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론과 진실 미셸 푸코 미공개 선집 2
미셸 푸코 지음, 오트르망 옮김 / 동녘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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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의 현실이 꿈이 될 때가 있다.



마주쳤던 상황 하나, 지나온 거리 몇 개, 아는 사람 몇 명만으로도 꿈은 이야기를 만든다. 그 속에서 나는 제법 마음대로 있을 것 같지만 오직 나만이 현실의 나를 벗어나지 않아서, 어렵게 마련된 꿈을 깨뜨린다. 이런 꿈이 주는 메시지가 있다면, '꿈조차 현실적으로 깨지는 슬픔'이랄까. 작게 행복하려고 했던 꿈이 끝나고 나면 현실로 편입되어 더 큰 불행의 자리로 오는 상황에 마주한다.



정호만 돌아온다면

<꿈의 제인>에서 소현의 몇 개의 현실과 몇 개의 꿈을 반복해 보여준다. 현실과 꿈을 넘나드는 사이 주변의 인물은 상황에 맞게 조금씩 다르게 나온다. 단, 소현만 변하지 않는다. 소현은 어떤 사람인가. '저를 받아주는 곳이 이곳 뿐이어서 왔어요.' 병욱의 팸에 들어온 이유를 지수에게 이렇게 말하는 이다. 관계 맺는 방법을 모르는 것은 비단 소현뿐만이 아닌데 그녀는 유독 두드러진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이는 모두 가출 청소년이다. 집을 나왔다는 것은 그곳이 살만한 곳이 아니었다는 것. 그 속에서의 나를 견딜 수 없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또래들로 이뤄진 공동체에서도 사는 건 쉽지 않다. 팸의 대장을 아빠 혹은 엄마로 불러야 하거나, 말도 안되는 신고식을 치러야 하거나, 술과 담배의 날들, 바에가서 돈을 벌거나, 사회의 법칙에 부스러지는 아이들은 이 얄팍한 법칙에 살아남느라 비참하다. 이곳에서도 살아남지 못한다면 그 다음은 어디에 가야할지 모른다... 하나의 세상을 택했다면 그 안에 소급되는 규칙도 하나. 이 안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이 안의 법칙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있다. 이중고를 치르고 중에 소현은 내가 이렇게 어려운 것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다 정호가 떠난 탓이다. 생각한다.

정호만 돌아온다면.



자신과 똑같이 닮은 다른 사람 찾기

그러나 소현은 자신이 찾는 이가 정호가 아니라 소현 자신임을 모른다. 헤어짐에는 여러가지 종류의 나쁨이 끼어들겠으나, 나의 질량과 부피를 다시 확인하고 채우거나 덜어내는 과정이 있다. 기꺼이 나의 자리를 소중한 이에게 내어주었다. 아니면 저기까지, 나의 자리라고 생각했는데 실은 아니었다. 내것이 아니므로 버려야 한다. 다시 나만의 어떤 것으로 채워가야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관계가 서서히 닫히고 열리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소현은 거의 없어지고 희미해진 자신의 자리를 오로지 정호의 부재로만 생각한다. 얼마나 힘이들까. 소현은 자신과 똑같이 닮은 정호를 찾느라 힘들다. 세상 어디에도 그런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찾습니다

그래서 소현이 갈구하는 공동체를 만나거나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소현은 자신이 갖고 있는 고유의 질량이 거의 없다. 그곳에 들어갈 '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죽을 수도 없다. 완벽하게 죽어버리는 지수처럼, 소현은 죽어지지도 않는다. 그런 소현이 다른 사람을 찾을 때, 나와 영혼을 나눌 수 있는 인간을 찾을 때 다음과 같은 문제에 부딪힌다.



영혼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자 할 때, 영혼은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하며, 그 또 다른 영혼은 파레시아를 갖춰야만 합니다. 43


<파레시아>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솔직히 말하기', '진실 말하기', '진실의 용기', '발언의 자유'등으로 번역된다. (파레시아는 푸코의 후기 사유의 핵심이 되는 말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성찰을 위한 전략적 도구인데) 작게는 관계를 설명하는 데도 중요할 것 같았다. 소현을 넣어 위의 문장을 다시 쓸 수있다. '소현이 자기 자신을 돌보고자 할 때, 자기 자신에게 마음을 쓰고자 할 때, 소현의 영혼은 다른 영혼을 필요로 하며, 그 또 다른 영혼은 파레시아를 갖춰야만 한다.' 여기서 읽어야 할 것은 다음 구절까지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영혼과 자기 자신을 배려하는 자, 그래서 파레시아를 가진 타인, 즉 파레시아스트를 필요로 하는 자는 파레시아스트를 찾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 역시 파레시아스트가 자기에게 말하게 될 진실을 받아들일 능력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받아들일 채비가 되어 있다는 신호를 파레시아스트에게 보내야 합니다. 64


제인은 파레시아가 될 수 있을까
<꿈의 제인>은 소현이 자신의 파레시아스트(진실을 말하는 사람)를 찾는 여정이다. 동시에 진실을 들을 용기를 키워 '꿈의' 제인에게 준비가 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시간이다. 제인은 몇 가지 중요한 진실을 소현에게 말해준다. '인간은 시시해지면 끝이야.' 그건 케익을 먹는 중에 일어났다. 인간은 케익 한 조각에도 시시해질 수 있으니까 언제나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또 인간은 불행이 지속되는 중에 드문 드문 행복하다는 것. 이런 말을 하는 제인은 어떤 사람인가. 태어나면서 거짓말쟁이가 되어 자신을 부정당했던 이다. 내가 나의 진실을 말하려고 애써왔지만 세상은 들어주질 않는다. 제인의 파레시아를 인정하지 않는다. 트랜스젠더로 무대에 서는 제인. 제인 역시 소현처럼 자신을 알아줄 사람을 헤맸으나. 이제는 자신이 거둘 수 있는 더 약자인 이들에게 파레시아스트가 되어준다.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된다.

소현은 영화 내내 편지를 쓴다. 천장을 열어 편지를 놓는데, 너무 깊숙히 밀어놓으면 보이지 않을 것 같고, 바깥으로 너무 나오면 누구나 쉽게 볼까봐 적당히 삐져나오도록 편지의 자리를 고심한다. 그러나 받는 이가 없으므로 그 편지는 누구에게도 읽히지 않는다. 그러나 알고 있을까. 그녀가 누군가에게 알려지기를 원했던 그 말들은 우선 자신에게 한 번씩 읽혔다는 것을.



밀쳐지는 살의 모양

영화 마지막에 정호와 소현이 함께있는 장면을 보여준다. 정호가 일하는 바에 무기력하게 앉아 있는 소현. 정호는 사이다 한 캔을 앞에 놓으며 소현에게 그만 가라고 말한다. 일 끝날 때까지 그냥 있을게. 정호는 소현을 밀어내고, 무기력하게 소현은 그곳에 있고 싶다. 소용없이 밀쳐지고 밖으로 나가게 되는 소현. 내가 이 영화에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한 장면은 이쯤이었다. 느리게, 소현이 밀쳐지는 뭉근한 모양의 살을 안다. 나는 이렇게 밀쳐지는 사람이었고, 이렇게 밀어낸 사람이었다. 내가 가장 잘 보이던 거울은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게 없어지고 나면 수만가지로 비치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모습도 보이는 거울을 마주해야 한다.



나는 (진실을 들을)용기가 있는가. (진실을 말해 줄)타인을 만날 수 있을까. 그 전에, (진실을)말할 용기가 내게 역시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영화는 그걸 암울하게도 창문 밖으로 보여준다. 그 자리가 옳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렇게 저렇게 채워진 사슬 속에서 자유로 뚫린 구멍이 그 밖에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삶의 태도가 저것 뿐이라고 할때. 더 이상 시시해질 수 없는 몇몇은 창문 밖의 자리를 택했다.



그는 살아 있기 보다는 진실을 말하기를 원합니다. 그것은 그가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입니다. 106





+
한 번 더 봐야 이해할 수 있을텐데 아쉽다. 한 번 더 보기에는 마음의 쓰임이 큰 영화.

<담론과 진실>이 이 영화를 이해하는 실마리를 주었다고 생각했다.



인용 출처

미셸 푸코, <담론과 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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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학자의 개>는 흥미롭고 냉철하다. 개를 비롯한 앵무새, 혹은 거미, 나비, 혹은 나방을 인간이 마주할 때 나오는 감정에 대해 의문한다. 동물들의 의도가 우선이 아니라 인간의 느낀 '감정'에 동물들의 표정과 몸짓이 해석 되는 일을 다시 묻는다. 흔하게 묻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 예컨대 돼지는 먹을 수 있고 개는 먹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같은 것에 대해 말이다. 어떤 것은 비천하고 어떤 것은 귀중하게 되는지에 대해 파고든다. 글쓴이의 질문은 나의 생활과 아주 가까이 있어서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접어놓고 읽고 싶은 철학의 단면 외에도 직접 개를 키우며 생긴 일화들은 어떤 인간사만큼 복잡한 감정을 낳는다. 


집시(저자가 키우는 개)와 산책을 나가는 데, 젊고 강인한 이웃집 개 짓는 소리에 집시가 놀랐고, 자신도 은연중에 움찔했다는 거지. 그런데 집시가 자신을 이렇게 쳐다봤다는 거다. '당신도? 당신도 깜짝 놀란거야?' 달리 해석할 수 없이, 그 개의 얼굴이 그런 물음을 던지고 있더라는 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대답 없이 예정대로 다시 산책을 한다. 개와 주인은 다른 높낮이로 걸으면서 서로의 늙어감을 바라본다. 이런 것까지 들키게 될 줄 몰랐는데. 나에게도 숨기고 싶었던 안쪽을 한참 이쪽을 집시가 알아버렸다. 집시와 살면서 마주한 이런 장면에서부터 플라톤과 아렌트, 상당 분량의 문학을 가져오기도 한다. 편안하게 잡았다가 어라, 하는 생각으로 표지를 다시 살피게 된다.  


플라톤은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필요를 선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것 없이는 삶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게 된 것을 가치의 원천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그것들, 즉 부, 사회적 지위, 출세 등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처럼 필요를 선으로 오인하는 행위는 한 사람이 무엇을 절대적인 가치, 즉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보고 있는지를 실질적으로 드러내는데, 그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이 절대적 가치는 대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이 덮쳐올 때,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재설정한다. 108p


철학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들어온다. 이 밖에도 등산에 대한 생각이 흥미로웠다. 산을 올라가며 목숨을 잃기도 하는 일의 이해할 수 없음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글은 없는 것 같다. 산을 오를 때 장비를 거의 쓰지 않는 점에 대해서. 손쉬운 등반을 등반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의 윤리에 대해서. '산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자체라는 시간에 직면해 어떤 덕목을 갖고 있음을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었다.'라는 말은 명쾌한 것을 넘어 아름답다. 


<철학자의 개>라는 제목에서 이런 내용을 만나게 되리라고 어떻게 생각이나 했을까?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러나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드러나 괴롭히는 대목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드러난다. 실은 21페이지부터 벌써 난리다. 


내 유년기는 순탄치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결국엔 다시 떠나버렸다. 아버지는 나를 깊이 사랑해주었고 나도 그 점을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좀처럼 살가운 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어서 나는 올로프에게서 따뜻함과 위안을 찾아야 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성격이 달랐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여성의 손길이 결핍된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서 남자 어른보다는 한 마리의 개가 더 뛰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혹시 유머라고 적어놓았는지? 혹시 가부장제의 아버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무리 접어도, '여성', '손길', '결핍', '충족'등의 단어에서는 여성을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종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분 나쁜 대목이다. 칭찬이랍시고 남자 어른보다 개가 더 뛰어나다는 말을 붙여놓았는데, 인간이라면 자신의 자식에게 살가운 정을 드러내고 아껴야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특수한 종만이 아이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째서 '살가운 정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깊이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는지 의심스럽다. 사랑은 그 정을 드러낼 때에만 사랑이다. 


46년생의 저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인양 생각된다(저자의 이력을 살피고 '어쩔 수 없다'고 쓰는 이해라니, 다정도 병이다) 마지막 장에서 여과없이 드러나고야마는 이 문제는 암컷 고양이 세 마리가 하나만 남은 새끼 고양이를 지키기 위해 포악스러워졌다는 설명에서부터 "아이들에게 소홀한 어머니는 새끼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고양이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의 구절까지 총체적인 문제다. 양육을 여성의 일로 정해버리는 이 반쪽 밖에 남지 않은 시선. 그러나 그는 이 반쪽의 시선을 자신이 가진 최대의 값으로 가져간다. 냉철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제법 중용을 지키며 이 장을 빠져나오는 듯 하지만 아마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반쯤 가려진 카메라가 무엇을 제대로 찍을 수 있겠나. 여성에 대한 철학없이 쓸 수 없는 것을 써 놓았다. 볼썽사나운 컷이다. 


추천한다면, 동물과 함께 살아낸 장면들 때문이다. 그럴듯한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놀라울 정도로 눈앞에서 그려낸다. 여기에 더해지는 철학자의 어깨.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또 그런 이들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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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취미처럼 인근 초중고 학생들이 이용하는 문구점에 들른다. 청소년들이 자주 사가는 물건을 구경할 수있다. 방탄이나 트와이스의 뱃지, 각종 스타들의 사진을 활용한 아이템까지. 다종한 요새의 문구를 본다. 나는 삼각자 세트라든가, 원고지 사이에서 내가 보지 못했던 물건들을 본다. 이 물건들은 아주 이상하게 어울려있고 그 속에서 나는 가끔 편지지를 사온다. 

그 중에 슬라임이라는 걸 찾았다. 실물이 궁금해서. 가보니 코너가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무슨 펄이 들어있는 것부터 진주알이 섞인 것까지. 원형의 플라스틱 통 안에 들어있다. 십대들이 시험 끝나고 하고싶은걸 공유한 댓글에서 '슬라임 만들기'를 발견했는데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슨 게임인 줄 알았다. 

설명하자면 예쁜 찰흙이다. 만지고 노는데 의미가 있는데 무언갈 만들자고 작정하는 물건은 아니다. 촉감과 소리를 즐기는 놀이를 한다. 초중고를 다니는 학생들과 이야기할 수있는 기회가 거의 없고, 지나온 시절을 생각하면서 단순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말하자면 마음이. 박물관의 유물만큼이나 닿을 수 없는 세기를 바라보는 심정으로.

심정을 확대하다보니 가끔은 '도티'님의 영상을 찾아보기도 한다. 하지만 말 그대로 보는 것일뿐. 끝까지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임으로 상황극을 하는데 이것부터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튜브 크리에이터라는 직업도 생소하지만 더 생소한건 그걸 이루는 콘텐츠다. 그리고 이걸 재밌어하는 사람들의 마음.

세계인의 심정을 알기위해서는 아니고 그냥 종종 <사마의>라는 중드를 본다. 조조가 다른 이를 염탐해 사진처럼 그려온 죽간을 화롯불에 태우는 장면이 있었다. 나는 속으로 뜨끔하면서 이것이 종이책의 미래 같은게 아닐까 했다. 잘 타더라. 하지만 그 죽간에 그려진 그림은 지금 내 핸드폰에도 들어 있다. 좋은 죽간을 갖고 있는 셈이지. 이 글도 핸드폰으로 쓰고있다. 추워서 피씨 앞으로 갈수가 없다.

좋은 콘텐츠가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콘텐츠의 '연결'이 중요하다고 설득하는 글은 꽤 믿음직스러웠다. 물론 좋은 콘텐츠가 대체로 성공하지만, 아닌 경우도 있으니까. 제일 대표적인 예가 책 아닌가. 책만한 콘텐츠가 세상에 어디에 있다고. 논문은 또 어떻고. 하지만 책은 시대의 죽간같은게 되어버린 느낌이다. 이상하게 너무 오래 살아왔다는 느낌도 들고. 그런 책을 들고 핸드폰을 보는 조화는 말할 수 없이 이질적이다. 

이와 대비를 이루는 유튜브의 영상이 있다다. 유튜브 구독자 1위~10순위를 살펴보면 이 콘텐츠들에서 가치, 기능, 효용 등을 알아내고 수치화 하는 건 무의미한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이 영상의 가치는 다른 곳에 있다. 바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  

이 말은 인간 하나 하나가 중요하다는 말처럼 들렸다. 연결을 하는건 사람의 몫이니까. 결국 마음을 이해하고 알아야하는 일이니까. '최고'를 만드는 이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라는 말처럼도 들렸고.

그래서 유튜브의 세계는 신기하다. 진실로 잉여롭게 노는 것이 최고인 것 같으니. 가늠 할 수없는 기술의 발전이 노는 인간임을 잊지 않았다는 걸 증명하는 곳에 총동원한다. 

그날 슬라임이 무엇인지 몰라 검색하다가 아이유가 별일 없이 그걸 갖고 노는 영상을 봤다. 참 별것 없게도 위안을 줬었다. (심지어 아이유가 나오거나 아이유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는다. 그냥 아이유의 손과 슬라임만 나온다) 세상의 아이유도 이런 놀이를 하는구나, 라는. 평범한 인간의 동질성 같은게 느껴졌기 때문인가.

정답을 갖고 있는 사람이, 기업이 여기 한정되고 정해져있는것 같지만 기회가 '있다'라는 말처럼도 들린다. 만나지 않지만 연결되어있고, 그 연결들이 바꾸는 셀러의 순위와 뉴스의 순위, 생활의 변화가 있다. 직업을 탄생시킨다. 10년 전에 누가 알았겠나! 유튜브크리에이터가 티비를 대체하게 될 줄. 티비 프로그램과 영화는 도티님같은 이들과 싸워야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탄생하고 있는 셀 수없이 많은 도티님들과. 

무지막지한 제목을 이고 있는 이 책은 아마도 기업의 임원들,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 창업한 이들만 위한 것처럼 생겼다. 심지어 추천사의 제목은 '구글러가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선물하는 책'이다. 이렇게 각 잡은 것과 달리 수다스럽고 재미있다. 이 책은 소설과도 경쟁할 수 있다. 그러니 위에 거론된 이들이 아니라, 당신이 생활인이라면 한번쯤 읽어봐도 좋겠다. 이 책이 주는 인사이트에 당신은 어떤 영감을 낳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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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 콜스 - 영화 [몬스터콜] 원작소설
패트릭 네스 지음, 홍한별 옮김, 짐 케이 그림 / 웅진주니어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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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너는 이름 그대로 궁지에 몰려 있다. 


모든 걸 망쳐버리고 소리지르고 싶지만, 일상을 조금만 잃어도 어긋날 모든것이 어떻게 엉켜버릴지 가늠도 되지 않는다. 때문에 묵묵히 작은 빛이 금방 닫혀버리는 단추구멍 같은 일상을 꿰멘다. 토스트를 하고 쨈을 발라 먹고, 세탁기를 돌리고 학교가는 턱 끝에서 배꼽아래까지. 코너가 삐끗할 수 있는 것은 늘 꿈 속이다. 집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고, 엄마가 그 안에서 바닥을 잃지만 코너는 엄마의 팔을 잡아 당겨 올리지 못한다. 엄마가 암흑 속에 빠지며 꿈이 깬다. 엄마는 투병중이고, 아빠는 이혼했고, 학교에서는 왕따다. 코너에게는 주목나무를 바라보고 상상하는 일과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그려내는 일만이 위로다. 


코너는 믿을 수 없는 일을 진실로 믿는 것이 잘 되지 않는다. 엄마가 다시 건강해질 거라는 기대가 헛되다는 것을 스스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걸 발설하거나, 그렇다고 생각하는 건 옳지 않은 것 같다. 왜냐면 나는 아직 12살이고, 그러니까 아직 어리고, 그러니까 순진무구하게 믿어준다면 엄마가 다시 건강해질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착하게 빌고 또 빌게 되면, 엄마의 병이 낫게 되는 게 지금껏 읽어왔던 동화의 이야기니까. 그렇게 나아지지 않는 희망을 애써 삼키고 있을 때, 저 언덕 위의 주목나무가 일어나 저벅버적 걸어서는 코너가 있는 2층집 창문으로 고개를 드민다. 다짜고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 가지 이야기가 끝나면, 네 번째 이야기는 네가 해야 한다'고 겁을 주면서. 주목나무는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가릴 수도 없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마무리도 없고, 그래서 무엇을 배우면 좋을지도 알 수 없는 세 가지 이야기를 들려준다.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 다니지 않아도 돼.*


주목나무는 무너져가는 세계에 머물며 착한 아이로 남고자 하는 코너를 울린다. 기어코 울려 버리고, 스스로 모퉁이가 되어 코너가 잡고 돌아야 할 무거운 순간이 되어준다. 나를 잡고 있지만, 이제 곧 손을 놓게 되겠지만, 여기를 가볍게 돌고나면 다른 세계가 있다고 말해준다. 그 모퉁이는 누구나 돌아야 하는 인생의 어떤 점이다. 언젠가 너에게 전해준 종이가 반으로 접힐 때가 온다. 


나의 마음이었던, 나의 살이었던, 나의 미소였던 그곳은 더 이상 드넓지 않아서 너는 다른 면으로 굴러떨어질지도 모른다. 누구나의 이야기는 반에서 반으로, 다시 반으로 접혀 들어간다. 더이상 접어올릴 수 없을 때 하늘의 별이 된다. 그 때가 누군에게나 온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이유로 맞아야 하는 죽음의 순간이다. 아직 나의 이야기가 남아 있기에 그 손을 놓을 때가 온다. '보내지 않는 것'이 '사랑하는 것'은 아니야. '떠날 수 없음'이 '착한 것'은 아니야. 너는 용기 있게 너에게 주어진 삶을 맞아야 해. 주목나무가 들썽인다. 코너는 엄마와 깊게 헤어진다. 어쩔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고, 헤어짐을 헤어짐으로 맞아준다. 


한 개의 이야기가 끝나가고 있다. 너는 착하지도, 나쁘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네가 행복해질 거라는 약속은 없다. 교훈도 물론 없을 것. 너는 이 헤어짐을 만나서 무엇이 되었니? 더욱 네가 되었니? 진실로, 너만이 부딪혀 느낄 수 있었던 너의 심연을 들여다 보았니. 코너가 할머니와 엄마가 꾸려준 방에 남아 엄마가 남겨준 그림을 한 장 한 장 들출 때, 네가 꾸었던 꿈이 실은 나의 것이기도 했다는 고백을 듣는다. 코너가 꿈에서 보났던, 주목나무가 들려주었던 이야기가 엄마의 그림으로 남겨있다. 네가 울면서 준비했을 헤어짐의 마음을 나 역시 잡는 것이 쉽지 않았어라는 엄마의 목소리가 그림으로 살아나 한 장 한 장 넘겨지고 있다. 성장이라는 '코너'를 준비하기 위해서, 인생의 한 켠을 마련해두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어리다거나, 슬픈 이야기만으로 소비하지 않기 위해서 이렇게 크고 오래된 나무가 내 안락한 집 창문을 부수고 들어와야 했다. 



*메리 올리버, 「기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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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 - 페미니스트가 말하는 남성, 남성성, 그리고 사랑
벨 훅스 지음, 이순영 옮김, 김고연주 / 책담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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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자아이들과 여성들-그리고 남자아이들도-모두 공통적으로 이 비밀을 지니고 있다. 

아무도 남자들에 관한 진실을 말하지 않을 것이다. 111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 몸에는 생물학적으로 섹스에 대한 갈망이 내장되어 있다고 믿지만 

사랑에 대한 갈망이 내장되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141




어떤 책은 경험의 밑바닥을 들어올린다. 썪고 부유해서 형체가 온전하지 못한 부분을 이렇게 들어 올려 보인다. <남자다움이 만드는 이상한 거리감>을 읽으면서 그랬다. 내가 느꼈던 무력함과 이해할 수 없던 부분들이 선명해졌다. 그리고 그 감정을 풀어갈 수 있는 실마리를 볼 수 있었다. 페미니즘을 알게 되면서 나는 마땅히 분노해야 할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은 갖게 되었다.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게 무슨 뜻인지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 후에 무엇을 더 할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더 큰 분노와 더 큰 화를 낼 수 있게 되었지만 힘이 들었다. 내가 아는 이들을 '미워한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고, 앞이 '막혔다'는 느낌이었다. 그 후에 남는 것은 허탈함과 절망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는 기쁘지 않았다. 방법을 찾아야 했다.  






@kai_rev님 트위터 캡쳐. (문제시 삭제하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자라면서 가장 많이 배우는 것 하나는 가부장제 시스템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 단어를 전혀 모른다 해도 마찬가지인데, 우리는 어릴 때부터 가부장적 성역할을 떠맡으며 이를 가장 잘 수행하기 위한 여러 방법을 끊임없이 지도받기 때문이다. 52

 

 

'어릴 때부터 가부장적 성역할을 떠맡으면서'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위 트윗은 '라면'이라는 한 요리가 가족의 구성원 중 어떤 이를 통해 나오느냐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읽히는지 잘 보여준다. (중요: 라면이라는 요리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다르게 읽히는 정도가 바로 성역할을 의미한다. 최근에 추석도 있었으니 긴 말없이 자신의 추석을 생각해 보면 되겠다. 드러나 있는 나의 성에 따라 '앉는 자리''하는 일'이 달라진다. 이것은 말하자면, 모든 인간을 같은 범주에 놓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풍경이다. 추석 풍경이나 너무나 흔하기 때문에 누가 앉아서 술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가, 누가 밥을 차리고 설거지를 하는가를 생각하면 된다. '원래' 그것을 더 잘하는 사람은 없다. 누가 그 사람을 그 자리에 놓는가 만 있을 뿐이다. 위계를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다. 어떤 성이 다른 성을 억압하는지도 사족처럼 따라 읽힌다.

 

벨 훅스는 '가부장제'는 정신질환의 하나라며 강력한 훅을 날리는데 이보다 정확한 말은 없어 보인다. 이 단어가 아니고서는 도저히 '가부장제'를 이해할 만한 열쇠가 없기 때문이다. 가부장제는 어떤 종교보다 강한 믿음으로 이 사회를 지탱하고 있다는 것 역시 그렇다. 내가 찾지 못했던, 그러나 찾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래서 페미니스트들이, 페미니즘이 나가야 할 길은 바로 이 가부장제를 알고, 이 아래서 억압받는 남성과 여성이 바로 '우리'임을 알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가부장제 아래 체화된 이들을 공격하고, 잘못되었다고 분리하고 격리하는 건 우리가 건강해지는 방법이 아니다.

 

그러니까 여성들 대부분은 적어도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다. 그러니까, 그 마음을 친한 친구에게든 치료사에게든 혹은 비행기나 버스에서 옆에 앉은 낯선 이에게든 말할 수 있다. 남성들은 가부장적 관습에 따라 일종의 감정적 금욕을 배운다. 이 가부장적 관습에서는, 아무 느낌도 갖지 않는다면 더 남자다운 것이겠지만 혹여 무엇을 느끼고 그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는다 해도 그 느낌을 틀어막고 그 느낌을 잊고 그 느낌이 사라지게 하는 것이 남자다운 태도라고 가르친다. 30

 

누가, 그렇게 가르치냐고 물을 수 있다. 사회 전체가 그렇게 이끈다. '남자답게'라는 말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점을 포함한다. 아버지의 분노와 체벌로 크지 않은 이들이라도 창피를 주거나 눈치를 주는 식으로 성역할에 맞는 행동을 하며 자라왔다.

 

조지 와인버그는 <왜 남자들은 자신을 던지려 하지 않는가>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이미 완벽한 상태에 있는 여성을 찾는데, 관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고 기본적으로 느끼기 때문이다. 어떤 일이 조금이라도 잘못되면 그 문제에 대해 말하기보다 빗장을 지르는 편이 더 쉬워보인다" 남자다운 척한다는 것이 말하는 바는 진짜 남자라면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33

 

가부장제 사회에서 남성들이 표현해도 된다고 인정해주는 딱 한 가지 감정이 있다. 바로 분노라는 감정이다. ...어떤 사람이 고통이나 영혼의 괴로움을 감추려 할 때, 분노는 그것을 숨기기에 가장 좋은 장소다. 34

 

나는 '아버지'라는 대명사가 슬픔 대신에 분노를 가졌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아버지만큼 슬픈 사람도 없게 된다. 하지만 슬픔은 울거나 무너지는 슬픔의 방법으로만 드러나야 한다. 그래야 그 다음의 감정으로 순화될 수 있다. 분노는 진짜 감정을 멀어지게 하고 주위의 공분과 두려움만을 살 뿐이다. 슬픔이 약함이라는 증거인 양 받아들인다. 그리고 또 약하다면 왜 안되는지 대답하지 못하면서 슬픔을 가린다. 어떤 문제에 정답과 오답은 있으면서 감정을 정확하게 드러내는 방법에 대해서는 정답과 오답을 내릴 수 없었다. 감정에 대해서 왜 배울 수 없었는지, 배우려고 하지 않는지 궁금해졌다. 내가 가진 감정은 거의 ''. 그게 아니고서는 나일 수 없다. 내가 느끼는 것, 감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것. 이것은 '언어'를 배우고 어떤 ''을 배우는 것만큼 소중하다.

 

(...)남성이 여성을 지배해야 하며 강한 남자들은 자신보다 약한 남자들을 지배해야 한다고 배운다.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남성들은 가부장적 사고와 실천을 순순히 따를 때 자신들이 받게 되는 주요 보상들 중 하나가 성적으로 여성들을 지배할 수 있는 권리라고 일찌감치 배운다. 그리고 여성이 주위에 없다면, 그들은 자신보다 약한 남성을 '여성'의 자리에 놓을 권리를 갖는다. 143

 

성교를 뜻하는 남성 중심의 속어인 'fuck'이 어떤 의미인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여성을 fuck한다는 것은 그녀와 섹스를 하는 것이다. 또 다른 상황에서 누군가 fuck하는 것은 (...) 한 사람에게 상처를 주거나 그를 속이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말을 한다는 것은 대개 폭력에 대한 암시이거나 폭력을 가하겠다는 위협이다. 사람들은 섹스와 폭력을 여전히 같은 단어로 사용한다. 섹스가 폭력적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생각과 섹스가 명백히 폭력적이라면 강간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에 반대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은 가부장제가 얼마나 큰 힘을 가지고 있는지를 증명한다. 153

 

남성은 섹스를 하면서 사랑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모든 감정적 만족을 얻고 싶어 한다. 대부분의 남성들은 섹스를 통해 살아 있고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얻을거라고, 가깝고 친밀하다는 느낌과 기쁨을 얻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섹스는 그런 좋은 것들을 주지 않는다.

 

성에 관한 이야기는 내 이야기를 덧대서 이야기 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하다. 완벽하게 이 책을 읽을 이들을 격려하고 이해할 수없었던 것들을 설명하는데, 벨 훅스의 글은 어떤 심리학, 의학서보다 남성을 더 잘 설명하는 것 같다.

 

 

비어만은 이렇게 말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를 비롯한 모든 남성들의 미래 모습은 우리가 부정하도록 훈련받아온 인간성의 모든 부분을 되찾는 것이다. 섹스에 대한 집착이 치유될 수 있으려면, 굳이 없어도 어떻게든 지낼 수 있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배워온 인간 경험의 본질적인 면을 되찾아야 한다. 서로에 대한 친밀감, 나이와 배경과 성을 막론하고 상대를 배려하고 그들에게 연결되는 것, 자신의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인 즐거움, 열정적인 자기표현, 마음을 들뜨게 하는 갈망, 자신과 또 다른 사람에 대한 다정한 사랑, 나약함, 어려울 때 받는 도움, 편안한 휴식, 많은 사람들과 많은 종류의 관계를 맺고 가까이 지내는 것 등이 모두 여기에 속한다. 303

 

이건 내가 바라는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이에 더해 페미니스트 아동문학이나 페미니즘에 대해서 공교육과 사교육에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인간 감정의 본질적인 모습을 알 수있는 것, 비어만이 한 말들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가능하다면 이들이 어른이 된 시점에서는 굉장히 많은 사회적인 문제가 해결돼 있을 것이다. 나와 나의 세대가 7살 때 이것을 알았더라면, 13살에, 17살에 그리고 21살 때 알았더라면. 내 삶은, 내가 사는 사회는 더 많이 달라져 있을 것이다. 더 많은 것들을 느끼고 표현했을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을 배우고, 소통할 시간이 많지 않다. 그리고 이 책을 '희망'을 갖고 싶은 모든 이들에게 추천해주고 싶다. 마음이 아파서 읽은 기록을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했다. 내가 읽어본 최고의 치유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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