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마뉘엘 카레르의『러시아 소설(열린책들/임호경 옮김)』은『적(敵)』(2000)에 이은 그의 두 번째 르포르타주다.(출판사소개인용) 시나리오 작가, 영화감독으로도 활동하는 엠마뉘엘 카레르가 7년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작품으로 그는 도입부에서 직접 그 의미를 전한다. “『적(敵)』이라는 제목의 이 책에 나는 7년동안 갇혀 있었고, 탈진하여 빠져나왔다. 나는 생각했다. 이젠 끝났어. 이제 난 다른 것으로 넘어갈 테야. 난 바깥으로, 다른 사람들에게로, 삶으로 가겠어.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르포르타주를 쓰는 것이 좋겠어.”(p.17) 『러시아 소설』은 그가 사람들과 삶의 편으로 옮겨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가교 역할을 한다. 작가는 도전하듯 여정을 시작한다.
그가 취재할 헝가리 남자는 2차대전 말 러시아 오지 코텔니치의 정신병원에서 모든 사람에게서 잊힌 채 53년을 보낸 사람이다. 이름도 언어도 불명확한 ‘안드라시 토머’의 귀환은 상징적 사건이 된다. 전쟁으로 실종된 8만 명 이상의 헝가리 병사들, 56년이 지나서 그 중 한 명이 생환한 것이다. ‘인수자가 인수해 가지 않은 소포처럼’(p.29)남은 채 ‘가차없는 파괴의 과정’(p.39)을 거친 그를 추적하고 기록하는 일은 또 하나의 ‘실종’, 이번에는 귀환하지 않았을뿐더러 더 이상 타인이라 할 수도 없는 외조부의 그것과 겹친다. 돌아오지 않는 이들은 사망한 것으로 선언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실종자는 일종의 유령, 여러 세대를 감염시킬 수 있는 정체 모를 고통의 근원인 반면, 사망자는 장례를 치르고 애도할 수 있고, 마침내 잊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p.63) ‘선언’이 사람을 사망케 한다. “사망 선언이 내려지자, 그는 죽은 것이다.” (p.64)
이민자였던 카레르의 외조부 조르주 주라비슈빌리는 집에 있던 어느날, 십대였던 어머니와 외삼촌 앞에서 체포된다. 그들은 다시 아버지를 보지 못한다. 러시아사를 전공한 프랑스의 정치역사학자이자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회원인 헬렌 카레르 드카소세가 실종된 주라비슈빌리의 딸이자 카레르의 어머니다. 어머니와 외삼촌은 어떤 시간을 겪어온 것일까. 어머니가 평생 모토로 삼았던 “절대 불평하지 말고 절대 설명하지 말라”의 무게는 얼마나 무시무시한가. 사라진 존재가 살아남아 성취한 자들을 위협할 수 있기에 숨죽였던 시간은, 글로도 말로도 드러내지 말 것을 압박하지만 이 무언의 강제를 작가는 거부한다. “난 그녀가 죽기 전에 이것을 쓰고 또 출판하리라. 바로 그녀를 위해 쓰리라. 그녀를 해방시켜 주기 위해, 단지 나만이 아니라 그녀를 말이다.”(p.131) 이 책의 목적이다. 그는 다시 러시아로 향하고 외조부의 편지를 살피고 기억 저편을 기록한다.
코텔니치 방문은 작가의 러시아적 뿌리를 엿보는 일이기도 하다. 그는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자랑스러운 유산인 ‘고운 러시아어’가 유창하기를 바란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났던 아냐, ‘프랑스 사람들과 프랑스어로 얘기할 수 있게 되어 좋아 미칠 지경’(p.47)인 그녀, 영혼으로 노래부르며 환하게 웃던 그녀는 다음 방문때는 FSB의 중령 사샤 카모르킨과 함께고 그들 사이에는 이제 어린 아들도 있다. 다른 세상에서 온 카레르와 촬영팀을 아이처럼 환대하던 그녀에게서 작가는 더 이상 코텔니치의 마타하리를 발견할 수 없다. 통역을 도울 수 있어 기뻤던 아냐는 소년원을 촬영하던 날 냉랭한 카레르의 눈치를 살피고 그날의 불편함은 가슴에 맺힌다. 그녀는 사샤의 사랑이 시들해지고 너무나 좋아했던 프랑스어도 자신에게서 사라져 가고 있다고 느낀다. 카레르는 파리로 떠나기 전, 역 앞 광장 벤치에서 카메라를 고정한 채 피사체를 담는 실험을 한다. 이 특별한 기록의 마지막은 아냐와 어린 레옹, 그리고 아이에게 불러주는 카레르의 러시아 자장가로 채워진다. 라스콜리니코프(죄와 벌)의 노파 살해를 연상시키는 참혹한 장면에 앞서 미리 이루어진 애도인 셈이다.
작품을 이끄는 두 번째 축은 작가와 소피의 사랑이다. 작가는 이 사랑을 구원삼아 ‘다른 것’, ‘바깥’, ‘삶’으로 건너가기를 원한다. 사랑은 넘쳐나나 극한 갈등을 동반하고 소피는 단테의 베아트리스가 아닌 열정과 투쟁의 대상이 된다. 책 속의 책과 같은 르 몽드 개제 단편은 소피에게 바치는 애가이자 긴 청혼의 서(書)로 읽힐 수 있을까. 기계장치의 설계자처럼 모든 것을 기획하고 완벽한 결말을 자신했건만 예상했던 승리는 맛볼 수 없다. 다툼과 불신과 새디즘적 강박만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에 더해 가족들의 시선과 차가운 여론, 비웃음까지. 5부의 311페이지부터는 소피의 변론이 나온다. 소피 입장에서의 총괄정리편인데 카레르의 1인칭 주인공 시점을 소피의 시점으로 복기한다. 여성의 심리를 작가가 이토록 예리하게 통찰했다는 사실이 놀랍다. 종말로 치닫는 사랑이라는 점에서 이 또한 일종의 죽음이다. ‘자잘한 다이아몬드들로 둘러싸인 에메랄드가 박힌 백금 반지’(p.407), 『적』의 장클로드 로망의 반지로 마감하는 장면은 으스스하고도 필연적인 결말처럼 보인다.
『러시아 소설』은 일기이며 고백록 또는 자전적 소설이다. 카레르의 시간을 따라가다보면 자신의 시간을 투영시킨 그의 작품들도 엿볼 수 있다. 동시에 3대를 넘어 4대를 향하는 큰 폭의 가계도를 펼쳐 흐릿한 부분을 수정하고 선명한 마침표를 찍는 과정이다. 또한 이 책은 인간의 다층적인 감정을 캐내서 면밀히 분석한 보고서다. 그의 문장은 이성을 벼리게 하고 감성을 충만케 한다. 예측과 계산이 가능한 합리주의는 르몽드지의 단편 에피소드에서 정점을 보여준다.『러시아 소설』은 죽은자들과 남은자들을 글과 영상으로 담아낸 여정이다. 안드라시 토머부터 냐냐, 그리고 아냐까지, 이들을 불러낼 무대를 설치하고 커튼콜의 기회를 선사한다. 그들을 위해 진혼곡 대신 자장가를 부른다. 이제 비로소 살아있는 또는 살아남은 자들은 죽은자 또는 잃어버린 자들과 화해하고 그들이 출몰하던 죄책감과 고통의 국경선을 넘어 삶의 영역으로 이동한다. 진정한 휴식과 자유는 이제부터다.
강제에 의해 사라지고 죽음을 선고받는 사람들은 영하 25도의 코텔니치까지 가지 않더라도 떠올릴 수 있다. 스스로 실종을 선택하는 자들, 곁에 있으나 스스로를 가두고 유폐시키는 자들, 여러 개의 방을 만들어 숨바꼭질하는 자들 등 우리 곁에 있는 여러 명의 안드라시 토머를 떠올린다. 모멸감으로 스스로 투명인간이기를 선택했든, 보도 듣도 못한 팬데믹이 벼랑끝으로 밀어냈든 안드라시 토머들은 그 수를 더한다.『러시아 소설』은 책이라는 한정된 공간을 넘어선다. 애써 외면하려했던 자기만의 고통을 끌어내 직시하고 견주게 만들고 마침내 위로한다. 쓸쓸하고 먹먹한 여운이 편치 않을지언정 카레르를 만나는 시간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