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의 빛 1 문학의 세계
윌리엄 포크너 지음, 이윤성 옮김 / 책세상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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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월의 빛을 반드시 팔월에 읽겠다고 의도하지 않았다. 7월 말에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논제 세미나를 진행하고 곧바로 그동안 아껴두었던 팔월의 빛을 읽기 시작하였다. 수년 전 어느 날 문동 카페 대00님의 두 권짜리 선물이 도착했을 때 포크너라는 이름은 내게 친숙하지 않았다. 아마 한 작품도 읽기 전이었을 당시에는 앞으로 포크너가 나의 독서 여정에 어떤 모퉁이돌, 나아가 디딤돌이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지금은 포크너를 통해서 아끼는 이름들을 연상하는 일이 소중하다. 까뮈나 가르시아 마르케스, 푸엔테스가 그 자체로 빼어나지만 포크너와 연관할 때 또 다른 즐거움을 안긴다. 뿐만 아니라 도착적인 분위기를 내뿜는 길고 짙은 문장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인물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를테면 과거의 어둠으로 침잠하는 하이타워 또는 조 크리스마스를 생각할 때, 이야기를 만들어내던 이반 카라마조프, 자신이 만든 이야기 속으로 끌려들어가던 이반이, 실체로 모습을 바꾼 이야기 속 인물과 어두운 방에서 대면하던 불안한 이반 카라마조프가 포개진다.

 

윌리엄 포크너의 팔월의 빛 1, 2(이윤성 옮김, 책세상, 2009, 1932, 406쪽 분량(1)/352쪽 분량(2))은 가장 환하고 뜨거운 빛으로 인간의 삶을 조명하고, 그 아래 드러난 생의 어둠과 희망을 깊이 응시하는 소설이다. 소리와 분노(1929), 압살롬, 압살롬!(1936)과 함께 포크너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 팔월의 빛 1, 2(1932)은 포크너 문학의 주요 배경인 가상의 공간 요크나파토파 제퍼슨 시에서 금주법이 시행되고 있던 1930년대 초 8월의 약 11일간의 이야기다. 포크너는 1949심오하고 독창적인 예술적 기교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탐구했다는 평가와 함께 노벨문학상을 수상하고 작가는 사랑, 명예, 긍지, 연민, 희생, 인내-그런 것들을 쓰지 않으면 아무것도 쓰지 않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의 소설은 형식에서 난해하고 실험적이다. <소리와 분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압살롬, 압살롬!>등의 작품에서 경험해온 서사 기법, 예술적 기교는 인간의 영혼 탐구라는 주제를 성취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도구였음이 분명하다.

 

제목 없이 스물 한 개의 장으로 이루어진 소설의 첫 장은 리나 그로브로 시작한다. 젊은 여성인 리나 그로브는 임신한 몸으로 한 사람을 찾아 앨라배마에서 미시시피 주까지 이동하여 4주만에 목적지에 도착한다. 그가 부를 것이라 믿고 소식을 기다리던 중, 직접 찾아 나서기로 결정하고 실행했다. 제퍼슨에 있는 제재소에 가면 만나게 될 한 사람, 루커스 버치를 생각하며 맨발을 옮기는 리나는 평온하다. 다만 그녀는 루커스 버치 같은 작자들’(p.11)의 대표격인 상대방의 진면목을 뱃속의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야 확인하게 된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나고, 마차를 얻어 타면서 제퍼슨에 도착하자, 리나는 지금 이 순간에 충실했던 특유의 낙관으로 세상에, 사람은 돌아다니기 마련인가 봐.’(p.43)라며 감탄한다.

 

두 번째 장은 바이런 번치의 회상으로 등장하는 조 크리스마스다. 독자는 처음 크리스마스가 제재소에 모습을 드러낸 장면을 바이런의 목소리로 목격한다. 그는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조 크리스마스라는 이름과 이름을 발음할 때의 소리가 불러일으키는 징조와 이미지, 경고와 운명을 의미심장하게 기록한다. 3년 전 어느 날의 조 크리스마스에 이어, 6개월 전 제재소에 나타난 또 다른 사람인 조 브라운은 라디오를 켜고 달리는 빈 자동차, 도움 되는 일이라고는 결코 없는 한 마리 말을 연상케 한다. 브라운은 속이려는 자이고, 이름부터 가명이듯 사람의 본질이 베어있기 마련인 음색이나 말하는 방식에서부터 솔직하지 않은 점이 묻어났으며, 이런 사실마저 쉽게 간파 당한다. 도둑질이나 살인조차 잘하려면 보통 이상은 되어야 하고, 목표를 세우고 매진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인물이 결코 못되는 사람, 바로 리나가 찾아 나선 상대다. 크리스마스와 브라운이 버든 양의 농장이 있는 오두막에 함께 살며, 금주법이 시행되던 시기에 밀주를 판매하고 있다는 소문은 공공연하게 퍼졌다.

 

마을에서 바이런 번치에 대해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단 한명은 하이타워 목사다. 25년 전 이 마을의 교회에 부임했던 젊은 목사는 아내와 함께였다. 그러나 추문과 사건으로 아내를 잃고 교회로부터 버림받은 추방자 신세가 된 채, ‘치욕이 서린 집에 혼자 기거하며 가끔은 바이런 번치와 이야기를 나눈다. “한때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도 바이런 번치는 그녀를 잊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말했을 것이다. 아니면 그녀가(아니면 사랑이) 그를 잊었다는 말이 더 맞는 것인지도 모르겠다.”(p.65)라는 감성어린 글이 번치를 소개하는 첫 문장이다. 그런 번치에게 영원히 기억될 순간이 다가온다. 여느 때처럼 토요일 오후 혼자 제재소에 남아서 일을 하고 있던 그에게, 버든 양의 집에 불이나 누런 연기가 피어오르던 오후에, 사람들은 모두 불구경에 몰려있을 시간에, 리나 글로브가 걸어 들어와 루커스 버치, 즉 조 브라운 행세를 하고 있는 버치를 찾는다.

 

이후 소설은 인물과 사건을 추가하고 시간을 변조한다. 에피소드를 적제적소에 배치함으로 주요 인물들의 삶을 입체적으로 직조해간다. 그림자 같았던 아이 조 크리스마스가 고아원에서 겪었던 사건, 그의 곁에 있던 어른들, 그를 입양하는 가정에서 당하는 종교적 억압은 상당히 사실적이다. 버림받아서, 아이여서, 모질고 무례한 양부에게 입양되어서, 흑인의 피가 섞여있어서 그는 고통 받지만, 현명하게 최선의 선택을 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알지 않기로 한다. 크리스마스는 자신의 손으로 버든의 목숨을 거두고, 퍼시 그림이라는 가공의 폭력에 의해 희생당한다. 조이로 태어나서 조 크리스마스로 불리다가 조 매키천이 되었다가 다시 조 크리스마스로 죽음을 맞는다.

 

크리스마스가 몸을 피했던 하이타워 목사의 집을 배경으로 소설은 목사의 유년시절로 이동한다. 처음 제퍼슨에 온 젊은 시절에 그는 저물어가는 구릿빛 햇살이 어떻게 거의 귀로 들을 수 있는 소리처럼 보였는지를 기억한다(p.679)고 회상한다. 매일 저녁 혼자 앉아서 지켜보는 석양은 그에게 두 번째 감각을 자극하고 귓전에 울리는 이미지는 여덟 살 때 보았던 아버지의 옷, 환영에 시달리게 했던 낡은 옷에까지 데려간다. 남북 전쟁 당시 대치했던 병사들, 어쩌면 누군가의 죽음의 증거였을지 모를 천 조각은 공포에서 자부심의 대상으로 변화한다. 하이타워의 성찰은 무의식 심연까지 내려가 어둠과 고통을 샅샅이 조사하다가 모레 구덩이에서 벗어난 마차바퀴(p.715)처럼 자유로워진다. “밤이 완전히 내려앉으려고 하는 팔월의 부드러운 대기에 걸린 마차 바퀴는 후광과 같은 희미한 광채를 만들어 자신을 감싸려고 한다. 그 후광은 얼굴들로 가득 차 있다.”(p.715)

 

포크너는 소리와 분노를 쓴 이유를 '캐디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단편으로 짧은 생을 살게 할 수 없었다.'(p.430, <소리와 분노>문학동네) 전했다. 마찬가지로 8월의 빛에서 빛은 임신한 젊은 여자 리나를 가리킨다고 밝혔다. '자기에게 닥친 상황을 받아들이고 그 상황에서 가장 현명한 선택을 할 줄 아는 인물'(p.757)을 리나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리나를 통해 어쩌면 삶은 태도의 문제, 선택에 따라 다른 문이 열리는 시험지가 아닐까 생각한다. 작가는 비극적이고 고통스럽기도 한 전체 서사의 처음과 마지막을 리나 글로브에게 할애함으로 잔인한 날카로움을 감싼다. 그녀는 고행길을 걸으며 단 한 번도 푸념하지 않았고, 다가오는 정황을 한결같이 긍정의 편에서 해석했으며, 아무리 사소해도 감사를 표하는데 주저한 적이 없고, 루커스 버치를 대면했을 때 알아야 할 진실은 정확하게 통찰했다. 그녀는 하이타워 목사가 새로운 시작을 꿈꿀 수 있도록 의미 있는 시발점을 제공했고, 바이런 번치에게 유일한 가치, 빛의 존재가 되어주었다. 소설의 결말은 리나의 명랑한 어조를 그대로 반영함으로 오래고 비참한 굴곡에도 불구하고 사랑스러운 온기와 새로운 가능성을 선사한다.

 

남북 전쟁 이후 여전히 인종갈등이 첨예한 시기에 일어난 백인 여성 살인 방화사건은 갈등에 불을 지핀다. 공동체에 속하지 못하는 인물들은 쉽게 공격 대상이 되고, 재수용의 가능성도 기회도 박탈된다. 소설은 미묘한 인간의 속내를 선명한 문장으로 정리함으로 거울 역할을 해낸다. “마을 사람들은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사람들이란 때때로 누군가에게 마침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강제로 시켜놓고 나서는 오히려 그들에게 미안해지는 것이다.”95에서처럼. 소설은 시공간적 배경이 분명하지만 포크너의 다른 작품들에서 보듯 보편성과 확장성을 가지고 독자에게 질문한다. 이 인물, 이 사건, 이 배경과 정황, 또는 선택들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포크너 소설의 매력에서 문장을 빼놓을 수 없다. 끝없이 이어졌으면 싶은 장문, 결코 지루한 법 없는 열거, 리듬마저 느껴지는 사유의 나열, 비유와 직유 등 생생한 수사법의 활용, 정의 내리기, 재정리하기를 비롯하여 적확한 문장의 행진이 계속된다. 크리스마스, 하이타워 목사 등 인물의 상황에 따라 결을 달리하며 소리로 심리를 표현하는 장면들, 전작인 소리와 분노에서 그려냈던 소리의 이미지는 더욱 섬세하고 상징적으로 진화한다. 비참한 상태에서도 놓치지 않고 흐르는 서정적인 자연의 묘사, 숲과 나무에서 공간과 시간으로 즉, 구체물에서 사유로 변화해가는 상념 등은 독자를 계속 머물게 만든다. 소설은 사소하지만 결정적인 인생의 장면들 또한 정확하게 포착한다. 작은 차이는 복선이 되어 깊은 어둠을 드리우거나 누군가의 안녕을 안심하도록 돕는다. 캐릭터 설명이 철두철미해서 그들은 살아있는 인물로 어딘가에서 지금도 움직이고 있을 듯싶다. 2, 3AB를 연상하는 일이 가능하다. 세상에는 제2의 바이런들이 있듯이 제 2의 퍼시 그림도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이번에도 포크너를 읽으며 소설 안으로 심각하게 흡수되어 버리는 경험을 한다. 일상은 창백하고 무감해져서 현실복귀를 위해 일시 정지로 잠시 멈추는 과정, 숨 돌리는 과정이 필요하다. 또 한가지, 작품이 주는 감동은 그 모든 여정의 슬픔을 위로할 만큼 빛이 난다. 작가는 친절하게 기대와 설렘을 마련해놓는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지만 부당하게 던져진 존재들은 안간힘을 써서 성장해간다. 그러나 성숙하거나 온전해지지 못한 채 쫓기고 내몰린다. 불시에 삶을 빼앗기기도 하지만 전가할 책임과 감당할 책임은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다. 아직 뜨거움의 절정 팔월이어도 이미 태양은 이미 다음 계절을 준비한다. 절정과 퇴락은 겹치고 혼재한다. 책을 읽으며 팔월을 언급하는 문장들을 모아보아도 좋겠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견딜 수 있는 것 같군. 하기야 사람은 전혀 해보지 않은 일조차 견딜 수 있지.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 수 있는 상황도 능히 참을 수 있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견딜 수 있어. 뒤를 돌아다보든 아니든 상황이 나아질 게 없다는 것을 알 때는 특히 그렇지.”(p.618) 바이런다운 말, 독자에게 건네는 작가의 편지 같은 말들이 기쁘게 닿는다. 소설의 부제를 길 위에서라고 붙여본다. 수많은 인물들이 잃어버린 길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자기 앞에 놓인 길을 얕보고 저주했으며, 그 길 위에서 방황하고, 30년을 헤맨 끝에 길을 찾기도 하지만 너무 늦은 경우도 있었다. 방향도 없이 길 위를 무작정 달리던 이, 먼지 날리는 길에서도 기꺼이 미소 짓는 이들 역시 보았다. 치밀하고 치열한 포크너식 글쓰기는 예상했던 대로 놀라움을 자아낸다. 계속해서 질문한다. 부조리한가? 그게 다인가? 이제 끝인가? 라고. 더 이상 집필되지 않지만 여전히 몇 번이고 다시 읽어야 할 작품들이라는 사실을 위안 삼는다. 아직 8, 포크너의 8월의 빛을 읽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책 속에서>


그러나 이런 작은 마을에서는 악이 성공하기가 용이하지도 않고, 또 비밀이 유지되는 것이 드문 일이기도 해서, 사람들은 더 많은 악을 만들어 다른 사람의 이름에 덮어씌우기도 한다. 그런 것이 악이 요구하는 전부이기 때문이다. 이 사람 마음에서 저 사람 마음으로 바람에 날리듯 옮겨 다니는 그런 생각, 그런 단 한마디 근거 없는 말이 악이 요구하는 전부인 것이다.(p.97)

 

붉은색의 고운 흙이 덮인 길은 이미 기울기 시작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언덕 쪽으로 이어져 있다. ‘그래, 저 정도 언덕은 문제없어.’ 그는 생각한다. ‘언덕쯤이야. 사람이 견뎌낼 수 있지.’ 지난 7년 동안이나 친숙했던 언덕은 평화롭고 조용하다. ‘사람이란 무슨 일이든 견딜 수 있는 것 같군. 하기야 사람은 전혀 해보지 않은 일조차 견딜 수 있지. 사람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이라고 생각되는 일도 얼마든지 견뎌낼 수 있어. 소리 내어 엉엉 울 수 있는 상황도 능히 참을 수 있지. 사람은 뒤를 돌아보지 않고도 견딜 수 있어. 뒤를 돌아다보든 아니든 상황이 나아질 게 없다는 것을 알 때는 특히 그렇지.’(p.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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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1
윌리엄 포크너 지음, 김명주 옮김 / 민음사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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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막하고 참담한 이야기, 무력하고 비통한 이야기 틈에 종종 어처구니없는 실소가 새어 나온다. 한 가족의 희비극은 블랙 유머를 품은채 단지 소설일 뿐일까, 그들만의 삶일까 독자에게 묻는다. 그들은 목적지까지 순조롭게 이동하지 못한다. 대신 함정에 빠지고 난관에 봉착하다가 결국 부조리하게 끝난다. 장례 행진은 도착 지점이 정해졌으나 소설 결말 이후에 펼쳐질 귀로 역시 인물 개별로 보았을 때 동일한 행진의 연장선이다. 뫼비우스 띠처럼 이어지는 길은 끝나지 않는다. 이 길은 소설 밖으로 연결되어 독자 앞에 놓인다. 당신들은 좀 나은지 질문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김명주 옮김, 민음사, 2003, 1930, 316쪽 분량)는 열다섯 명의 화자가 번갈아 등장하며 보고 생각하고 느낀 것, 간파한 것과 감춘 것에 대해 증언한다. 윌리엄 포크너는 1926년 첫 소설을 발표한 이후, 소리와 분노(1929) 다음 해에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1930)를 발표하였다. 압살롬, 압살롬!1936년에 출간한다.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로서 혁신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포크너는 현대 미국 문학에 강력하고 예술적으로 비할 바 없는 기여를 했다는 평과 함께 노벨 문학상(1949)을 수상했다.

 

허구의 남부 지역인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문학적 우주를 창조했던 작가는 소리와 분노에 이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에서도 남부 한 가족의 행보를 추적한다. 이번에는 몰락한 귀족이 아닌 가난한 농부의 집이다. 전작 소리와 분노는 콤슨가 4남매 중 세 명이 일인칭 시점의 화자로 작품을 이끌고, 마지막 장은 사남매를 키운 흑인 하녀의 목소리를 빌어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하며 네 개 장으로 이루어졌다. 이와 비교해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앤스 번드런과 그의 아내 애디, 네 명의 아들 (캐시, 주얼, 달과 바더만), 고명딸 듀이 델이 주 화자가 되어 일인칭 시점으로 진술한다. 그밖에 다른 인물들도 등장하기에 교차하여 서술할 때의 회전율이 높다. 독자는 인물별 목소리를 연결하면서 59장으로 나름의 지도를 그려간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는 아내이자 어머니인 애디 번드런이다. 그리고 의 위치에 등장인물들이 들어가 각자 어머니의 관을 만들 때’(캐시), ‘자기의 말을 돌볼 때’(주얼)처럼 서술어를 교체하며 에피소드를 남기고 전체적인 그림으로 완성해간다.

 

에디 번드런은 더 이상 바랄 게 없겠지. 죽어 누워 있기에 캐시의 관보다 더 좋은 것은 없을 것이다.”(p.9) 첫 번째 화자인 달은 두 페이지를 할애해 주얼과 캐시의 인상, 어머니를 언급한다.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어머니가 죽어 누워 있기에, 캐시의 관보다, 라니. 태연하게 반복되는 일상은 왜곡되고 일그러져 있지만, 그들에게는 이상할 게 없다. 바로잡을 방법을 알 수 없고 그럴만한 에너지도 의지도 없다. 문제라는 인식 자체가 부재하다. 이와 같은 일상이 누운 채 죽어가는 어머니 눈앞에서 벌어진다. 이웃은 번드런네 가족을 돕고자 하면서 시시콜콜 품평도 빠뜨리지 않는다. 목화를 따고 농사를 돕는 건 정작 다른 사람들이고 주얼은 무심하고, 캐시는 관에 못을 박을 뿐이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시키고 비난하며, 달 역시 일하지 않는다. 고민을 간직한 듀이 델은 달에게 비밀을 들키자 그를 증오하고, 그녀는 달이 방화 사건을 일으키는 소설 후반에 난폭하게 적개심을 드러낸다. 달은 결국 잭슨으로 가게 된다. 잭슨, 소리와 분노에서 벤지를 위협하는 수단이었으나 마지막까지 가지 않았던 그 정신 병원에 달은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결박된다. 달에게는 벤지에게 있었던 캐디나 딜지가 없어서였을까.

 

소리와 분노의 콤슨 부부가 기본적인 부모의 역할을 하지 못했던 것처럼 번드런 부부 또한 마찬가지다. 가장인 앤스는 철저히 자기중심적 인물이고 이를 숨기지도 않는다. 그의 우주는 자신을 기준으로 돌아간다. 땀을 흘리면 죽는다는 경고를 지키느라 수고하는 법이 없고 자기 욕구 충족에 철저한 아버지다. 애디의 경우 59장을 통틀어 단 한 번 속내를 밝히지만, 그녀가 간직한 생의 비밀은 결코 사소하지 않다. 아내이자 어머니라는 나름의 역할 수행도 나름의 복수를 감추고 있으며 복수의 이론적 근거 또한 명백하다. 소설에서 가장 시선을 집중시키는 장이고 질문을 던지고 사유를 촉발하는 부분이다. 그녀는 말한다. ‘, 모성이나 공포, 자존심이란 단어는 그저 빈 곳을 메우기 위한 형태일 뿐”(p.194)이라고. 쓸모없는 말에 속은 보복으로 보복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기기로 한 애디는 내가 죽으면 제퍼슨에 묻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요구한다. 이웃 코라는 그녀가 번드런 가족과 함께 묻히는 것이 싫어서 40마일이나 떨어진 먼 땅에 묻으라고 주문할 만큼 유난스럽다고 평한다. 장례 행진은 그렇게 시작된다.

 

번드런 가족은 죽은 어머니를 매장하기 위해 무더운 여름날 마차에 관을 싣고 집을 나선다. 요크나파토파에서 제퍼슨까지 40마일 거리는 반나절이나 하루면 도달할 수 있는데도 열흘이 걸린다. 열흘간 가족들은 홍수나 화재를 겪으면서 물과 불에 맞서고, 가축을 잃고, 다친 다리를 또 다치고, 악취에 시달리고, 필요와 욕망을 담금질하며 애도와는 정작 멀어진다. 하루에 도착할 40마일을 열흘 동안 가는 여정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불순종의 결과 40년간 치렀던 광야 생활의 축약으로도 읽힌다. 소설의 결말은 잠시 멈추게 할 만큼 아이러니하고 희극적이다. 이들의 문제는 무엇이었을까. 번드런 일가는 짧게 목소리를 내고 바통을 넘기는 소설의 형식처럼 서로의 마음을 읽을 시간이 부족하다. 눈을 맞추고 경청할 때 가능한 온전한 소통이 결핍되어 있다. 그들이 각자의 이야기를 할 때 청자는 멀리 있거나 듣지 않는다. 자기 이야기만 하는 사태의 반복은 동일한 목적지를 향해 함께 이동할지라도 서로를 소외시킨다. 작가는 터무니없을 만큼 고된 여정에 위트와 익살을 덧붙이면 독자는 잠시 숨을 돌린다.

 

소설은 볼드체, 도형, 공백 등을 활용해 함의를 추측하게 하고, 인물의 개성을 살려 문체에 변화를 준다. 아름답고 시적인 풍광 묘사, 개념을 파고들며 주장하고, 새롭게 정의 내리는 문장은 독자를 매료시킨다. 전작인 소리과 분노의 흔적을 발견하는 즐거움도 크다. 길과 집, 시간, 언어, 존재에 대한 성찰이 독자를 머물게 한다. 소설가 랠프 엘리슨은 고전의 위대함이 포크너가 인간 본성을 탐색했듯이 도덕적인 목표를 꾸준하게 추구하는데 있다며 그래서 우리는 포크너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 포크너가 철저한 기획과 실험 끝에 완성했다는 이 작품은 어느 길 모퉁이나 석양빛 아래, 여전히 발견되기를 기다리는 보물을 감추고 있을지 모른다. 반복해서 읽어야 하는 작가 포크너는 이번에도 독자를 쉽게 떠나보내지 않는다.

 

 

 

 책 속에서>


말과 행위가 맞아떨어지지 않을 때 사람들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늘 그렇듯이 무서운 밤, 거친 어둠으로부터 들리는 거위의 울음소리처럼 언어는 떨어져 내린다. 누군가 군중 속의 두 얼굴 가리키며, 너의 엄마다 혹은 아빠다 말할 때, 정신없이 그 얼굴을 찾아 헤매는 고아처럼, 말은 그것이 가리키는 행위를 찾아 헤맨다.(p.197)

 

가끔씩 난 확신할 수가 없다. 누가 미쳤고 누가 정상인지 알게 뭐란 말인가. 어느 누구도 완전히 미치거나 완전히 정상일 수는 없을 거다. 마음의 균형이 제대로 잡히는 것이 쉽진 않으니까. 중요한 것은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아니라,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다.(p.2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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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곰과 작은 곰이 낚시하러 가요 베스트 세계 걸작 그림책 68
에이미 헤스트 지음, 에린 E. 스테드 그림, 강무홍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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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큰 곰과 작은 곰이 낚시하러 가요(강무홍 옮김, 주니어RHK, 2025, 48쪽 분량)는 에이미 헤스트()와 에린 E. 스테드(그림)가 함께 펴낸 작품으로 고전 그림책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앞표지에 두 마리 곰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오른쪽 어깨에 낚싯대를 얹은 자세로 노란 웃옷, 파란 바지, 검은 장화로 복장을 맞췄다. 덩치가 큰 곰은 아빠고 작은 곰은 아들인 거라고 짐작하며 책을 펼친다. 갈색, 그러니까 곰 색 면지에는 마주보는 동일한 실루엣이 하얗게 자국을 남겼다. 그들의 낚시는 어느 날갑자기 결정된다. “지금 낚시하러 가면 딱 좋겠는걸.”하는 큰곰의 말에 , 딱 좋을 것 같아.”라는 작은 곰의 대답이다. 보통은 이렇지 않다. 딱 좋기는, 미리미리 얘기를 해줬어야지. 선약이 있잖아, 할 일도 많아, 라는 답이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그림책 속 무해한 곰들은 낚시용 복장을 척척 입는다. 벌써 준비 끝.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빠뜨린 게 있었다. 가장 중요한 낚싯대부터 블루베리 스콘, 이야기책까지 챙겨 넣는다. 보통은 이렇지 않다. 특히 스콘. 목적이 낚시면 낚시에 집중해야지 따끈따끈 맛있는 블루베리 스콘을 위해 냉동칸에서 꺼내 녹이는 정도가 아니라 블루베리 따기부터 오븐에 굽기까지의 과정을 거친다는 건 동화적이다. 오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그르치거나, 상당히 지연시키는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이견이 없다. 이야기책까지 담고 나서 드르륵드르륵수레를 끌고 간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더 큰 물고기를 잡을 가능성을 위해서 이동시간을 아껴 쌩쌩 달릴 법도 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조급한 기색이 없다. “낚시꾼은 기다릴 줄 알지.”라고 속삭이고는 흐르는 시간을 스콘을 먹으며, 이야기책을 읽으며 물고기가 잡히기를 기다린다. 호수에 비치는 빛을 바라보고, 물결 일으키며 다가온 물고기를, 사라져가는 물고기를 다시 바라본다. 스스로를 낚시꾼이라고 여기는 큰 곰과 작은곰은 제대로 복장을 갖추고, 준비에 정성을 들였으며, 원칙을 지키는 전문가들이다. 기다리기, 조용히 말하기. 최선을 다했기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아쉽지 않다. 오늘 낚시 끝.

 

성과는 없었지만 좋은 하루였다. 성과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다리는 시간은 함께 선택한 일들로 채워졌고 기다림 자체는 빛이 일렁이듯 충만했다. 함께 보낸 하루가 큰곰과 작은 곰은 물론 동행했던 벌과 물고기에게까지 완벽해진다. 이 그림책은 시간을 보내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알려준다. ‘빨리빨리지금 이럴 때인가는 계속해서 우리 귓전에서 호루라기 소리를 낸다. 경고하는 알람은 언제부터인가 내면에 이식되어 조급증과 불안 지수를 높인다. 에이미 헤스트의 글은 반복과 리듬으로 일상의 속도를 늦춘다. 에린 E. 스테드의 그림은 물에 흠뻑 적신 붓으로 말간 색을 입힌다. 필선이 드러나고 여백은 넉넉하다. ‘루틴 철저는 때로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의미로 채워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어떤 시간을 살고 싶은지 책은 질문한다. 아이에게, 또 어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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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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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 동안 진행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뒷세이아> 함께 읽기를 마쳤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지략이 뛰어난 주인공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전쟁 이후 그리스의 영웅 오뒷세우스의 귀환 여정은 모험 자체였고, 영웅은 지구가 아니라 결국 가족을 지켜냈다. 어쩌면 가장 지켜야 할 가치 우선순위는 가정이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고 <일리아스> 읽기에 돌입했다. 완독을 위한 전략은 유효했다. 오뒷세우스가 등장하는 장면이면 ‘그답구나 역시’ 라며 반가운 마음도 일었다. 24권 1만 5693행에 이르는 서사시 <일리아스>는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 오다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자 유럽 문학의 효시로 문자적으로는 ‘일리온의 노래’를 의미한다. 일리온, 일리오스, 트로이, 트로이아 모두 동일한 호칭으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고 있는 전쟁터였다. 그리스 지역은 헬라스, 희랍으로도 명명하며 작품의 배경이다. 트로이 전쟁 마지막 10년째의 약 50일 간의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파트로크롤스의 죽음과 아킬레우스의 참전, 헥토르의 활약과 죽음,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화해 등 굵직한 사건을 중심에 놓고, 신들과 인간, 영웅들과 이름 없는 병사들의 서사까지 촘촘하게 배치함으로 죽음과 삶, 수치와 명예, 필멸과 불멸 등을 성찰하게 한다.


1권부터 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의 딸을 돌려주지 않고 모욕하자 사제는 아폴론에게 기도로 호소하고 아카이오이족은 전쟁과 역병에 고통당한다. 열흘째 되는 날 이를 보다 못한 아킬레우스가 회의를 소집하고 크뤼세이스(사제의 딸)를 돌려주라고 하자 아가멤논은 그 대신 아킬레우스가 받은 명예의 선물인 브리세이스를 데려가겠다고 응수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모욕하고 이미 공평한 분배를 마친 자기 몫을 빼앗은 아가멤논에게 분노하여 어머니 테티스에게 제우스를 찾아가 줄 것을 요청한다. 바다의 정령인 테티스는 제우스에게 고전적인 탄원의 자세로 아카이오이족이 아들에게 전보다 더 큰 경의를 표할 때까지 트로이아인들에게 승리를 내려달라는 간청을 한다. 아킬레우스 역시 아가멤논이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회의장과 전장에서 벗어나 자기 처소에서 머문다. 그의 참전은 20권에서야 이루어진다.


인간들의 왕, 반신, 정령, 신들의 제왕이 전면에 등장하여 포문을 여는 1권의 첫 문장은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1)이다. 이준석 판본은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1:1)하고 더욱 직관적으로 주제어를 배치한다. 첫 번째 분노가 성립된 데 이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둘도 없는 벗,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 앞에 극에 달하고, 이로써 반신인 영웅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트로이아의 헥토르에게 자신의 무구를 빼앗겼기 때문에 아키렐우스는 새 무구를 기다린다. 테티스가 부탁하여 헤파이토스가 새로 제작한 무구를 가지고 나타날 때까지 그는 목청만으로도 트로이아인들의 사기를 꺾는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다가온다.


전체 50일의 이야기 가운데 그리스군과 트로이아군의 전투는 총 4일만 묘사된다. 강대진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함께 읽기>에 따르면 첫 세 권과 마지막 세 권이 되돌이 구성으로 포개지는데, 시인은 지상과 천상(올림포스)을 연결하고(아킬레우스-테티스-제우스), 사건과 인물 또한 극적으로 대체되어(크뤼세스-크뤼세이스, 프리아모스-헥토르) 균형을 이룬다. 그 사이에 전세는 승기를 잡다가 기울기를 반복한다. 인간계의 전쟁은 신들의 대리전 성격을 띠기에 영웅이지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순간들, 내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은 순간들을 겪으며 신들의 개입에 기뻐하거나 절망하고 끝내 인간 조건을 수용하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지혜와 어리석음, 절제와 오만은 경계 없이 가까워 전진과 후퇴 사이에 연달아 출현한다. 전조와 복선의 반복은 촘촘한 빌드업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 서사시의 주제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게 될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아킬레우스는 두 가지 상반된 죽음의 운명이 놓여있다는 어머니 테티스의 말을 회상한다. 결국 불멸의 명성을 선택하고 죽음을 수용하지만 <일리아스>에서는 암시를 하되 명시적으로 포착하지 않고 불멸의 영웅 이미지를 유지한다. <오뒷세이아>의 “저승” 편에서 그를 다시 볼 수 있는데 그가 사자(死者)들을 다스리느니 지상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다는 말이 처연하다. 독후 토론을 위한 논제는 자연스럽게 인물 위주로 작성하게 되었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는 당연히 중심이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헬레네다. 그리스군에게 트로이 전쟁의 명분을 제공한 헬레네는 단순히 미의 상징, 아름다움의 절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여신 아프로디테의 명령에 ‘그대나 신들의 곁을 떠나 그의 곁에 가 앉으’(p.118)라고 하거나, 신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온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마땅히 내 전남편인 메넬라오스에게 싸움터에서 죽었어야지 돌아왔느냐고 한다. 헥토르의 장례식에서는 안드로마케, 헤카베에 이어 세 번째로 호곡을 선창하며 슬픔을 표현한다. 트로이 멸망 이후에도 그녀의 삶은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정해둔 독서 표식으로 꿈틀대는 지렁이 기호가 있다. 이 표는 ‘어마어마하게 무시무시하다’라는 의미다. 기호는 곳곳에 그려졌다. 지렁이 표는 겹쳐서 꿈틀대기도 하는데 죽어가는 전사들의 적나라한 묘사, 도처에 나타나는 시신 훼손 장면, 목숨을 애원하나 가차 없이 거절당하는 전쟁터는 영상이 지나가듯 생생하다. 그런 중에 따로 떼어내도 한 편의 서정시처럼 완성될 것 같은 장면이 6권이다. 헥토르가 아내 안드로마케와 어린 아들 아스튀아낙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헤어지는 부부의 대화가 절절하나 트로이아의 파수꾼 헥토르는 멈출 수 없음을 안다. 온전한 가정을 무참히 깨뜨리기는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바로 뒤 7권 아이아스와의 일대일 결투에서 위험에 처하게 되는 헥토르는 14권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순간을 맞으며 죽음의 은유를 받는다. 수많은 죽음을 담은 <일리아스>의 마지막 죽음은 헥토르의 것으로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무구를 입은 헥토르와 헤파이스토스가 새로 제작한 무구를 장착한 아킬레우스, 즉 아킬레우스 대 아킬레우스의 대결은 서사시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은 이미 인간 대 인간의 대결이 아니다. 헥토르의 서약 제안에 그는 합의에 관해 말하지 말라며 “마치 사자와 사람 사이에 맹약이 있을 수 없”(22:262)다고 할 때 그는 이미 분노와 복수에 사로잡힌 맹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헥토르의 죽음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고 ‘신의 근심, 신의 저울, 신의 속임수’가 필요했다고 강대진의 책은 해석한다. 더 강한 전사에게 맞서지 말라고 아들을 만류하는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절규는 수천 년을 통과해 현재의 독자에게도 먹먹하게 닿는다. 절정을 지나 서사시의 백미는 노왕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화해 장면이다. 혼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원수의 손에 입을 맞추고 연민을 불러일으킬 때, 함께 눈물 흘리며 정화될 때 아킬레우스는 관용을 베푼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1)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24: 804)로 맺는다.


라신의 비극 『안드로마케』는 헥토르가 아내에게 했던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절판된 도서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느낌을 누구보다 잘 표현한 사람을 20세기 초의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스라고 전한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우리의 노력이란, 오오 가련한 우리,

우리의 노력이란 트로이인들의 노력과 같은 것.

우리는 성공을 목전에 두고,

조금만 더 애를 쓰면 다시 일어서리라고 기대하면서,

힘과 용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늘 무엇인가가 와서 우리를 가로막는다.

아킬레우스가 외호(外濠)로부터 우리 앞으로 느닷없이 튀어나와

그 우렁찬 고함으로 우리에게 겁을 준다.

우리의 노력이란 트로이인들의 노력과 같은 것.

우리는 결연함과 담대함으로

운명의 흐름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고,

밖에 남아 싸움을 계속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담대함도 결연함도 가뭇없이 사라진다.

우리의 영혼은 동요되고 불안감에 마비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도주에서 구원을 찾으며

성벽 주위를 빙빙 돌아 내달린다.

저기 성벽 위에서는 벌써 통곡이 시작되었다.

저들은 가버린 우리의 날들과 우리의 열정을 슬퍼하며 우는 것이다.

헤카베와 프리아모스가 우리의 죽음을 슬퍼하며 피울음을 우는 것이다.

(p.74~76/호메로스의 세계/피에르 비달나케/솔)


우리의 노력이 트로이인들의 노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럼에도’는 인간이 살아남는 한 이어지지 않을까. 부스러기를 헤아리고 모으는 노력, 기억하고 사랑하려는 의지, 지금이라는 불안한 처지를 마다않고 발판 삼겠다는 약속이 말이다. 오만을 경계하고 그 아슬아슬한 선을 넘지 않도록 깨어있겠다는 다짐은 지금도 반복될 테다.


주요 전장이 천상인지 지상인지 뒤섞인다.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보편적인 심리를 시인은 놓치지 않고 신과 인간에게 고루 적용한다. 죽음과 고통을 부르는 치열한 전투에서도 그 너머를 투시한다. 인간이 피와 땀을 흘릴 때 신은 나타나거나 사라졌다. 조종 받는 입장임을 알아도 눈앞의 전투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인물은 가장 작은 병사일지라도 독자에게, 또는 관객에게 소외되지 않는다. 다시 오늘을 생각한다. 맹수 앞에 맞선 채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누군가도 있다. 도망치고 도망쳐도 꿈속에서처럼 나아갈 수 없는 절망에 갇힌 누군가도 있다. 그러나 뒤돌아서서 기꺼이 맞서기로 어느 순간 결단한다. 최후의 순간이 고통스러울지언정 명료한 의식으로 직시하겠다는 누군가도 있다. 원수의 손에 입을 맞추며 백 번이고 간곡히 청하겠다는 부성도, 필멸의 아들이 아까워 시름하며 자기의 불멸이 기쁘지 않은 정령도, 이 모든 고통을 왜 감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소연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일리아스>는 인생이 겪는 무수한 불합리와 부조리를 늘어놓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찰나의 연민을 놓치지 않는다. 기적의 순간에 연대함으로써 비록 잠시일지라도 허락받은 시간 안에 온 마음으로 예를 갖추고 기억하는 이들을 기록한다. 작품은 끝났어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트로이 성은 불에 탈 것이고 헥토르의 남은 가족에게는 참혹한 시간이 기다린다.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조가 될 것이고, 귀향하는 오뒷세우스는 새로운 사명에 헌신할 것이다.


AI가 글을 쓰고 뛰어남을 뽐내는 21세기에 『일리아스』를 읽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읽다보면 정신이 혼란해서 지금 어느 편이 승기를 잡고 있지? 전투 몇 일째지? 밤인가 낮인가? 지금 맞은 게 급소인가? 재등장은 가능한가? 죽는 건가? 이런 반칙 같은 신들의 술수라니? 우왕좌왕하면서도 읽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느 순간 독자는 눈을 떼지 못하는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개별적으로 밀착해오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목소리로 읽는 낭독은 얼마나 더 깊은 여운을 남길지 기대된다. 필사를 하면 직유나 은유의 반복, 공식구 등 표현의 생동감이 더 느껴질 것이다. 책을 마치며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앞으로 너는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 중에 한 작품만 읽을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겠나? 나는 곧바로 답할 수 있다. 『일리아스』라고.(다행히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완독의 아쉬움을 위한 선물을 발견했다. 라헬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하여』이다. 압축의 정수, 버릴 글자 하나 없는 책, 몽땅 외우고 싶은 책의 첫 장은 <헥토르>다. 『일리아스』는 옛 노래, 지나간 노래일까. 일리온의 노래는 여전히 불리고 있다. 귀족이나 영웅이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를 행간에 채워 명랑한 음조로, 때론 애달픈 가락으로 울려 퍼진다.



책 속에서>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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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7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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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의 단편집 중 빗장 지른 문(1909)삶에 사슬로 매여 있듯이 주인공 그래니스의 시도가 거듭 좌절되는 아이러니를 속도감 있게 담는다. 이때 이라는 단어가 본래 의미를 충족하고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2년 후 출간된 중편 소설 이선 프롬(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0, 1911, 212쪽 분량)은 충분히 사랑하고 살아볼 수 없었던 사람, 환상과 몽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삶조차 곧바로 빼앗겼던 인물을 그린다. 미국 문학사에서 본격적인 의미로 최초의 여성 작가라 불리는 이디스 워튼은 마흔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다작 작가이면서 <순수의 시대>로 여성으로는 처음 퓰리처상을 받았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선 프롬>서로 갈등하는 인간의 마음문제(p.176)라고 평했고 워튼은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큰 즐거움과 가장 큰 편안함을 느꼈다(p.174)고 전했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 이선 프롬이 겪는 관계에서의 갈등과 그로 인한 고통은 그만큼 온전히 독자에게 닿는다.

 

이선 프롬은 여러 겹의 굴레에 갇혀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 스탁필드를 떠나지 못하고, 이웃인 하먼 가우의 표현에 의하면 이곳에서 너무 많은 겨울을 났다. 생명력을 곧바로 무기력으로 대체하는, 추위와 강풍이 여섯 달 동안 지속되는 혹독한 기후를 거듭 견뎌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은 프롬의 농장 노동과 벌이로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들은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간병을 도왔던 사촌 누나 제노비아 피어스(지나)는 프롬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한 부탁으로 떠나지 않고 아내가 되었는데, 일곱 살 연상의 그녀 역시 복잡한 질병을 앓기 시작한다. 아내의 친척 매티가 부모를 잃고 지나를 돕기 위해 온다. 일은 능숙하지 못해도 대화의 즐거움을 깨우쳐주는 매티가 프롬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 중이다.

 

소설은 액자식 구성으로 화자인 엔지니어가 들려주는 이선 프롬의 젊은 날을 기록한다. 화자는 프롬의 집이 유독 위축되어 보이는 이유가 허물어 사라진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본채보다 더 뉴잉글랜드 농가의 중심이면서 초석인 엘, ‘땅과 연관된 데다 그 자체로 따뜻함과 자양분의 주요 원천을 포함하는 삶’(p.23)을 상징하는 엘의 철거는 황량한 가운데 프롬을 속수무책 홀로 서 있게 한다. 반면 낮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프롬네 집안의 묘석들은 산 자들의 땅에 자리 잡은 채 시선과 목소리로 말을 건다. 너도 결코 떠나지 못할 걸, 우리처럼, 하는 속삭임으로. 프롬은 냉담한 아내 지나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그럴수록 매트의 젊음과 생기에 마음이 이끌린다. 아내 지나가 매트를 내보내겠다고 결정했을 때, 프롬은 갈등한다.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인다.

 

프롬은 추위와 상관없는 낙원 같은 곳, 이미 기억에서 흐려진 플로리다에 다시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공과 대학 실험실로 돌아가 그의 꿈을 마저 이룰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상기된 추억은 현실의 진공 같은 밀폐를 부각할 뿐이다. 프롬은 매트와 서부로 떠나고 싶었다. 그렇다고 아내를 남겨둘 수도 없었고 선한 이웃을 상심케 할 수도 없었다. 매트를 배웅하던 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기쁨만이 그의 전부였다. 그리고 망설인 끝에 그녀의 결심에 동조하고 계획은 빗나간다. 지금까지의 비극은 비극도 아니다. 앞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한다. 소설의 결말은 독자의 예상을 저만큼 뛰어넘고 이전에 제시된 전조와 암시, 복선들을 헤아려보게 만든다.

 

행복해지고 싶었던 한 사람을 본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가슴 뛰게 만드는 세계에 투신하여 배우고 싶고, 먼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며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럴만한 여건이 안 되었던 이선 프롬. 그는 벌써 죽어서 지금 지옥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p.10)지만 여전히 우체국에 들러 지나를 위한 의약품 봉투와 구독지 한 부를 찾아간다. 아마도 계속될 그의 일상이다. 소설은 창과 칼로 공격하는 것 같은 혹한의 날씨가 인간을 무력하게 하듯이 환경과 상황, 시선이나 주변의 기대가 의지와 상관없이 개인을 옥죄는 현실을 보여준다. 탈출의 방편을 모색하나 문학에서 길을 발견한 작가와 달리 프롬은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다.

 

작품은 영상 같은 이미지, 긴장감 넘치는 침묵, 차가운 감각과 초조한 순간들을 쌓으며 섬세하게 독자를 이끈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작가는 이웃의 목소리로 매티가 죽었더라면 이선 씨는 살았을 거라고 보탠다. 그러면서 프롬 집안의 묘석들을 다시 불러낸다. 죽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삶, 어쩌면 죽음보다 더 가혹한 삶은 대를 이어 새기고 쌓인 죽음의 증거들에 일 획을 미리 보태는 듯 암울하다. 젊음의 정점에서 갇힌 삶이 프롬과 매트에게 동일하게 반복된다. 지나의 입지 변화 또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보편적인, 그러면서 비극적인 작품이 마치 경종처럼 다가온다.

 



 책 속에서>


이선은 묘석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지난 몇 해 동안 이 말없는 선조들은 그의 조바심, 변화와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욕망을 빈정대 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을 결코 떠나지 못했다······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겠느냐?’라는 구절이 묘석마다 쓰여 있는 듯했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살다가 마침내 저들에게로 가겠지.’ 하며 몸서리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변화를 피하려던 욕망은 다 사라지고 이 조그마한 울타리가 따뜻한 존속감과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p.50)

 

광기에 사로잡혀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 갑자기 깨닫자 그 광기가 사라지며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였고, 자기가 버리면 고독과 가난 속에 남게 될 병든 여인의 남편이었다. 설령 아내를 버릴 배짱이 있더라도 그를 동정하는 인정 많은 두 사람을 속이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천천히 농장으로 돌아왔다.(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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