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역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8
윌리엄 포크너 지음, 이진준 옮김 / 민음사 / 200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성역의 어두운 분위기는 긴장을 고조시킨다. 악 자체처럼 보이는 포파이, 문제를 일으키고 무책임하게 외면하는 인물 가우언, 폭력의 대상이자 자기 보호와 합리화를 위해 타협하는 여대생 템플 드레이크, 정의 실현을 목표로 행동하고 싸워나가지만 공고한 벽에 막혀 무력하게 일상으로 되돌아오는 변호사 호러스 벤보, 템플과는 다른 계층의 여성 루비 라마, 루비의 실질적 남편이자 토미 살해의 누명을 쓰고 투옥된 구드윈 등 책 속 인물들은 갈등 상황에 반복해서 빠져들고 헤어 나오기 위해 애쓴다.

 

성역(이진준 옮김, 민음사, 2007, 440쪽 분량)1931년 출간 당시 작가 윌리엄 포크너에게 논란과 동시에 인기와 부를 안겨준 작품이다. 1920년대를 배경으로 산업화로 인한 비인간화와 가치관의 혼란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함께 거론되기도 한다. <성역> 출간 다음 해에는 <팔월의 빛>이 세상에 나오는데, 박계영의 논문에 따르면 단편 <매마른 9>까지, 백인 여성의 강간과 강간범의 린칭 주제를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역의 공간적 배경은 특히 소설의 분위기를 주도한다. 알콜 중독인 남자 친구 가우언이 자동차 사고를 내고 템플과 같이 밀주업자 구드윈의 저택에 머물게 되면서 사건은 시작된다. 수풀로 둘러싸인 샘에서 과거 대농가였으나 폐허가 된 집으로 장소가 이동한다. 포크너 단편 <스러지지 않으리> 등에서 나왔던 프렌치맨스 밴드가 작가가 창조한 가상공간 요크나파토파 중에서 가난한 시골 농촌마을을 뜻한다면 <성역>의 올드프렌치맨 지역은 그 중에서도 몰락한 대농장과 폐허가 된 저택으로 영역을 한정한다. 폐허 저택에는 온전치 못한 사람들, 사회에서 인정받기 어려운 이들이 금주법 시행 중 법망을 피해 은밀하게 밀주를 만들고 판매한다. 제퍼슨의 판사라는 고위층의 자녀 템플은 있어야 할 곳인 대학 또는 아버지의 집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아버지에게 이를 거예요!”(p.112)를 외칠 뿐이다.

 

포파이는 템플을 멤피스의 매음굴로 데려가고 그녀는 더욱 피폐해진다. 그녀는 저택에서도 멤피스에서도 탈출을 시도한다. 그러나 템플의 탈출은 탈주 대신 되돌아오는 게 목표인 듯 거듭 회귀하는 코스를 반복한다. 포파이 대신 토미 살해 용의자로 몰린 구드윈은 진범 포파이에 대한 증언을 거부한다. 한마디라도 한다면 그걸로 끝장이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는데, 두려움에서 파생한 신념이 분명하다. 템플은 거짓 증언으로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가는 듯 보인다. 그러나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녀가 찾은 자리가 이미 의미라고는 상실한 공허가 아닐까 묻는다. 구드윈은 벤보의 신념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다. 벤보의 여동생 나르시사는 쓸데없이 참견하지 말고 이 일에서 손을 뗄 것을 그에게 계속 요구했다. 구설에 오르내리는 일을 피하고 거리를 두라고 강조했다. 그녀는 도와줄 사람이 없는 루비 라마와 아기가 자기 부모님의 집이자 유년의 공간, 성역에 머무는 것을 격렬히 반대한다.

 

소설의 제목인 성역(聖域/Sanctuary)”은 사전적으로 신성한 지역’, 또는 불가침 지역을 뜻한다. 역자는 소설의 첫 문장인 샘을 병풍처럼 둘러싼 수풀 뒤에서 포파이는 그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을 지켜보았다.”(p.7)성역을 상징하며, 그것이 침해되는 것은 성역시 되어왔던 기존의 가치와 질서가 파괴되는 것’(p.427)을 암시한다고 쓴다.  성역은 상대적인 의미를 지닐 수도 있겠다.  템플이 들어가게 되었던 폐허 저택도 그들만의 성역일 수 있고,  이때 템플은 루비가 강조했듯 침입자 위치에 놓인다.  멤피스의 미스 레바의 집, 구드윈이 포파이를 피해 머물고자 했던 감옥, 진실을 밝히고자 하는 법정이 성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성역을 그 기능을 변조하고 비웃는다 내가 사는 도시에서는 그런 인간은 재판도 하지 않아.”(p.388)라고 말했던 군중은 나름의 성역의 기준대로 사적 정의를 실현시킨다.

 

소설은 마지막 장에 포파이의 탄생과 죽음을 배치한다. 지금까지의 혼란과 악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그의 삶의 굴곡과 상흔이 어떤 방식으로 그를 이끌었는지 에필로그처럼 보탠다. 그럼으로 악은 태어나는 것인가 결핍과 트라우마로 획득되는 것인가 묻는다. 포파이의 반대편에 사람이란 어떤 일을 할 때면 단지 그것이 옳기 때문에,  그것을 하는 것이 사물의 조화에 필요하기 때문에 할 수 있다”(p.364)고 했던 벤보가 비록 지금은 실패하였지만 작은 희망처럼 존재한다.  그는 <팔월의 빛>의 바이런 번치,  단편 <머리카락>의 호크쇼 계열의 캐릭터로 미약할지라도 불의를 바로잡고자 자신의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다.  물론 그에게 호의적인 조력자는 찾기 어렵다.

 

소설은 3인칭 전지적 시점에 가까우나 포크너 소설이 으레 그렇듯 드러내고 전달하기보다 감추고 미완인 채로 둔다. 템플이 벤보에게 들려주는 사건의 전말은 대체할 수 없는 진실 같았다가 순진하고 비개인적인 허영심에 찬 경험의 재구성이라는 지적에 독자는 멈칫한다. 템플의 회상은 심지어 자아도취적인 면도 합세하여 현실과 환상을 뒤섞는다. 어쩌면 자기합리화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멤피스 미스 레바의 집에서 그녀는 1030분을 생각했다고 반복 서술하는 템플의 성찰은 인상 깊다. 동일한 시간대이지만 며칠 사이 그녀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  사건 이후 1030분은 더 이상 이전의 1030분이 아니다. 회복할 수 없는 상실로 완전하게 갈리는 카이로스의 순간이 되어버린다.  시간과 소음의 비유나 다양한 수사는 사건의 진행 틈새에 멈추고 생각할 시간을 들인다.

 

소설은 독자의 몫으로 여러 의문을 남겨둔다.  책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삶을 추측하는 일도 독자의 몫이다.  남부의 작가 포크너는 <성역>에서 1920년대 미국 남부 상류 사회의 부도덕과 속물근성을 비판한다.  맹목적인 군중 심리, 익명의 목소리가 진실을 가리고 왜곡시키는 현장도 고발한다.  진 스타인과 진행한 파리 리뷰 인터뷰에서 그의 소설이 폭력으로 점철되어 있는 작품이라는 평에 대하여 포크너는 답한다.  폭력은 단지 목수의 연장 중 하나와 마찬가지이며, 목수가 한 가지 연장으로 집을 지을 수 없는 것처럼, 작가도 한 가지 연장으론 글을 지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성역>은 가독성은 좋으나 어둡고 불편한 작품이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불편하지만 필요한 작품임은 물론이다.  현대의 독자에게도 유효한 질문을 보내고 있는 <성역>의 일독을 권하는 이유다.

 



책 속에서>


글쎄, 그들이 날 유죄로 만들 증거가 있다고 생각하든 말든 난 법정에서 승산이 있어요. 하지만 그자가 그 근처 어딘가에 있었다는 말을 내가 했다는 게 멤피스에 퍼졌다가는 내가 증언을 한 이후 이 감옥으로 다시 돌아올 가망이 있을 것 같아요?”

당신에겐 법, 정의, 문명이라는 게 있어요.”(p.174)

 

 

그는 언젠가 책에서 읽은 한 구절을 말하기 시작했다.

평화는 드물어라. 평화는 드물어라.”(p.39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크너 자선 단편집 2 포크너 자선 단편집 2
윌리엄 포크너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윌리엄 포크너의포크너 자선 단편집 2(조호근 옮김, 서커스, 2025, 704쪽 분량)1권에 이어 <황무지>, <중간 지대>, <저 너머>에 속하는 스물 네 작품을 담았다. 작품 해제에 실린 제발 누군가에게 바가지를 씌워황금의 땅1천에 팔아줬으면 하네. 그러면 다시 머릿속 냄비를 휘젓지 않고 장편에 매진할 수 있는 두 달의 시간을 벌 수 있을 거야.”(p.11)라는 인용문을 읽으며 포크너가 머릿속 냄비를 휘저어 풍성한 단편 또한 창작해서 독자에게는 얼마나 행운인가 싶었다.

 

<황무지>1차 세계대전 말과 직후를 배경으로 하는 전쟁 단편들로 채워진다. 라틴어로 별을 향해라는 의미인 아드 아스트라(Ad Astra)”는 전쟁의 명분이 무엇이었건 시간이 지날수록 별에 비유되는 이상과는 멀어지는 실상을 그린다. 등장인물들의 대화와 묘사는 절망의 골이 깊어지고 번민과 자괴감에 빠져드는 과정을 보여준다. <승리>는 전쟁이 종교와 전통을 귀히 여기며 살아가던 한 가족의 구성원을 어떻게 비인간화시키고 나락으로 떨어뜨렸는가에 대하여 감정을 배제한 채 르포르타주처럼 서술하는 작품이다. 마치 한 편의 고발문학 같다. 결말의 그레이와 워클리가 만나는 장면은 필름이 돌아가는 듯 시각적이고 잔상이 길다.

 

전쟁을 주제로 하는 포크너의 단편들은 약 백여 년 후인 현재의 정황과도 닿아 있다. <세상을 떠난 모든 파일럿들에게>가 과연 1권에 묶인 <스러지지 않으리>라는 제목에 조응할 수 있을지, 답은 부정적이다. <스러지지 않으리> 또한 이미 스러진 이들을 향한 반어적 의미를 내포할 뿐 아니라 회상하고 이야기함으로 소멸에 저항한다. 시대에 떠밀려 스러지는 생명, 특히 젊음, 부스러지는 꿈을 사진 한 장으로 기억해낸다. 스냅 사진으로 추억하는 사람들의 사라져버린 시간이 아스라하다. 그들이 빼앗긴 열정과 일상에 대하여 작가는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물으며 기록한다. 속절없이 사라져갈 기억일지라도 붙든다.

 

포크너가 결정하는 제목은 물론 함축적이지만 때로는 역설적이고 자조 섞인 비판도 담는다. 본의 아니게 또는 기꺼이, 선택의 여지없이 전쟁에 뛰어든 이들을 기록하며 용기를 새롭게 정의 내린다. “그는 아주 오래전부터 용기를 품은 인간 따위는 없으며, 그저 도로에 뚜껑이 열린 맨홀에 빠지듯이 눈먼 채 용맹 속으로 뛰어들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p.78) “그게 전부다. 그걸로 끝이다. 용기든 무모함이든 원하는 대로 불러도 좋은 그것은 그저 찰나를 밝히는 불꽃일 뿐, ! 소리와 함께 꺼지면서 원래의 어둠이 돌아온다.”(p.192)라고.

 

<중간 지대>에는 결이 다른 작품들이 포진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인간 내면의 갈등을 다루어야 한다고 했던 포크너는 모든 작품에서 이 주제를 놓치지 않지만 특별히 더 인상 깊은 작품을 모아놓는다. 문을 여는 단편 <와시><압살롬, 압살롬!>의 와시(워시) 존스 에피소드 결말부를 통해 단편으로 먼저 구상되었음을 알게 한다. 서트펜 가의 흑인 노예들에게도 멸시 당하던 와시는 위상이랄 게 없다. 백인 빈민(poor white trash)의 소외를 보여주는 대표적 인물의 비극을 집중적으로 숙고하고 2년 후에 3대 장편 소설 중 하나인 <압살롬, 압살롬!>에 적확하게 안착시킨다.

 

<마티노 박사>는 미스테리 같다가 심리 스릴러처럼 전환하는 작품이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삼월 토끼 모티프도 인상 깊고, 황동으로 힘이나 진실이 퇴색하는 비유는 1권에 실린 <황동 켄타우로스>를 연상케 한다. 마티노 박사는 중반 이후에 모습을 드러내지만 강렬한 주인공으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한다. 일종의 가스라이팅이며 심리학에서의 조종을 긴밀하게 연결한 모퉁이를 따라가며 확인할 수 있다. 반면 총명했을 젊은이들의 무기력한 자멸은 안타까우면서도 으스스하다. <브로치>에서 장악하기의 또 다른 예, 또 다른 폐해를 볼 수 있다. 관계와 심적 갈등을 예민하게 응시하고 꼭 필요한 장면을 반복, 배치하여 결말까지 치닫는 속도와 힘이 대단하다. 세 인물 중 어떻게 연결한 두 사람도 평안이라고는 없는 투쟁 관계가 마치 그리스 고전 비극을 읽는 것만 같다.

 

언급했듯이 포크너 단편을 읽을 때, 제목을 놓치지 않고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한다. 작가의 의도가 드러나는 지점을 명시적으로 밝히는 경우도 있다. <황금의 땅>의 결말부는 글렌데일에 살고 있는 어머니에게 할애한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계속해서 꿈 꿔 왔지만 불가능함을 깨닫고 낙담한다. ‘영원히 살게 될 거야라는 말이 이미 생명을 잃었다는 말과 동일시되면서 그녀가 물기를 흡수할 수 없는 황금의 땅에 이식된 식물처럼 시들어 가리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인종 간 갈등을 주목하고 드러내온 작가는 인간관계에서 작동하는 힘의 논리, 그로 인한 폭력성과 잔인함도 놓치지 않는다.

 

<우리 밀라드 할머니와 베드포드 포레스트 장군과 해리킨 크릭 전투>는 작정하고 따라올 수 있으면 따라와 봐라고 작가가 앞서 나가는 글이다. ‘그 일은 대체 무엇인가, 독자는 추측과 추론, 추격을 시작한다. <불타오르는 헛간>의 소년 화자의 아버지 앱 스놉스는 여전히 비열한 행동을 하며 사위 존 사토리스의 농장을 지키고 있는 화자의 할머니 로자 밀라드와 대치국면이다. 길고도 짐작하기 어려운 제목을 달고 있는 소설은 후반으로 접어들면 서서히 전말이 드러난다. 전쟁 서사를 너무 낭만적인 에피소드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부정하기는 어렵다. 장편 <소리와 분노>가 남부 명문가였던 콤슨 가의 가세가 기울고 몰락해가는 과정과 사회 분위기를 기록했다면 단편 <여왕이 있었네>는 사토리스 가문의 몰락으로 남북전쟁 후 남부 귀족의 명멸을 전한다. ‘여왕이 있었다는 과거형은 노부인이 가문의 역사로 편입되는 종결과 닿는다.

 

6<저 너머>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더 자주 침범한다. 소제목과 동일한 <저 너머>는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는 작품으로 사별을 통해서 그리고 사별 때문에 지금의 내가 되었다는 말이나, 지성으로 가능하고 육신이 갈망하는 불멸성이란 결국 죽음이라는 통찰이 작가의 견해를 드러내는 것 같다. 각주에서는 이 작품이 포크너의 실제 삶과 명확한 연관을 지닌 드문 작품이라고 설명한다. 도입부와 결말부 사이(임종과 입관 사이)에 사후의 여정을 끼워 넣은 형식도 눈여겨보게 되면서 유려한 문장과 상상을 자극하는 전개가 이 또한 영화를 보는 것 같다. 환상적 요소와 씁쓸한 현실이 뒤섞이는 <검은 음악>, 유쾌와 낙관에서 스산함으로 변해가는 까다로운 작품 <다리>, 지역의 특징적 바람, 자연이 배경이 아닌 전면에 부각하는 듯한 단편 <미스트랄>을 비롯하여 마지막 작품 <카르카손>은 도시의 이름이기도 하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환상적으로 고조시킨다. 여러 고전을 인용해 죽음을 관조하고 응시하는데 문장은 여전히 탁월하게 아름답다.

 

몇 작품만 간략하게 언급하였다. 무엇보다 포크너가 직접 선별한 단편을 읽는다는 데 의미가 있다. 때로 작가의 의도에 닿지 못하는 모호함과 답답함을 느끼면서, 때로는 정곡을 찌르는 스토리텔링에 감탄하면서 페이지를 넘겼다. 그의 작품은 책장이 일방향으로 넘어가지 않는다. 무던히 거슬러 올라가 다시 읽기를 시작하고 서두와 종결을 나란히 보기도 하였다. 캐릭터를 한 번에 설명하지 않고 세부를 하나씩 추가하는 서술 방식이 독자를 분주하게 만들기에 때론 이렇게까지 힘들게 읽을 이야기인가 소심하게 투덜대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포크너식 위트, 호러부터 유머까지 멈추지 않는 질주는 근사하다.

 

숭학당에서 함께 읽기를 진행하면서 1권의 토론 작품은 <에밀리를 위한 장미 한 송이>로 비교적 쉽게 결정하였다. 2권에서 한 작품을 선택하는 일은 꽤 어려웠다. 함께 치열하게 읽어낸 작품을 논제와 토론으로 재정리하고 싶은 단편이 그만큼 많았다. 결국 <브로치>로 정했는데 와시, 펜실베니아 역, 자택의 예술가, 마티노 박사, 황금의 땅, 산골의 승리 등 결정을 미루며 갈등을 계속 하였다. 기회가 된다면 다른 작품들도 나눠볼 수 있기를 바란다. 독자는 회복이 불가능한 절망, 돌이킬 수 없는 관계, 설마가 사실이 되는 비정함 앞에서 안타까움에 만일 ~했더라면 달라졌을까를 거듭 되뇌며 인간 조건과 생의 비밀을 응시한다.

 

포크너가 벼려내 놓은 잊을 수 없는 문장,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시적인 문장, 때론 의미와 상징으로 꽉 찬 밀도 높은 문장, 끝없이 이어질 것만 같은, 그랬으면 좋겠다 싶은 리듬감 넘치는 문장, 연극적 문장, 호소하는 문장, 침묵으로 메아리치는 문장, 속이는 듯한 문장, 따돌리는 문장까지 그 모든 포크너의 문장을 비록 번역본으로 읽는 독자이지만 사랑한다. “인간은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에게 유일하게 가능한 불멸은 언제나 살아 움직여서 불멸인 어떤 것을 뒤에 남겨놓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항상 움직일 것이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였던 포크너. 그의 말대로 그의 문장은 항상 움직일 테고, 소리낼 것이다. 가독성 좋은 포크너, 포크너 입문서가 필요한 독자에게 우선 <포크너 자선 단편집>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친구란 있으면 좋은 존재다. 밤에 벽난로 앞에 둘러앉아서 대화를 나눌 때는 말이다. 하지만 그 지점을 넘어서면, 네 결점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너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 온갖 시행착오를 저지르는 사람을 견뎌내려면 그를 깊이 사랑해야 한다.”(p.79)

 

그래서 이 이야기는 복합적이다. 즉각적이고 깊이나 균형감 따위는 없는, 인간이라는 종족이 무엇을 겪고 변화할지에 대한 전조이자 위협을 슬쩍 내비치는, 어둠과 어둠 사이에 순간적으로 명멸하는 번개처럼 짤막하게 이어지는 일련의 인상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p.16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예제가 가득한 제미나이 길라잡이 생성형 AI 길라잡이
이승우 지음 / 정보문화사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인공지능이 탁월한 도구이자 빼어난 파트너로 일상에 안착해가는 중이다. AI 시장에서 오픈AI의 챗GPT와 구글 제미나이는 강자의 자리를 확보했고 최근에는 클로드의 약진도 주의를 끈다. 최재천 교수님은 모든 문명의 이기를 다 활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더 현명한 방법이며 도서관을 일주일 뒤져야 하는 작업을 AI15초 만에 해준다면 사용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다고 하였다. AI와 내외해왔지만 도태는 시간 문제라는 생각도 들던 차에 재미나이는 유료 챗GPT라 생각된다는 이야기에 알아보자 싶었다. 마침 이승우의예제가 가득한 제미나이 길라잡이(정보문화사, 2026, 264쪽 분량)는 제목처럼 첫걸음을 떼기 위한 안내서로 삼기에 적절하다.

 

저자는 독자가 가장 필요로 하는 부분부터 익히고 활용할 것을 권한다. 빠른 모드, 사고 모드, Pro의 세 가지 핵심 모드를 살펴보면서 프롬프트에 따라 단편소설 플롯도 만들어주고 요구사항을 포함한 보고서 작성, 나아가 학술 논문 작성까지 능력치가 놀랍다. 계속해서 데이터는 쌓이고 한계는 지워질 것이다. ‘사용자가 대화할 때 입력하는 모든 문장인 프롬프트도 사례를 보면서 이해할 수 있다. 직관적인 질문 뿐 아니라 메타 프롬프트를 사용해 AI와 공동으로 작성하고 초안 확인과 개선의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 데이터 작업 자동화 파트에서는 다양한 예제를 경험할 수 있는데 자동 생성되는 차트는 확실히 시간과 수고를 아껴줄 것 같다. Pro이상인 경우에 슬라이드 생성과 이미지 삽입 등을 적용해 강의 자료 작성에 활용해보아도 되겠다.

 

지메일, 이메일 자동 작성 및 관리 파트에서는 읽지 않은 메일들의 내용을 요약해 준다는 게 매력적이다. 더 나아가 읽지 않은 메일 중에서 회신이 필요한 메일을 알려달라는 단계에서는 뭐지? 마법사야? 갸웃했다. 인공지능과 아직 멀리 있는 인간의 반응이다. , 놀라워라를 연발하면서 읽어나갔지만, 제공된 예제도 실험해보고 직접 부딪히며 체득하고 알아가는 게 중요할 것 같다. 그럼에도 기본 개념과 작동 방식, 연결 과정 등을 친절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흥미로웠다. 글쓰기 수업 에클에 참여하면서 구글 문서로 실시간 협업과 소통, 전천후 접근 등 다양한 매력을 경험하였다. 다만 문서 스타일 변화 시도는 새롭게 알게 된 기능이었고 활용여부는 선택의 영역이라 본다.

 

들어가는 글에서 저자는 “AI는 여러분을 대체하지 않습니다. AI는 시간과 생각의 여유를 만들어주는 도구입니다.”라고 전한다. 문명의 이기인 셈인데 도구를 잘 사용한다면 여러분여러분고유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나아가 더욱 확고하게 정립할 수 있겠다. 이번 주에 진행하였던 도서관의 토론 도서는 마크 트웨인의아담과 이브의 일기였다. 전복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작품에서 이브는 짐작과 가정과 추측이 아닌 실험을 통한 증명을 중요하게 여긴다. “모든 것의 답을 알아내면 더는 가슴 뛰는 일이 남아 있지 않을 테고그런 일들이 나를 슬프게 한다고 덧붙인다. ‘새로운 불이라고 일컫는 AI시대는 잠정적으로든, 자명하게든 모든 것의 답을 알아낸 시대일까. 그 답은 차치하고 우선 시간과 생각의 여유를 누려보기 위하여 진화하는 파트너를 경험하는 안내서로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포크너 자선 단편집 1 포크너 자선 단편집 1
윌리엄 포크너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5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포크너 자선 단편집 1의 서평을 잘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끝에 을 빼기로 타협하고서야 겨우 숨을 고른다. 우선포크너 자선 단편집 이 출간되어서 무엇보다 기쁘다. 읽을 수 있어서 기쁘고, 그럼으로 포크너만의 아우라를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어서 기쁘며, 이에 더해 8개월 동안 진행하고 있는 숭학당의 윌리엄 포크너 함께 읽기에 포함할 수 있어서 기쁘다.포크너 자선 단편집100편에 이르는 단편 중에서 작가가 직접 선별한 42편을 묶었으며 1권에는 스무 작품을 담았다. 작품 결정부터 수록 순서와 각 장의 소제목까지 직접 정했던 포크너는 1951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하였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1949)하고 시상식은 다음 해에 가졌는데 수상 연설은 그의 문학적 지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포크너는 글을 쓸 가치가 있는, 비탄과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주제는 오직 인간 내면의 갈등뿐이라고 전했다. 인간 내면의 오래된 진리이자 진실을 남겨야 하는데 사랑과 명예와 동정과 자부심과 연민과 희생 같은 보편적 진리가 깃들지 않은 이야기란 그저 짧게 스러질 운명일 뿐“(p.8)이라고 강조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대표작은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소리와 분노(1929),팔월의 빛 (1932),압살롬, 압살롬!(1936)이 있다. 독특한 서술 기법과 문체로 작가의 개입과 판단을 억제하고 인물이 직접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게 함으로 독자를 끊임없이 긴장시키는 작품들이다. 로쟈 이현우는 초심자를 위한 포크너가 있느냐는 것. 비유컨대 포크너는 경사가 완만한 바다가 아니라 바로 깊어지는 바다다. 그럼에도 문학 독자라면 그의 작품들에 끌리지 않기도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 책이 적절한 포크너 입문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포크너 작품의 배경인 전후 미국 남부를 상징하는 가상의 공간인 요크나파토파는 단편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된다.

 

전체 6개의 장에서 1권은 <시골>, <마을>, <야생> 세 개의 장, 스무 작품을 담았다. 첫 번째 단편 <불타오르는 헛간>은 남북 전쟁 이후 남부 사회의 계급 갈등을 다룬다. 화자인 막내 아들 커널 사토리스 스놉스의 시선으로 아버지 애브너 스놉스 위주의 일화와 행동을 보여준다. 폭력적인 아버지 애브너는 자신의 잘못으로 배상 판결을 받자 분노하며 헛간에 불을 지른다. 어린 아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누설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소년의 갈등과 고통은 결국 그 걸음을 미지의 곳으로 이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포크너의 변주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가 모티프라고 알려져 있어 유명하다.

 

어린 소년이 화자인 작품을 꽤 만날 수 있다. <주님의 지붕널>도 아들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아버지에게 초점을 두고 서술해가는 단편이다. 대공황으로 인한 정책을 은근히 비판하며 풍자적 요소들이 웃음 짓게 하고 그런 중에도 신앙의 불멸성과 견고함이 재건 계획을 세우게 한다는 견해도 읽힌다. 스피디한 전개와 온점같은 마지막 요약 문장까지 근사하다. 순수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전쟁, 그 이해할 수 없음을 잘 보여 주는 작품 <두 병사>는 동심을 이토록 온전히 이해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 다시 한번 놀랄 따름이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따온 <스러지지 않으리><두 병사>의 후속편으로 질문이 계속되는 단편이다.


<윌리 삼촌>은 화자인 소년이 주인공의 죽음을 먼저 밝히면서 과거를 회고한다. 마을 사람들은 드럭스토어를 경영하다 약물 중독에 빠진 윌리 삼촌을 치료하려고 애쓰나 그는 도움을 원하지 않고 지옥길일지라도 혼자 갈 수 있기를 원한다. 탈출을 시도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엉뚱하게 죽음을 맞는데, 화자인 나는 윌리 삼촌을 아이들의 순수함으로 사랑하고 죽음을 초월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연민 어린 블랙 코미디적 굴곡을 통해 어떤 도움은 선의로 닿지 않고 모멸일 수 있나 질문을 남긴다. 그 중 포크너의 장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다알 번드런 예화가 잠시 나와서 반갑다. 로드니 외삼촌과의 에피소드를 조카 의 시선으로 서술하는 <그 또한 괜찮으리라>는 온 가족을 눈물과 고통으로 몰아넣는 문제아 로드니 외삼촌의 끝없는 일탈과 비극적 결말을 긴밀하게 그린다. 아이는 후에 이 사건의 진실을 어떻게 감당하려나 염려가 된다.

 

포크너의 인물은 다른 작품에서 종종 재등장한다. <소리와 분노>의 퀜틴 콤슨이 <압살롬, 압살롬!>에서 이미 전사를 쌓으며 침잠해갔던 게 일례다. <키 큰 남자들>에서는 휘둘리지도 타협하지도, 요행이나 행운을 바라지도 않고 묵묵히 선택하고 살아낸 이들을 본다. 온갖 규칙과 규제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게 우리들의 문제라는 보안관보의 견해는 지금도 유효한 지적이다. 인물간 구도를 눈여겨 볼 작품이며 <팔월의 빛>에서는 지방 검사로 나왔던 개빈 스티븐슨 변호사를 전언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 <어느 곰 사냥>에서 중편 <>의 주인공 아이크 매캐슬린(아이작)이 스치고, 주요 인물 드 스페인 소령은 여러 단편에 출현한다. 누군가에게 장난이 다른 사람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아픔으로 남고 잊혀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기발한 에피소드로 능청스런 비유가 계속될 때면 포크너가 이렇게 유쾌한 면도 있었나 싶다.

 

놀랍게도,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읽는 작품도 있다. 예를 들어 <황동 켄타우로스>는 영상을 보는 것 마냥 시각적이고 주인공들의 표정까지 그려진다. 다만 웃음을 위한 웃음은 아니다. 희비가 교차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실소하거나 쓴웃음을 짓는 경우도 상당하다. <죽음의 매달리기>는 어떤가. 서두의 작품 해제(p.22~23)에서 포크너의 공중 곡예에 관한 몇 개 단편들은 작가의 공군과 항공기에 대한 애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하는데 실재했던 곡예 비행이 중심이다. 곡예를 선보이는 과정이 무척 생생하나 톤은 더할 수 없이 진지하다. 타인의 위험을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시선, 군중 심리에 대한 비판도 볼 수 있는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실소가 나니 난감하다. 비극적인 이야기를 웃음을 참으며 읽게 하는 것도 재능이 아닐까.

 

<머리카락>에서는 호크쇼라는 이발사가 등장한다. 평범하지 않은 호크쇼의 행적을 화자가 개빈 스티븐스에게만 털어놓는 구조다. 여자와 남자를 단정하는 시선이 불편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일상이었을 테다. 그는 또 다른 인물을 연상하게 만드는데, ‘호크쇼를 직접 본 남자라면~’(p.201)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팔월의 빛>에서 바이런 번치를 설명하는 서두의 한때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도~’와 흡사하다. 매우 시적이다. 예상을 넘어서는 반전 결말은 단편의 미덕을 배가시킨다. 충격 결말이라면 <에밀리를 위한 장미 한 송이>를 꼽을 수 있다. 포크너가 출간한 첫 번째 단편소설로 비평가 브룩스에 따르면 포우를 능가하려는 시도이며 포크너가 창조한 특별한 세계로 들어가는 항구, “포크너적인 충격이다. 에밀리 그리어슨 양의 저택이 눈엣가시 사이의 눈엣가시가 된 것처럼 아버지 세대의 이상은 옛 것이며 불합리한 면도 두드러진. 에밀리의 일생은 포크너의 여러 인물이 강요된 틀에 갇혀 고통을 감내하는 여정이었듯 놓치고 사라져가는 시간의 축적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회복할 여지가 없는 시점에 복기함으로 드러난다. 포크너가 즐겨 사용하는 비순행적 서사 진행을 단편에서도 구사한다. 시간을 추적하면서 독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상쇄하고 회복하기 원하는, 나아가 시간과 겨루고자 도전하는 애처로운 인물을 만난다. <매마른 9>의 미니 쿠퍼 양도 비교해서 볼 수 있다.

 

첨예한 흑백 갈등을 비판하는 <매마른 9>에서 남부 신화안에서 살아가는 미니 쿠퍼양은 틀 안에 안주하고 방관함으로 어쩌면 불의한 폭력에 가세한다. 작가는 발표 1년 후인 1932년에 조 크리스마스 주인공의 장편 <8월의 빛>을 출간하는데 집중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던 시기다. 선동적 극단주의자 매클렌든은 <8월의 빛>의 퍼시 그림 계열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백인 여성 옹호를 위한 매클렌든의 분노가 새장 같다고 표현한 그의 집에서 아내에게 하는 행동을 스케치함으로 이중성을 드러내고 위선의 산물일 뿐임을 지적한다. <엘리>는 첨예한 흑백 갈등을 따라가다 심리 스릴러같은 섬찟한 결말로 이끈다.

 

흑인 여성은 당시 가장 열악한 위치에 놓였을 것이다. <그 저녁의 태양>은 남부 흑인 여자의 고통스런 삶을 세부 설명 없이 분위기와 심리 묘사 만으로도 독자가 충분히 추측하고 느낄 수 있게 한다. 포크너는 이번에도 어린이를 주요 화자로 등장시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거리를 둔다. 아이들 눈에 보여지는 것 넘어, 이해하는 것 이면의 갈등이나 임박한 폭력의 위험성 을 상상하게 한다. 낸시의 슬픈 삶, 그 두려움을 아무도 해소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먹먹한 단편이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화자가 어린 퀜틴 콤슨이라는 점이다. <소리와 분노>의 콤슨가 남매 넷 중 막내 벤지를 제외한 셋과 아버지 어머니, 하녀 딜지까지 등장하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듯하다. 아홉 살 퀜틴, 일곱 살 캐디, 다섯 살 제이슨이 낸시를 보고 그녀의 말을 듣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포크너는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유년의 콤슨가 아이들과 어머니인 콤슨 부인의 성향까지 완벽하게 그려낸다. 그것만으로도 뜻밖의 보석을 발견한 듯 기쁨을 안긴다. 3야생편은 인디언 소재 작품들인데 <정의 하나>는 열 두 살 퀜틴이 <>의 주요 인물 중 샘 파더스의 과거를 거슬러 전언의 전언을 듣는 식으로 전개된다. <정의 하나>의 전사라 볼 수 있는 <어떤 구애>는 추장 둠의 청년기가 드러나면서 한 인물을 단일하게 해석하는 것을 상쇄한다.

 

단편 소설에서도 여전히 시간순의 친절한 전개와는 거리가 멀다. 꿈 속의 꿈처럼 A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B와의 대화에서 들었던 CC'의 행보라는 구조가 독자도 계속 긴장하며 집중하게 만든다. 또한 문자의 표면적 뜻에서 탐색해 들어가 이면의 깊은 의미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며 남겨둔 행간을 힘써 헤아릴 것 또한 동시에 요청한다. 읽은 부분을 앞 뒤로 재점검하면서 혹시 오독은 아닐까 고민하는 일은 포크너 독자에게는 기본이다. 그럼에도 철저한 캐릭터 구축, 탁월하고 아름다운 비유와 상징, 정곡을 찌르는 일침, 상황과 심정을 문장으로 적확하게 간추리는 반복을 통해 작가는 희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더 나은 시간을 희망한다. <두 병사>에서 열 아홉 살 피트 그리어는 어느 날 진주만에 그 일이 일어나서참전하여 전사하였다. 요크나파토파 카운티의 중심도시 제퍼슨에서 떨어져 있는 가난한 농촌 지역 프렌치맨즈 벤드에 사는 피트의 가족은 똑같이 태평양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드 스페인 소령을 위로하기 위해 법원 건물보다 커 보이는 소령의 저택을 방문한다.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박물관에 들르는데 작가가 만들어낸 상징과 같은 박물관이다. 관람료를 내지 않고 다르게 생긴 집과 헛간과 경작하는 방식이나 경작하는 작물이 다르더라도 결국에는 같은 인간인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그린 그림을 바라볼 수 있는공간이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사명을 요구 받기도 하였으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스러지지 않는다. 포크너가 창조한 문학적 우주 요크나파토파는 미국 문학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 중 하나’(톰 울프)이며, 마르케스에게 마콘도를 가능하게 했던 토대이다.

 

포크너는 그가 개척한 상상의 땅에서 스러져서는 안 될 순간을 포착하고 스러져버린 이들을 일으켜 세운다. 글을 쓸 가치가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고 하였던 인간 내면의 갈등에 천착함으로 주요 장편 소설에서 뜻 깊은 성취를 해내지만 단편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포크너 자선 단편집은 그리어의 가족이 들렀던 제퍼슨의 박물관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호명하고 먼지를 털어내는 기념관이다. 포크너에게 남부는 온 마음으로 응시하고 관찰하고 나아가 현미경을 대보고 각도를 바꿔보며 전력을 다했던 대상이었고, 결국 영원히 아로새겨놓았다. 지금 우리의 남부는 어디인가, 어떤 이름인가 혹은 누구일까. 전심으로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일지 생각한다. 기존 출간된 포크너 단편집은 다섯 작품을 담은 <헛간, 불태우다>(쏜살문고, 민음사, 2021)와 열 두 작품을 실은 <윌리엄 포크너>(현대문학, 2013)가 있다. 이번에 두 권으로 포크너 자선 단편집이 완역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작품 해제와 꼼꼼한 각주, 사투리체 번역까지 역자의 정성이 가득하다. 빼어난 작품들을 짧은 호흡으로 읽는 호사를 누릴 일만 남았다. 압축의 정수인 한 편이 마무리 될 때마다 감탄사가 나올 게 분명한포크너 자선 단편집을 추천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세기 후반 실험문학 모임 울리포(OuLiPo)에는『문체 연습』의 저자 레몽 크노 뿐 아니라 조르주 페렉도 속해 있었다. ‘작업실, 문학, 잠재성’을 뜻하는 세 개의 프랑스어 단어에서 첫 음절을 차용하여 조합한 울리포(OuLiPo)는 ‘잠재 문학 작업실’을 뜻한다. 실험적 시도는 인상적인 결과물을 생산하였고, 참여자가 아닌 독자 입장에서는 실험에서 유희로, 유희에서 장난처럼 약간씩 각도를 비틀어갈 때 위태롭다는 우려와 자유롭다는 희열을 왕래하게 된다.


페렉의『보통 이하의 것들』(김호영 옮김, 녹색광선, 2023, 212쪽 분량)에 담긴 아홉 편의 글은 실험실에서 도출한 듯한 재기발랄한 에세이와 자유로운 사유가 빛나는 아름다운 단편을 고루 보여준다. 첫 번째 <무엇에 다가갈 것인가?>에서 작가는 우리 삶은 무엇으로 구성되고 어떤 식으로 채워지며 날이 바뀌고 인생이 나아가는 동안 무엇을 남기는가 질문한다.


매일 일어나고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적이고 하찮은 것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하며, 본질 또는 진짜 스캔들, 진짜 사회적인 불편함은 “견디기 힘든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삼백육십오 일”(p.16)이라고 강조한다. 평범한 것들에 언어를 부여하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의 인류학을 구축하는 일”(p.17)이라고 선언한다. “기이한 것은 언제나 아름답고, 기이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사실 기이한 것만이 아름답다.”는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화두와는 상당히 배치된다.


우리에 대해 말한다는 행위, 내국적인 것들의 인류학을 구축하기 위한 방법론은 페렉을 본보기 삼을 수 있다. 그가『공간의 종류들』에서 집요하게 점유해 나갔던 공간은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내고 명명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에서 두 번째 실린 <빌랭 거리>는 ‘장소들’ 프로젝트라는 틀 안에서 공간을 재탐색한다. <빌랭 거리>는 양가가 폴란드 이주 유대인이었고, 2차 대전 당시 부모를 잃었던 작가에게는 태어나고 자랐던 유년의 장소다. 그는 도시정비사업으로 사라질 공간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다. 12년 동안 총 24번의 묘사를 계획했으나, 작업은 계획과 달리 중성적인 묘사 여섯 번과 회상을 담은 여섯 번에 그쳤고, 책은 중성적인 묘사 여섯 개를 모아 놓은 것이다.


24쪽 빌랭 거리 지도와 함께 1969년 첫 번째 기록부터 75년까지 총 여섯 번의 기록을 남긴다. 첫 번째 기록은 분량이 가장 많고 좀 더 세밀한 묘사를 보여주고, 뒤로 갈수록 언급되지 않은 번지가 추가되거나 빠지기도 한다. 방문했을 때의 변화를 삽입하고 주변 사람들을 언급하며 덧댄다. 여섯 번째인 마지막 기록은 1975년 새벽 2시경 방문 스케치인데 왜 그 시간에 찾아갔을지 그의 새벽 외출을 짐작한다. 또한 시멘트 펜스라는 단어와 노동은 고문이라는 등식 낙서가 고되고 막막한 심경을 불러일으킨다.


트라우마가 있는 장소를 매년 한 번씩 찾아가 감정을 배제하고 기록한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감정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했을 객관적 기록이라는 형식은 충분하고 필요한 안전장치였을까.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저편으로 넣어 버릴 수 없고 잃어버리지 못하는 기억에, 어쩌면 무의식 가까이 가라앉아 있어서 꺼낼 방법이 없는 무언가에 닿겠다는 의지의 실현이었을까. 나름의 구조 절차가 아니었을까, 그는 목적을 달성했을까, 질문이 뒤따른다. 나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기록해야 할까, 기록해야 했을까, 내가 기록하지 않음으로 이미 잃어버린 장소, 곧 풍화되거나 무화될 수 없는 삶의 빈약한 조각은 무엇일까 자문한다.


<생생한 컬러 엽서 이백사십삼 장>은 울리포의 조합 문학 창작 방식을 따라가며 한계를 넘어 언어에 내제된 ‘무한한 표현 가능성’(p.51)을 전한다. 역자 노트가 이 장을 대신하는데 작가의 창작이 인공지능(AI)의 방식으로 작성된 최초의 글쓰기 사례 중 하나이며, 페렉은 이 모든 수고를 직접 수작업으로 해냈다니 놀라움을 안긴다. 그 결과물이 이탈로 칼비노에게 보내는 끝이 없어 보이는 안부 엽서이겠다. 반복되는 패턴의 글 묶음은 엽서라는 한정된 지면에 쓰기에 단문일지라도 마치 끝나지 않을 듯 계속되니 인내력 부족한 필자는 ‘미친다’, ‘화난다’ 등의 단어를 여백에 적어 넣으면서 읽고 있다. 인내력 테스트의 장이다. 이 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엽서 수신자인 이탈로 칼비노의『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었어야 한다. 칼비노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화를 돋군다.


<런던 산책>은 무척 아름다워서 다시 읽고 싶다. 그 안에 사용된 단어(명사)와 명소, 실존 인물과 책 속 인물, 거리 풍경과 작품 속 배경이 우아하게 교차한다. <지성소>는 글에서 잠시 스친 진통제 영향인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알카 셀처>를 감상하며 읽어도 좋겠고 무엇보다 결말이 신의 한 수다. <천구백칠십사 년 한 해 동안 내가 먹어치운 유동식과 고형 음식들의 목록 작성 시도>는 ‘글을 쓰자’ 고 마음 먹는다고 바로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그는 다 계획이 있구나 아니 있었구나, 최소한 일 년 전에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돌입 했겠구나 알게 된다. 독자는 책을 읽는 동시에 분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매일 식탁에 남아서 또는 잠들기 전에 꾸깃한 메모지에 오늘 먹은 음식을 적어 넣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다가 벌떡 일어났을 수도 있고, 귀찮아서 애초에 이런 시도를 결심한 자신을 탐탁치 않아하며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는 기록했을 테고, 분류하고 합산하였을 텐데 합산은 월별로 묶어서 한 후에 계절별로 더하거나 최종 일 년을 모았을 테다. 육 해 공 음식 재료 중에 어떤 재료로 만든 음식을 앞에 배치할 지를 궁리했을 수도 있다. 조리법 별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생선류, 소고기류, 송아지고기류, 돼지류, 양, 닭, 토끼로 이어지는 단백질 공급원들을 지나 치즈, 과일, 파이, 아이스크림, 주류 쪽으로 이동하면 이편이 좀 더 기호에 맞다고 눈독을 들이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미 사라진 음식들을 2026년의 한 독자는 품평하고 있다. 아니 왜 커피는 없어? 나라면, 나라면, 하고 군침을 흘리며 나의 목록 작성 계획을 저울질 하고 있다.


<스틸 라이프/스타일 리프>도 매력이 넘친다. 보르헤스의 미로 또는 뫼비우스 띠가 생각나는 글 앞에서 독자는 눈에 힘을 준다. 아이고 눈이 팽팽 도네, 달라진 단어는 무엇인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활자에 기울기를 준 역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어지는 <나는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에서도 여러 가지 참견을 하였지만 “알베르 카뮈를 왜 싫어해? 말도 안 된다” 하나만 꼽겠다. 해설도 아껴 읽어야 한다. 상실과 애도로써의 페렉의 글쓰기는 먹먹함을 남긴다. 어머니의 미용실 흔적이 남아 있던 24번지 건물이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게 페렉 사망 다음날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떠나지 못하게 붙든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2월 숭학당 논제 세미나 도서로 선택하였다. 토론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읽는 도중에 읽기란 무엇인가 내가 읽는 행위가 유의미한가를 미심쩍어 할 만한 지점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따뜻하게 안착한 작품이다.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을 모토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쓰는 행위가 중압감과 때론 좌절, 열패감까지 고루 선사하고 강타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게 옳다는 걸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그가 살아낸 치열한 삶에 감동하며, 그럼에도 밝은 에너지 가득한 흑백 사진에 고마워하며, 오늘도 담백 하고는 거리가 먼, 감정으로 가득한 평을 쓴다. 페렉의 작품을 다시 읽기로 한다. 그의 태도와 스스로 멈추지 않은 결기를 기억하며 페렉 읽기를 권한다.




책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것, 나머지인 것, 모든 나머지인 것,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매일 일어나고 날마다 되돌아오는 것, 흔한 것, 일상적인 것, 뻔한 것, 평범한 것, 보통의 것, 보통-이하의 것, 잡음 같은 것, 익숙한 것. 어떻게 그것들을 설명하고, 어떻게 그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어떻게 그것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p.16~17)


어떻게 ‘평범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어떻게 그것들을 더 잘 추적하고 수풀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들을 끈끈하게 감싸고 있는 외피에서 떼어내고, 그것들에 하나의 의미, 하나의 언어를 부여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 평범한 것들이 자신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인류학을 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에 대해 말하고,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다른 이들에게서 훔쳐 온 것을 우리 안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인류학 말이다. 더 이상 이국적인 것이 아닌, 내국적인 것들의 인류학.(p.17~1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