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공감필법 공부의 시대
유시민 지음 / 창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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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는 글쓴이기 텍스트에 담아둔 생각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보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 독서가 풍부한 간접 체험이 될 수 있다. 간접 체험을 제대로 해야 책 읽기가 공부가 된다. 그리고 남이 쓴 글에 깊게 감정을 이입할 줄 아는 사람이라야 가상의 독자에게 감정을 이입하면서 글을 쓸 수 있다. 자기 생각과 감정 가운데 타인의 공감을 받을 수 있는 것을 골라낼 수 있고, 그것을 공감을 얻을 수 있는 방식으로 쓰게 된다.(8)
공부가 뭘까요? '인간과 사회와 생명과 우주를 이해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는 작업'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공부의 개념이에요.(17)
문자 텍스트를 읽을 때는 글쓴이가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한 지식, 정보, 생각, 감정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있는 그대로 읽어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게 되지 않으면 공감도 교감도 비판도 할 수가 없어요. 그리고 그렇게 해야 책에서 얻은 것이 세상과 타인과 자기 자신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하는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죠?
그러면 이제 공부의 다른 측면인 글쓰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글쓰기는 뭐냐? 내가 가치있다고 여기는 정보, 옳다고 믿는 생각, 살아가면서 느끼는 감정을 문자로 표현하는 일입니다. 글쓰기는 공부한 것을 표현하는 행위인 동시에 공부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문자 텍스트로 표현하기 전까지는 어떤 생각과 감정도 내 것이라고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지요. 그 모든 것은 문자로 명확하게 표현해야 비로소 내 것이 된다는 겁니다.(75~76)

예전에 영화비평서를 한창 열심히 읽었을 때, 저만의 '비평론'을 한 번 만들어보았습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개똥철학에 가까웠던 저만의 비평론을 저는 '공감비평'이라고 명명했죠. 지금 생각해보면 부끄러운 이야기인데 이왕 썼으니 자세하게 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생각한 공감비평이란, 일단 비평을 하는 텍스트에 깊이 공감하는 첫단계가 있어야 합니다. 텍스트에 깊이 공감하여 텍스트를 만든 이의 생각과 감정을 받아들여 공감하거나 이해하는 공감의 단계를 거치고 나서 두번째 단계로 비평을 한다는 거죠. 공감도 하지 않고 무턱대고 비평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공감하고 나서야 제대로 된 비평이 가능하다는 생각도 깔려 있었구요.

<유시민의 공감필법>을 읽으며 과거에 만들어두었던 저만의 비평론인 '공감비평'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더군요. 책의 저자인 유시민 씨는 공부와 글쓰기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공감을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강조했습니다. 유시민 씨에게 공부란 책을 읽고 그때의 감정이나 생각을 글로 쓰는 것인데, 이 때 공감이 없으면 안 된다는 거죠. 깊이 공감하는 독서의 경험을 해야 자기자신에게 무언가가 깊이 남고, 또 그것이 글쓰기에도 안정적인 토대가 된다는 말로 느껴졌습니다. 저도 유시민의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공감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쓰는 것같지만(^^;;) 공감 없이는 제대로 된 독서의 경험도 없고, 독서의 경험을 토대로 한 글쓰기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독서를 하며 제가 뭐 엄청나게 깊은 생각을 하는 것도 아니고, 수준 높은 글을 쓰는 것도 아니지만 제 개인적인 경험에 비추어봐도 정말 맞는 말이거든요.

무엇보다도 제가 유시민 씨의 말에 깊이 공감하는 이유는 공감을 해서 책을 읽을 때 독서가 가장 기쁘고 즐겁기 때문입니다. 저자가 책에 아로새긴 생각과 감정과 삶의 흔적들을 깊이 공감하여 내것으로 받아들일 때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감정을 느끼는 독서의 경험. 제가 이 맛을 알기 때문에 독서를 끊을 수가 없습니다. 어쨌든 유시민 씨는 공감해서 읽는 게 가장 좋은 독서의 방법이자 공부의 방법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저도 거기에 동의합니다. 조금 다르게 이야기해보면 저는 독서의 즐거움과 공부는 붙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독서야, 이건 공부야, 이건 즐거움이야 라고 명확하게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죠. 공감하여 즐겁게 읽다보면 제대로 된 독서의 경험을 할 수 있고, 내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공부가 되는 것이죠. 독서와 즐거움과 공부가 하나로 되는 경험. 그것이 저는 공감독서라고 생각합니다. 아직 경험한 적은 없지만, 유시민 씨의 말에 따른다면 공감독서를 하다보면 좋은 글쓰기로도 이어지겠죠.

적다보니 의욕이 솟구칩니다. 공감해서 잘 읽고 즐거워하며 공부도 하고 글쓰기도 해야겠다는. 이 경험에 지름길은 없을 겁니다. 꾸준히 공감해서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글쓰기를 하는 수밖에 없겠죠.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저는 유시민 씨의 말대로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떻게 될지 알 수 없지만 끈기있게 밀어붙여 보겠습니다. 그런데 벌써 글 한 개를 썼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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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8-05-23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짧은 글을 선호하는 시대가 될수록 남이 쓴 글에 감정을 이입하고 제대로 읽을 줄 아는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 것입니다. 반대로 글 쓰는 사람들은 더 많아질 거예요. 짧은 글을 쓸 수 있는 SNS는 자기표현의 수단이 되고, 공감(인정)을 많이 받을 수 있는 최적의 글쓰기 공간이죠. 사람들이 인정하는 좋은 글을 쓰고 싶다는 욕심이 많으면 자신의 글에 향한 타인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해요. 페이스북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페이스북에 글을 정말 잘 쓰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 글 잘 쓰는 사람치고는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본 적이 별로 없어요. 타인에게 비판을 받으면 어떻게든 자신의 글이 틀리지 않았다는 식으로 답변을 해요. 대화 분위기가 꼬이면 감정싸움으로 번집니다. 그런 모습이 너무 보기 싫어서 페이스북 계정이 있는데도 안 써요.. ^^;;

짜라투스트라 2018-05-24 14:38   좋아요 0 | URL
ㅎㅎㅎ 그런 일이 종종 있죠. 그래서 저는 페이스북은 그냥 아는 사람들하고만 소통하는 걸로 하고 있습니다.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촘스키, 세상의 권력을 말하다
노암 촘스키 지음, 문이얼 옮김 / 시대의창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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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지역이란 미국의 경제적 요구에 종속되어야 할 곳을 말한다. 가능하다면 지구 전체까지도 포괄할 생각이었다. 이 계획은 기회가 되는 한 그대로 실행되었다.(23)
권력자들은 조용하고 수동적인 국민을 원한다. 이들을 골치 아프게 만들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은 잠자코 있지 않고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런 행동들이 지속적이고 조직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124)

촘스키 책을 다시 읽으니 감회가 새롭네요. 책을 펼치기 전에 '언제적 촘스키인가'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0대 중반만 해도 저는 촘스키 책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불만, 반항에 대한 열망, 개혁과 발전, 정의와 윤리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20대 중반의 저에게 촘스키는 얼마나 매력적이었는지. '변형문법생성이론'으로 현대 언어학을 대표하는 언어학자가 되어 정치적 발언을 하지 않고 조용히 살아도 평온하게 명성을 얻은 채 지낼 수 있었던 언어학자 노엄 촘스키는 끊임없이 미국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적인 발언을 하고, 전세계 분쟁지역의 평화를 외치는 행동하는 지성인의 면모를 계속해서 보여온 인물입니다. 베트남전 반전 시위와 민권 운동, 신자유주의의에 대한 비판, 9.11 사태 이후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전쟁에 대한 비판적 발언, 전세계에세 전쟁과 폭력과 독재에 저항하는 이들에 대한 지지표명까지 실로 그의 인생은 행동하는 지성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몇 년 전에 세상을 떠난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과 더불어 미국의 행동하는 지성의 대표적인 인물인 그가 쓴 책을 20대 중반의 제가 어떻게 안 읽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시간은 저를 무디게 했습니다. 20대 때 가졌던 열정과 이상과 믿음은 시간의 힘앞에 마모되고 사사그라들더군요. 제 열정과 이상과 믿음이 사그라드는 만큼, 촘스키의 책에 대한 제 열정도 사라져갔습니다. 어느 순간 돌아보니 촘스키는 저에게 과거에 열심히 읽었던 저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흘러 며칠 전에 촘스키 책에 제 눈앞에 보였습니다. 아, 과거의 유물 같은 그 이름 촘스키. 저는 신기했습니다. 마음먹고 읽기로 했죠. 읽기로 하면서도 '이미 다 아는 내용인데 새로운 것은 없을거야'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럴수가. 저는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읽으며 놀랐습니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렇게 새롭고 생생하다는 점에. 어쩌면 저는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과거의 많이 읽었다는 그 사실 하나만 믿고 게으름을 피운 것일지도 모릅니다. 과거에 많이 읽은 것은 과거에 불과함에도, 뇌세포속에 담긴 기억이 시간이 지나며 망각의 늪에 빠진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다 안다는 식의 오만함으로 무장해 있었던 것이죠. 책을 읽으며 저는 깨달았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과 환경, 시간은 어떤 책이든 다르게 읽을 수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30대의 저는 20대때의 뜨거운 열정 가득한 독서와는 다른, 조금 나이 먹었지만 그래도 열정은 간직한 차분한 열정으로 책을 읽어나갔습니다.

누군가는 노엄 촘스키를 싫어하고 엄청 비난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가 맨날 미국을 지나치게 깎아내리고 비난한다고. 미국의 정치적 폭력과 미국적인 식민주의의 실상을 지나치게 과장한다고. 네,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것까지 부정하지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말하고 싶은 건, 노엄 촘스키가 말하는 것의 가치입니다. 그는 우리가 쉽게 보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줍니다. 그는 우리가 인식하지 못했던 것들을 보게 만듭니다. 우리가 손쉽게 접하는 폭력과 전쟁의 역사가 아니라,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폭력이 자행됐고 아직도 폭력이 자행되며 많은 이들이 죽고 희생되고 있는데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한다고 그는 얘기합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여러분은 킬링필드는 알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캄보디아의 진보적인 크메르루주 정권이 자행한 대학살이죠. 언론들이 엄청 떠들었고, 영화도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인도네시아의 친미 독재자인 수하르토가 저지른 동티모르 대학살은 얼마나 알고 있나요? 들어본적은 있나요? 미국와 친했던 인도네시아의 독재자 수하르토가 저지른 그 참혹한 학살을 아는 사람이 몇명이나 될까요? 동티모르 대학살과 캄보디아의 킬링필드가 뭐가 어떻게 다르기에 이렇게 유명세에서 차이가는 나는 걸까요? 이뿐만이 아닙니다. 미국과 친했던 중앙 아메리카의 엘살바도르,니카라과,과테말라 정권이 저지른 학살에 대해서는 얼마나 아나요? 제 생각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저는 이 나라들의 친미정권이 저지른 학살을 아는 사람이 얼마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잠시 촘스키의 말을 빌려 이 학살 중 하나에 대해 적어보겠습니다.

'예수회 신자들은 미국이 창설하여 훈련시키고 장비까지 지원한 정예 조직 아틀라카틀 부대에 의해 살해당했다. 이 조직은 1981년 3월에 미 육군 특수부대 학교가 반게릴라전 전문가 열다섯 명을 엘살바도르에 파견하면서 창설됐다. 이들은 창설되자마자 대대적인 학살을 시작했다. 미국 교관들조차 이 군인들이  "유별나게 잔인해서... 우리 교관들은 포로들을 죽인 후 귀만 잘라오지 말고 제발 산 채로 잡아오도록 설득하느라 늘 애를 먹였다"고 말할 정도였다.
1981년 12월, 이들은 살인과 강간, 방화를 자행함녀서 1000명도 넘는 민간인을 살해했다. 그들은 그 뒤에소 수많은 마을을 폭격했고 사살하거나 물속에 빠드리는 등의 방법으로 추가고 수백 명의 민간인을 죽였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여자와 어린이, 노인 들이었다.(55~56)

이번에는 학살의 현장에 있었던 신부의 증언입니다.

엘살바도르에서는 죽음의 특공대가 사람을 그냥 죽이지만은 않는다. 그들은 사람들의 머리를 베어 창에 꽂아 이곳저곳에 세워놓았다. 엘살바도르 재무경찰도 남자들의 배를 갈라 내장을 꺼내는 데 그치지 않고 생식기를 잘라내어 시체들의 입에 물려놓기까지 했다.(56)

으~~ 너무 끔찍한 얘기들입니다. 이것까지 쓸 생각은 없었는데 쓰다보니 생생함을 위해 이 정도만 적었습니다. 존재하는 최악의 조직으로 불렸던 ISIS 못지 않은, 어쩌면 그들보다 더한 생생한 폭력에 대한 증언입니다. 제가 말하고 싶은 건, 이런 식의 끔찍한 폭력과 학살이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었는데 우리들은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ISIS,킬링필드,유대인 대학살은 알고 있지만 우리는 동티모르,엘살바도르의 학살은 모릅니다. 우리는 왜 이런 사건들을 모르는 것일까요? 언론은 왜 이런 사건들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일까요? 저는 이 부분에서 노엄 촘스키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인식의 균형을 위해서, 한 개인이 가진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기 위해서.

생각해봅시다. 킬링필드도 나쁘고, ISIS가 저지른 짓도 나쁘고, 유대인 대학살도 나쁩니다. 마찬가지로 동티모르, 니카라과, 엘살바도르, 과테말라의 학살도 나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우리는 한쪽의 나쁨만 안다는 사실입니다. 미국과 사이가 안 좋은 세력이 저지른 학살이나 미국 정치권에서 힘을 가진 이들이 당한 피해만 안다는 말입니다. 이건 뭔가 잘못된 건 아닌가요? 이건 세상을 편향적으로 보는 것 아닌가요? 우리는 지금까지 한쪽의 시각만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바로 미국의 주류 세력이나 기득권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자, 그들이 부유하지 않거나 평범한 이들이 인식했으면 하는 시각. 여기서 깨어나야 합니다. 세상을 조금 더 폭넓고 균형있게 바라보는 것은 지금의 편향된 인식보다 훨씬 괜찮은 일입니다. 노엄 촘스키의 책들은 당연하게도 이것에 도움이 됩니다.

책은 왜 읽는 것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다양한 대답이 있겠지만, 그 중에서 책을 읽고 더 나은 존재가 되고, 더 괜찮은 인식과 시각을 가지기 위해서라는 대답도 있겠죠. 자, 여기 책을 읽으면 기존의 시각을 깨부수고 더 균형잡히고 폭넓은 인식과 시각을 제시하는 책이 있습니다. 이 말은 이 책을 읽으면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두려워서 책을 안 읽겠습니까. 눈 딱감고 읽으면 됩니다. 적고보니 무언가 책팔이를 하는 듯한 기분이 드는군요. 출판사랑 전혀 상관이 없는 인물로서 변명을 해보자면(^^;;) 과거로 돌아간 듯한 경험을 하며 제가 깨달은 게 지금까지 제가 적은 내용입니다. 어차피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이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저와 똑같은 경험을 할지는 장담할 수가 없습니다. 확실한 건, 저에게는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읽는 경험이 유효하고 좋았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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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머니 밀리언셀러 클럽 148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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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몬테비스타 주민으로서 말해 줄 게 있어요. 여기선 거의 무슨 일이든 생길 수 있답니다. 거의 무슨 일이든 벌어져 왔고.(44~45)
현재는 과거를 바꿀 수 없지만, 그 수수께끼와 의미를 아프게 의식하게 만들 수 있다.(254)
비극의 후속편이 아니라 전원시를 위한 배경 같았다. 인생은 짧고 달콤하다고 난 생각했다. 달콤하고 짧고.(307~307)

진실을 아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 것일까요? 누군가 감추려고 하는 것들을 알아야만 세상이 선하고 행복해지는 것일까요? 지금 보다 나이가 어릴 때는 진실을 아는 것이 진실을 모르는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나이가 들어보니 진실을 아는 것이 반드시 좋거나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진실을 몰라도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진실을 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거나 좋은 것은 아니니까요.

로스 맥도널드의 루 아처 시리즈는 고독하게 진실을 쫓는 탐정의 모습을, 미국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의 스타일로 풀어낸 소설입니다. 고독하고 쓸쓸한 탐정 루 아처는 현실의 씁쓸한 실상에도 불구하고 포기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그것과 마주서는 인물입니다. 그가 마주치는 현실은, 미국의 신화를 구성하는 것중 하나인 가족의 이상이 무너져내린 동시대의 미국의 모습입니다. 사랑의 신화가 무너져내린 부부, 해체된 가족, 서로를 믿지 않는 가족관계, 더 나아가 서로를 이용하다 비극을 맞는 모습들까지. 과거의 이상이 통하지 않는 그 시대의 미국 가족의 비극적인 현실을, 탐정 루 아처는 사람들을 돕고 싶은 마음을 가진 채 파헤칩니다. 자신의 행동이 그들의 상처를 후벼파다 못해 터뜨린다고 해도. 왜냐하면 이미 곪을 때로 곪을 상처는 결국에는 모두에게 피해가 가기 때문입니다. 아니 이미 그들은, 곪을때로 곪은 상처 때문에 큰 피해를 입고 입고 있어서 누군가가 그 상처를 터뜨려주기를 바란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루 아처는 그들이 무의식적으로 바란 행동을 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로스 맥도날드는 가족의 해체 때문에 고통받고 있는 이들의 바람을 담아서 탐정 루 아처를 만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동시대의 현실이 작가로 하여금 이 시리즈를 만들게 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저는 루 아처 시리즈에서 무너져 가는 아메리칸 드림의 모습과 그 무너져내림 속에서 사그라져 가는 가족의 이상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 아처는 형체만 남은 가족의 이상과 아메리칸 드림을 두고 괴로워하는 인간들을 돕는 탐정입니다. 그것이 본인에게 너무나 아파서 견디기 힘들다 해도.

<블랙 머니>도 루 아처 시리즈의 패턴을 따라갑니다. 부유한 도시 몬테비스타에 와서 의뢰인을 만난 그는 의뢰인의 의뢰를 받아들여 사건을 파헤치다 추악한 현실을 마주합니다. 연쇄살인, 폭력, 도박, 불륜, 원조교제, 협박. 마치 막장 드라마에 나올 듯한 자극적인 사건들의 한가운데를, 사람들을 돕고 싶어하는 인간적인 마음을 가진 채 나아가는 탐정 루 아처는 아무리 비극적이라고 해도 진실에 가닿습니다. 아무리 그것이 아프다고 해도 우리 앞에 진실을 펼쳐 보이고 그는 쓸쓸하게 사건을 마무리합니다.

다시 한 번 질문을 던져 봅니다. 진실을 아는 것이 반드시 행복한 것일까요? 누군가 감추려고 하는 것들을 알아야만 세상이 선하고 행복해지는 것일까요? <블랙 머니>를 읽고 나니 더욱 더 쉽게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이 나오지 않네요. 그래도 확실한 건, 루 아처는 진실을 추구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점입니다. 그는 곪을때로 곪은 상처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니까요. 저는 어떨까요? 저는 아직까지 확답을 내놓지는 못하겠습니다. 비겁하게 진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상황에 따라 다를 수도 있다는 말은 할 수 있겠네요. 저에게는 지금 이 대답이 그나마 최선이니까요.

"당신이란 사람을 모르겠어요, 아처. 목표가 뭐예요?"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도움이 되고자 합니다."(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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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뜨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도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
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9~10)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즐거운 지식>,니체,341절)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처음 펼치서 읽는 이라면, 처음 시작되는 문장부터 당황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니체의 철학적 개념 중에서 가장 난해한 개념으로, 많은 철학자들을 곤경에 빠뜨린 '영원회귀'가 처음부터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마치 곤경에 빠진 철학자들의 심정을 똑같이 체험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는 독자는 '이건 뭐지?'라는 말을 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응, 이건 뭐지? 영원회귀가 왜 소설의 처음에 나오는 거지? 영원회귀와 이 소설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 무수한 질문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습니다. 질문의 늪에서 헤매다 보면 깨닫습니다. 내가 밀란 쿤데라가 쳐놓은 사유의 그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는 걸. 소설의 시작이 사유의 시작이자 질문의 시작이라는 것은 이전까지 제가 읽었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경험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건 이 소설이 제가 기존에 읽었던 소설과는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단순히 서사의 예술 작품으로서의소설이 아니라, 사유과 서사가 결합된 '사유의 그물'로서의 소설을 읽는다는 경험을 제가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기대했습니다. 어떤 신세계가 펼쳐져 있을지.
...
(중간생략)
아마도 이 소설은 읽는 이마다 다른 해석을 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저 자신도 언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을 할 것 같습니다. 이 소설은 너무나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한 소설이기에. 그 많고 많은 해석 중에서, 지금 저는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한 번 소설을 보려고 합니다. 한 번 시작해보죠. 삶이 무한히 반복된다면 얼마니 지겹고 권태로울까요. 니체의 이해하기 어려운 영원회귀라는 개념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 지겨움과 권태로움은 어느정도 짐작은 가능합니다. 하지만 한 번의 삶밖에 살 수 있는 현실의 인간들은, 그 지겨움과 권태로움을 완벽하게 알 수 없겠죠. 니체는 영원회귀를 넘어서서 초인의 개념으로 가지만, 현실의 중력에 얽매인 평범한 인간인 저는 초인으로까지 넘어가지는 못합니다. 단지 저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며 한 번 뿐인 인간의 삶을 지겹고 권태롭지 않게 살 방법을 궁리할 뿐입니다. 영원하지 않더라도, 단 한 번 뿐이더라도 지겹지 않게 사는. 제 머릿속을 맴도는 건 니체가 말한 아이라는 단어입니다. 아이는 영원히 무언가가 반복되는 경험을 해도 지겨워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언제나 반복되는 경험들을 언제나 새롭게 즐겁게 바라봅니다. 문득, 과거에 제가 조카와 같이 살 때 한 경험이 떠오릅니다. 비디오로(비디오라니 얼마나 오래전 일인지요?^^;;) <슈렉>을 보고, 마지막에 보너스로 슈렉과 피오나 공주와 모든 등장인물들이 나와서 노래하고 춤추는 부분을 조카에게 100번 넘게 틀어준 적이 있습니다. 나이가 아주 어렸던 조카는 그 장면이 나올 때마다 즐거워하며 같이 노래부르고 춤을 췄습니다. 조카에 비해 나이가 많았던 저는 지겨워 죽을 뻔 했습니다. 그때는 조카를 이해하지 못했는데, 니체의 영원회귀와 아이 개념을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가 가능합니다. 아이에겐 그 부분이 100번 반복된 게 아닙니다. 아이는 매 순간 다른 경험을 100번 한 것입니다. 저는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와 아이의 개념을 그 순간 경험한 것입니다. 비록 그 순간에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으면서 저는 조카가 했던 경험을 다시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해봅니다. 영원히 반복되더라도 언제나 새롭게 경험하는 것을. 밀란 쿤데라가 사유와 서사의 그물을 통해서 다른 소설과는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소설을 창조해내며, 자신의 세계 속에 삶을 살아가는 권태와 지겨움을 이겨낼 가능성의 씨앗을 소설 속에 숨겨두었기에. 키치를 극복하며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있는 존재의 무게감'으로 전환시키려는 어떤 삶의 가능성을 소설 속에서 보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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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하는 거짓말이지만(^^;;)
하루에 한 번이라도 글을 쓰도록 하겠습니다.
어떻게든.

*근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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