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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평점 :
오래 책꽂이에 있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드디어 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는데 바로 작가의 두 번째 단편집 <사라진 것들>의 출간 소식이 들려서다. 신간을 펴기 위한 최소한의 준비이자 예의로써 읽었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의 한줄 평을 ‘이론 따위 필요 없다. 자체 발광하는 작품의 아련한 눈부심으로 빠져보자’라고 쓴다. 두 줄, 세 줄이 되면 점점 더 과도해질 터라 한 줄로 맺는 게 최선이다. 영문학을 전공하고 예술학 석사학위를 받은 앤드루 포터는 데뷔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으로 2008년 단편소설 부문 플래너리 오코너상을 수상하였다. 출간 당시 ‘현재 미국에서 가장 눈여겨봐야 할 단편 작가’, ‘데뷔작에서 이미 장인의 솜씨를 보여주었다’는 등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앤드류 포터의 『사라진 것들(민은영 옮김, 문학동네, 2024, 332면 분량)』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후 15년 만에 출간되었지만 필자는 15년을 7일로 단축하는 순간이동을 가상 체험하였다. 전작의 빛이 유쾌하게, 자신있게에 방점이 찍히지 않았음에도 <사라진 것들>과 비교할 때 찬란에 가깝다. 소설집 <사라진 것들>은 열다섯 편의 작품으로 열다섯 번 쓸쓸함을 덧칠한다. 두껍게 겹쳐진 마띠에르는 감정의 여러 갈래를 압착해내서 과거라는 시간의 핀으로 고정하기에 복구의 여지를 없앤다. 겹겹이 올린 물감색은 쓸쓸함 또는 쓸쓸함이 번졌을 때의 컬러라 감정의 분지들은 하나의 색조로 짙어져간다. 주조색은 아무리 해도 명랑이나 희망참과 간극을 벌린다.
“하지만 어쩐지 더 큰 목적에서 이탈해 표류하는 기분, 세상과 단절된 기분이 드는 것도 사실이었다.(중략) 예전에 지녔던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혹은 버려두고 떠나왔다는 느낌이 늘 있었다.”(p.21) 옛 친구들의 모습이 ‘묘한 광경’으로 비치는 건 그들은 그때 그 시간에 머물러 있고 나의 시간만 흐른 느낌 때문이다. 현재의 시간을 살아가는 나는 아내와 두 아이의 안위를 염려하고 안전을 확인하고 파수꾼 역할을 하며 걱정과 과민함 사이에서 꿈과 현실의 교차에 현기증을 느낀다. ‘너 어디로 간 거야?’ 라는 친구의 문자는 과거에서 걸려온 전화처럼 아득하다.(오스틴)
작가는 상실에 대한 감각을 다시 한번 스케치한다. “그때의 우리가 어떻게 알았겠어? 그 모든 게 변한다는 것을” 아이들이 태어나면서 담배나 와인, 심야의 여유가 사라질 걸 몰랐다. 함께하기에 인생도 사랑도 배가 될 것이다. “집안에는 더 많은 사람과 더 많은 웃음과 더 많은 재미가 있겠지만 결국 우리는 줄어들겠지.”(p.26)라고 할 때, 사라진 것의 대체물이 보기에 좋아 보이고 바람직해 보이나, 그 좋은 웃음이나 재미에 반하여 정작 잃게 되는 건 관계의 본질이고, 감소하는 건 각자의 실존이다. 양팔 저울이 급격히 한쪽으로 쏠린다.(담배) “그런 것들은 어떻게 알게 되는 걸까?”(p.56) 물음은 답에 이르지 못한다. 그림들을 본 순간에 그냥 알았다는 사실만을 알아차릴 뿐이고, 곧이어 누군가와 함께 있으면서도 이미 가버린 사람을 바라보고 있다는 자각에 놀란다. 그는 그녀를 쓸모없는 물건들이 가득 찬 벽장 안 그림 한 점에서 떠올렸다. 잊었던 시간, 잃게 된 그녀를.(넝쿨식물)
소설은 아름다운 요소가 충만하다. 고전문학들, 도스토옙스키, 그림, 조각가, 와인, 음식, 식물, 음악, 클래식 연주, 편지 등 다양한 모티프를 두루 배치하고 집중적으로 반복한다. 손상되지 않는 아름다움이 좌표를 고정하고 있는데 반해 끊임없이 낙하하는 인간조건의 대비는 극명하다. <첼로>는 위대함의 표상, 특출하고 탁월한 재능의 현현이었던 첼리스트에게 닥친 병과 그로 인해 깨어지는 일상, 꿈, 성공, 계획 가능했던 미래와 이를 지켜보는 동반자의 아픔과 무력감을 그린다. 인생에 가하는 타격이 이유 없이 전격적일 수 있고 인간은 취약한 선택지(기다리거나, 견디면서 기다리거나)만을 받아든다는 설정은 소설보다 현실에 가깝다.
이와 같은 취약함은 아이의 요구에 자신의 상태를 설명할 수 없는 아버지에게서(숨을 쉬어), 상대가 어떤 식으로든 내 뒤통수를 쳤다고 ‘느껴서’ 정년직 임용에 탈락한 일을 “정년직 임용 ‘사건’”(p.163)으로 확정하고 나름의 관계 재정립과 함께 ‘컬렉션’이라는 치졸한 복수를 쌓아간 지성인들의 이야기에서도(실루엣)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시선을 두었던 협곡이 미지의 공간이었듯이 실루엣만 보일 뿐이던 손짓에 의미를 만들고 다음 행보를 결정하는 일 역시 불안정하다. 불확실을 확실로, 나아가 확고부동함으로 밀어붙였던 기저에는 ‘느낌’이 있었을 뿐이다. 느낌에 기인했던 오해는 바로잡을 수 있을까. <벌>의 화자는 “매우 취약한 상태”(p.212)에 놓인 가정이라 혹시 무너질까봐 힘주어 밀수도 없다고 고백한다. 언제부터 망가지기 시작했는지 아내와의 관계를 복기하며 현재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면밀히 살핀다. “작은 구멍, 떼를 지어 드나드는 벌들, 그 옆 풀밭에 놓인 텅 빈 벌집.”(p.219)은 벌의 본능적 행위가 아니라 침몰하는 관계의 불길한 메타포다. 이와 같은 전조를 그들은 최대한 감추지만 이번에도 깨달음은 갑자기 도달한다.
모든 일이 끝이 있듯이 놀이도 끝이 있다. 하물며 가장놀이라면. 화자가 ‘친밀함을 회피하는 사람’이 된 진짜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말한다. “참 이상한 일이다. 마흔세 살이 되었는데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다니, 삶의 어느 시점에 잘못된 기차에 올라타 정신을 차려보니 젊을 때는 예상하지도 원하지도 심지어 알지도 못했던 곳에 와버렸다는 걸 깨닫다니. 꿈에서 깨어났는데 그 꿈을 꾼 사람이 자신이 아니었음을 알게 되는 것과 비슷하리라는 생각이 든다.”(p.127)고. 조금 과장하자면 인류 공통의 독백이 등장하여 흠칫한다. 그는 덧붙인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아직 확실히 기억할 수 있다고. 묵과의 베일을 걷어내고 어긋남의 시작점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 순간을 상기하는 지금, 그는 여기에서 안녕한가. 감정을 낱낱이 분석하지 않아도 결말은 안온하리라는 낙관과 달리 익숙했던 쳇바퀴는 어느새 낯선 족쇄로 발목 잡는다.(라인백)
“이 식당 밖의 세상에서 내 인생은 혼란 그 자체였다.”(p.232) 다행히도 그에게는 자기만의 공간, 안전지대가 있다. 당신은 어떤가, 지금 당신의 포솔레 수프는 무엇인가 작가는 묻는다. 이 작은 안위조차 곧 사라지곤 한다. 히메나의 아파트처럼 미래형 동굴이 끝없이 안심시키는 듯했으나 이 또한 기한이 정해진 아지트였다. 안심의 근거는 인정의 부재를 보이는 존재로 바꾸어주는 마법에 있었다. 더 이상 유령이 아닌 살아있는 사람으로 살게 하는 기회는 놓치기 어려운 법이다. 마지막 작품이 표제작인 <사라진 것들>이다. 지금까지 회피와 상실의 여러 모양을 그려왔다면 본격적인 실종과 남겨진 자들을 말한다. 친구 대니얼은 이미 사라진 후이고 화자의 아내 타냐는 자기 영역을 만들고 소통을 거부하는 성정으로 언제 부재하게 될지 두려운 실종 임박 상태다. 남겨진 자들, 실종자의 여자 친구와 화자는 대니얼의 집을 정리하는 이틀간, 그리고 과거로 편입될, 사라지기 직전의 반 시간을 같은 마음으로 지킨다.
분명 확실했다. 캠퍼스와 친구들과 소소한 유흥과 아주 많이 남은 미래가 확실했다. 자신도 있었고 물질적인 곤란만으로 계량할 수 없는 여유도 지녔다. 확실함을 지렛대 삼아 하루, 또 하루를 보냈던 청춘이었건만 주위를 둘러보는 지금 이 순간 낯선 떨림이 안으로부터 흔들려 퍼진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굳이 찾아보자면 그대는 유쾌하지 않으리라, 상실을 받아들이게 되리라, 패배의 맛이 진하게 배어 있는 상실이리라, 끝에는 세상 두려운 네 글자, 너무 늦은 감 있는 네 글자, ‘다시 시작’이 버티고 있으리라는 정도만이 확실하다. 작가는 인생의 중반을 통과하고 있는 남성들의 목소리를 정성 들여 지면에 새겼다. 여섯 편의 초단편은 산문시처럼 아름다운 압축을 보여주는데 마치 순도 높은 보석 같다. 특히 <고추>는 붉은 루비에 견줄 만하다.
작가는 한 편 한 편 첫 문장부터 마지막 온점까지 눈을 떼지 못하도록 사로잡고 이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문장은 간결하고 주의는 흐트러지지 않으며 감각을 예리하게 벼린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때 중간중간 말을 거는 다른 목소리가 있다. ‘아시죠? 당신 이야기잖아요.’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서술도 독자의 시간을 맞대어보게 한다. 낯익으면서도 서글픈 감정을 정연한 문장으로 읽을 때 마음에서는 화학반응이 일어난다. 감정도 분리수거가 되는지 모르겠지만 회한이나 아쉬움을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실수나 착각에도 눈을 맞춘다. 회피와 외면, 핑계와 합리화, 책임 전가까지도 인정하는 시간, 반드시 대면해야 할 시간을 작가는 초청한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푸시킨의 명시 첫 행에서 의구심이 든다. ‘노여워’가 이 자리에 적절치 않아 보인다. 분노도 힘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기에는 근력도 줄었다. 노엽기보다는 두려움에 가깝다. 두려워하지 말라, 삶이 그대를 한 번도 요청하지 않았던 곳으로 이끌었을지라도, 이 사실을 어느 날 느닷없이 깨닫게 되더라도, 잠시 얼얼한 타격감이 느껴지더라도, 슬퍼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지금 여기’가 낯설어지는 순간, 뒤 돌아 서서 한 걸음씩 되밟아 올라가다 틀린 지점을 찾아 오답 풀이와 함께 수정할 수 있다면 자기 몫의 캔버스는 밝고 투명하게 유지될 테다.
현실은 그렇지 못하니 문제다. 그 작은 연산 착오는 이미 0을 1로, 1을 0으로 교란해 버렸다. 이 간격은 종말에 이르렀을 때 ‘무한’과 ‘없음’ 만큼이나 회복하기 어려운 차이를 만들어낸다. 환불 요청은 물론이고 바꿔주세요, 라는 교환 요청도 어림없다. 댁이 다 사셨잖아요. 인생 무대 관리자(만일 그런 게 있다면)는 삶을 살아냈다는 의미로 응대하였으나 돈을 지불했다고도 해석 가능하다. 그러니 반박할 수 없다. 서서히 자리를 떠나는 속내는 온통 헝클어지고 입안은 쓰디쓰며 잠긴 목에 비명이 살짝 걸친다.
전도서의 기자인 지혜자는 한 문장에 다섯 번을 반복하여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고 인간의 삶을 총평했다. 불통하여 불화하게 되었고 그래서 불만인 순간들은 미세한 변이와 복제를 자동화 시스템처럼 일으켜왔기에 영민했던 청춘조차 적절한 응대에 실패했다. 작가는 묻는다. 그래서 앞으로? 라고. 다른 누구 아닌 당신은 이제 막 확인한 생의 진면목 앞에서 어리석은 매너리즘과 장엄한 시지프스 중에서 어떻게 방향을 잡아갈 것이냐고.
푸시킨은 2연에서 ‘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한없이 슬픈 것’이라고 노래했다. 책 속 인물들은 ‘마음은 과거에 살고 현재는 한없이 슬픈 것’으로 치환하며 얼어붙는다. 하지만 시인은 이어지는 마지막 행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또다시 그리움이 되리니’에서 예언한다. 지금, 여기, 자각의 순간 또한 만일 작가가 15년 후에 세 번째 단편집을 출간한다고 가정할 때 더할 수 없는 그리움이지 않을까. <첼로>의 한 장면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와 ‘실제’ 자아를 묘사하는 단어를 기록하는데 포터의 소설은 이 간극에 눈감지 않고 생의 변곡점에서 다음 발을 떼는 이들의 초상을 완성한다. 그렇게 응원하고 있다. 직면하기, 이제 우리들 각각의 차례다. (끝.)
(20240807 서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