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까지 참고 있던 여학생들이 그만 까르르르하고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으니까요. 놀라기도 했거니와 창피하기도 했습니다. 게다가 도중에 할 기분마저 잡쳐버렸으니 아무래도 계속할 수 없어 급기야 그걸로 모임을 끝내고 말았습니다."
첫 모임치고는 성공이라던 낭송회가 그 정도였다면 실패한 경우에는 과연 어땠을지 상상하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목구멍에서 까르르 소리가 났다.
주인은 더욱 부드러운 손길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남을 비웃어 귀여움을 받는 건 고마운 일이기는 하지만 기분이 좀 나쁘기도 했다. P76
주인은 툇마루에 흰 담요를 깔고 엎드려서 화사한 봄볕에 등짝을 말리고 있었다. 태양 광선은 의외로 공평한 것이어서 지붕에 풀이 난황폐한 집이라도 가네다 씨의 객실만큼 환하고 따뜻해 보인다. 그러나 가엾게도 담요만은 봄날답지 않다. 제조공장에서는 흰 것이라 생각하고 짰고, 양품점에서도 흰 것이라 생각하고 팔았을 뿐 아니라 주인 역시 흰 것을 주문해 사왔을 것이다. 그러나 열두세 해 전의 일이라 흰색의 시대는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짙은 회색으로 변색하는 시기를 맞고 있다. 이 시기를 지나 암흑색으로 변할 때까지 담요의 생명이 유지될지 어떨지 심히 의심스러울 따름이다.

지금도 여기저기 닳고 닳아 씨줄 날줄의 실오라기가 뚜렷이 드러날 정도이니 이제 담요‘라 부르는 것도 분에 넘치는 일이다. 오히려 ‘담은 생략하고 그저 ‘요‘라고 하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하지만 주인은 1년을 쓰고 2년을 쓰고 5년을 쓰고 10년을 썼으니 평생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만사태평이다.p197

"불평도 괜찮네. 불평이 생겨 털어놓고 나면 그래도 당분간은 기분이 좋아지니까. 사람은 다 다른 법이라서 그렇게 자기처럼 되라고 해봤자 될 수 있는 게 아니지. 젓가락은 다른 사람처럼 쥐지 않으면 밥먹기가 힘들지만, 빵은 자기 마음대로 자르는 것이 가장 좋은 것 같네. 실력 있는 양복점에서 옷을 맞추면 처음 입을 때부터 몸에 맞는 것을 갖고 오는데, 솜씨 없는 양복점에서 맞추면 한동안 참지 않으면 안 되네. 하지만 세상은 참 교묘해서 입고 있는 사이에 양복이 내 골격에 맞춰주니까 말이야. 훌륭한 부모가 지금 세상에 맞도록 솜씨 좋게 낳아주면 그게 행복이지만, 그렇게 안 되면 세상에 맞지 않은 채 참든가 아니면 세상이 맞춰줄 때까지 견디는 것 말고는 다른 길이 없겠지." p415
- 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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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0
헤르만 헤세 지음, 황승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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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 헤르만 헤세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다는 것을 알지만 실제로 그 명제가 나의 이야기가 되어 내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들을 나는 어떻게 보내게 될까? 끝을 안다는 것에서 또 그것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에서 뭔가모를 쓸쓸함이 느껴졌다.

클링조어가 죽음을 맞이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에게 일생이란 무엇일까?  또 무엇을 남기게 될까? 그것이 무엇이 됐든  내 것은 아름다웠으면 하는 바램이다.

새파랑님의 극찬에 읽고싶은 목록에 언른 주워담았고 동네 도서관서 빌려읽은 이 책은 무엇보다 문체가 너무 좋아 홀짝홀짝 포도주를 맛보듯 한구절 한구절 음미하며 읽었다. 덕분에 맛있게 잘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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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2-10 23: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포도주 맛보듯! 정말 아 책에 아울리는 표현같아요 ~ 새파랑님 책 추천 좋지요 *^^* 즐거운 밤 보내세요 ~

키라키라 2021-12-10 23:31   좋아요 3 | URL
네~ 읽다보니 어느순간 ‘어찌 이리 표현할 수 있을까‘ 하며 읽는 눈걸음이 나도모르게 느려지더라구요 ㅋ 새파랑님 포함 친구님들 덕분에 좋은 책 많이 알아가고 있습니다 ^^ 미니님도 즐거운 주말밤 되세요~~^-^

새파랑 2021-12-10 23: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키라키라님 리뷰에 제 닉네임이 언급되다니 영광입니다 ^^ 맛있게 잘 읽으셨다니 제가 더 뿌듯하네요~!!
저도 이책 읽으면서 문장이 정말 좋은데 왠지 쓸쓸하다고 느꼈거든요 ㅜㅜ 갑자기 이 책을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

키라키라 2021-12-10 23:38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의 인생책 덕분에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 책이 주는 즐거움의 모습이 참 다양하다 느끼는 요즘입니다 ^^
 

인생은 짧고, 저세상에 갔을 때 책을 몇 권이나 읽고 왔느냐고 묻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니 무가치한 독서로 시간을 허비한다면 미련하고 안타까운 일 아니겠는가?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것은 책의수준이 아니라 독서의 질이다. 삶의 한 걸음 한 호흡마다 그러하듯,
우리는 독서에서 무언가 기대하는 바가 있어야 마땅하다. 그리고 더풍성한 힘을 얻고자 온 힘을 기울이고 의식적으로 자신을 재발견하기 위해 스스로를 버리고 몰두할 줄 알아야 한다. 한 권 한 권 책을읽어나가면서 기쁨이나 위로 혹은 마음의 평안이나 힘을 얻지 못한다면, 문학사를 줄줄 꿰고 있다 한들 무슨 소용인가? 아무 생각 없이산만한 정신으로 책을 읽는 건 눈을 감은 채 아름다운 풍경 속을 거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P11

장자와 열자, 맹자 등을 읽어보면 중국의 이들 대스승들과 현인들은 웅변가들과는 정반대여서, 놀랍도록 소박하며 서민과 일상에 밀착해 있었다. 허영이라곤 전혀 없이 은둔과 자족의 삶을 택해 살았으며, 이들이 스스로를 표현한 방식은 보면 볼수록 무릎을 치며 감탄하게 된다. 노자의 반대편에 있는 공자는 체제주의자이며 도덕주의자, 법치주의자요 관습의 수호자로서 고대 현인들 중 그나마 유일하게 무게를 잡는 인물인데, 그의 면모는 예컨대 간혹 이런 식으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소용없을 줄을 알고도 굳이 행하는 그런 이가 아닌가?"
이만한 평정과 유머와 간결함을 나는 다른 어떤 문학에서도 찾지 못하겠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살펴보노라면, 그리고 세상을 단 몇 년 몇십 년 안에 평정하여 바로잡겠다는 사람들의 웅변을 들을 때면 나는 가끔 이 구절 등을 생각하게 된다. 그들은 위인 공자와 마찬가지로 행하되, 그들의 행위 이면에는 ‘그것이 소용없을 줄을‘ 아는 지식이 결여되어 있다. P47
- P47

올바른 독자들에게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타인의 존재와사고방식을 접해 그것을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그를 친구로 삼는 것을 뜻한다. 특히나 문학작품을 읽노라면 비단 몇몇 인물과 사건들만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작가의 방식과 기질, 내면의 풍경, 나아가 작풍이나 예술적 기법, 사고와 언어의 리듬까지 접하게 된다. 한 권의 책에 사로잡힐 때, 작가를 알고 이해하기시작해 그와 모종의 관계를 맺을 때, 비로소 그 책은 진정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사람이라면 책을 내던지고 잊어버리는 대신간직하고자 한다. 즉 필요할 때마다 독서와 경험을 거듭할 수 있도록 값을 치르고 산다. 그렇게 책을 사는 사람, 그 느낌과 정신에 마음이 움직여 책을 구입하는 사람이라면, 무분별하게 이것저것 읽어내기보다는 자기 마음에 와 닿는 책들, 깨달음과 기쁨을 안겨주는 작품들을 가려 찬찬히 모을 것이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손에 집히는대로 아무거나 마구잡이로 읽어대는 독자보다 더없이 귀하다.p108 - P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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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피를 입은 비너스 / 레오폴트 폰 자허마조흐

마조히즘, 사디즘이란 단어 뜻을 찾아보았다.
변태적인 성적쾌락이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이런 뒤틀린 쾌락도 누군가에겐 쾌락이겠구나 싶다.
제베린의 기괴한 계약서 한 장이  반나의 상상력과 더해져 내면에 숨어있는 인간의 잔인성을 끌어내게되고 자기앞에 피흘리며 고통당하는 남자모습을 보며 악마같은 쾌감의 절정도 맛본다.
비너스라는 완벽에 가까운 여성의 의미에 쾌락적 유혹의 ‘모피‘라는 옷을 덧입고 반나는 데릴라같은 쾌락과 잔인함의 캐릭터로 변신했다.
홈쇼핑에 종종 판매되는 모피가 누군가에겐 추위를 막는 옷일 뿐이지만 또 누군가에겐 야릇하고 지나치게 위험한 물건일 수 있다는걸 알았다.

나는 조숙했으며 극히 민감했어요. 열 살 나던 해에 나는 순교자들의 전설을 다룬 책을 손에 넣게 되었지요. 지금기억으로 당시 나는 그 순교자들이 지하 감옥에 갇혀 고통스러워하고, 석쇠에 눕혀진 채로 불에 태워지고, 화살에 맞아 몸이 벌집이 되고, 끓는 역청 속에서 삶아지고, 맹수들에게 던져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두려움과 함께 실제로는 황홀감을 느끼며 읽었어요. 그들은 가장 끔찍한 고통을 마치 무슨 즐거운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치러냈지요. 그 뒤로 수난이나 끔찍한 고통을 견디어 내는 것이 내게는 하나의 쾌감으로여겨졌습니다. 특히 아름다운 여자에 의해 고통을 받을 때 말입니다. 내가 아는 한 모든 시적인 것과 모든 악마적인 것은한 여성 안에 다 들어 있으니까요. 그래서 나는 여성을 정식으로 숭배하기로 했습니다. P63


- P63

디오니시우스의 황소 이야기에 대해 들어본 적 있나요?" 그녀가 물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군요. 그런데 그게 어쨌다는 거죠?""아첨 잘하는 한 신하가 그 시라쿠스의 폭군을 위해 새로운 고문 기구를 고안해냈어요. 말하자면 쇠로 만든 황소인데, 그 안에다 사형선고를 받은 사람을 집어넣고 활활 불을 지피는 거지요. 쇠로 된 황소가 달구어지기 시작하고 그 안의 사형수가 고통을 못 이겨 절규하면 그 사람의 목소리가 꼭 황소가 울부짖는 소리처럼 들린다는 거예요.
디오니시우스는 그 장치를 고안해낸 사내를 향해 미소를 짓더니 당장 그 자리에서 그 도구를 시험해 보기 위해 그 사내를 가장 먼저 쇠로 만든 황소 안에 집어넣으라고 명했어요. 이 이야기는 참으로 교훈적이죠.

내게 이기심, 당돌함, 잔인함 같은 속성을 주입해준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어요. 그러니 당신이 마땅히 그 첫 희생자가 되어야 해요. 나는 사실 지금 쾌감을 느끼고 있어요. 나와 다름없이 생각도 하고 느낄 줄도 알고 욕망도 있는 사람을, 아니 정신과 육체 면에서는 오히려 나보다 강한 사람을 내 손아귀에 쥐고 학대할 수 있다니 말이에요. 특히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말이에요.p194
- P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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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2-03 07: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읽고나서 뭐야 이책~ 이랬는데 왠지 여운이 남더라구요 ㅋ 마조히즘을 통해 사랑의 극단성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었어요 ^^

키라키라 2021-12-03 07: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새파랑님과 같은 반응이었어요 ㅋ 요런종류의 사랑도 있구나 했지만 뭔가 찜찜.. 결론은 이런 사랑은 내타입 아닌걸로~^^ㅋ
 

그래서 세상은 다양성보다 보편성이 중요하게 돌아갔습니다. 신문, 방송 같은 대중매체는 사람들을 유사한 생각과 유사한 생활 방식으로 살도록 유도하는 데 강력한 역할을 담당해왔습니다. 그래서 거대한 사회 시스템이 권력이 되어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형태로 발전해왔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권력이 소비자로 이동하면서 억눌려 있던 다양성은 하나의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되었고, 여기에 부족 본능이 더해져 작은 세력이 강력한 글로벌 팬덤으로까지 확산되는 새로운 생태계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디지털 플랫폼이 인류의 본성까지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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