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가 너무 찝찝해 앉아서 글을 쓰기 시작한다.

이 찝찝한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아무 알맞은 표현이 있긴 한데 화장실에서 쓰는 표현이라 일단 넘어가기로 한다.^^;;

100페이지는 넘게 읽고 나서 글을 쓰려 했는데, 50페이지쯤에 내 마음속 찝찝함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켜져서 충동적으로 앉아서 글을 쓴다.

맹세를 하고 나니까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이 내 마음 속에 들러붙은 것일까.

어쨌든 이런 강박은 환영하고 또 환영한다.

날마다 나로 하여금 글을 쓰게 만드니까.

사실 어제도 책 리뷰를 쓰려고 했다.

맹세에 따라서 4일째를 넘길 까봐,

4일이 넘어 가기전에 우선 '4일째'라는 짧은 글을 남겼다.

뒤이어 4일째에 읽은 책리뷰를 쓸 예정이었는데... 진짜로 쓸 예정이었는데... 쓸 생각은 가득했는데...

나도 모르게 자고 있었다.

정말 내가 언제 잤나 싶을 정도로 잠에 빠져든 것이다.

눈을 뜨니 시간은 새벽 다섯 시가 넘어 있었다.

방의 불은 다 켜져 있고, 눈 앞의 컴퓨터도 커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내가 다섯 시간을 넘게 잤다는 점.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불을 끄고 본격적으로 잠에 취했다.

짧은 글이라도 남겼으니 나중에 책리뷰를 쓰면 된다고

자기 자신을 설득하면서.

그렇게 시간이 지나 맹세를 한지 5일째 오후 7시가 넘었다.

어제 써야지 하고 미러 두었던 책리뷰에 대한

책임감이 온몸을 지배하고 있기에

지금 당장 쓰지 않을 수 없다.

지금 당장 책리뷰 고고~~


기쁨의 집1-이디스 워튼


내게 이디스 워튼은 풍속소설 작가다. 제인 오스틴처럼, 이디스 워튼은 자신이 살아온 그 시대의 삶과 풍속을 세밀하게 잘 그려내는 작가처럼 여겨진다. 19세기 말에 뉴욕 상류층에서 태어난 이디스 워튼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미국 뉴욕에서 살아가는 상류층의 삶과 풍속을 여과없이 정밀하게 표현한다. 그들이 가진 통속성과 위선, 경박함, 피상성을 더도 덜도 없이 리얼하게. <기쁨의 집>은 이디스 워튼에게 작가로서의 명성을 안겨 준 출세작이자 대표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이디스 워튼의 출세작이자 대표작답게 <기쁨의 집>에는 20세기 초반 뉴욕 상류층의 실상이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여기까지 적고 보면 이어지는 글이 그 시절 미국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시절 미국을 잘 알지도 못할 뿐더러, 책에 나오는 것 이상은 관심을 두지 않고 있다. 당연히 관심이 없기 때문에 20세기 초반 미국 상류층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야기 하고 싶은 건 소설의 주인공인 릴리 바트라는 여인에 대해서이다.

릴리 바트. 미국 뉴욕의 상류층으로 태어나 당시 미국 상류층 여성답게 과소비와 화려한 문화의 한가운데를 즐긴 인물이다. 그녀에게 불행이 닥친 건 아버지의 파산과 뒤이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부터이다. 자신이 돈을 얼마나 쓰는지도 관심이 없고, 오직 화려한 소비만 하던 그녀에게 아버지의 파산과 어머니의 죽음은 청천벽력과 같은 일이다. 부유한 친척 부인이 연민을 느껴 그녀를 맡지만, 친척 부인은 돈을 아끼는 구두쇠과의 인물이다. 그녀는 과거와 같은 소비를 하지 못하고, 이 위기를 극복하려면 오직 하나 돈 많은 남자와 결혼해야만 한다. 그래서 소설 내내 그녀의 관심사는 부유한 남자와의 결혼뿐이다. 다행이 그녀에게는 무기가 있다. 미모라는 무기.

하지만 애석하게도 미모라는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지만 그녀의 결혼은 성사되지 않는다. 무슨 마가 끼었는지(??) 알 수 없지만 부자남과의 결혼 프로젝트는 번번이 무산되고, 그녀는 29살에 도달하게 된다. <기쁨의 집>은 29살에 도달한 릴리 바트가 조바심을 내며 부자남자와의 결혼을 어떻게든 성사시키려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배경을 다 쓰고 이제서야 내 생각을 써보려 한다. 나는 읽으면서 릴리 바트 때문에 답답해 죽을 뻔 했다. '답답해 죽을 뻔'이라는 말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내가 답답해 죽으려 했던 건 릴리의 행동 때문이다. 위에 적어 놓은 걸 보면 릴리 바트는 철저하게 속물처럼 보일 것이다. 일단 그녀가 속물이라는 점은 맞다. 속물은 맞는데, 아쉽게도 그녀는 철저한 속물이 아니다. 철저하지 못한 속물이랄까. 속물로서 부자 남자를 차지하려면, 철저하게 속물적으로, 이기적으로, 계산적으로 행동하면 된다. 그런데 그녀는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가 마음에 둔 지적이고 멋진 남자 셀던이 나타나자 셀던을 의식하여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행동을 그만둔다. 도대체 이게 무슨 짓인지. 속물적인 목적을 이루려면 어떤 것에도 굴하지 않고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행동을 하면 될 것을. 그렇다면, 속물적인 행동을 할 수 없다면, 반대인 낭만과 이상의 길로 나아가면 된다. 릴리 바트는 여기서도 어그러진다. 그녀는 셀던이 돈이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와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다. 자신의 행동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녀는 다시 조바심을 내어 부유한 남자와 결혼할 생각을 한다. 이게 문제다. 그녀는 철저한 속물이 되지도 못하고, 반대인 낭만의 길로 가지도 못한다. 그녀는 속물과 낭만주의자의 그 어디 쯤에서 어정쩡하게 머문 채, 속물과 낭만 사이를 헤매며 실패의 구렁텅이로 빠져든다.

내가 그녀에게 분노했던 건, 그녀의 모습이 나의 모습과 겹쳐지기 때문이다. 나도 릴리와 같다. 속물적인 생각을 품고 있으면서, 철저하게 속물적이고 계산적인 모습을 보이지도 못하고, 반대로 낭만과 이상의 길로는 용기가 없어 쉽게 나아가지 못한다. 그래서 나도 릴리처럼, 속물과 낭만의 그 어디쯤엔가 어정쩡하게 위치한 채, 그 무엇도 아닌 삶을 살고 있다. 나의 부정적인 모습을 릴리가 보여 주기 때문에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더군다는 그녀는 추문에 휩싸인 채 실패로 빠져들지 않는가. 그녀의 실패와 나의 실패가 겹쳐지는 것 같아 나의 분노는 커져만 간다. 그러나 내 분노가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녀의 삶은 작가에 의해 결말이 정해져 있는데. 보봐리 부인, 안나 카레니나, 에피 브리스트, 더버빌 가의 테스와 같은 길로. 하지만 나와 릴리는 차이가 있다. 나는 아직 실패가 정해져 있는 건 아니다. 릴리와 다른 결말을 꿈꾸며, 나의 <기쁨의 집> 읽기는 2부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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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째... 12시가 다가오는 시간에 앉아서 백지를 노려보고 있다.

이제는 백지 보다 글자가 더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여전히 글자보다는 백지가 더 익숙하다.

하지만 앉아서 끄적거려 본다. 쓰다보면 익숙해질 거라는 생각으로.

시간이 초과될 거 같아서, 읽은 책에 대한 감상은 이 글을 쓰고 나서

또 쓸 예정이다.

어찌되었든 맹세는 맹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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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악당-야쿠마루 가쿠

 

*스포일러 있으니 읽을 때 주의해주세요.^^;;

 

 

<악당>은 아주 쉽게 요약이 가능한 책이다. 범죄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 가족인 주인공의 성장기. 그러나 이건 일반화의 폭력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건 모욕이다. 성장이라는 말로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삶과 심정의 변화를 단순하게 요약해버리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무수한 고뇌, 범죄로 누나를 잃은 삶의 고통과 정서적인 불안정, 책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변화해나가는 삶의 양상들을 단지 성장이라는 말로 요약해버린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아니, 참을 수 없다. 성장이라는 말로 이 소설을 요약해버리려 했던 나의 오만함과 무심함을. 책 속에 나오는 범죄를 저지른 악당들과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도 쉽게 책을 요약해버리려던 나의 생각은, 언어적인 의미에서는 악당들의 사고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내가 나의 무심함을 쉽게 용서할 수 없는 건, 이 책에 담겨 있는 정서적인 에너지가 나를 건드린 것도 한 몫 했다. 범죄로 누나를 잃은 주인공의 삶도 그렇지만, 탐정일을 하는 주인공이 마주치는 인물들의 기구한 삶과 이야기가 간직한 감정적인 에너지도 엄청나다. 하나같이 어찌나 기구한지. 그러나 모든 범죄가 범죄를 겪은 이들에게는 특별하다고 한다면, 범죄를 만난 이들의 삶을 반드시 기구하다는 말로만 표현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범죄를 마주쳤다는 것이 특별함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삶은 각각의 삶으로서는 특별함이 맞다. 동시에 저마다의 특별함을 간직한 그들의 삶은, 범죄와의 만났던 사람들의 일반론에도 포함된다. 그들은 특별하지만 일반적이다. 범죄와 만난 이들로서 일반적이지만 또 개체의 삶으로서 특별하다. 특별성과 일반성이 어우러진 그들의 삶은, 범죄라는 특성 때문에 엄청난 정서적 에너지를 품을 수 밖에 없다. 그 에너지를 읽으면서 마주쳤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삶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용서라는 말로 예를 들어보자. '범죄를 저지른 가해지를 용서한다'는 말은 너무도 힘들지만 그 말 자체는 쉬운 말이다. 하지만 이걸 세밀하게 파고들어가보자. 용서가 어디 쉬운가. 자기 가족을 죽인 사람을 용서한다고? 용서가 가능하다고? 이게 가능한가? 그러나 언어는 삶의 세밀함을 포용하지 못한 채, '용서한다'라는 말로서만 표현될 뿐이다. 여기에 피해자 가족의 엄청난 고뇌와 삶의 변화가 포함될 여지는 없다.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떠나간 가족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살아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고, 싸울 수 있고, 웃을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걸 용서할 수 있다고? 이걸 용서하려면, 용서라는 영역에 도달하려면, 어떤 경험을 해야하는걸까. 분명한 건, 용서를 하려면 일반적인 걸로는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에 닿아야 했다는 점이다. 그 무언가에 닿아야만 가능한 게 용서가 아닐까. 용서를 해본적 없는 범인인 내가 추리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악당>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그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성장을 거부한다. 아니 과거에 범죄가 저지른 상처에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성장에 도달하는 건,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마주한 사연이, 삶이 그를 성숙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단순히 성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언어가 가진 비극이다. 소설을 일반화할 때 생겨나는, 단순성이 가진 비극 앞에서 나의 <악당> 읽기는 아쉬움에 머무른다. 그 지난하고 복잡하며 엄청난 삶과 감정의 에너지를 가진 과정이 다 사라져버리니까. 나는 그래서 '성숙'이라는 말로 단순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내 상황이 아쉽고도 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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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라는 말로 예를 들어보자. '범죄를 저지른 가해지를 용서한다'는 말은 너무도 힘들지만 그 말 자체는 쉬운 말이다. 하지만 이걸 세밀하게 파고들어가보자. 용서가 어디 쉬운가. 자기 가족을 죽인 사람을 용서한다고? 용서가 가능하다고? 이게 가능한가? 그러나 언어는 삶의 세밀함을 포용하지 못한 채, '용서한다'라는 말로서만 표현될 뿐이다. 여기에 피해자 가족의 엄청난 고뇌와 삶의 변화가 포함될 여지는 없다.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떠나간 가족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살아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고, 싸울 수 있고, 웃을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걸 용서할 수 있다고? 이걸 용서하려면, 용서라는 영역에 도달하려면, 어떤 경험을 해야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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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의 맹세를 지키기 위해 글을 쓰려고 앉아 있다.

여전히 보이는 하얀 백지뿐.

계속 백지 보는 것도 지겹고도 어지러운 일인데,

이 지겨움과 어지러움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단호한 심정으로 글을 써내려 갈 수밖에 없다.

떠오르는 게 없어 어쩔 수 없이 읽은 책에 대한 생각을 쓰는 걸로.


악당-야쿠마루 가쿠

*스포일러 있으니 읽을 때 주의해주세요.^^;;

<악당>은 아주 쉽게 요약이 가능한 책이다. 범죄로 가족을 잃은 피해자 가족인 주인공의 성장기. 그러나 이건 일반화의 폭력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이건 모욕이다. 성장이라는 말로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삶과 심정의 변화를 단순하게 요약해버리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겪어야 했던 무수한 고뇌, 범죄로 누나를 잃은 삶의 고통과 정서적인 불안정, 책 속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겪으면서 변화해나가는 삶의 양상들을 단지 성장이라는 말로 요약해버린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 아니, 참을 수 없다. 성장이라는 말로 이 소설을 요약해버리려 했던 나의 오만함과 무심함을. 책 속에 나오는 범죄를 저지른 악당들과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너무도 쉽게 책을 요약해버리려던 나의 생각은, 언어적인 의미에서는 악당들의 사고와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으리라.

내가 나의 무심함을 쉽게 용서할 수 없는 건, 이 책에 담겨 있는 정서적인 에너지가 나를 건드린 것도 한 몫 했다. 범죄로 누나를 잃은 주인공의 삶도 그렇지만, 탐정일을 하는 주인공이 마주치는 인물들의 기구한 삶과 이야기가 간직한 감정적인 에너지도 엄청나다. 하나같이 어찌나 기구한지. 그러나 모든 범죄가 범죄를 겪은 이들에게는 특별하다고 한다면, 범죄를 만난 이들의 삶을 반드시 기구하다는 말로만 표현하는 것은 어폐가 있다.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범죄를 마주쳤다는 것이 특별함이라고 한다면, 그들의 삶은 각각의 삶으로서는 특별함이 맞다. 동시에 저마다의 특별함을 간직한 그들의 삶은, 범죄와의 만났던 사람들의 일반론에도 포함된다. 그들은 특별하지만 일반적이다. 범죄와 만난 이들로서 일반적이지만 또 개체의 삶으로서 특별하다. 특별성과 일반성이 어우러진 그들의 삶은, 범죄라는 특성 때문에 엄청난 정서적 에너지를 품을 수 밖에 없다. 그 에너지를 읽으면서 마주쳤기 때문에, 나는 그들의 삶이 뿜어내는 에너지에 휘둘릴 수 밖에 없었다. 용서라는 말로 예를 들어보자. '범죄를 저지른 가해지를 용서한다'는 말은 너무도 힘들지만 그 말 자체는 쉬운 말이다. 하지만 이걸 세밀하게 파고들어가보자. 용서가 어디 쉬운가. 자기 가족을 죽인 사람을 용서한다고? 용서가 가능하다고? 이게 가능한가? 그러나 언어는 삶의 세밀함을 포용하지 못한 채, '용서한다'라는 말로서만 표현될 뿐이다. 여기에 피해자 가족의 엄청난 고뇌와 삶의 변화가 포함될 여지는 없다. 가족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떠나간 가족을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살아 있었다면 다시 만날 수 있고, 이야기할 수 있고, 싸울 수 있고, 웃을 수 있는데 그걸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이걸 용서할 수 있다고? 이걸 용서하려면, 용서라는 영역에 도달하려면, 어떤 경험을 해야하는걸까. 분명한 건, 용서를 하려면 일반적인 걸로는 도달할 수 없는 무언가에 닿아야 했다는 점이다. 그 무언가에 닿아야만 가능한 게 용서가 아닐까. 용서를 해본적 없는 범인인 내가 추리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악당>의 주인공도 마찬가지다. 그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성장을 거부한다. 아니 과거에 범죄가 저지른 상처에서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벗어나지 못한다. 그가 성장에 도달하는 건, 그가 원했던 것이 아니라, 그가 마주한 사연이, 삶이 그를 성숙에 이르게 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을 단순히 성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언어가 가진 비극이다. 소설을 일반화할 때 생겨나는, 단순성이 가진 비극 앞에서 나의 <악당> 읽기는 아쉬움에 머무른다. 그 지난하고 복잡하며 엄청난 삶과 감정의 에너지를 가진 과정이 다 사라져버리니까. 나는 그래서 '성숙'이라는 말로 단순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는 지금의 내 상황이 아쉽고도 또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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