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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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1.원청-위화

 

원청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의 이름입니다. 소설 <원청>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도시인 원청을 찾아가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그 도시에 살고 있다고 여겨지는 한 여자를 찾아나서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자 그 남자를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된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원청>은 어긋난 인연의 이야기입니다.

 

, 맞습니다. 저는 <원청>을 어긋난 인연의 이야기로 읽었습니다. 어긋나 갈라지게 된 두 사람은, 저마다의 삶을 살면서 현실과 마주하고, 마주한 현실 속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나가게 됩니다. 두 사람의 갈라선 현실은 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라는 배경을 두고 있습니다. 혼란스럽기 그지없던 그 시대의 현실은 두 사람의 삶에 역사적 현실성이라는 무게감을 더하죠. 이 역사적 현실성은 실존했던 잔혹함과 폭력성을 보여줍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폭력이 생생히 저질러졌던 살육의 현장을 위화는 가감없이 그려내면서, 소설적 현실 속에 역사를 담아내는 자신만의 문학적 방식을 이 작품에서도 사용합니다. 그건 서글프면서도 기쁘고 슬프면서도 즐겁습니다. 그건 그 모든 것들을 다 담아내면서 아름답습니다. 아마도 이걸 문학이라고 할 수 있겠죠.

 

위화는 초기에 폭력적이고 잔혹한 실험적인 소설들을 쓰는 작가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랑비 속의 외침> 이후로는 초기의 경향을 벗어나 삶의 아름다움을 그려내는 데 집중합니다. 기쁨과 슬픔과 서글픔과 힘겨움과 고단함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만들어지는 서민들의 삶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데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그건 삶의 아름다움을 형상화하려 했다는 말입니다. 오랜 기간 공들여 써내려간 <원청>에서도 위화 식의 삶의 아름다움의 문학적 형상화는 생생히 살아 있습니다. 폭력적이고 잔혹한 초기 경향의 창조적 재생산과 더불어. 아마도 위화는 지속적으로 이 삶의 아름다움을 자신의 문학 속에 담아내겠죠. 그렇다고 한다면 저도 그의 작품들을 지속적으로 읽으면서 그 삶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게 삶의 아름다움에 중독된 독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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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름다운 할머니
심윤경 지음 / 사계절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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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20.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심윤경

 

1.

독서모임에서 책 이야기 보다 쓸데없는 이야기를 너무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서평에서는 독서모임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책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는 심윤경 작가가 작가 생활 20년 만에 처음으로 발표한 에세이입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며 에세이집이지만 소설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디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냐고요? 보통 소설은 가상의 서사를 다루고 있습니다. 소설이 현실적이든 현실적이지 않든 소설에는 서사가 핵심에 놓여 있는 경우가 많죠. 그에 비해 에세이는 서사보다는 개인 감정의 표현이나 삶의 묘사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핵심에는 서사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어떤 서사냐고요? 자기 삶을 그리는 자기 서사라는 대답을 해야겠습니다.

 

2.

저자인 심은경은 자식을 낳고 양육에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양육의 어려움을 겪는 과정에서 저자인 나는 어려움을 해결하고자 자신이 성장한 과정을 파고들게 됩니다. 자신의 성장과정을 파고드니 저자는 자신의 양육 과정의 핵심에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가 놓여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저자의 할머니는 언어의 미니멀리스트입니다. 많은 말 보다는 적은 수의 말을 하고, 말이 아닌 다른 것들로 손녀인 저자와의 상호관계를 이끌어나갑니다. 끊임없는 신뢰, 상호 존중의 비언어적 제스처, 애정의 지속적인 비언어적 표현, 여유있는 언어 사용과 기다려주는 행동, 흔들림없는 안정적인 감정 등으로 저자의 할머니는 예민하고 별난 저자의 흔들림없는 안식처이자 편안한 보금자리가 되어줍니다. 저자는 할머니라는 평안하고 안정적인 토대를 통해 유년기를 별문제없이 지나가고 원만한 인간관계를 할 수 있는 인간이 됩니다.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저자는 할머니가 했었던 일들을 딸과의 생활에서 최대한 적용해보려고 노력합니다. 많은 말보다는 적은 수의 말을 통해 여유를 보여주고 기다려주려고 노력하며, 세세하게 지시하기보다는 아이가 스스로 무언가 할 수 있게 해주기 등을 통해서 저자와 딸의 관계는 과거보다 더 나은 상태가 됩니다. 아이가 성장하면서 겪는 여러 가지 일들에서도 저자는 어김없이 할머니가 자신에게 베풀었던 삶의 모습을 이용합니다. 이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이 겪었던 극심한 작가적 슬럼프의 상황에서도 저자는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를 떠올리며 슬럼프를 극복해 나가게 됩니다.

 

3.

제가 읽은 에세이들은 대체적으로 일관된 구성을 지녔다기보다는 다양한 글들을 복합적으로 묶은 구성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이 책은 일관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저자인 심은경은 자기 삶을 그리는 자기 서사를 핵심으로 살아서 책을 꾸려나갑니다. 그리고 그 자기 서사의 중심에는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가 있죠. 저자 자신의 든든한 토대가 되는 나의 아름다운 할머니와 저자가 그려내는 삶의 서사를 보면서 저도 묻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의 삶을 그리는 서사에는 심윤경 작가의 아름다운 할머니 같은 든든한 토대가 있었는가? 나에게도 평안하고 안정적인 삶의 근원적인 무언가가 되는 게 있었는가? 이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가 없네요. 저도 저자처럼 제 삶을 곰곰이 들여다보며 무언가를 찾아봐야 겠습니다. 찾다보면 저만의 아름다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도 있겠죠. 그러면 저도 어쩌면 그걸 토대로 무언가 다른 글을 쓸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가령 나의 아름다운 책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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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베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5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권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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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9.맥베스-윌리엄 셰익스피어

 

인생은 걸어다니는 그림자일 뿐.

무대에서 잠시 거들먹거리고 종종거리고 돌아다니지만얼마 안 가 잊히고 마는 처량한 배우일 뿐.

떠들썩하고 분노 또한 대단하지만,

바보 천치들이 지껄이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이야기. (p.137)

 

<햄릿>은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가장 분량이 많고 모호하고 불확실합니다. <리어 왕>4대 비극 중 가장 어둡고 슬픕니다. <오셀로>4대 비극 중 인간의 정념에 가장 집중합니다. <맥베스>4대 비극 중 가장 전개가 빠릅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이야기할 책은 4대 비극 중 가장 전개가 빠르다고 여겨지는 <맥베스>입니다.

 

텍스트를 보는 다양한 방식이 있겠지만, 저는 <맥베스>를 주인공인 맥베스의 심리 변화를 통해 들여다봅니다. 우선 맥베스는 공을 세워 기뻐하는 상태에 있습니다. 다음으로 맥베스는 세 마녀를 만나 그 자신이 왕이 된다는 말을 듣습니다. 마치 악마의 유혹 같은 이 말은 맥베스에게 의혹을 안깁니다. 진짜 내가 왕이 될 수 있을까. 의심하는 맥베스에게 현재의 왕을 죽일 기회가 옵니다. 맥베스는 주저하죠. 하지만 아내가 맥베스를 몰아붙이며 맥베스는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됩니다. 그 이후로는 그 이전의 인간 맥베스가 아닌 악당 맥베스, 폭군 맥베스, 권력에 집착하는 맥베스의 영역입니다. 이 상태에서 맥베스에게 의심이나 주저는 없습니다. 그는 권력을 지키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존재로서 행동합니다. 자신이 죽인 인물의 유령이 보이면서 맥베스에게 슬슬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맥베스는 애써 무시합니다. 자신에게 들이닥칠 파멸의 그림자를 무시하지만 현실은 그의 생각과는 다릅니다. 맥베스는 현실 부정 끝에 자신이 부정하던 현실에게 따라잡혀 죽음을 맞습니다.

 

이건 안정된 지위를 누리다 변화를 겪는 과정과 이어집니다. 자신의 상태에 만족하던 한 인물이 세 마녀를 만나서 동요되고, 변화하게 됩니다. 이 때 세 마녀가 맥베스에가 불어넣은 건 야망이라는 개념입니다. 자신만의 삶에 머무르던 맥베스는 세 마녀가 불어넣은 야망이라는 마법에 홀려 위로 날아오르려 합니다. 처음에는 의심하죠. 내가 올라갈 수 있을까? 저 위로 날아오르는 게 가능할까? 주저할 때 아내는 확신을 심어줍니다. 그래 해보자. 해보는 거야. 도덕이니 윤리니 하는 것들을 버리고 그는 자신에게 은혜를 베푼 왕을 죽이고 자신이 왕의 자리에 오릅니다. 위로 올라왔으니 그는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려고 합니다. 내려 가기 싫으니 수단방법 안 가리고 위의 자리를 지키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자리를 지키려는 그의 행동이 그의 파멸을 초래합니다. 그의 파렴치함과 부도덕함과 폭력성에 반발한 이들이 그를 몰아내려고 합니다. 맥베스는 주변에서 들리는 경고음에도 불구하도 눈을 감습니다. 현실에 눈을 감고 현실을 보지 않습니다. 보지 않으면 현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그러나 눈을 감는다고 존재하는 현실이 사라집니까? 현실은 사라지지 않고 맥베스의 목을 서서히 조입니다. 아내의 죽음 같은 파멸의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그는 멈출 수 없죠. 위로 올라와서 내려갈 수 없으니까요. 결론은 그의 파멸이자 죽음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결말을 보지 않으면 세 마녀의 목소리는 맥베스에게 축복처럼 보입니다. 결말을 보고나니 세 마녀의 목소리는 축복이 아닙니다. 그건 저주죠. 너는 왕이 된 다음에 죽을 거라는 저주. 근데 그 저주의 다른 이름은 야망입니다. 세 마녀가 불어넣은 야망을 다른 말로 하면 파멸입니다. 야망=파멸. 축복이 저주가 되고, 야망이 파멸이 되는 마법. 저에게 <맥베스>는 비극의 마법성을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사랑하면 죽게 되고, 올라가면 내려오고, 최상의 상태를 겪은 뒤에 파멸하는 마법을 가진 문학장르가 비극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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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셀로 열린책들 세계문학 193
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 권오숙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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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8.오셀로-윌리엄 셰익스피어

 

오셀로: 이제 내가 구원받는 길은 그녀를 미워하는 것뿐이다.

, 결혼의 저주여, 우린 이 섬세한 여인네들을

우리 것이라 할 수는 있어도,

그들의 성욕은 우리 것이 아니구나!

사랑하는 것을 한 켠에 두고 타인들이 사용하게 할 바에야

차라리 두꺼비가 되어 동굴의 수증기를 먹고 살아가련다.

허나 이는 지체 높은 자들이 걸리는 역병.

이런 운명에는 그들이 천한 자들보다 더 노출되어 있다.

이것은 죽음처럼 피할 수 없는 운명.

이 갈라진 뿔을 이마에 지니는 운명을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지니게 된다.(p.102)

 

너무나 글이 쓰기 싫었습니다. 글쓰기를 의무적으로 하게 만들어놓았는데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쓰지 말고 포기해버릴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안 쓰고 넘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여기 앉아서 글을 쓰고 있네요.^^;; 앉아서 글을 쓰려고 하니 <오셀로>에 관해서 써야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드네요.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내 마음이 쓰라네요. ㅎㅎㅎ

 

제 마음에 물어봤습니다. <오셀로>는 어떤 작품이냐고? 제 마음이 대답을 하네요. <오셀로>는 질투라는 괴물이 사람을 잡아먹는 과정을 그린 비극이라고. , 제가 보기에 <오셀로>는 질투라는 감정이 사람을 사로잡은 과정을 그린 비극이자 질투가 괴물이 되어 사람을 잡아먹는 비극처럼 보였습니다. 그럼 질투라는 괴물은 누구를 잡아먹나요?’라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질투가 잡아먹은 건 오셀로라고 생각합니다. 오셀로의 마음 속에서 생겨난 질투는 어느 순간 걷잡을 수 없이 커지더니 아내를 죽이는 것도 모자라 오셀로 본인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습니다. 그 과정을 보고나니 질투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말이 저절로 떠오르더군요.

 

질투가 그냥 생긴 건 아니겠죠. , 맞습니다. <오셀로>에서 오셀로의 질투를 키워내는 존재는 이아고라는 악역입니다. 현대 정신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사이코패스에 가까운 이아고는 오셀로를 부추겨 질투를 불러 일으켜 아내를 죽이게 만들고, 오셀로 자신마저 죽음으로 몰아넣은, <오셀로>라는 비극의 핵심적 인물입니다. 저는 이아고의 모습을 보면서 을 형상화한 존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의 느낌이 나지 않고 오직 오셀로의 파멸에만 몰두하는 인물로서, 유혹하는 존재이자 유혹의 끝에 파멸을 가져다 주기 때문에.

 

저에게 <오셀로>는 순수한 여인인 데스데모나라는 아내와 함께하는 선의 영역에서 이아고의 유혹에 넘어가 질투에 사로잡혀 이아고와 함께하는 악의 영역으로 진입한 오셀로가 파멸하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선에서 악으로의 변화, 선과 악의 대립에서 악의 승리를 그려내면서 인간에게 경고하는 비극. 제가 너무 이분법적으로 보고 있는 걸까요? 그러나 이렇게 바라보면 <오셀로>가 더 흥미로워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여기서 제가 하지 않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오셀로의 자아가 더 튼튼했다면, 아니 자아를 받치는 심리적인 부분에서 조금 더 확실한 자존감이 있었다면 이아고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오셀로의 자아에는 그가 이룬 뛰어난 업적과는 어울리지 않는 불안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그건 오셀로가 흑인이라는 점과 연관이 있습니다. 책에서 언뜻언뜻 드러나지만 백인 위주의 사회에서 흑인이라는 건 엄청난 불안감을 불러 일으킬 수밖에 없습니다. 언제라도 추락할 수 있다는, 언제라도 내쳐질 수 있다는, 나는 저들과 다르기 때문에 불완전하다는 심리적인 불안감이 내면에 존재할 수 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그 불안감이 있었기에 이아고의 유혹이 통했던 것이고, 데스데모나에 대한 믿음이 더 쉽게 무너질 수 있었던 겁니다. 결국 저는 <오셀로>를 오셀로가 질투에 사로잡혀 선에서 악으로 건너가 파멸하는 비극이자 그 흐름의 근저에 인종주의가 맴돌고 있는 비극으로 바라봅니다. 정념의 비극에 인종주의가 더해진 비극. 그것이 제가 바라보는 <오셀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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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민음사 사서四書
동양고전연구회 역주 / 민음사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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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17.논어-공자(민음사)

 

1-1 선생님꼐서 말씀하셨다. ‘배우고 그것을 때에 막혀 나가면 기쁘지 않겠는가?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않겠는가?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움을 품지 않으면 군자답지 않겠는가?’ _ 학이(學而)

 

저는 고전을 읽을 때 원전을 바로 읽지 않습니다. 먼저 원전을 설명하는 해설서를 읽고 어느 정도의 이해의 틀을 만들어놓습니다. 그 다음 단계로 저는 원전 읽기를 시도합니다. 몇 년 전 동양 고전을 열심히 읽기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설서들을 읽고 나서 원전 읽기로 가는 건. 동양 고전에서 가장 먼저 손을 댄 것이 <논어>였고, <논어>도 해설서들을 원전보다 먼저 읽었습니다. 대충 알고는 있었지만 해설서들을 읽으면서 저는 공자와 사랑에 빠져버렸습니다. 첫사랑이라서, 첫경험이라서 그런 걸까요? 사랑에 빠지니 공자의 모든 것이 좋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불꽃같은 사랑이란 게 영원하지는 않잖아요? 불꽃 같은 사랑의 시기가 지나면, 불꽃같은 열정이 식고 조금 더 현실화된 사랑의 시기가 도래해죠. <논어>와 공자에 대한 제 사랑도 똑같았습니다. 불꽃처럼 모든 걸 사랑하는 시기가 지나가고, 냉정하게 바라보는 시기가 도래하더군요. 그 때의 공자는 뛰어난 인물이지만 시대의 맥락에서 벗어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논어>도 모순적이고, 시대의 흔적을 담은 텍스트로 바라보게 되었죠. 저는 이런 냉정함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열정적인 옹호는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만들어주니까요.

 

지금 저에게 공자는 만고의 스승이라거나 사상의 대종사 같은 느낌은 아닙니다. 저에게 공자는 한 시대를 풍미한 사상가로서 이후 세대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인물 정도로서 생각됩니다. <논어>에 대한 평가도 동양고전 최강의 텍스트라거나 영원불멸의 진리를 담은 책으로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읽다보면 좋은 구절이 많은 동양고전 정도로만 생각됩니다. (사실 저는 <노자><장자>를 성향상 더 좋아합니다.^^;;) 찬성과 긍정으로만 가득한 평가도 아니고, 부정으로만 가득한 평가도 아닌, 그 중간 어디쯤에서 왔다갔다하는 사상가이자 텍스트로서 공자와 <논어>를 바라보고 있다는 말입니다.

 

저는 긍정과 부정을 왔다갔다하는 상태에서 지속적으로 <논어> 관련 해설서들과 원전의 다양한 판본들을 읽었습니다. 민음사 판본의 <논어>도 민음사 번역본의 <대학>,<중용> 다음에 읽었죠. 번역이 다른 고전들을 읽다보면 작은 차이들이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작은 차이들이 책의 차별점으로 이어집니다. 제가 보기에 민음사 버전 <논어>의 번역은 초보자도 쉽게 읽을 수 있는, 바로 이해되는 번역은 아닙니다. 번역 언어 자체의 정확성에 더 치중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상세한 해설이 덧붙여 있어서 읽는데 어려움은 없습니다.

 

결론적으로 <논어>를 지속적으로 읽는다는 건, 텍스트를 통해서 공자의 음성을 계속 듣는 것에 다름 아닙니다. 제 마음에 들려오는 공자의 목소리는, 혼돈의 시대에서 자신이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주나라의 예법을 되살리는 것이자 인을 강조하는 것이고 누구도 차별하지 않고 가르침을 주는 것이고 사람에 따라 다른 가르침을 주는 것이자 실패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묵묵히 가는 사람의 음성입니다. <논어> 읽기가 계속될 예정이니 이 음성은 앞으로도 제 마음 속에 사라지지 않고 꾸준히 이어질 겁니다. 잊혀지지 않는 과거의 목소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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