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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의 궁전 ㅣ 안개 3부작 3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김수진 옮김 / 살림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죽음에서 태어난 악마가 누군가를 쫓는다. 도망치는 남자는 갓난 쌍둥이 아이 두명을 살리기 위해 필사적으로 뛴다. 쌍둥이 아이들은 한 중년의 여성에게 맡겨진다. 이 중년 여성에게서 간신히 목숨을 구원 받은 쌍둥이에게는 가혹한 운명의 미래가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하야 이 여성은 결국 이 쌍둥이들을 위해서 이 둘을 생이별을 시킬 수 밖에 없게 된다.
한명은 이 여성의 손에, 다른 한명은 캘커타의 고아원 원장의 손에 키워지게 된다. 여성의 손에 키워진 소녀의 이름은 쉬어, 고아원에서 자라 원장이 붙여준 이름을 가진 소년은 벤. 벤은 인자한 원장 ’카터’의 보호 아래에서 고아원 친구들 이언, 시라지, 이소벨, 마이클, 로샨, 세스와 어울리며 ’차우바 소사이어티’라는 우정으로 똘똘 뭉친 클럽을 결성하고 아지트를 만들어 그 곳을 ’한밤의 궁전’이라고 이름 붙인다.
소설의 진행은 바로 이 한밤의 궁전에서의 추억으로 미래의 이언이 과거를 회상하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소설의 중심부는 벤과 쉬어의 불행한 운명과 그에 맞닿은 슬픈 과거의 이야기이다.
성장소설을 청소년뿐만 아닌 성인도 읽을 수 있게 쓰고 싶었다는 작가는 왜 벤과 쉬어가 결코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도록 결말을 만들었을까. 이 소설은 따지고보면 해피엔딩이 아니다. Bad ending이라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결말은 시원스럽지 않다.
쉬어는 죽음과 키스하고 벤의 행방은 알 수 없다. 게다가 어릴때 비밀결사대를 만들어 서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 일이 무슨 일이건 간에 무조건 도와야 한다는 조항을 만들고 서로를 지켜주었던 죽마고우들은 흩어져서 제각각 살다가 죽거나, 아니면 벤과 쉬어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 직후부터 현재까지 만난 적 없이 그저 소식으로만 들을 뿐이다. 어쩌면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런데 쉬어와 벤의 아버지가 죽은 뒤 너무나도 고통스럽게 죽어 증오의 껍데기를 둘러싸고 다시 부활하는 경우처럼 어떤 사실은 신화적이다. 불사조의 디도 여신을 언급하는 것 또한 불사조 전설 같은 환상적인 요소와 오묘하게 엮여 있다. 그런 와중에 과거의 진실과 맞닿은 벤이 그 사실을 깨달을 때 즈음이면, 충격적인 현실 때문에 혼돈에 빠지게 만든다. 쉬어는 이런 진실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오히려 어떤 진실은 아예 모르는 게 약이라는 것을 암시하듯 끝까지 모르는 채로 죽음을 맞게 된다.
어릴 땐 봐도 제대로 몰랐던 것들을 의식을 가지기 시작하는 시기에 사실과 맞닿게 될때의 기분이란 건 가히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혼란스러울 것이다. 성장하면서 주위의 환경으로부터 받는 영향과 반응은 벤의 성장기에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조금 아쉬운 건 벤의 경우는 벤이 환경의 영향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게 안타까웠다. 악마의 화신이 된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가 아니라고 부정하지만 그럼에도 벤은 약한 모습을 보여줄때의 아버지를 보며 연민을 느낀다.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을래야 무심코 외면할 수 없는 것이다. 조금 옥의 티라면 악마의 화신이 된 아버지가 본래의 자신의 모습 또한 지니고 있었다는 게 조금 엉성한 것 같기도 하다.
죽음에서 증오의 탈만 쓰고 다시 살아난 아버지의 모습에는 비정하고 나쁘다 할지라도 옛날 사랑했던 자신의 아내를 아직도 애틋해하고 마지막엔 벤에게 자신을 해방시켜 달라고 부탁하는 모습 또한 완전 악마의 모습은 아니다. 그러니까 악마의 껍질로 싸여 있어도 예전의 따뜻한 감정은 남아있다. 결국 악마보다는 불안정한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점이 어떤 비극적인 현실 속에 덩그러니 던져진 가족의 비참한 모습을 묘사한 것 같기도 했다. ’한밤의 궁전’에서 벤은 절친한 친구들과 우정동맹을 맺었고 16세가 되서야 처음 만난 또래, 사실은 쌍둥이인 쉬어를 만나며 한 가족사, 나아가 과거의 역사 속의 운명과 만나며 어쩌면 정해져 있었던 건지도 모를 미래의 불행을 겪게 된다. 하지만 벤은 어쨌든 현실을 직시하고 도망가지 않았다. 이언이 말한 것처럼 최고의 브레인이었고, 용기 또한 남달랐다.
보통 소설의 결말에서 모든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과는 달리 [한밤의 궁전]에서는 직접적이 아닌 간접적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식이다. 벤은 행방불명이고. 결말이 현재진행형이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무언가를 할 것이다..라는 암시와 여운이 느껴진다.
제목만 들어보면, 동화같은 환상의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이야기로 들어가면 전혀 느낌이 다르다. 활발하고 명랑했다가도 어둡고 침침하며 무섭고 섬찟하기도 하다. lahawaj 라하와즈는 벤이 태어날 때 그의 엄마가 붙여준 이름이다. 이 이름을 뒤집으면 jawahal이라는 말이 되는데 이 이름은 바로 벤과 쉬어의 아버지가 불사조 처럼 악마로 부활했을 때 지닌 이름이었다. 왠지 의미심장하다.
’천사의 게임’이라는 소설의 작가가 [한밤의 궁전]의 작가이기도 한데, 작품을 읽다보면 느낌이 비슷한 경우의 상황이 종종 등장한다. 여기저기에서 나오는 수수께끼와 책들 말이다.
’천사의 게임’에선 한 번도 쓴 적 없는 책을 써달라는 의뢰를 받으며 책과 연관이 깊어지고 [한밤의 궁전]에선 벤의 아버지가 과거에 작가였으며 ’시바의 눈물’이라는 책을 쓴 적도 있다라는 장면이 나온다. ’시바의 눈물’이 ’세사르 마요르키’ 작가의 동명소설도 있었기 때문에 헷갈렸는데 한밤의 궁전에서 나온 ’시바의 눈물’의 내용은 ’세사르 마요르키’의 소설 ’시바의 눈물’과 다른 것 같았다. 그런데 또 신기한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과 세사르 마요르키는 둘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출신이라는 점이다. 어쩌면 루이스 사폰이 세사르를 개인적으로 알고 있고 그녀의 소설 제목을 자신의 작품 속에 언급함으로써 독자들에게 관심을 가지게 만들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보기도 했다. 내용은 다르지만. 암튼 이 점은 궁금한 채로 남아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