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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에 대하여
라헬 베스팔로프 지음, 이세진 옮김 / 미행 / 2025년 4월
평점 :
라헬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하여』(이세진 옮김, 미행, 2025, 125쪽 분량)는 <일리아스> 완독의 아쉬움을 단번에 사라지게 해 줄 책이다. 이 책은 수많은 수식과 찬사로 에워싸인 고전, 감싼 헌사의 무게가 때로는 장벽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명저, 가장 오래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빛나는 길잡이 별, 최고의 서사시인 <일리아스>를 정확하게 조명한다. 얇은 책은 예리한 날처럼 틈을 내어 고전의 중요한 핵심을 건드리고 드러내 보인다. 저자는 840페이지 분량의 서사시에서 꼭 필요한 요소를 단 125페이지로 포집한다. 시몬 베유, 한나 아렌트와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여성이자 유대인, 철학자인 라헬 베스팔로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다시 읽은 『일리아스』에 대한 통찰을 기록하고 “전쟁에 맞서는 자신만의 방식”이라고 하였다.
목차를 보고 감동할 수 있을까. 이 책이 그렇다. <일리아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독자는 첫 장이 <헥토르>인 것에 감격한다. 첫 페이지부터 문장의 긴밀함과 밀도는 독자를 바짝 끌어당긴다. 헥토르라는 이름이 한 번 언급될 때 열 번에 맞먹는 파장이 감지되고 다른 이름들이 끌려온다. 안드로마케와 아스튀아낙스가, 프리아모스와 헤카베가, 헬레네와 파리스가,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끌려온다. 모든 문장이 밑줄이라 밑줄로 동여매어진 책에서 발췌를 꼽기가 어렵지만 다음 문장을 인용하다. “그리하여, 헥토르는 ‘후대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회자될’ 것이라는 이 영광을 제외하고 전부를 잃었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전사에게 이 영광은 기분 좋은 환상이나 알맹이 없는 허세 따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속이 나타내는 바와 맞먹는다. 그건 바로 불멸에 대한 확신이다. 이야기를 넘어, 시의 지고한 초연함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확신 말이다.”(p.25) 전부를 잃은 헥토르는 죽음으로 불멸에 이르렀음을 명확히 한다. 아무도 반론할 수 없다.
서사시 1권의 첫 행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1)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일리아스>의 주제를 확인하는 건 보편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실은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아니라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 <일리아스>의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작품의 통일성과 진행을 동시에 지휘한다.”(p.26)고 주장한다. 서사시는 두 영웅이 맞서기 전에 하르팔리온과 에우케노르의 대리전으로(일리아스 13권) 먼저 암시하고, 운명적 결전을 노래가 끝나가는 22권에 배치한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아닌 어머니 테티스와 함께다. 저자는 테티스가 아킬레우스를 약점 없는 존재로 만들지는 못했기에 그가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다고 밝힌다. 아킬레우스의 운명이 헥토르보다 더 가혹한 이유는 그가 불의에 바쳐진 자이고 불의를 가할 것이냐 당할 것이냐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들을 향한 테티스의 분투와 비탄은 <일리아스> 내내 베어 나왔다. <일리아스>를 펴니 우연히도 그 중 한 부분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그대의 무릎을 잡고 간청하는 거예요.
혹시 그대가 단명할 내 아들을 위해 방패와 투구와 복사뼈 덮개가
달린 아름다운 정강이받이와 가슴받이를 만들어주실까 해서.
그 애가 가지고 있던 것은 그 애의 충실한 전우가 트로이아인들에게
쓰러질 때 잃어버렸어요. 그 애는 지금 속이 상해 땅에 누워 있어요.”(457-461/p.547/일리아스/천병희 옮김/숲)
그녀는 제우스에게든, 헤파이스토스에게든 거침없이 다가가고 몸을 던져 탄원한다.
이어지는 헬레네의 장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한다. “그녀는 트로이인들에게 속하지 않고 아카이아인들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주어질 때조차 자기 자신에게만 속한다. 아름다움은 자신을 만든 자, 자신을 관조하거나 욕망하는 자에게서도 달아난다.”(p.44) 그리고 헬레네의 변질되지 않는 아름다움은 생에서 시로, 육체에서 대리석 조각상으로 넘어가면서도 그 감동을 잃지 않았다고 아름다움의 신성함에 대해 말한다. 미의 본성을 꿰뚫어보고 전달하는 저자의 능력 덕분에 독자는 안다고 여기던 개념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고, 더 눈부시게 인식한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헬레네를 차지하려 싸운다는 결말, 실상은 판로나 원자재, 비옥한 땅을 두고 싸우는 게 아니라, 헬레네를 놓고 다툰다는 지적은 놀라움을 안긴다.
“신들의 희극” 에서는 <일리아스>와 <전쟁과 평화>를 나란히 놓는다. 두 저자에게 ‘진지함의 부재’는 인간 이하를 의미하고,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전자의 신들과 후자의 사교계 사람들을 동일선상에 둔다. “트로이에서 모스크바까지”에서는 다시 한 번 <전쟁과 평화>를 언급한다. 죽어가는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던지는 환멸 어린 시선과 안드레이 볼꼰스키가 자신의 죽음 너머에 던지는 듯한 시선(p.62)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엿보았던 영원에서, 전쟁이란 무엇인가, 바로 ‘생을 소진하면서 생에 지고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재정의 내린다. 저자는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만찬”을 놓치지 않는다. 서사시의 마지막 권이며 주제를 견인하는 결말에서 비통함으로 간구하는 노왕과 그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인간으로 돌아와 환대하는 아킬레우스를 주목한다. 그리고 “고대적 원천과 성경적 원천”에서 두 개의 원천<일리아스>와 <성경>을 같이 살핀다.
이 책에서 특히 좋았던, 그래서 감탄했던 부분은 톨스토이와 호메로스를 견준 지점이다.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어 보라는 인사이트를 준다. <전쟁과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참전한 안드레이 볼꼰스키 공작이 눈앞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응시할 때다. “멀리 도나우 강 뒤쪽에 푸르게 보이는 산들, 수녀원, 신비로운 골짜기, 우듬지까지 안개가 낀 소나무 숲은 더한층 훌륭했다······저곳은 고요하고 행복에 가득차 있다······‘내가 저기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중략) 그런데 여기에는······(중략) 아아, 바로 저것이, 저것이, 지금 내 머리 위와 내 주위에 있는 저것이, 그렇다, 죽음이다······눈 깜짝하는 순간에 나는 저 태양도, 저 강물도, 저 골짜기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1권 p.290) 관념이 아니라 사실로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저자는 볼꼰스키 공작과 헥토르 왕자를 비교했는데, 앞의 문장에 이어 공작이 마음을 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러나 만약 죽음밖에 다른 길이 없다면? (중략) 글쎄,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죽음을 맞으리라.(전쟁과 평화 1권 p.321, 문학동네)” 안드레이 다운 각오인데 지금 다시 읽으니 상당히 헥토르적이다. “하지만 내 결코 싸우지도 않고 명성도 없이 죽고 싶지는 않다. 후세 사람들도 들어서 알게 될 큰일을 하고서 죽으리라.”(일리아스 22권 303-305/p.633, 숲) 거의 동일한 문장이 반복되는 듯하다. 비평가 이반 곤차로프가 <전쟁과 평화>를 “살아 있는 거장이 쓴 러시아판 『일리아드』”라고 칭할 만 하다. 아마도 그래서 레몽 크노가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이거나 ‘오디세이아’다.”라고 단언했을 테다.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전쟁이 수없이 반복되어도 다시 두꺼운 서사시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이유일 것이다.
모터 달고 달리는 글, 힘이 넘치는 글에서 에너지가 폭발한다. 고전의 주요 인물에 대한 평은 몇 개의 겹이 있어서 저자가 처한 상황, 고통, 불안, 무너지지 않겠다는 결기, ‘그럼에도’라는 선언과 다짐이 포개져 있다. 어두운 시대를 향한 제언과 소망, 나아가 구원 요청까지 담겨있다. 숙고하며 전개했을 치밀한 저작은 분출하듯 쏟아져 나오니 타격감을 느낄 정도다. 이 책이 유사한 시기에 <일리아스>를 읽고 쓴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 대한 응답이라고도 하는데 베유의 시선도 궁금하다. <일리아스에 대하여>는 <일리아스>를 읽은 독자가 언제까지나 안도하며 아낄 책이다. 또한 아직 읽지 못한 독자를 기대하고 열망하게 만들 책이며, 나아가 상상하고 꿈꾸게 할 책이기도 하다. 라헬 베스팔로프,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탁월한 선택과 집중을 보여주는 버릴 글자 하나 없는 아름다운 저작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일리아스』의 철학, 이 쓰라린 경험의 소산은 원한을 배척한다. 원한은 무엇보다 자연과 실존의 결별이다. 여기서 전체는 부서진 조각들을 이성의 힘으로 그럭저럭 맞붙여놓은 조립이 아니라, 모든 구성 요소들의 상호 관통이라는 능동적 원칙이다. 불가피한 것의 전개는 인간의 마음과 우주를 동시에 극장으로 삼는다. 이야기의 영원한 실명(失明)과는 대조적으로, 시인의 창조적 혜안은 신보다 더 신적이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영웅들을 후대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여준다.(p.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