가족이라는 이름의 구경꾼들-윤성희
들어가기 전에 : 이것은 소설의 아주 작은 부분입니다.
작은 삼촌이 외할머니의 오빠로 변하는 마술
의도는 곳곳에서 일어난다. 작가는 짧은 문장을 묵묵히, 속도감 있게 붙어서 (쉽게)쓰는 것 처럼 보인다. 독자는 짧은 문장을 읽기는 쉬우나 엮기는 어렵다. 여백이 없는 지면에서 쉴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한 단원이 마감되는 곳 뿐이다. 현재의 대화와 오래 전의 대화가 고작 마침표로 구분되고 좀처럼 줄도 바꿔주지 않는다. '기억 속의 대화'와 '기억 속의 외할머니의 대화'와 '현재 할머니의 대화'를 구분해야 한다. 이 빽빽함에 지쳐갈 때 쯤 오독의 신화가 일어나, 작은 삼촌이 외할머니의 오빠로 변하는 마술을 보았다.
새벽에 일어난 외할머니는 배를 내놓고 잠을 자는 작은 삼촌에게 이불을 덮어주었다. 작은삼촌은 양말을 한쪽만 신고 있었다. 양말 한쪽은 동그랗게 말려 소파 밑에 들어가 있었다. 외할머니는 소파 밑에서 양말을 꺼내 오른손을 넣어보았다.
["오빠". 외할머니는 중얼거렸다. 집을 나오기 전, 외할머니가 마지막으로 한 일은 식구들의 양말을 빤 거였다. 빨래를 하고 있는데 학교에 갔다 돌아온 외할머니의 오빠가 양말을 던지며 말했다. "이것도 빨아." 양말 한쪽은 대야 안으로, 다른 한쪽은 수챗구멍으로 떨어졌다. 외할머니는 수챗구멍으로 떨어진, 목이 늘어난, 양말을 보면서 눈물을 흘렸다. 외할머니는 빨던 양말을 전부 대야에 집어 넣고, 이불 빨래를 할 때처럼, 발로 밟았다. 비누거품이 사방으로 튀었다. 외할머니는 오빠에게 소리쳤다. "나도 손 두 개, 발 두 개야. 오빠도 마찬가지고"]
외할머니는 작은삼촌의 양말을 소파에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65p (밑줄, 띄어쓰기, 괄호 모두 봄밤)
외할머니는 작은삼촌에게 이불을 덮어주다가 한쪽만 신고 있는 양말을 본다. 그 양말 한쪽이 외할머니의 오래 전을 불러와 이야기 하는데, 이것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은 언제나 화자인 '나'여서 모든 것을 구경한다. '집을 나오기 전'이라는 설명이 있지만 외할머니가 부르는 '오빠'는 무척 시간을 거슬러 가 이질감까지 느낄 수 있게 된다. 빠르게 쫓다가는, 작은 삼촌이 외할머니의 오빠로 바뀌는 이상한 상황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소설이 정신 없어 보이는 것은 이렇게 작은 매개체-'양말'로도 시공을 엮고 경험이 엮여서 이야기를 짜기 때문이다. 생각을 그대로 써나간다.
구경꾼의 성질
이런 것이 구경꾼의 성질이라 할 수 있다. 구경꾼은 자신이 눈이 닿는 곳을 종횡 할 수 있다. 상황에 개입하지 않고 보는 사람이다. 이야기의 화자인 '나'는 가족 안에 있으면서 바깥에 있는 사람이다. 상황에 개입할 때도, 개입하지 않을 때도, 내가 있기 전의 일에도 와서 거의 모든 이야기를 전한다. 그런데 이런 구경꾼은 한 둘이 아니다. 화자는 '나'로 정해져 있지만, 위에서 보듯이 외할머니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는 외할머니 또한 '내'가 되어 자신의 오빠 이야기를 전한다.
구경꾼들의 이야기는 흘려 들어도 될 만한 이야기가 없다. 문장이 짧은 만큼, 이유도 없이 와서 던지는 이야기들은 나중에 모두 엮이는 소재로 잘 엮인다. 그러나 읽는 중 문장의 인과가 전혀 없는 어처구니 없는 서술을 종종 발견 할 수 있다. 멈칫 하지만 별다른 설명이 없어 다시 이야기가 끄는 곳으로 가기 쉽다. 이를 테면 '어머니는 왠지 그 괘종시계가 싫었다.' 라는 문장이 있다.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어' 노래를 불러 보자. 이것은 한 문장으로 꾸리는 한편의 서사다. 어머니가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던 이유에는 아이와 어머니가 살아왔던 생이 들어 있다.
미심쩍은 '왠지'를 들어내는 것
그러므로 미심쩍게 걸리는 '왠지'들을 찾아 길게 읽어 볼 것을 권한다. 작가는 무던 하게 다음으로 넘어 가는 것 같지만 아니다. 어머니는 스스로를 풀어 쓸 수 없다. 그것은 어머니가 주인공일 때 가능하다. 그렇다고 '내'가 읽어 줄 수도 없다. 나는 어머니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작가는 말을 하지 않음으로 지면을 채우기로 했다. 지면에는 티도 나지 않지만. 발견해 주기를, 걸려 넘어지기를, 독자가 그 빈 칸을 읽어 주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
어머니는 집에 돌아가면 가족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괘종시계를 없애고 거기에 가족사진을 걸어야겠어. 어머니는 왠지 그 괘종시계가 싫었다. 종이 울릴 때마다 어머니는 숨을 죽이고 종이 몇 번 울리는지 숫자를 세었다. 그러다 보면 하루가 아주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고등학교에 다닐 적에 어머니는 버스정류장 앞에 있던 사진관에서 사진을 훔친 적이 있었다. 74p (밑줄 봄밤)
사고 직후 입원 중에 어머니는 괘종시계를 없애고 가족사진을 걸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왜 괘종시계가 싫었을까에 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는다. 이어지는 문장은, 종이 울리는 것을 셀 때면 하루가 아주 빨리 지나가는 것처럼 느껴졌다는 내용이다. 여백이 없지만 얼마나 많은 여백을 독자에게 주고 있는 것인지.
간격을 넓혀서 읽으면,
결혼하고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이다. 집에는 큼직한 괘종시계가 있었다. 없는 살림에 어울리지 않게 커서 거실을 다 차지하는 것 같았다. 식구들을 챙겨 보내면, 북적거리는 아침을 지나 한적함이 찾아왔다. 그럴 때면 내 숨소리보다 크게 들렸던 괘종시계의 초침, 나보다 더 확실한 소리에 작아지며 구석에 앉아 창 너머를 바라보곤 했다. 시간은 빠르면서 더뎠다. 정각이 되면 괘종시계는 가슴을 놀래며 울렸다. 뎅, 뎅, 뎅, 뎅. 놀래는 소리가 싫어 어느 날은 숨을 막고 소리가 지나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금새 울린 만큼의 시간이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이후로 나는 정각이 되면 숨을 참기 시작했다. 속으로 속으로, 그러다 보면 하루가, 일 년이, 그렇게 수십 년도 금방 살아 낼 것 같았다.
라는 이야기를 읽는다면, 작가는 촘촘한 이야기의 여행을 살근히 설명하지 않는다. 왜 일까. 소설이나 삶이나 깊게 파고 들어가야 나오는 것은 손톱 만한 진실인데. 대체로 그 진실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늘어뜨려 장엄할 생각은 없다. 아름답지 않다고 진실을 영영 숨길 수도 없다. 그런 것을 '왠지' 같은 돌로 눌러 놓는다. 그리고 그 돌을 건드릴 수 없는 가족. 아무리 화자가 자기 아버지의 어린 시절과 내가 태어나기 전의 일을 본다고 해도 결국 '현상'에 지나지 않는 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글자놀이와 징검다리, 천천히 건너가야 하는 이야기
이 와글와글한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읽으면 분량이 세배 쯤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소설이지만 쓰기는 '시'와도 닮았다. 앞에서 말한 괘종시계 이야기에서 어머니에게 아버지가 없다는 사실을 적고 다음 문장에서는 화자의 아버지의 이야기로 넘어 온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아버지(외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 화자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아버지-아버지)로 이어지는 글자 놀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다음 문장은 아버지의 이야기는 어린시절로 '첫째야,' 하고 불렸던 이야기를 하고. 이어 큰삼촌으로 연결된다. '첫째'는 실은 아버지이나 첫째에서 연상 되는 '큰'삼촌의 생각으로 넘어간다. 경계도 없이 규칙도 없이 구경꾼은 자신의 눈을 돌리는 것 처럼 보이지만 실은 모두 그럴만한 징검다리를 건너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