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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 산으로 간다 문학동네 시인선 65
민구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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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두운 갈색에서 오래된 기억을 떠올린다

 

이 색은 마을 입구에서 비를 맞는 장승의 부라린 눈이고색색의 줄을 가지마다 걸친 성황당 나무의 단단함이다연기가 올라오는 지붕낮은 기둥을 이루는 손 때이며 다른 소문이 침범할 수 없는 방 입구의 붉은 글씨다지금은 사라진 마을그곳에 살았던 이들을 단단히 결속하는 이야기가 있었다.

시작은 달이다달은 존재하는 것일까존재한다고 믿는 것일까누구나 달이 있다고 하늘을 가리켜 말할 수 있으나 그것을 끌어내 '여기 달이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달이 존재한다고 믿는 편이 아닐까 싶다달이 있다고 증명해야 하는 것은 과학의 일이 아닌가 하며 어물쩍 물러선다그러나 시인은 이지러지는 유약에 묻는다수천 년 동안 사람들이 목을 빼고 저것을 쳐다보았다고? 시인은 달을 보고 짖었을 늑대를 풀어놓는다. '줄을 풀고 창문으로 넘어들어온 달이 구석에서 나를 물고 어금니를 드러낸다// 오줌발이 얼마나 센지 사방 벽으로 튀어 잘 지워지지 않는다// 달은 나무를 잘 탄다움직이는 달」 부분이것은 내가 알고 있는 달에 관한 신화 중 가장 얼굴이 잘 보이는 달이다달은 소원을 등에 받아두기만 하지 않는다달은 유년의 등을 쫓길 잘하는 곰보 핀 개구진 모습이다시인의 주문으로 달은 존재한다고 믿었던 것에서 존재하는 것으로 움직인다시가 가진 힘은 새로운 믿음을 견지하는 데 있지 않을까아름다움이 논리를 뛰어넘는 것을 본다달이 있다고 하는 건 이렇게 말하는 거다달이 갈긴 담벼락 오줌발을 보여주면서


달을 존재하는 것으로 끌어내린 시인은 이제 '동백'을 통해 설화를 빚는다. '나는 천천히 돌 속으로 걸어들어간다눈 덮인 지붕 아래서 죽은 자들이 일가를 이루고 산다/ (...) 파리채로 모기를 잡던 여자가 밥상을 내온다이걸 먹으라고기가 차서 주위를 둘러보면벽에 문드러진 동백들동백부분벽에 문드러진 동백이 보여주는 인상은 무엇인가시는 끝이 났고기가 찬 밥상 앞에 앉아 있는 ''의 안위를 담보할 수 없다동백이 주는 서늘함과 죽은 자들이 이룬 일가의 으스스 함. 제가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화자의 순진함이 위험해 보인다. '동백'은 다른 세계를 알리는 이정표이고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를 만드는 '연기'로 보인다동일한 제목의 '동백'을 보자. '나는 항상 그를 본다 유년의 어느 날따귀 맞은 채 올려다본 교정 한가운데서유유히 담을 넘던 사내의멋진 신발을 기억한다동백」 부분. '목줄을 풀고들어오는 달도 있는데, '민첩하게','산 너머로 달아나는동백을 만드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동백'을 잡으려는 ''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하지만 동백을 '멋진 사내'로 만드는 데는 성공한다이어지는 동백의 연작에서는 동백으로 현재와 예전을 포개 잇는.

 

'딸애가 여우에게 물렸다고새 장화에 피가 묻어 친구들이 자길 피하더라고설산에 떨어진 핏자국 따라 첩첩산중등굣길 걸어 너를 업고 오는 길동백2」 부분여우에 물린 딸을 안고 ''는 급한 대로 바위를 두드린다딸을 뺏긴다기다린다시간이 흐르고 의사는 돌이 된 딸을 돌려주는데지폐를 건네고 돌려받는 여비가 '동백몇 닢이다. '낯익은 총성만 동백나무빈 광주리에 담겨내려오는데동백3」 부분동백연작의 인상은 눈 속에서 피는 붉은 꽃잎의 기이함으로 현생과 다른 생을 이으려는 간절함 아닐지눈 속에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과 여우와총성과 광주리가 떠오르는 세계로 가는 길은 끊겼다콘크리트 바닥에는 눈도 여우도 없다그러나 길마다 동백은 키 반듯하게 잘려 동그랗고 매끄러운 잎들로 도시를 아름답게 꾸미고 있지 않나커다랗게 피는 붉은 꽃이 어둔 보도블록에 떨어진다시인은 지금과 이 낯선 공간을 '동백'으로 겹쳐 꿰매잇는다단절된 이야기를 연결하려는 시도가 동백을 매개로 일어난 것은 이름 하나로 그칠 꽃에서 거대한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음이다뭐라고 말해야 할까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지금과 이어내는 시인의 바늘을그것으로 하여금 몰랐던 눈밭이 하나 생기고그리로 발을 옮김으로 우리의 삶이 확장된다바위를 두드려 의사를 만나는 공간을 낯설어하면 안 된다. 작년 겨울전 세계를 강타한 영화 <겨울왕국>의 엘사 일가가 안나의 치료를 위해 트롤을 만나는 장면이 떠올리자없는 세계로 내는 문을 ''라고 한다그렇다면 세상의 문제는 이야기 없음이 아니라 상상력 없음이리라이야기 있으되 그것을 이미지로 구현하지 못하는 문제로 명확해진다열광의 일부도 시에게 돌리지 않는 깜깜한 얼굴에도 여전히 시를 읽는 시인을 생각한다.

 

2. 투명한 공간을 그리는 화가, 아니 시인

 

 

나는 기다려

천천히 녹는 겨울을

흐르는 평범한 세계를

 

-거울부분.


이전과 사뭇 다른 차분한 어조는 맹렬함과 선명함이 없이 ''에 도착한다방이라 하면무엇이 없을수록 깨끗하고 정갈한 방일 테지만 그 무엇들 중에서 가장 없어야 정갈할 것으로 방에 사는 이임을 떠올리면사는 이 없이는 '방'자체마저 사라지는 위험을 떠올린다정갈함과 방의 존재 이유는 태생적으로 반대의 이야기를 갖고 있는 셈이다각기 다른 부제를 통해 방의 연작들은 화자인 ''를 희미하게 지우는 시도를 지속한다이것으로 마침내 ''이라고 부를 수 있는 본연의 모습에 다가가려는 모습이랄 수 있을지방에 대한 이와 같은 집중은공기의 연작에서도 이어진다.

 

나는 빛도 어둠도

털이 다 빠진

까마귀도 아니야

 

나는 백지

가느다란 손가락이 아니야

 

공기-나는」 부분.

 

시인은 어떤 색으로도 덧칠 할 수 없는 오래된 기억의 색(달과 동백)으로 시작해 어떤 색도 들어올 수 없는 '색 없는 풍경'(공기와 방)을 기록했다. '달과 동백'에서 시인은 달에 대한 수천 년 인간의 믿음을 담벼락으로 끌어내리고 길가를 네모 반듯하게 장식한 동백을 통해 다른 세계로 가는 길을 만들었다달은 누구나 어느 곳에나 있으나 잡을 수 없는 풍경이고 동백은 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초록 잎을 '생경'하게 간직하는 기이한 풍경이다. '달에게 물리'던 시인은 '광주리이고 내려가는동백의 정취로 떠나 ''과 '공기'에 도착하는데방과 공기는 내밀하고 순수하게 그 자체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공간'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구 같다. 그곳은 무엇보다 내가 없는 어떤 곳자신이 지워진 곳으로 나타난다그래서 시를 색으로 이야기한다면어떤 것으로도 덧칠 할 수 없는 색의 풍경과 어떤 색도 존재하지 않는 색으로써의 풍경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다

 





시인은 198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젊은 시인의 첫 시집, 마지막 시는 '저리 보면달이 뭐 별건가'불청객」부분. 로 끝난다이것을 말하기 되기까지, '어금니를 드러낸 달'을 불러온 것에서 불과 시집 한 권의 시간이다. 배가 산으로 간다의 제목은 산을 오르는 배가 사실은 산 몇 개로 이뤄진 구조물이었다는 '그림'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다시집 뒤표지배가 산으로 가거나 산이 배로 가는 일은 결국 한 모습이었다는 그림. 이것과 같은 구조인지, '달'로 오래 들고 볶은 그가 마침내 '달이 뭐 별건가'라는 대답을 냈다그를 보며 언제고 '시가 뭐 별건가라며 웃음을 보일 모습을 기다린다시인이 처음 만든 일가, 고동-치는 색을 몸에 녹여내는 일이 우리가 이곳에서 도망치지 않고 다른 세계로 통하는 문을 만들거나. 이름만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을 수 있는 비밀일 수 있다는 것을 귀띔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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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_한겨례





아.올것이 왔구나! 



김사인 시인의 목소리를 두고두고 들을 수 있다니 

당장 받아듣습니다.



김나영 문학평론가는 전생에 나라를 구하셨나. 

부럽고 부럽고 불납니다.



1회는 진은영 시인. 다음 회에 함민복, 이제니 시인 등이 출연한다.



바로가기_http://www.podbbang.com/ch/84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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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끄러미 2015-04-11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팟방이 있었군요 감사

봄밤 2015-04-11 17:20   좋아요 0 | URL
읽어주시는 시가, 목소리가 시 이야기가 참말로 좋아요. : ) 추천합니다!
 



불청객




민구



가로등 불빛이

작은방 창으로 들어온다

밥상을 타넘고

안방으로 걸어와서 어머니 가슴에

발을 올려놓는다

괘씸하지만

꽁꽁 언 발을 끄집어낼 수도 없어

그대로 둔다


보일러 돌아가는 소리에도

잠을 깨시는 어머니

늘 걷어차던 이불을 웬일로

한 번 안 차고 주무신다


네가 붙잡았나 싶어서

불빛이 시작한 자리를 가만히

오래오래 본다


저리 보면

달이 뭐 별건가





민구, 『배가 산으로 간다』, 문학동네. 2014.11.



1983년 인천에서 태어났다. 200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이 간단한 시인의 소개에 '태어났다'라는 말을 좋아서 자꾸 읽는다. 태어났군요. 1983년에 태어나셨군요. 그러니까 인천에서요 태어났군요. 음. 지금 어디 있다는 거지요. 이걸 읽는 나 역시 '있음'을 함께 생각한다. 혼잣말을 잇는다. 시인의 첫 시집이다.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시다. 가로등, 어머니. 낡고 낡은 이야기를 하려나 읽어가면. 달이 맹렬하게 이를 드러내고 오줌발을 갈기던 시「움직이는 달」이 떠오른다. 시집 앞쪽에서 읽었던 패기와 확연히 대비되는 관조다. 한 시집에 들어 있다. 단정은 이르이, '저리 보면/ 달이 뭐 별건가'라는 말을 마지막에 놓는 시인의 손을 생각한다. '시가 뭐 별건가' 가볍게 놓을 줄 아는 얼굴이다. 다음 시집에서는 무엇을 볼 수 있을까. 기대가 산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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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문학과지성 시인선 276
진은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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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




허기를 견뎠다고는 할 수 없겠으나

빵 봉지는 안이 투명했다구겨진 포장에 빛이 잘 들어왔고 작게 쓰인 글씨가 흔들렸다입가에 묻은 우유속이 빈 것들을 앞에 두고 말이 없었다참이 끝나가는 오후골판지 위에 드러누운 황갈색 작업복은 몸을 하나 둘 일으키기 시작했다. “백주대낮에는하느님이 정하신 일만 일어나므로” 교실에서부분현장은 다시 흙먼지와 날것의 온도로 뒤섞였다. 천안 아산역에는 하루 열 세대의 기차가 지났다.


어떤 구절은 어느 날의 신문기사처럼 간결하게 '그날'이었다현장은 도로가 잘 보였다. “앰뷸런스와 소방차로 거리는 활기차다열차는 수백 명을 태운 채강물로 뛰어들 뻔했다” 그것은 아주 흔한 소리여서 어쩌면 도로의 구성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이 문장으로 시마이 할 때까지 다시 부푼, 빵 봉지만큼의 허기를 대신해 견뎠다고 할 수 없겠으나. 그는 무엇을 알고 있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은 가질 수 있었다. 컨테이너 숙소 이불에 피곤을 뉘이고 무엇을’ 알기 위해 시집을 피곤했다그러나 우리는 책을 덮고 창가로 가서 밖을 바라본다” 로 시작하는 시시가 책을 덮으라고 하는 것인가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며칠 밤을 졸았었나. “하루종일 침묵한 일을 위해우리는 서로에게강철로 된 드롭프스를 넣어준다” '달콤한 사탕'이 아니라, '강철로 된 드롭프스*'라고 쓴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은 그런 날들에 기대 읽기 시작했다.


그 저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니

진은영은 서른 살에 등단했다그리고 3년 후첫 시집을 냈다이 시퍼런 시집을 보면서 벽과 머리의 관계를 생각한다물렁한 살로만 지탱된 생이 없듯이 내게도어떤 굳건함이 있을거라 믿었던 것은 모두 착각인 듯 싶어서시는 너에겐 어떤 방패도 없다는 듯 작정하고 들어왔다가령 이런 물음들. "자 그러니 말해봐 너에게 저녁은 어떻게 오지고요한 저녁의 시부분그 저녁을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잠이 들 수 있겠니찧지 않고서 견딜 수 있겠니그러니 벽과 머리의 관계를 생각하고비로소 머리의 쓸모를 생각한 것이다.



슬픔

물에 불은 나무토막그 위로 또 비가 내린다


자본주의

형형색색의 어둠 혹은

바다 밑으로 뚫린 백만 킬로의 컴컴한 터널

-여길 어떻게 혼자 걸어서 지나가?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부분.


모름지기 시인의 포부란 고작 일곱 개의 단어로 사전을 만들고 고작 몇 마디의 말로 거대한 이름을 설명하려 드는 것세상에 사전만큼 무모한 노력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으면서그러나 어떤 사전보다 깊은 갈래를 냈으니이 두 쪽 짜리 사전에 금방 손을 떼지 못할 것이다. ‘슬픔이라는 말에서 물에 불은 나무토막을 부르는 걸 보자처참함나무는 쓸모를 잊어버리고 물속에서 헤풀헤풀 풀어질 것이다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그것도 모자라 그 위로 ’ 비가 내린다참혹함몇 마디 하지 않았으나 그 몇 마디조차 막아버리고 싶은 구절이다잊지 말아야 할 것은 '슬픔다음으로 오는 단어가 자본주의라는 점인데오늘이 외면하는 '오늘'을 시가 바로 보겠다는 선언 아닌가시가저 나약한 가지가, “손가락을 쓰는 일이 머리를 쓰는 일보다 중요하기 때문긴 손가락의 부분이라며 머리가 아니라 ''으로 온다.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시는 주소가 없다당신의 기억이 그렇듯 장소보다 시간에 기대 살기 때문이다. "그 사람을 보았다는 회상의 흔적은 그의 영혼 속에 있고그의 지적 활동의 발현이 작용한다는 것은 그의 행동에서 알아볼 수 있다."**는 말이 앞을 보태줄 수 있을지.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부분이처럼 있다는 곳에서 살지 못하는 것이 또 하나 있어서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이름 '가족'이다누구나 긴 말 하나씩 품는 단어시인도 한 마디 했다긴 말 할 것 없다는 듯 간단히. “밖에선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집에만 가져가면꽃들이화분이// 다 죽었다” 가족」 전문이렇게 쉬운 비유가 이때까지 어디에 있었나밖에서 빛나는 것이 어째서 한 집에 들어가면 서로를 쏘아보는 날이 되어야 했나이 짧은 시를 쉽게 넘길 수는 없다. 

 

너는그곳에 살지 않는다.

센 언어는 기세가 꺾이지 않고 1,2장 내내 읽는 이에게 처들어 온다가족에서의 충격은 청춘에서 다다르는데, 청춘」은 연작이다아마도 더용서 할 수 없었던 모양인가익지 않아 무서운 말들에 흠씬 두들겨맞는다서른 세살에 나온 시집이므로서른 세살 이후에 쓰인 단어는 이곳에 하나도 없다분명하게 금 그어진 서른 셋 이전의 날들은 독자와쓰는 이를 따라 무섭도록 쪼아댄다.

 


청춘 2


맞아 죽고 싶습니다

푸른 사과 더미에

깔려 죽고 싶습니다


붉은 사과들이 한두 개씩

떨어집니다

가을날의 중심으로


누군가 너무 일찍 나무를 흔들어놓은 것입니다


「청춘 2」 전문.

 

어질한 뒷목을 쓸어 정신을 차리면 다른 시. 이제는 더 정확히 '서른 살'이라고 겨눈다. "단지 무언가의 절반만큼 네가 왔다는 것돌아가든 나아가든 모든 것은 너의 결정에 달렸다는 뜻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서른 살부분서른 살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당신이 생각해야 하는 거고내가 알려 줄 수 있는 말은 다만 이것 뿐이다. "지금부터 저지른 악덕은죽을 때까지 기억난다스무살의 끝에 몰린 이들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하나도 없다. 시인이 말하는 방식이 이렇다이런 일갈이 어디 청춘에게만 한정돼 있으랴뒤를 넘기면 "유신론자는 매일 확인한다어디에나 똑같이 찍힌 신의 엄지손가락 지문을무신론자」부분. 보우하사유약한 나를 또 꾸짖고 뱉고 달린다. 시인은 달려서 마침내 이 세상에 없던 포도송이를 하나를 그리는데. 이 시를 쓰기 위해 시인이『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이 시집에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일 것이다. 처참하게도 무용한 시가 폭력에 부딪힌다. 일어났던 폭력과 그것을 침묵했던 폭력, 모두에게 말이다.

 

 ...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

 네가 흘린 눈물은 다 어디로 갈까

 네가 떨어뜨린 물방울은 다 포도송이가 되었다

 건물들 사이로 솟은 첨탑 꼭대기에

 매달린 포도송이

 누구의 그늘이 될 수 없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입을 축일 수도 없다

 열매가 투명해서 아무도 따먹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쓴다

 너에게 수천 개의 물방울이 모여든 이유를

 

 네가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학살되었다 이곳에서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노동자들이 분신했다 이곳에서

 스무 살이 된 이후로도 다른 스무 살들이 어디론가 끌

려갔다 이곳에서

 빈방의 아이들은 불타 죽고 이곳에서

 철거촌 사람들은 깡패에게 맞아 죽고 이곳에서

 라고 나는 쓴다 이곳은 조용하다

 라고 쓰고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

 라고 쓴다 보랏빛 젖은 안개로 쓴다

  

 네 투명한 포도알 위에

 스무 살 메마른 입술 위에

 

첨탑 끝에 매달린 포도송이부분.


''는 누구인가너는 스무 해 첨탑 꼭대기 매달린 포도송이이고포도송이가 떨어뜨린 물방울이다스무 살 메마른 입술을 가진이다그래서 너는 스무 해 동안 일어났던 이 땅을 모두 알고 있거나전혀 알지 못한채로 그 땅을 걷는이다너는 누구인가그러나 너는 누구인지가 중요한가중요한 것은 시인이 이곳에서 일어난 일을 잊지 않겠다며 투명할 포도알과스무 살 메마른 입술 위에 이 일들을 '쓰는 행위'나는 포도를 알고 있다포도는 작고물이 많고입에 쏙 들어간다그러나 이것은 열매가 투명하다포도라고 할 수 있을까까맣게 가지에 차 오르는 풍성한 부풀음이 아닌 것을 말이다열매가 투명한 포도는 원래 알알이 있다고 믿어졌던 것이나 점차 흐려졌다. 학살과 노동자들의 분신과 다른 스무 살이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보지 못하면서, 그 모든 일이 있었던 이곳을 조용하게 만들면서. 이 투명한 포도는 언제 과육과 검은 껍질을 갖게 될 것인스무 살이 되어 그곳을 걷는 '그'가 마침내 한 개의 '몸'을 채워가고 있을것인가절망에 몰린 희망을 시인은 "보랏빛 젖은 안개로"쓴다. 그것 참 지워지기 쉬워라처음으로 돌아가시는 책을 덮으라고 했다. "교실 밖에서"일어나는 삶을 보라고 했다. 배움에 뜻이 있다면 "하루종일 침묵"하느라 "메마른 입술"에 "보랏빛 안개"로 이곳의 일을 말하는 것이다보랏빛 안개가 내 입술 위에도 내렸을 일을 생각한다. 조용히, 입을 벌려 따라 읽는다.***

 

 

 

 *사탕

**프란시스 위스타슈, 이효숙, 『우리의 기억은 왜 그토록 불안정할까』, 알마. 26p

원문 : "그 사람을 보았다는 회사의 흔적이 그의 영혼 속에 있고, 그의 지적 활동의 발현에 이런저런 방식으로 작용한다는 것을 그의 행동방식 속에서 알아볼 수 있다."


***따라 읽는 글 

진은영,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계간 문학동네 2014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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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 시인선 393
유희경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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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를 잃어버린 장소-非공간의 발견_유희경, 『오늘 아침 단어』, 문학과지성사.



<오늘 아침 단어>는 '오늘 아침'에 이후에 놓일 관습적인 말을 총합한다. 이를테면 식사나, 기분이나 날씨 등으로 자연스러울 '오늘 아침 ○'을 '단어'라는 말로 축약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것으로 오늘-아침은 스스로 갖는 지루한 리듬을 벗어나 '오늘 아침'에서 달아난다


아침은아침이 오지 않을 때까지 일어나서 손쉽게 일상이라고 불리지만. '일상'에 순식간에 잡아 먹히기 때문에 흔적을 거의 남기지 않는다아침은 조용하고 유순한가. 아니, 아침은 당신이 당신을 벗어나기 시작하는 기록적인 시간 아닌가가장 가까운 어느 곳에라도 가려 할 때당신은 반드시 당신을 벗어나 그곳에 도착하기 때문이다집 앞의 슈퍼만 가려해도 그렇다주섬주섬 어질러진 옷을 입으면 당신은 '그 옷을 입은사람이 된다그래서 옷을 갖춘다는 '의례'는 그 뜻만이 전부가 아니다.


당신의 목이 '티셔츠'를 통과하는 것은 그래서 '의례(儀禮)'라고 해야 한다그것을 통해 당신은 이상한 공간과 마주하기 때문이다시인 역시 웃옷을 갈아입으며 이런 시를 썼을 것이다.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이 안은 비좁고 나는 당신을 모른다/ 식탁 위에 고지서가 몇 장 놓여 있다. 어머니는 자신의 뒷모습을 설거지하고. 벽 한쪽에는 내가 장식되어 있다(...) 나는 나로부터 날카롭다 서너 토막 나는/ 이런 것을 너덜거린다고 말할 수 있을까"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부분. 그곳은 아직 당신의 바깥이 아니고 당신의 안이라고도 할 수 없는 이상한 공간이다그곳에서 바깥은 불투명하고 그렇다고 나를 알기에는 표면에만 머물 뿐이어서 무엇에도 정확히 속하지 않는다누구에게나 이런 공간이 있으나 어떤 고민도 없이 지나쳤기 때문에 비공간으로 존재해왔다. 이곳은 무엇보다 이름이 없어서 불리지 않았고 겨우 발견했으나 '시간'으로 치우쳐 기록될 뿐이었다.

 

오래 전 세일러문은 정의의 이름으로 ''를 용서하지 않기 위해 변신했었다옷과 머리카락과 마술봉화려한 영상과 음악으로 변신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어떤 악당도 세일러문이 옷을 갈아입을 때 공격하지 않는다마찬가지로 악당의 변신 역시 세일러문은 두고 볼 뿐이었다돌아와 생각하건데 '의례'에 대한 '윤리'였기 때문이리라문 파워 액션만화속의 일만이 아니다당신이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바깥은 당신을 기다려준다당신은 아직 나오려는 채비중일 것이고그 채비는 곧 끝날 것이며 당신은 티셔츠에 따라 다른 모습을 할 것이다누구나 티셔츠에 머리를 드미는 순간을 지난다시인은 이 의례의 순간에서 '이름이 없어 없었던 장소'를 발견하고 가능한 오래 머물고 싶다시인은 그곳에서 "가슴 바깥으로 걸린 간판을 읽으며 못이 녹슨 머리를 박는 소리"를 듣는다.


시인은 이제 둘 '사이'에서도 비공간을 발견한다. "둘이서 마주 않아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말없이 서로의 눈썹을 향하여 손가락을이마를흐트러져 뚜렷해지지 않는 그림자를나란히 놓아둔 채 흐르는//우리는 빗방울만큼 떨어져 있다" 「내일, 내일」, 부분. 여기서 문제는 두 사람이 잘못 배달된 도시락을 마주해서가 아니라스스로를 잘못 배달된 도시락처럼 생각하는 것에 있다제 스스로(도시락의 내용)는 문제가 없으되우리가 함께 있는(도착한장소가 잘못된 것이라는 고백이다누가 우리를 이곳에 데려왔는가대답이 된다면 슬프겠지만 나는 사랑하고 당신은 말이 없다라는 마지막 행을 답지로 밀어 넣는다안온한 공간이 불시착한 난감으로 바뀌는 순간. '없었던 공간'이 우리를 쳐들어온 사건이다시인은 이곳을 벗어나거나 뒤집으려고 하지 않는다. "생전의 감정 이런 일은 헐거운 장갑 같아서라며 다만 이곳에서 가능한 이야기를 읽어낼 뿐이다.

 

다시 '물건'에 집중해 조금 더 분명하게 비공간의 부조를 떠내고자 한다. “우산에 대해서라면 오래오래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검은빛이고 나는 펼쳐진 시간을 사랑한다// 예를 들어 점점 어두워져가는 거리어깨를 감춘 사람들이 집으로 돌아갈 때가로등 켜지고그림자 사라지고나는 머뭇거릴 때.” 「우산의 과정」, 부분. 시인은 우산이라는 물질이 마침내 우산으로써 활약하는 과정을 쓴다그리곤 마지막에 "우산을 함께 쓰고 가는 행위에 대해 우리는 깊이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우산이라는 검은 빛으로 펼쳐진 시간에는 빗속에 생긴 '새로운 공간'도 있다비가 아니라면 사라질 공간에서 어깨를 가까이 하며 걸었던 날을 깊게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우리는 우산 아래의 움직임을 '시간'으로 말하지 '장소'라고 하지 않는다. <오늘 아침 단어>의 공간은 이름이 없기 때문에 불리지 않으며 장소임엔 분명하지만 장소로써 역할하지 못하고 어떤 ''로 표기되고 마는 이상한 곳이다. ‘이 없되 시간만 있는 장소를 가 본적 있는가아무래도 갈 수 없는 곳이다우리가 기억이나 혹은 추억이라고 부르는 곳에 도착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시간이 없는 장소는 다른 방법으로 반복된다이 반복 속에서 시가 속수무책인 까닭은 하나 이기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그것들 앞에서 웃거나 강해지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시 「맑은 날」에서는 지금과 다른 뜻밖의 장소를 만난다술을 진탕 먹은 는 짬뽕이란 단어는 어떻게 발음해도 슬퍼지지 않는다며 몰아치는 행간을 지난다그리고는 문득 내게 없는아내가 식탁에 앉아 펑펑 쏟는 눈물앞에 도착하고 그 앞에서 재떨이를 끌어당겨 담배를 물고아내를 지켜보는 단답형 남편이된 것 같다고 말한다무엇보다 솔직하게 그런 게 어떤 기분인지 알 길 없는 것도 당연하다고 고백하면서, ‘내게 없는 아내’ 앞에 있고자 하는 마음을 쓴다내게 없는 아내는 아마도 미래에서 만날 아내 같다그 아내를 생각하는 사이’ 자신이 앉은 식탁은 비현실적인 장소가 된다그곳에서 도저히 착해지지 않는 마음을 뒤져보아도도무지 길들여지지 않는 글자만 가득할 뿐이라는 자신을, 미리 틀키고 싶은 협소를 쓴다뜻 없는 독백을 당신은 듣고 있는가우리가 아직 만나지 못한 공간에서 '나'는 당신을 상상하고 있다.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 거기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모르는 건 남편과 아내뿐이었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

작했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면목동」, 부분.

 

마지막 시의 마지막 연, 아내는 술을 마시고 울고남편을 이유를 모르고 부축하는 상황이 전술되었고 그때 그게 전부 나였다라는 진술이 이어진다. “마음에 피가 돌기 시작했다는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되었다라는 간명함아마도 가 의 탄생을 기억하는 일일 것같다이 이야기 푸는 일을 다음 구절로 대신하면 어떨까.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각각의 '현실속에는 근원과 리듬이 서로 다른 움직임들이 뒤섞여 있습니다즉 오늘이라는 시간은 어제 시작된 것이기도 하고그저께 시작된 것이기도 하며까마득한 옛날에 시작된 것이기도 합니다.”* 


오늘이라는 시간에 도착하기 위해 까마득한 옛날. '나'의 탄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이 마지막 시는 마침내 시의 제일 앞 <오늘 아침 단어>를 상기한다나의 한 겹 한 겹이 시간과 장소를 함께 포개며 지나왔고 그 사이 탈락 돼버린 시간과 장소가 등 뒤에 헝클어져 있다. 장소를 잃어버린 장소, 비공간의 발견. 시간으로만 기억되는 그곳을 시인은 찾아 보통의 곳에선 소리 낼 수 없던 마음을 낸다세상에 시를 만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장소가 있다면 이름이 없는 이런 '곳'들이 아닐까당신의 마음이 머물기를 고집 피우는 곳은 어떤 장소를 잃어버렸나. 그저 그때라고 밖에 부를 수 없는 그곳은 어디에 있는가. 그곳으로 걸음이 기울었지만 한 번 가까워본 적 없다. 는 고백을 나도 함께 쏟는다. 작은 카페. 엎질러진 커피향이 소란스런 테이블을 바라본다. 한 때 당신의 얼굴이 가만가만 비쳤었던 빈 잔과 내가 함께 말이 없는 오후다.  



*페르낭 브로델김홍식물질문명과 자본주의 읽기,해제中, 갈라파고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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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생각하는발 2014-08-09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티셔츠에 목을 넣을 때 생각한다' 라는 시는 봄밤 님이 소개했기에 읽은 기억이 나네요. 봄밤 님 알라딘 하기 전에 네이버 블로그 할 때 소개하지 않았나요 ? ( 다른 사람이 소개한 글 읽었나 ?! ㅎㅎㅎ ) 됐고 !! 봄밤의 시 읽기는 그냥 그렇고 그런 평론가가 시집 뒤에 쓴 영혼없는 평론보다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짜증나서 저는 언제부터인가 시집 뒤에 평론을 안 읽는데 이 정도 수준이라면 앞으로 읽어봐야겠습니다.

봄밤 2014-08-09 23:36   좋아요 0 | URL
맞습니다! 그랬던것 같아요. ㅎㅎ티셔츠 좋아해서 블로그에 올렸던 것 같습니다. 기억하시다니! 소개라고 해도 그냥 시를 올린 것뿐 아니었나 곰곰합니다.

무심히 지나는 그런 공간을 이렇게 생각하다니. 깜짝 놀랐어요. 전반적으로 촌스러운 시도 많지만 촌스러움이 좋습니다. (다음 시집이 기대됩니다)

그리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저 제가 이해하는 시 읽기를 하는 것뿐이라 평론(!)과는 당연히 비할바도 못되고 층위도 다릅니다. 저는 곰발님과 다르게(!) 평론을 잘 읽지 못합니다. 어려운 말이 많아서요! 그저 시를 많이 읽고 이런 이해도 있구나 하고 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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