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자의 개>는 흥미롭고 냉철하다. 개를 비롯한 앵무새, 혹은 거미, 나비, 혹은 나방을 인간이 마주할 때 나오는 감정에 대해 의문한다. 동물들의 의도가 우선이 아니라 인간의 느낀 '감정'에 동물들의 표정과 몸짓이 해석 되는 일을 다시 묻는다. 흔하게 묻지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질문들, 예컨대 돼지는 먹을 수 있고 개는 먹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 같은 것에 대해 말이다. 어떤 것은 비천하고 어떤 것은 귀중하게 되는지에 대해 파고든다. 글쓴이의 질문은 나의 생활과 아주 가까이 있어서 주변을 돌아보게 만든다. 접어놓고 읽고 싶은 철학의 단면 외에도 직접 개를 키우며 생긴 일화들은 어떤 인간사만큼 복잡한 감정을 낳는다. 


집시(저자가 키우는 개)와 산책을 나가는 데, 젊고 강인한 이웃집 개 짓는 소리에 집시가 놀랐고, 자신도 은연중에 움찔했다는 거지. 그런데 집시가 자신을 이렇게 쳐다봤다는 거다. '당신도? 당신도 깜짝 놀란거야?' 달리 해석할 수 없이, 그 개의 얼굴이 그런 물음을 던지고 있더라는 거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대답 없이 예정대로 다시 산책을 한다. 개와 주인은 다른 높낮이로 걸으면서 서로의 늙어감을 바라본다. 이런 것까지 들키게 될 줄 몰랐는데. 나에게도 숨기고 싶었던 안쪽을 한참 이쪽을 집시가 알아버렸다. 집시와 살면서 마주한 이런 장면에서부터 플라톤과 아렌트, 상당 분량의 문학을 가져오기도 한다. 편안하게 잡았다가 어라, 하는 생각으로 표지를 다시 살피게 된다.  


플라톤은 인간의 특징 중 하나가 필요를 선으로 오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그것 없이는 삶이 무의미해 보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 자기가 필요로 하게 된 것을 가치의 원천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죽음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그것들, 즉 부, 사회적 지위, 출세 등에 거의 모든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이처럼 필요를 선으로 오인하는 행위는 한 사람이 무엇을 절대적인 가치, 즉 다른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으로 보고 있는지를 실질적으로 드러내는데, 그가 정말 중요하다고 말하는 것과 이 절대적 가치는 대개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고통이 덮쳐올 때, 사람들은 무엇이 중요한지를 재설정한다. 108p


철학 이야기는 이런 식으로 들어온다. 이 밖에도 등산에 대한 생각이 흥미로웠다. 산을 올라가며 목숨을 잃기도 하는 일의 이해할 수 없음을 이보다 더 잘 설명해주는 글은 없는 것 같다. 산을 오를 때 장비를 거의 쓰지 않는 점에 대해서. 손쉬운 등반을 등반으로 여기지 않는 이들의 윤리에 대해서. '산에서의 죽음이 아니라 죽음 자체라는 시간에 직면해 어떤 덕목을 갖고 있음을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었다.'라는 말은 명쾌한 것을 넘어 아름답다. 


<철학자의 개>라는 제목에서 이런 내용을 만나게 되리라고 어떻게 생각이나 했을까?


읽어볼 만한 책이다. 그러나 완전히 동의할 수는 없다. 별 것 아닌 것처럼 드러나 괴롭히는 대목이 여성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드러난다. 실은 21페이지부터 벌써 난리다. 


내 유년기는 순탄치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는 아버지를 떠났다가 돌아오기를 반복했고, 결국엔 다시 떠나버렸다. 아버지는 나를 깊이 사랑해주었고 나도 그 점을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좀처럼 살가운 정을 드러내는 분이 아니어서 나는 올로프에게서 따뜻함과 위안을 찾아야 했다. 어쩌면 아버지의 성격이 달랐더라도 마찬가지였을지도 모른다. 여성의 손길이 결핍된 아이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일에서 남자 어른보다는 한 마리의 개가 더 뛰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부분을 혹시 유머라고 적어놓았는지? 혹시 가부장제의 아버지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아무리 접어도, '여성', '손길', '결핍', '충족'등의 단어에서는 여성을 사람이 아닌, 다른 어떤 종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점에서 기분 나쁜 대목이다. 칭찬이랍시고 남자 어른보다 개가 더 뛰어나다는 말을 붙여놓았는데, 인간이라면 자신의 자식에게 살가운 정을 드러내고 아껴야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여성이라는 특수한 종만이 아이를 아끼고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어째서 '살가운 정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깊이 사랑해주었다'고 생각하는지 의심스럽다. 사랑은 그 정을 드러낼 때에만 사랑이다. 


46년생의 저자로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인양 생각된다(저자의 이력을 살피고 '어쩔 수 없다'고 쓰는 이해라니, 다정도 병이다) 마지막 장에서 여과없이 드러나고야마는 이 문제는 암컷 고양이 세 마리가 하나만 남은 새끼 고양이를 지키기 위해 포악스러워졌다는 설명에서부터 "아이들에게 소홀한 어머니는 새끼를 헌신적으로 돌보는 고양이를 보고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다."의 구절까지 총체적인 문제다. 양육을 여성의 일로 정해버리는 이 반쪽 밖에 남지 않은 시선. 그러나 그는 이 반쪽의 시선을 자신이 가진 최대의 값으로 가져간다. 냉철하고 유려한 문장으로 제법 중용을 지키며 이 장을 빠져나오는 듯 하지만 아마 자신도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모를 것이다. 반쯤 가려진 카메라가 무엇을 제대로 찍을 수 있겠나. 여성에 대한 철학없이 쓸 수 없는 것을 써 놓았다. 볼썽사나운 컷이다. 


추천한다면, 동물과 함께 살아낸 장면들 때문이다. 그럴듯한 장면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놀라울 정도로 눈앞에서 그려낸다. 여기에 더해지는 철학자의 어깨. 동물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과, 또 그런 이들을 이해하고 싶은 사람에게도 도움이 될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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