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대를 스물 두어살쯤에 썼어요. 이십대 때, 인간은 허무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지요. 쓰게된 특별한 배경은 없어요. 그러나 그때 그런 생각을 써서 그런지 지금까지도 인간은 허무하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네요.




갈대


신경림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시는 예전에도 잘 안읽었어요. 대학 동기 서른 여섯중에 나 하나만 읽었습니다. 시는 극히 제한된 사람만 읽습니다. 다 시를 좋아할 필요는 없어요. 시는 소수가 읽으면 되는거지요. 그 소수가 제대로 읽어서 다른이들에게 전파하면 되는 거지요. 시를 안 읽어서 문제다, 우는 소리 하는 건 좋지 않다고 봐요.


시는 그 사람의 몸이 다 실려야 시지요. 시는 삶 전부가 실려 있을 때 감동을 주고 오래 살아남습니다.


저는 예전엔 계획을 잘 세웠었는데 이제는 닥치는대로 그날그날 살고 있습니다. 뭐 금년에 계획은 시를 한 이십편 쓰고 아일랜드를 꼭 가보고 싶은게 있어요. 걸리버 여행기를 쓴 조나단 스위프트와 율리시스를 쓴 제임스 조이스의 나라이지요. 우리 나라와 풍경이 비슷하대요. 






정정하셔라, 목소리를 처음 뵈었네. 

스피커가 등뒤에 있어 말씀이 잘 들어왔네. 내 뒤에서 가만가만 말씀해 주시는 것 같았네 우리는 얼굴도 보지않고...정다운 거리를 가질 수 있었네 우리는 눈도 마주치지 못했지만...함께 있었네 선생님 계신 무대 가장 뒤편에서, 나는 등으로 좋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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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inumsa님의 "[판미동] 판미동 신간 <한글 논어> 서평단을 모집합니다.(~6/23)"

가까운 듯 먼 지혜를 다시 읽고 싶습니다. 언제나 논어는 한글로 읽었지만 우리다운 우리말로 풀이한 것이겠지요. 잘 읽어내고 싶습니다. 저 격자처럼 반듯하게 떨어지는 마음을 갖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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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로운 삶 1
하 진 지음, 왕은철 옮김 / 시공사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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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각의 하드케이스 여행가방, 그 옆에 고급스러운 브라운 색 가죽가방. 그 위에 자연스럽게 말아올라간 여행모자. 반쯤 열린 현관에 짐을 기대 놓았다. 가뿐하게 채비를 마친 가방들은 주인을 기다린다. 여행의 기대 때문일까, 바깥은 '바닥'마저 눈부시다. 그러나 생활로 머무는 안쪽은 벽돌의 그림자며 색이며 하나같이 명확하다. 더이상 알고 싶지 않을 정도로 또렷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책을 덮어도 표지는 그대로다. 사진은 움직이지 않으므로, 현관을 나서지 않을 가방들은 여행을 떠나기 전 설렘만을 보여준다. 사진은 시간을 멈추므로, 이 평화로운 표지로는 난과 핑핑의 삶을 상상할 수 없다. 어제라는 24시간짜리 예고편도 내일을 확실히 감지 해 본 적 없듯이. 중국 아니라 미국에서의 삶, 두 개의 언어와 두 개의 생활에서 난은 두 번의 고비를 찾아간다. 새로운 나라에서 정착이 한 고비였다면, 다시 휘청이는 고비는 ''.

 

'자유로운 삶'은 무엇일까. 이 물음은 하나다. 그러나 그 대답은 여러개를 낳고, 정답은 아무도 알 수 없다. 핑핑이 대답하는 자유로운 삶과 타오타오가 대답하는 자유로운 삶, 그리고 난이 대답하는 삶은 모두 다르다. 모두 다른 방향을 가르키는 삼각형의 모서리처럼,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각자의 욕망은 멀어질 뿐 하나로 합쳐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 모두 '자유'를 이야기 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난의 삶은 그의 가족으로 지탱되지만 동시에 그의 자유가 사랑하는 가족에 의해 제한되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 "나는 그런 헛소리 못 받아들여요. 내가 왜 희생을 해야 하죠? 나는 이미 충분히 희생했어요. 게다가 '희생'이란 우리의 비겁함과 게으름에 대한 변명일 뿐이에요. 내 아들한테는 자기 인생이 있고 나한테는 내 인생이 있어요." 139

 

소설은 정직하다. 미국에서 사는 이야기, 자전적인 자신의 삶을 어떤 수사나 특별한 장치 없이 3인칭 시점으로 담담하게 말한다. 팍팍한 빵을 씹는 식감인데, 이 무딤에서 맛이 찾아온다. 작가가 알고, 내가 아는 공통의 맛을 느끼는 순간이 있다. 이야기가 솔직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나 또한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날들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화가 난 타오타오는 그에게 '두시백'*이라고 했다. 난은 그 말을 알지 못했다. 사전을 찾아봐도 나오지 않았다. 한번은 아들에게 철자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지만, 아이는 알려주지 않으려 했다.' 157 난은 그러면서 딸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장을 맺는다. 무슨 의미냐고 묻는다면 별 의미 없다고 답할 수밖에. 그저 이 쓸쓸함을 알아주길 바랄뿐이다. 가족은 노력과 관계 없이 자꾸만 부딪히며 상처를 준다. 이런 장면이 감정을 배제한 채 자주 나온다. 마음 없어서 더 남는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줄기 중에 난의 막내 동생 닝이 이민을 고민하며 난에게 묻는 대목을 기억해야 한다. 난은 막내 동생이 늘 어린애였고, 그에게는 외국에서 몸부림을 치며 살아갈 힘이 없었다 335고 기억한다. 그러나 난 역시 미국에 올 때, 그 같은 걱정을 말 없이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낯선곳을 개척하고 말고의 문제는 오로지 자신에게만 달려있는 일이라는 것을 난은 알지 못한다. 닝은 말한다. "외로움은 두렵지 않아. 희망이 없는 것보다 낫잖아. 여기는 완전히 망가졌어."336 마음을 크게 움직였을 말에도 불구하고 난은 닝의 나이와 닝의 어학능력, 그밖에 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갈 수 없는 이유를 댈 뿐이다. 너무나도 현실적인 인간의 모습. 난이 바랬던 모습일까? 난은 자신이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못견뎌 하면서도, 다른이에게는 '현실'의 중요성을 힘주어 말한다. 다시 '자유로운 삶'이라는 질문으로 돌아오자. 자신에게 올 때와 다른이에게 갈 때 다른 기준을 부여하는 것. 삶의 어깨가 어긋나는 장면같다.

 

다시 돌아와. 난은 미국에서의 생활이 안정될수록 그 상태를 경계한다. 그에게 쓰는 문제는 다른 삶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자유가 '자유'로 있을 수 있는 삶. 보통의 삶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는 것. 그는 재능과 주어진 여건과 관계없이 '쓰기'를 지속하지 못하는 것을 죄스러워한다. 쓰는 것의 결과가 무엇이던가에 써야한다. 그러나 난이 시에 집중하면 할수록 자연스럽게 생활과 멀어지는데, 여기서 핑핑과의 불화를 막을 수없다. 그러나 난에게 '인간은 삶을 완성할지아니면 작품을 완성할지 선택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이후로 문제는 지금의 삶이 아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결국 시를 쓰고, 발표한다. 더 이상 가게를 유지 할 수 없어 정리하지만 모텔 카운터를 맡아 생활은 유지할 수 있다. 난은 이 일이 아주 마음에 든다. 하루 종일 몸을 움직이지 않고 생각하며 쓸 수 있는 시간이 있다. 이 안온을 오래 오래 유지하기를 바라며 소설은 끝난다해피엔딩인가?  고뇌 끝에 결국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는 이야기일까. 이런 결말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이 소설의 끝은 이보다 앞에 있었기 때문이다.


 식당을 정리하기 전, 돈에 대한 혐오를 견디지 못하고 난은 가게 카운터의 현금을 꺼내 돈을 불태우기는 장면이 나온다. 그야말로 미친것이다! 그러나 이십분 후 난은 제정신으로 돌아와 가지를 썬다. '핑핑이 체로키 농부 시장에서 골라서 산, 부드럽고 씨가 없는 가지였다. 그는 할 일을 하면서 아주 조용히 나머지 하루를 보냈다.' 418 방금 전까지 돈을 꺼내 태우다가 멀쩡한 모습으로 가지를 하루종일 잘랐을 난의 모습이 잊혀지지 않는다나는 이 이십분이 '자유로운 삶'이라고 생각한다. 미칠 수밖에 없었던 이십분. 조용히 소리가 남는 도마 위. 또 무엇이 빛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우리가 다른 곳으로 떠나기 위해 통과해야만 하는, 은밀한 미침의 순간을 제외하고 나면 말이다.

 



 

*douch bag 얼간이라는 의미의 속어

**윌리엄 예이츠의 <선택>의 일부 379p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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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게 배우는 사람]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느리게 배우는 사람 창비세계문학 30
토머스 핀천 지음, 박인찬 옮김 / 창비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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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단편들을 다시 읽었을 때 나의 첫 반응은 한마디로 '오 맙소사'였다. 돌이키고 싶지 않은 신체증상이 동반되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고 나서 들었던 두번째 생각은 완전히 다시 쓰자는 것이었다. 이 두가지 충동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나는 중년 다운 평정심을 내세워, 그 당시 어린 작가였던 나를 이제 있는 그대로 봐줄 나이가 된 것처럼 행세하기로 했다. 이 어린 친구를 내 인생에서 내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10


고작 한 페이지 넘기고 확신했다. 핀천, 완전히 반했어! 이런 쑥쓰러움과 유머, 유쾌함과 연민이라면 그의 작품이 어떻다 하더라도 이해를 기울일 '의지'가 있다고. '의향'이 아니다. 노력을 하겠다는 약속이었고, 새끼를 걸고 흔드는 폼에 믿음이 있었다. 그러는 사이 '작가 서문''어린 친구'의 작품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조급해졌다. 아직 어린 친구를 만나기도 전에 그를 이해해 버릴까봐. 서문을 듬성듬성 넘기고 바로 작품을 읽었다.

 

로치 요새, 이곳의 일기는 좋다. '햇살은 또 얼마나 뜨거운데' 58 맑은 날도 많으면 괴롭다. 권태로운 빛이 넘쳐 땅 위에 아무렇게나 흐르고 그 위에 하염없는 시간이 별로 다를 것도 없는 색으로 끊임없이 덧칠한다. 이곳에서는 오히려 무의미한 일이 의미있어 보일 지경이다. 주인공 러바인은 여기 로치 요새, 그러니까 군대에 있고, 대학졸업장을 가지고 있지만 고등학교도 못나온 이보다 나을 것이 없고, 돌밭에 뿌려진 씨 같고, 부대 안에서 가장 게으른 녀석이다. 58 자신에 대한 동료들의 설명 끝에 러바인은 묻는다. "도대체 왜 나는 이렇게 군대에 처박혀 있을까?" 이어진 대답은 '로치 요새만큼 돌 많은 데도 없어.'. 실소다. 마음의 행방을 잡을 듯하면서 뻔하게 놓쳐버리는 서술은 여러 곳에서 반복된다. 앞은 보여줄 생각도 없고 지나가서 잡을 수 없는 뒷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소설의 일이라는 듯 러바인이 대수롭지 않게 지나는 가장자리를 오래 보여준다. 그래서 '습작에 가까운 소설'이라는 작가의 서문은 맞다고도 할 수 있고, 지나친 우려라고도 할 수 있을 것같다


비라고는 없을 것 같은 일기에 불구하고 소설 말미에 가면 비가 온다. 그 비는 예상 가능한 로치의 매일 같은 날을 흔든다. 하루쯤 땅도 식고, 러바인의 머리, 혹은 몸도 식을 것이다. 그래서라고 잇지는 않겠지만, 러바인은 ''가 싫다. 머리가 맑게 개이는 일기는 원치 않는다. 이 푹찌는 날씨와 함께 인생도 그러하고자 한다. 서른살, 혈기왕성한 나이이지만 그는 움직임을 원하지 않는다. 이 조용하고 변함없는 햇살 속에서 배를 찌우고, 야한 소설을 읽고, 여자와 한번 자보는 '하루'를 떠올릴 뿐이다.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나? 로치의 기후 때문인가, 50년대, 미국을 감싼 기후 때문인가? 순응과 획일이라는 집단에 안정하고자 하는 조용한 세대의 출현을 러바인에게 투영한 결과라면 어떨까. 소설집 가장 첫번째 자리를 꽤찬 미숙한 작품은 당시 미국에서도 외떨어진 사회, 게다가 군대, 어떤 청년으로 하여금 사회 전반에 흘렀을 풍경을 정확히 겨눈다.


'The Small Rain' 이슬비라는 제목이다. 이슬비는 비를 맞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옷은 젖는 희한한 이름이다. 안정된 직업, 전원 주택, 은퇴 이후 따위에 눈길조차 주지않는 러바인은 그 세대의 밖에 있고자 한 이는 아니었을까. 그러니까 차마 지켜볼 수 없던 그의 무력함은 사회가 말하는 성공을 거부하려던 불온함이 아니었냐는 의혹이 충분하다. 다음 같은 문장을 특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마침내 마음이 진정된 두사람은 바보 같은 개구리 울음소리에 계속 시달린 끝에 서로 떨어져 누웠다. "커다란 죽음의 한가운데에." 러바인이 말했다. "작은 죽음이 있다." 그러고는 조금 있다가 말했다. ", 라이프지의 사진 설명 같네. ''의 한가운데.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 , 맙소사." 73 그러니까 '삶의 한 가운데, 우리는 죽음 속에 있다'는 대목이 정녕 청년에게서 나오는 소리인가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그의 청춘은 조로가 아니냔 말이다. 

 

오, 맙소사. 어쨌거나 비는 내렸다. 소설은 끝났지만 그 후로도 왔을 비다. 미국의 그 날들도 지나갔다. <이슬비>에서 <로우랜드>로, 또 다음 작품으로 시선을 옮기면서 내 마음을 끄는 것은 아직 맨 앞에 있었다. 일부러 다 읽지 않고 지나왔기 때문이다. 어린 친구의 소개는 이렇게 이어진다. '다른 한편으로는, 아직 개발되지 않은 어떤 테크놀로지의 도움으로 오늘 우연히 그를 만나게 된다면, 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혹은 그것을 핑계 삼아 길을 걷다가 맥주를 한잔하며 옛 시절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얼마나 기분 좋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10 '그에게 돈을 빌려주거나' 자신의 어린 시절을 만나서 제일 처음 생각하는 것이 다짜고짜 돈을 빌려주는 거라니! 자신의 지난날에 대한 솔직한 걱정과, 유머러스하게 넘기는 중년의 그가 묘한 표정을 만든다다. 그들이 공유했던 미국의 날들은 통과하는 중이거나 통과한 후다. 시차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들이 만날 거리를 떠올리는데, 그날의 조명이며, 습기며, 길 양쪽의 풀냄새까지 끼쳐오는게 아닌가. 그때 주고 받을 이야기만 공백이다! 이제 어린 친구를 만나보았으니 어서 작가 선생도 만나야지 다짐한다. 그들은 훗날 내 기억 어디에서 만나게 될 것인데, 아마 내가 생각해둔 그 길이 맞을 것이고 차갑게 얼린 맥주를 두사람에게 들려줄 것이다. 오늘, 한차례 소나기가 다녀갔고 멀리서 장마가 올라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맞았다'는 생각 할 틈 없이 모두 젖고 마는. 그런 비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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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용산 - 딸에게 보낸 편지
김재호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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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 꽃-꽃피는 용산

 

 

만화의 칸 모두를 자를 대고 그렸다. 그래서 읽는 이는 어디서부터 그리기 시작했는지 쉽게 알아 챌 수 있다. 한 칸 한 칸 공간의 시작과 끝이 분명하다. 교도소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락된 자유의 칸일 터였다. 자를 밀고 올라오는 잉크는 자주 뭉쳤다. 잠깐 숨을 돌리거나 마음이 저 모르게 벌어졌을 틈일 것이다. 이 떨림을 고스란히 담아낸 손이 고마웠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이 칸들이 모두 같은 크기를 갖고 있었던 것. 그리기 전에 생각해 두었을 분할이다. 모두 같은 크기로 담자. '어떤 이야기라도'. 나는 이 뜻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그날 용산의 망루에서 불타고 있는 컨테이너도, 교도소 운동장에서 본 꽃들도, 들리지 않는 딸의 울음도 모두 같은 크기의 칸에 그려져 있다. 만화에서 모든 칸이 동일한 크기를 갖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묻는다. 슬픔이라는 말로 담는 것이 폭력으로 느껴지는 -마음의 진동과- 삶의 궤적을 지나온 기억이 고르게, 과장 없이 그려져 있다. 어느 한 칸은 크게 그리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하니까, 내 마음에 가장 크게 들어왔으니까, 조금 더 크게 말하고 싶으니까. 그러나 책을 두 번째 읽을 때, 이 마음은 저자에게 '할 수 없는 일'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큰 칸을 그리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작은 칸을 그릴 수 없었던 것이다. 어느 것 하나 작게 그릴 수 없다. '모두' 소중하므로.

 

지금도 밀양, 진도, 그 밖에 도처에서 일어나는 저울질은 가치 있다는 것을 안전한 쪽으로 옮긴다. 그렇다면 그 반대편은 어디로 내몰리는가. 자본과 권력의 준엄한 등식으로 용산과 삶에서 유배된 내가 있다. 내가 그리는 만화는 한 장의 종이에 그리움을 전할 뿐이지만 이곳의 크기마져 동일하지 않다면. 세상에 소중한 것들은 어디에 있을 수 있을까. 자리가 없다, 자리가. 살아있을 자리가 말이다. 그래선 안된다. 어떤 칸도 그 옆의 칸보다 크지 않고, 어떤 칸도 어떤 칸보다 작지 않다. 만화는 마음의 확장과 소멸을 어떤 장르보다 섬세하게 폭주할 수 있는 방식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동일한 칸에 성실하게 그려간 것은 그날의 일과, 헤어진 가족과의 살가운 추억이다. 보고 싶은 이들의 얼굴이, 눈동자가, 눈물이 모두 한 손에서 비롯된다.

 

세 가지, 많아야 네 가지 색으로 그려진 만화의 기록을 시간으로 환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저자가 감옥에 있는 오 년은 초등학생이던 아이가 무려 중학생으로 '변하는' 마법같은 시간이기 때문이다. 그런 동안 국가가 몰아간 용산의 죽음은 바래고 잊혀지는 것 같다. 그러나 <꽃 피는 용산>은 산 이는 그날을 떠안으면서도 여전히 살아간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움이라는 폭력으로 생생히 아프다. 세상에 무엇으로도 다시 채울 수 없는 아빠와 딸 사이 공백이, 아내와 떨어져 서로를 만질 수 없는 안타까움의 날들이, 아빠 없는 아이의 하루와 남편 없이 혼자서 생활과 아이를 키워야 하는 엄마의 날들이. 그리고 아들을 감옥에 간 이후로 돌아오는 당신의 생일상을 받지 않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 네가 나오는 날이 내 생일'이라는 이 고전 같은 대화가 아직도 이 땅에 울린다.

 

나는 그런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세련되어 나와 거리가 먼 것, 그래서 이야기와 나의 닿을 수 없는 거리에 안심하고 무뎌지고 싶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 그렸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매끈한 선들에 편했던 것은 눈이 아니라 마음이었구나. 손결 알고 싶지 않아도 느낄 수 밖에 없는 칸마다 울컥한다. 이 두께를 이루다니, 그러나 만질 수 없는 시간이라니, 이것의 배로 많을 거라니, 이 책이 나오고도 진행되는 내일이, 지하철을 타고 스쳐지나는 서울의 풍경이 이렇게 평온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많은 시간이 지나 ', 필 것인가 용산' 물으면 '그렇다', 혹은 '아니다' 여기저기서 들릴것이다. 그리고 이 말들이 어떤 소용도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우리는 다만 이 작은 기록으로 '용산을 기억하라' 기대 할 수 있을 뿐이다. <꽃 피는 용산>이 선명한 꽃이 될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마음에 핀 꽃은 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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