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고아였을 때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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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1.우리가 고아였을 때-가즈오 이시구로

늙은이가 조롱하는 건 너무 쉽지. 아마 당신 말이 맞을 거요, 젊은 친구. 아마도 우리는 사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이 되어 가는 걸 너무 오랫동안 방치했는지도 모르겠소.(29~30)
그 애는 일어나 앉더니 한쪽 창에 늘어진 가느다란 발을 가리켰다. 그러고는, 우리 아이들은 저 발의 가느다란 조각을 한데 묶어 놓은 실과 같다고 말했다. 언젠가 일본의 승려가 그 애한테 그렇게 말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종종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지만 우리 아이들은 단지 한 가족을 결합시킬 뿐 아니라 온 세상을 한데 묶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 우리가 제 몫을 다하지 못하면 발은 바닥에 떨어져 흩어져 버리고 말 것이다.(108)
나는 너 같은 소년들이 모두 온갖 것을 이것저것 경험하며 성장하는 게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해. 그러면 사람들이 서로를 훨씬 더 잘 대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야. 무엇보다 이런 전쟁도 줄어들게 될 거다.(112)
아무튼 우리가 어렸을 때는 사태가 나빠져도 바로잡을 능력이 없었지. 하지만 이제 어른이 됐으니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어. 그게 중요해. 우리를 좀 봐, 아키라. 이 모든 일이 지나고 나면 우리는 결국 사태를 바로잡을 수 있을 거야.(369~370
아주 중요해. 그리워한다는 것 말이야. 그리워하면 기억하게 되거든. 우리가 어른이 되면 세상이 지금보다 더 나아지리라는 걸 말이야. 우리는 그 기억을 가지고 좋은 세상이 다시 돌아오기를 바라는 거야.(370~371)
이제 세상의 실상을 알겠니? ... 네 어머니는 네가 영원히 그 마술 같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랐지. 하지만 그건 불가능한 일이야. 결국 그런 세상은 산산조각 나게 마련이야. 네게 있어서 그 세상이 그토록 오랫동안 남아 있었던 건 기적이야.(414)
우리 같은 사람들의 운명은, 사라진 부모의 그림자를 오랜 세월 뒤쫓으면서 고아로서 세상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리로서는 그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서 그 임무를 완수하려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 그러기 전까지는 마음의 평화를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441)
책을 덮으면서 어쩌면 고아가 된다는 것이 실제로 부모를 여의는 사실 여부와 상관없을지도 모른다고, 낙원을 잃은 이후 인간은 모두 고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시구로가 어쩔 수 없이 '문학'적인 이유다.(449)

책을 덮고 난뒤에 고개가 갸웃거려집니다. 파악하고 분석하고 분류하려는 저의 욕망이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어떤 범주로 분류할지 난감해지기 때문입니다. 성장소설로 봐야할까? 아니면 가즈오 이시구로식 탐정소설? 뭐가 뭔지 모르겠으니 소설로 할까? 고민 끝에 저 나름의 답을 내려봅니다. 이 소설은 가즈오 이시구로만이 쓸 수 있는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고. 저에게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라고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제 개인 팟캐스트 방송에서도 말했지만, 가즈오 이시구로는 자기가 쓰고 싶어하는 이야기를 소설로 써내려갑니다. 근데 쓰다보니 SF가 되었다가(<너를 보내지마>), 판타지가 되었다가(<파묻힌 거인>), 역사물이 되었다가(<남아 있는 나날>), 탐정 소설이(<우리가 고아였을 때>) 됩니다. 쓰고 싶은 대로 흘러가다가 특정한 장르물이 되는 거지 자신이 장르물을 쓰고 싶어서 쓰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들은 장르물의 외양을 띠고 있지만 장르물에 종속되지 않습니다. 특정 장르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으며 장르물이라기보다는 '소설' 혹은 '문학'의 범주로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고 나직하게 속삭입니다. 그 속삭임을 듣다보면 그의 소설들이 장르물이지만 장르물이 아닌 오직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는 장르에 속하게 되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도 추리소설의 외양을 띠고 있습니다.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오고, 범죄와 연관된 듯한 주인공 부모의 실종사건의 진실을 찾아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즈오 이시구로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습니다. 마치 동화 같은, 우화 소설 같은 면모를 보이면서 독자를 현실인데 현실 아닌 혼란스런 전쟁터의 한가운데로 안내하더니 모든 것을 무너뜨려버리는 진실을 알려주며 독자와 소설 속 주인공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보르헤스가 말한 세상의 혼란을 일으킨 사건을 탐정이 해결하고 다시 질서 잡힌 세상으로 돌아간다는 추리소설의 보수적인 기본공식이 무너져내리는 거죠. 결국 독자와 소설 속 주인공이 감내할 것은 질서 잡힌 세상으로 되돌아간다는 삶의 리사이클이 아니라, 삶의 혼란을 혼란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는 용기입니다. 내가 아는 세상, 내가 살아왔던 삶, 나라는 존재가, 다 무너져내리고 더 이상의 내가 아는 세상, 내가 살아왔던 삶, 나라는 존재가 아니게 될 때도,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고 살아가는 용기. 탐정이 살인사건을 해결할 수 있지만, 전쟁 같은 세상의 큰 사건을 해결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의 과거 삶의 혼란조차 감당할 수 없다는 그 무력감을 받아들이고 살아야한다는 용기.

이건 성장소설을 연상시킵니다. 어떤 계기를 통해 주인공이 아이나 성숙하지 못한 존재에서 어른이나 성숙한 존재로 탈바꿈한다는 성장소설의 틀을. 하지만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구도가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마치 현실이 아닌 듯한, 우화나 동화 같은 비극의 한가운데를 통과하고 얻는 것이 내가 아는 나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내가 아는 세상과 삶이 더 이상의 예전의 세상과 삶이 아니라는, 내 불확실한 기억과 불완전한 언어와 말로 표현되는 나의 정체성이란 불확실하고 부조리한 것에 불과하다는, 우리는 시대와 삶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무력한 존재로서 무력하고 미숙한 존재이지만 살아나갈 수밖에 없다는, 지나치게 쓰디써서 가슴이 아픈 시큼한 문학적 삶의 진실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나란 누구인가'를 묻다 나가 무참히 무너져내려 나란 누구인가를 질문할 수 없는, 세상과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다 내가 아는 세상과 삶이 무너져내려 삶이란 말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말할 수 없는 것'에 침묵하고 삶을 묵묵히 느낄 수밖에 없게 된 어느 가상의 철학자 같은 경험. 그걸 '성숙'으로 볼 수도 있겠죠. 삶을 언어와 말로 표현하지 않고 몸으로 받아들이고 수용하게 됐으니까요. 근데 그건 성숙이 아닌, 삶의 진실 중 하나의 발견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진실 중 하나? 삶이란 말해질 수 없다는, 말해질 수 없는 삶을 말하고 표현하기 위해 문학은 불완전한 언어와 불확실한 기억의 틀로 주조된 삶과 유사한 문학적 삶을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끊임없이 재생산할 수밖에 없다는 진실.

영국식 언어가 품격을 갖추고 펼쳐지는 <우리가 고아였을 때>라는 소설이 직접 말하는 부분과 말하지 않은 부분에서 말해지는 삶의 진실들에 귀기울이니, 삶의 서글픔에,쓰디씀에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삶이란 이토록 아름답고 슬픈 것이라는. 모든 것을 말로 할 수 없고, 우리의 기억조차 믿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얼마나 불완전하면서도 힘겨운지를. 하지만 우리는 포기할 수 없습니다. 이 삶이 슬프고 쓰디쓰더라도 우리는 살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해서 삶을 살아내는 것만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삶의 진실이자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가즈오 이시구로가 소설을 계속해서 써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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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unsun09 2017-12-22 18: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이 힘들어도 포기하지말고 살아가야 하는데 인간에게 그 의지의
한계점이 어디까지일까, 문득 궁금해집니다. 의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짜라투스트라 2017-12-22 19:18   좋아요 1 | URL
네 감사합니다.^^

[그장소] 2017-12-22 2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뭐...저는 이 책을 ( 나루토 그림자분신술에서 이름을 가져와봅니다) 분신 소설이라고 말이죠 . ^^

짜라투스트라 2017-12-22 21:58   좋아요 1 | URL
분신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