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한비야 지음 / 푸른숲 / 2005년 9월
평점 :
구호의 세상은 서로가 경쟁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해야 할 대상, 가진 것을 나누는 대상이었다. 같은 사람이 어떤 때는 강자였다가, 다른 때에는 한없는 약자가 된다. 이렇게 얽히고설켜 있으니 서로 도와야 마땅하다는 것이 구호 세상의 법칙이었다. 멋있었다.(본문중)
58년생. 엄마와 나이가 비슷하고 생일은 나보다 4일 빨라 같은 별자리를 가져 왠지 더 친근한 한비야씨. 내가 꿈꿨던 세계여행을 먼저 자랑스럽고 당당하게 이룬 그녀를 나는 더 친근하게 ’선배’라고 부르고 싶다. 평소에 세계에 눈을 돌리던 나에게 그녀는 나의 우상이 되었고 내가 언젠가 가고 싶어했던 길을 먼저 가서 흔적을 남겨놓은 고마운 사람이기도 하다.
여자라서, 두려워서, 걱정이 되서, 이런 마음이 가득찼던 내 머리속을 깨끗이 비워내고 그녀가 겪었던 사랑과 희망과 용기가 내 머릿속에 자리잡기 시작한 지금 나는 이제 열정을 뿜어낼 수 있는 힘이 불끈 생겨나고 있다.
자신이 약자였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약자에게 더욱더 감정이입이 되어 함께 그들의 슬픔과 고통을 느낄 수 있고 그 이유로 인해 사람들과 사회로부터 부당한 대우를 받는 이들과 함께 싸울 수 있었던 여인. 왜 힘든 긴급구호를 하냐는 물음에 이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내 피를 끓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그녀. 나아감이란 내가 남보다 앞서 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보다 앞서 나가는 데있는 거니까 초짜라고 주눅들지 않는 그녀. 목숨이 끊어지기 바로 그 순간까지, 가망성이 0퍼센트가 되는 그 순간까지는 어떻게든 살려내려고 노력하는 것이 긴급구호 요원이 해야 할 일이라고 말하는 그녀.
이 책을 보면서 같은 한국인이라서 행복함을 느낄 수 있고 자긍심을 느끼게 해 준 인물을 만나게 되었다.
몇달전 나는 세계의 극빈층에 대한 자선과 기부에 대한 어느 여성 사업가가 엮은 [파란 스웨터]를 매우 관심있게 읽었다. 저자는 미국의 중산층에서 태어났는데 국제은행가로 일하다가 돌연 아프리카로 가서 파란만장한 경험을 쌓으며 빈민들을 구제하는 사업에 몸을 던진다. 그녀는 처음에 서구인의 시선대로 그 나라의 사람을 대했지만 점점 그 문화와 관습, 복잡하게 얽힌 체제속에서의 사람들의 모습을 이해하고 사랑하게 된다. 자선기금에만 의지했던 사람들이 스스로 지속적인 수입을 창출해서 사업으로 만들고 그것이 모델이 되어 퍼져 나가 더 많은 사람들이 고기를 잡는 법을 알 수 있게 하는 것이 그녀가 하려는 일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블루베이커리’였다.
그러나 전쟁통에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고 그녀가 믿었던 사람들이 심하게 얽혀버린 이해관계에 인간의 욕심과 탐욕같은 것까지 꼬여들어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할 것 같은 상태를 보고 좌절한다. 그래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기 위해 준비한다. ’진리를 향해 나아갈 때 저지를 수 있는 실수는 딱 두가지다. 끝까지 계속 가지 않거나 첫 발도 떼지 않는 것 - 붓다 - 의 말을 마음에 되새기면서.
한비야씨나 이 미국인 여성 사업가나 사실 본질은 같은 마음에서 자신의 스타일대로 세상의 가장 어두운 곳에서 천천히 촛불을 켜 희망을 부르고 있다.
우리 나라에도 어려운 사람이 있는데 왜 멀리 있는 나라를 도와야 하냐고, 희망이 없으니 도울 필요가 없다고 냉소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1950년부터 1990년까지 우리 나라는 해외 원조를 받았다. 총액이 무려 25조 원이었고 1960년대에는 한 해 원조 액수가 우리 나라 보사부 예산의 두 배를 능가하기도 했다. 실제로 외국 기자를 이런 기자를 썼다고 한다. ’35년간 일본 식민지에, 남북간 이념 대립에, 이제는 전쟁까지 하고 있는 한국이 제 발로 서기를 바라느니 쓰레기 더미에서 장미꽃이 피는 것을 바라겠다.’고.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내용이다. 그 시대에 태어나지 않아 몰랐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한국은 그 사실을 부끄러워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국제 원조의 최대 수혜국이었던 한국이 해외 원조엔 인색한 편인 듯 하다. 대기업이나 고액 기부자는 줄었지만 개미군단의 후원자들은 엄청나게 늘어났다고 하는 걸 보면 한국엔 잘 사는 중산층이 많이 늘었다지만 그 중에는 풍족해도 남과 나누어 갖지 못하는 욕심이 너무 많은 사람들을 보며 씁쓸함과 동시에 개미군단의 아름다운 마음에 희망을 느낀다.
"현장에서 떠나기 얼마 전에 받은 이메일에서 누군가가 그랬다. 당신들이 목숨 바쳐 일한들, 아프가니스탄에서 고통받는 사람 전체 중 얼마를 돌볼 수 있느냐, 잘 해봐야 10만분의 1도 구제하지 못하는 것 아니냐고. 이에 바닷가에 사는 한 어부가 아침마다 해변으로 밀려온 불가사리를 바다로 던져 살려준 이야기가 떠오른 그녀. "그 수많은 불가사리 중 겨우 몇 마리를 살린다고 뭐가 달라지겠소?" 동네 사람들의 물음에 어부는 대답한다. "그 불가사리로서는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건진 거죠."(본문)
독도 문제에 대한 국제 사회의 반응을 생각해보면 독도가 우리땅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는 무관심한 세계인들의 반응에 한국은 너무 야속하고 분통이 터졌을 것이다.
솔직히 나도 내가 도와줘봤자 그 나라는 자체 내의 가난이라는 악습의 순환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던 많은 경제서들을 보면서 어느정도 그 의견에 동감했었는데 이번에 확실히 내 자신에 대해 반성을 하게 됐다.
언제나 작은 것이 우리를 괴롭히고 상처를 내는 것처럼 사람들이 보내는 따뜻한 눈빛, 수줍은 미소, 살짝 스치는 작은 손동작 하나에도 고마움이 느껴져 구호 요원들을 위로하고 감동시킨다는 것처럼 그녀의 직업은 비록 몸과 마음이 힘들지라도 가장 보람도가 높은 직업이다.
공짜 식량이나 두 손 놓고 앉아 날 돌봐달라는 동정심이 아닌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피나는 노력을 할 수 있는 한 줌의 씨앗을 바라던 아프리카인들, "앗살람 알레이쿰."(당신에게 평화를) 만나는 사람마다 이런 인사를 주고 받으며 하루에도 수십 번씩 평화를 빌어보지만 평화와는 거리가 먼 이라크, 초코릿, 예쁜 색깔의 계란, 아이스크림 모양의 지뢰로 아이들을 유혹하여 다치거나 죽게 만드는 사람들. 심지어 책이나 곰 인형 안에 지뢰를 묻어놓기도 하는..,
사자의 산이라 불리는 아름다운 단어를 가진 ’시에라리온’ (영화 블러드 다이아몬드에서 언급된 나라이기도 하다. ). 그러나 이름에 어울리지 않게 블러드 다이아몬드를 생산하여 소년병을 키우는 곳. 지난한 과정 없이, 준비나 노력 없이 하루아침에 무엇인가가 하늘에서 뚝 떨어질지 모른다는 헛된 꿈이 아이들의 발목을 붙잡아 다이아몬드를 찾지도 못하면서 3년동안 시간을 허비하는 소년들. 전쟁 중 자신의 가족들이 다른 소년병에게 희생되고 자신도 또한 다른 아이들의 가족을 희생시키고 성폭행도 방화도 수없이 했으며 민간인 팔다리도 셀 수 없이 잘랐다던 열다섯쯤 보이는 소년들. 자신을 먹여주는 세력을 위해 싸우겠다는 그들.
그들을 보면서 힘이 생겼다가도 힘이 빠지기도 하는 그녀를 보면서 나 또한 가슴이 아프고 힘겨운 싸움이라는 생각이 든다. 풍족하게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끔찍한 모습이나 불의한 모습을 보더라도 방관하거나 외면, 무관심의 반응이 많다. 그들은 그냥 보기에 싫은 것은 보지 않으려 한다. 하지만 그들의 차가운 외면에 세상의 버림받은 약자들은 7초마다 ’생명’은 고귀하고 경이롭다는 말뿐인 문장을 외치는 귀한 사람들의 말에는 전혀 아랑꼿없이 목숨을 잃고 있다. 지금 이순간에도 세계의 어느 나라는 무장을 하고 테러와 전쟁에 시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섬찟한 기분이 든다.
누군가를 돕는다는 것이 국제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면 쉽지 않은 절차와 복잡한 프로세스가 따른다. 그래서 마음 같아선 모두를 돕고 싶지만 물자가 충분치 않아서 마음 아프지만 돌아서야 하는 그들을 보면서 이런 사람들이 없었다면 세상은 결코 발전도 없었을 것이고 평화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 영원히 떠나간 희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인사 후 대천명. 사람이 할 바를 다하고 나서야 비로소 하늘의 도움을 청할 자격이 있다고 믿는다는 한비야씨를 보면 정말 강인한 정신과 아름다운 마음에 감탄을 하게 된다.
무엇보다 앞서가는 사람 없이 길 없는 길을 가야 하는 게 제일 힘든 그녀. 이 길 끝은 과연 정상인가, 내가 가진 식량과 장비는 충분한가. 앞으로 닥칠 크레바스와 암벽은 어떻게 넘어가나 하는 생각으로 때로는 버겁고 무섭기도 하다는 그녀. 남보다 강하게 태어났기 때문에 강한 것이 아니라 강해지려고 용기를 가지기 때문에 강해진다는 것을 알게 해준 그녀. "스키를 처음 배운 날이라면서 ’난 한번도 안 넘어졌어’하는 사람은 ’난 아무것도 못 배웠어.’하는 거죠. 누구든지 넘어지면서 배워요." 이 말은 그녀가 한 말이다.
흔들리고 두려울 때 그녀를 보며 힘을 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알았으면 좋겠다. 그녀가 우상이고 그녀의 용기를 배우고 그녀가 표시해놓은 표식을 따라 길을 가고 있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그녀가 언제나 안전하고 평안했으면 하길 바란다. 그리고 지금까지 해온 대로 변하지 않는 열정을 끝까지 간직했으면 좋겠다. 그녀가 갔던 길의 뒷모습에서 힘을 내는 뒤에 남은 사람들을 위하여. 또 그녀를 통해 희망을 발견하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