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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쓰메 소세키 지음, 진영화 옮김 / 책만드는집 / 2011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동물도 감정이 있다? 없다? 나는 있다고 생각한다. 고양이는 무언의 의사소통이나 분위기만으로도 그 속의 감정을 읽어낼 줄 아는 영리한 동물이라고 한다. 고양이의 눈을 마주보고 천천히 눈을 깜박였을때 고양이 또한 눈을 깜박이면 상대방의 마음을 받아주겠다는 의사표시라고도 한다. 고양이 눈 인사법이 정말 인상 깊었는데,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서는 평소 내가 생각했던 고양이에 대한 이미지보다 훨씬 고등적인 상념을 즐기는 고양이가 나온다.
고양이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지만 무엇보다 아쉬운 건 사람들이 이 고양이의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다는 것이고 2세 밖에 안됐는데도 불구하고 물독에 빠져 너무 빨리 생을 마감했다는 것이다. 내가 키우는 베타 물고기는 벌써 3년동안 장수하며 팔팔한데 말이다. 물고기보다도 짧은 생이라니. 인간들을 상세하고 예리하게 관찰한 이름 없는 천재 고양이의 요절이 하필이면 어이없고 허무하게도 물독에서의 익사라. 이로써 고양이가 말하는 인간들의 모습들, 특히 고양이의 주인 구샤미 선생을 중심으로 전개되던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구샤미 선생이 소세키 작가의 모습을 희화화 했다고 하나 사실 고양이의 사색을 들어봐도 역시 소세키적인 모습이 느껴진다. 고양이는 작품 속 인물들이 이야기 하는 주제에 대해서 자신의 생각을 펼쳐놓기도 한다. 사람들이 말하는 여러가지 사사로운 이야기들. 그다지 쓰잘데기 없어 보이는 말들을 들으며 고양이는 그런 인간들을 낮추어 생각한다. 비록 자신은 신체적으로 약해빠진 고양이로 태어났을지로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인간들의 행태와 견식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구샤미 선생의 주위로 모여드는 사람과의 매일같이 나누는 대화를 들어보면 많은 학자들과 그리스 영웅들, 작가, 어려운 어구들이 등장하며 말을 꼬으는 경우가 많이 있다. 각주를 읽어보는 것도 지칠만큼이나 이 책은 무슨 소설이 아니라 인문서를 보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졸면서도 어려운 책 위에다 얼굴을 처박고 있는 이상에는, 학자나 작가의 동류로 간주해야 한다. 그렇다면 주인의 머리가 벗겨지지 않은 것은 아직 벗겨질 만한 자격이 없기 때문이며, 머지않아 벗겨지리라는 게 곧 이 머리 위에 닥칠 운명인 것이다' - 315p
소소한 사건임에도 문자를 섞어 안주인이 알아들기 힘들게 말하면서 학자인 티를 내는 구샤미를 보며 고양이는 때때로 비웃기도 하나 그럼에도 다른 가족들에게 천덕꾸러기 신세인 자신을 그나마 거둬준 인성을 보고는 냉정한 시선을 흘기지는 않는다. 마음껏 구샤미 선생을 한심스러워하면서도 그 속에는 정이 있는 것이다. 반면에 주인에게 자신이 잡은 쥐도 뺏기고 몽둥이로 맞았는지 다리까지 절룩이게 된 검둥이 고양이를 보며 그래도 자신은 운이 좋은 편이라는 걸 알게 된다. 일단 자유로운 영혼으로써 뭐든 생각할 수 있고 굳이 해야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 집에 도둑이 들었으나 지켜보기만 했지 별다른 대처를 하지 못한 고양이는 안주인으로부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고양이라는 소리를 듣고 쥐를 잡아 자신도 뭔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하지만 오히려 쥐에게 물리는 신세가 된다.
어쩌면 고양이는 일부분이 주인 구샤미와 많이 닮아있다. 위가 안 좋아 별의별 알려진 바 없는 이상한 민간통치로 자신의 몸을 달래보고자 하지만 늘 실패하고 허접한 구샤미와 고양이 자체로썬 아무래도 허점이 많은 주인공 고양이. 이런 점 때문에 구샤미 또한 고양이를 내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생각해보기도 한다.
도후군이 말한다. '얼마전에도 제 친구인 소세키라는 사람이 [하룻밤]이라는 단편을 썼습니다만, 누가 읽어도 애매해서 종잡을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본인을 만나서 전하고자 하는 게 뭐냐고 따져 물었지만, 본인도 그런 건 모른다며 상대해주질 않는 겁니다. 그런 게 바로 시인의 특색이 아닌가 싶습니다.' -254p 255p
예리하게 찾아보면 소세키 자신을 언급하며 타인의 시선으로 드러내는 장면들이 곳곳에 나타나있다. 이것 또한 실제 자신을 희화화 하면서 유머를 주는 방식이다. 그저 비평적 어조의 본문을 심각하게 읽지 않아도 되는 것은 바로 작가가 써내려간 문장의 해학적인 요소 때문이다.
구샤미가 여러 사람들이 기부금을 얻기 위해 보낸 편지를 받고선.
'보통 사람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떠벌리지만, 학자는 알 만한 것을 알기 어렵게 지껄인다. 대학 강의에서도 어려운 말을 지껄이는 사람은 평판이 좋고, 알기 쉽게 설명하는 사람은 인망이 없는 걸 봐도 잘 알 수 있다. 주인이 이 편지에 탄복한 것도 의미가 명료하기 때문이 아니다. 그 취지가 어디에 있는지 포착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361p
이라고 고양이가 말하는 부분이 있다. 고양이는 자신의 시각으로 본 지식인의 허위허식에 비아냥거리며 실소를 던진다. 작가의 의식이 느껴진다. 그 밖에도 여성관, 예술관, 문화적 차이에 대한 의식도 두드러지게 나온다.
'나체 신봉자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게도 나체가 좋다면 딸을 벗거벗기고, 그 참에 자신도 벌거숭이가 되어 우에노 공원을 산책이라도 해보면 어떻겠는가. 못 하겠다고? 못 하는 게 아니라 서양인이 안 하니까 자신도 하지 않는 것이리라. 실제로도 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예복을 입고 뽐내면서 데이코쿠 호텔 같은 곳에 외출하지 않는가? 그 이유를 물어보면 별거 없다. 그냥 서양인이 입으니까 따라서 입었을 뿐이다. 서양인은 강하니까 무리하든 우스꽝스럽든 흉내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모양이다.' -279p
서양에 대한 이런 관점이
'니체 시대에는 영웅 같은 사람이 하나도 나오질 않았지. 나와밨자 아무도 영웅으로 내세워 주지도 않았고, 옛날엔 공자가 단 한 사람이었으니까 공자도 활개를 폈지만, 지금은 공자가 한두명이 아니야. ...중략.. 우리는 자유를 원해 자유를 얻었네. 자유를 얻은 결과 부자유를 느껴 곤란을 겪고 있어. 그러니까 서양문명이란건 언뜻 좋아 보여도 결국은 잘못된 것일세. 이에 반해 동양에서는 옛날부터 마음의 수양을 해왔어. 개성이 발달한 결과 모두가 신경쇠약에 걸려서 수습하기 곤란하게 됐을 때, 그때 가서야 '왕자가 다스리는 백성은 평안하도다'라는 시구의 가치를 비로소 발견하게 될 테니까.' - 501p
그러나 간게쓰군은 이런 말들이 별 감명이 안 생긴다며 염세적이라며 구샤미의 말에 답한다.
구샤미가 염세적인 니체의 주장들을 조목조목 따지면서 서양문화를 비판했지만, 사실 구샤미 또한 염세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다. 물론 서양문명이 잘못된 점이 많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유를 다시 없애고 왕자가 다스리는 백성이 평안하다고 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런 식의 비약적인 말들이 간혹 드러나며 구샤미의 허점이 보이기도 한다.
'개성의 발전이란 곧 개성의 자유라는 의미겠지. 개성의 자유라는 것은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의미이겠고, 그렇다면 예술 같은 게 존재할 까닭이 없잖아. 예술이 번창하는 것은 예술가와 그 예술을 누리는 사람 사이에 개성의 일치가 있기 때문일거야. 한데 자네가 아무리 신체시인이라고 버티고 나간들 자네 시를 읽고 재미있다고 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으면, 자네의 신체시도 안됐지만, 자네밖에는 독자가 없다는 말이 되겠지. ... 중략.. 자네가 쓴 것은 내가 이해를 못 하고, 내가 쓴 것은 자네가 이해를 못 하게 되는 날에는, 자네와 나 사이에 예술이고 나발이고 할 게 뭐 있겠어?" 499p
'개성이 발달한 19세기에 기가 죽어서 옆 사람의 시선이 염려돼 마음 놓고 잠도 편하게 잘 수가 없으니' 500p
이 개성의 발달이란 건 오늘날도 통하는 공감적인 말로 이 책이 19세기에 쓰였음에도 21세기에 읽어도 구시대적인 감상이 아니라는 건 어쩐지 조금 서글픈 느낌이 든다. 어쨌든 그때나 지금이나 너무나도 개성적인 사람은 자신을 알아주는 이가 있을 때까진 자신의 예술을 인정 받지 못하고 고독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니 말이다.
[고양이로소이다]는 고양이의 눈으로 글을 이끌어갔다고 해서 가벼운 글은 결코 아니다. 고양이의 눈을 통해 휴머니즘의 특색이 더 짙게 표현되고 옵션으로 다른 동물들의 감정에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소세키의 말장난적인 문장은 더불어 재미를 주고 인간을 좀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봄으로써 인간들의 군상에 대해 함께 실소하고 여러 주제의식에 대해 견식을 넓히는 데 인문서, 심리서 못지 않은 만족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