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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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정소영 옮김/문학동네/1990/2021)』는 현대 카리브해 문학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꼽히며 매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는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자전적 소설이다. 본명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이 아닌 필명을 사용하게 된 이유로, “저메이카”는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했을 당시 섬의 이름을 듣고 영어식으로 부른 이름으로 식민지성을 나타내고자 택했(p.139 연보)는데 식민 지배하인 고향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던 작가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킨케이드는 “모녀관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인종과 계급, 섹슈얼리티, 디아스포라 정체성”(출판사인용)을 주로 다루는데 수전 손택은 저메이카 킨케이드를 향해 “내가 언제고 읽고 싶은 글을 쓰는,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꼽는다.

식민 지배하인 고향 앤티가섬을 떠나 외국인 입주 보모로 미국의 대도시에 도착한 19세 루시는 “나는 이제 열대지방에 있지 않았고, 그 깨달음이 바짝 말라붙은 땅 위로 물줄기가 흐르듯 내 삶으로 흘러들어와 두 개의 강둑을 만들었다. 한쪽 강둑은 나의 과거였다.”(p.11)고 말하며 다른 한쪽 강둑은 “나의 미래”라고 이름 붙힌다. 머라이어, 루이스 부부와 그들의 네 딸과 함께 입주 보모로 지내는 동안 루시가 새롭게 보고 경험한 것들과 현재의 상황은 자신이 두고 온 과거를 불러낸다. “살아온 역사가 대단하구나.”라는 머라이어의 말에 “원하시면 얼마든지 가지셔도 돼요.”(p.21)라고 응대하는 루시는 냉정한 관찰자이자 상황 이면의 숨은 의미, 진실을 파고든다. 그녀의 관찰자적 입장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p.21)로 대변되는 이해불가, 소통불능으로 점철된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는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p.26), “어떻게 하면 그래요?”(p.36) 등으로 변주된다. 입 밖으로 소리내어 표현하지 않더라도 루시의 내면에서는 이 '불통'이 분노의 색을 간직한 채 연거푸 울린다. 개인사적으로 분노의 중심에는 자신의 가족, 특히 엄마가 자리하고 거시적으로 확장했을 때 피식민지와 지배국의 역사를 함축한다. 머라이어와 루시에게 수선화가 얼마나 다른 의미인지, “하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속에서 나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달라질 수 없었다.”(p.29)고 루시는 생각한다. 또한 루시의 시선은 이중성과 허위를 간파한다. “머라이어는 우리 모두가, 아이들과 내가 모든 것을 자기처럼 보기를 바랐다.”(p.33) 이는 머라이어에게만 국한된 취향은 아니다. 누구나 자기처럼 볼 것을 원하고 요구하게 된다.

루시가 살아온 시간은 시선의 방향을 이끄는 것은 물론 시력 또한 좌우한다. 가식과 허위를 꿰뚫는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쇼일 뿐,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p.41) 루시의 예상대로 머라이어와 루이스의 쇼는 곧 파경을 맞는데 이를 바라보는 루시는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한 듯하다. 그녀가 경험한 것들은 이론이 아닌 언제고 적용 또는 해석 가능한 실전의 사례들로 되살아난다. “내가 떠나온 고향에서는 어떤 존재가 이건가 싶으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돌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진짜’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p.46)

루시의 과거, 생의 한가운데는 엄마가 차지하고 있다. 엄마는 애증의 대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정점이자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절정이다. 넌 정말 화가 많은 애구나, 라는 머라이어의 말에 “물론 화가 많죠. 당연한 거 아니에요?”라고 답할 때 그 화의 주요 원인이 엄마이기도 하다. 화는 세분화되고 범주로 묶이고 루시의 선택과 행동의 동기로 작용한다. 루시라는 이름의 원래 의미를 알려주던 엄마, 마치 엄마가 원했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그 반대로 나갔다 싶은, 온힘을 다해 “비뚤어지고 말테다”하는 결기까지 느껴지는 애정행각들, “남자의 생애는 언제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참”(p.78)이고 세계 끝자락에서 태어나 고향을 떠나는 자신의 어깨에는 하인의 망토가 둘러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도. 나중에는 화 자체를 넘어서고 시선과 해석에 루시만의 통찰을 덧입힌다.

루시의 가열찬 성장 이야기는 주제가 명확하면서도 이중, 삼중의 확장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분량이 많지 않은 소설을 가뿐히 읽고 즐기게 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모든 사람을 조금 덜 행복하게 만드는 게 내 임무 같아요.”라고 말했던 저자의 의도는 성공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명확한 목소리, 회색지대라고는 없는 원색의 발언, 행동의 일관성을 직설적 문장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사계절을 지나면서 변하는 풍광의 생생함, 색으로 각인된 추억 속 장면들(p.105), 열대 우림과 대도시를 왕복하는 입체적 배경, 그 안에서 포착할 수 있는 인물들-‘상투적 인물’(p.49)부터 비겁자나 권력을 활용하기가 너무 쉬운 자,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와 치열하게 노력해도 결코 얻기 어려운 자 등-의 관계, 가족, 우정, 사랑의 의미 등을 응축해서 담고 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여운 덕분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모든 것은 가능하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상징적 그림책 “네 개의 그릇”도 다시 펴보고 싶어진다. 책을 읽고 나면 킨케이드가 “브론테와 울프의 후손”이라는 의견에도 공감하게 될 것이다.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루시의 이야기는 아마도 쉽게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나는 이제 열대지방에 있지 않았고, 그 깨달음이 바짝 말라붙은 땅 위로 물줄기가 흐르듯 내 삶으로 흘러들어와 두 개의 강둑을 만들었다. 한쪽 강둑은 나의 과거였다. 워낙 빤하고 익숙해서, 당시의 불행조차 지금 떠올리니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나의 미래였다. 텅 빈 잿빛 공간. 비가 내리고 배 한 척 눈에 띄지 않는, 구름이 잔뜩 낀 바다 풍경이었다. 이제 내가 있는 곳은 열대지방이 아니었고, 몸의 거죽도 속도 다 추웠다. 그런 감각에 휩싸인 것은 처음이었다.”(p.11)

머라이어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다루는 그림책을 쓰고, 그것을 지키려 애쓰는 단체에 수익금을 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머라이어와 마찬가지로 그 단체 회어ᅟᅮᆫ들은 모두 부유했지만, 눈앞에서 진행되는 세상의 피폐화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연결시키지 못했다.(p.60)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기울어진 자전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곳이었다. 해가 쨍쨍하고 가뭄에 시달리는 단 하나의 계절만 있는 곳. 그런 장소에서 자라면서 난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나는 눈부신 햇빛을 닮은 기질을 가지지 못했고, 실제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오래도록 가뭄에 시달렸을 뿐이다.(p.71)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것만 해도 상당한 성취였다. 그걸 이루려 애만 쓰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까지 바라면 과하지 싶었다.(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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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리뷰 당선되신거 축하드려요~~

mazinga 2022-03-10 23:46   좋아요 1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한 날들 되세요!

thkang1001 2022-03-08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azinga님! 이달의 리뷰에 당선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azinga 2022-03-10 23: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