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물결 (천줄읽기) 지만지 천줄읽기
이반 투르게네프 지음, 라승도 옮김 /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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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물결-투르게네프

 

 

1.

투르게네프의 손은 현실을 훑는다. 그가 현실을 훑자 현실은 물처럼 그의 몸에 

스며든다. 그는 어느순간 물같은 현실의 흐름을 견디지 못하고 자기 몸에 스며 

든 현실을 원고지에다 글로서 써내려가기 시작한다. 원고지에 스며든 그만의  

현실은 하나의 작품이 되어 독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가 그의 작품을  

펴는 순간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던 투르게네프만의 현실은 다시 우리의 몸으로

흘러들어온다. 그리고 어느 순간 우리 몸에 고인 투르게네프의 현실은 우리의 

현실이 되어버린다. 우리가 투르게네프의 작품을 읽는다는 건 이렇게 투르게 

네프식 물의 흐름에 우리가 동참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즐거운 세월 

행복한 나날이 

봄 물결처럼 

흘러가 버렸다.'(19) 

 

<봄 물결>은 투르게네프가 흘려낸 '봄 물결'이 고인 소설이다. 아름답게 화사 

하게 다가와서는 화려하게 꽃 피우고 사라져셔는 봄 뒤의 계절을 기다리게  

만드는 '봄 물결'은, 소설 속의 인물들을 뒤흔든다. 소설의 주인공인 사닌은 

자신에게 찾아온 봄 물결을 견뎌내지 못하고 젬마와 사랑에 빠져든다. 거역할 

수 없는 운명처럼 사닌을 몰아대는 '봄 물결'의 흐름 속에서, 사닌은 그 사랑의 

마법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여 흐름 속에 자신의 몸을 던진다. 

 

'고독하고 쓸쓸한 삶의 우울한 강둑에서 그는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으로 곤두박 

질치듯 뛰어들었다. ...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거센 물결이었다. 그것은 날아가듯 

앞으로 돌진한다. 그리고 이와 함께 그는 날아간다.'(104) 

 

사닌은 '봄 물결'을 열심히 헤쳐가다가 다시 다른 물결을 만난다. 그는 그 물결이 

또 다른 '봄 물결'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 물결은 그가 아는 '봄 물 

결'이 아니었다. 그 물결은 사닌의 몸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들고, 그가 이룩한 

'봄 물결'의 행복을 파괴하는 어둡고 강한 물의 흐름이었다. 그는 폴로조바라는 

어두운 여인의 물결을 헤매다 자신의 인생을 망쳐 버린다. 

 

'뱀이다! 아, 이 여자는 뱀이다! ... 그러나 정말 아름다운 뱀이다!'(157) 

 

몸과 마음 모두 상처받은 사닌은 간신히 어둡고 강한 물결에서 헤쳐나와 러시아 

로 돌아간다. 거기에서 그는 생명력 없는 조용하고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 30년 

의 시간이 지나고 그는 다시 과거의 '봄 물결'이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을 우연히 

깨닫는다. 참을 수 없는 사랑의 물결 앞에서 다시 젊은이가 된 사닌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다시한번 그 사랑의 물결에 몸을 맡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의 플로 

렌티노가 51년 9개월 4일을 기다리고 다시 사랑을 되찾은 것처럼. <세렌디피티> 

의 조나단과 사라가 7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콜레라 시대의 사랑>라는 책에 맡겨 

둔 자신들의 사랑의 인연을 다시 이어가는 것처럼.

 

 

 

 

2. 

 

 

<노자>를 보면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라는 말이 나온다. 하지만 <봄 물결>

에서 물은 최고의 선이 아니라 감당할 수 없는 삶의 흐름이자, 헤어나올 수 없는

사랑의 흐름이다. 낭만적 사랑의 소용돌이이자 운명의 압력으로서의 물의 흐름

을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문장으로 그려낸 투르게네프는, 아주 심플하고 간단한

구조 속에 그것을 구현하며 독자를 낭만적 사랑이라는 물의 흐름으로 이끈다.

 

 

자신이 살아가는 동시대 러시아 사회와 러시아인들의 삶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그려 

내던 투르게네프는 <봄 물결>에서 부드럽게 흘러내린 낭만의 물로 소설을 쓴 것처럼 

글 곳곳에 물의 웅덩이를 만들어서 독자들을 빠져들게 만든다. 필연적으로 독자들은  

물 웅덩이에서 헤맬 수밖에 없고, 헤매다 보면 어느새 젖어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그들은 깨닫는다. 우리가 잃어버린 19세기의 낭만이 우리 자신을 찾아왔다는 사실 

을. 

 

 

 

19세기의 낭만에 젖어 있다 보면 우리는 또다른 깨달음에 도달한다. 19세기의 낭만이 

19세기만의 낭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갈망하던 우리 내면에서 솟아나는 우리의 갈 

망과 같다는 사실을. 그 순간 우리는 19세기의 낭만을 우리 자신의 낭만으로 받아들이 

게 된다. 백 년이 넘는 시간을 건너뛰어 투르게네프가 전해주는 이 보편적이고 오래된 

진실 앞에서, 나는 그저 잃어버린 시간을 찾은 것처럼 좋아서 웃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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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프랑스식 서재 - 김남주 번역 에세이
김남주 지음 / 이봄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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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프랑스식 서재-김남주

번역가는 두 세계의 교차로에 서 있다. 하나는 자신이 지금까지 쭉 살아왔고 경험했고 앞으로도 살면서 경험해야 하는 세계이고, 또 하나는 살아온 세계와는 다른 낯선 세계이다. 이 두 세계의 교차로에 서서 번역가는 두 세계의 마주침과 뒤섞임과 혼합을 온전히 겪어내며 그 결과물로서 두 세계가 섞인 번역물을 완성하게 된다. 그때의 번역물은 오로지 한 세계에서만 살았을 경우 가지게 되는 익숙함이라는 틀을 깨버린 결과이자, 익숙함을 희생하고 불안과 혼란스러움과의 투쟁 끝에 태어난 번역가의 창조물이다.

 

하지만 이 창조물은 안타깝게도 완벽할 수 없다. 한 세계를 다른 세계로 완벽히 변화시키는 것이 불가능한 것처럼, 한 세계를 품고 있는 언어를 다른 세계의 언어로 변화시키는 것 또한 그와 유사하기 때문이다. 번역가는 ‘완벽한 변화’라는 불가능한 꿈을 좇으며 꾸준히 실패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실패라는 운명을 안고갈 수밖에 없는 번역가의 삶이란 지속적인 실패로 점철되어 있다. 

 

여기서 섣불리 번역가의 실패를 인생의 실패와 연결하지 말자. 오히려 번역가의 실패가 ‘번역’이라는 영역에서 언제나 벌어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그들에게 실패란 삶의 다른 이름이자 ‘완벽한 번역’이라는 꿈을 향한 사투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실패는 낯선 문화적 산물을 번역가의 문화권에 편입시킴으로서, 번역가의 문화권을 더욱 풍요롭게 충만하게 만들고, 번역가의 문화권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낯선 문화라는 선물을 주면서 그들 또한 풍요롭고 충만하게 만든다. 이 풍요로움과 충만함 속에서 번역가의 실패는 ‘문화적 성공’으로 변화한다. 번역가의 삶은 문화적 성공을 향햐여 나아가는 실패의 연속이라고 할 수 있다. 번역가는 결국 성공하기 위해 실패하는 존재들이다. 아니 실패를 통해서 성공하는 존재들이다. 그들에게 실패는 성공의 다른 이름이다. 

 

<나의 프랑스식 서재>는 꾸준히 성공을 위한 실패를 겪어온 한 번역자의 노고의 흔적이 아로새겨진 책이다. 주로 프랑스 문학을 한국어로 번역해온 번역가 김남주가 번역을 하다 흘러나온 ‘옮긴이의 말’을 담아놓은 이 책은, 한 작품의 문학적 성취도나 문학적인 분석보다는 번역가 자신이 한 작품과 오롯이 마주하며 겪어낸 삶의 결들을 풀어내고 있다. 그건 문학을 삶으로 품어낸 자의 발자취이자, 문화의 뒤섞임과 마주침과 혼합이라는 혼돈의 영역을 묵묵히 걸어온 자가 자신이 걸어온 길에 대한 애정을 풀어낸 자리였다. 하여 나는 읽으면 읽을수록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저자에 대해 고개가 숙여졌다. 그녀의 문학에 대한 애정, 번역에 대한 애정, 번역을 위한 고투를 느끼면서 어설프게 문학을 읽어온 내가 부끄러워졌다. 그래서 그녀가 번역한 책들로 고개를 돌려서 읽어보려고 한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기에. 번역에서 흘러나온 글이 다시 독서로 이끄는 경험을 하며 나는 외쳐본다. 번역은 위대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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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벨 꽃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427
최하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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팅커벨 꽃집-최하연

 

1. 

<팅커벨 꽃집>을 읽다가 서글퍼지기 시작했다. 어쩌자고 나는 이런 시집을 읽고 있는 것일까. 어쩌자고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받아들일 수도 없는 시들이 가득한 이런 시집을 읽는 것일까. 모더니즘이니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전위니 실험이니 하는 말들 이전에, 독서 본연의 의미를 생각하며, 읽을 수 없는 글을 읽는다는 것의 서글픔을 실감했다. 알 수 없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착각이다. 알 수 없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일 뿐이다. 나는 그저 그 ‘알 수 없음’의 영역에서 약간이라도 ‘알 수 있음’에 가닿기를 바랐다. 하지만 나의 염원은 ‘알 수 없음’의 무자비한 발길질에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알 수 없음’은 나의 희망과 염원을 짓밟고 나를 무지의 영역에 내팽개쳐 두고 떠나버렸다. 남겨진 자에게 남은 것은 가슴 가득 차오르는 서글픔뿐. 해설을 아무리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다. 아니 해설은 오히려 시를 더욱 알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내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성향의 시집을 다시 읽으리라는 사실이었다. 알 수 없음의 무자비한 짓밞음이 예정되어 있음에도 나는 이런 시집들일 읽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시를 꾸준히 읽어왔고 앞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자의 서글픈 숙명이기 때문이다.

 

2. 

이런 시들을 읽는다는 건 시인의 자폐적이고 폐쇄적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내가 괴로운 건, 내가 이런 시들을 읽음으로서 나 스스로 자폐적이 된다는 사실이다. 시를 읽는 이마저 자폐적으로 만드는 시 읽기의 힘겨움. 그래도 나는 읽을 수밖에 없다. 그건 내가 이런 시들을 읽어왔고, 앞으로 읽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고통을 음미하며 읽어나가는 이에게 서글픔이 다가오는 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서글픔은 언제나 감당하기 어렵다. <팅커벨 꽃집>을 읽는다는 건 서글픔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를 서글퍼하는 독자의 고통을 새삼 실감하는 자리였다. 그것은, 그 시간이 내게 참을 수 없는 서글픔의 고통을 환기시키는 삶의 흔적으로 남았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앞으로 이 시집의 시들이 사라지면서 남긴 고통을 생생히 간직한 채 살아가리라. 그런데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이 시집의 의미는 그런 게 아닐까. 자신만의 상처로 살아가는 시인처럼, 우리 자신도 우리만의 상처로 살아가게 되리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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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
파코 로카 지음, 김현주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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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름-파코 로카

 

누군가 내게 이 책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이 책은 그저 읽으려다 그만둔 책에 불과했다. 누군가 내게 이 책이 흥미롭다고 이야기를 한 순간, 이 책은 읽으려다 그만둔 책이 아니라 읽어야만 하는 책이 되었다. 읽지 않았고 접근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이 책의 무의미성은 내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책에 접근하여 무언가 느끼면서 유의미성으로 격상되었다. 그저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이 책을 읽고 ‘나만의 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며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내게 이 책은 어떤 의미였던가? 

 

<주름>. 정지된 컷과 말풍선의 조화를 통해서 서사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만화라는 장르는, 장르의 특성상 소설과 영화의 중간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만화는 영화와 같은 영상은 아니지만 정지된 이미지로 구성되며, 소설과 같이 문자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말풍선을 통해서 소설적인 특성도 가지게 된다. 이미지와 말풍선의 혼합을 통해서 탄생한 만화는 그래서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만화 그 자체가 된다.  

 

<주름>은 오직 만화만이 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치매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지된 이미지들과 말풍선들의 조합으로 한 남자가 겪는 치매의 과정을 서서히 드러내는 이 작품은, 소설이 줄 수 없는 이미지의 충격으로 독자의 뇌리를 강타하며, 영화가 줄 수 없는 ‘순간의 성찰’을 정지된 이미지의 힘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독자는 치매의 이미지화를 통해서 충격받으며, 동시에 종이매체의 특성과 정지된 이미지들 자체 때문에 치매를 성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충격받으며 성찰하기. 성찰하며 충격받기. 내가 보기에 이 동시다발적 충격과 성찰은 오직 이 작품이 만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주름>을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화만이 가능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갔다. 

 

<등대>. <주름>과 달리 이 작품은 나에게 익숙한 ‘만화’라고 볼 수 있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만화였기에, 나는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스페인 내전의 흐름 속에서 파시스트들에게 쫓기는 공화파 소년병 프란시스코와 등대지기 노인 텔모의 우정과 꿈의 추구를 그린 이 만화는, 힘이 있는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매력으로 독자를 뒤흔든다. 재미있고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특히 마지막 부분의 감동은 나를 ‘익숙하지만 너무나 좋은’ 감성의 영역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나는 꿈을 좇는 이야기에 약하다.) 

 

<주름>은 내게 색다름과 익숙함 모두를 느끼게 만든 책이었다. 그것은 이 책에 내게 다채로운 정신의 양식을 제공하며, 단일 음식의 맛이 아닌 다채로운 음식의 맛으로 정신을 배부르게 만들었다는 얘기였다. 이 정신적 충만함과 풍요로움이 이 책을 읽고 찾은 ‘나만의 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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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소포클레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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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포클레스 비극 전집-소포클레스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인들의 삶과 이어진다. 그리스인들의 삶의 정수인 그리스 비극. 거기에는 그들의 종교성과 철학과 가치관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그들이 이룩한 문화를 비롯한 그리스인들의 삶의 거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작가에 따라서 이것은 조금씩 다양한 양상을 보여준다. 아이스퀼로스는 조금 더 종교성에 치중해 있고, 에우리피데스는 기존의 전통과 질서에 대해서 회의적인 시각을 담아서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비극을 만들어냈다. 에우리피데스와 아이스퀼로스의 중간 영역에 위치한 소포클레스의 비극은, 그들 두 사람과 구분되는 비극을 만들며 진정 그리스 비극다운 비극, 아테네 삶의 총화인 비극, 그리스 비극의 정점에 도달한 비극으로서 존재한다. 그의 비극은 아테네 문화와 가치를 추종하는 아이스퀼로스의 경직성보다는 유연성을 드러내며, 에우리피데스의 회의적인 시각과는 달리 안전하고 정련된 언어로 전성기 아테네의 자신감과 그들이 이룩한 문화의 힘을 보여준다. 소포클레스는 지극히 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인간 자신의 오만으로 인해 파멸하면서 그 파멸을 받아들이는 인간을 넘어선 인간의 모습을 비극 속에 그리며, 인간이 신의 의지와 질서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교만하고 오만하기보다는 겸손하고 세상을 두러워해야 한다는 사실을 자신의 비극을 통해 여지없이 드러낸다. 그건 자신감의 표현이었고, 그 자신감을 경직된 믿음이 아니라 아름다운 예술적인 언어로 표현해내는 예술적인 몸부림이었다. 비극적인 아름다움, 애달픈 슬픔, 지나치게 인간적이어서 영웅적이고 초월적이고 종교적인 장중함이 이룩한 비극이라는 예술의 힘은 그리스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들처럼 비극이 아테네의 전성기를 떠받치는 기둥 중 하나라는 사실을 넌지시 알려준다. 화려하고 아름답게 아테네를 떠받친 이 기둥은 소포클레스 때에 가장 아름답게 빛난다. 그러나 벚꽃이 가장 아름다울 때 지는 것처럼, 아테네도 화려한 전성기의 뒤안길에서 몰락의 길을 걸어간다. 강력했던 힘은 사그라지고, 화려하게 꽃피던 문화도 정치적 혼란과 몰락의 영향 속에서 그 힘을 점차 잃어가고, 사람들은 과거의 힘과 질서를 잊고 혼란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아테네 전성기의 산증인으로서 아테네의 힘과 가치를 굳건히 믿던 소포클레스는 죽기 전에 자신이 가진 힘을 다끌어모아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를 지어서 전성기 시절 아테네의 목소리로 외친다. 아테네의 힘을 믿으라고. 하지만 이 노거장의 목소리는 바람처럼 흩어지고 그의 바람과는 달리 아테네는 화려한 전성기를 뒤로하고 몰락한다.

 

나는 이 책에서 아테네인들이 들었어도 되돌릴 수 없었던 내용이 담긴 목소리를 들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전했던 목소리는 이제 내용의 의의는 사라졌지만 아름다움은 여전히 간직한 채 전해졌다. 그건 이천 년의 시간을 넘어 고대의 그리스인들이 현대인에게 전하는 아름답고 찬란하고 비극적이며 애달픈 예술적 목소리에 다름 아니었다. 그 아름다운 목소리를 들으면서, 목소리가 남긴 비극적 잔향을 느끼면서 나는 힘이 있는 예술은 시간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시간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언제나 인간의 보편성이라는 틀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시간을 넘어서 전해진 목소리와의 조우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힘 있는 예술이 하나의 기적이라는 사실 또한 알려준다. 지극히 당대의 기준에 부합했던 예술이, 시간을 넘어서서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감동을 준다는 건 기적이라는 말이 아니면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에. 이처럼 과거라는 시간은 소포클레스를 통해 내게 전해지고 현재를 거쳐 다시 미래로 나아갈 것이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진실과 더불어 지극히 현재적인 것이 초시간적일 수도 있다는 또다른 시간을 알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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