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생 종려나무 -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95
윌리엄 포크너 지음, 권지은 옮김 / 민음사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야생 종려나무』(권지은 옮김, 민음사, 2026, 1939, 436쪽 분량)는 윌리엄 포크너의 열 한 번째 소설로『소리와 분노』와 10년의 간극이 있다. 미시시피에서 주로 작품 활동을 하던 작가가 할리우드에서 간헐적으로 시나리오 작업을 하던 시기를 거쳐 집필한 작품이다. 총 10개 장으로 구성된『야생 종려나무』는 <야생 종려나무>와 <노인>을 교차 진행하는 독특한 구조다. 출간 시 출판사의 강요로 제목이 정해졌지만 포크너가 선택했던 제목은 시편 137편 5절에서 인용한 부제 <예루살렘이여, 만약 내가 그대를 잊는다면>이었다. 포크너가 두 작품을 각각 완결 후 재배치하지 않고 교대로 집필하였다는 점도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지 작가의 의도를 한 번 더 생각하게 만든다.

 

홀수 장에 묶이는 <야생 종려나무>는 첫 장과 마지막 장이 조응하며 수미상관의 구조로 만난다. 미시시피 남부 해변의 별장을 세놓고 있는 중년 의사의 관점에서 거주중인 샬럿과 윌본을 보여준다. 그의 눈에 비치는 두 사람은 정체도 관계도 모호해서 자신을 순수의 울타리에 갇힌 자로 여기고 진실을 가리는 베일을 상정한다. 마음의 평화 수호와 베일을 걷어낸 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관찰자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왔을 이들을 호기심과 적대감으로 주시한다. 가운데 3, 5, 7장은 두 사람의 여정을 보여주는데 인턴으로 근무 중인 해리 윌본이 스물일곱 생일날 들르게 된 파티에서 리튼마이어의 아내 샬럿을 만난다. 후에 샬럿은 윌본을 두 번째로 만났을 때, ‘책에서 읽었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았던 것’을 비로소 깨우치게 되었다고 회상한다. 샬럿은 “사랑과 고통은 같은 것이고 사랑의 가치는 그걸 위해 희생한 것들의 총합이라서, 사랑을 싼 값에 얻는 건 자기 자신을 속이는 거나 마찬가지”(p.62)라 주장하며 둘만의 사랑을 완벽한 현재, 시간과 사회 규범에서 벗어난 상태로 만들어가려 한다.

 

윌본은 샬럿의 충실한 추종자이자 동조자이며 연인이 된다. 사랑은 죽지 않고 죽는 건 연인들 뿐이라는 샬럿이 사고와 행동을 주도한다. 그러나 어느 시점부터 윌본의 성찰은 깊어지고 시카고에서의 안정으로부터 근본적인 질문을 끌어내는데, 샬럿이 주장한 미덕에 동의하면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오늘날의 세계에서 사랑이 존재할 만한 장소는 없다, 인간이 사랑을 제거해 버렸다는 서술에 이어지는 부분은 기시감도 느껴지는데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대심문관 에피소드가 연상된다. 포크너의 인장과도 같은 시간과 존재의 관계 탐구는 흥미롭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흐르지 않고 시간의 전류는 기억을 통해 흐른다는 발견은 후에 윌본의 지향이 된다. 10년 전 작품『소리와 분노』의 퀜틴 장에서 만났던 파편적 시간의 변주와도 연결된다. 결국 방향을 바꾸는 결단도 윌본이 내리고, 두 사람은 유타주 탄광촌의 경험해보지 못한 추위 속으로 들어간다.

 

소설은 짝수 장에서 다섯 번 <노인>이야기를 펼친다. 미시시피주 교도소 농장에 수감되어 있는 스물다섯 살 정도의 키 큰 죄수는 기차 강도 미수 혐의로 십오 년 형을 받았다. 소설에 몰입한 나머지 내용을 직접 실행하다가 범죄는 시작도 하기 전에 붙잡혀 구속된 그는 이게 다 내가 읽은 책 때문이라며 작가들을 저주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자정 무렵, 미시시피 주 마을 제방이 무너졌다는 소리를 들으며 강제 기상한다. 1927년 5월 미시시피 대홍수가 배경으로 <노인(Old man)>은 “미시시피 강”을 부르는 별칭인 <Old Man River>에서 가져온 제목이다. 간수는 두 죄수에게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여자와 지붕에 앉아 있는 남자를 구조해 오라고 명령한다. 배가 뒤집히며 익사했다고 보고된 그는 사망자 처리가 되었으나 살아 있었고, 작가가 신화적으로 묘사하는 압도적인 홍수와 싸우며 ‘나뭇가지에 매달린 여자 구하기’라는 임무에 몸을 던진다.

 

3인칭 서술 중에 ‘이것이 칠 주 후(...)들려준 이야기의 내용이었다.’ 등 회고의 틀을 삽입하여, 현재의 사건과 훗날 전달된 이야기 사이의 시간적 거리가 드러나며 독자는 시야가 확대된다. 이야기는 더 입체적이고 생생해진다. 포크너가 중심으로 삼은 <야생 종려나무>와의 균형과 대조를 위해 집필한 <노인>은 분위기를 환기하고 독자를 새롭게 집중시킨다. 죄수는 홍수라는 자연재해를 당해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들며 새로운 경험을 쌓고 보이는 것 너머의 이면에 접근하는데, 특수한 현상과 일반적인 상태를 올바로 보지 못하고 착각해왔음을 느낀다. 인간은 얼마나 편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 생각하며 자연에 대한 인식 전환이 이루어진다. 그는 구출한 여자를 맡기고 교도소로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죄수의 복장만 보고 발포하는 사람들. 소통은 연거푸 실패한다. 우연한 만남이 더할수록 배움을 늘어 가는데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즐거움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왜 탈출하지 않고 계속 되돌아가려 할까. 자유로운 세계의 예측 불가능한 위험 보다는, 교도소에서 책임감, 명예심, 자부심 등의 미덕과 가치를 경험했다 여기고 받은 것을 돌려주기 원하는 죄수는 원칙과 약속을 가치로 선택한다. 다만 그의 선택은 충분히 존중받지 못한 채, 결국 ‘운이 없었던 일’로 치부된다.

 

매 순간이 사랑만으로 완벽한 삶을 살고자 했던 샬럿, 깨끗하고 질 좋은 돌이나 청동을 오랜 시간 잘라서 뒷면을 볼 수 있고 직접 안을 수 있는 작품을 만들기 원했던 그녀는 여성이나 모성이라는 사회적 역할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기보다, 그와 무관하게 극히 개인적 선택과 실존을 밀어붙이고자 한다. 샬럿은 실존이 본질에 선행한다는 명제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이다. 그녀는 리튼마이어를 완전히 잘라냄으로, 즉 온전하게 상실함으로 다시 온전해졌다고 여겼듯이 임신이라는 현실도 같은 방식으로 되돌리고자 한다. 반면 <노인>에서 죄수는 헬레네나 살아 있는 가르보가 아닌 만삭의 익명 여성을 구조해 어떤 의학적 도움도 없이 출산을 돕고 아이를 보며 자신이 겪은 고난의 이유를 깨닫는다. 배와 여자를 끝내 돌려주지만 추가로 형까지 받는다. 아이러니한 결말을 넘어 타자의 인정과 무관하게 주어진 일을 끝까지 해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스물일곱의 윌본도 열여덟의 키 큰 죄수도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으로 진입하였다. 윌본의 날들 역시 죄수가 예측 불허의 물살이 간직한 파괴적인 힘에 휩쓸렸듯이 다른 형태의 파도와 맞서야했다. 결코 배경이랄 수 없는 종려나무 잎은 마치 의식을 가지고 움직일 때를 정하듯이 샬럿과 윌본 곁에서 야생의 소리를 지르곤 했다. 윌본은 조용히 생각하는 잠깐의 정지상태를 수차례 반복하며 자신의 위치를 가늠했다. 성찰은 나침반처럼 다음 목적지를 가리켰고 그들은 호숫가에서 시카고로, 시카고에서 유타주 탄광촌으로 이동한다. 그러나 샬럿을 떠나보내고 눈앞에 놓인 몇 가지 가능성 가운데 윌본은 스스로를 가두는 길로 들어선다.

 

의식을 닫지 않고 깨어있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무가 아닌 비통함을 택할지라도 기억하는 일은 잃어버릴 수 없는 대상을, 시간과 길과 소리를 어떤 의미에서는 조각해서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으로 바꾸는 샬럿의 작업과도 다르지 않다. 샬럿이 추구하던 예술을 윌본은 글쓰기로 치환함으로 생동감 넘치던 영원과 같았던 찰나들을 수집한다. 둘만의 추억도, 그 끝에 닥친 원하지 않았던 결과도 흘러가버렸다. 무엇보다 흘러내리던 육신과 먼지와 재로 무화하는 놀라운 속도 앞에서 무력했던 윌본은 직전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차곡차곡 글이라는 용기에 담는다. 더 이상 흘러내리는 일이 없도록.

 

포크너의 글에는 빈틈이 없다. 독자는 <야생 종려나무>를 읽으며 고조된 긴장이 <노인>에서 조금씩 풀어지면 바람이나 파도를 타듯 완급 있는 읽기를 경험한다. 숨을 돌린다. 감옥의 침대 끝에 걸터앉은 윌본이 온 세상 모든 비극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서술, 그럼에도 ‘작은 조각’에 집중하는 태도는 영웅적이다. 남은 자가 남겨진 삶을 견뎌낼 수 있는 하나의 힌트가 아닐까. 윌본에 못지않은 비극적 인물 리튼마이어에게 포크너는 비로소 지면을 할애한다. 그의 태도, 그의 고통, 그럼에도 지켜낸 약속이 울림을 남긴다. 그럼에도 특별한 감동은 윌본의 차지다. 포크너는 윌본의 성찰, 각성, 의지, 결심, 실천을 섬세하게 조명한다. 내내 치밀했던 작품은 결말에서 한 단계 도약하면서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성실하고 미숙했던 청년이 단 세 줄로 요약되어있는 1년의 여정을 거치며 깨달은 것을 전할 차례다. 그는 종언을 고하는 기억을 멈춰 세운다. 이제는 마주할 용기가 있다. 기억을-이해하고-언어화할 수 있게 되었고-따라서 이제 다 괜찮았다는 진심어린 선언은 모든 쓰는 사람들의 푯대일 것이다.

 

반면 <노인>의 죄수에게 포크너는 느낌은 간직하지만 ‘언어화할 능력이 없’다는 한계를 설정함으로 ‘없음’으로의 회귀를 막고 통찰을 간직하게 하는 언어화의 중요한 차이를 드러낸다. 윌본의 글쓰기, 그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 아니었을까. 숨도 쉬어지지 않고 눈도 제대로 깜빡일 수 없는 중에 글쓰기만이 그에게 호흡이었을 테다. 읽혀서 돈으로 치환할 수 있는 수단으로서의 글을 써온 윌본은 비로소 진짜 이야기를 쓴다. 기꺼이 비통함으로 걸어 들어간다. 포크너의 목소리가 겹치는 장면들이다. 포크너가 자신의 이별 경험에서 가져온 말인 “비통함과 무(無)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비통함을 선택하겠어.”를 <야생 종려나무> 파트의 마지막 문장으로 삼았기에 그에게는 더욱 의미 있는 작업이었을 것 같다.

 

윌본의 선택은 어쩔수 없이『소리와 분노』에서 퀜틴 콤슨의 퇴장을 떠오르게 한다.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었다, 라는 말을 남겼던 퀜틴은 자발적으로 존재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10년 후 <야생 종려나무>의 윌본은 존재하기를 선택하고 존재하는 방법을 찾아낸다. 언어화함으로써 기억하고, 기억할 수 있기에 고통을 마다않고 ‘다 괜찮았다’라며 수용하는 입장이다. 퀜틴은 실현되지 못한 욕망과 시간의 굴레에 갇혀 자신의 혼란을 끝내 언어로 바꿔내지 못했고, 그래서 평화롭게 물속에 누워 뼈를 달그락거리고 싶다는 염원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물론 퀜틴은 단독자이기 이전에 남부의 장자라는 상징을 짊어지고 있었고, 남부 몰락의 예표이자 종결이기에 다른 선택이 불가능 했을 테고, 동일선상의 비교가 부적절할지 모르나 안타까움은 여전히 남는다.

 

『야생 종려나무』는 대표적인 장편들을 출간한 후, 후기 소설로 옮겨가는 전환축 역할을 하는 작품이라고 연구자들은 설명한다. 이 작품 역시 비선형적 서사, 의식의 흐름, 감각을 일깨우는 상징과 메타포(물 묘사 경연대회가 있었다면...), 흡인력 있는 만연체 문장을 만날 수 있고, 이에 더해 음악의 대위법 형식을 문학에 접목하는 또 하나의 의미 있는 시도를 해낸다. 소리와 색채와 이미지가 풍부하고 극한의 온도까지도 글로 감각하게 만든다. 그 중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 중 하나가 샬럿과 리튼마이어의 재회장면으로, 오듀본 공원 벤치에서 기다리는 윌본의 적극적인 상상으로 진행된다. 마치 눈앞에서 보고 있는 듯 재구성하는 형식이 기억과 상상, 추측의 경계를 지우고 결합시킨다. 자유의지와 사랑, 실존을 향한 투신, 평판과 무관한 가치 실현 등 읽는 일 자체가 맞서고 격돌하는 인물들과 동행하는 경험으로 남는다. 무엇보다 읽기는 어떻게 사람을 나아가게 하는지, 결국 쓰기는 어떻게 구원이 되는지 숙고할 수 있는 작품이며 독자 역시 내 삶의 방향성을 살피기 위해 잠시 멈추어 설 것이다.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그 재주를 잊게 하라.”(시편 137:5)는 구약의 시구처럼 이제 윌본의 오른손은 칼이 아닌 펜을 들고 둘의 영원한 예루살렘을 기억하려 한다. 이제 우리 각자의 예루살렘을 불러낼 차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내려가라, 모세여 ㅣ 서커스 세계문학 시리즈
윌리엄 포크너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6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윌리엄 포크너의 중편소설『곰』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이라면 아이작 매캐슬린이 다시 찾아온 숲에서 ‘할아버지’를 부르는 부분일 것이다. 주인공 소년의 성장과 선택은 울림을 전하지만 한편으로는 늘 미진함이 남았다.『곰』은 연작 장편 『내려가라 모세여』에 속한 작품으로, 하나의 이야기로 완결되어 있으면서도 전체 구성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드디어『내려가라 모세여』를 통해 온전한 형태의『곰』을 읽는다. 한 사람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면 4대에 걸친 한 가문의 연대기로, 남부의 실상으로, 나아가 한 나라의 역사로 확대된다. 구약의 출애굽기 내용을 모티브로 하는 유명한 흑인 영가 “내려가라 모세여(Go Down, Moses)”를 제목으로 삼은 이 소설은 총 일곱 개 단편이 묶였으며 표제작을 가장 마지막에 놓았다.

 

『내려가라 모세여』(조호근 옮김, 서커스, 2026, 504쪽 분량)는 본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세 가지 선물을 마련해둔다. 그 자체로 감동적인, 포크너가 자신의 유모 캐롤라인 바에게 보내는 (유일한) 헌사에서 독자는 잠시, 어쩌면 한참을 멈출지 모른다. 다음으로 윌리엄 포크너를 읽으면서 그려보고 찾아보고 궁금해 했을 매캐슬린 가문 가계도와 아이작 매캐슬린 연표다. 가계도도 그렇지만 연표를 읽으며 과연 어디까지 표기하였을지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동시에 안도감도 준다. 가계도를 쥐고 힘차게 읽을 일만 남았다.

 

『내려가라 모세여』는 3대 걸작으로 꼽히는『소리와 분노』(1929),『팔월의 빛 』(1932), 『압살롬, 압살롬!』(1936) 출간하고 수년이 지난 1942년 작이다. 남북전쟁 이후 남부 귀족 콤슨 가의 몰락을 그렸던 작가는 다시 한 방울의 법칙이 증언하듯 그들만의 기준을 세우고 폭력을 행사하는데 거침없었던 남부의 부조리를 기록했다. 이어 ‘백인의 양심’이라고도 불리는 아이작 매캐슬린을 중심으로 매캐슬린 가문의 불의와 그로 인해 치러온 무고한 희생에 천착한다.

 

첫 작품 <옛 일>은 아이작보다 열여섯 살 연상인 사촌 형 매캐슬린 애드먼드가 훗날 전해줄 에피소드다. 벅과 버디 형제는 관찰자인 소년 매캐슬린과 함께 주기적으로 도망치는 흑인 노예 토미네 털을 데려오기 위해 뒤쫓는다. 개와 여우가 뒤섞인 실내 추격 소동을 작품 전 후반에 배치하고, 흑인 노예를 추격하는 상황을 나란히 보여주는 작가의 의도를 추측케 한다. 한 편의 소동극처럼 유쾌하게 전개하면서도 인권의 개념이라고는 없는 노예제 시대에 카드 시합으로 사람을 취하는 비정한 실상을 비판한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의 관계는 또 다른 단편을 보탤 때 전체 퍼즐이 모양을 갖춰간다.

 

<불씨와 화덕>은 예순 일곱 살 루카스 비첨(루카스 보챔프)이 중심 인물이다. 그는 <옛일>의 토미네 털과 카드 게임에 이겨서 데려올 수 있었던 테니의 아들로 몰리 비첨과 결혼하여 경작지를 일구는 한 편, 금주법 시대에 밀주를 만들며 눈속임을 하고 있다. 에드먼즈 농장에서 소작농으로 지내면서도 매캐슬린의 후손이며 아이작 노인과 동류라고 여긴다. 캐러더스 매캐슬린, 즉 옛 캐스 노인은 아내와 노예, 백인과 흑인에게서 각각 후손을 보았다. 혈연 관계임에도 유지되는 지배 종속 구조를 루카스는 내심 인정하지 않는다. 자신이야말로 아이작과 동류라고, 후에 로스 에드먼즈 역시 루카스를 캐러더스 노인의 후계자이자 원형이라고 본다. 루카스의 회고는 아내 몰리가 어머니를 잃은 아기 로스 에드먼즈를 위해 그들만의 “불씨와 화덕”을 떠나있던 시간을 아로새긴다. 몰리의 헌신은 어린 아이에게 불씨가 되어 주었으나, 루카스에게 그 시간이 회복될 수 있을까. 로스 에드먼즈는 자란 후 금화 찾기에 눈이 먼 루카스의 비이성에 제동을 걸지만, 루카스가 스스로 멈추고 돌이킬 때 비로소 문제는 잦아든다.

 

그가 회심하는 계기는 성경 말씀에 기인한다. 탐욕을 거침없이 행사했던 선조 캐러더스 매캐슬린이 있었고, 한 사람으로 인한 갈등과 고통은 긴 시간을 내려왔다. 모세가 노래하는 시편은 인간 실존의 한계와 덧없음을 겸손하게 수용하는 고백이다. 포크너는 오만한 인간의 역사와 대비되는 현실 인식과 통찰로 <불씨와 화덕>을 맺는다. 몰리 비첨은 작가의 유모를 가장 깊이 반영하고 있는 캐릭터로 인상 깊다.

 

<검은 어릿광대>는 제재소 일꾼들의 우두머리인 24살 라이더가 죽음을 맞은 아내 매니를 묻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소설은 라이더의 움직임을 따라가는데 동일한 말을 반복한다. 전 괜찮아요-이제 그가 괜찮기 때문이었다-그러니 이제 다 괜찮았다-그러나 그것도 괜찮았다는 184~193페이지의 반복은 그가 얼마나 괜찮지 못한지를 역설한다. 그는 백인 버드송이 벌이는 주사위 게임 속임수에는 제동을 건다. 2장은 결론을 보여주고 회상하는 역순행 구조로 ‘깜둥이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야’로 시작하는 문장은 편견은 그대로임을 보여준다. 보안관보가 그의 아내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앞서 독자가 확인한 라이더의 고통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사람들은 실리와 계산속으로 움직이고 가장 편한 방식으로 결론을 손쉽게 단정한다. 한 인간의 죽음이 식후 영화 감상만도 못한 현실을 포크너는 비판한다.

 

<옛 일족>은 열 두 살 소년 아이작 매캐슬린(아이크)이 첫 사냥에 성공하고 일흔 살 샘 파더스로부터 축복 의식을 받던 과거 이야기다. 이 의식을 통해 아이작은 대지에 묻힌 다음에도, 즉 죽음을 초월해서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약속이자 상징을 공유하게 된다. ‘일족들’은 샘 파더스가 자신의 혈족을 설명할 때 부르는 치카소족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그는 소년에게 자신의 선조들과 본인의 출생, 이름에 얽힌 일화를 다섯 가지 항목, 한 페이지 정도 분량으로 요약한다. <포크너 자선 단편집 1>의 3부 “야생”편 소속 단편들에서 구체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역사에 속한다. 아이작과 샘 파더스가 사슴과 만나는 장면은 샘 파더스 사후 아이작이 숲에서 뱀을 만나는 <곰>의 절정 장면의 예표다. 아이작은 사슴과 마주했던 장엄하고 비현실적인 순간을 사촌 형 매캐슬린에게 전하며 불신을 예상하며 초조해한다. 매캐슬린은 이 대지에서 일어난 모든 일들, 삶과 기쁨, 다시 대지로 돌아가는 순환을 이야기한다. 비탄과 고통도 따를 거라면서 고통과 비탄조차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삶보다 더 끔찍한 유일한 것”(p.233)은 유감스러운 “비존재” 뿐이라고 덧붙인다.

 

<곰>은 총 5장으로 1장 첫 단락에서 주요 인물을 소개하며 인상적인 서막을 연다. 같은 피, 미천한 혈통, 더러워지지 않고 타락할 수 없는, 등의 단어가 인간에게만 한정하지 않고 동물에도 적용할 뿐 아니라 점차 확대될 것이다. 아이작은 멘토인 샘으로부터 무서움과 두려움의 차이를 배우고, 포기에 대해서도 판단하고 실천한다. 우선 총을, 이어 시계와 나침반을 포기한 소년은 이후 결정적 포기를 행한다. 소년이 태어나기 전부터 이어져 온 ‘파괴와 잔해를 헤치며 기관차처럼 달려가는 곰’이라는 서술, 황야와 곰에 대한 사유를 중독성 있는 포크너 특유의 문체로 전한다. 부연에 부연을 거듭하면서도 초점을 놓치지 않는 문장을 만난다. 곰의 메타포는 쌓이고 쌓인 끝에 멸망한 트로이의 마지막 왕인 프리아모스에게까지 닿는다. 3장에서 이름까지 얻은 전설적인 곰이 죽음을 맞고, ‘분과 마찬가지로’ 라는 수식을 받았던 라이언이, 그리고 원인을 알 수 없이 쓰러진 샘 파더스도 삶을 마친다.

 

포크너는『곰』을 다른 단편집에 독자적으로 수록할 때는 4장을 삭제하도록 권고했다고 한다. 4장의 공간적 배경은 야생에서 경작지, 그 중에서도 배급소로 바뀌고 스물한 살 아이작과 사촌 형 매캐슬린 에드먼즈가 마주하고 있다. 아이작은 자신의 권리, 상속권을 포기하고 양도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며 이유를 하나하나 밝힌다. 1865년의 일, 즉 남북전쟁 종전과 노예제 폐지를 비웃기라도 하듯 그 ‘일 따위는 개의치 않고’ 차별과 압박의 구조는 계속되는 현재, 둘의 논쟁은 치열하다.

 

4장의 핵심이랄 수 있는 장부 읽기는 희미한 형체와 불완전한 철자법으로 끊어질 듯 이어지는 필체이지만 참담한 증거를 기록한다. 앞서 읽었던 단편의 등장인물들이 다시 찾아오는 느낌이 든다. 소폰시바의 불행 역시 아이작은 해결하지 못한다. 다만 할 수 있는 한 최선의 책임을 지고, 선의를 다할 뿐이다. 노예의 이름을 기록한 장부는 그 사람들이 육신을 입고 나타나는듯 생생한데, 포크너는 호명하고 기록함으로 진실과 그들의 흔적을 기억하고, 기억해야 한다고 요청한다.

 

아이작 매캐슬린은 가문의 장부 기록 위에 성경을 겹쳐 해석하고, 노예제와 남북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덧댄다. 피로 밑줄을 쳐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겠구나, 라는 창조주의 음성을 가정하면서 장부에 새겨진 이름 뿐 아니라 행간과 여백까지 읽어내려 애쓴다. 결국 그의 상속 포기는 애초에 누구의 것도 아니었기에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다는 확인이며 자명한 논리로 수렴한다. 그의 멘토이자 실질적 부성을 상징하는 샘 파더스로부터 배운 덕목이기도 하다. 권리 포기는 다음 세대만큼은 자유롭게 하리라는 소망에 가능성을 열어준다. 가능성이 실현되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옛 일족>에서 인간보다 훨씬 큰 키로 우뚝 선 채 샘을 바라보았던 수사슴 장면을 아이작은 기억해낸다. 6년 전이다. 아이작은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 뱀을 향해 “추장님.” 그리고 “할아버지.”(p.418)라고 부른다. 포크너는 이토록 섬세한 작품의 결말을 분 호건백으로 맺는다. 이성을 잃은 듯한 분의 행동은 사유하지 않는 탐욕과 집착을 보여주는게 아닐까.

 

<삼각주의 가을>은 너무 궁금했던 노년의 아이작 매캐슬린 이야기이다. 칠십이 넘은 아이작 매캐슬린은 예순 번이 넘도록 11월이면 여전히 야생의 자연으로 돌아온다. 이미 너무 많은 것들이 사라지고 변화하고 대체되었음에도 자기 소유의 총을 가지고 삼각주 모양의 구역으로 축소된 숲으로 향하는 일은 계속된다. 무엇보다 야영지를 향하는 차를 운전했던 로스 에드먼즈가 길에서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던 이유가 드러난다. 역자가 도표화한 로스 매캐슬린 가문 가계도에서 제일 밑에 제임스 비첨의 손녀로 ‘딸’이, 그리고 오른쪽 끝에 로스 에드먼즈가 연결된다. 로스의 선택은 캐러더스 매캐슬린 노인의 행동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독자의 기대도 급격히 식는다. 선의는 열매를 맺는지, 역사는 반복하지만 발전하는지, 과거로부터 배우기는 가능한지 경종을 울린다.

 

포크너는 표제작 <내려가라 모세여>를 마지막에 놓으며 마무리한다. <“우리 벤저민을 팔았어요.” 그녀가 말했다. “이집트에 팔았어요.” (...) “로스 에드먼즈가 우리 벤저민을 팔았어요.” (...) “파라오에게 팔아서 이제 그 아이는 죽었어요.”>(p.477) 유사한 문장이 반복되는데 애통하는 마음이고 애도의 서와 다름없다. 성경에서 이집트(에굽)에 팔린 야곱의 아들은 요셉인데 몰리는 벤저민을 팔았다 되뇐다. 요셉의 동생이고 야곱의 사랑하는 막내아들 벤저민이어서 상징적으로 표현했을지도 모르겠다. 게빈 스티븐스의 통찰은 공감과 이해, 존중이 선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아이작 매케슬린이 백인의 양심을 대변한다면 공동체의 아픔을 존중하는 게빈 스티븐스는 새로운 남부인의 희망을 뜻한다는 평가도 공감하게 된다.

 

작가는 매캐슬린의 목소리를 빌어 고통과 비탄조차도 아무것도 없는 것보다는 낫다고 했다. 사과하는 스티븐스에게 워셤 양은 괜찮다며 “비탄은 우리의 몫이기 마련이니.”(p.478)라고 답한다. 작가의 또 다른 소설 <야생 종려나무>는 “비통함과 무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비통함을 선택하겠어.”(p.391)라는 해리 윌본의 생각으로 맺는다. 비통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았으니 기억하겠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아이작 매캐슬린은 과거 매캐슬린 가의 시조인 옛 캐스 노인의 악행이 촉발할 비탄의 시간을 속죄하는 의미로 권리를 포기하였으나 아이작의 노년에 회귀하는 죄성을 목격한다.

 

역자의 말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포크너의 유모 캐롤라인 바 관련 자료다. <소리와 분노>에서 그 복잡한 콤슨 가의 상흔을 네 번째 딜지 섹션에서 그녀의 목소리로 아울렀듯이 몰리 비첨에게서, 또 어린 로스 에드먼즈의 일화에 자전적인 서사와 감정을 입힌다. 이 책은 캐롤라인 바에게 보내는 헌사로 시작해서 비문의 글로 맺는다. 작가가 “한 편의 온전한 장편 소설”로 간주하였던 <내려가라 모세여>는 중·단편 일곱 작품을 오가며 묵직한 주제를 반복하고 변주한다. 주제를 담아내는 형식은 포크너 소설 독자라면 익숙할 것이다. 의식의 흐름이나 감각적 심상의 증폭, 다양한 메타포, 처연할 정도로 짙은 서정성, 행갈이나 최소한의 힌트도 없이 시간을 왕래하며 장면 전환하는 반복, 그리고 마음 깊숙한 곳에서 일어나 자신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느낌이나 기분, 수치심이나 불편함까지 언어화하는 정밀함 등 읽고 또 읽게 하는 문장들이다. 윌리엄 포크너 애독자라면 비로소 읽게 되었다고, 보물 같다고 아낄 책이다. 포크너라는 불씨는 빛도 열기도 스러지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그러다 문득 그는 자신이 왜 땅을 조금도 원한 적이 없는지를, 많은 사람이 진보라고 부르는 것을 왜 수용하지 않는지를, 자신의 수명을 이 땅의 궁극적인 결말에 맞춰 가늠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지금 가진 정도로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두 존재를 -자신과 야생의 자연을- 같은 나이로 여기고, 자신의 삶을 사냥꾼이자 숲사람의 그것으로 간주하며, 자신이 태어나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위 세대로부터 전해져 온 것이라고 기쁘고 겸손하고 환희와 자긍심을 담아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p.44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어느 서민 여성의 삶, 노년, 죽음
디디에 에리봉 지음, 이상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은 “그러니까 나는 핌에 두 번밖에 가지 못할 것이었다.”(p.11)라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논리와 이성, 현재 시점 최선책, 계획과 의지와 전망이 실현되지 못하고 어긋난 후에,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 회고하는 쓸쓸함과 아픔이 배어있다. 이 문장은 변화를 일으키고 다양하게 확대될 수도 있다. 그때가 마지막인 걸 알았다면, 그게 마지막일 줄 몰랐어, 평소와 다를 게 없었는데, 너무 갑작스러워 등의 읊조리는 문장들은 익숙하게 들어왔다. 말한 적도 있었다.

 

『어느 서민 여성의 삶, 죽음, 노년』(이상길 옮김, 문학과지성사, 2025, 366쪽 분량)에서 사회학자이자 철학자인 디디에 에리봉은 서민 여성이었던 어머니의 삶과 죽음을 성찰한다. 어머니와 가족의 이야기는 개인적인 기록으로 출발하여 모두가 직면할 노화와 죽음이라는 공통의 인간 조건을 묻는다. 전작인『랭스로 되돌아가다』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귀향한 저자가 자신이 속했고 벗어났던 노동 계급과 성 정체성을 분석하였다면 이번 저작에서 어머니는 노년에 이른 취약한 인간 일반으로 확대된다. 즉 피할 수 없기에 누구나 맞닥뜨릴 현재 또는 미래 어느 시점을 구체화한다.

 

어머니는 “내 집은 랭스야”라고 강조하지만, 방 하나가 예상보다 일찍 나온 덕분에 핌에 있는 에파드로, 즉 요양 병원 입소가 결정되었다. 연로하고 연약해지면서 집안에서도 넘어지거나 다치고, 연락도 끊기는 상황의 반복은 이성적인 선택만을 남겨두고 있다. 입소 이틀 후 어머니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사람들이 잘 돌봐줄 거라고, “두고 봐요. 괜찮을 거예요.”(p.53)라는 ‘상투어들’을 내뱉었다는 사실에 저자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러나 회복하지 못하실 거라고 말할 수 없지 않느냐는 것 또한 사실이다. 이중의 딜레마에 갇히는 갑갑함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어머니는 평생 불행했다고 저자는 인정한다. 그녀의 생애를 복기하고 그렇게 도달한 현재를 엘리아스, 흐라발, 솔제니친 등 다양한 작품과 견주는 과정이 이어진다. 그중에서도 사르트르가 보여주었던 상호성, 시선의 드라마, 대상화,-시선을 받는 것은 대상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절대로 거기서 빠져나가지 못한다.(p.82)- 즉, “타인은 지옥이다”라는 경구와도 같은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는데, 독자를 서늘하게 사로잡는다. 요양원의 기존 거주자는 새 입소자에게 무엇이 기다리는지에 대한 이미지를 제시함으로 곧 다가올 미래의 힌트가 된다. 되는대로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던 어머니는 호소하고 격분하는 짧은 단계를 거쳐 슬라이딩 증후군으로 살아있음에서 미끄러진다. 저자는 어떻게 그녀 주위의 것들이 닫히고 막혀갔을지, 제도와 관리 방식이 어떻게 그녀를 학대하였는지 고프먼이 ‘총체적 기관’이라고 불렀던 의미를 어떻게 충족하는지, 그 부도덕성을 언급하고 밝히고자 한다.

 

저자는 아들이긴 했지만 나쁜 아들이었고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자 더 이상 아들이 아님에, 가족으로부터 가능한 한 멀리 탈주함으로 아들 역할 또한 축소하고자 의도했음에도 죄책감을 느낀다. 그는 최소한 사회학적이고 이론적인 분석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그러면서 “어머니를 계속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그녀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p.183)고 쓴다. 사라져가는 어머니의 흔적을 아쉬워하며 복기하기 위한 여정은 공감을 부른다. 태어났던 그녀, 버림받았던 그녀, 일하고 결혼하고 불행하고, 또 일하고 열기와 분진과 소음 속에서 다시 일하다 요양원이 기다리는 삶이란. 저자는 그런 일생을 산 서민 여성인 어머니와 그녀의 아들인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한다. 기록한다.

 

결말에서 저자는 노년, 취약함, 죽음 등에 관한 사회적 고찰을 심화한다. 신체적 자율성 상실과 ‘우리’라고 말할 가능성의 상실, 공적인 말에 가 닿을 경로의 상실에 대해 지적한다. 그들을 보이게 하고, 그들에게 목소리를 준다는 과제를 독자와 백세시대인 지금 우리에게 드러낸다.『어느 서민 여성의 삶, 죽음, 노년』은 자전적 글이 갖는 생생함이 감정을 내내 두드린다. 개인으로써 감당하고 있는 현실과 다양한 저서를 인용하여 실제와 연결하며 교차 서술하는 구성은 누군가의 이야기를 독자 자신에게 대입하게 한다. 한 템포씩 멈추며 숙고하게 만든다. 사항마다 묻고 답하는 동안에 공감하는 지점은 늘어간다. 공감하기 때문에 위험하거나 불안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아무도 피해 갈 수 없는 쇠락과 죽음을, 그 끝에 도달할 공간과 시간을 가늠케 해주는 책이다. 그뿐 아니라 문장은 얼마나 아름답고 견고한지! 어떤 부분은 절절한 사모곡이다. “물론 G를 위하여”라는 헌사를 다시 읽는다. 본문에서 한 번도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던 어머니일까. 아마도 절대 잃어버리지 않을 누군가가, 우리 각자의 G가 새롭게 그 자리를 채울 것 같다.

 

 



 책 속에서>


어머니를 계속 살아 있도록 하기 위해서 나는 그녀에 관해 말해야만 한다.(p.183)

 


이젠 내가 지금과 같은 사람이 된 것이 ‘그녀였는데도’인 동시에 ‘그녀 덕분에’라는 점을 잘안다. 내 정신 속에서는 ‘그녀였는데도’ 가 ‘그녀 덕분에’를 오랫동안 능가해 왔다. 물론 오래전부터 내 이기심과 배은망덕이 부끄럽다. 이기심과 배은망덕이 어머니에게 가져다준 고통 때문에 고통스럽다. 하지만『내 어머니의 책』의 알베르 코엔이라면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죄책감은 “조금 늦었다”라고.(p.255)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성역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8
윌리엄 포크너 지음, 이진준 옮김 / 민음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역』의 어두운 분위기는 긴장을 고조시킨다. 악 자체처럼 보이는 포파이, 문제를 일으키고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인물 가우언, 폭력의 대상이자 자기 보호와 합리화를 위해 타협하는 여대생 템플 드레이크, 정의 실현을 목표로 행동하고 싸워나가지만 공고한 벽에 막혀 무력하게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변호사 호러스 벤보, 템플과는 다른 계층의 여성 루비 라마, 루비의 실질적 남편이자 토미 살해의 누명을 쓰고 투옥된 구드윈 등 책 속 인물들은 갈등 상황에 반복해서 빠져들고 헤어 나오기 위해 애쓴다.

 

『성역』(이진준 옮김, 민음사, 2007, 440쪽 분량)은 1931년 출간 당시 작가 윌리엄 포크너에게 논란과 동시에 인기와 부를 안겨준 작품이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산업화로 인한 비인간화와 가치관의 혼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함께 거론되기도 한다. <성역> 출간 다음 해에는 <팔월의 빛>이 세상에 나오는데, 박계영의 논문에 따르면 단편 <매마른 9월>까지, 백인 여성의 강간과 강간범의 린칭 주제를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역』의 공간적 배경은 특히 소설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알콜 중독인 남자 친구 가우언이 자동차 사고를 내고 템플과 같이 밀주업자 구드윈의 저택에 머물게 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수풀로 둘러싸인 샘에서 과거 대농가였으나 폐허가 된 집으로 장소가 이동한다. 포크너 단편 <스러지지 않으리> 등에서 나왔던 프렌치맨스 밴드가 작가가 창조한 가상공간 요크나파토파 중에서 가난한 시골 농촌마을을 뜻한다면 <성역>의 올드프렌치맨 지역은 그 중에서도 몰락한 대농장과 폐허가 된 저택으로 영역을 한정한다. 폐허 저택에는 온전치 못한 사람들,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이들이 금주법 시행 중 법망을 피해 은밀하게 밀주를 만들고 판매한다. 제퍼슨의 판사라는 고위층의 자녀 템플은 있어야 할 곳인 대학 또는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아버지에게 이를 거예요!”(p.112)를 외칠 뿐이다.

 

포파이는 템플을 멤피스의 매음굴로 데려가고 그녀는 더욱 피폐해진다. 그녀는 저택에서도 멤피스에서도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템플의 탈출은 탈주 대신 되돌아오는 게 목표인 듯 거듭 회귀하는 코스를 반복한다. 포파이 대신 토미 살해 용의자로 몰린 구드윈은 진범 포파이에 대한 증언을 거부한다. 한마디라도 한다면 그걸로 끝장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데, 두려움에서 파생한 신념이 분명하다. 템플은 거짓 증언으로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녀가 찾은 자리가 이미 의미라고는 상실한 공허가 아닐까 묻는다. 구드윈은 벤보의 신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벤보의 여동생 나르시사는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이 일에서 손을 뗄 것을 그에게 계속 요구했다. 구설에 오르내리는 일을 피하고 거리를 두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 루비 라마와 아기가 자기 부모님의 집이자 유년의 공간, 즉 ‘성역’에 머무는 것을 격렬히 반대한다.

 

소설의 제목인 “성역(聖域/Sanctuary)”은 사전적으로 ‘신성한 지역’, 또는 ‘불가침 지역’을 뜻한다. 역자는 소설의 첫 문장인 “샘을 병풍처럼 둘러싼 수풀 뒤에서 포파이는 그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p.7)의 ‘샘’이 ‘성역’을 상징하며, 그것이 침해되는 것은 성역시 되어왔던 ‘기존의 가치와 질서가 파괴되는 것’(p.427)을 암시한다고 쓴다.  성역은 상대적인 의미를 지닐 수도 있겠다.  템플이 들어가게 되었던 폐허 저택도 그들만의 성역일 수 있고,  이때 템플은 루비가 강조했듯 침입자 위치에 놓인다.  멤피스의 미스 레바의 집, 구드윈이 포파이를 피해 머물고자 했던 감옥,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법정이 성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역을 그 기능을 변조하고 비웃는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그런 인간은 재판도 하지 않아.”(p.388)라고 말했던 군중은 나름의 성역의 기준대로 사적 정의를 실현시킨다.

 

소설은 마지막 장에 포파이의 탄생과 죽음을 배치한다. 지금까지의 혼란과 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의 삶의 굴곡과 상흔이 어떤 방식으로 그를 이끌었는지 에필로그처럼 보탠다. 그럼으로 악은 태어나는 것인가 결핍과 트라우마로 획득되는 것인가 묻는다. 포파이의 반대편에 “사람이란 어떤 일을 할 때면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것을 하는 것이 사물의 조화에 필요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p.364)고 했던 벤보가 비록 지금은 실패하였지만 작은 희망처럼 존재한다.  그는 <팔월의 빛>의 바이런 번치,  단편 <머리카락>의 호크쇼 계열의 캐릭터로 미약할지라도 불의를 바로잡고자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물론 그에게 호의적인 조력자는 찾기 어렵다.

 

소설은 3인칭 전지적 시점에 가까우나 포크너 소설이 으레 그렇듯 드러내고 전달하기보다 감추고 미완인 채로 둔다. 템플이 벤보에게 들려주는 사건의 전말은 대체할 수 없는 진실 같았다가 순진하고 비개인적인 허영심에 찬 경험의 재구성이라는 지적에 독자는 멈칫한다. 템플의 회상은 심지어 자아도취적인 면도 합세하여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다. 어쩌면 자기합리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멤피스 미스 레바의 집에서 “그녀는 10시 30분을 생각했다”고 반복 서술하는 템플의 성찰은 인상 깊다. 동일한 시간대이지만 며칠 사이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건 이후 10시 30분은 더 이상 이전의 10시 30분이 아니다. 회복할 수 없는 상실로 완전하게 갈리는 카이로스의 순간이 되어버린다.  시간과 소음의 비유나 다양한 수사는 사건의 진행 틈새에 멈추고 생각할 시간을 들인다.

 

소설은 독자의 몫으로 여러 의문을 남겨둔다.  책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추측하는 일도 독자의 몫이다.  남부의 작가 포크너는 <성역>에서 1920년대 미국 남부 상류 사회의 부도덕과 속물근성을 비판한다.  맹목적인 군중 심리, 익명의 목소리가 진실을 가리고 왜곡시키는 현장도 고발한다.  진 스타인과 진행한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그의 소설이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는 작품이라는 평에 대하여 포크너는 답한다.  폭력은 단지 목수의 연장 중 하나와 마찬가지이며, 목수가 한 가지 연장으로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작가도 한 가지 연장으론 글을 지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성역>은 가독성은 좋으나 어둡고 불편한 작품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불편하지만 필요한 작품임은 물론이다.  현대의 독자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보내고 있는 <성역>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다.

 



책 속에서>


“글쎄, 그들이 날 유죄로 만들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든 말든 난 법정에서 승산이 있어요. 하지만 그자가 그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는 말을 내가 했다는 게 멤피스에 퍼졌다가는 내가 증언을 한 이후 이 감옥으로 다시 돌아올 가망이 있을 것 같아요?”

“당신에겐 법, 정의, 문명이라는 게 있어요.”(p.174)

 

 

그는 언젠가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을 말하기 시작했다.

“평화는 드물어라. 평화는 드물어라.”(p.3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포크너 자선 단편집 2 ㅣ 포크너 자선 단편집 2
윌리엄 포크너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윌리엄 포크너의『포크너 자선 단편집 2』(조호근 옮김, 서커스, 2025, 704쪽 분량)는 1권에 이어 <황무지>, <중간 지대>, <저 너머>에 속하는 스물 네 작품을 담았다. 작품 해제에 실린 “제발 누군가에게 바가지를 씌워「황금의 땅」을 1천에 팔아줬으면 하네. 그러면 다시 머릿속 냄비를 휘젓지 않고 장편에 매진할 수 있는 두 달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p.11)라는 인용문을 읽으며 포크너가 머릿속 냄비를 휘저어 풍성한 단편 또한 창작해서 독자에게는 얼마나 행운인가 싶었다.

 

<황무지>는 1차 세계대전 말과 직후를 배경으로 하는 전쟁 단편들로 채워진다. 라틴어로 “별을 향해”라는 의미인 “아드 아스트라(Ad Astra)”는 전쟁의 명분이 무엇이었건 시간이 지날수록 별에 비유되는 이상과는 멀어지는 실상을 그린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묘사는 절망의 골이 깊어지고 번민과 자괴감에 빠져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승리>는 전쟁이 종교와 전통을 귀히 여기며 살아가던 한 가족의 구성원을 어떻게 비인간화시키고 나락으로 떨어뜨렸는가에 대하여 감정을 배제한 채 르포르타주처럼 서술하는 작품이다. 마치 한 편의 고발문학 같다. 결말의 그레이와 워클리가 만나는 장면은 필름이 돌아가는 듯 시각적이고 잔상이 길다.

 

전쟁을 주제로 하는 포크너의 단편들은 약 백여 년 후인 현재의 정황과도 닿아 있다. <세상을 떠난 모든 파일럿들에게>가 과연 1권에 묶인 <스러지지 않으리>라는 제목에 조응할 수 있을지, 답은 부정적이다. <스러지지 않으리> 또한 이미 스러진 이들을 향한 반어적 의미를 내포할 뿐 아니라 회상하고 이야기함으로 소멸에 저항한다. 시대에 떠밀려 스러지는 생명, 특히 젊음, 부스러지는 꿈을 사진 한 장으로 기억해낸다. 스냅 사진으로 추억하는 사람들의 사라져버린 시간이 아스라하다. 그들이 빼앗긴 열정과 일상에 대하여 작가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물으며 기록한다. 속절없이 사라져갈 기억일지라도 붙든다.

 

포크너가 결정하는 제목은 물론 함축적이지만 때로는 역설적이고 자조 섞인 비판도 담는다. 본의 아니게 또는 기꺼이, 선택의 여지없이 전쟁에 뛰어든 이들을 기록하며 ‘용기’를 새롭게 정의 내린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용기를 품은 인간 따위는 없으며, 그저 도로에 뚜껑이 열린 맨홀에 빠지듯이 눈먼 채 용맹 속으로 뛰어들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p.78) “그게 전부다. 그걸로 끝이다. 용기든 무모함이든 원하는 대로 불러도 좋은 그것은 그저 찰나를 밝히는 불꽃일 뿐, 탁! 소리와 함께 꺼지면서 원래의 어둠이 돌아온다.”(p.192)라고.

 

<중간 지대>에는 결이 다른 작품들이 포진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인간 내면의 갈등’을 다루어야 한다고 했던 포크너는 모든 작품에서 이 주제를 놓치지 않지만 특별히 더 인상 깊은 작품을 모아놓는다. 문을 여는 단편 <와시>는 <압살롬, 압살롬!>의 와시(워시) 존스 에피소드 결말부를 통해 단편으로 먼저 구상되었음을 알게 한다. 서트펜 가의 흑인 노예들에게도 멸시 당하던 와시는 위상이랄 게 없다. 백인 빈민(poor white trash)의 소외를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의 비극을 집중적으로 숙고하고 2년 후에 3대 장편 소설 중 하나인 <압살롬, 압살롬!>에 적확하게 안착시킨다.

 

<마티노 박사>는 미스테리 같다가 심리 스릴러처럼 전환하는 작품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삼월 토끼 모티프도 인상 깊고, 황동으로 힘이나 진실이 퇴색하는 비유는 1권에 실린 <황동 켄타우로스>를 연상케 한다. 마티노 박사는 중반 이후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강렬한 주인공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며 심리학에서의 ‘조종’을 긴밀하게 연결한 모퉁이를 따라가며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총명했을 젊은이들의 무기력한 자멸은 안타까우면서도 으스스하다. <브로치>에서 장악하기의 또 다른 예, 또 다른 폐해를 볼 수 있다. 관계와 심적 갈등을 예민하게 응시하고 꼭 필요한 장면을 반복, 배치하여 결말까지 치닫는 속도와 힘이 대단하다. 세 인물 중 어떻게 연결한 두 사람도 평안이라고는 없는 투쟁 관계가 마치 그리스 고전 비극을 읽는 것만 같다.

 

언급했듯이 포크너 단편을 읽을 때, 제목을 놓치지 않고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한다.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지점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경우도 있다. <황금의 땅>의 결말부는 글렌데일에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할애한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계속해서 꿈 꿔 왔지만 불가능함을 깨닫고 낙담한다. ‘영원히 살게 될 거야’ 라는 말이 이미 생명을 잃었다는 말과 동일시되면서 그녀가 물기를 흡수할 수 없는 황금의 땅에 이식된 식물처럼 시들어 가리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인종 간 갈등을 주목하고 드러내온 작가는 인간관계에서 작동하는 힘의 논리, 그로 인한 폭력성과 잔인함도 놓치지 않는다.

 

<우리 밀라드 할머니와 베드포드 포레스트 장군과 해리킨 크릭 전투>는 작정하고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라고 작가가 앞서 나가는 글이다. ‘그 일’은 대체 무엇인가, 독자는 추측과 추론, 추격을 시작한다. <불타오르는 헛간>의 소년 화자의 아버지 앱 스놉스는 여전히 비열한 행동을 하며 사위 존 사토리스의 농장을 지키고 있는 화자의 할머니 로자 밀라드와 대치국면이다. 길고도 짐작하기 어려운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은 후반으로 접어들면 서서히 전말이 드러난다. 전쟁 서사를 너무 낭만적인 에피소드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장편 <소리와 분노>가 남부 명문가였던 콤슨 가의 가세가 기울고 몰락해가는 과정과 사회 분위기를 기록했다면 단편 <여왕이 있었네>는 사토리스 가문의 몰락으로 남북전쟁 후 남부 귀족의 명멸을 전한다. ‘여왕이 있었다’는 과거형은 노부인이 가문의 역사로 편입되는 종결과 닿는다.

 

6장 <저 너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더 자주 침범한다. 소제목과 동일한 <저 너머>는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작품으로 사별을 통해서 그리고 사별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말이나, 지성으로 가능하고 육신이 갈망하는 불멸성이란 결국 죽음이라는 통찰이 작가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 같다. 각주에서는 이 작품이 포크너의 실제 삶과 명확한 연관을 지닌 드문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도입부와 결말부 사이(임종과 입관 사이)에 사후의 여정을 끼워 넣은 형식도 눈여겨보게 되면서 유려한 문장과 상상을 자극하는 전개가 이 또한 영화를 보는 것 같다. 환상적 요소와 씁쓸한 현실이 뒤섞이는 <검은 음악>, 유쾌와 낙관에서 스산함으로 변해가는 까다로운 작품 <다리>, 지역의 특징적 바람, 자연이 배경이 아닌 전면에 부각하는 듯한 단편 <미스트랄>을 비롯하여 마지막 작품 <카르카손>은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고조시킨다. 여러 고전을 인용해 죽음을 관조하고 응시하는데 문장은 여전히 탁월하게 아름답다.

 

몇 작품만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무엇보다 포크너가 직접 선별한 단편을 읽는다는 데 의미가 있다. 때로 작가의 의도에 닿지 못하는 모호함과 답답함을 느끼면서, 때로는 정곡을 찌르는 스토리텔링에 감탄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그의 작품은 책장이 일방향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무던히 거슬러 올라가 다시 읽기를 시작하고 서두와 종결을 나란히 보기도 하였다. 캐릭터를 한 번에 설명하지 않고 세부를 하나씩 추가하는 서술 방식이 독자를 분주하게 만들기에 때론 이렇게까지 힘들게 읽을 이야기인가 소심하게 투덜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포크너식 위트, 호러부터 유머까지 멈추지 않는 질주는 근사하다.

 

숭학당에서 함께 읽기를 진행하면서 1권의 토론 작품은 <에밀리를 위한 장미 한 송이>로 비교적 쉽게 결정하였다. 2권에서 한 작품을 선택하는 일은 꽤 어려웠다. 함께 치열하게 읽어낸 작품을 논제와 토론으로 재정리하고 싶은 단편이 그만큼 많았다. 결국 <브로치>로 정했는데 와시, 펜실베니아 역, 자택의 예술가, 마티노 박사, 황금의 땅, 산골의 승리 등 결정을 미루며 갈등을 계속 하였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작품들도 나눠볼 수 있기를 바란다. 독자는 회복이 불가능한 절망,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설마가 사실이 되는 비정함 앞에서 안타까움에 ‘만일 ~했더라면 달라졌을까’를 거듭 되뇌며 인간 조건과 생의 비밀을 응시한다.

 

포크너가 벼려내 놓은 잊을 수 없는 문장,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적인 문장, 때론 의미와 상징으로 꽉 찬 밀도 높은 문장,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리듬감 넘치는 문장, 연극적 문장, 호소하는 문장, 침묵으로 메아리치는 문장, 속이는 듯한 문장, 따돌리는 문장까지 그 모든 포크너의 문장을 비록 번역본으로 읽는 독자이지만 사랑한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불멸은 언제나 살아 움직여서 불멸인 어떤 것을 뒤에 남겨놓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항상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던 포크너. 그의 말대로 그의 문장은 항상 움직일 테고, 소리낼 것이다. 가독성 좋은 포크너, 포크너 입문서가 필요한 독자에게 우선 <포크너 자선 단편집>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친구란 있으면 좋은 존재다. 밤에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서 대화를 나눌 때는 말이다. 하지만 그 지점을 넘어서면, 네 결점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너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온갖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사람을 견뎌내려면 그를 깊이 사랑해야 한다.”(p.79)

 

그래서 이 이야기는 복합적이다. 즉각적이고 깊이나 균형감 따위는 없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무엇을 겪고 변화할지에 대한 전조이자 위협을 슬쩍 내비치는, 어둠과 어둠 사이에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번개처럼 짤막하게 이어지는 일련의 인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