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 『고민하는 힘』 중 7 ~ 9 장
7.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나쓰메 소세키가 묘사한 남녀의 사랑에는 특징이 있어서 때로는 ˝삼각관계만을 썼다˝, ˝불륜만을 묘사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쓰메 소세키가 근대 지식인의 `연애가 지닌 환상의 비극`과 같은 측면을 묘사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다고 봅니다. (128)
예를 들면 부모에게 얹혀살고 있는 『그 후』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아버지에게 경제적 원조를 받는 조건으로 자산가의 딸과 정략결혼을 하라는 압력을 받습니다. 그러나 다이스케는 친구인 히라오카의 아내 미치요와의 금지된 사랑 쪽에 `진실한 사랑`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내어 미치요를 선택합니다. 하지만 정작 미치요의 각오가 단단해지자 겁을 집어먹습니다. (128)
『행인』의 이치로는 아내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어떤지 확신을 갖지 못하고 동생에게 아내를 유혹해 볼 것을 의뢰합니다. (128)
나는 개인적으로 『문』에 나오는 소스케와 요오네 부부를 좋아합니다. 과거에 친구를 배반할 정도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그들은 현재 참회의 마음을 가지고 의욕이 없는 은둔 생활을 하고 있지만 그들의 생활 속에는 재 속에 남아 있는 불꽃 같은 따스함이 있습니다. (138)
부부 관계만 보면 도저히 구제할 수 없을 듯이 보이는 『길 위의 생』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이 작품은 나쓰메 소세키와 교코의 실제 모습과 가장 닮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상당히 냉엄한 부분이 있지만, 주인공 겐조가 아내의 급한 출산에 허둥대는 장면 등은 매우 사실적이어서 쉽게 자를 수 없는 인연 같은 것을 느끼게 합니다. 그리고 부부가 처절한 심리전을 진행하듯이 전개되는 『명암』에서도 쓰다와 노부의 마음이 이상한 형태로 `동지`처럼 결합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138)
생각해 보면 부부에게는 부모 자식 같은 혈연관계가 없습 니다. 원래는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한쪽이 세상을 떠나면 비탄에 잠기고 상대에 대한 애절한 마음을 갖습니다. 그것은 사랑이 모습을 바꾸면서 서로 속에 존재하고 그렇게 쌓인 것이 자기 인생이 되기 때문이 아닐까요? 따라서 사랑이 성취되었는지 어떤지는 인생이 끝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138)
또 하나 덧붙인다면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 속에는 다소 악녀적인 여성이 등장하지만 극단적인 바람둥이는 나오지 않습니다. 묘사되어 있는 것은 새롭고 신기한 모험이 아니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계입니다. 앞에서 연애 환상이라는 것에 대해 이야기를 했는데, 관점을 달리해 보면 나쓰메 소세키는 일상의 남녀 모습 속에 최대의 모험적인 연애가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139)
또 하나 나쓰메 소세키의 등장인물들에 대해 말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이 남녀의 상호작용에 의한 결과라는 의미에서 그들은 결코 사랑에 대해 게으르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139)
8. 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나쓰메 소세키의 『유리문 안에서』에는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날 나쓰메 소세키에게 여자가 찾아와서 개인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듣기에 매우 괴로울 정도의 비통한 이야기였습니다. 여자는 이야기를 마친 뒤에 나쓰메 소세키에게 “만약 나와 같은 여자를 주인공으로 삼아 소설을 쓴다면 그 여자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 아니면 살아야 한다고 쓸 것인지” 묻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그 여자가 세상에서 꼼짝달싹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렇지만 여자에게 “죽지 말고 살아야 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늘 자기 가슴속에 “죽음은 삶보다 귀하다는 말이 떠돌고 있었음을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살아 있는 이유는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이렇게 몇 백 년, 몇 천 년 계속 되어 온 생명의 습관을 자기 대에서 끝낼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바로 “살아 있는 것이 고통이라면 죽어도 좋겠지요˝라는 말을 끝내 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늘 삶보다 죽음이 귀하다고 믿고 있던 내 희망과 조언은 마침내 불쾌함으로 가득한 삶이라는 것을 초월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것은 나 스스로 평범한 자연주의자임을 드러낸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지금도 반신반의하는 눈으로 물끄러미 내 마음을 바라보고 있다.˝
`사상적으로는 죽음의 존엄을 존중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는 천수를 누려야 한다. 스스로 생명을 끊어서는 안 된다. 자기 생명은 자기 것이 아니라 조상들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정론(正論)입니다. (147-148)
여기서 나는 다시 『마음』에 나오는 `선생`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유와 고립과 자아로 가득한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그 대가로 쓸쓸함을 맛보아야 하겠지요˝라고 선생은 말합니다. (150)
9. 늙어서 `최강`이 되라
나쓰메 소세키가 세상을 떠난 것이 쉰 살, 막스 베버가 세상을 떠난 것이 쉰여섯 살 때였으니까 이미 그들이 살았던 세월을 뛰어넘었습니다. (156)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는 `노년`을 보내지 못했습니다. (157)
그렇지만 나는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어딘가에 뻔뻔함에 대한 동경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나쓰메 소세키가 친구인 마사오카 시키 (正岡子規)와 자기를 비교해서 말한 적이 몇 번 있습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시키는 천재지만 나는 천재가 아닌 수재일 뿐이다. 따라서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천재는 천성적으로 뻔뻔한 사람이지만 수재는 뻔뻔함이 없습니다. 나쓰메 소세키의 마음 속에 그런 콤플렉스가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에 더욱 분발해서 언젠가 자기도 뚫고 나가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런데 나쓰메 소세키는 뻔뻔해지기 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168-16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