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 땐 시리즈
다미앵 클레르제-귀르노 지음, 김정훈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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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씩, 즐겁다-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

 

 

딸기 좀 먹어봐너는 팥빙수에 반쪽으로 잘라진 깨끗한 딸기를 가리켰다딸기 씨가 그렇게 좋다더라그 옆의 바나나를 먹으며 말했다봄 맞아 처음 먹는 딸기는 의외로 흰색이다몰랐던 것처럼빨간 딸기의 속살은 희디 희다팥빙수의 딸기는 떡에 기대서 우유에 적셔져도 흰색을 잃지 않는다그러니까 우유도 하얗고 딸기도 하얀 것이지하지만 '진짜 딸기맛 우유'는 '분홍색'일까왜 그런지 모르겠으나딸기우유는 분홍색이 맞는 것 같다.

 



<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는 자꾸만 희석되는 욕망에 대해 묻는다겉과 속을 섞어 무엇인지 모르게 하고 싶은내가 외면해버리리는 내 진짜 욕망에 대해 말이다내 욕망의 색은 '진짜 딸기맛 우유'처럼 분홍색이 아니던가마치 '진짜딸기의 속이라고 착각하게 하는 것처럼그러나 단단하게 지니고 있어야 할 딸기의 속은 흰색일 것이다외부와 상관없이 지속해야 할 내 감정은 어디뇨이렇게 큰 글씨로..박 하게 물어온다. <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 유쾌한 조합이지만 어쩐지 약간 숨기고 싶은 제목이기도 하다그러나 나는 결코 무력해서 읽는 것은 아니라오.

 

목차는 진단하기-이해하기-적용하기로 나뉜다몇 십년 전에 풀었던 '스스로 하는 학습지'의 목차가 떠올랐다. '분수'에 약한 것을 진단하고, '분수'를 이해하고, '분수'를 적용했던 어느 초등학교 수업시간을 떠올리면 잘 따라갈 수 있다혹시 그것에 트라우마가 있다면 목차는 가볍게 무시하고 와도 좋다책은 읽는 사람 마음이니까.

 

'욕망' 이라고 하면 굉장히 무섭고, 피해야 할 말 같지만이야기 되는(공연음악 등등거의 모든 것의 주제다본디 삶의 주제로 자리 잡아야 했지만 '욕망'은 길을 잃어버리고 '거짓 욕망에 밀리느라 '이야기 되는 것'에서야 주연을 꾀찼다가까이에 있는 '욕망'과 ''의 일치는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귀하다불일치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네이버 웹툰에 <미쳐날뛰는 생활툰>이라는 작품이 있다. '자매'가 나오는데동생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만화를 그린다며 연습하고 ‥ 연습하는 것이 일과이고 언니는 회사에 다닌다회사인이라면 십에 팔구가 그렇듯 출근하기 싫다. 그녀는 어느 날 베개를 기타 삼아 노래를 뽑는다가사의 주된 내용은 '회사를 때려 치고 음악을 하고 싶다' 동생은 귀를 막으며 그럼 '때려치라!'고 한다하지만 이어지는 가사, '돈을 벌어야 하느니~/음악해서 돈벌면 되잖아/예술해서 돈 벌어먹긴 더럽게 힘드나니~/' (...)


생활이 곤궁하고, 앞날도 알 수 없는 동생보다 때로 언니가 더 안쓰러워 보이지는 않은지. '우리가 살아가는 일이 종종 왜 그토록 안쓰러워 보이는 것인지를 이해하고 싶다면 관심을 기울여야 할 곳은 오히려 우리 욕망이다.' 33 저자는 콕 짚는다. 언니의 노래가 베게가 아니라 진짜 기타만 되었더라도. 나는 언니의 노래를 그냥 지나갈 수 있었을 거다.

 

언니가 음악을 하지 않는 일은음악의 시작은 매우 험난하고그 빛을 보기는 무척 어렵다는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에 부담갖기 때문일까그러나 부담이라니? '기타 연주자는 기타를 치는 사람이 된다.'는 말을 기억하자. 베게만 친다면 어떤 재능이 있어도 기타를 칠 수 없다. 처음 손에 굳은살이 박히는 순서를 지나지 않으면 소리를 낼 수조차 없다가장 친근한 악기 중 하나지만 TV나 라디오에서 들리는 소리를 내가 내기까지는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어떨까. '혹시 더 대단한 것들을 좇으려는 갈망은 우리를 세상에 대한 혐오 속에 빠뜨리고그렇게 하여 좋은 것들 하나하나가 주변의 평범함과 시시함 속에 둘러싸인다.50' 이 대목에서, 멈췄던 것은 아닐까. 저자는 욕망을 포기하는 것도 모자라 포기를 주변의 이유로 돌리는 비겁함을 꼬집는다이게 꽤 아프다왜냐하면 회사를 다니는 언니가실은 나의 모습이 아니었냐는 물음을 피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너는 종종 기타를 친다기타의 목적은 앨범을 내거나 연주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네 노래에 맞는 반주를 언제나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근사한지. 직접 낼 수 있는 소리는 좋은 음악을 '듣는 것'과 비교할 수 없는 기쁨을 준다비록 서툴고연주 할 수 있는 음악이 한정되더라도 말이다기타를 사서 치는 둥 마는 둥 한지 벌써 오년이 되었다오년 동안 얼만큼 늘었냐고 물어본다면쑥쓰럽게 머리를 긁적이겠지만 그때그때 나오는 좋은 노래를 부르면서 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는 걸 안다누군가를 보여주기 위한 것 아니고, '앵콜요청금지' 나 'duet'을 노래하는 아주 행복한 삼분을 위해서 말이다누구나 예술에 대한 욕망이 있다그것은 예술자체를 업으로 지내자는 원대한 것이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충분히 이뤄갈 수 있다예술을 사치라고 거부하는 생각은, 예술 하고 싶은 욕망을 스스로 뜯어냈던 자신에 대한 미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닐까? 가위로 종이를 오리고, 노래를 흥얼거리는 아주 단순한 욕망. <무력할 땐 아리스토텔레스>에서 말하는 것처럼이렇게.


작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말의 균형을 더 잘 느끼기 위해 시도하는 글쓰기음악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소리의 조화로 귀를 교육하기 위해 해보는 악기 연주무용가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몸을 다르게 볼 수 있기 위해 추는 춤. 167

 

욕망의 왈츠에 맞게 춤을 추자. 자연스러운 스텝은 나에게 어울린다. 나의 발과, 나의 몸짓, 무엇보다 나의 기분과. 나의 삶을 가꿀 수 있는 가능성이 보인다. 그곳에는 나를 위한 물이있고, 물은 나를 이해하는 속도로 흐른다.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일단 그런 사람이 된 후에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없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에 귀기울이자. 


마치 돌을 버리고 난 후에는 다시 그것을 잡을 수 없듯이그럼에도 돌을 던지는 것은 그에게 달려 있는 일이었다그 원리가 자신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이렇듯 정의롭지 못한 사람과 무절제한 사람 양자에게 공히 처음부터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었으며 그런 까닭에 그들은 자발적으로 그런 사람이 된 것이다하지만 일단 그런 사람이 된 후에는 그런 사람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더 이상 없다윤리학 3. 1114a 14~22 / 147


그렇다면 당신이 무력한 이유, 조금은 알 수 있을지 않을까. 좋아하는 것을 조금씩 매일매일 '하'자. 욕망을 멀찍이서 보거나 다른이에게 '좋다더라'권해주지 말고. 나는 한쪽으로 몰아 준 딸기를 너에게 준다바나나를 먹으며 딸기를 주었던 너에게가장 주고 싶은 것은 가장 받고 싶은 것이기도 한다는 것을 오후 늦게 알아버린 나는우유가 마른 동그란 숟가락 위에 제일 큼직한 걸로 얹혀 준다기타를 치고, 책을 읽고, 내일을 생각한다. 조금씩,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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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26 2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후, 이게 땐 시리즈군요. 책 디자인이 하도 후져서 욕했었는데...ㅎㅎㅎㅎㅎㅎ.
전 비참할 땐 스피노자 읽었습니다. 책이 의외로 좋더라고요.
재미있길래 덥석 에티카 읽는데 이야, 스피노자 쉬운 사람이 아니더라고요... ㅎㅎㅎㅎ

봄밤 2014-03-27 16: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피노자를 읽으려고 했는데 이 책이 먼저 보여서 읽었습니다ㅎㅁㅎ 맞아요 그런저런 내용이 아닐까 했는데 좋은 안내서 같아요. 디자인ㅋㅋ 책에 기분이 있다면 뭔가 초연한것 같은 표정을 그린듯 해요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
배수아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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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미나는 잠에 몰려 하루를 적어별것도 아닌 일 몇 개와 도저히 적지 않을 수 없는 일 몇 개를 불성실하게 써통째로 옮겨 놓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바닥에 배를 깔고 턱을 괴는 것은 필수야일기를 적는 몇 가지 원칙. 1. 간신히 기억할 수 있을 정도로만2. 가장 중요한 내용은 덜어내고진심이 촌스럽게 잘려. 사방에 흩어져몇 개는 그 날의 꿈 속으로 기어들어가는 것 같아. 버린 마음들은, 현실에서 질식하는 진심은 살아남으려고 몸을 틀.


아야미나는 잠에서 일어나면 꿈을 적어꿈이 오래지 않아, 없었던 일처럼 완전히 사라지는 것 같다는 허무.를 허무려고잠이 덜 깬 상태에서 띄엄띄엄 적어가정성스럽게 한 페이지를 다 채우는 날도 있는데정신이 들어서 읽으면 해독할 수 없는 오타로 가득해어떤 날은 "엄청난 꿈이었어"라는 말만 적혀 있어서, 그날은 일어나서 '엄청난 꿈'이 무엇일까 궁금해 하는 것이 나의 일이야. 


아야미,

종이학을 접을 때정사각형의 종이를 반으로 접는 '순서'를 건너지 않고 날개를 펼 수 없듯이당신은 원하지 않아도 두 개로 나눠진 세계에 '차례'로 도착하는 왕복을 반복해야 해꿈에서 깬 당신은 꿈을 받아 적고오늘의 끝에선 당신은 오늘을 받아 적는-각각 한 차원에서 가능한 한 가지 일들을 맞아그러나 


'꿈에서 막 깬 당신이 아직 시작되지 않은 오늘을 받아 적었다.' 어떨까. 뫼비우스의 띠처럼 시작 없는 순환이 시작되겠지더 이상 두 세계를 왕복하지 않는다면 꿈과 오늘을 나눌 수도나누려는 이유도 존재하지 않겠지종이접기를 시작한 적이 없는데, 손끝은 날개를 펼치려는 장면에 닿아 있어.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에는 만들지 않은 종이학이 부유해그곳에는 꿈도 오늘도 모두 '행방불명'해서 '무엇을잃어버렸다는 느낌도 없고, 그래서 그것을 '찾으려는'것도  무의미해띠를 잘라내 하나의 완전한 고리를 다시 만들기 전까지그러나 그 띠의 둘레를 걸으며잘못된 곳을 찾는 것은 어떤 시간 속에도 불가능하지아야미, 당신이 무심코 서 있는 바로 '그 자리'를 잘라내기 전까지 말이야당신이 머무는 모든 곳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당신은 받아들일 수 있을까아야미.


그러나 당신이 아니더라도, 두 개의 세계를 오가지 않고 오로지 한 곳에서만 살기로 하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아는 당신은. 그들과 이야기 할 때는 주의해야 할 점이 무엇인지 미리 말해주는 사람처럼 아야미. 친절하게 당신의 꿈 속에서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구나. 몇 개의 직업과 몇 개의 얼굴 속에서 나는 어떤 모습이 당신의 진짜일지 궁금하지 않아. 중요한게 아닐테니까. 그러나 나는 충실하고 성실하게 오늘과 오늘을 매일 건너서 <알려지지 않은 밤과 하루>를 엿보고도, 진심을 온전하게 한 곳에 적을 수가 없구나. 다만 당신의 세계를 나에게 빗대 그곳은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지. 그렇다면 아야미. 당신은 나의 세계, 모든 곳이 잘못되었다면, 네가 건너고 있는 두 세계는 온전한가. 묻겠지. 대답은 매일 '촌스럽게' 뜯긴 자국들이 붙잡아 놓았던 책의 구절로 대신할게. 한밤의 일기보도, 뱃사람들을 위한 바다의 일기예보. 내가 결코 들을 적 없던, 시작되는 말 사이의 무수하게 찍힌 온점들로.


한낮의. 기온. 섭씨. 삼십. 구도. 바람. 없음. 그늘. 없음. 여니에게. 전화해. 주세요. 삼십. 구도. 바람. 없음. 그늘. 없음. 한낮의. 도시. 신기루. 현상이. 나타날. 예정. 바람. 없음. 구름. 없음. 하늘. 의. 색깔. 없음. 여니에게‥여니에게

/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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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세계문학의 천재들 1권'이다. 이 자신만만한 시리즈가 궁금하다. 제목도 <리스본행 야간열차>. 훌쩍 싣고 싶다.

모르는 사람의 추천사가 눈에 띈다. '시와 철학이 섬세하게 교직되어 있는 책.' 현대고전이 되어버린 소설을 한국의 독자들도 확인할 때가 되었다. '문학의 천재들'이라니, 매혹적인 이름에 추천.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할까. <오리지널 오브 로라> 블라디미르 나보코프가 남긴 미완성 유작. 불태워 버리라고 했던 원고를 읽는 '어떤 느낌' 죄의식, 무엇을 '엿보고' 싶은 마음. 마침내 출간된 '결정'에 무엇이 있었을까. 단어장으로 겨우 쓰던 인덱스카드에 배합이 소설을 이뤘다니. 무엇을 적어보고 싶다는 마음과 함께, <오리지널 오브 로라>를 맞춰가고 싶다. 


(??이것만 이미지가 왜 이렇게 크지?)


저는 줌파 라이히에 대해 잘 모릅니다. 

길고 긴 출판사 제공 책소개를 보니 그녀의 문장 몇개가 있습니다.


어떤 생물은 건기를 견뎌낼 수 있는 알을 낳았다. 또 어떤 생물은 진흙땅에 몸을 묻고 죽은 체 지내면서 우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14쪽 /

우리는 어떤 생물과 어떤 생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저지대. 

그 다음 이을 말을 찾지 못했습니다만....이 책을 보고 나면 침묵과는 다른 말이 나오겠지요


이것은 소설이 아닙니다.



그러믄요, 선생님? 

묻고 싶어진다. 그렇다면 선생님, 저는 지금까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읽었어요. 모든 주사위를 다 부수고 싶습니다. 시는, 그러니까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지만, 세상에 주사위는 왜 이렇게 많은 것인지가요? 하나 읽으며 주사위의 숫자 하나를 지워갑니다. 마침내 모든 숫자가 무의미해질 때까지.




'김중혁'을 지나칠 순 없겠지요. 저 열쇠구멍에 맞는 열쇠가 없다면, 내가 열쇠 되어 들어갈 수밖에요. 

기억을 지우는 것은 한 없이 아름답게-이터널 션샤인, 그러나 김중혁식 딜리터는 무엇일지. 어감마저 좋지 않은데...(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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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3-27 01: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3-27 1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예 12년
솔로몬 노섭 지음, 오숙은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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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감지 할 수 없는 것에 무감각해진다. 비근하게 숨을 쉬는 일에 온 힘 들이지 않는 것이 그렇고, 신용카드 정보 누출 같은 일에 화를 오래 내지 않은 것이 그렇다.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대상에게 감정을 오래 투사 하는 일은 쉽지 않다. 무감각해지는 것은 벌어진 상황을 이해한다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상관 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이기 쉽다는 것 같다. 그래서 자연에게 엄청난 은혜를 받고 있어도 별로 고마운 줄 모르고, 신용카드 3사로부터 -모든 개인정보가 털린- '막대한 침해'를 겪었음에도 그다지 분노하지 않는다.   

노예 플랫은 12년 동안 맞았던 채찍의 횟수를 다 기억할 수 없다. 12년 동안 맞았던 채찍으로 '주인'의 본성을 표현할 수도 없다. 자유인으로 인정 받은 후, 더 지독해졌을 엡스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랫은 노예로 지내는 12년 동안 놀라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같은 인간'이 벌이는 잔인함에 무감각해지지 않은 것이다. 플랫은 시시로 놀란다. 채찍질이 벌어지는 광경과 매질의 깊이가 이제 익숙해질만도 한데. 어제 보았던 일이 오늘 벌어지는 것에 '또' 놀란다. 잔인함의 감지할 수 없는 크기, 그 겁없음에 말이다. 그래서 <노예 12년>은, 노예로 지냈던 날들의 참상을 고발이 아니라, '주인'의 잔인함에 익숙해지지 않으려고 자신과 싸웠던 날들의 기록이다. 플랫이 육신의 비참함에 가려 놀라기를 그만 둬 버렸다면, 플랫은 '솔로몬 노섭'이라는 자신의 이름을 다시 찾을 수 있었을까. 이 책 역시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노예 '12년'은 한 권의 책이고, 그것은 한 두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12년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이 정도'의 시간이지만, 플랫이 겪었던 12년을 보편적인 시간으로 환산할 수 없다. 어떤 숫자를 이어 붙여도 그가 겪은 낮밤을 합당하게 표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침내 플랫이 이름을 찾던 날,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 기쁨은 어디에 자리 잡아야 좋을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패치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울부 짖는 소리가 들린다

플랫 덕에 수많은 채찍질을 피할 수 있었는데. 그래도 자유인이 된다니 기뻐요 - 하지만 , 오! 주여, 주여! 전 어떻게 될까요? 295

패치에게 위로를, 플랫이 자유인이 되고나서도 매질을 견디고 마침내 죽었을 무수한 패치들에게 배스의 말을 전한다. 이 한권에 패치와 배스의 말이 모두 들어 있으나 끝내 서로 만날 수 없던 목소리다. 이렇게라도 잇는다면 들릴까.

무시무시한 죄악이 이 나라를 짓누르고 있어요. 언젠가는 그에 대한 처벌을 받을 겁니다. 그걸 심판할 날이 올겁니다.-그래요, 엡스. 화덕에서처럼 활활 타오르는 날이 올 거예요. 어쩌면 조만간, 아니면 나중에라도 말입니다. 그러나 신은 공정하시니 틀림없이 그날이 옵니다. 256

그러나 그날은 언제 도착하는 것이며, 노예는 과연 '노예제 폐지'와 함께 사라진 것일까. '그렇다'는 대답은 언제 누가 할 수 있을까. 이름 모르는 섬에서 '노예'로 감금되었다가 탈출했다는 뉴스가 바로 귓전에 있고, 형제복지원이 간판만 바뀌고 그 고통은 지속되고 있다는 뉴스가 바로 어제에 있었는데. 인간은 마침내 자신의 자유를 다 확인하고 나서야 다른이의 자유를 둘러볼 수 있고, 인간이 누리는 자유는 늘 다른 이를 침해해야 만족하는 자유 같아서 나는 책을 읽는 오늘의 자유를 '불편'하다고 느낀다. 혹시 자유는, 자유를 '문득' 불편하다고 느끼는 것으로부터 진정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닐지

'자유'라는 이름에 무감각해지고 있는 나는 그것이 과연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아주 공평히 말해서, 내 자유에 대한 권리는 도로 정비라는 이름으로 뿌리째 뽑히는 플라너스의 권리보다 조금도 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무리 많이 가져가도 말 한마디 한 적 없는 자연에게 고맙다고 전하고 싶고, '고맙다'는 것을 어떻게 말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또한 나에게 '막대한 피해'를 끼친 기업에게 분노를 어떻게 전할 수 있을지 생각한다. 어떤이에게는 내 자유가 나 이상으로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컸고, 어떤 이에게서 내 자유는 한없이 쪼그라 들었다. 당신이 갖고 있는 자유, 역시 그렇지 않나. <노예 12년>은 내가 가진 자유 이상의 가치, 모두의 자유를 생각하게 한다.



*
물론 자기 재산을 잃는 건 힘든 일이겠지요. 하지만 그건 댁의 자유를 잃는 것과 비교하면 별로 힘드지 않을 겁니다. 
아주 공평히 말해서, 댁의 자유에 대한 권리는 저기 엉클 에이브럼의 권리보다 조금도 크지 않아요. 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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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3-26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봄밤 님 글은 항상 집밥 같은 맛이 있습니다.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선에서의 절충 같은.....

봄밤 2014-03-26 21:24   좋아요 0 | URL
그래서 제가 깡마르는군여!! 그럼 저는 외식을 하러가야겠습니다.

찬이 별로 없어서...곰발 님 맛난 것 싸와서 같이 들어요.... : ) 헤헷

곰곰생각하는발 2014-03-26 23:38   좋아요 0 | URL
날씬하다고 자랑하시는 겁니깡 ~~ 수많은 여성 알라디너들에게 돌맹이 맞을거임 ~

봄밤 2014-03-27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큰일입니다 ㅠㅡ즈이집 집밥이 며칠 내 오뚜기밥이었던걸 떠올리다보니 그만..!!
 
 전출처 : minumsa님의 "[판미동]「숨만 쉬어도 셀프힐링」서평단 모집"

잠이 안오는 밤을 걱정하다가 우연히 판미동에 들렸습니다. 불면증에 대한 꼭지를 읽었어요. 잠이 안오는 이에게 그럴 땐 이렇게 해봐, 알려주곤 했지요. 이 꼭지들이 모여 책으로 나왔군요! ^^!
또 한 번 기쁘게 신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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