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번 이상의 반복과 1번의 사랑

'영원한 회귀란 신비로운 사상이고, 니체는 이것으로 많은 철학자를 곤경에 빠드렸다. 우리가 이미 겪었던 일이 어느 날 그대로 반복될 것이고 이 반복 또한 무한히 반복된다고 생각하면! 이 우스꽝스러운 신화가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뒤집어 생각해 보면 영원한 회귀가 주장하는 바는, 인생이란 한번 사라지면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에 한낱 그림자 같은 것이고, 그래서 산다는 것에는 아무런 무게도 없고 우리는 처음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어서, 삶이 아무리 잔혹하고 아름답고 혹은 찬란하다 할지라도 그 잔혹함과 아름다움과 찬란함조차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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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영원한 회귀라는 사상은, 세상사를 우리가 아는 그대로 보지 않게 해 주는 시점을 일컫는 것이라고 해 두자. 다시 말해 세상사는, 세상사가 덧없는 것이라는 정상참작을 배제한 상태에서 우리에게 나타난다. 사실 이 정상참작 때문에 우리는 어떤 심판도 내릴 수 없다. 곧 사라지고 말 덧없는 것을 비난할 수 있을까? 석양으로 오렌지 빛을 띤 구름은 모든 것을 향수의 매력으로 빛나게 한다. 단두대조차도.(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p.9~10)

'세계의 관점이 아닌 우리들의 관점에서 영원회귀는 하나의 선택[의지]을 요구한다. 세계 속에 존재하는 하나의 사물로서 우리 역시 생성과 소멸의 반복하는 운동 속에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구체적으로 그것을 선택함으로써 건강한 변신을 이루는 것은 중요하다. 니체는 살아 있는 우리 자신이 영원회귀를 능동적으로 택하는 것이 좋은 것(도덕적 의미의 선한 것과는 다르다)임을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영원회귀에 대한 우리의 선택[의지]은 우리 자신 안에, 그리고 세계 안에 예전부터 존재하고는 있었지만 단지 잠재적 형태로만 그러했던 새로운 존재들을 현실화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사물들과 더불어 거대한 '우주 교향곡'을 공연하는 연주자이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에 있었지만 한 번도 연주된 적이 없던 하나의 멜로디가 울려퍼질 수 있다면 그것은 멋진 일이 아닐까.(니체의 위험한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p.280)

20번 이상의 데미안 독서. 하나의 책을 20번 이상이나 읽는다는 건, 니체의 영원회귀와 같은 무한한 반복을 경험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누군가의 입장에서는 지겨움과의 사투와도 같은 20번 이상의 독서를 한다는 건, 어떤 각오를 포함하고 있다. 지겹지만 지겹지 않게 읽겠다는 각오. 그건 니체가 말한 영원회귀를 대하는 태도와 이어진다. 무한한 반복을 지겨움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매순간마다 무한한 긍정의 계기로 받아들이겠다는. 내가 의식적으로 니체와 같은 철학적 자세를 유지했던 것은 아니다. 읽고 읽고 또 읽고를 반복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매순간의 독서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됐다. 반복 끝에 도달한 반복 아닌 무한한 새로움의 창조. 똑같은 글들을 매순간 새롭게 받아들인다는 건, 반복을 넘어섰다는 것과 같다. 아니, 반복을 반복스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말이자 반복을 반복같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말일 것이다. <데미안>은 내게 ‘반복 아닌 반복’의 대명사처럼 여겨진다. ‘반복 아닌 반복’이기에 나는 겁내지 않고 틈만나면 <데미안>을 펼쳐 읽는다.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 바로 그것을 나는 살아보려고 했다. 왜 그것이 그토록 어려웠을까.’ 내 속에서 솟아 나오려는 것을 살아보려고 했던 이야기, 자기 자신을 찾아 나선 이야기, 자기 안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아나가는 이야기, 완전한 자기 자신을 바라보려고 노력한 이야기... 똑같지만 다른 무수한 이야기들 속을 헤매다보면 나 자신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이야기를 따라 나를 들여다보면 깜짝 놀라게 된다. 내 안에 무수히 많은 ‘나’들이 있어서. 무수히 많은 나들을 만나다 다시 책을 보면 알을 깨고 날아가는 새의 형상이 보인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 자신이라는 알을 깨는 경험을 한 기분이다. 깨고 깨고 또 깨고. 무수히 많은 나 자신을 감싼 알껍질들을 깨고 보니 예전의 나는 사라진 것 같다. 시간이 지난 만큼 나도 변화해 왔고, 그 시간과 함께 계속해서 <데미안>을 읽다보니 생겨난 변화의 흐름을 반영했다고 할까. 어느새 나와 싱클레어는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된 ‘우리’를 연결시키는 건 ‘사랑’의 감정이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나를 허물어뜨린 사랑의 감정. 그때 나는 싱클레어를, 데미안을, 베아트리체를, 에바부인을, 아프락사스를, 소설 <데미안>을 너무나 사랑하게 되어 이 사랑이 계속되리라는 운명을 느겼다. 무수히 반복되는 독서 속에서도 나를 지탱하는 건 그 사랑의 감정이다. 20번이 넘는 반복은 1번의 사랑이 무한히 지속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사랑은 나를 데미안 속에서 살게 하고, 싱클레어와 하나 되게 만든다. 벗어날 수 없는 무한의 열병 같은 사랑 앞에서 나는 무력하게 패배를 선언하고 다시 <데미안>속 ‘데미안’을 들여다본다. 나와 완전히 닮아 있는, 내 친구이자 나의 인도자인 데미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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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prenown 2017-11-01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번 이상의 데미안 독서. 하나의 책을 20번 이상이나 읽는다.. 대단합니다! 좋은 책은 이렇게 읽어야 하는데..

짜라투스트라 2017-11-01 11:32   좋아요 1 | URL
아 어떻게 하다보니 그렇게 되네요^^

cyrus 2017-11-01 1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0번의 독서도 대단하지만 그 반복적인 독서 후에 느낀 생각을 글로 정리하느라 수 차례의 퇴고를 거쳤을 짜라투스트라님의 글쓰기가 더 대단합니다. ^^

짜라투스트라 2017-11-01 22:02   좋아요 1 | URL
아 감사합니다.^^ 그냥 제 생각을 글로 쓴 건데 너무 좋게 봐주셨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