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
한홍구 지음 / 돌베개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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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돌베개)』는 역사학자 한홍구가 “법을 지배한 자들의 역사”라는 부제로 “인권의 최후 보루이자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위한 마지막 안식처였던 ‘법’이 정권의 조력자를 넘어 권력이 되기까지, 대한민국 사법부의 숨겨진 슬픈 역사 70년”(출판사인용)에 대한 기록이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이 책이 ‘국정원 과거사위의 보고서 ’사법편‘에 기초하고 있다.’(p.22)고 밝힌다. 저자는 2004년 10월부터 3년간 ‘국정원 과거사위’ 민간위원 활동을 했던 때 책의 집필을 마음먹고 그로부터 약 10년 후인 2016년『사법부』를 출간한다. 프롤로그는 책이 다루는 핵심 줄기를 요약하고 있다. 본문은 “재판일지와 판결문으로 읽는 대한민국 현대사”라는 말이 이해될 만큼 촘촘한 발췌와 인용으로, 충실한 자료 사진과 사진에 버금가는 정밀한 글로 채워진다. 프롤로그의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심호흡하게 만든다. “국정원 과거사위 보고서, 특히 「간첩편」과 「사법편」은 통곡하는 심정으로 아프게 써낸 보고서다. 독자 여러분도 우리 주변의 피해자들을 기억하며 아프게 읽어주기를 바란다.」(p.24)

『사법부』는 그 역사를 5부로 나누어 정리한다. 미군정과 이승만 시절의 ‘권력을 불편하게 만든 사법부’부터 ‘유신, 겨울공화국의 사법부’, ‘군사정권, -회환과 오욕-의 사법부’, ‘정보기관의 간첩조작과 고문, 조정당하는 사법부’, ‘민주화 이후의 사법부, 과거는 청산되었는가?’까지, 1945년부터 1997년의 노정을 담고 있다. 자료화면으로 스쳤던, 어딘가에서 읽었던, 어렴풋이 기억나는 사건명들이 본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오히려 믿어지지 않는다는게 반복되는 느낌이다. 촌철살인 소제목은 독자를 그때 그 시간으로 데리고 간다. 참혹함의 가운데에서 아픈 마음과 답답함을 견디는 일이 사법부를 읽는 일이다. ‘유신정권은 이렇게 수십 명의 목을 치며 사법부를 장악해갔다. 유혈이 낭자해진 사법부에서 목이 잘리는 변을 당한 사람과 살아남아 욕을 보아야 했던 사람 중 위로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였을까?“(p.89), ’확정판결 18시간 만의 사형집행은 인간이 할 짓이 아니다. 그러나 형사소송법 어디에도 18시간 만에 사형집행을 하면 안 된다는 구절은 없으니 이 또한 철저하게 ‘합법’이었다.‘(p.113) 고문과 미행, 보복과 협박이 끊이지 않던 시간도 똑같이 흐른다.

서문에서 저자가 이 책은 ‘보고서의 성격이 강하며 기본적으로 중앙정보부-안기부가 행한 사법권 침해와 판결에 대한 개입을 다룬 것이기 때문에 이 보고서에서 사법부는 피해자로 기록되어 있다.’(p.11)고 밝혔듯이 중정-안기부의 역학, 또는 제3, 제4의 추가 개입된 손을 추적한다. “중앙정보부(중정)-안기부는 자신들은 재판에 개입하거나 부당하게 압력을 가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다만 ‘조정’했을 뿐이란다.”(p.210) ‘조정관’ 또는 ‘관선기자’(p.210)라고 불렸던 사람들의 ‘목적’과 이를 위한 그들의 ‘역할’, ‘일상화된’ 존재의 명백함은 진술과 보고서로 흔적을 남기고 있다. 암흑시대에도 빛나는 판결을 내린 판사들도 마찬가지로 실명으로 거론하고 있다. 동시에 차기 ‘대법원장 재목’이었던 이들이 ‘소수의견’을 제출했기 때문에, 반갑지 않은 ‘무죄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탈락의 주요인으로 작용했다는 ‘소문’(p.257)으로 일단락된다.

저자는 자료와 인터뷰를 통해 판결했던 이들의 회상과 고통 받았던 이들의 눈물어린 육성을 들려준다. “사람은 참 가지가지다. 문귀동 같은 자가 있는가 하면, 문귀동을 써먹어 출세하려던 자가 있고, 문귀동의 죄악을 덮어버려야 정권이 산다고 생각한 자가 있고, 문귀동을 잡아넣는 것이 오히려 체제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한 자도 있다. 검찰과 사법부가 성고문 은폐의 공범이 될 때 거기에 기꺼이 협력한 자도 있고, 부끄러워한 자도 있고, 분해서 눈물을 흘린 자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권인숙의 고통에 아파하며 눈물을 흘린 자도 있다.”(p.356) 멈춰 있게 만드는 문장들이 여러 지점에서 돌출한다.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최근의 상황’(p.411)을 인용하며 ‘사법부의 권위를, 사법부의 독립을 갉아먹는 가장 무서운 적은 사법부 안에 있다.“(p.412)고 관심을 환기한다. ’대한민국 사법사 70년‘ 연대표로 시작해서 미주와 참고문헌, 찾아보기까지 저자의 의지가 독자의 읽는 행위에 온전히 전달되리라 생각된다. ’뒤돌아 본다는 것‘은 중요하고도 필수적이다. 결코 미래의 걸림돌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이름을 부르고 글로 기록하는 것 만으로도 슬픈 ’과거‘에 예(禮)를 표하는 꼭 필요한 행동이다. 변화의 시동(始動)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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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9
넬라 라슨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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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싱(문학동네/박경희 옮김)』은 할렘 르네상스 대표 여성 작가 중 한 명인 넬라 라슨의 1929년 작품이다. 할렘 르네상스는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대공황 무렵까지 할렘 지역을 중심으로 한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의 문예부흥운동으로 신흑인 르네상스라고도 불린다.(p.161 해설) 작품의 제목인 “패싱”은 ‘미국 문학 내에서 ’패싱 소설‘이라는 별도의 장르를 형성할 정도로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졌으며 ’정체성 혼란을 겪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갈등‘을 전하는 작품들(p.163해설)은 오랜 시간 면면히 이어져왔다. 올해(2021년) 레베카 홀 감독의 동명 영화로 개봉되는 『패싱』은 현대의 관객과 독자에게 범주와 영역을 넓히며 다가온다. 태생과 환경, ‘문학적 백인 행세를 한다는 비난’(p.164)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홀로 감내했던 시간 등 작가의 삶은 작품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듯하다.

『패싱』은 ‘뜻밖의 만남’, ‘재회’, ‘피날레’의 3부 구성으로 마지막 순간까지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아이린 레드필드는 학창시절에 클레어 켄드리와 가깝게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그녀에 대한 기억은 뚜렷했다. 클레어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과 클레어의 가출, 행적에 대한 소문보다도 클레어 자신이 휘발되지 않는 기억의 본체다. “그 시절에도 이미 클레어 켄드리의 삶에 대한 개념 안에는 희생적인 것이 전혀 없었다. 오로지 눈앞의 자기 욕망에만 충실할 뿐이었다. 그녀는 이기적이고, 차갑고, 끈질겼다. 그럼에도 가끔은 연극이 아닌가 싶을 만큼, 상대의 마음에 따스함과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p.15) 거리낌 없이 원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내 것으로 만들겠다는 태도’(p.28)는 굳이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잊혀지지 않는 특징으로 남아있다. 십 이년만에 우연히 만난 클레어. 그녀의 선택 ‘패싱’은 아이린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익숙하고 친근했던 모든 것을 끊어내고, 아마 전적으로 낯설지는 않더라도 분명 전적으로 우호적이지는 않을 다른 환경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으려는 시도”(p.35)에 대해 클레어는 오히려 너무나 쉬운 일이고, 작은 용기만을 필요로 함에도 왜 더 많은 사람이 결코 ‘백인 행세’를 하지 않는지 되묻는다.

그날의 만남 후, 클레어는 조금씩 아이린의 영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한다. 클레어가 이룬 가정은 거짓 또는 속임을 기반으로 하기에 불안보다 위험에 가까운 형국이다. 아이린은 ‘안전’을 유일하고 중요한 가치로 삼고 그 터전 위에서 그녀의 가정은 요새처럼 굳건해 보인다. 그러나 그녀가 추구하는 ‘안전’은 자신이 마련한 훌륭한 기반을 버리고 브라질로 가고싶다는 남편의 소강상태인 바램으로 한 번, 클레어의 개입으로 다시 한 번 강렬하게 흔들린다. 클레어는 질주하는 욕망을 드러내고 채우려는 공격성을 띈 인물이고 아이린은 한껏 방어하려는 의지를 간직한다. “그녀는 그가 행복하기만을 바랐지만, 그가 주어진 것들과 더불어 그렇지 못하다는 것에 분개했다. 그리고 그의 행복을 바라면서도 단지 자기가 원하는 방식으로만, 자기가 그를 위해 세워놓은 계획에 따라서만 그렇게 되길 원한다는 점은 결코 인정하지 못했다.”(p.83) 하지만 안전을 위한 아이린의 방어 역시 비틀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작품은 시종일관 클레어를 전형화시킨다. 비슷한 유형의 문구가 의도적인 듯 반복된다. “그게 바로 클레어 켄드리지, 아이린이 지적했다. 위험을 무릅쓰고, 타인의 감정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 않기.”(p.61) 이런 특징과 더불어 ‘그녀는 너무 예뻤다.’(p.125) 예쁘고 예뻤으며 지나치게 예뻤더라 투의 강조는 거의 남발 수준인데 아이린을 비롯한 타자의 시선으로 언급되면서 객관성을 확보하고 일종의 지위 또는 권력으로까지 자격을 부여한다. ‘한 방울의 법칙’이라는 가혹함에 맞서는 패싱이라면 면죄부가 될 수 있는지 묻는다.

작품은 흑백 인종과 패싱의 문제를 기조로 하지만 그와 동시에 아이린과 클레어 두 인물이 선택하는 삶의 방향성과 인간의 욕구를 면밀히 들여다본다. 둘은 계속 엇나가고 충돌하는데 이 불협화음에 가세하는 주변 인물들의 개입은 불을 붙이는 부싯돌이자 잘 조련된 장치로서 작가의 의도를 입체적으로 부각시킨다. 관계와 소통의 실패는 선의와 악의를 해석해내지 못하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될까? ‘작정한 인간의 악의’는 해석으로 희석시킬 수 있는 것일까? 클레어가 “난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라면 뭐든 할 만큼 못됐어.(중략) 정말, 린, 난 안전하지 않아.”(p.111)할 때 그 말의 확고함에 방점을 찍어야 할까, 곧 이어 큰 소리로 울기 시작할 때의 감춰진 비언어적 의미를 살펴야 할까. 후자를 취하기에는 시간도 여유도 없고 기울어진 각도기를 유지하는게 일반적이며 편하다. 간헐적으로 이어지지만 문답은 꼬리를 문다. 『패싱』의 가장 빼어난 점은 인물들의 심리 묘사에 있다. 간결하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는 표현은 ‘불안’, ‘질투’, ‘선망’, ‘미움’ 등의 인간 보편의 감정을 다양한 층위에서 펼쳐낸다. 일상적이고 익숙한 지점부터 독자를 옥죄고 긴장시키는 장면, 파국이다 싶은 순간까지 빠르게 질주하며 극한으로 밀어 붙힌다. 분위기의 점진적 고조, 포화에서 폭발로 치닫는 조용한 움직임은 훌륭하다. 리듬감 있는 문장이 긴장과 기대를 한껏 높이며 묘사는 눈앞에 영상을 보는 듯 시각적이고 생생하다. 흔들리는 인간들의 초상을 솜씨껏 완성한 이 매력적인 작품을 영화로 어떻게 구현했을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상관있었다. 그것은 이전의 어떤 것보다 더 상관이 있었다. 얼마나 쓰라린지! 그녀가 가졌던 단 하나의 두려움, 단 하나의 불안, 어딘가 다른 곳으로 떠나길 원하는 브라이언의 충동이 그렇게 유치하고 하찮은 것으로 쪼그라들다니! 더불어 그에 맞섰던 자신의 용기와 결의까지도 품위를 잃었다.(p.130)

안전. 그것은 그저 단어에 불과했던가? 아니라면, 그것은 오직 행복, 사랑 또는 그녀가 전혀 알지 못하는 거친 전율 같은 것을 희생하는 대가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안전과 지속에 대한 지나친 믿음과 지나친 노력은 그런 것들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일까?(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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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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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의 『스토너(STONER)/RHK/김승욱 옮김』는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 작품’이었다가 50년 후,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세상의 평가를 받게되었다.(출판사소개) 초판이 출간 1년 만에 절판되었지만 2010년대에 와서 유럽 전역에서 재출간되며 역주행 베스트셀러 신화(출판사 소개)를 일으킨 작품이라는 특이점은 비현실적이다. 이 비현실성이 저자인 존 윌리엄스를, 그리고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를 사라진 흔적으로써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숨쉬는 인물로 불러낸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p.8) 작품의 첫 문장은 책의 줄거리이자 그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작은 농가에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아주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돕던 스토너는 ‘집에서 하는 어드렛일보다 조금 덜 피곤한 허드렛일을 하듯이 학교에서 공부’(p.10)를 한다. 날로 척박해가는 땅의 수확에 도움받기 원하던 아버지는 그를 컬럼비아의 농과대학으로 보낸다. 그는 처음 캠퍼스에 들어섰던 때를 잊지 못하듯 아처 슬론 교수의 영문학 개론 시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질문받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후, “모르겠나, 스토너 군?”(p.31)하고 물었던 슬론 교수는 스토너를 새로운 세계, 문학의 세계로 이끈다. 문학은 이제 그에게 새로운 소명이 된다. 슬론 교수 덕분에 ‘처음 시작한 곳에서 다시 출발’(p.42)하는 기회를 잡고 ‘땅’에 메였던 부모의 기대와 행로로부터 다른 길로 들어선다.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고독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p.79)던 이디스 보스트윅을 향한 스토너의 구애와 결혼은 자연스럽게 진행된 듯 보였다. 이디스의 어머니 보스트윅 부인을 보았을 때 스토너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아차렸다.’(p.85) 습관적 불만과 앙심과 절망이 베어나오는 목소리까지. 그날 밤 ‘그는 어둠 속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의 삶이 왠지 낯설고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했다.’(p.88) 자신의 행동이 현명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던 그가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닫는데는 한 달이 걸리지 않는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고 낯설고 두려운 무엇으로 변해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픈 것은 딸 그레이스 스토너, 태어나 처음 1년동안 오직 아버지의 손길과 목소리, 사랑으로만 자랐던 아이,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얼굴에 ‘그 내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지성이 드러나’던 아이, 스토너의 서재에서 온전한 충만함으로 서로에게 기쁨이었던 아이와의 분리다. 이디스는 두 부녀를 있는 힘껏 떼어낸다, 전략적으로, 철저히.

이디스는 적의 얼굴을 하고 스토너를 공략한다. 그의 거처를 서재에서 일광욕실로, 결국 학교의 좁은 공동 연구실로 몰아내기까지 수위를 높여가는 행동은 충격적이다. 결국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p.180)고 생각하는 스토너의 포기와 수용과 합리화의 단계들은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적의 얼굴이 이쯤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스토너의 세미나 추가 수강을 요청하던 찰스 워커, 그의 지도교수이자 노골적으로 워커를 변호하면서 기이할 정도로 스토너에게 적대적이던 로맥스 박사까지 스토너를 이중 삼중으로 애워싼다. 부모님의 쓸쓸한 죽음 또한 물론이다. ‘이제마흔 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p.254) 그런 가운데 그의 세미나를 들었던 젊은 강사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만남은 위안이고 다행이고 슬픔이며 그럼에도 다시 다행이 아니었나 하는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p.274) 캐서린과의 마지막 선택 또한 서로에게 최선이었고 다른 여지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p.301) 스토너는 ‘일이 망가질 것’을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과 동의어로 생각한다. 그만큼 어느날 그에게 다가왔던 문학은 모든 것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할 가치이자 유일한 삶의 의미다. 그는 공격을 회피하는 법이 없다. 고통을 호소하는 법 없이 시선을 고정하고는 묵묵히 견뎌낸다. 그의 딸 그레이스 또한 그녀가 될 수 있었을 모든 가능성에 도달하지 못한 채 도망치는듯한 삶을 감수한다. 인간이 인간을 해롭게 하는데는 이유도 끝간데도 없어보인다. 작품의 마지막, 작가는 ‘죽음’을 묘사한다. 노쇠와 쇠약, 병과 죽음으로의 긴밀한 바통터치는 익숙하고 보편적인 경로를 보여주면서도 특별한 대단원의 막을 그려낸다. 이 마지막 장면들, 그 먹먹함은 『타타르인의 사막(디노 부차티/문학동네)』‘ 의 끝 페이지들을 연상시킨다. 조반니 드로고가 ’인류 공동의 적‘을 대면하는 순간의 밀폐된 공간, 드로고의 마지막 몫인 ’별들‘처럼 스토너는 ’그 자신의 책‘에 손을 뻗는다.

작가가 그려낸 윌리엄 스토너라는 인물은 무엇보다 ‘투명하다’는 단어의 인간화처럼 보인다. 그가 열정적으로 소망하는 순간이나 무기력하게 구석으로 내몰리는 순간이나 스토너는 외부의 것들을 투명하게 통과시킨다. 스토너를 통과해 곧바로 독자에게 닿는 충격은 그래서 더 이상 캐릭터의 것, 작중 인물의 것이 아니고 아림과 통증으로 되살아나고 증폭된다. 왜 이런 일이,이럴때는 어떻게 등의 대안과 처방과 방책을 끌어모으다가도 기대했지만 헛될 수 있고 헛되리라는 ‘인간 조건’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p.388)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의 마지막 성찰은 시처럼 노래처럼 유연하게 흐른다. 어쩌면 그를 처음 이끌었던 ‘소네트’만큼이나 완벽하다. 역자가 인용한 작가 인터뷰에처럼 스토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애정을 갖고 있고, 의미도 있다고 생각했다(p.395)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가는 그를 ‘진짜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밝힌다. ‘진짜 영웅’,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랑이었건 고난이었건 불평도 핑계도 없이 감당했던 스토너는 그런 면에서 영웅이었음은 분명하다. 또 한 편의 시처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적절한 인사인지 모르겠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p.159)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p.390)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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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소설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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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뉘엘 카레르의『러시아 소설(열린책들/임호경 옮김)』은『적(敵)』(2000)에 이은 그의 두 번째 르포르타주다.(출판사소개인용)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엠마뉘엘 카레르가 7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작품으로 그는 도입부에서 직접 그 의미를 전한다. “『적(敵)』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 나는 7년동안 갇혀 있었고, 탈진하여 빠져나왔다. 나는 생각했다. 이젠 끝났어. 이제 난 다른 것으로 넘어갈 테야. 난 바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삶으로 가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르포르타주를 쓰는 것이 좋겠어.”(p.17) 『러시아 소설』은 그가 사람들과 삶의 편으로 옮겨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작가는 도전하듯 여정을 시작한다.

그가 취재할 헝가리 남자는 2차대전 말 러시아 오지 코텔니치의 정신병원에서 모든 사람에게서 잊힌 채 53년을 보낸 사람이다. 이름도 언어도 불명확한 ‘안드라시 토머’의 귀환은 상징적 사건이 된다. 전쟁으로 실종된 8만 명 이상의 헝가리 병사들, 56년이 지나서 그 중 한 명이 생환한 것이다. ‘인수자가 인수해 가지 않은 소포처럼’(p.29)남은 채 ‘가차없는 파괴의 과정’(p.39)을 거친 그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일은 또 하나의 ‘실종’, 이번에는 귀환하지 않았을뿐더러 더 이상 타인이라 할 수도 없는 외조부의 그것과 겹친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은 사망한 것으로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실종자는 일종의 유령, 여러 세대를 감염시킬 수 있는 정체 모를 고통의 근원인 반면, 사망자는 장례를 치르고 애도할 수 있고, 마침내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p.63) ‘선언’이 사람을 사망케 한다. “사망 선언이 내려지자, 그는 죽은 것이다.” (p.64)

이민자였던 카레르의 외조부 조르주 주라비슈빌리는 집에 있던 어느날, 십대였던 어머니와 외삼촌 앞에서 체포된다. 그들은 다시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 러시아사를 전공한 프랑스의 정치역사학자이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인 헬렌 카레르 드카소세가 실종된 주라비슈빌리의 딸이자 카레르의 어머니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어떤 시간을 겪어온 것일까. 어머니가 평생 모토로 삼았던 “절대 불평하지 말고 절대 설명하지 말라”의 무게는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사라진 존재가 살아남아 성취한 자들을 위협할 수 있기에 숨죽였던 시간은, 글로도 말로도 드러내지 말 것을 압박하지만 이 무언의 강제를 작가는 거부한다. “난 그녀가 죽기 전에 이것을 쓰고 또 출판하리라. 바로 그녀를 위해 쓰리라. 그녀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 단지 나만이 아니라 그녀를 말이다.”(p.131) 이 책의 목적이다. 그는 다시 러시아로 향하고 외조부의 편지를 살피고 기억 저편을 기록한다.

코텔니치 방문은 작가의 러시아적 뿌리를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랑스러운 유산인 ‘고운 러시아어’가 유창하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아냐, ‘프랑스 사람들과 프랑스어로 얘기할 수 있게 되어 좋아 미칠 지경’(p.47)인 그녀, 영혼으로 노래부르며 환하게 웃던 그녀는 다음 방문때는 FSB의 중령 사샤 카모르킨과 함께고 그들 사이에는 이제 어린 아들도 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카레르와 촬영팀을 아이처럼 환대하던 그녀에게서 작가는 더 이상 코텔니치의 마타하리를 발견할 수 없다. 통역을 도울 수 있어 기뻤던 아냐는 소년원을 촬영하던 날 냉랭한 카레르의 눈치를 살피고 그날의 불편함은 가슴에 맺힌다. 그녀는 사샤의 사랑이 시들해지고 너무나 좋아했던 프랑스어도 자신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다고 느낀다. 카레르는 파리로 떠나기 전, 역 앞 광장 벤치에서 카메라를 고정한 채 피사체를 담는 실험을 한다. 이 특별한 기록의 마지막은 아냐와 어린 레옹, 그리고 아이에게 불러주는 카레르의 러시아 자장가로 채워진다.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의 노파 살해를 연상시키는 참혹한 장면에 앞서 미리 이루어진 애도인 셈이다.

작품을 이끄는 두 번째 축은 작가와 소피의 사랑이다. 작가는 이 사랑을 구원삼아 ‘다른 것’, ‘바깥’, ‘삶’으로 건너가기를 원한다. 사랑은 넘쳐나나 극한 갈등을 동반하고 소피는 단테의 베아트리스가 아닌 열정과 투쟁의 대상이 된다. 책 속의 책과 같은 르 몽드 개제 단편은 소피에게 바치는 애가이자 긴 청혼의 서(書)로 읽힐 수 있을까. 기계장치의 설계자처럼 모든 것을 기획하고 완벽한 결말을 자신했건만 예상했던 승리는 맛볼 수 없다. 다툼과 불신과 새디즘적 강박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에 더해 가족들의 시선과 차가운 여론, 비웃음까지. 5부의 311페이지부터는 소피의 변론이 나온다. 소피 입장에서의 총괄정리편인데 카레르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소피의 시점으로 복기한다. 여성의 심리를 작가가 이토록 예리하게 통찰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종말로 치닫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일종의 죽음이다. ‘자잘한 다이아몬드들로 둘러싸인 에메랄드가 박힌 백금 반지’(p.407), 『적』의 장클로드 로망의 반지로 마감하는 장면은 으스스하고도 필연적인 결말처럼 보인다.

『러시아 소설』은 일기이며 고백록 또는 자전적 소설이다. 카레르의 시간을 따라가다보면 자신의 시간을 투영시킨 그의 작품들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3대를 넘어 4대를 향하는 큰 폭의 가계도를 펼쳐 흐릿한 부분을 수정하고 선명한 마침표를 찍는 과정이다. 또한 이 책은 인간의 다층적인 감정을 캐내서 면밀히 분석한 보고서다. 그의 문장은 이성을 벼리게 하고 감성을 충만케 한다. 예측과 계산이 가능한 합리주의는 르몽드지의 단편 에피소드에서 정점을 보여준다.『러시아 소설』은 죽은자들과 남은자들을 글과 영상으로 담아낸 여정이다. 안드라시 토머부터 냐냐, 그리고 아냐까지, 이들을 불러낼 무대를 설치하고 커튼콜의 기회를 선사한다. 그들을 위해 진혼곡 대신 자장가를 부른다. 이제 비로소 살아있는 또는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자 또는 잃어버린 자들과 화해하고 그들이 출몰하던 죄책감과 고통의 국경선을 넘어 삶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진정한 휴식과 자유는 이제부터다.

강제에 의해 사라지고 죽음을 선고받는 사람들은 영하 25도의 코텔니치까지 가지 않더라도 떠올릴 수 있다. 스스로 실종을 선택하는 자들, 곁에 있으나 스스로를 가두고 유폐시키는 자들,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숨바꼭질하는 자들 등 우리 곁에 있는 여러 명의 안드라시 토머를 떠올린다. 모멸감으로 스스로 투명인간이기를 선택했든, 보도 듣도 못한 팬데믹이 벼랑끝으로 밀어냈든 안드라시 토머들은 그 수를 더한다.『러시아 소설』은 책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선다. 애써 외면하려했던 자기만의 고통을 끌어내 직시하고 견주게 만들고 마침내 위로한다. 쓸쓸하고 먹먹한 여운이 편치 않을지언정 카레르를 만나는 시간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도 알잖아요. 만일 이야기하는 게 금지된 뭔가가 존재한다면, 우리가 이야기할 수 있고, 또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뿐이라는 것을요.(p.330)

-이상한 일이지만, 이 책을 쓰면서 난 그 잊을 수 없는 느낌을 다시느꼈답니다. 엄마에게로 헤엄쳐 가는 느낌, 엄마에게 닿기 위해 풀장을 건너는 느낌 말이에요.(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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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아이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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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뉘엘 카레르의 『겨울아이(열린책들/전미연 옮김)』는 1995년 프랑스 3대 문학상 중 하나인‘페미나 상’을 수상해 주목받았으며(p.190,역자해설) 클로드 밀러 감독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되어 칸 영화제에서 수상했는데 읽는 내내 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이기에 원작이 영상과 음악을 덧입어 어떻게 재해석되었을지 궁금함을 더한다. 카레르를 향한 ‘자연주의적 엄격함과 예민한 촉수를 지닌 이야기꾼’(마가진 리테레르)이라는 찬사에 걸맞게 언론은 『겨울아이』를 ‘걸작’, ‘완벽한 성공작’, ‘언어의 기적’으로 평했는데 책을 펼쳐 이를 확인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니꼴라는 2주 동안 진행되는 스키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전세 버스를 탈 수 없었다. 학기 중에도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못하고 집에 와서 식사 후 돌아갔던 것처럼 캠프 대비 학부모 준비 모임에서도 아버지는 니꼴라를 위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니꼴라에게 불안요소였는데 깜빡 잊고 차 트렁크에서 여행가방을 꺼내지 못한 일, 실수로 잠결에 소변을 볼 가능성까지 더해 잔뜩 긴장하게 된다. 여기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 ‘종잡을 수 없이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p.18), 예측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아이들을 혼란케하는 오드칸이라는 점도 편치 않은 일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 했던 캠프였다. 마음대로 중단하기 어려운 2주의 일정이 부모님은 물론 니꼴라도 염려스러웠다. 산장에는 캠프 교사인 파트릭과 마리 앙주가 있고 여선생님도 계셨다. 처음 만났을 때 파트릭은 경직된 니꼴라에게 소원을 이루어주는 브라질 팔찌를 준다.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니꼴라는 급하고 꼭 필요한 것부터 포괄적이고 유리한 소원까지 무게를 달아본다. 준비물 없이 캠프 훈련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외과 의료기구 외판원이라 주로 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는 연락이 닿지 않고 어머니 또한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

트렁크의 의료용 견본을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했던 아버지는 공원에서 사라졌던 아이와 관련된 두려운 이야기를 했었다. 잠들지 못하는 니꼴라는 생각의 꼬리를 물다 무심한 상상을 보탠다. 연약하고 소심한, 동시에 동화 속 장면에 가슴 떨며 눈물 흘리는 민감한 소년 니꼴라에게 상상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 경계를 넘어 눈밭으로 나간 니콜라가 얻은 병은 파트릭과 소통할 기회를 선사하고 니꼴라에게는 뜻밖의 선물처럼 만족스런 시간이 흐른다. 헌병들이 오고 실종 사건의 종말이 알려지고 파트릭이 그를 자신의 집으로 돌려보내기까지.

소심하면서도 위축된, 동시에 민감하게 갈망하는 니꼴라에게 지금껐 허용되었던 환경은 의견이 존중되거나 편안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조차 아버지가 말하는 방식은 불편했고 “니콜라야, 세상에는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단다.”(p.35)라는 주의는 밤에 잠드는 것을 두렵게 했다. 초점잃은 시선과 떨리는 손을 한 채 더듬더듬 방을 나서던 아버지의 기억, 갑자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에서 이사를 하던 날 터지던 울음, 뭔가를 숨기고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함께 울 수조차 없었던 그날의 어머니(p.149)까지 소년은 보이지 않는 벽을 어렴풋이 의식한다. 동화 읽기는 이런 압박을 해소하는 니꼴라만의 방법이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에 담긴 잔혹동화들, 가장 좋아했던 피노키오와 인어공주, 특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목소리마저 잃었던 인어공주와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마지막 간절함을 담아 피노키오의 물빛 요정에게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한 소원을 청했다.

일상으로부터 격리된 스키 캠프는 니꼴라가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엿본 곳이자 인간의 참혹함은 얼마나 세상을 망가뜨리는가를 짐작케 했던 이중의 공간이다. “니꼴라는 손목에 묶여 있는, 파트릭이 준 팔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라서 부모님이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게 될 때 말총 머리를 길러야지 하고 다짐한다.”(p.64) 캠프 교사 파트릭은 그에게 롤모델이자 좋은 어른으로써 니꼴라의 아버지와 대조를 보인다. 파트릭은 지금껏 니꼴라가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신호를 보낸다. 소원 성취의 소망을 담은 팔찌, 아랍의 왕세자들같은 특별한 기분,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시간에 느꼈던 충만함까지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밝고 건강하다. 그래서 심적 벼랑 끝에 내몰릴 니꼴라에게 다행이며 희망이기도 하다.

니콜라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소년다운 상상을 발휘해 위로받는 자신을 그려보며 “포근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포근했다. 이 순간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지속됐으면(p.51)”하고 파트릭과 차에서 음악을 들으면서는 “커서 파트릭처럼 되었으면 하고, 이렇게 능숙하게 운전하면서 편안한 여유를 갖는 사람,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이처럼 마음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고······.”(p.59) 생각했다. 또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스키캠프는 계속되고 열은 떨어지지 않기를(p.107) 바랐다. 마지막으로, 집으로 올라가는 승강기 안에서 아이같던 소망은 더 이상 즐거운 희망으로 변하지 못하고 비통한 울림만을 남긴다.

『겨울아이』는 어린이들의 겨울 스키 캠프라는 설레임 가득한 분위기와 냉혹한 범죄를 나란히 놓는다. 잊지 못할 추억과 우정보다는 오드칸을 중심으로 한 힘의 논리와 그로인한 서열을 미화 없이 그려보인다. 작가는 니꼴라의 기억과 상상을 오가며 공원에서 일어났던 장기매매 사건, 장난하다 일어났던 총기사고, 의료사고로 간단한 수술 끝에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의식이 깨어났던 아이, 실종 소년 르네의 결말까지 니꼴라의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혹은 개입되었던 에피소드들을 기록한다. 후에 니꼴라를 포함해서 위의 아이들과 그 가족이 “꿈에서 깨어나 마주한 현실”(p.138)은 냉혹하다. 또한 마지막 순간 르네가 자신이 살았던 삶을 꿈으로 무력한 죽음만을 삶으로 치환하는데 이런 자리바꿈은 작품 곳곳에서 아픈 자국을 안긴다. ‘왜’, ‘어떻게’, ‘앞으로’ 같은 단어들을 차마 내뱉지 못하게 만드는, 헤쳐진 상처 그대로를 내보이는 듯한 일관된 서술은 엄격하고 냉정하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소년, 니꼴라는 어떡하나요? 라고 묻게 만든다. 스스로 선택한 적 없이 주어진 조건들은 누구의 잘못인가, 소년은 또는 제2, 제3의 니꼴라들은 이 중 어떤 부분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물을 때 롤러 나이프로 파이를 자르듯 선명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눈물 흘리는 그러나 자신의 손을 빼는 파트릭과 마리 앙주의 기도는 니꼴라에게 무엇으로 닿을까 가슴이 답답해질 때 작가는 짧은 시간변조를 통해 마치 오 헨리의 「20년 후」처럼 20년 후의 오드칸과 니꼴라를 잠시 비춘다. “(중략)니꼴라는 곧 문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그의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삶에서는, 그에게 용서란 있을 수 없음을.”(p.186) 그의 인생’이라는 말이 그나마 희망적이다. 마지막 온점 이후, 다시 앞 장으로 페이지를 넘겨 이 힌트를 붙잡고 아이가 무사하기를, 아니 파트릭을 만났던 아이였기에 괜찮기를 기도하게 된다. 상상이 현실로 다가온 충격 속에서 꿈보다 막막한 삶의 문턱을 넘어서려는 결말은 이제 독자의 상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한가지 혼란스러운 점은 서지정보에서 『스키 캠프에서 생긴 일』을 양장본으로 제작하며 『겨울 아이』로 바꿨음을 밝히는데 옮긴이의 말에서는 『그 해 겨울 방학』으로 작품을 언급한다. 역자해설에서까지 통일되지 않은 채 세 번째 제목으로 부른다는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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