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주름
파코 로카 지음, 김현주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주름-파코 로카
누군가 내게 이 책의 이름을 말하기 전에 이 책은 그저 읽으려다 그만둔 책에 불과했다. 누군가 내게 이 책이 흥미롭다고 이야기를 한 순간, 이 책은 읽으려다 그만둔 책이 아니라 읽어야만 하는 책이 되었다. 읽지 않았고 접근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이 책의 무의미성은 내가 어떤 사람의 말을 듣고 책에 접근하여 무언가 느끼면서 유의미성으로 격상되었다. 그저 하나의 몸짓에 불과했던 이 책을 읽고 ‘나만의 꽃’으로 만드는 과정을 거치며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해본다. 내게 이 책은 어떤 의미였던가?
<주름>. 정지된 컷과 말풍선의 조화를 통해서 서사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만화라는 장르는, 장르의 특성상 소설과 영화의 중간에 위치할 수밖에 없다. 만화는 영화와 같은 영상은 아니지만 정지된 이미지로 구성되며, 소설과 같이 문자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지만 말풍선을 통해서 소설적인 특성도 가지게 된다. 이미지와 말풍선의 혼합을 통해서 탄생한 만화는 그래서 영화도 아니고 소설도 아닌 만화 그 자체가 된다.
<주름>은 오직 만화만이 할 수 있고, 표현할 수 있는 방식으로 치매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정지된 이미지들과 말풍선들의 조합으로 한 남자가 겪는 치매의 과정을 서서히 드러내는 이 작품은, 소설이 줄 수 없는 이미지의 충격으로 독자의 뇌리를 강타하며, 영화가 줄 수 없는 ‘순간의 성찰’을 정지된 이미지의 힘으로 가능하게 만든다. 독자는 치매의 이미지화를 통해서 충격받으며, 동시에 종이매체의 특성과 정지된 이미지들 자체 때문에 치매를 성찰할 수밖에 없게 된다. 충격받으며 성찰하기. 성찰하며 충격받기. 내가 보기에 이 동시다발적 충격과 성찰은 오직 이 작품이 만화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나는 <주름>을 봤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만화만이 가능한 가능성의 영역으로 끌려 들어갔다.
<등대>. <주름>과 달리 이 작품은 나에게 익숙한 ‘만화’라고 볼 수 있다. 익숙하기 그지없는 만화였기에, 나는 이야기의 흐름에 몸을 맡기고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스페인 내전의 흐름 속에서 파시스트들에게 쫓기는 공화파 소년병 프란시스코와 등대지기 노인 텔모의 우정과 꿈의 추구를 그린 이 만화는, 힘이 있는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매력으로 독자를 뒤흔든다. 재미있고 흥미로우면서 동시에 아름답고 슬픈 이야기. 특히 마지막 부분의 감동은 나를 ‘익숙하지만 너무나 좋은’ 감성의 영역으로 이끌고 들어간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나는 꿈을 좇는 이야기에 약하다.)
<주름>은 내게 색다름과 익숙함 모두를 느끼게 만든 책이었다. 그것은 이 책에 내게 다채로운 정신의 양식을 제공하며, 단일 음식의 맛이 아닌 다채로운 음식의 맛으로 정신을 배부르게 만들었다는 얘기였다. 이 정신적 충만함과 풍요로움이 이 책을 읽고 찾은 ‘나만의 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