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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림수사대 박스 세트 - 전4권 - 진정한 협객의 귀환!
이충호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2년 6월
평점 :
품절
난세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세상이 어지럽지 않다면 영웅들이 드러날 수 없다는 말이다. 그 말인 즉, 어지러운 세상과, 그것을 바로잡을 영웅은 언제나 서로를 끌어당긴다는 말일 터. 인류역사를 따져보면, 세상은 늘 어지러웠고 어두웠다. 평화는 짧았고, 크고 작은 분쟁과 전쟁만이 길었다. 혹 평화와 비교해서 전쟁과 수탈의 역사가 단발적이라고 하더라도, 그 단발적인 기간안에서의 고통의 파급은 헤아릴 수 없다. 국가끼리 충돌하지 않으면 국가 안에서 충돌했고, 그게 아니더라도 언제나 어두운 먹구름은 늘 사람의 머리 위, 하늘의 한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더 부유한 삶을 살거나 살고싶은 영악한 이들은, 그 기준을 만들었고, 사람들은 거기에 현혹되어 계속해서 높은 욕망을 향해갔다. 작정하고 자신의 사욕을 지향하는 이들을, 하루하루 먹고 살기 바쁜, 혹은 거기에 자의든 타의든 만족하는 평범한 소시민들에겐 막을 도리가 없었다. 함께 잘사는 세상을 만드는 일은 (당연히) 많은 이들의 뜻이 모여야만 가능할 텐데, 그것은 일정의 '양보'를 필요로 했고, 그 '양보'를 수긍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심만을 채우려는 이들은 '자신만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이들의 뒤에 줄섰다. 그리고 타인에게 하나도 내어줄 것 없이 오로지 자신에게 가져다줄 욕망에 대한 기대는 엄청난 집중력과 단결력을 가져다 주었다.
현대에는 그런 왕이나, 귀족들이 사라졌다. 표면적으로. 하지만 그것들은 이제 '권력' 과 '재벌'이라는 형태로 다시 새롭게 태어났고, 사람들은 왕족이나 귀족들과의 신분차이를 태어날 때 부터 인정하는 것보다 어쩌면 더 어리석게도, 그들이 더 많은 사람들을 착취하고 이용하는 것들을 '능력' 혹은 (그저 자본주의라는 미명아래) '당연한 것' 으로 여기며, 심지어는 선망하며 살고있다. 정당한 방법으로 정당한 보상을 거두는 이들은 그 '정도'를 지켜가기에 우리 삶을 헤집어 놓진 않는다. 문제는,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정당하지 않은 보상을 가져가려는 이들이 결국 우리의 삶을 좀먹는다는 사실이다.
세상은 여전히 쥐가 치즈를 갉아먹듯, 조금씩 수탈당하고 있다. 나무와 숲이 저멀리 밀려가고, 콘크리트와 철근으로 더 높은 곳으로만 뻗어나가려는 현대의 빌딩 숲 속에서도 당연 예외는 아니다. 그러니깐, 난세는 여전하니, 영웅도 여전히 필요하다. 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영웅'을 꿈꾸고 있는 것과 동시에, 스스로도 작은 영웅이 되고자 한다. 무협의 세계에서는 그 '영웅'이란 것이 '협객'이라는 비슷한 듯 하지만 다른 말로 표현되는 듯 싶다. 포털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영웅이란 지혜와 재능이 뛰어나고 용맹하여 보통 사람이 하기 어려운 일을 해내는 사람을 일컫고, 협객이란 호방하고 의협심이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영웅은 보통사람은 흉내낼 수 없는 것들을 해내는 사람이다. 하지만 협객은 다르다. 의협심으로 행한다면 누구나 협객이 될 수 있다. 이제 현명한 이들은, 누군가에게 영웅을 '기대하지 않고' 제 스스로 '협객'이 되어야 함을 직시하고 있다.
이 <무림수사대>는 진정한 '협객'이 사라진 시대에서 다시한번 '협객'이 '판치는' 세상을 꿈꾸는 한 작가가 완벽한 현실에서의 완벽한 판타지를 그려낸 만화다. 방대하고 무구한 역사를 지닌 무협의 세계가 이 네권에 모두 담겨 있단, 그런 가당찮은 말은 하지 않겠지만, 이 어두운 현실이 어떻게 협객과 연결되어 질 수 있는지는 분명히, 빼어나게 그려져 있다. 그것이 읽은 지 채 얼마지나지 않았건만 다시한번 이 만화를 읽게한 동력임이 분명하다. 물론 이 만화가 완벽하단 얘긴 아니다. 가끔 보이는 올드한 표현들과 같이 아쉬운 점이 있다. 수많은 예술들이 그러하듯 말이다. 하지만 작가가 그리고자 했던 세상은, 꿈은, 협객의 모습은 분명 적확하고, 정직하게 그려져 있다. 우리 모두 한명 한명이 협객이 되어, 의롭게 살아가는 일, 그것이야 말로 완벽한 판타지가 아닌가? 그 완벽한 판타지가 완벽한, 그러니깐 아주 리얼한 현실속에서 벌어진다면 어떤 모습일까에 대한 해답이 바로 여기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내가 느낀 주요 흐름대로 이 <무림수사대>를 이야기 해보겠다.
(전권 내용을 거의 다 다루기에, 스포일러 당연 포함)
세상은 여전히,
푸른 숲은 빌딩 숲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돈과 권력만이 최고다. 하지만 이 세계가 우리가 현재 사는 세상과 확연히 다른게 하나 있다면 무술과 검술이 공식적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 무림계가 하나의 거대한 권력을 쥐고, 사람들 속에 자리잡고 있고, 또 경찰에서도 무술/검술 등을 이용한 '무림수사대'가 있다. 문제는 거대 재벌가처럼, 국가보다 더 무소불위의 권력을 만든 무림계 또한 썩어가고 있었던 것. 그리고 거기에 검을 들이대어 '징벌'하는 자가 있었으니...
혼자 아픈 세상,
'지후'는 마포경찰서 무림수사대로 발령받고, 전설적인 유랑검객 백운의 파트너가 되지만, 계속해서 이를 인정하지 않고 독단적으로 행동하려고 한다. 그 이유인 즉, 과거 지후의 파트너였던 '현' 과 제룡련주 '연우'의 지원요청을 묵살함으로써 그들이 목숨을 잃은 것. 그 이후로 그는 고장난 시계를 계속 차고 다니며 자신이 속죄하지 못한 과거에 얽매여 더이상 누군가의 등을 맡고, 맡기는 일을 하지 않으려 한다. 처음엔 무림계 오대신군에 대한 연쇄살인 용의자를 잡는 임무였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그 거대한 세상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하는 지후의 발을 붙잡는 것은, 다름아닌 개인적인 상처다. 지후를 무림수사대로 이끈것도 개인적인 선망때문이었다.
하지만 우리의 많은 상처는, 우리가 사는 세상이 주는 것.
세상의 많은 이들은, 젊은이들이 현실의 모든 불합리들을 헤쳐나가고 살아가길 바란다. 모든 원인은 자신한테 있고, 현실은 '원래 그런거니깐' 어쩔 수 없음을 인정하고 자기 자신만을 다독여 나가길 바란다. 그래야 '기득권 체제'가 유지되니깐. 그리고 지후도 현과 연우의 죽음을 모두 자기탓으로 여긴다. 셋중에서 자신만이 배제된다는 생각을, 파트너로써 인정받고 있지 않다는 불신이 그 지원요청을 거절하게끔 만들었으니깐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현과 연우를 그 죽음보다 더 잔인한 상황으로 직접몰아간 것은 무엇인가. 바로 뒤틀린 권력이고, 범죄이자, 음모였다. 그러니깐 그것은 비뚤어진 권력과 음모가 먼저였지, 지후의 치기어린 선택의 문제가 먼저가 아니었다.
현재 개봉하고 있기도 한 '스파이더맨'이 탄생할 수 있었던 심리적 배경을 떠올려보면, 개인의 선택과 세상의 부조리가 어떻게 관계되는지 뚜렷하게 알 수 있다. 자신과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외면했던 '부조리'. 사실은 세상의 그 '부조리' 함은 분명 우리 각자의 개인과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깐 그런 상처를 근본부터 진료하기 위해선 개인의 성찰만을 강요하는게 명백한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상을 더 좋게 바꾸기위해 협객이 필요하다.
그런 부패한 권력들이 평범한 이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것을 막기 위해서, <무림수사대>는 존재하는 것이다. 영웅의 무소불위 힘까지는 없지만, 정의(正義)의 실현을 위해서 밤낮으로 애쓰는, '협객'들 말이다
그 협객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성장해야만 하는데,
'무림수사대'와 같은 협객들이 되기위해서는 개인 각자의 수행이야 두말할 것도 없고, 서로가 함께 성장해야 한다. 한명의 부족함이 곧 다른 한명을 사지로 빠트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한명이 '더' 특출난 것은 괜찮지만, '덜' 특출난 것은 분명한 위험이 될 수 있다. 이 '무림수사대'원들은 서로 개성 뚜렷한 자신만의 특기들을 갖고 있고 그것들이 서로의 등 뒤를 보호하기에 계속해서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것. 지나간 것을 딛고 얼어서서, 현재를 살고, 미래를 향해 갈 줄 아는 용기. 칼을 드는 용기가 아니라, 칼을 내려놓을 줄 아는 진정한 용기.
그 성장은 반드시 서로의 '신뢰'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하지만 그 성장이 무공의 수준으로만 판가름 나는 것은 아니다. 등 뒤를 맡기는 것보다 더 우선적으로 선행되야 할 것은, 등 뒤를 맡기고 마음놓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신뢰'를 주는 것이다. '무림수사대'원들은 서로 그런 신뢰를 통해서 존재하는 집단이다. 지후가 결국 현의 요청을 거절한 것 또한 그 믿음과 신뢰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치기어린날 한순간의 선택이긴 했지만, 현과 연우, 지후 이렇게 셋의 관계에서 자신은 배제된다는 소외감, 그리고 무엇보다 현이 자신에게 등을 내맡기지 않고 있다는 자괴감, 그리고 거기서 연결되는 자존감의 붕괴는 지후의 판단을 순간적으로 흐리게 한 것이다. 이러니 '신뢰'는 개인의 역량보다 더 중요하기도 한 것이다. 서로간의 '신뢰'를 통해 '성장'해서 모두 각자가 한명한명의 협객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서로가 협객으로 거듭난다면.....
하지만 언제나 그래왔듯 세상은 어지러울 것이고, 아마도 많은 협객들이 나타나고 사라질 것이다. 혹시나 그들이 밝은 세상을 만들진 못하더라도, 오늘 어둠으로 세상이 덮히지 않도록 할 순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협객들이 그렇게 소리없이 나타나고 사라졌을 테고. 그들이 있기에 오늘 우리가 내일에 대해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깐, 협객은 '릴레이'가 필요한 것이다.
방대하진 않지만 짧은 시간을 밀도있게 담아낸 어렵지 않은 스토리, 영상기법을 적절히 차용한 효과, 색색깔 화려하기 보단 컷마다 색을 정해 인물과 배경을 그 색에 맞춰 스타일리쉬함을 돋보이게 하고, 과감하고 대범한 선/묘사, 컷구성과 진행으로 인해 시원스럽게 페이지를 넘겨가는, 하지만 그 틈에서 의외로(?) 섬세하게 묘사되어 은근 머뭇거리게끔 해줬던 이 <무림수사대>는 얼핏 보기엔 사나이의 우정을 끈덕지게 이야기 한다. 맞다. 그게 틀린 건 아니다. 하지만, 말미까지 쭉 주의깊게 따라가보면 그가 말하고자 했던, 그리고자 했던, 꿈꾸고자 했던 사람과 세상이 무엇인지 더 폭넓게 알수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우리의 선함과 순수함에 맞지 않는 어두운 세상에 태어났을지라도, 혹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옆에 있는 이들에게 등을 맡기어, 신뢰로 한발 한발, 비록 그 어딘가에 이름 한자 남지 않을지라도, 내 동료가, 그리고 나 스스로가 그 순간을 기억하기에, 모두가 서로, 한명 한명의 협객이 되어, 의롭게 세상을 살아나가는 것이다. (이상은 본문 텍스트 차용) 그 속에서 우리는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서로 '신뢰'로써 '성장'하여, 함께 '협객'이 되어, 비록 언제 끝날지도 알 수 없는, 아니 어쩌면 인류 역사와 거의 함께 해왔을 이토록 지난한, 불의에 맞서 의롭게 사는 일...그래서 적어도 누군가가, 내일은 더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품어볼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일. 그런 세상을 구성하는 하나의 작은 별들이 되기를, 어쩌면 이충호 작가는 그 작은 꿈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성장한다는 것은, 하나의 희망을 품는다는 듯 보여진 종이학 한마리 처럼 말이다.
파트너끼리는 '너 때문에도 '나 때문에도' 없다고 말하던 현은 결국 모든 것을 '자신때문'으로 짊어지려고 했던 안타까운 협객이었다. 그는 그렇게 모든 것을 혼자 짊어지려 했기에 성질급한 지후를 생각해 그를 뒤에 두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생각지도 못한 불화를 낳았고, 그로인해 그들은 파국을 맞았다. 부패한, 비정한 세상은 그들의 의협심을 놔두질 않은 것이다. 그 비극속에서 살아남아, 살아남은 자의 책임과 고통을 홀로 짊어지며 과거의 상처에 박제된 채 살아갔던 지후는 '무림수사대'의 동료들을 만나서 (현이 지후에게 바랐던 것처럼) 다시 서로를 '신뢰'하는 것을 배우며, '성장'해서 진정한 '협객'으로 거듭나 세상에 맞서는 '무협만화', 이것이 바로 <무림수사대>다.
이 책 맨뒤, 책날개에서 작가는 협객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다.
"그들의 말에는 반드시 믿음이 있고 행동에는 반드시 과감성이 있으며 이미 허락한 것에 대해서는 반드시 성의를 다한다. 그 몸을 돌보지 않고 남의 곤경에 뛰어들며 벌써 생사존망의 어려움을 겪었어도 그 능력이 있음을 뽐내지 않으며 그 덕을 자랑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
사마천이 [사기] - [유협열전] '에 '협객'을 묘사한 글이다. 세상이 천박하게 변해버려서일까. '협객'을 찾아보기가 너무나도 힘들어졌다. '협객'근처에도 가기 힘든, 나약한 책상물림으로서 이 시대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그리 많지 않다. 그저 떨리는 펜으로 질문을 던져볼 밖에.
"어지러운 이 세상을 바꿀 진정한 '협객'은 어디에 있는가?!"
글이든, 그림이든, 만화든, 영화든, 음악이든, 춤이든, 연극이든, 그 뭐가 되었든,
자기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의(義)를 펼치는 협객이 되자. 각자, 그리고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