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이
엠마뉘엘 카레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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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뉘엘 카레르의 『겨울아이(열린책들/전미연 옮김)』는 1995년 프랑스 3대 문학상 중 하나인‘페미나 상’을 수상해 주목받았으며(p.190,역자해설) 클로드 밀러 감독의 동명 영화로도 제작되어 칸 영화제에서 수상했는데 읽는 내내 감각을 일깨우는 작품이기에 원작이 영상과 음악을 덧입어 어떻게 재해석되었을지 궁금함을 더한다. 카레르를 향한 ‘자연주의적 엄격함과 예민한 촉수를 지닌 이야기꾼’(마가진 리테레르)이라는 찬사에 걸맞게 언론은 『겨울아이』를 ‘걸작’, ‘완벽한 성공작’, ‘언어의 기적’으로 평했는데 책을 펼쳐 이를 확인하는데는 그리 많은 시간을 필요로하지 않는다.

니꼴라는 2주 동안 진행되는 스키캠프에 참여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전세 버스를 탈 수 없었다. 학기 중에도 학교 식당에서 점심을 먹지 못하고 집에 와서 식사 후 돌아갔던 것처럼 캠프 대비 학부모 준비 모임에서도 아버지는 니꼴라를 위한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친구들로부터 소외되는 것은 니꼴라에게 불안요소였는데 깜빡 잊고 차 트렁크에서 여행가방을 꺼내지 못한 일, 실수로 잠결에 소변을 볼 가능성까지 더해 잔뜩 긴장하게 된다. 여기에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 ‘종잡을 수 없이 아이들 위에 군림하는’(p.18), 예측하기 어려운 행동으로 아이들을 혼란케하는 오드칸이라는 점도 편치 않은 일이다.

피할 수 있으면 피하려 했던 캠프였다. 마음대로 중단하기 어려운 2주의 일정이 부모님은 물론 니꼴라도 염려스러웠다. 산장에는 캠프 교사인 파트릭과 마리 앙주가 있고 여선생님도 계셨다. 처음 만났을 때 파트릭은 경직된 니꼴라에게 소원을 이루어주는 브라질 팔찌를 준다. 무슨 소원을 빌어야 할까, 니꼴라는 급하고 꼭 필요한 것부터 포괄적이고 유리한 소원까지 무게를 달아본다. 준비물 없이 캠프 훈련에 참여하기는 어렵다. 외과 의료기구 외판원이라 주로 도로 위에서 시간을 보내는 아버지는 연락이 닿지 않고 어머니 또한 시원한 답변을 주지 못한다.

트렁크의 의료용 견본을 아무도 만지지 못하게 했던 아버지는 공원에서 사라졌던 아이와 관련된 두려운 이야기를 했었다. 잠들지 못하는 니꼴라는 생각의 꼬리를 물다 무심한 상상을 보탠다. 연약하고 소심한, 동시에 동화 속 장면에 가슴 떨며 눈물 흘리는 민감한 소년 니꼴라에게 상상은 현실과 맞닿아 있다. 그 경계를 넘어 눈밭으로 나간 니콜라가 얻은 병은 파트릭과 소통할 기회를 선사하고 니꼴라에게는 뜻밖의 선물처럼 만족스런 시간이 흐른다. 헌병들이 오고 실종 사건의 종말이 알려지고 파트릭이 그를 자신의 집으로 돌려보내기까지.

소심하면서도 위축된, 동시에 민감하게 갈망하는 니꼴라에게 지금껐 허용되었던 환경은 의견이 존중되거나 편안히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안전지대는 아니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조차 아버지가 말하는 방식은 불편했고 “니콜라야, 세상에는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있단다.”(p.35)라는 주의는 밤에 잠드는 것을 두렵게 했다. 초점잃은 시선과 떨리는 손을 한 채 더듬더듬 방을 나서던 아버지의 기억, 갑자기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곳에서 이사를 하던 날 터지던 울음, 뭔가를 숨기고 진실을 말해주지 않았기에 함께 울 수조차 없었던 그날의 어머니(p.149)까지 소년은 보이지 않는 벽을 어렴풋이 의식한다. 동화 읽기는 이런 압박을 해소하는 니꼴라만의 방법이었다.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에 담긴 잔혹동화들, 가장 좋아했던 피노키오와 인어공주, 특히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목소리마저 잃었던 인어공주와 자신을 동일시했으며, 마지막 간절함을 담아 피노키오의 물빛 요정에게 현실에서는 이루지 못한 소원을 청했다.

일상으로부터 격리된 스키 캠프는 니꼴라가 새로운 삶에 대한 가능성을 엿본 곳이자 인간의 참혹함은 얼마나 세상을 망가뜨리는가를 짐작케 했던 이중의 공간이다. “니꼴라는 손목에 묶여 있는, 파트릭이 준 팔찌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자라서 부모님이 더 이상 간섭하지 않게 될 때 말총 머리를 길러야지 하고 다짐한다.”(p.64) 캠프 교사 파트릭은 그에게 롤모델이자 좋은 어른으로써 니꼴라의 아버지와 대조를 보인다. 파트릭은 지금껏 니꼴라가 경험하지 못했던 전혀 다른 신호를 보낸다. 소원 성취의 소망을 담은 팔찌, 아랍의 왕세자들같은 특별한 기분, 몸과 마음을 이완하는 시간에 느꼈던 충만함까지 그가 보여주는 세계는 밝고 건강하다. 그래서 심적 벼랑 끝에 내몰릴 니꼴라에게 다행이며 희망이기도 하다.

니콜라는 생각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소년다운 상상을 발휘해 위로받는 자신을 그려보며 “포근했다. 믿어지지 않을 만큼 포근했다. 이 순간이 그가 살아 있는 동안 지속됐으면(p.51)”하고 파트릭과 차에서 음악을 들으면서는 “커서 파트릭처럼 되었으면 하고, 이렇게 능숙하게 운전하면서 편안한 여유를 갖는 사람, 그리고 몸의 움직임을 이처럼 마음가는 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하고······.”(p.59) 생각했다. 또 아버지가 돌아오지 않고 스키캠프는 계속되고 열은 떨어지지 않기를(p.107) 바랐다. 마지막으로, 집으로 올라가는 승강기 안에서 아이같던 소망은 더 이상 즐거운 희망으로 변하지 못하고 비통한 울림만을 남긴다.

『겨울아이』는 어린이들의 겨울 스키 캠프라는 설레임 가득한 분위기와 냉혹한 범죄를 나란히 놓는다. 잊지 못할 추억과 우정보다는 오드칸을 중심으로 한 힘의 논리와 그로인한 서열을 미화 없이 그려보인다. 작가는 니꼴라의 기억과 상상을 오가며 공원에서 일어났던 장기매매 사건, 장난하다 일어났던 총기사고, 의료사고로 간단한 수술 끝에 완전한 어둠 속에서 의식이 깨어났던 아이, 실종 소년 르네의 결말까지 니꼴라의 아버지가 들려주었던 혹은 개입되었던 에피소드들을 기록한다. 후에 니꼴라를 포함해서 위의 아이들과 그 가족이 “꿈에서 깨어나 마주한 현실”(p.138)은 냉혹하다. 또한 마지막 순간 르네가 자신이 살았던 삶을 꿈으로 무력한 죽음만을 삶으로 치환하는데 이런 자리바꿈은 작품 곳곳에서 아픈 자국을 안긴다. ‘왜’, ‘어떻게’, ‘앞으로’ 같은 단어들을 차마 내뱉지 못하게 만드는, 헤쳐진 상처 그대로를 내보이는 듯한 일관된 서술은 엄격하고 냉정하다.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소년, 니꼴라는 어떡하나요? 라고 묻게 만든다. 스스로 선택한 적 없이 주어진 조건들은 누구의 잘못인가, 소년은 또는 제2, 제3의 니꼴라들은 이 중 어떤 부분을 감당하고 책임져야 하는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물을 때 롤러 나이프로 파이를 자르듯 선명하기는 너무도 어렵다. 눈물 흘리는 그러나 자신의 손을 빼는 파트릭과 마리 앙주의 기도는 니꼴라에게 무엇으로 닿을까 가슴이 답답해질 때 작가는 짧은 시간변조를 통해 마치 오 헨리의 「20년 후」처럼 20년 후의 오드칸과 니꼴라를 잠시 비춘다. “(중략)니꼴라는 곧 문이 열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문이 열리면서 그의 인생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이 삶에서는, 그에게 용서란 있을 수 없음을.”(p.186) 그의 인생’이라는 말이 그나마 희망적이다. 마지막 온점 이후, 다시 앞 장으로 페이지를 넘겨 이 힌트를 붙잡고 아이가 무사하기를, 아니 파트릭을 만났던 아이였기에 괜찮기를 기도하게 된다. 상상이 현실로 다가온 충격 속에서 꿈보다 막막한 삶의 문턱을 넘어서려는 결말은 이제 독자의 상상으로 자리를 옮긴다.

(한가지 혼란스러운 점은 서지정보에서 『스키 캠프에서 생긴 일』을 양장본으로 제작하며 『겨울 아이』로 바꿨음을 밝히는데 옮긴이의 말에서는 『그 해 겨울 방학』으로 작품을 언급한다. 역자해설에서까지 통일되지 않은 채 세 번째 제목으로 부른다는 점이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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