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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빛 1 ㅣ 문학의 세계
윌리엄 포크너 지음, 이윤성 옮김 / 책세상 / 2024년 9월
평점 :
『팔월의 빛』을 반드시 팔월에 읽겠다고 의도하지 않았다. 7월 말에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논제 세미나를 진행하고 곧바로 그동안 아껴두었던 『팔월의 빛』을 읽기 시작하였다. 수년 전 어느 날 문동 카페 대00님의 두 권짜리 선물이 도착했을 때 포크너라는 이름은 내게 친숙하지 않았다. 아마 한 작품도 읽기 전이었을 당시에는 앞으로 포크너가 나의 독서 여정에 어떤 모퉁이돌, 나아가 디딤돌이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지금은 포크너를 통해서 아끼는 이름들을 연상하는 일이 소중하다. 까뮈나 가르시아 마르케스, 푸엔테스가 그 자체로 빼어나지만 포크너와 연관할 때 또 다른 즐거움을 안긴다. 뿐만 아니라 도착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길고 짙은 문장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인물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과거의 어둠으로 침잠하는 하이타워 또는 조 크리스마스를 생각할 때,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이반 카라마조프,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가던 이반이, 실체로 모습을 바꾼 이야기 속 인물과 어두운 방에서 대면하던 불안한 이반 카라마조프가 포개진다.
윌리엄 포크너의 『팔월의 빛 1, 2』(이윤성 옮김, 책세상, 2009, 1932, 406쪽 분량(1권)/352쪽 분량(2권))은 가장 환하고 뜨거운 빛으로 인간의 삶을 조명하고, 그 아래 드러난 생의 어둠과 희망을 깊이 응시하는 소설이다. 『소리와 분노』(1929), 『압살롬, 압살롬!』(1936)과 함께 포크너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팔월의 빛 1, 2』(1932)은 포크너 문학의 주요 배경인 가상의 공간 요크나파토파 제퍼슨 시에서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던 1930년대 초 8월의 약 11일간의 이야기다. 포크너는 1949년 “심오하고 독창적인 예술적 기교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구했다”는 평가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작가는 사랑, 명예, 긍지, 연민, 희생, 인내-그런 것들을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소설은 형식에서 난해하고 실험적이다. <소리와 분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압살롬, 압살롬!>등의 작품에서 경험해온 서사 기법, 예술적 기교는 ‘인간의 영혼 탐구’라는 주제를 성취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도구였음이 분명하다.
제목 없이 스물 한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첫 장은 리나 그로브로 시작한다. 젊은 여성인 리나 그로브는 임신한 몸으로 한 사람을 찾아 앨라배마에서 미시시피 주까지 이동하여 4주만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가 부를 것이라 믿고 소식을 기다리던 중, 직접 찾아 나서기로 결정하고 실행했다. 제퍼슨에 있는 제재소에 가면 만나게 될 한 사람, 루커스 버치를 생각하며 맨발을 옮기는 리나는 평온하다. 다만 그녀는 ‘루커스 버치 같은 작자들’(p.11)의 대표격인 상대방의 진면목을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확인하게 된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고, 마차를 얻어 타면서 제퍼슨에 도착하자, 리나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던 특유의 낙관으로 ‘세상에, 사람은 돌아다니기 마련인가 봐.’(p.43)라며 감탄한다.
두 번째 장은 바이런 번치의 회상으로 등장하는 조 크리스마스다. 독자는 처음 크리스마스가 제재소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을 바이런의 목소리로 목격한다. 그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조 크리스마스’라는 이름과 이름을 발음할 때의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징조와 이미지, 경고와 운명을 의미심장하게 기록한다. 3년 전 어느 날의 조 크리스마스에 이어, 6개월 전 제재소에 나타난 또 다른 사람인 조 브라운은 라디오를 켜고 달리는 빈 자동차, 도움 되는 일이라고는 결코 없는 한 마리 말을 연상케 한다. 브라운은 속이려는 자이고, 이름부터 가명이듯 ‘사람의 본질이 베어있기 마련인 음색이나 말하는 방식’에서부터 솔직하지 않은 점이 묻어났으며, 이런 사실마저 쉽게 간파 당한다. 도둑질이나 살인조차 잘하려면 보통 이상은 되어야 하고, 목표를 세우고 매진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인물이 결코 못되는 사람, 바로 리나가 찾아 나선 상대다. 크리스마스와 브라운이 버든 양의 농장이 있는 오두막에 함께 살며,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에 밀주를 판매하고 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졌다.
마을에서 바이런 번치에 대해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단 한명은 하이타워 목사다. 25년 전 이 마을의 교회에 부임했던 젊은 목사는 아내와 함께였다. 그러나 추문과 사건으로 아내를 잃고 교회로부터 버림받은 추방자 신세가 된 채, ‘치욕이 서린 집’에 혼자 기거하며 가끔은 바이런 번치와 이야기를 나눈다. “한때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도 바이런 번치는 그녀를 잊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녀가(아니면 사랑이) 그를 잊었다는 말이 더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p.65)라는 감성어린 글이 번치를 소개하는 첫 문장이다. 그런 번치에게 영원히 기억될 순간이 다가온다. 여느 때처럼 토요일 오후 혼자 제재소에 남아서 일을 하고 있던 그에게, 버든 양의 집에 불이나 누런 연기가 피어오르던 오후에, 사람들은 모두 불구경에 몰려있을 시간에, 리나 글로브가 걸어 들어와 루커스 버치, 즉 조 브라운 행세를 하고 있는 버치를 찾는다.
이후 소설은 인물과 사건을 추가하고 시간을 변조한다. 에피소드를 적제적소에 배치함으로 주요 인물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직조해간다. 그림자 같았던 아이 조 크리스마스가 고아원에서 겪었던 사건, 그의 곁에 있던 어른들, 그를 입양하는 가정에서 당하는 종교적 억압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버림받아서, 아이여서, 모질고 무례한 양부에게 입양되어서, 흑인의 피가 섞여있어서 그는 고통 받지만, 현명하게 최선의 선택을 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지 않기로 한다. 크리스마스는 자신의 손으로 버든의 목숨을 거두고, 퍼시 그림이라는 가공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다. 조이로 태어나서 조 크리스마스로 불리다가 조 매키천이 되었다가 다시 조 크리스마스로 죽음을 맞는다.
크리스마스가 몸을 피했던 하이타워 목사의 집을 배경으로 소설은 목사의 유년시절로 이동한다. 처음 제퍼슨에 온 젊은 시절에 그는 저물어가는 구릿빛 햇살이 어떻게 거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처럼 보였는지를 기억한다(p.679)고 회상한다. 매일 저녁 혼자 앉아서 지켜보는 석양은 그에게 두 번째 감각을 자극하고 귓전에 울리는 이미지는 여덟 살 때 보았던 아버지의 옷, 환영에 시달리게 했던 낡은 옷에까지 데려간다. 남북 전쟁 당시 대치했던 병사들,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의 증거였을지 모를 천 조각은 공포에서 자부심의 대상으로 변화한다. 하이타워의 성찰은 무의식 심연까지 내려가 어둠과 고통을 샅샅이 조사하다가 모레 구덩이에서 벗어난 마차바퀴(p.715)처럼 자유로워진다. “밤이 완전히 내려앉으려고 하는 팔월의 부드러운 대기에 걸린 마차 바퀴는 후광과 같은 희미한 광채를 만들어 자신을 감싸려고 한다. 그 후광은 얼굴들로 가득 차 있다.”(p.715)
포크너는 『소리와 분노』를 쓴 이유를 '캐디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단편으로 짧은 생을 살게 할 수 없었다.'고 (p.430, <소리와 분노>문학동네) 전했다. 마찬가지로 『8월의 빛』에서 빛은 ‘임신한 젊은 여자 리나’를 가리킨다고 밝혔다.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줄 아는 인물'(p.757)을 리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리나를 통해 어쩌면 삶은 태도의 문제, 선택에 따라 다른 문이 열리는 시험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는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기도 한 전체 서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리나 글로브에게 할애함으로 잔인한 날카로움을 감싼다. 그녀는 고행길을 걸으며 단 한 번도 푸념하지 않았고, 다가오는 정황을 한결같이 긍정의 편에서 해석했으며, 아무리 사소해도 감사를 표하는데 주저한 적이 없고, 루커스 버치를 대면했을 때 알아야 할 진실은 정확하게 통찰했다. 그녀는 하이타워 목사가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시발점을 제공했고, 바이런 번치에게 유일한 가치, 빛의 존재가 되어주었다. 소설의 결말은 리나의 명랑한 어조를 그대로 반영함으로 오래고 비참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온기와 새로운 가능성을 선사한다.
남북 전쟁 이후 여전히 인종갈등이 첨예한 시기에 일어난 백인 여성 살인 방화사건은 갈등에 불을 지핀다.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쉽게 공격 대상이 되고, 재수용의 가능성도 기회도 박탈된다. 소설은 미묘한 인간의 속내를 선명한 문장으로 정리함으로 거울 역할을 해낸다. “마을 사람들은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이란 때때로 누군가에게 마침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시켜놓고 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해지는 것이다.”95에서처럼. 소설은 시공간적 배경이 분명하지만 포크너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듯 보편성과 확장성을 가지고 독자에게 질문한다. 이 인물, 이 사건, 이 배경과 정황, 또는 선택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포크너 소설의 매력에서 문장을 빼놓을 수 없다. 끝없이 이어졌으면 싶은 장문, 결코 지루한 법 없는 열거, 리듬마저 느껴지는 사유의 나열, 비유와 직유 등 생생한 수사법의 활용, 정의 내리기, 재정리하기를 비롯하여 적확한 문장의 행진이 계속된다. 크리스마스, 하이타워 목사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결을 달리하며 ‘소리’로 심리를 표현하는 장면들, 전작인 『소리와 분노』에서 그려냈던 ‘소리’의 이미지는 더욱 섬세하고 상징적으로 진화한다. 비참한 상태에서도 놓치지 않고 흐르는 서정적인 자연의 묘사, 숲과 나무에서 공간과 시간으로 즉, 구체물에서 사유로 변화해가는 상념 등은 독자를 계속 머물게 만든다. 소설은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인생의 장면들 또한 정확하게 포착한다. 작은 차이는 복선이 되어 깊은 어둠을 드리우거나 누군가의 안녕을 안심하도록 돕는다. 캐릭터 설명이 철두철미해서 그들은 살아있는 인물로 어딘가에서 지금도 움직이고 있을 듯싶다. 제2, 제3의 A나 B를 연상하는 일이 가능하다. 세상에는 제2의 바이런들이 있듯이 제 2의 퍼시 그림도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이번에도 포크너를 읽으며 소설 안으로 심각하게 흡수되어 버리는 경험을 한다. 일상은 창백하고 무감해져서 현실복귀를 위해 일시 정지로 잠시 멈추는 과정, 숨 돌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 한가지, 작품이 주는 감동은 그 모든 여정의 슬픔을 위로할 만큼 빛이 난다. 작가는 친절하게 기대와 설렘을 마련해놓는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부당하게 던져진 존재들은 안간힘을 써서 성장해간다. 그러나 성숙하거나 온전해지지 못한 채 쫓기고 내몰린다. 불시에 삶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전가할 책임과 감당할 책임은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아직 뜨거움의 절정 팔월이어도 이미 태양은 이미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절정과 퇴락은 겹치고 혼재한다. 책을 읽으며 팔월을 언급하는 문장들을 모아보아도 좋겠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견딜 수 있는 것 같군. 하기야 사람은 전혀 해보지 않은 일조차 견딜 수 있지.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 수 있는 상황도 능히 참을 수 있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견딜 수 있어. 뒤를 돌아다보든 아니든 상황이 나아질 게 없다는 것을 알 때는 특히 그렇지.”(p.618) 바이런다운 말, 독자에게 건네는 작가의 편지 같은 말들이 기쁘게 닿는다. 소설의 부제를 ‘길 위에서’라고 붙여본다. 수많은 인물들이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자기 앞에 놓인 길을 얕보고 저주했으며, 그 길 위에서 방황하고, 30년을 헤맨 끝에 길을 찾기도 하지만 너무 늦은 경우도 있었다. 방향도 없이 길 위를 무작정 달리던 이, 먼지 날리는 길에서도 기꺼이 미소 짓는 이들 역시 보았다. 치밀하고 치열한 포크너식 글쓰기는 예상했던 대로 놀라움을 자아낸다. 계속해서 질문한다. 부조리한가? 그게 다인가? 이제 끝인가? 라고. 더 이상 집필되지 않지만 여전히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할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위안 삼는다. 아직 8월,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책 속에서>
그러나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악이 성공하기가 용이하지도 않고, 또 비밀이 유지되는 것이 드문 일이기도 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악을 만들어 다른 사람의 이름에 덮어씌우기도 한다. 그런 것이 악이 요구하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 마음에서 저 사람 마음으로 바람에 날리듯 옮겨 다니는 그런 생각, 그런 단 한마디 근거 없는 말이 악이 요구하는 전부인 것이다.(p.97)
붉은색의 고운 흙이 덮인 길은 이미 기울기 시작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언덕 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 저 정도 언덕은 문제없어.’ 그는 생각한다. ‘언덕쯤이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지.’ 지난 7년 동안이나 친숙했던 언덕은 평화롭고 조용하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견딜 수 있는 것 같군. 하기야 사람은 전혀 해보지 않은 일조차 견딜 수 있지.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 수 있는 상황도 능히 참을 수 있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견딜 수 있어. 뒤를 돌아다보든 아니든 상황이 나아질 게 없다는 것을 알 때는 특히 그렇지.’(p.6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