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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현산의 사소한 부탁
황현산 지음 / 난다 / 2018년 6월
평점 :
말 그대로 사소한 부탁이지만, 이들 지엽적인 부탁이 어떤 알레고리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95)
<사소한 부탁>은 제 입장에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뉩니다. 칼럼을 묶은 부분과 시,소설,사진,영화에 관한 비평을 묶은 부분으로. 칼럼을 묶은 부분은 <밤이 선생이다>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동시대의 사건이나 사고에 관련한 즉물적 시각이나 생각을 정당화하는 단순한 칼럼이 아니라, 프랑스문학을 읽고 연구하고 비평하며 자신만의 인문학적인 시각을 갈고 닦은 한 문학연구자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인문학자가 자신의 삶에서 길어올린 인문학적 삶의 힘으로 써내려간 칼럼들은 <밤이 선생이다>처럼 깊이와 격조가 있습니다. 그건 황현산의 삶이 쌓아올린 깊이와 격조겠죠. 결국 황현산의 칼럼을 읽은 이가 받아들이는 것은 황현산의 삶의 힘인 것입니다. 칼럼에 대해서 제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입니다.
저한테 더 놀랍게 다가온 건 뒷부분의 비평입니다. 제가 요새 생각하는 게 비평에 관한 부분이거든요. 황현산의 비평이 제가 생각하는 부분을 잘 건드려서 놀랍게 다가온 것 같습니다. 저는 황현산의 비평을 읽으며 게오르그 루카치의 명구가 떠올랐습니다.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며,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그리고 별빛이 그 길을 훤히 밝혀 주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소설의 이론> 중에서) 이 말을 저만의 방식대로 해석하며 제가 생각하는 바를 이야기해보겠습니다. 루카치의 명구는 저에게, 전근대인들이 느낀 자연과의 친밀감,일체감이 가져다주는 자연적이고 아름다운 감각을, 자연을 정복과 이용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근대인들이 느낄 수 없고, 따라서 근대인들은 전근대인들이 느낀 행복감을 느끼치 못한 채 고립되고 외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말처럼 들렸습니다. 이걸 비평에 적용해서 저만의 방식대로 해석해보면, 비평이란 고립되고 외로운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근대인들이 자신만의 방식으로 어떠한 삶의 성좌를 그려나가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이게 무슨 말이야?'라고 물을 수 있겠죠. 좀 더 자세하게 말해보겠습니다. 제가 보기에, 비평이란 비평의 대상이 되는 컨텐츠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을 토대로 무언가 다른 자신만의 삶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것입니다. 이때 다른 삶의 지도를 그려나간다는 말은 자신의 의도했든 안했든 근대인이 잃어버린 전근대인의 감각이나 삶의 방식을 비평이라는 방식으로 새롭게 되살려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근대인이 잃어버린 어떤 인간적인 감각의 회복이자 인간성의 회복을 비평이 할 수 있다는 말이죠.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비평이 그려내는 삶의 지도, 혹은 삶의 성좌가 힘이 있어야 겠죠. 힘이 있어야 전근대인이 잃어버린 그 무엇을 되찾을 수 있으니까요. 더불어 그것은 근대라는 시간을 살아가는 인간들에게 삶을 살아가는 힘을 줄겁니다.
저에게 황현산의 비평은, 황현산이 비평을 통해서 그려내는 자신만의 삶의 성좌는, 힘이 있습니다. 그것은 깊이 있고 격조 있는 황현산의 비평의 언어 때문입니다. 또 비평에 황현산이라는 한 인물의 삶의 힘이 녹아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문화 컨텐츠가 황현산이라는 인물의 삶이라는 필터를 통과해서, 그 인물의 언어라는 필터를 통과해서, 우리에게 다가와서 펼쳐보이는 비평의 성좌는 우리 삶을 재구성하고 재창조하여 우리 삶을 새롭게 만듭니다. 삶을 새롭게 하기, 그러면서 잃어버린 과거의 힘을 복원하기. 황현산의 비평이 보여주는 것이 제가 생각하는 비평의 개념과 맞아떨어졌기 때문에 저에게 황현산의 비평은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건 저로 하여금 다시금 비평을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책을 덮으며 꿈꾸어 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저만의 비평을. 나의 삶이 녹아있는, 나만이 줄 수 있는 삶의 힘으로 가득한 비평을. 물론 그게 언제 가능할지 알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