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핍한 날의 벗 태학산문선 101
박제가 지음, 안대회 옮김 / 태학사 / 200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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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의 박지원를 필두로 홍대용,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이 모여 술을 마시고 글을 논평하고 이야기를 나눴다는 그 시절을 그려보았다. 왜 이리 가슴이 뛰던지. '북학의'의 저자로만 기억되었던 박제가. 그는 부조리한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결국 뜻을 펼치지 못하고 변방에서 생을 마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을 실패했다 말할 수 없다. 청나라에 대한 호감이 때때로 도가 넘었다 싶은 때도 있지만, 그것도 결국 시대의 한계를 마주한 자의 심정이었다 변호하고 싶다. 서얼의 수는 계속해서 늘었지만 조선 초에 만든 서얼 차별 법은 변하지 않았다. 정조 대에도 서얼 차별을 금지해달라는 상소가 여러 차례 있었지만 권력을 가진 자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 세상 속에서 능력이 있음에도 내보일 기회를 얻지 못했던 박제가의 절망은 얼마나 컸을까.  

이 책의 두께는 그리 두껍지 않지만 서얼이었기에 능력이 있어도 뜻을 펼치지 못했던 울분, 무능력한 데다 권위의식에 쩔어 희망없어 보이는 지배층에 대한 분노, 굶주리는 백성들과 차별받는 사람들에게 느끼는 안타까움 등 박제가가 느꼈던 다양한 감정과 생각을 짧게나마 맛볼 수 있었다. '백탑에서의 맑은 인연' '꽃에 미친 김군'이나 '궁핍한 날의 벗' '기술자의 대우' '개혁의 방안' 등이 좋았다. 또 어린 시절 글자 연습을 했던 책을 복원하며 옛추억을 되새기는 모습이(어린 날의 맹자) 무엇보다 따스히 가슴에 와닿았다. 낙엽에 미끄러져 넘어질뻔하다 일어나서는 누가 볼까 부끄러워 단풍잎 하나를 들고 아무렇지 않게 서 있었다는 부분(묘향산 기행)에서는 킥킥대며 웃었다. 그 모습도, 그 사실을 담담히 써내려간 모습도 왠지 웃기던걸. '묘향산 기행'에서는 무엇보다 박제가의 서정적인 면을 볼 수 있었다. 산속에서 음악을 들으니 어떻더냐 묻는 이에게 '나의 귀는 다만 물소리와 스님의 낙엽 밟는 소리만을 들었노라' 대답한 그는 아마도 낭만적인 사람이었을 것이다. 낭만을 아는 사람만이 변화를 꿈꿀 수 있다. 그것이 실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꿈꾸는 것을 나무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뜨거운 피가 흐르는 사람이니까. 다만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겠지. 나는 내 꿈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을까. 그로 인해 절망해본 적은 있을까. 현실의 벽을 깨고자 했던 박제가의 모습이 나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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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지음, 송필용 그림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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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잘 모른다. 아는 시도 얼마 없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럽지만, 시란 그저 폼을 잡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여긴 적도 있었다. 실제로 그런 것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도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시간이 흐른 뒤였다. 시가 나를 찾아왔다는 어떤 이의 말을 어렴풋이나마 이해할 것 같다 느낀 것도 그때쯤. 바람에 날린 꽃잎이 물 위로, 땅 위로, 누군가의 머리 위로.. 예상하지 못했던 곳에 도착하는 것처럼, 우연히 내 가슴에 닿게 될 시를 기다리고 또 즐기게 된 것도 그때쯤인 것 같다. 그리고 한참 힘들었던 어느날, 몸이 아니라 마음이 지치고, 나라는 사람이 참 한심하기만 했던 그때 이 시를 보았다. 참 이상하지. 이미 알고 있던 작품이었는데도 마치 처음 본 듯 낯설었고 꼭 나에게 하는 말처럼 큰 위로가 되었다. 안다 여겼는데 사실은 제대로 알지 못한 이 시처럼, 조금 알 것 같다 여긴 인생이었는데 아직 한참 멀었다는 것을 깨닫고 한숨이 나왔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모두가 그렇게 살아가는 거구나. 이것도 삶의 과정이구나... 생각하니 쓸데없게만 여겼던 내 고민과 뭐 하나 제대로 못하는 한심하게만 보였던 나를 보듬어주고 싶었달까.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이 방황도 그리워하는 날이 올 거라 생각하는 여유가 생긴 것 같았다. 그런 것이라면 좀더 가벼운 마음으로 방황해야지. 어디선가 나와 같은 고민으로 불안해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당신만 바보 같아서 그러는 게 아니에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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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전집 양장 세트 - 전9권 (2판) - 일러스트 500여 컷 수록 셜록 홈즈 시리즈
아서 코난 도일 지음, 백영미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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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소설을 좋아해서 닥치는 대로 읽었던 때, 코난도일의 작품 목록을 써놓고 읽은 것을 하나씩 지워가는 것도 나름 재미있었다. 하지만 황금가지 전집을 보니 갖고 싶은 마음이 참 간절했었지. 그 시절 선뜻 살 수 없었기에 실망이 컸던 나.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지난 뒤에 결국 갖게 되어서 더욱 기쁘다. 작가의 이름을 딴 만화가 나올 만큼 유명하고 인기있는 이 시리즈는 탄탄한 캐릭터와 평범한 듯 궁금증을 일으키는 사건이 조화를 이루며 시간이 흘러도 그 생명력을 잃지 않는다. 나 역시 며칠동안 단숨에 읽을 만큼 그 시절 그때처럼 몰입해 읽었다.  

하지만 출판사의 성의없음에 좀 화가 난다. 오래전 출판되어 내가 산 것만도 26쇄. 그런데 오자가 여기저기 눈에 띈다는 게 말이 되는지. 특히 쭉 왓슨으로 표기되다 갑자기 튀어나온 와트슨에 경악했다; 오래전의 번역을 새로 하는 것까지는 안 되더라도, 오자는 꼼꼼히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좋아해 많이 팔린 작품인데 홀대받은 기분이 들어 팬으로서도 독자로서도 마음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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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추한 내 방 태학산문선 109
허균 지음, 김풍기 옮김 / 태학사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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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첫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지은 사람. 허균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그것뿐이었다. 폐쇄적인 유교 사상으로 꼼짝하지 못했던 조선에서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그의 삶 전체를 반영했다는 사실은 좀더 시간이 지난 뒤에야 알 수 있었다. 명문가에서 태어나 뛰어난 재주를 자랑했다가 결국 역모죄로 길거리에서 죽임을 당한 허균의 삶은 너무나 드라마틱하다. 혁명의 뜻을 굳히기 전에 그는 속세를 떠나 신선처럼 살고 싶었으면서도 입신해 이름을 떨치고 싶은, 일치할 수 없는 욕망의 사이를 걸었다. 그러면서 신분제를 비웃듯 서얼들과 어울리고, 불교와 도교에 심취하고, 여인네들과 염문을 뿌리며 조선의 문제아로 떠올라 수차례 파직과 유배를 경험한다. 그러나 그것은 곧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나는, 매창에 보낸 짧은 편지에서 자연에 숨어 살겠다 한 지 얼마되지 않아 다시 벼슬을 얻은 제 모습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인간적이라 좋았다. 가난 때문에 벼슬을 할 수 있다면서 다른 사람을 통해 친구에게 조심스레 작은 벼슬을 권하는 자상한 마음 씀씀이에 반했다. 숙부인 첩지가 내려왔을 때 오래전 세상을 떠난 부인을 그리워하며 쓴 글에서는 살짝 눈가가 젖었고, 스승의 평가에 자신만의 시를 쓰고 싶다고 되받아치는 당당함에 가슴 설렜다. 좀더 많은 작품이 실려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생길 만큼 허균에 대한 궁금증은 커져간다.  

별을 네 개만 준 것은 풀어쓰기에서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허균과 그의 작품을 소개한 책이 많지 않은 지금 그의 세계를 느껴보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나는 이 책을 돌베개에서 나온 <허균 평전>과 함께 읽었는데, 허균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그의 작품을 읽으니 더 이해가 잘 되었다. 또한 두 책에서 작품이 겹칠 때는 서로 다른 풀이를 비교하는 재미도 있었다. 허균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좋은 방법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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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없는 세대 (구) 문지 스펙트럼 16
볼프강 보르헤르트 지음, 김주연 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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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이 지배하는 시대에 희망을 보기란 쉽지 않다. 섣부른 희망이 오히려 절망을 부른다고 하여, 더욱더 냉소로 무장하기도 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내 몸 건사하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느낀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허울뿐인 민주주의지만, 그래도 전쟁이나 독재를 체험하지 않은 나에 보르헤르트의 글은 긴 여운을 남겼다. 지금 나는, 일상의 폭력 앞에서도 자주 절망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도 잘 버티고 있다 스스로를 격려해주고는 있지만. 

저자는 전쟁과 독재의 시대, 갖은 혐의로 죽음을 앞두기도 했지만 여전히 옳지 않은 일에 대항하고 싸웠으며, 그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에 대한 연민과 유머를 잃지 않았다. 그의 작품에는 절망적인 현실이 그대로 드러나고 결말에서도 문제는 해소되지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희망은 밤하늘 별빛 같다. 아주 작은 빛이지만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 이리 없을까 의아스러울 만큼 보르헤르트의 작품집을 찾기가 힘든 상황이기에 이 책은 더욱 소중하다. 잘은 모르지만, 번역도 어색하지 않게 잘 된 것 같다. 전에 보르헤르트의 작품이 수록된 단편집을 샀다가 정말 거지같은; 번역에 화가 나서 환불했는데, 그런 불쾌함 없이 잘 읽혔다. 문학과지성사에서 그의 다른 작품을 더 소개해줬으면 하는 소망이 있는데, 이 책을 산 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직 소식이 없다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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