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장의 용도
함윤이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전 문학동네소설상을 수상하셨던 함윤이작가님의 첫 소설집 「자개장의 용도」를 읽었습니다.

(자개장의 용도)
할머니에서 어머니로 대대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었던 자개장이 마음만 먹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신비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 멀리있는 부모님의 집에서 서울의 대학교 기숙사로 자개장의 문을 열고 한발 짝 내딛으면 바로 갈 수 있고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놀이공원과 클럽을 갈 때도 기다리지 않고 아주 편리하게 갈 수 있고 심지어 저 머나먼 타클라마칸 사막까지도 돈 한푼들이지 않고 바로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지 생각만 해도 흥분이 되고 나만 알고 싶고 사용하고 싶기에 아무리 사랑하는 정우에게도 자개장에 대해 알려줄 수 없었던 심정이 이해가 가더군요.

(구유로 舊遊路)
최근 절찬리에 방영되고 있는 드라마에 나오는 아이돌 그룹처럼 자신들만의 앨범을 가지고 데뷔하기 위해 불러만 주면 바로 행사장 무대 위에서 행사를 보러 온 사람들의 끈적한 손길과 눈길을 그저 견디며 춤과 노래를 선보이던 걸그룹에서 이탈하여 숙소였던 구유로 적산가옥을 떠났던 보배가 개기일식을 보기 위해 정확하게는 개기일식이 시작되는 시간에 공연을 하는 사라, 위리, 공희의 모습을 보기 위해 오직 사랑하는 이를 낫게 하려고 독일 뮌헨에서 프랑스 파리로 국경을 넘어 걸어서 갔다는 소설 속 남자처럼 8시간동안 걸어서 가는 모습이 인상깊었습니다.

(강가/Ganga)
외국인 노동자인 쿠쿠와 자자가 왔다던 나라로 남자를 사기 위해 여행을 온 인물이 스무 살 남짓한 여드름이 아직 가시지 않은 소년을 물 속에서 구하게 되며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았지만 ‘당신은 내 생명의 은인‘이라고 말하던 소년의 모습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저도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가게 된다면 ‘강가/Ganga‘라는 이름으로 살아볼 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수호자)
시체놀이를 하다가 목이 졸려 죽을 위기에 처하던 선우를 구해주던 무조가 선우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겨 더이상 자신을 더이상 지켜주지 못할 것같다는 얘기를 꺼낼 때 왜 이렇게 가슴이 아픈 건지...... 폭설이 내리고 한파로 꽁꽁 얼어붙은 눈 속에 혼자 우두커니 서있는 기분이었습니다.

(규칙의 세계)
셰어하우스에서 외국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에게 필요한 것들을 구해주고 알려주던 완희가 사미산(蛇尾山)에 버섯을 캐러가고 사랑하는 사람의 가족이 낫기를 빌어주기 위해 돌탑을 쌓으러 가는 외국인들을 찾으러 가며 스멀스멀 기어다니는 뱀떼를 만나 비명을 지르고 그와중에 혼이 깃든 거울을 깨뜨리지 못하며 다시 함께 살아가는 이들의 앞날에 행복이 가득하길 빌어주고 싶습니다.

(나쁜 물)
공사하다 흐지부지되어 폐허가 된 곳에 누군가에 의해 결박되어있던 남자를 발견해 풀어준 것밖에 없었고 그 남자에 대해 알지 못했는 데 몸에 ‘나쁜 물‘이 들어있어 자라면서도 그 남자와 이름이 같은 재복과 결혼하고 이혼하면서도 끊임없이 ‘나쁜 물‘로 가득차있고 아무도 없는 빈 집에서 여러 명의 웃음과 울음, 노랫소리가 들려온다는 집주인의 민원을 받은 인물이 자신의 집 앞의 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같은 소리와 같은 이 소설의 시작에 있던 QR코드를 스캔하여 들은 (나쁜 물)을 읽고 만드신 조율(joyul)님의 13분 21초짜리 기이한 음악을 퇴근하면서 들었는 데 여러분들도 꼭 한 번 들어보셨으면 합니다.

(천사들(가제))
자신들이 만들 영화의 캐스팅 오디션을 남자, 여자, 천사 배역 이렇게 3명 뽑는 데 한 조로 묶어서 각자 맡은 역할에 몰입하여 연기를 하는 것을 각본을 쓴 항아와 함께 지켜보는 꿈을 부산가는 무궁화호 열차에서 꾸는 인물이 부산역에 도착하여 가는 곳에 뜻밖의 장소라는 것에 놀라우면서도 무너져가는 항아를 포함한 자신과 인연이 있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무대에서 연기하는 꿈 속에서 깨고 싶지 않아하는 모습에 마음이 찡했습니다.

소설집 전반에 느껴지는 오라가 너무 깊숙하게 제 머리속에 박히게 만들었던 「자개장의 용도」에 이어 내년 상반기에 문학동네에서 출간될 작가님의 장편소설 「정전(출간 시 제목이 변경될 수도 있음.)」또한 빨리 만나봤으면 좋겠습니다.
함윤이작가님, 좋은 글을 읽게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카스피 2025-12-23 22: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자개장이 뮌지 모르는 MZ세대가 대다수일 것 같습니다.

물고구마 2025-12-24 03:55   좋아요 0 | URL
그렇죠. 요즘 집(고향집이나 가족이 함께 사는 경우)에 자개장이 있는 곳은 많지 않아 자개장을 접해보지도 못하니 자개장에 대해 잘 모를 수도 있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