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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토마스 베른하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 필로소픽 / 201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움직임, 어떤 움직임-비트겐슈타인의 조카
이곳의 불은 어둡다. 천장 중심에 있는 등 아래서 나는 내가 필요로 하는 빛을 다 가려버린다. 나만한 그림자가 타자를 가리고 모니터에 올라와 눈에 닿는 빛이 부족하다. 나를 치우지 않으면 여기는 계속 어두울 것이다. 빛이 들어오는 방향을 바꿀 수 없다면 내가 있는 곳을 바꿔야 하겠지. 천장을 바라보며 책상에 앉아야 앉아야 할 것 같다. 위치를 바꾸는 것이 어려운 이유 하나. 중력을 거스르는 일은 떠올리기도 전에 거부된다는 점. 움직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책 하나를 들어 조금도 움직이지 않다가, 이제서야 조금씩 움직여본다.
<비트겐슈타인의 조카>는 베른하르트가 병실에서 만난 비트겐슈타인의 조카, 파울과의 이야기를 독백으로 거칠게 그린 책이다. 장이라고 나눌 것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질게 이어진다. 내용이 크게 바뀌지 않으면서, 그러나 꽤 다양한 곳을 도달하면서. 이들의 관계는 우정이라는 말이 어렵다. 증오, 혹은 증오 같은 감정이 담겨 있는 말이어야 한다. 물론 상대방에 대한 증오를 잘 살피면 나에게서 기인하는 경우가 왕왕하다는 점을 알아두자.
나는 그가 느닷없이 병실로 뛰어들어 와 나를 무작정 힘껏 껴안고 내 가슴에서 울음을 터트릴까 봐 정말로 두려웠다. 나는 그를 사랑했지만 그에게 안기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쉽아홉 혹은 예순 살이나 나이를 먹은 그가 나에게 매달려 엉엉 우는 것은 더더욱 싫었다. 49
이런 구절들이 곳곳에 쓰러져있다. 베른하르트는 파울과의 소통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의 병세, 그의 연약함을 모두 받아줄 생각은 없다. 자신이 침식되는 것을 참아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라면 모든 것을 받아주어야 하는 것이 미덕 같겠지만 생존 본능을 뛰어넘는 미덕 따위는 없다. 파울을 가여워하며, 파울을 만난 것은 경이로운 일이었지만 그가 갖고 있는 위험을 견디는 것은 이와 별개의 것이다. 베른하르트는 목숨이 하나이고, 또 그 하나 밖에 없는 목숨은 무척이나 병들기 쉬운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둘이 같은 병을 앓았다면 서로는 알은 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몰라보고 싶었을 것이다. 나와 같은 흔적을 몸에 새기고 있는 사람에게 '타인'이라는 인식을 받기 어렵고 그러면서 나와 같음을 연민하는 것은 싫기 때문이다. '다행히' 라는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둘은 다른 병을 앓기에 병자이면서 건강한 자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파울은 정신이 아프고, 나는 폐가 아프고. 다시 말하자면 나는 정신이 건강하고 파울은 폐가 건강한 셈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몇 시간이고 말 한마디 나누는 법 없이, 모차르트를 들었고, 베토벤을 들었다. 우리는 그런 것을 사랑했다. 51
그러나 이 둘의 관계를 우정이 아니라면 무슨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공백의 시간, 침묵의 시간을 기쁜 마음으로 채우는 일은 쉽지 않고, 혼자서 혼자인 상태를 만족하는 것도 어려운 마당에, 그들은 침묵으로 시간을 사랑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어떤 힘도 나올 수 없는 육체를 벗어나 음악으로 간신히 지탱 된 정신의 아치에서 기쁠 줄 알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에서 나는 모르는 표정 하나를 발견한다.
'처음에는 네다섯 발자국을 걷는다. 그다음에는 열이나 열한 발자국, 그러고 나서 열세 발자국이나 열네 발자국을 떼어야 한다. 환자란 그렇게 움직여야 하지' 16 이 말은 환자의 움직임에만 맞는 것은 아니다. 내딛을 바닥을 신뢰할 수 없는 곳에서 몇 발자국을 시험 삼아 뻗는 것에서도 적용할 수 있다. 버려진 발자국들과 제법 길게 가져왔던 발자국을 떠올리자. 움직이는 것은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이들이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 신문을 구하려고 몇 개의 도시 몇 백킬로미터를 차로 달렸던 장면은 분개, 어처구니 없음, 조소같은 것이 아니라 쓸쓸하다. 그 많은 도시를, 신문 하나를 위해 돌아다녔으나 구하지 못했다. 무엇이 바보 같은 것인가? 그 신문을 쉽게 구할 수 없는 빌어먹을 자연에 있는 삶이, 아니면 내가 서 있는 땅에게 욕을 해댔던 광기 어린 모습이? 이들의 저편에는 이런 삿대질과 증오에 비켜서 사람들이 있다. 갈 수 없는 곳에 가려는 움직임을 평생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들이 입을 가리고 웃는다.
숨을 편히 내쉴 수 없는 문장들, 그런 곳을 만들지 않았던 베른하르트와 파울의 이야기는 그 웃음에 대한 증오는 아니었을까. 나는 빛에 조금씩 둔감해져서 여기까지 움직일 수 있었다. 모니터에 가려진 나만한 그림자를 나를 치우지 않아도 더듬거리며 올라오는 글자를 그럴만하게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전복은 아니다. 버려질 발자국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렇다고 걸을 필요조차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정신병을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했듯이, 나는 폐병을 내 목적을 이루는 데 이용'한 것처럼. 33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도 결국 움직임이었고 있어야 할 모습이다. 다른 사람에게 이해받기 어려웠던, 그리고 결코 이해를 요구하지 않았던 그들의 '살아있음'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