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수록 아름다운 우리 그림 - 한국 전통회화 들여다보기
이소영 지음 / 미술문화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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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이소영의 『볼수록 아름다운 우리 그림-한국 전통회화 들여다보기(미술문화, 2025, 280쪽 분량)』는 우리 옛 그림과 생활용품의 멋과 운치를 한 권으로 소개한다. 이미 탁월했으나 감상자의 시선이 미치기 어려운 먼 곳에 있던 작품, 보았어도 알아차리기 어려웠을 작품의 먼지를 털어내고 조명을 비추어준다. 발품을 팔지 않아도 최고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은 직접 관람과는 비교할 수 없다 해도 감사한 일이다. 책으로 먼저 보고 찾아 나서도 될 테고 분명 자신도 모르게 원작 앞에 서 있는 나를 상상하게 될 것이다. 언제쯤이 될까 가늠하면서.


서문에서 저자는 취향대로 작품을 선택하고 소재의 상징성과 의미 정도만 간략하게 썼음을 밝힌다. 나머지는 감상자의 몫으로 남겼다는 집필 방향이 독자의 적극적 읽기를 격려하는 듯하다. 총 5부로 먼저 옛그림 속에서 동물과 식물을 재발견한다. 맨드라미와 수탉처럼 어울리지 않는 소재를 같이 그리는 이유가 소재가 가진 상징성 때문이라니 그림 안에 소망이 숨 쉬고 있다. 첫 작품은 신사임당의 8폭 병풍 <초충도> 중 <오이와 개구리>다. 다정하고 차분한 느낌이 여성적이라고 여겨질 수 있지만 “신사임당의 포도와 산수는 대가 안견에 견줄 만큼 절묘하다 평”(P.15)고 했던 기록은 그림을 다시 보게 한다.


2부는 식물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다. 역시 식물에도 소망을 담은 의미가 빼곡하다. 박병수의 12폭 병풍 <낙화화조도>를 볼 때 왜 이렇게 흐릿한가 싶다가 곧 인두화(또는 낙화)의 세계를 어렴풋이 가늠한다. 구김을 펴는 도구인 인두로 종이, 나무, 가죽 등을 지져서 그렸는데 이 정도로 섬세하다니 감탄이 나온다. 다리미질하던 옷도 태워 먹는 사람으로서 예술의 지경, 소망의 간곡함은 놀라움을 자아내고, 알고 나니 작품은 달리 보인다. 3부는 옛그림 하면 익숙하게 떠올리던 산수화다. 그러나 익숙이란 몽매에 가까운 정신의 익숙이었나, 작은 정보에 페이지 넘기던 손을 멈춘다. 조영석에 의하면 정선은 내금강과 외금강을 드나들면서 산수의 형세를 파악하였는데 그가 쓴 붓을 묻으면 무덤을 이룰 정도였다(p.125)고 하니 천재가 노력까지 하니 걸작을 남기는 건 당연한 것 같다. <금강전도>는 ‘장안사부터 비로봉까지 샅샅이 탐승한 것들을 한 화면에 부감한 듯 재구성한 것'(p.125)이라고 한다. 많은 화가에게 사랑받았던 소재인 임포가 등장하는 서옥도는 전기의 <매화초옥도>가 아닌 김수철의 <겨울 산수>가 담겼다.


4부의 생활용품 편에서는 보기만 해도 뿌듯한 ’책가도 병풍‘ 두 점이 실렸다. 옛사람의 현세구복 염원이 담겨있다는 책가도는 현대에 와서도 다채롭게 재해석되고 있다. 5부, ’옛 사람의 멋‘은 다양한 사람의 얼굴과 차림새를 볼 수 있다. 수를 헤아리며 작품을 소개한 책의 마지막인 60번째 그림은 ’군중으로 이루어진 글자‘, 이응노의 <반전평화>다. “이응노의 읽히지 않는 글씨를 프랑스에서는 ’기호‘라 하고 우리는 ’문자추상‘이라 명명했다.”(p.271)고 하는데, 문자추상은 붓으로 찍어내는 절규인양 소리없는 아우성을 멈추지 않는다. 어렵기 때문에 기원하는 마음이 더 뜨거워질 것이다. 예술로 떠나는 시간 여행은 선조들의 삶과 정신을 빠르고 분주한 4차 산업시대로 초청함으로 치열한 일상에 쉼과 여백을, 그리고 자성을 드리우게 만든다.


저자는 한 작품을 두 번 응시할 수 있게 구성하였다. 돋보기를 댄 듯 가까이 확대하여 먼저 보고, 멀리서 전체를 조망하듯 다시 보는 방식으로 독자를 안내한다. 박래현의 <달밤>도 흑색과 백색, 황색의 농담을 조절하여 표현한 두 마리 부엉이에 우선 초점을 맞춘다. 부엉이에 시선을 빼앗기고 다음 페이지를 열면 온전한 작품이 간직하고 있는 시공간이 드러난다. 배경으로 받쳐주는 큰 달과 세련된 색의 조화가 눈에 띈다. 좌우는 여백과 밀집이 균형을 이루고 부엉이의 노란 눈에서 두 번째 달을, 다시 세 번째 달을 발견하게 된다. 책은 요약한 단상을 상단에 배치하고, 이어지는 본문에 작가 설명과 함께 당시 화단의 특징을 알려주기도 한다. 옛 그림에서 사용하던 기법과 용어를 안내하고 상징의 의미를 해석해 줌으로 막연한 감상에 구체적인 길라잡이 역할을 해준다.


예술작품 감상에 기술적인 이해, 지식적인 접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저자도 감상자 몫의 여백을 넉넉히 남기고 있으나 장황하지 않으면서도 꼭 필요한 설명은 우리 옛그림의 지평을 확대하는 디딤돌로 작용한다. 후기에서 저자는 한국미술에 대한 관심을 촉구한다. 생활속에서 전통을 누리기를 소망한다는 저자의 목소리가 여운을 남긴다. <볼수록 아름다운 우리 그림>이라는 제목이 적확하다. 오래 볼수록 순수한 아름다움이 베어 나온다. 천천히 볼수록 투영된 작가의 삶과 시대가 말을 건다. 필요하고도 소장 가치 충분한 책으로 추천한다.


책 속에서>

이렇듯 우리 그림에는 작품의 작은 요소에도 큰 서사가 담겨 있다.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외모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옛사람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더 중요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수성노인의 장수와 박쥐의 오복은 당시 사람들의 여러 소망을 망라한 것이다.(p.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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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테르부르크 이야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8
고골리 지음, 조주관 옮김 / 민음사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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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투>와 <코>를 처음 읽었을 때의 놀라움이 여전히 생생하다. 이렇게 적나라한 이야기가 다 있구나 싶었다.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의 잠자리 동화 격으로 읽어주던 작품 중에 루쉰의 <아큐정전>을 비롯해 고골의 <코>도 있었다. 실망스럽게도 아이들은 지루함과 두려움을 내비쳤고 시기상조라는 결론에 완독은 미래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었다. 고골 단편선을 몇 개 출판사로 보유하고 있는데 내가 가진 민음사판 <뻬쩨르부르그 이야기>도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로 표기가 수정되어 나오고 있다. 번역은 즐겁게 읽었던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의 저자 조주관이다. 니콜라이 고골의 『페테르부르크 이야기(조주관 옮김, 민음사, 2002, 372쪽 분량)』는 당시로서는 미래적 도시이며 가공의 도시로 치환할 수 있을 페테르부르크를 배경으로 러시아식 ‘작은 인간’의 분투를 기록한다. 작은 인간은 러시아 관등 체계에서 대부분 9등관으로 대표되는, 주로 정서나 펜 깎기를 하는 하급 관리의 대명사로 드러나지 않는 소모적 일에 시간을 쏟는 러시아문학의 한 전형이다.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는 <코>와 <외투>, <광인 일기>, <초상화>, <네프스끼 거리> 등 다섯 편의 대표작을 담는다.


<코>는 이발사 이반 야꼬블레비치가 아침 식사 중에 칼로 자르던 빵에서 코를 발견하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는 코를 발견할 뿐 아니라 이 코의 주인을 한눈에 알아차린다. 코 따위를 집안에 둘 수 없다고 다그치는 아내를 피해 들고나온 코를 처치하고자 애를 쓰나 이 또한 만만치 않다. 1장은 “하지만 여기서 사건은 완전히 안개 속에 묻혀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p.15)로 이반의 에피소드를 맺는다. 2장의 주인공은 코의 주인인 8등관 꼬발료프다. 코가 있어야 할 자리에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충격 그 자체다. 제법 잘생기고, 제법 관등에 만족하던 그는 우연히 5등관 신사가 되어 돌아다니는 자신의 코를 본다. 계급에서도 밀리는 코발료프가 당신은 사실 나의 코요, 라고 어렵사리 지적하는데, 코는 말한다. “당신은 실수하고 있소. 나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이오.”(p.22) 코의 변신과 부조리하기 그지없어 마치 꿈꾸는 듯한 상황극과도 같은 현실이라니. 코발료프는 절망하는데 다행히 코는 제자리로 돌아온다. 사라질 때처럼 시치미 뚝 떼고! 1부(장)와 2부의 결말은 ‘전혀 알 길이 없다’와 ‘전혀 알 길이 없었다’로 거의 동일하다. 3부에서 작가는 총평 격인 자신의 의견을 얹는다. 사건의 터무니없음과 그로 인한 궁금증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비현실 안에 내제하는 본질을 환기한다.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꿈과 일상을 넘나들며 자기 몫의 생을 버티는 사람들, 작은 인간들은 지금도 오늘을 살아가고 있다.


<외투>는 만년 9급 문관 아까기 아까끼예비치가 주인공이다. 이름 짓기 곤란해 아버지의 이름을 따랐던 주인공이 이름 없이 생을 마치고 관리 유령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기까지의 굴곡사가 전개된다. 그는 한 벌의 외투를 원하나 그에게 모든 것이었던 외투는 꿈처럼 사라지고 만다. <광인 일기>는 9등관 포프리신의 일기로 일인칭 서술이다. 국장의 집 서재에서 펜을 깎는 일을 하는 포프리신은 국장을 매우 영리한 ‘국가적 인물’이라고 여기는데 우연히 만난 국장의 딸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는 국장 딸의 강아지 맷쥐가 하는 개들의 대화를 알아듣고 국장의 딸을 원하지만 이루지 못할 것이며, 그녀의 결혼 소식까지 알자 낙담한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이웃 개인 피젤을 만나러 가서는 “실은 댁의 강아지와 할 말이 있는데요.”(p.111)라고 이유를 밝힌다. 고통스러운 처지에 웃음이 끼어드는 장면은 곳곳에 등장한다. 그는 분노한다. “걸핏하면 시종무관 아니면 장군이라니, 이 세상은 더 나을 것이 없다. 시종무관이 아니면 장군이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된다.”(p.120), "어쩌면 나는 백작이나 장군인데, 다만 9급 관리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아마 나 자신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을 거다.“(p.121) 사회 비판과 자기 인식, 실존적 질문이 혼재하다가 그의 일기는 서서히 결을 달리한다. 12월 8일 다음에 2000년 4월 43일, ‘며칠도 아니다, 날짜가 없는 날’ 등으로 이어지며 그는 자신을 스페인의 왕이라고 믿는다. 비참하게 갇힌 채 내뱉는 그의 말은 안타깝기 그지없다.


<초상화>에서 젊고 재능 있는 화가였던 차르뜨꼬프는 우연히 사온 초상화로 인해 삶이 송두리째 바뀐다. 그의 성정을 읽은 지도교수는 조심하라는 경고를 하였으나 ‘초상화’가 열어준 새로운 생활은 그에게 방아쇠 역할을 한다. 다만 그림 액자일 뿐인데 초상화가 쏘아보는 시선은 시트를 덮어씌우게 만든다. 그림과 대면하며 꿈을 꾸고, 꿈속의 꿈으로 거듭 들어가고 깨어나오는 장면은 상당히 생생해서 오싹한 기분이 든다. 쉽게 타협하고 욕망을 제어하지 못한 탓에 차르뜨꼬프는 몰락하고 만다. 초상화의 연유를 밝히는 2부만으로도 단독 작품이라 해도 될 만큼 인간의 내면을 밀도 있게 포착한다. <네프스끼 거리>는 화가 삐스까료프와 삐로고프 중위 두 친구의 이야기다. 소설은 “뻬쩨르부르그에는 네프스끼 거리보다 더 나은 곳이 없다.”(p.227)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락을 “이 네프스끼 거리라는 건 언제나 거짓말을 한다.”로 시작하여 “그리고 악마가 모든 것들을 실제 모습으로 보여주기를 거부하고 램프의 불을 직접 켤 때, 네프스끼 거리는 더욱 심하게 사람들을 속인다.”(p.282)로 종결한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받아들이기 어렵게 되자 화가 삐스까료프는 꿈으로 도피하고 꿈에서 욕구를 충족한다. 하지만 꿈은 현실을 속이는 눈가리개에 불과했고 멸망을 부른다.


“그 웃음의 배후에서 우리는 보이지 않는 눈물을 느낀다.”는 푸시킨의 말처럼 고골의 단편에서 맞닥뜨리는 풍자와 아이러니는 애처로움과 슬픔을 품고 있다. 작은 인간이라는 전형이 19세기 러시아에만 존재하였다고 볼 수 없다. 지금도 사람들은 뻬쩨르부르크만큼이나 휘황한 도시의 대로에서 또는 외진 골목에서 힘쓰고 버텨낸다. 일주일 사용 가능한 힘을 하루 단위로 분배하며 ‘오늘도 무사히’를 읊조린다. 의미에 연연하지 않고 태연자약하게 살아가는 소수의 인물을 제외하고, 생래적 조건의 한계를 넘기 어려운 고골의 대다수 인물은 힘에 부치는 대결 끝에 목숨을 잃거나 미치고 만다. 이 연장선상에 작가인 고골 자신도 고통당하고 생을 재촉하였다. “(중략) 한편으로 자신의 재능이 진지한 구원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적합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고통받았습니다. 고골은 전형적인 속물들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는 데 최고 작가입니다. 문제는 그런 재능과 그가 생각한 작가의 소명이 충돌하는 데 있었습니다.”(p.111/로쟈의 러시아 문학 강의 19세기/현암사) <죽은 혼> 2부의 원고를 두 번 불사르고 단식하다 죽음을 맞는 작가의 고통이 그의 등장인물들의 그것과 겹쳐지면서 안타까움을 더한다. 고골의 단편선 『페테르부르크 이야기』는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독자를 사로잡는다. 때론 인과관계가 성립하지 않거나 근거가 부족해 보인다. 그럼에도 이어지는 속도감 있는 전개는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다고 독자를 설득해 낸다. 시간 경과에 따른 <네프스끼 거리>의 변화를 기록할 때는 도스토옙스키가 『백야(1848년)』에서 “페테르부르크 전체가 나에게는 친구와 마찬가지”라며 감정을 이입하며 말을 걸던 장면을 연상케 한다. 때로 고독한 이들에게 장소는 그저 공간이 아니라 가능성이자 상징으로, 아려한 품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봄의 초입, 3월이다. 겨울이 완전히 떠나기 전에 정곡을 찌르는 시린 고전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그렇긴 하지만 하나하나 따져본다면 전체적으로 이 사건을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가 비현실적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생각하고 다시 생각해 보면 이 이야기 속에는 분명히 무엇인가 내포되어 있다. 누가 뭐라해도 이와 비슷한 사건들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있다. 드물긴 하지만 있을 수 있는 일이다.(p.51, <코>)


시종무관 따위가 뭐냔 말이다. 사실 이건 관직에 불과할 뿐, 아무것도 아니다. 손으로 잡고 감촉을 느낄 수 있는 어떤 물건도 아니다. 사실 시종무관이라고 해서 이마에 눈알이 하나 더 박힌 것도 아니다. 또 코가 금으로 된 것도 아니고, 내 코도 모든 사람의 코와 같다. 시종무관도 코로 냄새는 맡을 테지만, 먹거나 재채기는 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는 왜 이 모든 차이와 다양성이 있는지 여러 번 파악하고 싶었다. 나는 9급 관리다. 왜 9급 관리가 되었을까? 어쩌면 나는 백작이나 장군인데, 다만 9급 관리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아마 나 자신도 내가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을 거다.(p.121, <광인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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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호수의 에세이 클럽 - 진짜 내 이야기로 에세이 쓰기
임수진(밤호수) 지음 / 엑스북스(xbooks)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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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 전성시대다. 때론 모두 다 에세이를 쓰고 있는 듯하다. 나라도 쓰지 말아야겠다고 불필요한 결심을 하였으나, 어느 순간 마음을 비집고 들어가 무언가를 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비집으면 또 틈을 내어주는 이 편한 세상은 소설도 시도 아니다, 일기와 에세이 사이에서 타인의 시선을 모른척했다가 초대했다가 제발 보시게 라고 강권하는 등 그때그때 널을 뛰어왔다. 널뛰기가 꽤 오래다 보니 결국 계속할 거라면 제대로 뛰어보고 싶어진다. 임수진(밤호수)밤호수의 에세이 클럽(엑스북스, 2025, 240쪽 분량)은 당신도 쓸 수 있소 에세이, 그것도 잘 쓸 수 있소 에세이, 라고 용기를 주는 다정한 초대장이다. ‘진짜 내 이야기로 에세이 쓰기라는 부제가 처음에는 헉, 하며 손사래를 치게 할지 모른다. 그러나 중반부를 넘어서고 책이 끝나갈 때가 되면 좋아, 진짜 내 이야기로!’라며 마음 한 켠 불씨가 담기고, 손에 힘도 들어간다. 흔쾌히 손을 맞잡아줄 그를 생각하면서 말이다.

 

책은 온라인 에세이 쓰기 수업 <밤호수의 에세이 클럽>을 진행했던 4년간의 경험과 그 이전 국어 교사로서의 시간, 그 이전부터 한결같이 이어져온 읽고 쓰던 기쁨을 생생하게 전한다. 먼저 왜 에세이인가, 하는 물음이 선행된다. 늘 하던 내 안의 질문이 즐비하다. 대작가가 아닌 바에야 또 하나의 글을 내놓는게 무슨 의미인가(p.21)를 앵무새처럼 반복했던 시간이 스친다. 종이 더미만 더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태라고 자가 진단하던 시간 말이다. 하지만 에세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넘어가면 공감이 나온다. 에세이스트는 건강한 나르시시스트이지만 공감의 코드 때문에 진짜 나르시시스트는 될 수 없다(p.44)는데 동의하게 된다. “에세이라는 게 결국 내 마음과 타인의 마음이 교감하는 지점에서 폭발하는 카타르시스의 문학”(p.45)이라고 분명히 한다.

 

2부는 에세이 쓰기 실전 방법론이다.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나는 모두 글감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다. 시간이라는 장치가 정제의 과정을 거치게 하는 과거의 나, 생생한 표현이 가능한 현재의 나, 소망과 꿈을 설계할 수 있는 미래의 나는 얼마든지 꺼내어 쓸 수 있는 훌륭한 글감이다. 2장은 핀셋 가이드라 모두 밑줄이다. ‘초보 에세이스트들의 흔한 습관들에서 독자는 자신의 글쓰기 습관과 견주어보며 그래서 어려웠던 거다, 그래서 문제였던 거다, 알아차리며 원인과 해법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 필자의 경우 불친절한 전개에 색깔을 덧입힌다. 빨간 줄이다. 늘 마음이 급해서 혼자 저만치 가버리는 악순환을 제할 때가 되었다. ‘공감에서 작가가 들이미는 진짜 자기 이야기의 힘은 그 무엇도 이길 수가 없다. 이러한 공감의 힘은 바로 솔직함과 진실함에서 나온다.”(p.81)는 지적은 가장 중요한 지침임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에서 해법과 안내는 계속된다. 에세이는 하나의 정서나 감정으로 남을 것이고 그것은 곧 형용사라는 저자의 말에 미운털을 박아놓고 홀대해온 형용사를 다시 보는 계기가 되었다.

 

4부 나만의 콘텐츠 만들기에서는 목차를 써서 방향을 잡고 글을 써나가게 된다. 리스트를 작성하고 키워드를 도출하는 일이 어렴풋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작성하는 자와 하지 않는 자는 다른 결과를 받아들게 될 것이다. 특히 눈여겨 본 부분은 3, ‘이미 써 놓은 글을 콘텐츠로 만들기. 당신은 어떤 책을 내고 싶은가 묻는다면 나는 숨도 쉬지 않고 서평집이다. 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해진 게 어느덧 4년쯤 된다. 목차도 대강 꾸렸다. 그런데 뛰어들지 못하는 이유는 은근히 우선순위에서 밀리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간절하지 않은 걸까? 내긴 낼 거야, 이것부터 하고! 수백 번 되풀이한 나의 변이다. 책을 읽는 한 서평을 쓰게 된다. 눈앞에 버티고 있는 써야 할 서평이 이 평을 포함해서 지금도 두 편이다. 어떻게 쓸지 고민중인 서평이 계속 목전에 있기에 일단 해결해야 할 서평부터 쓰느라 서평집은 진행하지 못하는 이 아이러니, 바보스러움, 제자리걸음 때문에 오늘도 뒷목을 잡는다. 나는 이 상황을 네 컷 만화로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제목은 <정신차리시 개!>가 적당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희망한다.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밤호수의 에세이 클럽은 연습하기 코너를 적소에 배치하여 배운 내용을 실제 적용하도록 돕는다. 모셔두기보다 닳도록 펴볼 강력한 안내서 역할을 할 것이다. 책의 후반에 나오는 편집회의 이야기는 독자를 들뜨게 한다. 저 회의에만 들어가면 훌륭한 작가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 분위기를 상상한다. “글을 쓰는 순간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건 선생이 아니라 독자다.”(p.225)라는 문장이 뭉클하다. 기꺼이 읽어주고 지지하며 함께 시간을 통과하는 동지가 있다는 건 감사하고 귀한 일이다. 명 에세이집을 추천받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의 장점이다. 읽고 있는데 웬일로 이번에는 작은 책을 읽느냐는 남편의 말에 이 책 작은 책이 아니라고 나도 모르게 힘을 준다. 쓰는 마음, 소통하고 공감하며 비로소 내 안의 나를 고스란히 허용하는 기적은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필자처럼 기록을 신성시하나 동력 부족으로 시도와 매듭을 거듭 지체하는 이들에게, 치장을 떼어낸 채 불굴의 펜을 들고 가장 투명한 자신을 기록하기 원하는 이들에게 정교한 나침반이, 때론 따뜻한 동무가 되어줄 책이다.

 


책 속에서>

모든 이야기는 기록하는 순간 의미가 생기고, 기록되는 순간 영원성을 지닌다. ‘역사가 된다.(p.8)

 

(전략) 말하자면 에세이는 있는 그대로의 내 공간을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공간으로 다듬어 가는 과정이자, 거칠고 투박한 돌덩어리를 각자에게 어울리는 보석으로 세공해 가는 과정이다.(p.24)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진한 공감을 줄 수 있는 글과 아닌 글의 차이는 딱 한 가지다. 진짜 내 이야기의 진실함이 들어 있는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참 이상한 일이다. 아무리 좋은 드라마와 기가 막힌 영화 이야기를 예시로 들어 글을 전개하더라도 작가가 들이미는 진짜 자기 이야기의 힘은 그 무엇도 이길 수가 없다. 이러한 공감의 힘은 바로 솔직함과 진실함에서 나온다.(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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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 속의 사나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8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박현섭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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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영어권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 영미 문학계의 천재라 불리는 조지 손더스는 25년간의 강의를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라는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했다. 그가 엄선한 19세기 러시아 단편 소설은 일곱 편이다. 그중에서 체호프 작품이 세 편으로, 톨스토이(2)를 능가한다. 체호프는 마흔넷에 세상을 떠나기 전, 작가 이반 부닌에게 사람들은 앞으로 칠 년 더 내 작품을 읽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기껏해야 육 년쯤 더 살겠지요.”(p.331, 해설)라고 말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단편 작가로 여전히, 아마도 영원히 건재할 것이다. 손더스는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체호프의 <마차에서>, <사랑스러운 사람>, <구스베리>를 강독한다. 체호프 타계 120주년을 기념해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중단편 선집 <상자 속의 사나이><마차에서>를 제외한 두 작품이 실렸다.

 

상자 속의 사나이(박현섭 옮김, 문학동네, 2024, 348쪽 분량)1884년부터 1903년에 발표된 체호프의 중단편 중에서 작품성이 뛰어난 13편을 발표순으로 담은 선집이다. 작가의 생몰년인 1860~1904년과 견줄 때 초기작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주요 저작을 살펴볼 수 있는 구성이다. 작가는 모스크바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하였고, 의사로 개업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하였다. 의사이면서 작가였고,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운 환자이기도 했던 체호프는 자신을 불태우듯 집필에 전념하였다. 희곡 갈매기」 「벚나무 동산등으로 셰익스피어 이래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이자 모든 단편소설 작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레이먼드 카버가 언급했듯 탁월한 단편소설 작가다.

 

처음 실린 세 편은 안토샤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던 작품으로 <>, <아뉴타>, <반카> 모두 가엾은 이들을 등장시킨다. 굶주리고 학대받는 아이와 착취당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여인을 본다. 특히 신문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난에 개제되었다는 <반카>는 안타까움에 독자를 숨죽이게 만든다. 중편 <6호실>은 동시대 독자들에게 가장 열렬한 호응을 받았던 작품인데 레스코프는 사방 천지가 6호실이며, 6호실은 러시아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소설은 줌 인하듯 병원의 별관을, 현관을, 바닥에 침대를 고정한 커다란 방을 묘사한다. 현관에는 질서를 사랑하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구타를 자행하는 경비원 니키타가 있다. 소설은 방 안에 있는 다섯 명의 정신병자를 소개하는데 그 중 이반 드미트리치 그로모프의 사정과 그를 진료하게 된 의사 안드레이 예피미치 라긴의 만남은 결말에 더욱 비극적 색채를 덧입힌다. “안드레이 예피미치는 모든 걸 알아차렸다.”(p.125) 그는 6호실에서 환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이십여 년 넘게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음을 비로소 자각한다. 너무 늦은 깨우침이다.

 

아름답고 숭고한 감정에 함께 빠져들게 하는 <대학생>을 지나면 또 한 편의 문제작이자 표제작인 <상자 속의 사나이> 차례다. <상자 속의 사나이>,<구스베리>,<사랑에 관하여>삼부작으로 묶인다. 교사 부르킨은 수의사 이반 이바니치에게 동료 교사였던 상자 속의 사나이’, 벨리코프 이야기를 들려준다. 벨리코프는 소라게나 달팽이처럼 외부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혔던 기인으로도 볼 수 있으나 화자는 상자 속의 사람이 비단 그뿐만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가 이건 상자 속 삶이 아닐까요?’(p.185)라고 반복할 때 독자를 향하는 작가의 목소리로 들리며 액자식 구조를 활용한 질문은 울림을 던진다.

 

<구스베리>는 부르킨과 이반 이바니치가 비를 피해 알료힌의 집으로 가서 묵으며 나누는 이야기다. 이반 이바니치가 친동생인 니콜라이에 대해 나머지 두 명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행복으로, 최면 상태와 각성의 중요성으로 화제를 옮겨간다. 그의 웅변조는 갸웃하게 만드는 결말에 이르는데 조지 손더스는 이 작품을 근사하게 채에 고르고, 숙고의 지점을 짚어낸다. 화자와 청자를 바꿔가며 이야기 속 이야기로 독자를 끌고 가는 세 편의 연작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사랑에 관하여>는 집주인인 알료힌이 들려주는 지나가버린 사랑 이야기다. 그녀는 지방 재판소 부소장인 루가노비치의 아내다. 말기작은 올렌카라는 불멸의 캐릭터를 탄생시킨 <귀염둥이>와 작가 후기작의 특징인 열린 결말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표한 <약혼녀>로 이어진다.

 

내가 체호프에게서 가장 감탄하는 것은 그가 글에서 의제로부터 정말 자유로워 보인다는 점이다.(중략) 그는 의사였고, 그가 소설에 접근하는 방식은 애정어리면서도 진단적으로 느껴진다.”(p.529/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손더스는 자신의 책에서 꼽은 세 편 외에 이번 선집에 실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사랑에 관하여>와 몇 작품을 더 추천한다. 체호프가 정치적 또는 도덕적 입장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는 비판에 대해서 손더스는 지금은 이런 특질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며 확실성이 종종 권력으로 오인되는 세상에서 불확실함을 유지할(, 계속 호기심을 가질)만큼 자신감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라고 덧붙인다. 모든 결론을 의심하며 재고하는 체호프를 고상하며 심지어 거룩하다고 쓰면서 나아가 체호프의 이야기를 훌륭하고 간략한 재고 기계라고 부연한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어리석고 극단적인 사람들, 편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들, 현실감각이 떨어지거나 속물근성에 깊이 물들었거나, 무감각자나 망상자도 전면에 나선다. 그러나 작가는 예술가는 등장인물과 그의 말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되며, 편견 없는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견해를 실천한다. <6호실>에서, <로트실트의 바이올린>에서 그들은 너무 늦게 자각한다. <구스베리>, <귀염둥이>처럼 때론 늦게까지 깨닫지 못한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처럼 어떡하지 상태에서 이야기 바퀴는 멈추고 마저 굴리는 건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기도 한다.

 

벨리코프만 상자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니고, 라긴만 6호실에 갇힌 게 아니라는 점을 독자는 금세 간파할 것이다. 체호프는 간결한 문장으로 생의 부조리와 타협하고, 결정을 보류하는 이들에게 노크한다. 그런 중에도 서정적인 풍경 묘사와 생생하게 포착한 분위기는 삶이라는 보편의 희비극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귀염둥이>는 논제를 만들고 시립 도서관에서 토론하였던 작품이다. 올해 상반기에 토론할 체호프를 정하는 일이 즐거우면서도 어렵다. 모든 작품이 마스터피스 아닌가! 페이지터너 급으로 읽히지만 여운을 돌아보는데 훨씬 시간을 들이게 되는 고전 명작이다. 생기와 기쁨을 안고 우리 생의 6호실, 비좁아 지는 상자를 떠날 수 있길 바란다. 동시에 예술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정확히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작가의 말대로 체호프가 선사하는 예술에 힘입어 생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조건을 조명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겠다.

 



 책 속에서>


그 혼돈 속에서도 문득 견디기 힘든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 달빛 속에서 마치 시커먼 망령들처럼 보이는 이 사람들이 바로 이와 똑같은 고통을 날이면 날마다 몇 년이고 겪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그는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런 것을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고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죄가 없다. 하지만 니키타처럼 완고하고 거친 안드레이 예피미치의 양심은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한 냉기로 감쌌다. 그는 박차고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싶었다.(p.132, 6호실)

 

"우리는 남들이 거짓말하는 걸 보고 듣는 것도 모자라서,“ 반대편으로 자세를 바꿔 누우며 이반 이바니치가 말했다. ”그런 거짓말을 참는다는 이유로 바보라고 놀림을 당하지요. 모욕과 멸시를 참으면서, 자신이 정직하고 자유로운 사람들 편이라는 걸 대놓고 주장하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자기 스스로 거짓말하며 미소를 흘립니다. 이 모든 게 빵 한조각, 따뜻한 방 한 칸, 한푼 값어치도 없는 알량한 지위 때문이죠. 아니,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p.186, 상자 속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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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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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더 나아가 억제함으로 고양하는 글쓰기를 계속 만난다. 클레어 키건, 한 강, 욘 포세의 간결함이 동일한 결은 아니어도 소란함이나 치장은 제하고 의미를 내포한 행간 그대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보이기도 한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욘 포세는 기념 연설문에서 내게 글쓰기는 귀를 기울여 듣는 일입니다. 글을 쓸 때 나는 결코 사전에 준비를 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듣기만 할 뿐입니다.”(p.95)라고 말했다. 귀 기울여 들을 때 들리는 것은 침묵이며 나아가 침묵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책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한번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화자가 숲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다.

 

페이지마다 쌓여가는 눈이 표지판 없는 숲 한가운데에서 생존에 필요한 조건들을 냉각시킨다. 눈이 내리고, 어둠이 들어서고, 기온이 떨어지고, 체온이 내려가고, 허기지고 피로한 상태로 그는 본다, 듣는다, 감각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낯선 현상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수용한다. 미심쩍소, 당신 누구요, 라고 물을 권리, 잠시만요, 라고 유예시킬 자격은 이미 회수되었다. 기회를 달라고 하소연할 수 있나. 그는 기회를 기회라고 여기지 못했다. 그가 낭비한 시간 목록과 세부 사항이 추수가 끝난 곡식 단처럼 가지런히 묶여 있다. 첫 번째 묶음은 마땅치 않은 일련의 감정들이었다.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p.7)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기쁨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그는 무언가를 했을 뿐”(p.7)이다. 운전했고, 갈림길에서 선택했고, 숲길 끝에 처박혔고, 후진하지 못하여 차에서 내렸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머릿속으로 방법을 시뮬레이션한 끝에 숲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루함에서 공허함으로, 다시 두려움으로 감정의 파고를 탄다. 멍청하다는 자책을 털고 간절하게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두려움을 감정으로 인식하지 않고 단어로 분석한다. ‘차분하고 조용한 두려움’, ‘불안함이 없는 두려움’, 말하자면 말뿐인 두려움’. 그러므로 감정은 허상이고 이성적인 나는 구출되는 게 마땅하다는 합리화다.

 

이 순간 눈앞에 보이는 실체는 몹시 불합리하다. 철저하게 혼자인 그, 누가 봐도 혼자인 그는 의식의 흐름대로 말문을 연다. 머릿속에 작동하는 사고는 언어 회로를 돌린다. 최면을 거는 듯한 문장으로, 이전의 말을 번복하고, 맞서다가 부연하고, 오류를 곁들이다 끝없이 덧댄다. 딱히 할 일이 없는 그는 의식의 흐름을 놓칠 이유가 없다. 자기의식과 침묵만이 유일한 대화 상대다. 그런데 누군가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불분명한 순백색의 존재’, 예전 그대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차례로 다가온다. 지력과 이성을 넘어서는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감정이 그랬듯이 지력이나 이성도 하나의 단어, 또는 말, 하나의 표현 방식일 뿐이라고 반론한다. 그는 곧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거부하지 않는다.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는데 결국 삶으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작은 행동의 총합, 애쓰고 버틴 끝에 예외 없이 맞이할 단 하나의 결말을 빛 속에서 마무리한다. 아무도 예외일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

 

작가는 예외일 수 없는 길인 죽음을 <아침 그리고 저녁>에 이어 <샤이닝>에서 다시 한번 형상화한다. 전작에서 친구 페테르가 고깃배를 타고 요한네스를 마중 나왔는데 이번에는 깊은 숲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중 나온다. 전작에서 페테르는 질문하는 요한네스에게 하나하나 답해준다. ‘궂은일이 생긴 아래를 내려다보다 에 접어들자 인도자는 이제 말들이 사라질 거라고 안내했다. <샤이닝>에서는 화자인 가 다가온 이들을 묘사하다가 말미에는 일인칭 복수형인 우리로 주어를 바꾼다. 설명을 듣고 이해하려 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경계를 넘자마자 즉각적으로 통찰하고 의문도 망설임도 없이 빛으로 합류한다. 거의 단일한 공간적 배경인 눈 쌓인 숲에서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죽음의 여정을 그린다. 작가는 죽음을 문학적으로 완성해 낸다. 동의하는가와 별개로 사실과 환상을 치밀하게 직조하여 설득력을 갖춘다. 죽음은 도처에 만연하나 나와는 무관하다고, 아직 무관하다고 여기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금기시하는 정서와 달리 이면에는 확고한 분위기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죽음이라는 담론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샤이닝>에서 독자는 열 번 남짓 마침표를 썼던 <아침 그리고 저녁>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양의 마침표를 볼 수 있다. 의식의 흐름이 이어질 때 쉼표를 타고 연속해 나간다. 다만 질문 끝에 물음표는 삽입하지 않는다. 답을 간구하기보다 상태를 수용하고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 답변이 주어지지 않아도 이의가 없다는 마음을 엿본다. 80여 쪽 분량의 소설은 독자를 한 호흡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상당히 감각적이다. 말끝에 얼어붙는 입김, 속수무책으로 에워싸는 눈발이 느껴진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텅 빈 공간이 자리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캐릭터들에게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기분이 든다. 초현실주의 화가가 회화적으로 구축한 미지와 익명의 세계를 간결한 글로 읽으며 상상의 영역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랄까. 한국어판 표지도 인상적이다. 인간이 육신의 눈에 담는 마지막 풍경이 별이 총총히 박힌 채 진공처럼 영혼을 빨아들이는 또 다른 차원의 문일까.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샤이닝>은 묵독으로 읽어도 좋지만 낭독할 때 울림은 극대화된다. 분주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삶 전체를 조망해 볼 작품이다. 물음표 없는 물음이자 사유의 쉼표로 초청하는 작품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그런데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가 누구인지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물어볼 수는 있는 일이었던가. 나는 말한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존재가 말한다: 나는 나일 뿐입니다(p.64)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다,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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