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비-스트로스는 모든 신화들은 비슷한 구조를 가지며, 게다가(이것이 그의 주된 초첨은 결코 아니었으나) 모든 신화들이 유사한 사회적, 문화적 기능을 가진다고 말하였다. 즉, 신화의 목적은 이 세계를 설명하는 한편, 이 세계의 문제와 모순들을 마술처럼 해결하려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그는 "신화적 생각은 항상 그들의 목표에 반대되는 것이 존재한다는 점을 자각함으로써 진전된다...신화의 목적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논리적 모델을 제공하는 것이다"고 주장하였다. 달리 말해서 신화는 모순을 추방하고 이 세계를 이해할 만하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하나의 문화로서의 이야기이다. 신화는 우리 자신과 우리 존재 사이의 갈등을 진정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112>
이해할 수 있을까. '신화는 모순을 추방하고 이 세계를 이해할 만하고 살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들려주는 '문화'로서의 이야기로 존재한다는 설명을. 살 떨리는 만감의 교차를. 여지껏 사라진 적이 없으니 신화 있던 오늘은 언제나 이해하기 어렵고 살기 만만찮았던 것 같다. 신화의 존재가 이렇게 절망적일 수가 있나. 싶으면서도 신화를 읽으며 조금 더 나은 날을 갖고자 하는 긍정의 태도를 읽는다. 이제 신화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야기만큼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시대'에 존재하게 되었다. ex_아이폰의 작동 원리, 엑티브 엑스의 존재 이유, 중세에서 날아온 듯한 어느 항공기 일가와 현 정권 (이건 도무지 설명할 방법이 없다)과 함께 이해 불가의 어깨를 견준다.
그렇다는 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되고 '신화소'라는 특유의 단위를 통해서 해석해 왔던 '신화'에 대해 정신분석을 적용한 책이 나왔다. <신화와 정신분석>. 중국 일본 한국은 물론, 그리스, 북유럽에 이르기까지 온갖 신화를 정신분석적으로 설명한다. 주몽에 대한 정신분석은 다음과 이렇다. (이런 건 생각도 못했다)
주몽은 어머니로부터 극진한 돌봄을 받아 자존감과 거대자기가 잘 형성되었지만, 아버지와의 관계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이 경우 자신을 냉대하는 상징계의 요구에 대해 긍정적으로 반응하기 어렵다. 주몽은 어머니 외에 친밀관계를 맺은 여인의 존재가 모호하다(별거). 그의 삶에 만족을 주고 정신에너지를 보충하는 데 필요한 아니마(여성에너지)도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다. 여성과의 관계가 신화에 부재한 것은, 주몽(당대 한민족)의 모성 콤플렉스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컸음을 암시한다. <신화와 정신분석, 583>
이 책에서 흥미로운 건 이젠 새롭지도 않는 동서양의 차이를 신화에서도 발견하고 해석하는 데 있다. 세상이 최초로 생성되는 과정에서도 동양의 신은 선대의 신과 싸우거나 대립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전승, 생성되는데 이에 비해 서양의 신은 '살해'라는 과정을 통한다.
세상이 최초로 생성되는 과정을 담은 창세신화는 동서양의 차이가 매우 확연하다. 중국의 창세신 반고는 저절로 노쇠해져 죽은 뒤 그 몸에서 자연만물이 자연스레 생성된다. 일본의 창세신 이자나기와 이자나미는 성관계를 통해 국토와 태양, 달, 바람 등을 창조하며 선대의 신들과 대립해 싸우지 않는다. 한국의 창세기에서는 우주와 만물이 최초 형성되던 때부터 미륵·천지왕이 존재해 우주와 인간 세상을 조화롭게 다스리는데, 이 신들이 자연만물을 직접 창조하지는 않는다.
(...)
그리스의 창세신 우라노스와 게르만족의 태초신 이미르는 모두 신세대 신에게 살해된다. 북유럽의 오딘은 형제들과 연합해 태초신인 거인 이미르를 살해하고, 이미르 몸의 각 부분을 절단하여 하늘·대지·바다·호수 등의 자연을 창조한다. 바빌로니아에서는 '만신의 어머니'거인 티아마트가 젊은 신들에 의해 살해당한다.<신화와 정신분석, 564>
이 차이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저자는 "동양 특히 한국에서 왕 살해·아버지 살해는 유독 반인륜적 행위로 해석되어, 그 흔적이 말소된 상태"라고 하면서 "왕 살해 요소에 때한 이런 철저한 검열·부인·억압은 프로이트가 『토템과 터부』에서 언급했듯이, 억압된 무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비롯된 신경증적 과민방응일 수도 있다." p. 568. 며 설명을 잇는다. '왕 살해'를 찾아 볼 수 없더라도 '왕 살해' 위협이 없던 것은 아닐 것이다. 신채호가 '조선역사상 제일대사건'으로 지목한 묘청의 난을 기억한다. '왕 살해'가 왕만을 처단하는 것만이 아니라, 왕과 함께 하는 지배 체제 전부를 전복하는 것을 뜻하는 것은 물론이다.
힘 없고 약하고 작고 가난한 것은 온전하게 존재하기가 어렵다. 그들이 '보통'처럼 '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필요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막는 사회는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소식을 전한다. 흡사 '영아 살해'를 떠오르게 하는 소식들에서. 직접적으로 가해하는 이들을 미워하기보다 자신이 살아 남기 위해 더 어리고 약한 것의 억압을 부추겨야만 하는 세계의 잘못을 생각하고 싶다. 여기서 '왕 살해'를 떠올리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상상력이며, 필요한 물음인지 돌아본다. 신화 읽는 것을 고루한 일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세계를 '살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라는 본문의 말은 붙이지도 않겠다. 그저 이곳을 이해할 만한 곳으로 만들기 위해, 오래된 신과 신들의 싸움과, 영광을 읽는다.
덧붙여 신화 읽는 것이 저 먼 곳을 비롯해 오늘을 읽는 시도라고 한다면, 문화를 아는 것은 오늘을 반영하는 거울에 눈 맞추는 거라고 할 수 있을지. 두 번 읽고 싶은 책이다.
긍정적 문화는 내일에 대한 약속을 현시하며, 따라서 그 자체로 현재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는 오늘의 노동을 지속하기 위해서 잠시 재충전하며 쉬려고 들어가는 영역이며, 결국 "생존의 적대관계들이 무마되고 평정될 수 있으며, 외관상 분명히 통일되고 자유로운 영역이 문화 속에서 구축되는 것이다. 문화는 사회생활의 새로운 조건들을 긍정하거나 또는 감춘다." <문화연구와 문화이론, 1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