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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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등 독서 교실에서 학생들과 만나는 첫 시간, 진진진가 게임으로 자기소개를 하곤 했다. 네 개의 문장에서 하나의 거짓을 찾아내기 위하여 아이들은 귀를 기울이고 나름대로 가늠해 본다. 불쑥 호기심을 드러내는 경우도, 지루함을 내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세 개의 옳은 문장과 하나의 틀린 문장은 거울처럼 가장 먼저 자신을 비춘다. 나를 반추하는 짧은 시간 후 가볍고 재미있게, 어색함을 녹이며 넘어가는 활동이었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서 다섯 개의 문장은 부유하다 사라지지 않는다. 각각의 문장이 지금까지의 시간을 요약하고 나의 상징물을 만들어낸다. 명확하고 단순하게 정렬한 문장에 소설은 노크한다. 명백한 진실 안에 어떤 거짓이 침묵할 수 있는지, 거짓 안에 어떤 갈망이 웅크리게 되는지, 애초에 규칙을 위반하고 약속을 흩트리는 일은 없는지 살핀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 2024, 240면 분량)은 김애란의 두 번째 장편 소설로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 13년 만에 출간되었다. 23년 전 데뷔하는 순간부터 주목받으며 젊은 거장이라 불려온 작가는 네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 소설과 산문집에 더해 또 하나의 선물을 독자에게 전한다. “빛과 거짓말 그리고 그림에 관한 이야기라고 언급했던 소설은 생각보다 가뿐한 분량으로, 그러나 기대 이상 묵직한 화두로 독자 손에 들린다. 후기에서 작가는 <바깥은 여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의 남은 삶을 응원하는데 그 응원은 인물을 넘어 독자에게 뻗어온다. 삶은 가차 없을지언정 우리 모두 마지막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머물다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인공인 지우, 소리, 채운이 차례로 등장한다. 지우의 첫 장면은 선호 아저씨를 기다리는 파출소다. 소리는 전입생 채운이 자기 소개하던 교실에서, 채운은 현재 머무는 사촌 동생의 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은 잠시고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난다는 지우는 그림 그리기라는 할 일을 자신에게 준다. 엄마 지연이 해주던 이야기를 재생하면서. 지우는 도마뱀 용식이가 자라는 과정을 그려서 카페에 올린다. 제법 반응이 좋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연히 이를 보게 된 채운은 신경이 쓰인다. 채운은 사건이 일어난 그날 이후 이모 집에서 지내고 있다.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 둔 채운은 영어 공부 앱에 따라 문장을 만들면서 자신의 마음을 기록한다. 자기 대신 교도소에 있는 엄마와 깨어날까 두려운 아버지, 불확실한 내일을 생각할 때 마음을 의지할 대상은 반려견 뭉치 뿐이다. 독립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지우는 도마뱀 용식을 소리에게 맡긴다. 소리도 입시 미술을 준비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은 그 손이 다른 걸 감지하는 특별한 손이 되었다. 특별함이 빠져나갈 때까지 소리는 만나고 떠나보내고, 다시 진실의 모양을 가진 오해를 바로잡는 순간을 맞는다.

 

소설은 고등학교 2학년인 세 아이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방학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지우, 채운, 소리가 번갈아 등장하고, 현재와 과거를 왕래하며 사건과 감정을 서술한다. 막이 빠르게 바뀌는 연극을 보는 듯도 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어른은 아이들에게 길잡이나 바람막이 역할보다는 길에 서서 위협할 뿐 아니라 길을 막고, 벼랑 끝에 세우는 역할을 한다. 또 다른 어른 역시 아이 곁에서 함께 고통받을 뿐 방어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결국 채운의 엄마 태선은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된다’(p.180)며 지금 이대로가 서로를 구해준 거라고 현실을 선택한다.

 

아이들이 처한 현실은 감당하기 수월하지 않아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소설은 이야기 안에 두 번째 이야기를 품은 겹 구조로 만화(지우)나 영어 문장(채운), 회상과 고백(소리)으로 삽입된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이야기란 무엇이고 어떤 쓸모를 가지는지 거듭 변주하며 주제를 견인한다. 이야기의 원형은 처음에 지연이 어린 지우에게 읽어주던 옛이야기에서 빛이 새어나왔습니다”(p.11)라는 구절의 빛과도 같은 숭고함이나 완전함을 간직한다. 소설은 이 빛을 빼앗겼다가 서서히 회복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엄마(지연)를 잃은 지우는 이야기를 지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만화를 그리는 지우에게 이야기는 끝이 있어서가 중요한 이유고 소리는 늘 시작되기 때문’(p.66)이라고 다른 미덕을 꼽는다. 끝이 없는 이야기의 암담함과 시작조차 안 되는 이야기의 허무 중에서 두 아이는 마음을 잡지 못한다. 그래도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라고, 그 안에 갇힌 듯한 채운을 향해 소리는 손을 내민다. 둘 만의 비밀을 간직하고서.

 

겹구조는 다시 한 번 층을 만든다.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고, 만화의 마지막 화가 올라오면서 작은 빛이 드리운다. 스스로를 속이고 회피했던 내 안의 진실을 인정하는 일도 필요했다. 감춰두었던 마음을 아프게 고백할 때 그에 대한 답신처럼 빛은 하늘에서조차 신호를 보낸다. “그 빛은 마치 옛 화가들이 누군가의 눈동자에 빛을 새겨넣을 때 붓 끝에 묻힌 아주 적은 양의 흰 물감 같았다. 소량이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p.196) 그렇게 조금씩 조명 받으며 아이들은 걸어 나가고 자라 나가게 될 것 같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기 위한 최소한의 예로 서둘러 <달려라, 아비><바깥은 여름>을 읽었다. 여름이 끝나면서 읽던 소설이 가을 초입 새로운 작품으로 멋진 매듭을 지은듯하다. 청소년 성장 소설 같은 인상이 강하지만 부모 세대의 해결하지 못한 상처도 진지하게 다루고 있어 공감의 폭은 확대된다. 책을 덮으며 회전무대 팝업 북을 떠올린다. 좋아하는 팝업 북에 회전무대까지 장착되어 기쁨을 배가시켜서 아끼지만, 삶은 신비로운 오르골 소리를 배경음 삼지 않는다. 무대가 돌아갈 때 빈정거리고 비웃는 말들, 속이고 타협하는 말들, 학교나 가정이라는 공간을 조금씩 무너뜨리는 일상의 공격이 어느 순간 재현될까 조마조마했다.

 

간결하게 농축하는 작가의 문장은 소설 속 시간과 공간으로 단번에 끌어들인다. 그들의 마음이 전이되어 함께 아슬아슬하고 같이 괴롭다. 그래도 결말 이후에 계속될 이야기는 독자 마음에 말줄임표로 찍히는데 점들은 어두움 보다는 빛으로 기운다. 살아있는 만큼 남아있는 과제를 직면해갈 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 것만 같다. 규칙에 따라, 규칙에 반하여 발설된 문장들이 이야기가 되었고, 마치 게임처럼 다른 문장, 다른 마음에 닿기 위해 바통을 들고 달렸다. “게다가 어떤 이야기는 한 번에 몰아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p.228)는 말처럼 숨 고르게 하는 작품, 때로 벅차서 한 번에 몰아읽기 어려운 이 소설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그냥······이야기가 좋아서?

순간 소리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이······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난 반댄데.

-뭐가?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그런가?

-.(p.66~67)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언제인가?’

소리가 슬픈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

그런데 채운은 지금 무서운 이야기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라고, 거기서 잘 빠져나오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곧 채운과 만날 예정이었고, 그건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뜻이었다.(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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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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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추스르다라는 낱말을 찾아본다. 몸을 가누어 움직이거나, 물건을 추어올려 잘 다루거나, 산만한 정신이나 마음 따위를 바로잡아 안정시키는 걸 말한다. 한 가지 더, 일을 수습하여 처리하는 것도 뜻한다. 바깥은 여름의 인물들은 추스르는 일이 만만하지 않은 상태에 직면한다. 몸이나 물건 따위, 마음이나 일도 왜 추슬러야 하나, 꼭 그래야 하나 아득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가능할지 방법을 알지 못한다. 밖은 여름이어도 그들이 서있는 공간은 계절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자연법칙을 어긴 채 얼음 어는 성이 된다. 녹지 않는 얼음성이다.

 

김애란의 단편소설집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 272면 분량)은 온기나 발광채, 유일한 해를 잃어버린 서늘함을 체감케 한다. 바깥은 자신의 외부이기에 그곳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외면하거나 상상하거나 잊기를 결심할 수 있으나 훼손 이전으로 회복하지 못한 채 타자로 남고 만다. 겪어낸 시간은 저만치 뚝 떨어진 과거에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 같은 현재가 된다.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그렇게 있는듯하다.

 

<입동>에서 아이를 잃은 부부는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p.21)이 보인다. 애써 마련한 우리집에서 안도와 감사의 시간은 찰나고 고통의 시간은 무한에 이른다. 내부에서 고통은 모든 것인 사랑의 상실로, 외부에서는 판단하고 돌을 던지는 차가운 손에 의해 이중으로 옥죄어 온다. <노찬성과 에반>에서 열 살 찬성은 사고로 아버지를 잃는다. 동생같이 아끼던 유기견 에반이 아프면서 모든 게 그대로인데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을, 떠나보낼 결심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인 용서를 혼자 감당한다. <건너편>의 도화는 연인 이수와 얼추 개수명과 비슷한 십 년을 함께했지만 역시 떠나보낼 결심을 내린다. 그녀에게는 신뢰하는 말이 있어서, 왜곡 없는 문장을 구성할 수 있어서 다행이랄 수 있을까.

 

<침묵이 미래>는 역대 최연소 수상으로 화제를 모은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이고 말()이며 침묵의 무게는 정체성 난해한 정체인 로 의인화하여 마지막 화자를 설명한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존하는 소수언어박물관이 마지막 화자들의 거처다. ‘쩌렁쩌렁한 모어 한복판에’(p.127) 버려진 그들은 눈물날 것 같이 친근한 모국어를 그리워하지만 마지막 화자이기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저 소통할 대상이 없기에 있어도 소용없는 말들의 소용돌이에 갇힌 형국이다. 나의 순례는 끝이 없고 막막하다. 첫 번째 이름 오해에서 필요에 의해 이해로 변화하나 점점 거대해져 죽음을 맞는 허무 또는 장관은 생명의 순환과 견주게 된다.

 

<풍경의 쓸모>에 나오는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p.182)라는 문장에서 책의 제목을 만난다. 다른 궤도에 존재하는 시공간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엇갈려 있기에 스치거나 만날 수 없겠고 풍경은 과거에 촬영된 화면으로 미래 어느 시점에야 확인된다. 정우는 프로부모의 역할에 충실했던 어머니를 보았다. ‘프로강사에 가까워지던 자신, 그러나 프로성인이 된 후에도 거짓 서명에는 프로일 수가 없다. ‘프로되기의 자명함과 어려움을 인생이 내게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받아들여야 할 때, 시간에 무기력하게 등 떠밀리며 눈감는다.

 

개수대 앞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본다.”(p.187)는 문장으로 <가리는 손>은 시작된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아이, 분신과도 같은 아이이기에 내 안의 역사를 통해 바라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 전해오는 이미지는 어긋나 있고 동의할 수 없지만 어떤 괴리, 어쩌면 배반은 갑작스럽게 포착되고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는 그의 부재에 마냥 아프다. 특히 상대에게 닿지 못하는 일상의 말은 입가에서 주저하고, 잔소리와 농담, 둘만의 언어가 갈피잡지 못한 채 공간에 부유할 때 그렇다. 새로운 소통의 시도는 고통이라는 감각을 예민하게 할 뿐이었는데 그의 선택을 복기하게 한 편지는 처음으로 다른 생각을 시작하도록 만든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펴기 전 두 번째 과제로 <바깥은 여름>을 마쳤다. 일곱 개 단편을 읽으며 무엇이 가장 좋았다고 헤아릴 수 없다. 일곱 개의 세계가 밀도 높게 펼쳐지고 그 안에 초대되었다가 나오는 일은 심해를 잠수하고 떠오르는 듯 다른 압력, 다른 세기에 적응하도록 한다. 활자를 통해 바닷물에 섞이지 않는 눈물을 구별하고 눈빛을 읽는 일이 반복된다. 출간된 지 칠 년이 지난 작품 속 인물들에게 인사 건네고 싶다. 노찬성은 열 아홉이 되었겠네, 잘 지내고 있나요 안부를 묻는다.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찌르는 문장이 뒤따르고 뒤따르니 넋 놓고 읽을 뿐이다. 작가는 매끄럽게 질주하면서도 필요한 만큼의 감정을 정확하게 곁들인다. 덧대거나 치장하는 법이 없다. 과도하거나 미흡하거나 어색한 순간을 만나지 못한다. 독자는 감정의 파고를 차분하게 견디는 인물에게 이입하고 안타까워하고 태도를 배우며 결국 안녕을 기도하게 된다. 이름들을 기원의 목록처럼 지니게 만든다. 데뷔작인 <달려라, 아비>의 재기발랄한 유쾌함, 불굴의 희망바람, 위트와 다정함은 <바깥은 여름>에서 더 깊이 있고 진지하게 직시하는 법을 보여준다.

 

화자는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라고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p.200) 드는 반발심을 설명한다. 말의 홍수 시대를 사는 현재에 보내는 경고와도 같다. 역지사지라고는 없고 품이 드는 이해보다 오해를 방치하는 경우도 흔한 나날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말의 여러 가지 면모는 페이지를 넘겨보며 연결 짓게 하거나 한동안 숙고하게 만든다. 여름 끝에 읽은 <바깥은 여름>이 늦었지만 다행이다. 어쩔 수 없이 걸리고 만 여름 감기가 뒤꿈치를 들어 올린 만큼 마음의 키를 키워줄 작품을 추천한다. 이제 <이중 하나는 거짓말> 차례다.

 



 책 속에서>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하며 간질거리던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대형 화물 트럭 몇 대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찬성 옆을 사납게 지나갔다.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p,81, 노찬성과 에반)

 

어느 부족의 시제에는 전생과 환생이 들어간다. 그런 건 누가 정하고, 어떻게 설득하는지 다른 부족은 조금도 가늠 못한다. 어느 나라 동사는 백오십 번 이상 몸을 바꾼다. 그것은 프리즘에 닿은 빛처럼 여러 갈래로 꺽이며 굴절된다. 단어가 소리에 반사돼 정신에 무지개를 비춘다. 어느 민족에게 사랑은 접속사, 그 이웃에게는 조사다. 하지만 또다른 부족의 경우 그런 건 본디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하여 아무런 명찰도 달아주지 않는다. 어떤 민족에게 보고 싶다는 한 음절로 족하다. 하지만 다른 부족에게 그 말은 열 문장 이상으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다. 어느 추운 지방에서는 몇몇 입김 모양도 단어 노릇을 한다.(p.138, 침묵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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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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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읽었던 책의 제목은 <생의 한가운데>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는 <삶의 한가운데>는 어제 읽은 듯이 생생하고 외우다시피 하는 문장 또한 상당하다. 니나 부슈만의 투신하는 삶은 지독할 정도였고 그래서 더 빛이 났으며 근접하기 어려운 차원이라고 여겼다. 전혜린 번역이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전혜린의 수필집을 읽어서인지 작가인 루이제 린저와 작가를 대변하는 주인공 니나 부슈만, 그리고 전혜린까지 연결되면서 범접 불가한 열정과 순수, 뛰어난 실력이 하나의 이미지로 섞여 들었다.

 

삶의 한가운데(박찬일 옮김, 민음사, 1999, 1950, 382면 분량)는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자전적 소설로 니나 부슈만이라는 아이콘이자 전형을 완성한다. 니나에게서 분출하는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더 많이 알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용기 있게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련의 과정을 견인할 뿐 아니라 잦아들지 않는 동력을 제공한다. 루이제 린저는 전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로, 토마스 만으로부터는 시대악과의 싸움에서 뛰어난 용기를 보인 작가라고 평가받았다. 나치의 억압으로 교사 해직 통보를 받고, 나치 투쟁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는 기록에 더해, 히틀러에 저항해 목숨을 걸었던 저항 문학가로 행세하며, 독일의 잔 다르크가 되길 원했(주간조선, 박광작, 2017)으나 본모습은 친 나치주의자라는 무리요의 평가가 추가되며 놀라움을 안긴다.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는 니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며칠간을 함께 보낸다.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p.7)라는 첫 문장에서 후자에 가까웠던 마르그레트가 동생을 알아가는 과정을 소설은 담고 있다. 동시에 언니 마르그레트도 니나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서서히 발견한다. 오랜 시간 니나를 사랑하던 슈타인이 죽은 후 니나의 집으로 배달된 그의 일기와 편지, 메모와 공백까지 함께 읽어나갈 때, 슈타인 역시 니나를 거울삼았고, 그뿐 아니라 사랑의 유일한 대상, 삶의 이유이자 이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문턱을 넘어왔을 때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야 하리라.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p.43) 1929915일자 일기는 슈타인의 미래를 예견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지 18년째 되는 날, 삶이라는 여정을 맺겠다고 결정하는 순간에 그는 자신의 죄가 결단을 회피했다는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비겁해서라기보다는 유약해서였다고, 끝없이 주의하도록 경고하는 목소리와 모든 경우의 장단점을 고려하라는 명령이 결단을 막았다고 스스로 변호한다. 그의 내면에는 멈추는 법 없는 북소리,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던 셈이다.

 

니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니나는 수선화와 빨간 장미를 좋아하는 건 물론, 많은 것을, 아니 모든 것을 좋아하는데 심지어 몹시 저주스러운 이 삶”(p.15)까지 좋아한다. 풍만함이나 포만함은 참을 수 없는 대신 공포와 불안에 흔들릴지언정 미지의 가능성은 애착을 느끼는 대상이다. 당면한 일을 회피하지 않고 의무를 다하는 일, 약속을 지키는 일은 그녀에게 중요하다. 일신상의 편안함은 고려 조건이 아니었기에 당면한 일을 수행한다.

 

니나는 흘려버리고 말 일상도 순간마다 붙들고 그 안의 감정과 의미를 들여다본다. 삶에 산재해 있는 여러 관념을 명명하고 각각 분리하기 원한다. 사랑은 무엇인지 행복은 무엇인지 재정의한다. 사랑과 정열의 차이, 행복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고, 결혼의 의미와 결혼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의무나 당위, 제반 사항을 탐색하며 관계 맺는 일에 대하여 질문한다. 멋진 순간이 우리 삶에 존재한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던 니나는 그런 삶을 살아냄으로 직접 확인하기 원한다. 처음에 그녀에게 삶이란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을 파고드는 것”(p.55)을 의미했다. 그녀에게 삶이란 점차 약속을 지키는 것,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일로 확대되었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위험을 무릅쓰는 일, 전쟁에서 비롯한 거대한 부조리에 저항하는 일, 무엇보다 제대로 된 글을 쓰고, 멈추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된다.

 

소설은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 보인다. 니나를 잃은 슈타인의 슬픔은 만져질 듯이 표현된다. 그리고 이 절망이 바닥을 치고 오르는 순간 또한 기록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지 않았다.”(p.304)고 자신과 대면 후에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기대한다. 정화되는 심정과 각성 끝에 감사에 이른다. “나는 니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쪽을 본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한다.”(p.305) 이 감정은 곧 곤두박질하지만 그는 운명이라 여기고 운명을 종결짓는다. 보편과 극단을 아우르며 마음의 움직임과 파생되는 인간의 감정을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인상적인 부분을 다 꼽을 수 없지만 소설가인 니나가 가지고 있는 글에 대한 태도는 빼놓을 수 없다. “누구든 그가 쓴 것과 똑같아. 이걸 분리시킬 수는 없어.”(p.130)라고 단언한다. 살기로 결심한 즉시 실행에 옮기는데 바로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니나에게 산다는 것은 곧 소설을 쓰는 것이다. 책 속의 책인 니나의 소설에서는 그녀에게 문학이란 무엇인지, 작가는 어때야 하는지 밝힌다. 소재가 자기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맷돌에 갈고 또 가는(p.164) 이유, 곧 값싼 효과를 허용함으로 빨리 타락하는 일을 방지한다는 원칙도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조건이다.

 

소설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니나와 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용감한 인생 탐구자인 니나와 함께 삶의 의미, 추구할 가치,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을 향한 여정에 돌입하게 된다. 슈타인과 니나의 글은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고 지그재그를 그리듯 엇갈리며 배치되어 있어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다. 다행히 간결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는 이를 상쇄하는 요소다. 대화와 서술이 섞여있고 공간적 배경도 글에 따라 현재와 과거를 왕래한다. 화자인 언니가 대강 펼친 뒷부분을 먼저 읽기도 하기에, 결말에 다가가다 앞으로 다시 거슬러 읽는 일도 생긴다.

 

그와 같은 수고는 글로써 남겨진 자의 흔적을 쫓을 때 일정 부분 정성으로도 간주된다. 어쩌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슈타인 박사만이 아니라 폭력의 무참한 시기에 희생양으로 사라진 이들을 애도하는 방식일수도 있겠다. 재확인한 작가의 행보가 지금까지처럼 몰랐던 게 나았겠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다시 읽은 작품이 다시 잃은 작품이 되었나 생각할 때, 작품은 작품으로 남겨두고 싶다. 온통 의지와 정신으로 형성된 듯한 니나는 새롭게 질문을 시작한다. 니나 부슈만은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정한 기준을 제시하며 곧바로 실천할 태세다.

 

 

 책 속에서>


-그러니까 니나가 밤새 쓴 것은 편지가 아니라 지켜야 할 약속이었다. 피로와 절망, 이별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약속.(p.149)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런데 그것은 그들 탓이야. 그들은 운명을 원하지 않거든.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는 수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으려고 해.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차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일탈이란 편한 점도 있으니까. 혹은 마치 파산 직전에 있는 상인이 그것을 숨기고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한 후 일생 동안 그 이자를 갚아가며 늘 불안하게 사는 것과도 같지. 나는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p.144)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워.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 게 나는 싫어.(p.166)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변신을 보고 전율한다. 나는 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니나는 내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녀도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내가 그런가? 정말일까? 도대체 누가 도피하고 있다는 말인가? 쫓겨난 자들과 함께 미지의 해안으로 달려가는 자들인가, 아니면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아마도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들인가.(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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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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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한 적도 없는데 요즘 하는 일이 일관된다. 앤드루 포터의 <사라진 것들>을 읽기 위하여 사두고 안 읽은 전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었다. 클레어 키건의 <이처럼 사소한 것들>을 읽기 위하여 사두고 안 읽은 전작 <맡겨진 소녀>를 읽었다. 이제 김애란 차례다. 배송중인 장편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기 위하여 사두고 안 읽은 데뷔작 <달려라, 아비>를 읽었다. 이쯤되니 남들 다 읽을 때 읽자는 교훈을 얻을 수도 있고, 전작을 읽지 않았다는 죄책감도 일종의 병이나 편견이라고 유연하자 허용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당분간은 지금 A를 읽기 위하여 전작인 -A 또는 그 전작 -AA, -A (마이너스 무한대 A라고 읽어야 하나)를 더듬어 읽을지 모르겠다. 역행하여 오르는 사이에 근육이 붙을 날들이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기 위하여 데뷔작 <가난한 사람들>을 펴는 일은 당연과 강박 사이에 부유한다.

 

김애란의 첫 번째 소설집 달려라, 아비(창비,2005, 268면 분량)는 자기만의 과제를 해결하려는 자들의 분투를 이야기한다. 치열함은 분투의 기본값이지만 애쓰다 지쳐 분노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인다. 오히려 관조하고 웃어넘기면서 다음 페이지에 희망을 남겨둔다. 다음 페이지를 누군가 대신 써줄 수 없고 내일을 누군가 대신 살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속임수나 부조리와 맞닥뜨리는 시기는 몇 세부터 몇 세 사이, 어릴 때 제외, 주로 사춘기 등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왜 아버지는 달려 나가셨고, 어머니는 안 계시며, 나는 복어의 독을 이겨내야 하는지 당면한 문제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왜 아버지는 잠깐만 있으라 하고 돌아오지 않는지, 왜 나는 잠 못 드는지, 불면의 원인 해결이 중요한지 증상 완화가 먼저인지 알고 싶다. 혼자 깨우친 한글로 비로소 완성한 세계, 필연의 작품은 왜 기필코 붕괴돼 버렸는지, 그녀들은 자기만의 방에 기거하는지 내가 그녀들의 방에 침범하는지, 애초에 나는 복제품 중의 하나인지, 익명은 실존의 극단이고 허상인지 알아내기 위하여 집중한다. 두려움을 떨쳐내며 한 번 더 집중한다.

 

한국 문단의 새로운 이름을 기억하자는 찬사를 비롯해 수많은 감탄 속에 등장했던 작가 김애란은 한국일보 문학상의 최연소 수상(2005)을 시작으로 여러 상을 받아왔다. 소설집과 장편소설, 산문집 등으로 꾸준히 독자를 만나왔으며 얼마 전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출간했다. 젊은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는 데뷔작 후기에서 문학이 신앙이 되기를 바라지 않는다고 다만 소설 안의 어떤 정직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한다. 그의 소설은 추앙의 별은 아니지만 정직한 바람, 간절한 갈망을 추려내 담는다. 간절함을 갈무리하는 방식은 비장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고 확성기를 통과시켜 사실을 증폭시키는 일은 더더욱 없다. 마지막의 너털웃음이나 침묵은 적절한 매듭으로 묶이고 스스로를 침잠케 하거나 매몰시킬 유혹의 여지를 없앤다.

 

소설집은 표제작인 <달려라, 아비>부터 등단작인 <노크하지 않는 집>까지 아홉 개 단편을 묶었다. <달려라, 아비>의 아버지는 가 세상에 태어나기 전날 집을 나가 의 세상으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화자인 나는 그가 달리기하러 집을 나갔다고 그렇게 믿기로 했다”(p.15)고 선언한다. ‘는 아버지의 지구별 무한 경주를 자신이 입혀드린 야광 바지로 식별해 내고 띄엄띄엄 마음으로 동행한다. 혼자 남겨진 어머니는 비장함이나 분노로 딸을 키우는 대신 농담으로 키웠고 농담은 어머니의 가장 큰 유산인 자신을 연민하지 않는 법과 조화롭다. 곤란과 고단과 억울은 할당받은 자기 영역 밖으로 흘러넘쳐 결국은 비극적 파장을 짙게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소설은 다른 전개를 보인다. 마지막 온점까지 읽고 났을 때 따라오는 건 감탄이다.

 

편의점을 배경으로 현대인의 일상을 성찰하는 소설이 인기였다. 편의점은 마치 하얀 도화지처럼 어떤 사연, 어떤 인물에게도 공평한 배경을 제공했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는 어쩌면 많은 편의점 노벨의 시조다. 편의점이 변주를 시작하면 동네 사랑방 같은 다정함도 투명한 벽으로 칸막이 치는 싸함도 무난하게 완성할 수 있다. 어느덧 이십여 년 전인 2003년의 편의점 풍경은 이십 대 청춘의 일상을 사실적으로 기록할 때 중요한 장치이자 상징이 된다. 불안과 부담 사이, 침해받지 않을 자유와 안부 물을 공존 사이는 여전히 아슬아슬하다.

 

<스카이 콩콩>은 아버지와 두 아들의 일상을 그린다. 불통과 일탈, 다시 화합도 그린다. 집 앞에 서 있는 오래된 가로등은 가족을 내려다보는 무심한 목격자부터 기적을 공유하는 증인까지, 꿈과 상상, 시간과 공간을 넘나든다. 스카이 콩콩이 보이지 않는 날개를 선사했다면 가로등은 어떤 가능성도 지지하겠다고 윙크한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는 불면증에 대응하는 백 한 가지 방법을 연상케 하면서 설상가상으로 갑자기 동거하게 된 아버지 일화를 보탠다. 아버지는 불청객이면서도 종국에는 불쌍해지는데 나와 아버지 중에서 누가 더 불쌍한지 독자는 가늠하기 어렵다.

 

<사랑의 인사>는 네스호 괴물 네시의 출몰과 약속을 저버리고 사라진 아버지와의 조우를 나란히 놓는다. 우연한 조우가 단 한 번의 사랑의 인사를 하기 위한 아버지의 선물이라 여겼지만, 극적으로 맞닥뜨린 그 아버지는 예전부터 유일하게 잘해왔던 일, 즉 내 앞에서 사라져가는 일”(p.160)에만 충실하다. 아비가 달리는 일에만 충실했듯이. 상실은 또다시 출발점에 서나 상실감을 느끼는 일은 그만 마다한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에서 나는 소리친다. “아버지 좀! 그러지 말고 말해보세요. 진짜 이야기를.”(p.183) 지금 하고 있다고 대답하는 아버지. 부자의 대화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진심으로 채색된 꿈자리를 편다. <종이 물고기>는 이야기의 변신, 글쓰기의 가능성을, <노크하지 않는 집>은 대학가 한 건물에서 익명의 사람들과 지내는 화자가 겪는 어긋남을 보여준다. 예측은 빗나가고 몸 둘 바 모르겠는 순간은 느닷없이 도착하고 있다.

 

이토록 즐거운 소설 읽기라니. ‘즐거운이라는 낱말은 의미있는’, ‘특별한’, ‘새로운’, ‘매력 넘치는’, ‘웃픈’, ‘짠한으로 계속 바뀐다. 페이지를 빠르게 넘어가다가도 한 번씩 뭉클할 때면 그대로 멈춘다. 웃음과 낙관 사이에 마음 추스르고 나아가려는 의지는 부단히 개입했을 것이다. 소설의 들은 현재의 , 내가 처한 조건을 선택한 일이 없으나 최대치의 성실로 하루를 잇대어 살아 나가야 한다. 불안정한 관계와 불확실한 소통에도 지지 않고 스스로를 소외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 빛을 발한다. 놀이처럼 게임처럼 숨바꼭질 또는 숨은그림찾기처럼 긴장과 느슨함을 왕래할 때 가끔 가로등의 윙크도 받는다. 유쾌하고 매력 넘치는 문장은 독자에게 신선한 자극을 안긴다. 한 편씩 아껴 읽은 이야기가 소중하다. 남들 다 읽을 때 읽기를 미루지 말자, 이 무슨 시간 낭비이며 뒷북인가 싶은 마음도 들지만 한편으로 높아지는 지수가 있으니, 딩동, 택배가 도착했습니다. 알람이 울린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 설렘 지수는 높아진다.

 

 




책 속에서>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정확하게는 우리집이 아니라 우리 주인집 앞이었지만, 그가 온전히 굽어보던 것은 옥상 위의 우리집. 그중에서도 나와 형이 살고 있는 방의 창문이었다. 그 시절, 형과 나의 정수리에는 언제나 가로등 불빛이 노랗게 고여 있었다.(p.60, 스카이 콩콩)

 

오래전 우리집 앞에는 나이를 많이 먹은 가로등 하나가 있었다. 그는 먼 옛날부터 그곳에 있었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었다. 나는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지구보다 더 큰 둘레를 그리며 돌고 있는 가로등의 운동을 상상하곤 했다. 지구의 원주와 가로등이 손끝으로 그려내는 원의 너비. 그리고 그 두 원의 너비 차가 만드는 사이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를테면 형이나, 아버지, 혹은 나 같은 사람들.(p.81, 스카이 콩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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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1
헤르만 헤세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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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독서여정은 어떻게 됩니까, 라는 모호하고 한계 없는 질문에 답은 대체로 명확하다. 내가 인식한 첫 책은 <데미안>이었고 이전의 모든 앎과 앓이는 <데미안>를 위한 준비였다고 돌이켜 생각한다. 때로 데미안과 헤세는 혼동되기도 하였고 혹시 다시 데미안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헤세의 소설들을 한권씩 찾아 읽었다. 녹턴이 귓가에 끝없이 울리던 짧은 에세이부터 <유리알 유희>까지 헤세의 글에 숨은 또 다른 데미안 찾기는 계속되었다. 헤세는 시로, 구름으로, 노을지기 시작하는 저녁의 부드러운 서정으로 다가오기도 했지만 치열하고 논리적인 기준점과 선택지, 신생 이론으로 답을 요구할 때도 많았다. 내가 선망하는 쪽과 내가 처한 쪽은 한 번도 자리 바꾸는 일 없었고 한결같이 스스로를 데미안을 선망하는 싱클레어로 규정했다. 그러니 나의 두 번째 이름을 에밀이라 지은 건 당연했다.

 

재독을 하기까지 수십 년이 걸렸다. 다시 읽을 때에 무언가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잠재해 있었음을 부인하지 못한다. 결말을 차마 두 번 읽기 어려웠다는 핑계를 하나 더 보탠다.(다시 보니 결말은 바람 앞 흔들리던 촛불이 어떤 바람 앞에서도 춤출 수 있는 촛불로 거듭남에 방점이 찍힌다) 그럼에도 데미안은 늘 나의 시야 범위 내에 자리했는데,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했기에 종이에 활자로 찍힌 데미안이 나무 책꽂이에 기대어 있어야 했다. 삼중당부터 민음사, 문학동네까지 <데미안>들이 서게 되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얼마 안 있어 했던 생각은 잊혀지지 않는다. “얘는 언제 커서 데미안을 읽지? 큰일일세.” 여기까지는 다시 만난 데미안에게 보내는 인사다.(요즘 새롭게 놀라는 한 가지는 책에 치르는 지불 금액이다. “세상에, 데미안이 8천원이라니.” 얼마나 다행인가. 만일 가치로 책값을 매기자고 시도한다면 작품에 등장하는 동화 속 청년처럼 별을 향해 몸을 던져야 할지도 모른다.)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안인희 옮김, 문학동네, 2013, 1919, 240면 분량)은 온전한 자기 자신에 이르기까지의 고통스럽고도 신비로운 여정을 기록한다. “에밀 싱클레어의 청춘 이야기가 부제로 데미안은 화자인 싱클레어의 수기이자 성장기이다. 익명으로 출간되었던 <데미안>에 대해 토마스 만이 폭풍우 치는 등대의 불빛이라는 찬사와 함께 신예 작가 에밀 싱클레어를 궁금해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헤르만 헤세는 독일 남부 칼프에서 목사인 아버지 밑에서 태어났다. 기독교적 분위기에서 자라 라틴어 학교에 입학했으나 적응하지 못한다.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헤세는 서점 점원으로 일하며 글을 쓰기 시작하여 첫 시집과 산문집을 발간한다. 첫 장편소설 <페터 카멘친트(1904)>가 성공하며 작가의 길을 가게 되고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반전주의를 분명히 한다. 1946년에 노벨 문학상과 괴테상을 받았다. 주요 작품으로 수레바퀴 밑에서, 게르트루트, 크눌프, 데미안, 싯다르타, 나르치스와 골트문트, 유리알 유희(1946년 노벨문학상 수상작) 등이 있다.

 

나는 오로지 내 안에서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에 따라 살아가려 했을 뿐이다. 그것이 어째서 그리도 어려웠을까?”(p.7)라는 제사에서,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선 서문격인 페이지에서, 화자인 싱클레어는 독자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평이하지 않다. 익숙하지 않은, 어쩌면 스치고 외면해온 주제다. 인간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 드문 오늘날, “인간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사람들”(p.8)은 죽을 때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으며 이 이야기를 다 쓰고 나면 자신 또한 더 가벼운 마음으로 죽을 거라는 고백은 우리를 숨죽이게 한다. 내던져진 시도인 인간이라는 확인, 이해와 해석의 간극에 긴장은 더해간다. 열 살 소년 싱클레어는 지금까지 속했던 세계. 밝고 따뜻한 아버지의 집 안에 전혀 다른 성격의 또 다른 세계가 있었음을 알아차린다. 두 번째 세계는 금지된 세계에 가깝고 내 삶의 방향과 어긋나지만 분명한 끌림이 있다. 프란츠 크로머가 등장하고 이 끌림은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어떻게 해도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던 두려움에서 그를 해방시킨 게 데미안이었다. 데미안이 해주는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는 비성경적이다. 지금까지의 싱클레어에게는 불경스럽고 전복적이다. 불편하고 동의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정밀하면서 자유롭고 자연스럽기까지 하기에 판단하기 이전에 이미 스며들고 있다. 카인의 표가 죄로부터, 징벌로부터 기인한 게 아닌 뛰어남을 표식이었다고? 데미안의 다르게 생각하기는 또 다른 세계의 진입구였고 데미안의 세계를 엿보고 그로인해 그토록 그립던 아버지의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나 정작 구원자에게는 거리를 둔다. “, 지금은 안다. 자기 자신에게로 이르는 길을 가는 것보다 사람이 더 싫어하는 일은 없다는 것을!”(p.57) 이라는 자각은 수기를 쓰는 시점까지 미루어진다.

 

싱클레어는 자신만의 공기에 둘러싸여 자신만의 법칙에 따라”(p.62) 사는 데미안을 별에 견준다. 데미안의 얼굴에 대한 묘사는 시간을 초월하여서 지배받지 않는 항속성, 인간과 동물의 구분이나 성의 정체성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존재를 보여준다. 미와 추의 개념으로 이분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간직한 그는 이루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다.”고 평한다. 회피의 기간을 지내고 교류한 데미안은 주의력과 의지를 집중하여 존재 전체가 소원으로 채워졌을 때 실현되는 비밀을 이야기한다. 싱클레어가 갈등했던 선과 악이라는 두 세계는 데미안에게서 더 나아가 신과 악마의 주제로 대치된다. 허용된 것과 금지된 것의 차이와 사람마다 자기만의 범위를 알아내야 한다는 견해는 익숙함, 매너리즘, 편안함과는 극단에 있는 깨어있음을 요구한다.

 

싱클레어는 자기파괴적인 방종함”(p.90)의 시기에 접어든다. 한껏 바닥을 치던 그에게 데미안 이후 두 번째 구원자가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으로 다가오고 그림 그리기라는 새로운 형태의 기록을 시작한다. 대상으로부터 받은 인상과 감정, 풍성해진 꿈을 그림으로 구체화할 때 또 한걸음 기대하지 못했던 자아상을 구별해내고 아프락사스에게 날아가는 투쟁하는 새를 통해 데미안과 연결되는 경험을 한다. 싱클레어는 자신에게 가는 세 번째 길 안내자인 음악가 피스토리우스 뿐만 아니라 동급생 크나우어까지도 역시 길을 안내하는 사람, 또는 길 자체”(p.147)라 느끼고 충실히 그들을 맞고 보낸다. 마침내 에바 부인을 만나기까지.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 에바 부인을 모든 존재의 어머니”(p.173)같다고 여긴다. 동시에 데미안이 고착될 수 없듯이 에바 부인 역시 어머니이면서 연인, 사랑의 정수이자 무한한 확대를 내포한다. 온전히 평온한 삶, 싱클레어 행복의 시대는 다가오는 격변, 전쟁이라는 불행 앞에서 상실의 시대로 추락하게 될까. 데미안의 마지막 페이지는 깊은 울림과 충격으로 잊지 못할 인장을 남긴다.

 

혹시 무언가 훼손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라니, 완벽한 착각이었다. 다시 읽은 데미안은 처음 읽어나가던 순간의 충격만은 못하겠지만 무척이나 놀라워 다시 읽지 않고 흘려보낸 시간이 아까워진다. 상징이 가득하고 환상적이기까지 한 작품은 등교와 크리스마스가 있는 구체적인 일상의 시간, 방과 대문, 골목이 있는 공간, 소음과 냄새까지 끼쳐오는 사실성에 밀착한다. 그래서 데미안은 독자의 외부에서 제 3자로 위치하는 하나의 픽션, 타자로 머물지 않는다. 소설은 에밀 싱클레어의 수기가 아니라 독자 개인의 고백록이자 성장기로 모습을 바꾸고 언젠가 도달해야 할 미래의 나에 대한 예표로 다가온다. 자신의 길을 가야 하는 자들에게 작가는 친절하게 쉬운 예로 바꾸어 말하거나 거듭 설명한다. 우리는 싱클레어의 목소리를 빌어 반론하거나 의구심을 해소할 수 있다.

 

명민한 인도는 전쟁이라는 불행한 시대를 살아내고 있던 새로운 세대 청년들에게 먼저 향했고, 그 얼굴 그대로 지금까지 모든 시대를 향하고 있다. 헤세는 그 모두가 저마다 자연의 아주 소중한, 딱 한 번뿐인 시도인 인간들을 총으로 쏘아 대규모로 죽이는 판”(p.8)에 반대하여 최대치의 방안을 강구하였고 목소리를 내었다. 시대적 배경의 암울함과 온전한 자기 발견의 어려움이라는 이중의 고통에서 자유롭기는 어렵다. <데미안>은 피할 수 없는 먼 길, 불안하고 명확하지 않은 길에 선 모두를 기꺼이 안내하는 나침반과 같다. 진리를 향하기에 아름답고 강력하며, 무엇보다 강제하지 않는 나침반이다. 그 방향 지침은 여전히 유효하며 앞으로도 유효할 것이다. 지금 <데미안>을 처음 펴는 이들을 열렬히 부러워한다.

 

 


책 속에서>


새는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온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로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p.110, 문학동네)

 

 

나는 많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은 바로 내 옆에서 죽었는데, 그런 사람들은 증오와 분노, 때려죽이기와 없애버리기가 대상과 관련이 없다는 사실을 느낌으로 깨달았다. 아니, 대상이란 목적만큼이나 완전히 우연한 것이었다. 근원적 감정은 가장 사나운 것일지라도 적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근원적 감정의 피비린내 나는 행위는 내면의 표출, 속으로 찢긴 영혼이 겉으로 터져나온 데 지나지 않았다. 그렇게 찢긴 영혼은 미쳐 날뛰며 죽이고, 파괴하고, 스스로 죽기를 원했다.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거대한 새가 힘겹게 투쟁하여 알에서 나오고 있었다. 알은 세계이고 세계는 부서져야 했다.(p.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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