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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분노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3
윌리엄 포크너 지음,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평점 :
수년간 책꽂이에 머물렀던 <소리와 분노>를 책상으로 가져온 건 한달 전이다. 과제처럼 할당된 책들 사이에 틈을 내어 포크너를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역의 공립도서관에서 진행중인 “노벨문학상 작품 토론” 커리에 포크너는 없었으나 마지막 차시를 <소리와 분노>로 수정하였다. 포크너를 읽기에 딱 좋은 시간은 우연인 듯 필연처럼 만들어졌다. <압살롬 압살롬>을 읽은지 5년이 흘러 세부 내용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안개로 뿌연 독해의 여정에서 반들한 조약돌처럼 확실한 의미 하나 발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렇기에 얼마나 경탄했는지, 그럼에도 부실하게나마 기록을 남기는게 또 얼마나 감사했는지 분명히 기억한다. 윌리엄 포크너 최고의 걸작이라는, 작가 자신 또한 “내가 다시 쓸 수 없는 걸작”이라고 평했다는 『소리와 분노』(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2013, 1929, 460쪽 분량)가 ‘뉴욕주 뉴욕시’라는 말로 맺을 때 독자는 숨을 죽인다. 여운이라기에는 묵직하여 마지막 온점이 돌덩어리로 남은 느낌이다. 온점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않다. 그림자들의 맹목적인 돌진을 보았다. 허망한 이탈과 느닷없는 절연을, 무표정과 동시에 일그러진 가면을 보았으며, 참혹한 굉음과 서늘한 침묵이 함께였다.
소설은 남북 전쟁 후 와해되어가는 남부의 실상을 제퍼슨이라는 가공의 땅, 대지주인 콤슨가의 몰락 과정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 보인다. 네 개의 장은 콤슨가 4남매 중 세 명이 화자가 되어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막내인 벤지, 장남인 퀜틴, 셋째 제이슨 순서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일들을 불연속적으로 기록한다. 마지막 장은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하는데 사남매를 키운 흑인 하녀 딜지의 목소리가 담긴다. 벤지 섹션으로 부르는 첫 장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진 벤지가 구사하는 ‘백치의 언어’(p.426)로 콤슨가의 사람들을 만난다. 서른세 살 성인 벤지로 시작하여 유년기와 청소년기까지 시간 이동이 이루어질 때 각각은 활자에 색 입히기로 구분되고, 벤지를 돌보는 이들이 변경되는 지점을 기준으로 시기를 가늠해야 한다. 끙끙거리기와 울부짖기 정도로만 의사표현이 가능한 벤지에게 아프고 차가운 언어, 비아냥과 협박 등의 폭력이 돌보는 이들로부터 보이지 않게, 돌봐야하지만 방기하는 이(어머니)로부터 근본적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누나인 캐디가 집을 떠나기 전까지 애착과 의지의 대상이 되어준다. 일독을 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읽다보면 다음 장들과 연결되면서 비로소 이해가 되니 초독의 미진함과 허술함, 어쩔수 없는 독해의 난도를 실감한다. “울타리 틈 구불구불한 꽃 자리 사이로 그들이 치는 게 보였다.”(p.9)라는 첫 문장부터 독자는 화자가 보는 세상을 그의 감각에 근접하여 스며들기 위해 애쓰는 여정에 돌입한다.
가장 분량이 많으며 책의 중심이랄 수 있는 두 번째 장, 퀜틴 섹션은 “커튼에 창틀 그림자가 보이니 일곱시에서 여덟시 사이일 것이며 시계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또다시 시간 안에 있는 것이다.”(p.101)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생각한다. 사유하고 골똘히 몰입하며, 고요하게 문장을 만들어나간다. 사고의 흐름은 유려하고 다분히 현학적이다. 주제나 사안에 따라 논리를 세우고 확정한다. 부드럽고 친절한 퀜틴은 아픔을 감추고, 자조적으로 관망하며, 내색하지 않은채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기까지 퀜틴은 현재와 과거를 끊임없이 왕래하고, 시간을 정의하는 아버지의 경구들을 되뇌고 확인한다. “나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없으니까. 내가 없는데 그러면 하버드도 없는데 그러면 모자인들 있으랴.”, “다시. 존재의 과거형보다 슬픈 말. 다시. 무엇보다 슬픈 말. 다시.”(p.128) 인간은 자기 불행의 총합이라고 말했던 아버지. “언젠가는 불행도 그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네 불행이야.”(p.140)라고 아버지는 못 박는다. 시간을 중단시킴으로 ‘언젠가는’ 이라는 희망도 떠나보내는 퀜틴의 결단에 그의 기여는 어떠했나. 벤지의 목초지를 팔아 하버드에 오게 된 퀜틴은 어린 시절 동화속 그림을 기억하며, 캐디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소리들이 없었던 거나 다름없기를 바랐던, 간절했던 그 기억을 품고 존재의 과거형으로 화한다.
제이슨은 성장하여 콤슨가의 가장이 되었다. 그는 퀜틴이나 캐디와 달리 혜택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받기로 예정된 혜택도 빼앗겼다. 캐디 때문이라고 여기는 그는 캐디의 딸 퀜틴까지 한데 묶어 지론을 편다. “한번 잡년은 영원한 잡년이다.”(p.241)라고. 벤지 섹션의 첫 문장이다. 어머니인 콤슨 부인은 더 무기력해졌다, 가정의 가장이자 폭군 행세를 하는 아들과 애초에 다툴 생각이 없다. 비굴할 정도이지만 차곡차곡 축적해온 날들의 결과로서 현재는 정확한 값에 도달했다. 소설은 제이슨의 화법과 행동, 반응을 세밀하게 드러냄으로 독자에게 거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매 순간 억눌린 분노, 적대적인 기운이 폭발 직전의 아슬아슬함을 내뿜는다. 그에게 반하는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인물이 여전히 콤슨가를 지키고 있는 흑인 하녀 딜지다. 그녀는 왜 제이슨이 저러도록 내버려 두느냐고 콤슨 부인에게 직언한다. 부활절 예배에서 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딜지, 언제든 필요한 만큼의 불굴의 힘을 발굴해내는(p.394) 사람, 시작을 보았고 이제 마지막이 보인다는 딜지는 마지막 때를 피하지 않고 지켜내는 사람, 지켜보겠다는 사람이다. 비록 비참한 몰락만이 남아있을지라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떠오르는 이는 캐디다. 캐디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어디에 있든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해설에서 포크너는 단편으로 끝날 이야기를 <소리와 분노>라는 장편으로 만들었고, 그 중심에 캐디가 있다고 전한다. “캐디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단편으로 짧은 생을 살게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p.430)는데 캐디가 단독 화자로 나서는 장은 없다. 사랑이나 이해를 받지 못하고 집에서 탈출하는, 부모 없는 여자 아이의 이미지(p.429)는 캐디가 되었다. 내몰리는 아이다. 이런 이미지는 그녀의 딸 퀜틴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현재 불행이 모두 ‘그년’ 때문이라고 호소하는 제이슨에게 보안관은 “자네가 그 아이를 도망치게 내몰았어, 제이슨.”(p.399)이라고 명확히 말한다. 영민하고 사려 깊었던 소녀 캐디는 사랑하는 것들을 차례로 잃어버린다. 그것에 접근할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소설에서 그녀의 고통은 구체적으로 계량되거나 묘사되지 않는다. 부지중에 그랬건, 캐디, 캐디, 하고 벤지 귀에 속삭이는 러스터 마냥 고의였건, 고통은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캐디는 소리조차 없지만 벤지는 울부짖는다. “그것은 태양 아래 목소리 없는 모든 고통에서 나오는 장중한 절망의 소리였다.”(p.415) 벤지가 내는 소리는 피할 수 없는 ‘공포’이자 ‘충격’(p.419)이며 콤슨가 구성원 전체의 비통한 목소리를 일정 부분 대변한다. 다만 콤슨 부인은 제외하고.
콤슨 부인의 한결같은 자기중심주의, 극단의 이기주의, 회피와 합리화는 한 가정을 무너뜨리는데 충분한 독을 간직한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런 애들이 생겨났을까 벤저민으로도 벌은 충분했는데(후략)”(p.137)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이가 콤슨 부인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내뱉음으로 아이들에게 독소를 주입하는 어머니-“하지만 엄마의 마음속에는 모든 게 끝나 있었다. 끝장이야. 끝장이야.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독이 침투했던 것이다.”(p.136)가 콤슨 부인이다. 맹독은 한 가족을, 시대를, 생명을 소멸하고야 만다. 그녀의 대척점에 딜지가 위치한다. 소설은 다양한 삽화를 곁들여 다채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 중에서 부활절 예배 장면은 인상 깊다. 초청 목사의 모습에 교인들은 실망을 넘어 불평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가 전하기 시작하였을 때 사람들은 감동하고 변화한다. 이 장면은 사무엘상 16장에서 여호와가 사무엘에게 이르신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라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다. 보이는 것에 따라 빠르게 자기 입장을 정하는 인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딜지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벤지를 보듬는다. ‘어쨓든 너는 주님의 자녀야’며, ‘앞으로도 오래도록’(p.416)라고 덧붙인다, 그토록 존귀하다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말을 낼 것인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성찰하고 또 바꿔야 한다. 그럴 때 진행되는 비극이라도 속도를 조절할 수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를 통과하는 한 가족의 비극은 또 다른 아픈 가족사인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떠올린다. 그들이 도피처로 삼았던 마약이나 술이 퀜틴이 빠져 들어간 죽음이나 아버지에게 있어서의 술과 다를 바 없다. 전조와 암시는 계속되고 복선을 연거푸 깔리는데 막을 길은 없다는 게 무력감을 배가시킨다. 절망이 숨을 열었다 막았다 눈앞에서 찰랑거리는 느낌이다. 역시 어렵지만 마성의 소설이다. 무한 반복해서 읽고 싶은 문장이 넘친다. 퀜틴 섹션에 특별히 더하지만 한 문장이 발하는 통찰은 공기를 진동시키듯 점진적으로 퍼져온다. 연극조로 되풀이하는 아버지의 조언 뭉치는 아들을 결국 부순다. 망치처럼. 아버지의 조언은 구원자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어머니는 있으나 부재중이었다. 퀜틴가 사남매는 반드시 주어졌어야 할 부모의 절대적 사랑을 누린 적이 없다. 동화책 속 그림을 보고 어두운 구덩이에 갇힌 아이들에 자신을 대입하고 위로 올라가는 부모에게 분노한다. 그러면서 캐디를 희망 또는 절망의 대상으로, 천국 또는 지옥을 예비한 인물로 지목하고 벤지처럼 여전히 울며 이름 부르거나, 퀜틴처럼 동반하기 원했으나 혼자 끝을 맺거나, 제이슨처럼 악에 받힌 행보를 보인다. 고통에 찬 한 가족의 역사를 독자가 읽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뿌리박힌 관습에 의탁하여, 또는 편협한 아집에 사로잡힌 채 자기 안에 갇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고발한다. 화자를 바꿔가며 시간을 복기하는 이유는 작위를 지양하고 진실에 다가서라는 경종이 아닐까. 책임 회피와 의무의 방기가 일으키는 파장을 알아차릴 것, 쉽지 않지만 유혹도 위험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번역본을 읽는 독자로서 역자 공진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내밀한 의식 안에 두 겹, 세 겹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들이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과 병렬 서술하는 문장들, 간단한 대화조차 너무 많은 함의와 너무 많은 과거 인장들을 끌고 와 미래와 절연하는 문장들, 문장이 되지 못하는 파편화된 음절을 붙들고 살아내야 하는 부조리와 참혹함, 나무 냄새와 인동덩굴 향기로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남기는 쓸쓸함, 자기 자리에서 구원자는 되지 못하여도 지키는 자로 남는 목소리 등 <소리와 분노> 읽기는 서사와 전개해 나가는 형식을 통해 고루 특수하고도 있을법한 이야기를 증언한다. 20세기 초 미국 남부의 이야기는 어느새 보편성을 획득하여 현대의 독자에게 놀랍도록 꼭 들어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퀜틴의 퇴장이 아쉽다면 수년 후 출간된 <압살롬 압살롬>의 화자로 등장한 하버드 시절 퀜틴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그가 전하는 서트펜 가 또한 결코 단순하지 않은 가계도를 그리지만.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 현대 소설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할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라는 말과 함께 194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읽어야 할 포크너의 작품이 남아 있다는 게 기쁘다. 어떤 틀도, 최소한의 개요표도 없이 무작정 기록한다는 행위는 늘 감정의 파도를 타고 그러므로 흠결이 두드러진다. 일독 후 쓴다는 결심 또한 얼마나 용감한 넌센스인지. 그럼에도 기억의 쇠퇴는 빠르고 깨달음의 빈곤은 가속하기에 읽을 때마다 오독이었음을 발견할지언정 읽은 후 기록하고 만다. 아직 ‘노벨 문학상 수상작 토론’의 마지막 차시를 위한 논제 만들기가 남아있다. 고달프지만 가슴 뛰는 일 아닌가. 포크너는 반복해서, 어쩌면 주기적으로 재회해야 할 작가다. 문제는 늘 시간이다. 퀜틴적 시간, 시지프스적 시간. 크로노스 또는 카이로스의 시간, 어느 편으로 축이 기울건 문제는 시간이다. 얼마나 남아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지금 어떻게 채우고 있나. 부활절 주일을 앞둔 고난 주간을 보낸다.

책 속에서>
하지만 비가 올 때면 황혼 무렵에 냄새가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가 황혼 무렵에 더 내리는 것인지 황혼빛 자체에 무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인동덩굴 냄새는 그때 가장 강했다. 나는 언제 그치지 언제 그치지 하며 침대에 누워 있곤 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외풍에서 물냄새가, 축축하고 한결같은 호흡 냄새가 났다. 어떤 때는 그 말을 되뇌다 인동덩굴 냄새가 쏟아지는 잠에 섞여들기도 해 그 모든 것은 밤과 불안을 상징하게 되었고, 잠들지도 깨지도 않은 상태로 누워 회색빛 어스름 속 긴 복도를 응시하면 모든 안정적인 것들이 허망하고 불합리해졌으며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나의 모든 느낌과 고통들 그 그림자들은 기묘하고 비뚤어진 형태를 띠고 스스로 긍정했어야 할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그들 자체에 내재하는 일관성이 없이 조롱하였으되 나는 생각하기를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었다.(p.225~226)
그러다 결국 그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회중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목소리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들은 말이 필요 없는 경지에 들어 영창을 읊는 박자로 서로 가슴으로 이야기했다. 그가 성경대에 기대더니 원숭이 같은 얼굴을 쳐들었다. 그러자 그의 자세는 초라함과 하찮음을 초월하는 평온한 고통의 십자가가 되었고 그의 얼굴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p.3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