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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시 읽기의 괴로움 - 사랑과 자유를 찾아가는 유쾌한 사유
강신주 지음 / 동녘 / 2011년 9월
평점 :
한적한 물이 흐르는 강위, 그 위에 둥둥 떠있는 작은 나룻배 한척에 올라탔다. 그 작은 공간에 수많은 타인들의 속삭임이 들리는 듯 했다. 하지만 그 어디를 둘러봐도, 누구도 없었다. 인상좋은 사공만이 한가로이 노를 저을 뿐이었다. 강의 한쪽편에 솟은 높고 단단한 절벽을 바라봤다. 높이도 가늠되지 않을만큼 높다란 그것은, 매끈하게 반짝거리는 것이, 오를 수도 없을 것 같이 생겼다. 군데군데 밟아 올라갈 수 있을 만한 것들이 툭툭 튀어나와있지만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보였다. 세상 그 무엇이 부딪혀도 저 돌들을 깨뜨리거나 올라 설 수 없을 것처럼 보였다. 나는 체념하여 반대편을 바라봤다. 무성한 숲이 있었다. 촘촘한 나무와 나무 사이의 틈이 마치 다른 세상과 연결된 균열처럼 보였다. 그 나무들도, 잎들도 끊임없이 살랑거렸다. 때로는 격하게, 때로는 조심스럽게 흔들렸다. 무슨 나무인지 알아보기는 커녕, 그 바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흘러가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세상 모든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것 같았다. 그 사이를 유유자적하게 통과하는 이 작은 배는 때로는 단단한 절벽에 다가서는 것 같더니, 금새 반대편 숲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사공은 술에 취한것 같기도 하고, 춤을 추는 것 같기도 했다. 절벽에 부딪힐 것 같은 두려움도, 나무 사이의 균열 속으로 빨려들어갈 것 같은 두려움도 잊고, 어느샌가 나도 그 리듬에 몸을 맡기기 시작했다.
삶은 남의 제스처로는 살아낼 수 없다는 것. 오늘 바로 이 순간 우리가 깊이 되새겨야 할 가르침은 바로 이겁니다.
... 라고,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 강신주는 이야기 한다. '이 책 자체가 완벽하게 강신주가 바라보는 제스처로 시와 철학을 바라보는 것 아닌가..?' 하지만 심증으로 의심하기엔 이르다. 그저 다시 책장을 넘길 뿐이었다. 그동안 내게 철학은 너무나 먼, 억갑절의 안개 자욱한 산과 같아서 오를 엄두를 내지 못했고, 시는 길가에 소담하게 핀, 종종 만날 수 있는 꽃과 같아서 가까이서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 내게도 이 책은 온기는 너무 따뜻하고, 또 포근했다.
이성복의 시와 라캉을 읽으며 나는, 그들이 자신에게 각인된 히스테리 또는 강박증을 씻어내기 위해 씨름하며, 곧 수평적 관계로의 나아가려는 시도를 통해 타인과의 관계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서로가 아슬아슬하게 자신의 경계를 넘어가고, 극복하려는 사랑이란 것을, 그래서 그 길이 사랑이 나아갈 길임을 인지했다. 타인과의 관계, 그 사이에서 선택한, 혹은 선택받은 사랑을 시작으로, 나는 무수하게 다양한, 삶의 표면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어떤 때는 우리를 지배하는 사회와 세계의 모순과 위험을 들여다보고, 그 안에서 낡지만, 여전히 유효한 가능성과 방법을 탐구했다. 어떤때는 타인과 '타인의 타인' 즉, 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며, 나에 대해 떨어져보려고 애썼다. 이 차이들을 근본적으로 어떻게 인식해야하는지 생각해보았고, 선택하는 죽음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생각해 보았다. 나, 너, 우리를 속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생각해보았고, 진정한 자유는 어떤 인식과 행동으로부터 시작해야 하는지도 생각해보았다. 나중의 생각이 먼저 한 생각을 덮어버리지 않게 애써야 했다. 그것이 곧, 세계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었음을 모르고서 말이다.
글자를 인지하는 시각의 활동은, 뇌로부터 사고(思考)를 시작하게 하고선 이내 그 소임을 다했다. 그 뇌에서 시작된 사고는 곧, 혈관을 타고 심장을 돌며, 감상에 젖게 하고, 온몸의 기관을 돌며 시각으로 점철되어, 상대적으로 미뤄뒀던 나의 모든 감각들의 기억을 다시 찾기위해 애썼다. 발끝으로 내려온 그 모든 감각은, 내가 딛고 있는 이 땅, 그것을 함께 딛고 있는 무수히 많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그들을 다시 바라보려 했고, 어쩌면 부질없음을 알면서도 또 누군가를 떠올리고, 누군가를 지웠다. 그리고 그 타인과 내가 함께 공존하는 이 세계를 바라보았다. 그것은 지금껏 인식하지 못했던, 인지하지 못했던 방법이었다.
내가 이 책, 이 세계에 어디부터 들이밀었는지는 모르겠다. 여느 스포츠 종목처럼 발끝부터 들이밀었는지, 가슴부터 들이밀었는지, 머리부터 들이밀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디부터 나왔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 나는 때때로 머리가 이끄는 대로 향했고, 때로는 그저 발이 이끄는 쪽으로 향했다. 때로는 가슴이 뛰는 곳으로 향했다. 때로는 그것들이 불협화음처럼 멀찌감치 떨어져 있기도 했고, 종종 그것들이 한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했다.
돌아보면, 자의든 타의든 삶의 어느 순간 내 머리 위에 우뚝 서있던 철학과 시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들에게서 나는, 열매가 떨어지길 기다린 적이 없었다. 그 열매가 얼마나 탐스럽게 열려있는지 알면서도, 그것이 언제 내게 떨어질 것을 알 수 없었기에, 나는 그것들을 애써 무시하고 지나쳤다. 기다리려 해본적도 없거니와, 그 나무에 기어오르려 했던 적도 없다. 그것이 기억에라도 남아있었다면, 막 떨어진 열매라도 만날 수 있었으련만, 나는 그것을 너무 일찌감치 기억에서 지우고, 포기하고 사회와 자본이 부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들은 내게 기다리고 인내하고, 성찰하는 것은 죄악이라고 말하며 쉴틈없이 돌아가는 컨베이어 속으로 나를 밀어버렸다. 실은, 그 움직임 또한 나를 등떠민 힘에 의해서였는지, 내 발이 먼저 움직였던 것인지 조차 분명하지 않다.
강신주는 그런 나를 끄집어 내서, 잠시나마 이 한적하고 여유로운, 그러나 안에서는 눈물겹고 위험천만한 소용돌이가 휘몰아 칠지도 모를 강 한복판, 작은 배 위에 나를 앉혀준 것이다. 때로는 단단한 절벽의 모습을 한 철학에도 가까이 가보고, 때로는 바람이 굽이굽이 떠도는 시의 숲으로. 내가 배의 구불구불한 움직임에 맞춰 철학과 시를 잠깐씩 만나며 춤추기 시작하자, 어느새 배 위에는 나 혼자였다. 나는 내가 이 배를 저어가야 할지, 뛰어들어 수영을 시작해야 할지, 절벽을 타야할지, 숲으로 들어가야 할지 고민해야만 했다.
집중하는 사람에게서 느껴지는 깊이의 비밀은, 내면을 깊게 파고드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있는 감수성이라고 말한 그는, 김수영의 시 '달나라의 장난'을 이야기 하며, 서럽지만 스스로 돌면서 아름다운 궤적을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어딘가로는 뛰어들어야만 하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서럽지만,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해진 방법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잃어버린 내 길도, 하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안으로 들어가서는 안된다고, 바깥으로 향해서, 세계로 들어가고 타인으로 들어가고, 또 타인으로.. 그렇게 '타인의 타인'까지 만나고 오면 그것이 곧, 자신을 거쳐나오는 것이라고 그가 말하고 있는것 같았다.
삶은 남의 제스처로 살아낼 수 없다는, 그 말을 다시 떠올렸다. 그가 가리킨 방향과 또 다른, 내 방향으로 향하기 위해서 나는 그의 가르침을 흠씬 뒤집어 쓴 셈이다. 그가 시인과 철학자를 빌렸듯이, 나도 잠깐 그를 빌렸을 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머리나쁜 나는 금새 다시 여기로 돌아올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또 나아가고, 혹 또 돌아올 것이다. 그러다보면 또 어느새 그가 말한 많은 시인들과 철학자들에게 돌아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결코 나아간 만큼 돌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거짓말처럼 언제라도 내 바로 뒤에서 나를 반길 것이다. 그리고 다시 등떠밀 것이다. 내 길을, 내 방향대로 가라고. 다시금 앞으로 향할때마다 분명, 타인을 향해, 세계를 향해 한뼘 더 가까이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책을 덮고, 적잖은 시간이 흐른 후 불현듯, 집중에 이르는 길이,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무엇인가로 열려 있어야 한다고 했던 말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시인들의 시를 읽고, 철학자의 말을 듣고, 그것을 한데 엮은 강신주의 이야기를 들으며, 생각하고 있는 나이기에, 나는 나의 내면으로 들어갔던것으로 착각했다. 사랑을 이야기 하고, 차이를 이야기 하고, 타인을 이야기 하고, 사회를 이야기하고, 감각을 이야기 하고, 자유를 이야기 했던, 그것들은 모두 나의 내면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엔, '타인의 타인'인 나 또한 세계를 향한 길목에서 만날 수 있는 많은 것들중 하나였던 것이다.
강신주는 철학이, 가장 높은 곳에서 우리 삶을 내려다볼 수 있는 시선을 제공해줄 수 있다고, 시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채워야만 하는 빈 그릇이자, 미래에 읽힐 숙명을 타고난 글이라고 말 한다. 고도가 높을수록, 즉 높은 곳일 수록 산소는 희박하다. 그래서 삶의 높은 곳에서 빈 그릇을 채우는 것은 더디고,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에 읽힌다는 숙명이 결국은, 지금이 아닌 앞으로를 움직이 듯, 시와 철학은 앞으로의 삶, 나아가 앞으로의 더 나은 세계를 만드는 작지만 큰 힘을 가진, 어쩌면 가장 맑고 분명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시와 철학 사이에서 길을 좇던 강신주의 글을 통해 나는, 세계와 타인, 나 사이에 놓인 험준한 길들을 더듬어본다. 죽음이 삶을 인식하게 하듯, 벽을 밀어내는 힘이 곧 나를 일정하게 밀어내듯, 상대적인 것이 그 반대편의 본질을 깨닫게 하듯, 세계를 향해 뛰어드는 것은 곧 나를 향해 뛰어드는 것과 다름 없을 것이다.
베르테르의 사랑으로는 결코 사랑하는 이의 마음을 열 수 없다는 뜻을 넌지시 밝힌 그의 말처럼, 시인과 철학자를 멘토로 삼고 따라하려 하거나, 시를 외우거나 하지 말라고 당부했던 그의 말처럼, 그는 어쩌면 이 책 또한 흘려버리라 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눈 쌓인 길 위에, 철학자와 시인이 앞서 걸어간 발자취 사이를, 우리는 일정하게 따라나설 것이 분명하다. (저자인 강신주 또한 이토록 많은 시인과 시집, 철학자와 철학서를 소개하고 있지 않은가?) 하지만 그 언젠가, 우리가 준비되어 있든 아니든, 눈보라가 그들의 자욱을 지울 것이고, 우리는 덩그러니 남겨질 것이다. 거기에 우리는 우리만의 제스처를, 우리만의 길을 만들어 나가야만 할 것이고, 또 그럴 것이다. 어쩌면 그 길은 세계와 나, 그리고 타인 사이의 길인 동시에, 세계와 나, 그리고 타인에 대한 경계를 관통하는 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결국은, 그 길위에 꽃 한송이 필 지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