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에게 재능이 있나요?
김경욱 지음 / 마음산책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본격적이지 않아서 좋다. 본격적인 작법서도 글쓰기 책도 아니고, 본격적인 리뷰 모음집도 아니다. 강의록을 묶어서 내 강의의 진수를 보여주겠노라고 초대한 자리도 아니다. 김경욱의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마음산책, 2025, 216쪽 분량)는 쓰기와 읽기, 살기와 걷기를 적당한 간격의 징검다리 돌처럼 놓아 계속 가보게 만드는 산문집이다. 글이 본격적이라 온통 빨강인 책(빨간 볼펜 밑줄과 별이 그득한)도 필요하지만 이처럼 거울이 되고 창이 되는 편안하면서도 적절하게 치열한 책도 감사하다.

 

적절하게 치열한 책이란 뭘까.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쉽게 예측되지 않고, 뽐내지 않으면서도 그의 성실과 진심이 짐작 가능해서 저절로 지지하게 되는 정도라고 생각한다. 사실은 뽐낼 만도 하다. 수많은 문학상 수상과 아홉 권의 소설집과 아홉 권의 장편 소설을 낸 한국 소설가이며 진화하는 소설 기계라는 별칭까지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예종 교수로 20년째 창작을 설파하는 분이니 말이다.

 

소설가의 첫 번째 산문집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예술과 학교>, <예술과 인생>, <예술과 기술>까지 세 장에 각각 아홉 편의 글을 본문으로 실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여러 가지 키워드가 여운처럼 남는데 그중 하나가 숫자 9. 한 꼭지당 분량은 여섯 페이지 내외라 한 호흡으로 읽기에 편하다. 편할 뿐 아니라 내용이 솔깃하고 흥미롭다. 재미있다는 말이다. 표제작이라고 할 수 있나, 첫 번째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에서는 작가가 되고 싶다면 우선 편지를 쓰자고 말한다. ‘이야기란 그리거나 적는 게 아니라 들려주는 것이라는 근거와 함께. 첫 문장을 쓰지 말고 첫마디를 건네야한다는데, 목소리를 입혀야 한다는 데서 그렇구나! 버튼을 새삼 누른다.

 

작가는 고흐의 그림을 보고 그림이 목소리인 것과 같이 글 또한 목소리라고, “이미지가 아니라 소리다.”(p.18)라고 보탠다. 공감 버튼을 연거푸 누른다. 윌리엄 포크너의 <소리와 분노>를 거듭 읽는 중이라 소리는 나에게 단어를 넘어 탐구할 대상이 된 지 오래다. 첫 장은 재능이란 어떠어떠하지 않는 것이다, 라는 통찰로 마친다. “자신을 아끼는 데 게을러서는 안 된다.”(p.20) 혹한이냐 싶은 가을에 온기를 전하는 말로 마무리한다.

 

소리라는 말을 듣고 포크너를 생각하였는데 두 번째 글에서는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언급하며 문학도 예술일 수 있었다고 전한다. 독자는 상상의 강의실에 학생들과 함께 앉아 고흐의 그림을 보고, 메리 올리버의 시 <기러기> 낭독 소리를 듣는다. 내면의 자화상과 외면의 자화상을 함께 그리고 써본다. 토니 모리슨과 필립 로스에게서 분노도 연민도 없이 정확한 소설을 쓴다는 의미를 생각하며 책을 장바구니에 담는다. 내로라하는 세계문학의 첫 문장 중에서 <모비 딕>나를 이슈미얼로 불러달라.’를 오랜만에 상기한다.

 

이 책의 장점을 어쩌면 잊고 있던, 책꽂이에 붙박이처럼 결박된 빼어난 고전에 공기를 통하게 하고, 새로 만날 계획을 세울 수도 있다는 데서 찾는다. 읽지 못한 작가들에 대한 다급함도 일깨운다. 물론 글쓰기 요지도 배울 수 있다. 플롯의 정의를 자꾸 다시 확인하곤 했는데 순서가 바뀌면 관계도 바뀌고 사건의 의미도 달라진다. 스토리가 선택이라면 플롯은 배치일 것이다.”(p.186)라는 설명은 꼭 기억하려고 마음먹는다.

 

즐겁게 읽다 보면 제법 밑줄이 한가득이고 메모도 눈에 띈다. 이대로만 해도 훌륭해질 듯하다. 이대로 못해서 문제지. 책은 짧은 소설도 두 편 담았다. 작가의 다른 소설도 만나보고 싶어진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이야기는 <황소가 하는 일, 전갈이 하는 일>이었다. 글쓰기 책을 낼 수 있을 만한 아이디어 메모 노트 분실 경험은 생생하게 와닿는다. 정말 소중한 걸 잃어버리는 경험에서 나아가 되찾기까지. 그런데 그 안에 있어야 할 내공의 진수이자 진리는 평범했다는 아이러니. 내 안의 전갈이 두려워한 것은 두려움 자체였다는 성찰은 내 생각이 짧았다는데 이른다. 소설만이 아니라 산문도 아름다운 초대일 수 있다는 깨달음에(‘깨달았다금지) 앞으로 나올 작가의 새로운 산문을 벌써 기다리기 시작한다.

 

나의 독서 여정을 3초 안에 훑어볼 때 지금은 윌리엄 포크너 시대다. 재독 도서, 삼회독 도서, 초회독 도서를 한꺼번에 읽다 보니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때로 분노도 솟구친다. 대체 왜 이러시는 걸까요, 나한테 왜 이러시는 건가요, 이런 문장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 건가요, 포크너 승! 혼잣말하며 소리 내거나 분노하고 감탄하던 와중에 읽은 <나에게 재능이 있나요?>는 책이 이렇게 친절해도 되는 거야? 이렇게 다정할 수 있는 거야? 단비 같은 시간이었다. 본격적이지 않아도 좋은 김경욱 소설가의 산문집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를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 책꽂이에 있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드디어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바로 작가의 두 번째 단편집 <사라진 것들>의 출간 소식이 들려서다. 신간을 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이자 예의로써 읽었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한줄 평을 이론 따위 필요 없다. 자체 발광하는 작품의 아련한 눈부심으로 빠져보자라고 쓴다. 두 줄, 세 줄이 되면 점점 더 과도해질 터라 한 줄로 맺는 게 최선이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은 앤드루 포터는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2008년 단편소설 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하였다. 출간 당시 현재 미국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단편 작가’, ‘데뷔작에서 이미 장인의 솜씨를 보여주었다는 등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앤드류 포터의 사라진 것들(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2024, 332면 분량)<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후 15년 만에 출간되었지만 필자는 15년을 7일로 단축하는 순간이동을 가상 체험하였다. 전작의 빛이 유쾌하게, 자신있게에 방점이 찍히지 않았음에도 <사라진 것들>과 비교할 때 찬란에 가깝다. 소설집 <사라진 것들>은 열다섯 편의 작품으로 열다섯 번 쓸쓸함을 덧칠한다. 두껍게 겹쳐진 마띠에르는 감정의 여러 갈래를 압착해내서 과거라는 시간의 핀으로 고정하기에 복구의 여지를 없앤다. 겹겹이 올린 물감색은 쓸쓸함 또는 쓸쓸함이 번졌을 때의 컬러라 감정의 분지들은 하나의 색조로 짙어져간다. 주조색은 아무리 해도 명랑이나 희망참과 간극을 벌린다.

 

하지만 어쩐지 더 큰 목적에서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중략)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p.21) 옛 친구들의 모습이 묘한 광경으로 비치는 건 그들은 그때 그 시간에 머물러 있고 나의 시간만 흐른 느낌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나는 아내와 두 아이의 안위를 염려하고 안전을 확인하고 파수꾼 역할을 하며 걱정과 과민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의 교차에 현기증을 느낀다. ‘너 어디로 간 거야?’ 라는 친구의 문자는 과거에서 걸려온 전화처럼 아득하다.(오스틴)

 

작가는 상실에 대한 감각을 다시 한번 스케치한다.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담배나 와인, 심야의 여유가 사라질 걸 몰랐다. 함께하기에 인생도 사랑도 배가 될 것이다.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p.26)라고 할 때, 사라진 것의 대체물이 보기에 좋아 보이고 바람직해 보이나, 그 좋은 웃음이나 재미에 반하여 정작 잃게 되는 건 관계의 본질이고, 감소하는 건 각자의 실존이다. 양팔 저울이 급격히 한쪽으로 쏠린다.(담배) “그런 것들은 어떻게 알게 되는 걸까?”(p.56) 물음은 답에 이르지 못한다. 그림들을 본 순간에 그냥 알았다는 사실만을 알아차릴 뿐이고, 곧이어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이미 가버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자각에 놀란다. 그는 그녀를 쓸모없는 물건들이 가득 찬 벽장 안 그림 한 점에서 떠올렸다. 잊었던 시간, 잃게 된 그녀를.(넝쿨식물)

 

소설은 아름다운 요소가 충만하다. 고전문학들, 도스토옙스키, 그림, 조각가, 와인, 음식, 식물, 음악, 클래식 연주, 편지 등 다양한 모티프를 두루 배치하고 집중적으로 반복한다. 손상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좌표를 고정하고 있는데 반해 끊임없이 낙하하는 인간조건의 대비는 극명하다. <첼로>는 위대함의 표상, 특출하고 탁월한 재능의 현현이었던 첼리스트에게 닥친 병과 그로 인해 깨어지는 일상, , 성공, 계획 가능했던 미래와 이를 지켜보는 동반자의 아픔과 무력감을 그린다. 인생에 가하는 타격이 이유 없이 전격적일 수 있고 인간은 취약한 선택지(기다리거나, 견디면서 기다리거나)만을 받아든다는 설정은 소설보다 현실에 가깝다.

 

이와 같은 취약함은 아이의 요구에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서(숨을 쉬어), 상대가 어떤 식으로든 내 뒤통수를 쳤다고 느껴서정년직 임용에 탈락한 일을 정년직 임용 사건’”(p.163)으로 확정하고 나름의 관계 재정립과 함께 컬렉션이라는 치졸한 복수를 쌓아간 지성인들의 이야기에서도(실루엣)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시선을 두었던 협곡이 미지의 공간이었듯이 실루엣만 보일 뿐이던 손짓에 의미를 만들고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 일 역시 불안정하다. 불확실을 확실로, 나아가 확고부동함으로 밀어붙였던 기저에는 느낌이 있었을 뿐이다. 느낌에 기인했던 오해는 바로잡을 수 있을까. <>의 화자는 매우 취약한 상태”(p.212)에 놓인 가정이라 혹시 무너질까봐 힘주어 밀수도 없다고 고백한다. 언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아내와의 관계를 복기하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면밀히 살핀다. “작은 구멍, 떼를 지어 드나드는 벌들, 그 옆 풀밭에 놓인 텅 빈 벌집.”(p.219)은 벌의 본능적 행위가 아니라 침몰하는 관계의 불길한 메타포다. 이와 같은 전조를 그들은 최대한 감추지만 이번에도 깨달음은 갑자기 도달한다.

 

모든 일이 끝이 있듯이 놀이도 끝이 있다. 하물며 가장놀이라면. 화자가 친밀함을 회피하는 사람이 된 진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말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p.127). 조금 과장하자면 인류 공통의 독백이 등장하여 흠칫한다. 그는 덧붙인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아직 확실히 기억할 수 있다고. 묵과의 베일을 걷어내고 어긋남의 시작점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 순간을 상기하는 지금, 그는 여기에서 안녕한가. 감정을 낱낱이 분석하지 않아도 결말은 안온하리라는 낙관과 달리 익숙했던 쳇바퀴는 어느새 낯선 족쇄로 발목 잡는다.(라인백)

 

이 식당 밖의 세상에서 내 인생은 혼란 그 자체였다.”(p.232) 다행히도 그에게는 자기만의 공간, 안전지대가 있다. 당신은 어떤가, 지금 당신의 포솔레 수프는 무엇인가 작가는 묻는다. 이 작은 안위조차 곧 사라지곤 한다. 히메나의 아파트처럼 미래형 동굴이 끝없이 안심시키는 듯했으나 이 또한 기한이 정해진 아지트였다. 안심의 근거는 인정의 부재를 보이는 존재로 바꾸어주는 마법에 있었다. 더 이상 유령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기회는 놓치기 어려운 법이다. 마지막 작품이 표제작인 <사라진 것들>이다. 지금까지 회피와 상실의 여러 모양을 그려왔다면 본격적인 실종과 남겨진 자들을 말한다. 친구 대니얼은 이미 사라진 후이고 화자의 아내 타냐는 자기 영역을 만들고 소통을 거부하는 성정으로 언제 부재하게 될지 두려운 실종 임박 상태다. 남겨진 자들, 실종자의 여자 친구와 화자는 대니얼의 집을 정리하는 이틀간, 그리고 과거로 편입될, 사라지기 직전의 반 시간을 같은 마음으로 지킨다.

 

분명 확실했다. 캠퍼스와 친구들과 소소한 유흥과 아주 많이 남은 미래가 확실했다. 자신도 있었고 물질적인 곤란만으로 계량할 수 없는 여유도 지녔다. 확실함을 지렛대 삼아 하루, 또 하루를 보냈던 청춘이었건만 주위를 둘러보는 지금 이 순간 낯선 떨림이 안으로부터 흔들려 퍼진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굳이 찾아보자면 그대는 유쾌하지 않으리라, 상실을 받아들이게 되리라, 패배의 맛이 진하게 배어 있는 상실이리라, 끝에는 세상 두려운 네 글자, 너무 늦은 감 있는 네 글자, ‘다시 시작이 버티고 있으리라는 정도만이 확실하다. 작가는 인생의 중반을 통과하고 있는 남성들의 목소리를 정성 들여 지면에 새겼다. 여섯 편의 초단편은 산문시처럼 아름다운 압축을 보여주는데 마치 순도 높은 보석 같다. 특히 <고추>는 붉은 루비에 견줄 만하다.

 

작가는 한 편 한 편 첫 문장부터 마지막 온점까지 눈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고 이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문장은 간결하고 주의는 흐트러지지 않으며 감각을 예리하게 벼린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중간중간 말을 거는 다른 목소리가 있다. ‘아시죠? 당신 이야기잖아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서술도 독자의 시간을 맞대어보게 한다. 낯익으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정연한 문장으로 읽을 때 마음에서는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감정도 분리수거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회한이나 아쉬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실수나 착각에도 눈을 맞춘다. 회피와 외면, 핑계와 합리화, 책임 전가까지도 인정하는 시간, 반드시 대면해야 할 시간을 작가는 초청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푸시킨의 명시 첫 행에서 의구심이 든다. ‘노여워가 이 자리에 적절치 않아 보인다. 분노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근력도 줄었다. 노엽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깝다.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그대를 한 번도 요청하지 않았던 곳으로 이끌었을지라도, 이 사실을 어느 날 느닷없이 깨닫게 되더라도, 잠시 얼얼한 타격감이 느껴지더라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여기가 낯설어지는 순간, 뒤 돌아 서서 한 걸음씩 되밟아 올라가다 틀린 지점을 찾아 오답 풀이와 함께 수정할 수 있다면 자기 몫의 캔버스는 밝고 투명하게 유지될 테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문제다. 그 작은 연산 착오는 이미 01, 10으로 교란해 버렸다. 이 간격은 종말에 이르렀을 때 무한없음만큼이나 회복하기 어려운 차이를 만들어낸다. 환불 요청은 물론이고 바꿔주세요, 라는 교환 요청도 어림없다. 댁이 다 사셨잖아요. 인생 무대 관리자(만일 그런 게 있다면)는 삶을 살아냈다는 의미로 응대하였으나 돈을 지불했다고도 해석 가능하다. 그러니 반박할 수 없다. 서서히 자리를 떠나는 속내는 온통 헝클어지고 입안은 쓰디쓰며 잠긴 목에 비명이 살짝 걸친다.

 

전도서의 기자인 지혜자는 한 문장에 다섯 번을 반복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인간의 삶을 총평했다. 불통하여 불화하게 되었고 그래서 불만인 순간들은 미세한 변이와 복제를 자동화 시스템처럼 일으켜왔기에 영민했던 청춘조차 적절한 응대에 실패했다. 작가는 묻는다. 그래서 앞으로? 라고. 다른 누구 아닌 당신은 이제 막 확인한 생의 진면목 앞에서 어리석은 매너리즘과 장엄한 시지프스 중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아갈 것이냐고.

 

푸시킨은 2연에서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한없이 슬픈 것이라고 노래했다. 책 속 인물들은 마음은 과거에 살고 현재는 한없이 슬픈 것으로 치환하며 얼어붙는다. 하지만 시인은 이어지는 마지막 행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움이 되리니에서 예언한다. 지금, 여기, 자각의 순간 또한 만일 작가가 15년 후에 세 번째 단편집을 출간한다고 가정할 때 더할 수 없는 그리움이지 않을까. <첼로>의 한 장면은 자신의 진정한자아와 실제자아를 묘사하는 단어를 기록하는데 포터의 소설은 이 간극에 눈감지 않고 생의 변곡점에서 다음 발을 떼는 이들의 초상을 완성한다. 그렇게 응원하고 있다. 직면하기, 이제 우리들 각각의 차례다. (.)

 


(20240807 서평)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일리아스에 대하여
라헬 베스팔로프 지음, 이세진 옮김 / 미행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라헬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하여(이세진 옮김, 미행, 2025, 125쪽 분량)<일리아스> 완독의 아쉬움을 단번에 사라지게 해 줄 책이다. 이 책은 수많은 수식과 찬사로 에워싸인 고전, 감싼 헌사의 무게가 때로는 장벽으로 다가오기도 하는 명저, 가장 오래 되었으면서도 여전히 빛나는 길잡이 별, 최고의 서사시인 <일리아스>를 정확하게 조명한다. 얇은 책은 예리한 날처럼 틈을 내어 고전의 중요한 핵심을 건드리고 드러내 보인다. 저자는 840페이지 분량의 서사시에서 꼭 필요한 요소를 단 125페이지로 포집한다. 시몬 베유, 한나 아렌트와 동시대에 활동하였던 여성이자 유대인, 철학자인 라헬 베스팔로프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다시 읽은 일리아스에 대한 통찰을 기록하고 전쟁에 맞서는 자신만의 방식이라고 하였다.

 

목차를 보고 감동할 수 있을까. 이 책이 그렇다. <일리아스>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독자는 첫 장이 <헥토르>인 것에 감격한다. 첫 페이지부터 문장의 긴밀함과 밀도는 독자를 바짝 끌어당긴다. 헥토르라는 이름이 한 번 언급될 때 열 번에 맞먹는 파장이 감지되고 다른 이름들이 끌려온다. 안드로마케와 아스튀아낙스가, 프리아모스와 헤카베가, 헬레네와 파리스가, 그리고 아킬레우스가 끌려온다. 모든 문장이 밑줄이라 밑줄로 동여매어진 책에서 발췌를 꼽기가 어렵지만 다음 문장을 인용하다. “그리하여, 헥토르는 후대 사람들에게 길이길이 회자될것이라는 이 영광을 제외하고 전부를 잃었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전사에게 이 영광은 기분 좋은 환상이나 알맹이 없는 허세 따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속이 나타내는 바와 맞먹는다. 그건 바로 불멸에 대한 확신이다. 이야기를 넘어, 시의 지고한 초연함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확신 말이다.”(p.25) 전부를 잃은 헥토르는 죽음으로 불멸에 이르렀음을 명확히 한다. 아무도 반론할 수 없다.

 

서사시 1권의 첫 행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1)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라는 <일리아스>의 주제를 확인하는 건 보편적이다. 그러나 저자는 사실은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아니라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 <일리아스>의 중심 주제를 이루고 작품의 통일성과 진행을 동시에 지휘한다.”(p.26)고 주장한다. 서사시는 두 영웅이 맞서기 전에 하르팔리온과 에우케노르의 대리전으로(일리아스 13) 먼저 암시하고, 운명적 결전을 노래가 끝나가는 22권에 배치한다. 이 책의 두 번째 장에 나오는 아킬레우스는 파트로클로스가 아닌 어머니 테티스와 함께다. 저자는 테티스가 아킬레우스를 약점 없는 존재로 만들지는 못했기에 그가 독자의 마음에 와 닿는다고 밝힌다. 아킬레우스의 운명이 헥토르보다 더 가혹한 이유는 그가 불의에 바쳐진 자이고 불의를 가할 것이냐 당할 것이냐만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들을 향한 테티스의 분투와 비탄은 <일리아스> 내내 베어 나왔다. <일리아스>를 펴니 우연히도 그 중 한 부분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그대의 무릎을 잡고 간청하는 거예요.

혹시 그대가 단명할 내 아들을 위해 방패와 투구와 복사뼈 덮개가

달린 아름다운 정강이받이와 가슴받이를 만들어주실까 해서.

그 애가 가지고 있던 것은 그 애의 충실한 전우가 트로이아인들에게

쓰러질 때 잃어버렸어요. 그 애는 지금 속이 상해 땅에 누워 있어요.”(457-461/p.547/일리아스/천병희 옮김/)

그녀는 제우스에게든, 헤파이스토스에게든 거침없이 다가가고 몸을 던져 탄원한다.

 

이어지는 헬레네의 장에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를 논의한다. “그녀는 트로이인들에게 속하지 않고 아카이아인들에게도 속하지 않는다. 아름다움은 주어질 때조차 자기 자신에게만 속한다. 아름다움은 자신을 만든 자, 자신을 관조하거나 욕망하는 자에게서도 달아난다.”(p.44) 그리고 헬레네의 변질되지 않는 아름다움은 생에서 시로, 육체에서 대리석 조각상으로 넘어가면서도 그 감동을 잃지 않았다고 아름다움의 신성함에 대해 말한다. 미의 본성을 꿰뚫어보고 전달하는 저자의 능력 덕분에 독자는 안다고 여기던 개념을 낯선 눈으로 바라보고, 더 눈부시게 인식한다. 지금도 여전히 우리는 헬레네를 차지하려 싸운다는 결말, 실상은 판로나 원자재, 비옥한 땅을 두고 싸우는 게 아니라, 헬레네를 놓고 다툰다는 지적은 놀라움을 안긴다.

 

신들의 희극에서는 <일리아스><전쟁과 평화>를 나란히 놓는다. 두 저자에게 진지함의 부재는 인간 이하를 의미하고, 모든 것의 원인이지만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는 전자의 신들과 후자의 사교계 사람들을 동일선상에 둔다. “트로이에서 모스크바까지에서는 다시 한 번 <전쟁과 평화>를 언급한다. 죽어가는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던지는 환멸 어린 시선과 안드레이 볼꼰스키가 자신의 죽음 너머에 던지는 듯한 시선(p.62)에서, 죽음을 눈앞에 두고 엿보았던 영원에서, 전쟁이란 무엇인가, 바로 생을 소진하면서 생에 지고한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재정의 내린다. 저자는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만찬을 놓치지 않는다. 서사시의 마지막 권이며 주제를 견인하는 결말에서 비통함으로 간구하는 노왕과 그를 통해 자신의 아버지를 떠올리며 인간으로 돌아와 환대하는 아킬레우스를 주목한다. 그리고 고대적 원천과 성경적 원천에서 두 개의 원천<일리아스><성경>을 같이 살핀다.

 

이 책에서 특히 좋았던, 그래서 감탄했던 부분은 톨스토이와 호메로스를 견준 지점이다. <전쟁과 평화>를 다시 읽어 보라는 인사이트를 준다. <전쟁과 평화>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는 참전한 안드레이 볼꼰스키 공작이 눈앞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응시할 때다. “멀리 도나우 강 뒤쪽에 푸르게 보이는 산들, 수녀원, 신비로운 골짜기, 우듬지까지 안개가 낀 소나무 숲은 더한층 훌륭했다······저곳은 고요하고 행복에 가득차 있다······‘내가 저기에 있을 수만 있다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것이다.(중략) 그런데 여기에는······(중략) 아아, 바로 저것이, 저것이, 지금 내 머리 위와 내 주위에 있는 저것이, 그렇다, 죽음이다······눈 깜짝하는 순간에 나는 저 태양도, 저 강물도, 저 골짜기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1p.290) 관념이 아니라 사실로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이다. 저자는 볼꼰스키 공작과 헥토르 왕자를 비교했는데, 앞의 문장에 이어 공작이 마음을 정하는 부분이 나온다. “그러나 만약 죽음밖에 다른 길이 없다면? (중략) 글쎄, 필요하다면! 다른 사람들에게 뒤처지지 않는 죽음을 맞으리라.(전쟁과 평화 1p.321, 문학동네)” 안드레이 다운 각오인데 지금 다시 읽으니 상당히 헥토르적이다. “하지만 내 결코 싸우지도 않고 명성도 없이 죽고 싶지는 않다. 후세 사람들도 들어서 알게 될 큰일을 하고서 죽으리라.”(일리아스 22303-305/p.633, ) 거의 동일한 문장이 반복되는 듯하다. 비평가 이반 곤차로프가 <전쟁과 평화>살아 있는 거장이 쓴 러시아판 일리아드라고 칭할 만 하다. 아마도 그래서 레몽 크노가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이거나 오디세이아.”라고 단언했을 테다.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고 전쟁이 수없이 반복되어도 다시 두꺼운 서사시의 첫 페이지를 펼치는 이유일 것이다.

 

모터 달고 달리는 글, 힘이 넘치는 글에서 에너지가 폭발한다. 고전의 주요 인물에 대한 평은 몇 개의 겹이 있어서 저자가 처한 상황, 고통, 불안, 무너지지 않겠다는 결기, ‘그럼에도라는 선언과 다짐이 포개져 있다. 어두운 시대를 향한 제언과 소망, 나아가 구원 요청까지 담겨있다. 숙고하며 전개했을 치밀한 저작은 분출하듯 쏟아져 나오니 타격감을 느낄 정도다. 이 책이 유사한 시기에 <일리아스>를 읽고 쓴 시몬 베유의 일리아스 또는 힘의 시에 대한 응답이라고도 하는데 베유의 시선도 궁금하다. <일리아스에 대하여><일리아스>를 읽은 독자가 언제까지나 안도하며 아낄 책이다. 또한 아직 읽지 못한 독자를 기대하고 열망하게 만들 책이며, 나아가 상상하고 꿈꾸게 할 책이기도 하다. 라헬 베스팔로프,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탁월한 선택과 집중을 보여주는 버릴 글자 하나 없는 아름다운 저작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일리아스의 철학, 이 쓰라린 경험의 소산은 원한을 배척한다. 원한은 무엇보다 자연과 실존의 결별이다. 여기서 전체는 부서진 조각들을 이성의 힘으로 그럭저럭 맞붙여놓은 조립이 아니라, 모든 구성 요소들의 상호 관통이라는 능동적 원칙이다. 불가피한 것의 전개는 인간의 마음과 우주를 동시에 극장으로 삼는다. 이야기의 영원한 실명(失明)과는 대조적으로, 시인의 창조적 혜안은 신보다 더 신적이고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영웅들을 후대 사람들에게 가리켜 보여준다.(p.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람을 목격한 사람 - 고병권 산문집
고병권 지음 / 사계절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병권의 사람을 목격한 사람(사계절, 2023, 328쪽 분량)은 대신 기록하는 펜, 대신 외쳐주는 앰프. 저자는 이 앰프를 싸구려 앰프라고 칭하지만 성능 좋은 앰프는 무심했던 이들이 고개를 돌리게 만든다. 그가 대변하는 이들은 약하고 상처받은 사람들, 내몰린 채 고통 받는 사람들이다. 책 표지에는 제목 사람을 목격한 사람을 다섯 번 반복해서 썼다. 앞의 사람은 각각 다른 서체이고 뒤의 사람은 동일한 글씨체다. 앞의 각각 다른 글씨체 사람은 다른 아픔에 처한 채 속수무책 버티고 있고 뒤의 사람은 목격한 증인으로, 목격 이전과는 달라져야 하고 달라지는 과정 중의 사람이다. 표지의 세 개 기호는 사람, 목격하는 눈, 이 둘이 만나 하나가 됨을, 변화를 일으킴을 뜻하지 않을까. 마지막 표기가 자꾸 비로소 쉬게 되는 숨을 연상케 한다. 기관지 절개술로 기도를 확보한 이미지를, 일단 안심하게 되는 그림을 떠오르게 한다. 고병권은 노들장애인야학 철학 교사이며 읽기의 집 집사로 작은 앰프가 되기를 소망하며 함께의 선봉에 선 지식인이자 행동가, ‘아프고 슬픈 사람, 싸우는 사람 곁의 인문학 연구자이다. 그의 목소리는 독자와 사회를 환기한다.

 

사람을 목격한 사람2018년부터 2023년까지 저자가 쓴 글과 현장에서 행한 연대 발언을 모은 산문집이다. 1<두 번째 사람> 두 번째 사람 홍은전은 심보선 시인의 시의 의미로 시작한다. 두 번째로 슬픈 사람이 첫 번째로 슬픈 사람을 생각하며 쓰는 게 시라고 한다. 순서를 나타내는 서수를 사람에게 붙이자 슬픔의 진원지로부터 떨어진 거리가 가늠된다. 시인을 제외하고 두 번째 사람은 누구일까. 홍은전 작가는 세상에서 제일 많이 비어 있는 두 번재 자리를 채우는 사람이다. 두 번째 사람이 선 자리는 첫 번째 사람이 도와달라며 손을 내밀 때 소매가 잡히는 자리’(p.28)이기에 세 번째 네 번째 자리가 과밀해도 두 번째 자리는 회피하는 곳이다. 저자는 서술함으로 독자에게 거울을 건넨다. 당신은 어디에 서 있는지를 묻고, 혼자 우는 자가 있다는 걸 알릴뿐 아니라 두 번째 사람을 기록한다.

 

2<아프고 미안한 사람> 구차한 고통의 언어에서는 누구도 아픈 것 때문에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p.56)는 말에 들어있는 두 겹의 고통, 생리적 고통과 그 상처를 가졌다는 사실로 인한 해석적 고통을 설명한다. 소수자들이 사용하는 변명의 언어는 어떻게 자포자기의 언어에 이르는가를, 우리 사회가 미안해하지 않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미안해지는 일의 원인을 알린다. 3<보이지 않는 사람>에서 보이지 않는 존재로 살다가 이제는 볼 수 없게 된 노동자들(p.96)을 기억하며 저자는 두렵다고 호소한다. 이 호소는 우리 사회 저택 주인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 사람이 주검이 되어도, 주검이 빈 자리가 되어도 보이지 않을 것 같다는 두려움이다. 4<포획된 사람>은 불법 체류자 단속이 초래한 딴저테이 사례를 알린다. “범죄가 법적인 타락이라면 불감은 윤리적인 타락이다.”(p.123)라는 지적은 세계 도처에 일어나고 있는 현재 진행 중인 사건들이 이대로 괜찮은지 질문한다. 5<함께 남은 사람>에서는 코로나 당시 방역 모델과 근대적 주권 모델에 전제된 타인에 대한 표상이 닮은꼴이고 해석한다. “안전을 위해 타인을 무증상 감염자로 간주하라는 방역 지침과 타인을 본성상 늑대로 간주하고 안전책을 도모하는 사회계약론은 멀리 있지 않다.”(p.169)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라는 말도 있지만 인간은 인간에게 신이다는 말도 있음을 강조한다. “공동 격리를 자원한 활동가편에서 저자는 그들로부터 삶이 가장 축소된 순간에도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혼자여서는 안 된다는 것”(p.171)을 확인한다.

 

6<싸우는 사람> 죽은 사람의 죽지 않는 말은 네 페이지를 할애하여 유언을 만난 세계의 소회를 담는다. 유언을 만난 세계는 열사 여덟 명이 겪은 차별과 투쟁, 저항 그리고 죽음을 기록함으로 그 의미를 새긴 저작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국 장애 운동사에서는 이들 안티히어로(반영웅)’열사이다.”(p.209)라고 쓴다. 7<연대하는 사람>의 첫 강연원고 한국 장애인들의 투쟁 형상은 어디서 왔을까에 앞서 언급한 유언을 만난 세계를 비롯한 <비마이너>3부작에 대하여 부연한다. 애도와 투쟁의 결합인 장례 투쟁이 필요한 이유, 생존에 대한 열정이 사회변혁에 대한 열정과 무관할 수 없다고 밝힌다.

 

프롤로그부터 에필로그까지, 코앞에 다가온 죽음을 목격한 사람, 목격하고 절규하는 사람의 구조 요청인 여기, 사람이 있다!”(p.5)에서 살려주세요’(p.322)까지, 그 사이에도 계속되는 구조 요청이 있다, 사람이 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닌 이유는 의도하는 만큼 다듬고 잘라서 보여주기 때문일 수도 있고, 보는 이가 다급한 자의 손이 닿지 않을 자리인 세 번째, 네 번째 자리를 고수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저자는 서두에 내가 쓴 글들이란 한두 걸음 떨어져서 보고 느낀 안타까움에 지나지 않는다.’고 고백하지만 작은 소리도 놓치지 않는 스피커, 성능 좋은 확성기가 되어 곁에서 동행한다. 글로 새겨 잃어버리지 않도록 묶은 책에서 독자는 니체도 프리모 레비도 잠시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정신 승리의 상징인 아Q도 오랜만에 만난다. ‘사람 살려라는 네 글자를 알아듣는 것이 문학이고 철학이라는 저자의 말은 책을 읽고 난 후에 더 또렷해진다. 제목이, 제목의 서체가, 사람과 눈의 간결한 표식이 또렷해진다. 먹먹해지는 가운데 함께의 의미를 묻는 책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함께 사는 곳에서는 잠시 떨어져 지낼 수 있고 얼마든지 혼자 사는 것도 가능하다. 언제든 연락할 사람, 연락해오는 사람이 있는 곳에서는 잠시 연락을 끊고 지낼 수도 있다. 하지만 격리된 채 고립된 사람들은 살 수가 없다. 제아무리 강한 사람도, 제아무리 큰 도시도 이것을 버틸 수는 없다.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한다.(p.16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영혼 없는 작가
다와다 요코 지음, 최윤영 옮김 / 엘리 / 202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영혼 없는 작가(최윤영 옮김, 엘리, 2025, 272쪽 분량)는 독일어와 일본어로 글을 쓰는 이중 언어 작가 다와다 요코의 에세이 선집이다. 이번 개역 증보판에는 초판본(2011)에서 아홉 편을 추가하여 모두 스물세 편을 담았는데 유럽이 시작하는 곳(1991), 부적(1996),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2002)에서 정수를 모았다. 일본에서 태어나 러시아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에 정착하여 독문학을 전공한 다와다 요코 문학은 일본어 작품과 독일어 작품이 주제, 형식, 문체 면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인다고 역자는 전한다.(p.268) 일본어 작품이 스토리를 갖춘 본격 문학에 가깝다면, 독일어 작품은 에세이적 성격이 강하다고 평가하는데 이번 작품집은 후자에 속하는 작가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작가를 향한 호평은 기대를 높이고, 자유로운 여행자이자 집요한 관찰자, 창조적인 예술가로서의 다와다 요코를 서둘러 만나고 싶게 한다.

 

<유럽이 시작하는 곳>은 화자가 동 시베리아 항구까지 배에서 보낸 시간과 유럽까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탄 백 육십 시간의 기록을 모았다. 기록은 여행 일기, 여행이 끝난 뒤에 지어낸여행 일기, 여행기와 상상, 배의 도서실에서 본 지도, 동화 모음집, 잠에 빠져들며 들었던 옛 이야기, 어머니가 어린 시절에 추천 받았다는 지혜로 가득 찬 소설, 화자가 썼던 소설의 한 부분 등을 포함한다. 이야기와 현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이면서 화자는 목적지를 향하여 이동하고 마침내 도착한다. 기록 중 등장하는 시베리아의 숲처럼 지혜로 가득 찬 소설, 모스크바를 도서관이 중심인 도시로 각인케 만든 책은 과연 무엇이었을지 궁금하다. <엄마말에서 말엄마로>는 독일로 이주한 작가가 필기도구와 문구류를 소재로 언어의 독특한 차이, 언어를 선물해준 타자기에 대한 회고를 담았다. 특히, 유년 시절에는 단어가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서술한 장면이 특히 인상적이다.

 

표제작 <영혼 없는 작가>는 독일어 단어 에서부터 연상의 실타래를 풀어나간다. 방은 공중전화 부스인 전화 방, 고해 방, 작가의 서재로 이어진다. 인간의 영혼을 생각할 때 떠오르는 두 가지 이미지를 기다란 빵과 물고기와 견주고, 영혼이 그 사람으로부터 독립되어 동물로 자신의 삶을 살아간다는 설명도 덧붙인다. ‘내가 겪고 쓰는 모든 것은 영혼의 삶과 부합한다.’(p.52)는 문장이 여운을 남긴다. 작가가 영혼이 없을 수 있을까, 영혼을 정신과 등치시킨다면 오히려 영혼 지킴이, 영혼 수호를 사명으로 하지 않을까. ‘영혼 없는 작가라는 아이러니한 제목에 대해 작가는 근거를 들어 설명한다. 영혼은 비행기처럼 빨리 날 수 없어서 비행기로 여행할 때 영혼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없는 채 목적지에 도착한다고. 동화적인 이유를 독자는 곱씹으며 페이지를 넘긴다.

 

중세도시 관광여정의 짧은 스케치 <로텐부르크 옵 데어 타우버:독일 수수께끼>는 진짜 독일 인형인 호두까기 인형과 다양한 인형들 이야기를 보여준다. <통조림 속의 낯선 것>은 읽기와 이해, 오해와 불일치 등을 다양한 대상과 소재로 연결시킨다. “가끔 나는 모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구역질이 났다. 그 사람들은 착착 준비해 척척 내뱉는 말 이외의 다른 것은 생각하거나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주었기 때문이다.”(p.83)라는 문장은 독자를 멈추어 생각하게 만든다. 말 뿐인 말, 말을 위한 말, 의식을 거치지 않은 소리에 가까운 말을 비롯해서, 유창함의 허위와 위선을 비판한다. <사실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 되지만 유럽은 존재하지 않는다>에서도 감각과 언어가 맺는 타성을 직시한다.(p.88)

 

<부적>은 의심과 회피, 경계와 자기방어의 영역이 서서히 겹치다가 분리되는 일상을 엿볼 수 있다. <전철에서 책 읽기>는 제목 그대로가 주제인 일종의 관찰이자 고찰문이다. 한번쯤은 관심을 가지고 생각해봤을 법한 이야기를 작가는 멋지게 펼친다. <사전 마을>도 발상의 전환, 상상의 거침없음을 즐길 수 있는 작품이다. 일본어 원전과 독일어, 한국어 번역을 함께 실었다. <귀신들의 소리>에서 작가는 어린시절 가면극의 북소리를 회고하며 자신에게 비인간적인 무엇이었던 음악에 대해 말한다. 하나의 소리가 품고 있는 여러 겹의 소리가 낯설고 이질적이라 작가는 계속 자문한다. 연상은 불꽃의 갈라지는 끝자락, 이중의 혀를 지나 부조화의 다성성을 상징하는 인물 악마’(p.182), 바흐의 칸타타에 등장하는 단어에 이른다. 바흐 음악회 감상 후 우리의 음악을 어떻게 생각하시나요?’(p.183)라는 질문에 편을 나누어 받아들이거나 배척하는 함의를 지닌 우리라는 단어에 주목한다. 독자 역시 일상에 배어있는 관습적 사고를 다시 바라보게 된다. 각성의 순간은 때때로 등장한다.

 

<번역가의 문 또는 첼란이 일본어를 읽는다>에서는 문학의 번역 가능성’, 번역본 또한 문학일 수 있는지를 숙고한다. 작가는 파울 첼란의 시 원전과 일본어 번역본의 관계를 시를 직접 인용하며 첼란의 시들이 일본어를 들여다본다는 인상은 더욱더 강해’(p.195)진 근거를 밝힌다. 첼란의 단어들이 보관 용기가 아니고 열림이라는(p.200) 발견, ‘단어 하나를 쓴다는 것은 문 하나를 연다는 것이며 글자 읽기는 단어 읽기이지 문장이나 음향 읽기가 아니라는(p.201) 통찰을 차분하게 전달한다. 독자는 작가의 세심함 덕분에 경이로운 세계를 잠시 엿본 듯한 기분에 잠긴다. <해외의 혀들 그리고 번역>에서 작가는 프랑스 시인의 시 원전을 받고 배우지 않은 언어는 투명한 벽’(p.216)이라고 생각한다. 초벌 번역본을 받기 전의 기간을 며칠 동안이지만 읽을 수 없는 원본과 같이 살았다는 것을 기쁘게 여긴다. 짐작하고 추측하는 알지 못하는 문자를 낯설게 동시에 기대하며 기다리는 풍경은 그 자체로 시적이다.

 

영혼 없는 작가는 정좌하고 책상에 앉아서 읽고 있어도 내내 흔들리며 어딘가에 기대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작가는 여행 중이고, 그 여행길의 동반자로 독자를 택했다. 독자는 이름 모를 여행지의 예기치 않은 날씨의 변화, 분위기나 낯선 풍경에 반복해서 노출된다. 지도도 정보도 없이 무작정 작가를 따라 나선 채, 길 위에 서서 띄엄띄엄 행하는 독서, 급하게 넘기는 페이지, 여운을 정리하지 못하고 다음 이야기로 서둘러 뛰어들 때의 불안과 조급함, 뜻밖에 발견한 보석을 주어 담을 새 없이 이루어지는 자리이동 등이 그의 작품을 읽으며 부차적으로 얻는 수확, 또는 경험이다. 작가의 아이같은 상상력이 때론 천진하게 다가오고 유머와 위트는 생기를 부여한다.

 

능수능란한 이야기의 세계는 휘리릭 지나가는 듯하나, 상당히 정교한 일침들이 박혀있다. 유년 시절에 단어는 어떤 힘을 갖는지(p.46), 원본 없는 번역이 일어나는 인간의 몸과 태어날 때 주어지는 원본 텍스트 보존 장소인 영혼(p.55), 모어 유창자를 볼 때 경험하는 구역질, 포장과 내용물의 불일치, 단어와 이미지의 괴리, 파울 첼란의 시 탐구에서 원전과 번역의 불가사의한 연결, 번역을 염두한 창작 가능성 등 이야기는 독자를 매혹한다. 단어, 텍스트, 의미, 소통으로 이야기는 무한히 확대된다. 공간을 차지할 때 작가는 이방인으로 때론 정착민으로 존재하며 투명하게 움직임과 쉼을 누린다. 누릴 수 있는 이유는 아마도 작가의 관찰자적 시선, 적극적인 기록자 시선, 깨어 있는 의식, 그렇게 무한히 수집하는 순간을 결코 잃어버리는 법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자유롭고 에너지가 가득하며 거침이 없다. 그렇게 고요하고 소란한 즐거움을 책에 저장했다. 영혼 없는 작가는 다와다 요코의 세계로 들어가는 빼어난 입문서 또는 초대장이 되어줄 것이다.

 

 




책 속에서>


유년 시절에는 단어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럼으로써 모든 단어가 각자의 삶을 살게 된다. 이 삶은 단어를 문장 내의 의미에서 해방시켜준다. 심지어 어떤 단어들은 너무나 생명력이 넘쳐 마치 신화속의 인물처럼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펼쳐 나갈 수 있다.(p.46)

 

글을 쓰는 사람은 삶을 온전하게 사는 게 아니라는 주장은, 사람과 삶을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임이 틀림없다. 아마 그들은 인간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다. 나는 나도 살고 있고 나의 삶도 살아간다고 말하고 싶다. 나의 글도 삶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가 글을 쓸 때 그가 자신의 삶을 살아가고 있느냐는 질문은 비뚤어진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이 질문은 인간을 중심에 세우기 위해서 던지는 것이다.(p.5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