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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의 어릿광대 ㅣ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 7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1년 12월
평점 :
허상의 어릿광대-히가시노 게이고
N, 오늘부터 너에게 계속 편지를 쓰게 될 거 같아. 너는 아마도 어리둥절하겠지. 내가 왜 계속 편지를 쓰는지. 카카오톡으로 해도 될 것을, 왜 편지를 쓰는지. 니 생각이 맞아. 편지라는 글의 형식은 시대착오적이다 못해 죽어버린 장르야. 아무도 쓰지 않는 편지라는 장르를 굳이 너에게 쓰는 이유를 너는 알 수 없을 거야. 하지만 N, 나도 사정이 있어. 나도 매일매일 글을 쓰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았다면, 너에게 편지 같은 걸 쓰지 않았을 거야. 나는 매일매일 글을 쓰겠다는 말도 안 되는 맹세를 해버린 탓에 어쩔 수 없어. 뭐라도 해야지. 되도 안되는 몸부림이라도 치고, 생쇼라도 해야지. 맹세라는 이름을 빌린 저주를 벗어나려면(^^;;) 주술적인 행동이라도 해봐야 하는 거야. 다행인 건 나에게 너가 있다는 점이야. 나는 종종 너에게 쓰는 편지라는 형식으로 서평을 쓰곤 했어. 심심풀이삼아, 똑같은 서평을 쓰는 게 지겨워서, 가끔식 쓰던 이 서평을 이제는 지속적으로 진행해보려 해. 쓰기도 편하고, 할 말도 많아지니까. 편지를 보내는 사람만 있고, 편지를 받는 사람은 자신한테 편지가 오는지도 모르는, 편지를 쓴 사람에게 계속 되돌아오는 이 일방향의 편지는 계속될거야. 내가 힘들어질때까지.
이 시리즈의 첫 책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허상의 어릿광대>야. <용의자 X의 헌신>이 포함된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의 7편이야. 7편까지 나온 거 보면 이 시리즈의 인기를 실감할 수 있겠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가가 형사 시리즈와 더불어 히가시노 게이고를 대표하는 시리즈물이야. 형사 냄새 물씬 풍기며 인간의 이야기에 포커스를 맞춘 가가 형사 시리즈와 달리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주로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물리학자 유가와 마나부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추리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어. 어떻게 보면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는 최초의 추리소설인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에서 이어지는 흐름에 호응하고 있어. 포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이 어떻게 드러나는지를 <모르그가의 살인 사건>을 통해 잘 표현하고 있어. 닫힌 밀실에서 벌어진 수수께끼의 살인사건을 어떻게 해결하는지를 보여주며. 근대가 아닌 전근대였다면, 닫힌 밀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은 귀신이나 유령, 악마의 소행 혹은 신의 벌 같은 미신적이고 종교적이며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인 원인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을 거야. 하지만 근대는 다르지. 신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인간이 홀로 스스로 세상을 밝혀나가며 세상의 원리를 파헤치는 근대적인 사고방식에서는 과거의 사고방식이 설 자리가 없어. 포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과학적인 사고방식에 기반하며,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쳐. 거기에는 신이니 천사니 악마이니 기적이니 하는 것들이 설 자리가 없어. 거기에 있는 건 이성적인 인간과 그런 인간이 밝혀낸 인과관계가 있을 뿐이야.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도 마찬가지야. <탐정 갈릴레오>에서 시작된 이 시리즈에서 유가와 마나부 교수는 불가사의한 사건들을 과학자 특유의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사고에 기반하여 해결해나가. 불가사의하고, 말도 안 되며, 초현실적인 사건들은 그의 머리 앞에서, 인간들이 저지른 단순한 사건이 되어버리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시리즈가 무조건 과학적인 사고방식에만 기대고 있냐? 그것도 아니야. <용의자 X의 헌신>을 읽었다면 알겠지만, 이 시리즈는 인간의 감정, 인간의 삶에도 관심을 주고 있어. <용의자 X의 헌신>이 살인사건의 진실을 덮으려는 천재 수학자의 계획을 천재 물리학자가 파헤치는 구성으로 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소설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건 ‘사랑’이라는 강렬한 감정이야. 사랑 때문에 자신의 모든 걸 건 수학자의 행동이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파토스가 책의 핵심에 있다는 말이야. <허상의 어릿광대>에서도 나는 이것을 느꼈어. 책은 유가와 마나부 교수가 다양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어. 여기에서도 여전히 불가사의한 수수께끼의 사건들을 해결하는 유가와 마나부 교수의 과학적인 추리도 중요하지만, 빠질 수 없는 건 사건과 관련된 이들의 삶이야. 단지 추리를 이끌어내기 위한 도구로서 인간들이 이용되는 게 아니라, 저마다의 삶을 자신의 의지로서 이끌어나가는 인간들이 엮어내는 이야기의 힘도 포함되어 있다는 거야. 이성적인 로고스와 인간의 삶이 불러일으키는 파토스의 공존이야. <허상의 어릿광대>에서 내가 본 건 그거야. 아마도 이 경향은 탐정 갈릴레오 시리즈가 계속되는 한 이어지겠지.
첫 편지는 여기서 마쳐야겠어. 조만간 다음 편지로 만날 테니까 기대하고 있으라구.
-너의 친구M이 N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