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셰프들 - 프랑스 미슐랭 스타 셰프들의 요리 이야기
크리스티앙 르구비.엠마뉴엘 들라콩테 지음, 파니 브리앙 그림, 박지민 옮김 / 동글디자인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신간 서평단 활동을 막 시작하던 2014, 그러니까 벌써 10년 전이다. 우리 가족은 2년 예상으로 이곳에 왔고, 일생일대의 지방생활을 시작하며 회사로부터 텃밭도 신청해서 당첨되었다. 텃밭이라, 상추와 배추를 조금 심었음에도 우리가 농사를 짓는구나 마음만은 이미 농부였다. 그때 자연을 배우는 만화 텃밭 백과를 읽고 서평을 쓴 후, 눈에 띄는 곳에 책을 세워두고 오고 갈때마다 어루만졌다. 텃밭 대전을 치르던 우리에게 이 책은 금도끼이자 은도끼였고(서평에 이렇게 써있네), 돌아보면 애잔한 추억템이 되었다. 위대한 셰프들이 그런 계보를 이어 기분이 하강할 때면 몰래 꺼내먹는 다크 초콜릿 역할을 하리라 본다. 물론 지금 셰프의 길에 들어서려는 것도 아니고 요리와 미식에 관심도 약하지만 위대한 셰프들은 미식기행 간판을 건 인생 여행 요약본이기 때문이다.

 

위대한 셰프들(파니 브리앙 그림, 박지민 옮김, 동글디자인, 2024, 224면 분량)은 프랑스의 미슐렝 스타 셰프들의 요리와 그 안에 담긴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미식 탐방기다. 미식 평론가를 꿈꾸었던 할아버지는 손자 기욤에게 미식 평론가 인턴을 해볼 것을 권한다. 학교를 졸업한 후 시간에 쫓기고 불분명한 꿈에 초조한 평범한 청년이 새로운 경험을 쌓아가며 변화해가는 현장은 정감 가득하고 때론 화사하다. “요리사는 그저 요리만 무척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각자 나름의 비전을 가지고 있지. 사상이자 미학이라고 할 수 있지. 미식 평론가는 마치 번역가처럼 그걸 드러나게 하는 거야! 요리는 단순히 맛있거나 맛없는걸 만드는 게 아니란다!“(p.9)라는 할아버지의 조언을 지침 삼아 기욤의 탐방은 시작된다. 그는 5개 지역에서 8명의 위대한 셰프들을 만나 약 30가지의 요리를 맛보며 미식의 진가를 깨우치고 그때마다 조금씩 성장한다. 요리사의 의도를 파악하려고 노력하라는 말은 작가 또는 예술가의 의도를 읽어내기 원하는 모든 감상자의 행위와도 연결된다.

 

셰프들이 안내하는 요리의 현장은 고유한 가치와 개성을 구현하는 화학자의 실험실, 자연의 보고이며 마법의 공간이다. 화려한 고난도의 요리를 설명하면서도 내일 죽는다면 메뉴에는 없는 할머니의 레시피 요리를 먹겠다고 한다. 늘 아이디어를 채집하며 맛 조합의 팔레트를 넓혀가고 레시피를 찾아내는 성실함은 기본이다. “난 쓴맛을 당신을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않아의 맛이라고 불러. 첫 한입을 베어 물면 다시 먹고 싶어지지만, 왜인지는 모르는 거야.”(p.136) 라는 설명, 미식은 자기다움, 명철함, 끈기가 필요한 인생 수업(p.168)이라고 말은 공감을 부른다. 책의 후반으로 갈수록 다채롭고 힘있게 변하는 기욤의 평론도 주목하게 되고 음악과 미술, 발레까지 비유와 인용도 찾아보게 만든다. 숨어있는 이야기를 발견하는 일은 또 하나의 매력이다. 독자는 화자인 기욤을 통해 오감을 일깨우게 된다. 텍스트 중심 또는 텍스트와 사진, 텍스트와 삽화 등 가능한 여러 구성 중에서 만화 형식을 취한 건 빼어난 선택이다. 시각적으로 풍성하게 구현되는 조리현장과 재료부터 세팅까지의 과정, 핵심인 평가에 이르기까지 독자의 상상을 만족시킨다. 시간의 모든 결을 간직하기 원하고 함께 하는 이들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예술의 여러 갈래 중에서 요리를 만났을 때, 삶은 선물이 된다. 이 여행 나도 가고 싶다.




(서평단_출판사 도서제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좀머 씨 이야기
파트리크 쥐스킨트 지음, 유혜자 옮김, 장 자끄 상뻬 그림 / 열린책들 / 1999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유명한 책을 뒤늦게 읽을 때면 저절로 형성된 예상치 혹은 기댓값과 견주는 행위를 무심결에 반복한다. 그 결과 기대 범주 내로 안착하는 작품도 있지만 이를 빗나가는 경우에는 더욱 당혹스럽고, 이 당혹감은 한동안 여운을 남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 씨 이야기(장 자끄 상뻬 그림, 유혜자 옮김, 열린책들, 1999, 1992, 122쪽 분량)를 당돌하고 유쾌한 소년의 성장 소설로 상상했으나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책의 제목은 소년의 이야기가 아닌 좀머 씨 이야기다. 좀머 씨는 120쪽 내외의 많지 않은 분량 중에서도 간헐적으로 잠깐씩 출현하지만 인상은 강력하다. 주로 주인공 소년의 눈으로, 가끔 이웃의 눈으로 해석되는 좀머 캐릭터는 픽션 세계와 현실을 남모르게 넘나드는 인물처럼 가공적이면서 동시에 생생하게 육화한다.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모든 문학상 수상과 인터뷰를 거절하고 사진 찍히는 일조차 피하는 기이한 은둔자로 이는 D, J. 샐린저를 연상케 한다. 그는 모노드라마 콘트라바스로 찬사를 받은 이후 좀머 씨 이야기와 유례없는 성공을 거둔 향수등으로 독일을 대표하는 작가로 자리매김한 언어의 연금술사다. 작가의 기량은 작품들이 증명하나 그의 기피는 독자가 추측하는 한편 존중할 뿐인데 좀머 씨 이야기는 세상을 향한 작은 힌트가 아닐까. 그와 같은 힌트의 메신저가 주인공 소년이다.

 

이 이야기는 소년이 자신의 유년을 회상하면서 우연히 쓰게 된 글은 아니다. “좀머 아저씨의 이야기를 하려고 작정”(p.14)하고 기록한 결과물이다. 늘 걸어 다니기만 했던 좀머 아저씨, 어디서나 쉽게 식별되는 사람이었던 좀머 아저씨의 모습을 꼼꼼히 묘사하지만 결코 알 수 없던 것은 그대로 남겨둔다. “그런데 정작 그가 어디를 그렇게 다니는 것인지? 그러한 끝없는 방랑의 목적지가 어디인지? 그리고 무엇 때문에 그가 그렇게 잰 걸음으로 하루에 열둘, 열넷 혹은 열여섯 시간까지 근방을 헤매고 다니는지,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p.22)라고.

 

좀머 아저씨는 단 한 번 분명하게 말한다. 빗줄기가 우박으로 변하여 수백만 개의 얼음덩이를 쏟아 붓던 날, 여전히 걷고 있는 좀머 씨를 발견한다. 그러다 죽겠다며 차에 타라는 아버지의 권유에 지팡이로 땅을 내려치며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p.35)라고.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던 순간도 완벽히 혼자라 여겼을 때였다.

 

현재 시점에서 돌아보면 대수롭지 않은, 그러나 당시에는 상황을, 감정을 감당하기 위해 모든 힘을 집중해야 했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가 전개된다. 카롤리나 퀴켈만이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p.47) 라고 말했을 때의 환희, 계획과 실망, 마리아 루이제 풍켈 선생님 댁에서 배우던 피아노, 선생님의 어머니가 과자를 주는 미세 연결 동작, 무엇보다 코딱지 사건과 참담함에 죽기를 각오하고 결행하려던 심정, 자신의 장례식을 그려보며 저절로 눈물을 쏟는,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상상 등 소년의 결정적 순간들은 독자의 유년기 한 순간을 불러낸다. 그 때마다 우연히 엿보게 된 좀머 아저씨가 씨실과 날실처럼 교차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본 그에 대해 쓴다.

 

윌리엄 홀먼 헌트의 <세상의 빛> 그림 속 문에는 손잡이가 없다. 안에서 열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는 문이다. 이런 문을 닫아 걸고 묵묵하고자 의지를 벼린 사람들이 있을 테고 그 중 한 사람이 작가 자신의 일정 부분을 대변하는 좀머 씨다. 좀머 씨가 소통의 문 손잡이를 내쳐버린 이유는 전쟁과 연관한 트라우마였을지, 다른 무엇이었을지 명확하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를 조금 별난 사람으로 여긴다.

 

사람들에게 좀머 씨는 궁금하지만 굳이 본인이 원치 않는데 나의 시간과 품을 들여 그의 의식세계에 노크할 정도는 아닌 무명 씨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걱정거리들이 있”(p.97)기도 하니까. 소년의 기록으로 남은 은둔자의 몰락은 없음으로 수렴하기까지 멈추지 않고 그 원인은 짐작하고 추측할 뿐 미스테리로 남는다. 한편으로는 어떤 인생이건 미스테리 없이 쨍할 수 있을까 싶지만 좀머 씨 경우는 일상적 수용의 범위 밖에 있다. 우리 곁에는 좀머 씨가 과연 없을까.

 

좀머 씨 이야기는 다양한 매력을 가진 소설이다. 어린 소년이 화자인 성장 소설이고 숲과 나무가 자주 등장해 청량한 분위기를 지닌다. 장 자끄 상뻬의 삽화는 완벽한 마침표 역할을 한다. 성장과 죽음, 수용과 거절, 빛과 그림자 등 상승하는 이미지와 하강하는 이미지를 고루 담아낸 소설은 인간의 삶을 요약한다, 자신의 상황을 동화 속 장면에 견주거나 자라면서 읽게 되는 오디세이아까지 문학 작품들이 언급되는 부분에서 소년의 민감함 뿐 아니라 아무에게도 좀머 씨에 대해 말하지 않고 대신 기록하는 선택을 수긍하게 한다. 간결하지만 긴밀하게 연결시킨 문장은 활자를 읽는 느낌이 사라지고 이야기 속으로 단번에 몰입하게 만든다. 마치 문장은 이렇게 쓴다는 사례집과도 같다.

 

특히 아버지의 입을 빌어 작가는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은-너희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어중이떠중이들이 입이나 펜으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 라고 단도직입적으로 경고한다. “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p.34) 늘 별표해 두지만 여전히 실천하기 어려운 상투어, 추상어 금지 규정도 이에 속한다. 말 뿐만 아니라 내 곁에 있는 누군가를 상투구가 아닌 꼭 필요한 진심으로 대하는 일은 기본일 것이다. 성장은 시기의 문제도 아니고 지금 이 순간에서부터 새롭게 시작하는 모든 과정 가운데 있다. 그런 의미에서 여전히 성장을 꿈꾸는 분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틀에 박힌 빈말이라는 것은-너희들도 기억해 두는 것이 좋을 거야-어중이떠중이들이 입이나 펜으로 수도 없이 많이 사용했던 말이라서, 그 말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거야. 실제로 그렇단다.”

 

“(전략)그런 말들은 인간의 삶에서 만들어진 말들이 아니라, 질 나쁜 소설이나 터무니없는 미국 영화에서 생겨난 말들이니까 그런 말들을 똑똑히 기억해 두거라!”(p.3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03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문자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장소, 없는 장소인 유토피아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 이상향을 뜻한다. 최선, 완전, 이상이라는 단어는 늘상 우리가 선망하고 추구하는 목표지점에 배치되고, 무엇과 결합해도 만족스러운 덕목으로 여겨진다. 이와 같은 이상 사회는 질병 없고 위험이 없으며 눈물도 없으리라는 환상을 주고, 환상을 위해 지불해야 할 대가는 마땅해보인다. 그 많은 감시카메라는 더 이상 사각지대를 허락하지 않고 철두철미 지킴이 역할을 한다. 안심은 때로 두려움 일부를 동반한다. 유토피아가 존재하지 않는 장소라는 아이러니를 내포하듯, 유토피아의 반쪽 얼굴이 디스토피아임을 부정하기 어렵다.

 

조지 오웰의 1984(정희성 옮김, 민음사. 2003, 1949, 444면 분량)는 디스토피아 문학의 대표격으로 <우리들(1922)>, <멋진 신세계(1932)와 함께 3대 디스토피아 소설 중 하나다. 책이 나온 1948년에 설정한 미래 시점이 아주 먼 미래로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변화는 급진적일 수 있고 회복 불가의 낙인이 절대적일 수 있다는 경고를 소설은 잘 보여준다. 조지 오웰은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중 하나로 손꼽히며 계급의식을 풍자하고 사회의 부조리를 고발하는 데 탁월하였다. 소설가이자 언론인, 비평가로 십 칠년간의 본격적인 작가 생활 중 마지막 작품인 1984는 그의 최대 걸작으로 평가된다.

 

소설 속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작가가 구축한 디스토피아다. 오세아니아는 무엇보다 선명한 계급사회로 인구의 2퍼센트도 안되는 지배 계층인 내부당, 18퍼센트를 차지하는 지식인층인 외부당, 나머지 85퍼센트는 프롤이라 불리는 노동자 또는 최하층 무산계급으로 구성된다. 과거와 철저히 결별 할 뿐 아니라 해체하고 무화시키는 곳, 희망을 차단당하고 욕구를 무력화하는 전체주의 감시 사회는 다양한 요소들의 공조로 흔들림 없이 지탱된다. 포스터 속 눈동자는 감시카메라 기능을 빅브라더가 당신을 지켜보고 있다.” 라는 글로 재차 강조한다. 영원히 끌 수 없는 텔레스크린은 영원한 세뇌를 장담한다. 슬로건과 신어는 시스템의 근간이다. 그 장치들이 어떻게 발명 되었는가 이의를 제기하고 여정을 추적하고 답변을 요구하기에는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을 잃었다. 시스템의 하위구조, 쳇바퀴의 부속품인 인간은 전적인 수용과 참여로 유일하게 허용된 삶의 방식을 따른다.

 

다만 윈스턴 스미스는 다른 선택을 한다. 그가 시작하려는 일은 일기를 쓰는 것”(p.16)이다. 일기쓰기는 유익은 찾기 어렵고 위험은 분명한 행위다. 그에게는 마침 구입해둔 노트가 있었고, “이 분 증오를 기억하기 위해서 쓰기를 선택했는데 무의식중에 페이지를 채운 글은 빅 브라더를 타도하자로 이는 사상죄에 해당한다. 사상범들은 밤중에 사라지고 등록부에서 이름이 지워지고 그에 관한 모든 기록도 삭제되어 결국 증발”(p.33)한다. 조작과 증발이 일상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진리부 내의 기록국에서 일하는 윈스턴은 누구보다 잘 안다. 인간이 소외되는 기록국의 광경은 카프카의 <>에 나오는 업무공간을 연상케 한다. 그의 일터는 오세아니아의 시민들,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에게 그에 알맞은 수준으로 낮춰서 되풀이”(p.63) 제공되는 거의 모든 분야의 정보를 생산한다.

 

2부의 기록은 사상경찰이라고 오해했던 줄리아와의 조심스런 밀회로 방향을 전환한다. 당의 강령에 관심이 없는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오로지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그들이지만 함께하기 원하기에 둘만의 사생활을 누리고 싶다. “그것은 일부러 무덤으로 가는 계단을 밟는 것과 같았”(p.198)으나 게의치 않는다. “그런데 단순히 살아남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사는 게 목적이라면, 궁극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달라진단 말인가? 사람들이 그들을 자신들과 똑같이 개조시킬 수 없듯 그들 또한 사람들의 감정을 변화시킬 수 없다.”(p.236)는게 윈스턴의 확신이다. 그는 자신과 동일한 입장이리라고 여겨왔던 오브라이언으로부터 형제단에 초대받는다. 비밀리에 넘겨받은 그 책은 조작된 세계를 설명하는 치밀한 지침서로 슬로건과 사회 구조, 빅 브라더 밑으로 내부당과 외부당, 프롤이 어떤 역학관계로 존재하는지 설명한다. 윈스턴은 새로운 가능성에 거의 근접했다고 여겼다. 적시에 필요한 소통이 이루어졌음을 의심치 않았다. 희망은 무산계급인 노동자들에게 있다고 다시금 확신하는 그때 새로운 대결, 막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다.

 

나는 반항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카뮈식 인간조건을 윈스턴도 따르고 있었다. 그는 기록하는 자, 즉 깨어있는 자였고, 사랑하기 원했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지켜냄으로 체제에 저항하고자 했다. 그는 조작된 인간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이중사고에 속지 않는 인간이기를, 둘 더하기 둘은 넷이라고 말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도 독자도 비참 끝에 납득할 만한 결실을 기대했으나 작가는 다른 결말을 준비한다. 분량상으로 간결하고 내용상으로도 단순한 3부는 과도할 정도의 구체적인 묘사로 윈스턴이 전 생애애 걸쳐 지켜내고자 했던 희망을 부순다. 작가가 형상화한 1984년에서 다시 40년이 지난 현재, 소설 속 많은 부분이 현실로 평행 이동하였음을, 그를 넘어 합동임을 부인할 수 없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관은 바늘 하나 떨어질 틈 없이 치밀하기에 경고는 더욱 섬뜩하다.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이 오히려 윈스턴의 상황과 심정을 가늠케 만든다. 간결하고 건조한 문체는 허구가 아닌 지금도 진행중인 상황을 전달받는 듯하다. 희망은 무산계급에만 있다던 그의 믿음은 좌절되었다. 책은 여전히 묻고 있다. 왜 그들은 양은냄비와 같은 사소한 시비에만 사로잡히는지를. ”그런데 왜 그들은 좀 더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그 같은 함성을 지르지 않는 걸까?“(p.100) 그리고 의식이 없다면 반란 또한 기대할 수 없다고 답한다. 어디서부터가 감시 내 상태였을지, 처음부터였다고는 믿고 싶지 않고 소설이야, 라고 덮고 싶지만 그럴 수 없음을 안다. 작가는 마지막 작품, 마지막 부분에 부록으로 <신어의 원리>를 실었다. 사람을 규정하는 건 그가 쓰는 언어다. 그가 쓰는 말이 곧 그 사람이기에 생각을 규정하고 말을 왜곡하고 기록을 금지하고 검열하는 일은 가장 두려운 디스토피아일 것이다. 미래인에게 남기는 공개된 밀서와 같은 작품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그들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실들은 그들의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큰 것은 못 보고 작은 것만 볼 줄 아는 개미와 같았다. 그렇기 때문에 점점 기억은 상실되고 기록은 날조되어 가는데도 인민들의 생활이 개선되었다는 당의 주장이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런 주장을 반박하거나 검증할 기준이 없고, 앞으로도 있을 것 같지 않은 상황이었다.(p.131)


그건 단지 소극적인 것보다는 적극적인 것을 택했으면 하는 심리가 작용한 탓이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금 벌이고 있는 게임에서 승리할 수 없어. 하지만 같은 패배여도 더 나은 패배가 있는 법이야.”(p.192)

 

어떤 면에서 당의 세계관은 그것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에게 가장 잘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요구되는 것이 얼마나 끔삑한 일인지도 납득하지 못할뿐더러 현재 일어나고 있는 공적인 사건에 대해 무관심하기 때문에 가장 악랄한 현실 파괴도 서슴지 않고 받아들 수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무지로 인해 정상적인 정신 상태를 유지한다고 볼 수 있다.(p.22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 - 경이로운 세계 속으로 숨어버린 한 남자의 이야기
패트릭 브링리 지음, 김희정.조현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3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패트릭 브링리의 『나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입니다(김희정·조현주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2023, 360쪽 분량)』는 한 사람을 그리는 개인적인 기록으로 시작하여 오늘을 살고 있는 모든 이에게 닿는 자전적 예술 에세이다. 미술에 관한 모든 건 부모님에게서 배웠다고 고백했듯이 저자는 어린시절부터 아름다움을 접하고 반응하는 일에 민감했다. 성장하면서 학문적 도구와 최신 용어로 “예술을 제대로 분석하는 법”32을 익히기 원했다. 그러나 자랑스럽던 형의 투병과 이른 죽음에 그는 추구하던 삶의 방향을 바꾼다. <뉴요커>의 책상으로 돌아가는 대신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경비원이 되어 “내가 할 유일한 일은 고개를 들고 있는 것”(p.33)으로 한정한다. 책은 시간을 벗어난 형을 기억하는 애도의 장과 시간을 초월하여 영속하는 예술의 찬란을 교차 서술한다. 독자는 이 사이에서 자신의 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책을 펼치면 ‘세계 3대 미술관’이라 불리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순간 이동하는 호사를 누리게 된다. 관람객의 시선과 경비원 즉 내부 직원의 두 가지 입장을 활자를 읽어나가는 만큼씩 간접 체험한다. 아메리카 전시관의 고급 마호가니 가구 목재는 노예무역 초창기의 착취를, “특정 버전의 미국 이야기”(p.177)를 간직한다. 자물쇠 달린 금고가 아닌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p.132) 미술관이기에 일어났던 예술품 도난사도 등장한다. 미술관을 방문하는 관람객들의 세 가지 유형을 보면서 나는 어디에 가까운가 헤아려본다. 점차 지정된 자리를 지키기 바랬던 저자는 동료들과 애정을 담아 눈을 맞추는 관계가 되고, 경비원이라면 누구라도 어두운 푸른색 근무복 아래 숨겨둔 “비밀스러운 자아 하나쯤”은 있음을 알아차린다. 소통이 간직한 “격려의 리듬”(p.191)은 그를 비탄의 자리에서 끌어내기 시작한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은 한 지점이 아니라 연거푸 등장하기에 “가장”이라고 꼽을 수 없다. 예술 작품과 저자가 긴밀하게, 비밀리에, 충만하게 때론 고독하게, 어떤 방해도 받지 않고, 결코 방해 받을 수 없는 차원에서 나누는 감정이 백미다. 예술작품에 닿기를 원했던 저자가 작품 앞에 서서 응시하고 귀 기울이고 단 둘만의 서사를 쌓아올리는 순간들은 무척 아름답다. 제대로 분석하고자 전략을 세웠던 저자가 “예술 작품을 감상하는 나만의 방식”을 갖추게 된 변화는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켜보는 일, 사조와 지식적 배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판단하지 않고 시간을 허용하는 일은 내가 지난 2년간 배운 예술 향유와도 맞닿아있다. 저자는 티치아노의 <남자의 초상>에서 “그 자체로 완전하고, 밝고,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고, 퇴색하지 않는 그 무엇”, “인간의 영혼이 그랬으면 하는 바로 그 상태”(p.46)를 발견하고 미술관을 떠날 때도 형의 초상화 삼아 마음에 품는다.


12장은 저자가 쌓아온 예술관을 정리하고 13장은 다시 세상 속으로 출발하는 희망으로 맺는다. 12장의 화두는 “조르나타”이다. 미켈란젤로와 그의 조수들이 매일 아침 새로 바른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날 완성해야 할 부분에 대한 밑작업”을 하였고 이를 이탈리아어로 “하루의 일”이라는 뜻의 “조르나타”(p.280)라고 한다. <지스 밴드 퀼트 작품전>에 전시된 퀼트 작품들도 블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저자는 이를 루시 T. 버전의 조르나타라고 본다. 가장 위대한 예술 작품의 의미를 조르나타에서 찾을 때 독자는 나의 조르나타는 무엇인가, 결국은 유일한 작품으로 완성할 오늘치의 조르나타는, 하고 묻게 된다. 마지막 장에서 그는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전체를 견인할 한 작품을 결정한다. “확실히 메트 바깥으로 품고 나갈 수 있는”(p.320) 한 점이다. 역시 질문은 독자에게 돌아온다. 당신에게 그 한 작품은 무엇인가요.


서평은 위에서 마무리되었다. 지금부터는 안 쓰느니 못한 사족이 분명하다. 이 책은 읽기에 너무 황홀했고, 이 서평은 쓰기에 너무 괴로웠다. 어떤 면에서 유용한 서평은 거리두기에서 시작된다는 입장인데 거리두기에 실패한 서평이었고, 이입이 너무 많이 되어 속절없는 내적 수다에, 슬프고 신나는 환호에 우왕좌왕했다. 세계의 유명 미술관을 많이 방문해 봤다면 책을 읽기에 더 두근거릴 수도 있겠지만 심장 떨려서 방해될 수도 있을 테다. 그런 의미에서 워싱턴 D.C.에 있는 몇몇 미술관을 잠시, 스텐포드 대학 칸토 미술관은 여러 번 방문했던 나는 얼음 땡 하고 멈추었던 순간, 빨리 더 많이 봐야해 라며 속보로 내달리던 순간, 지금 이 행동을 하면 과연 저 경비원은 내게 다가올 것인가를 가늠하던 순간들을 소환했다.


특히 지난 2월 산호세 이집트 박물관에 방문했을 때의 예상 밖 광경을 이해할 수 있었다. 엄중하고 침묵 가득한 고대의 시간으로 들어가리라 기대했으나 웬걸, 박물관 앞부터 노란 스쿨버스의 장사진이었다. 여행기를 정리하다가 게으름 때문에 멈춘 상태였는데 덕분에 이집트 박물관 관람기는 남길 수 있었다. 이 책은 독자의 여러 갈래 욕구를 채워줄 만 하다. 다양한 정보를 주는 실용서의 역할도 하지만 무엇보다 예술 향유의 본질을 감동적으로 포착한다. 포착한 지점을 전달하는 건 또 다른 문제인데 그 또한 탁월하다. 관습적이고 식상한 문장, 불필요하거나 과장된 비유 없이 처음 보는 듯 신선해서 저자의 감정에 상당히 근접하는 경험을 선사한다. 그의 치열한 글쓰기가 책을, 책보다 삶을, 다가올 미래를 빛나게 하고 독자도 함께 기뻐하게 만든다. 줄이고 줄여서 여섯 개의 논제를 만들었는데 시립도서관 성인 독서토론에서 다시 한 번 잊지 못할 장면들을 소환하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미켈란젤로를 미켈란젤로로 만드는 건 그다음에 그가 한 일이다. 습작을 해본 다음 그는 일어나서 그 스케치를 현실화하는 작업에 착수한다. 그는 죽기 며칠 전까지도 말을 잘 듣지 않는 대리석을 망치와 끌로 두드리고 있었다.(p.292)

 

이제 더 이상 전성기 르네상스와 같은 개념을 빌어 생각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새로 만든 회반죽을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그리고, 회반죽을 조금 더 바르고, 거기에 그림을 조금 더 그리는 한 사람을 생각할 것이다.(p.3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류의 세계사 - 생명의 탄생부터 세계대전까지, 인류가 걸어온 모든 역사
허버트 조지 웰스 지음, 육혜원 옮김 / 이화북스 / 202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보이지 않는 펜은 이 순간에도 세계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번 장의 소제목을 파국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우려의 정도는 별 다섯, 극심으로 기울 것이다. 이번에도 다음 장, 다음 페이지로 무사히 바통을 넘길 수 있기를 바라며 역사로부터 배우기 위해 잠시 뒤돌아본다. 인류의 세계사(육혜원 옮김, 이화북스, 2024, 392쪽 분량)는 하버트 조지 웰스가 집필한 역사서로 아인슈타인의 추천을 받은 저작이다. 하버트 조지 웰스는 올더스 헉슬리의 조부인 생물학자 토마스 헉슬리를 만나며 과학에 관심을 가진 이후 정치, 문학 등으로 초점을 넓혀간 소설가이자 사회학자, 문명비평가이다. 또한 SF 문학의 창시자로 불리며 베르나르 베르베르, 조지 오웰 등의 작가들 뿐 아니라 모든 시대의 독자를 일깨운다. 작품으로 타임머신, 투명인간, 우주전쟁등 유명 작품을 비롯해 맨해튼 계획”(p.6)의 아이디어를 발견케 한 해방된 세계가 있다. 역사학자가 아닌 문학가가 쓴 인류의 세계사는 망각의 강을 거슬러 제대로 보는 눈을 지니자고 권한다.

 

인류의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대중을 상대로 한 최초의 한 권짜리 역사 책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웰스의 통찰력으로 초판 출간 당시 나치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었다고 한다.(p.7) 많은 세계사 책의 첫 장을 문명의 탄생이 차지하는 것과 달리 저자는 생명의 탄생부터 열어간다. 뒤를 잇는 인류의 기원에서는 원시인들의 사고방식이 어떠했을지 추론하며 체계적 사고는 비교적 늦게 발달한 능력이며 지금도 진정으로 자기 생각을 통제하고 정리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여전히 삶의 대부분을 이끄는 것은 상상과 열정“(p.48)이라고 밝힌다. 이 상상과 열정이 지혜와 철학을 꽃피울 때 인류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사상의 역사“(p.83)라는 시각처럼 사상과 삶이 밀착함으로 발전해가기를 기대한다. 그러나 상상과 열정은 나의 지경을 공격적으로 넓혀가는 창과 칼의 싸움을 본격화하고, 승패의 자리바꿈은 끝을 알 수 없게 된다.

 

마지막 10,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서 저자는 1차 세계대전 이후 평화 회담인 베르사유 조약을 언급하면서 진정한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약 20년 뒤에 더 큰 규모의 전쟁이 일어나리라 예측하는데 불행히도 실현되고 만다. 또한 자원 개발을 위해 지구 차원의 종합적인 통제 체계가 필요하고 전염성 질환과 인구 증가 및 이동 역시 전 세계 차원에서 다루어야”(p.369)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우리 모두의 진정한 국적은 인류’”(p.370)라고 강조한다. 예언자와도 같은 저자에게 현재였던 그 시간이 먼 과거가 되어버린 지금, 돌이키면 좋을 순간들이 이후로 켜켜이 쌓였다. 극단적 이기심은 첨예한 갈등을 불렀고 자연 파괴와 재발하는 전쟁이 공멸의 위기로 밀어붙이고 있다.

 

인류의 세계사(A short history of the world)는 원제와 같이 역사의 주요 장면을 간략히 다루지만 핵심을 놓치지 않는다. 주제별로 기술한 역사서가 아니라 시간순 구성이고 객관적 사실과 저자의 견해가 균형을 이루어 독자의 관점도 세워갈 수 있다. 또한 사실 나열 위주가 아닌 스토리텔링식 서술이어서 흥미롭고, 가독성 있는 개론서이자 입문서로 추천할 만하다. 장점을 덧붙이자면 지도와 도판자료, 사진 등이 풍부해서 각주를 대신하는 역할을 한다. 이해를 돕는 덧붙인 글도 부가자료로 정보를 제공한다. 무엇보다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때론 진지하게 때론 위트 있게 인간의 속내를 포착하는 문장이 인상 깊다. 저자는 인류가 이제 겨우 청소년기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인류의 역사는 마음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 목적도 의미도 업는 싸움을 종식시켜줄 평화를 행해 가고 있으며 이 훌륭한 과업이 반드시 완수될 것이라는 믿음을 드러낸다. 믿음이라기보다는 간곡한 부탁이자 기원에 가까운 말에 우리는 응답할 수 있을까. 현자가 보내는 과거의 편지 같은 책으로 청소년과 성인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새로운 발견과 발명은 늘어갔지만, 지적인 성찰은 더뎠다. 인류의 정신은 결국 20세기 초에 일어난 거대한 참사들이 벌어진 뒤에야 각성하였다. 16세기 이후 지난 4세기 동안의 인류 역사는 위험과 기회에 의식적으로 깨어있는 사람의 역사라기보다는 감옥에 갇혀 잠들어있는 역사에 가깝다. 잠든 인류를 가두어두는 동시에 보호해주기도 했던 감옥에 불이 났지만, 인류는 어색하고 불편한 듯 뒤척이기만 할 뿐이었다. 불의 열기와 바삭거리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말이다.(p.270)

 

하지만 우리 모두의 진정한 국적은 인류이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세대가 전쟁과 폐허, 불안과 곤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지, 또 언제쯤 그러한 불행에서 벗어나 위대한 평화의 새벽에 이르게 될지 예측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분명히 바로 그러한 평화, 곧 마음의 평화와 세계의 평화, 목적도 의미도 없는 싸움을 종식시켜줄 평화를 향해 가고 있다. 그리고 이 훌륭한 과업은 반드시 완수될 것이다.(p.370)

 

(서평단_출판사 도서 제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