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는 예전에 읽었던 책들 '다시 읽기'를 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책을 읽는 것도 좋지만,

예전에 좋은 기억이 있던 책들을 다시 읽으니,

예전에 그 책에 대한 좋은 기억이 되살아남과 동시에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요소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있더군요.

다시 읽기가 주는 묘미가

과거의 좋음과 현재의 새로움 사이의 조화라고나 할까...

또한 예전에는 읽고자 했으니 읽지 못했던 책들 읽기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읽으려고 했으나 읽지 못했던 책들을 읽어 나가기

성취감이 있어서 좋습니다.

항상 아쉬움과 후회의 대상이었던 책들을 읽는다는 게

내 마음속에 어떤 응어리를 해소해버리니까요.

요새는 이렇게 '다시 읽기'와 '반드시 읽기' 사이를 맴돌며

독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책들의 서평이나 리뷰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점.

이것도 고치면 참 좋을텐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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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의 어릿광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1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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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의 어릿광대-히가시노 게이고

 

N, 오늘부터 너에게 계속 편지를 쓰게 될 거 같아. 너는 아마도 어리둥절하겠지. 내가 왜 계속 편지를 쓰는지. 카카오톡으로 해도 될 것을, 왜 편지를 쓰는지. 니 생각이 맞아. 편지라는 글의 형식은 시대착오적이다 못해 죽어버린 장르야. 아무도 쓰지 않는 편지라는 장르를 굳이 너에게 쓰는 이유를 너는 알 수 없을 거야. 하지만 N, 나도 사정이 있어. 나도 매일매일 글을 쓰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았다면, 너에게 편지 같은 걸 쓰지 않았을 거야. 나는 매일매일 글을 쓰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맹세를 해버린 탓에 어쩔 수 없어. 뭐라도 해야지. 되도 안되는 몸부림이라도 치고, 생쇼라도 해야지. 맹세라는 이름을 빌린 저주를 벗어나려면(^^;;) 주술적인 행동이라도 해봐야 하는 거야. 다행인 건 나에게 너가 있다는 점이야. 나는 종종 너에게 쓰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서평을 쓰곤 했어. 심심풀이삼아, 똑같은 서평을 쓰는 게 지겨워서, 가끔식 쓰던 이 서평을 이제는 지속적으로 진행해보려 해. 쓰기도 편하고, 할 말도 많아지니까. 편지를 보내는 사람만 있고, 편지를 받는 사람은 자신한테 편지가 오는지도 모르는, 편지를 쓴 사람에게 계속 되돌아오는 이 일방향의 편지는 계속될거야. 내가 힘들어질때까지.

 

이 시리즈의 첫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허상의 어릿광대>. <용의자 X의 헌신>이 포함된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7편이야. 7편까지 나온 거 보면 이 시리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겠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가가 형사 시리즈와 더불어 히가시노 게이고를 대표하는 시리즈물이야. 형사 냄새 물씬 풍기며 인간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춘 가가 형사 시리즈와 달리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주로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추리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어. 어떻게 보면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최초의 추리소설인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에서 이어지는 흐름에 호응하고 있어. 포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어. 닫힌 밀실에서 벌어진 수수께끼의 살인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여주며. 근대가 아닌 전근대였다면, 닫힌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귀신이나 유령, 악마의 소행 혹은 신의 벌 같은 미신적이고 종교적이며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원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을 거야. 하지만 근대는 다르지.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인간이 홀로 스스로 세상을 밝혀나가며 세상의 원리를 파헤치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는 과거의 사고방식이 설 자리가 없어. 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기반하며,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거기에는 신이니 천사니 악마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들이 설 자리가 없어. 거기에 있는 건 이성적인 인간과 그런 인간이 밝혀낸 인과관계가 있을 뿐이야.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도 마찬가지야. <탐정 갈릴레오>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에서 유가와 마나부 교수는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과학자 특유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기반하여 해결해나가. 불가사의하고, 말도 안 되며, 초현실적인 사건들은 그의 머리 앞에서, 인간들이 저지른 단순한 사건이 되어버리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리즈가 무조건 과학적인 사고방식에만 기대고 있냐? 그것도 아니야. <용의자 X의 헌신>을 읽었다면 알겠지만, 이 시리즈는 인간의 감정, 인간의 삶에도 관심을 주고 있어. <용의자 X의 헌신>이 살인사건의 진실을 덮으려는 천재 수학자의 계획을 천재 물리학자가 파헤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소설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건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이야.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걸 건 수학자의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파토스가 책의 핵심에 있다는 말이야. <허상의 어릿광대>에서도 나는 이것을 느꼈어. 책은 유가와 마나부 교수가 다양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여기에서도 여전히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의 사건들을 해결하는 유가와 마나부 교수의 과학적인 추리도 중요하지만, 빠질 수 없는 건 사건과 관련된 이들의 삶이야. 단지 추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인간들이 이용되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서 이끌어나가는 인간들이 엮어내는 이야기의 힘도 포함되어 있다는 거야. 이성적인 로고스와 인간의 삶이 불러일으키는 파토스의 공존이야. <허상의 어릿광대>에서 내가 본 건 그거야. 아마도 이 경향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가 계속되는 한 이어지겠지.

 

첫 편지는 여기서 마쳐야겠어. 조만간 다음 편지로 만날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구.

-너의 친구MN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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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게 좋은 겁니다.

강제로 인위적으로 한다고 해서 효율성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결과가 좋은 것도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우러러서, 하고 싶어서 해야,

효율성도 높아지고, 결과도 좋은 게 아니겠습니까?

인위적으로 하루에 한 번 씩 글쓰기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쓰고 싶을 때 쓰는 게 좋은 겁니다...

라고 비겁한 변명이자 멍멍 소리를 늘어 놓은 채

이제 그만 이라고 외치고 싶지만...

맹세의 주술에 걸려서 계속 써야겠네요.^^;;

그럼 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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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고 일어나서 보니 하루가 지나 있었습니다.

아... 잊어버리고 하루 글쓰기를 못했구나.

후회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살다보면 실수도 할 수 있으니까.

앞으로 안 하면 되니까.

그러나... 실수를 반드시 하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없는 게 인생사.^^;;

미래에 어떤 실수들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매일 글쓰기를 포기하지는 않을 예정이니까요.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당분간은 조금 빨리 글을 올릴 생각입니다.

빨리 글을 쓰면 하루를 넘길 확률이 줄어드니까요.

어쨌든 실수와 함께 한 주를 시작하니 다짐을 더욱 더 강하게 드는

효과가 있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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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이네요. 오늘은 시간이 늦지 않았습니다.

늦지 않은만큼 여유를 가지고 글을 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무엇을 어떻게 써야할지 잘 모르겠네요.

백지만 눈앞에 가득합니다.

문득 무언가 떠오르는 듯 합니다.

어제 했던 독서모임 이야기를 해볼까.

그런데, 안타깝게도, 독서모임에 나가서

책이야기는 안 하고 온갖 쓸데없는 이야기만 한 기억이 나네요.^^;;

독서모임 나가서 책 이야기는 안 하고,

쓸데없는 이야기만 했으니 쓸 거리가 없네요.

분명히 독서모임 하기 전에는 가슴 가득 할 이야기를 품었던 거 같은데,

막상 독서모임 할 때는 생각한 것과는 다른,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서 쓸데없는 이야기만 했네요.

역시 상황은 닥쳐봐야 아는 건가봐요.

준비했던 이야기 대신, 다른 분들의 이야기에 맞춰서만 이야기를 했으니.

아쉬운 김에, 준비했던 이야기 일부를 풀어봐야겠습니다.

내가 준비했던 게 완벽하게 '무'로 흩어지는 것도 아까우니까요.ㅎㅎㅎ


죽음의 수용소에서-빅터 프랭클


죽음의 수용소에 갇힌 인간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들은 거기에서 벌레이자 인간 아닌 그 무엇이 됩니다.

여기에 절망한다면, 그들에게 희망 아닌 절망만 가득한 삶이 되겠죠.

하지만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저자 빅터 프랭클은

거기에서 무언가 삶의 의미를 찾으라고,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게 가능한 일일까요?

저도 제가 겪은 일이 아니라서 잘 모르겠네요.

다만, 빅터 프랭클은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뭐, 가능할 수도 있겠죠.

만약에 그게 가능하다면,

그들의 행동은, 그들의 삶은,

단순한 삶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포착한 게 될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건, 삶의 질적인 도약이라는 말로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지 수용소에서 죽지 않기 위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넘어선,

죽음이 가득한 절망의 수용소에서 삶을 다른 단계로 업그레이드 시키는

삶의 질적인 도약.

이 뒤에도 뭔가 주저리주저리 생각한 게 있는데요,

말이 길어지는 거 같아서 이만 끝내겠습니다.

길게 늘어지는 것보다는 짧게 끝내는 게 좋으니까요.

오늘도 무사히 글을 쓴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이만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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