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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르미날 1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21
에밀 졸라 지음, 박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8월
평점 :
대학시절 정치학 강의교재로 채택되어 영문본으로 일부분을 읽었던 기억이 나서 집어들었다. 우리말로 번역되는 데 시간이 꽤 오래 걸렸나 보다.. 일단은 프랑스 혁명사에 대한 기본이해가 있어야 겠다.1848년 2월 혁명으로 제2공화정이 들어서고,나폴레옹3세가 1851년 12월 쿠데타를 일으켜 공화정 체제를 붕괴시키고 1852년 12월 제2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에 즉위하였다.(혁명은 하루아침에 쉽게 성공하지 못한다. 테르미도르 반동을 비롯한 쿠데타..왕정복고 등)
이 책은 에밀 졸라가 프랑스 제2제정 시절 사회를 총체적으로 그려내려는 목표로 1871년부터 1893년까지 출간한 연작소설 <루공 마카르> 총서중 하나다.
이 소설 제르미날은 제2제정기를 배경으로한 탄광노동자의 비참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여기서 '사실적'이라는 말이 에밀졸라를 대표하는'자연주의적 기법'과 어떤 연관관계에 있는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문예사조에서 사실주의 다음이 자연주의였던것으로 기억한다)
아무튼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잠깐 알아보면, 에밀 졸라는 작가가 환경과 유전의 법칙에 따라 이야기 속의 사실들이 서로 연결되는 메커니즘을 보여줘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연작소설 <루공 마카르> 통해 두 가문(루공 가와 마카르 가)의 유전적 결함이 어떻게 후대에 전달되는지,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켜나가는지를 생생히 보여준다고 한다. 『목로주점』의 주인공 제르베즈의 세 자녀 나나, 에티엔, 클로드는 각각 졸라의 다른 작품 『나나』 『제르미날』 『작품』의 주인공이 된다. 『목로주점』에서는 알코올중독자인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여주인공 제르베즈가 점차 알코올중독에 빠져들면서 비참한 삶을 마감하는 이야기이다. 여성이자 세탁부인 제르베즈를 장편소설의 주인공으로 전면에 내세운 것은 당시 보수적인 문단과 사회 분위기에는 어긋나는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목로주점을 소설로 읽었던가? 영화의 몇 장면만 기억날뿐..그래서 목로주점 부터 제대로 읽어야 겠다는 생각인데, 순서에는 상관이 없을 듯하다.
기계공이었던 주인공 에티엔이 실직하고 일자리를 찾아 르 보뢰 탄광에 오고, 마외의 딸 카트린을 만나 함께 광부로서의 삶을 사는 과정에서 겪게되는 이야기.
여성이 탄광에서 일하는 것은 영국에서는 1842년부터, 프랑스에서는 1874년에야 법으로 금지되었다. 리디나 장랭, 베베르처럼 12세 미만의 어린아이들이 갱에서 일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광부들은 가족의 수입원이 줄어드는 것을 염려해 아내나 아이들이 탄광에서 일하는 것을 적극 지지했다.(52쪽 각주)
기계공으로 일하다 실직한 에티엔이 탄광에서 일자리를 구할때 탄광노동자들의 반응은 이렇다. "다들 봤지! 우리도 언제 저렇게 될지 모르는 거라고... 그러니까 불평불만일랑 늘어놓지 말자고.이렇게 일할 기회가 누구한테나 주어지는게 아니니까?"(49쪽)
에티엔이 처음으로 갱속에서의 작업을 하면서 느낀 감정과 생각에 대한 서술.
" 하지만 이제는 더는 버틸수가 없었다. 발은 피투성이에다 끔찍한 경련으로 팔다리가 뒤틀렸고, 쇠로 된 바이스로 몸통을 조이는 것 처럼 고통스러웠다."(75 쪽)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 지옥 깊숙한 곳으로 들어온 순간부터 그의 마음속에서는 서서히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그는 체념한 얼굴로 등을 바짝 구부리고 있는 카트린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죽음 같은 암흑 속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하면서 하루치 빵값도 제대로 벌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90쪽)
그들 사이에 만연한 체념과 순종의 미덕을 받아 들이기가 힘들었다.(102쪽) 그것은 너무나 부당하고 고된 일이었다. 저들에게 현혹되고 짓밟히는 짐승같은 존재로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이 그에게 반란을 부추겼다.(115쪽) 그곳을 떠나려던 그는 갱 속으로다시 내려가 고통받고 싸우기를 원했다.(117쪽) 나중에 에티엔은 탄광노동자의 대표가 되어 파업을 이끈다. 파업에 이르기까지 사측과의 협상과정이나 지도부의 의견대립, 동료를 배신하는 비열한 노동자(끄나풀)의 모습 등은 오늘날의 행태와 어쩌면 그리 비슷할까?
당시 이 탄광촌의 일상적 삶은 폭력적이다. 다시말하면 폭력이 일상인 것이다. 제정을 유지하고,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전쟁을 벌이는 국가에서부터 자신의 기득권을 보전하고, 안일한 삶을 살고자 하는 부르주아(자본가), 노동자의 임금을 깎아 이윤을 더 내려는 회사와 회사의 임금삭감에 저항하여 파업투쟁하는 노동자, 아내나 애인,어린아이에게 행해지는 체벌 등 신체적 폭력...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이르기 까지. 가난이 폭력을 낳았고, 이러한 폭력성이 프랑스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면, 우리나라도 조선후기나 한 말에는 혁명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지 않았을까? 그래서 홍경래와 동학이 있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실패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봉건적 유교이데올로기속에서 혁명지도부의 뚜렷한 지도이념,전망 부재나 하층민중들의 혁명의식이 고양되지 못한 점이 가장 큰 실패 원인이 아닐까 싶다.
광부의 아내가 탄광주식으로 편안하게 먹고 사는 부르주아에게 돈을 구걸하면서 " 오! 그렇다고 제 처지를 불평하자는 건 아닙니다. 사는게 이런 거라면 받아들여야 할 테니까요. 더구나 우리가 아무리 발버등쳐도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을지도 모르고요... 어쩌면 선한 신의 뜻이 임하는 곳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하루하루 성실하게 해나가는 게 가장 현명한 건지도 모르지요. 그렇지 않나요?"(153쪽) 1789년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면서 부르주아들만 이익을 보고, 노동자들의 삶은 더 나아진게 없었던 듯하다. 단지 자유가 확대되었다는거.. 굶어 죽을 자유만이 보장되었을 뿐이다.
민중의 언어로 탄광촌의 난잡한 성문화를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고는 하나 오늘날 페미니즘의 시각 뿐만아니라 건전한 상식을 가진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비난받아야 마땅한, 에밀졸라 또는 당시 프랑스에 만연한 여성관 " 숫처녀가 분명해 보이는 여자는 조그만 소리로 애원하고 버둥거리면서 남자에게 저항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아무 말 없이, 곰팡이가 슨 낡은 밧줄더미가 쌓여 있는 다 쓰러져 가는 컴컴한 창고 구석으로 여자를 밀어붙였다. 카트린과 꺽다리 샤발이었다. 그는 음울한 생각 대신 관능에 이끌린채 눈으로 그들을 좇으며 일의 추이를 지켜보았다. 무엇때문에 자신이 개입하겠는가? 여자들이 싫다고 하는 것은 남자들이 자신을 거칠게 다뤄주기를 바라서인 것이다."(202쪽)
오늘날 데이트 폭력의 심각성.. 여성의 성욕, 성의식에 대한 뿌리깊은 오해가 이런 걸출한 고전문학에서 태동되었음을, 그것이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어 오늘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물론, 조선시대의 가부장적 사회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비난하며 페미니즘을 논할 수 없듯이, 알코올중독과 살인충동을 유전병으로 인식한 에밀졸라, 그리고 당시 1800년대 후반, 만연한 프랑스의 성문화, 성의식이라는 시대적 한계를 무시하고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