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너
존 윌리엄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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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윌리엄스의 『스토너(STONER)/RHK/김승욱 옮김』는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 작품’이었다가 50년 후,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세상의 평가를 받게되었다.(출판사소개) 초판이 출간 1년 만에 절판되었지만 2010년대에 와서 유럽 전역에서 재출간되며 역주행 베스트셀러 신화(출판사 소개)를 일으킨 작품이라는 특이점은 비현실적이다. 이 비현실성이 저자인 존 윌리엄스를, 그리고 주인공 윌리엄 스토너를 사라진 흔적으로써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해 숨쉬는 인물로 불러낸다.

“윌리엄 스토너는 1910년, 열아홉의 나이로 미주리 대학에 입학했다. 8년 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그는 박사학위를 받고 같은 대학의 강사가 되어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강단에 섰다.”(p.8) 작품의 첫 문장은 책의 줄거리이자 그의 일생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 작은 농가에서 농부의 외아들로 태어나 아주 어려서부터 집안일과 농사일을 돕던 스토너는 ‘집에서 하는 어드렛일보다 조금 덜 피곤한 허드렛일을 하듯이 학교에서 공부’(p.10)를 한다. 날로 척박해가는 땅의 수확에 도움받기 원하던 아버지는 그를 컬럼비아의 농과대학으로 보낸다. 그는 처음 캠퍼스에 들어섰던 때를 잊지 못하듯 아처 슬론 교수의 영문학 개론 시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질문받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그후, “모르겠나, 스토너 군?”(p.31)하고 물었던 슬론 교수는 스토너를 새로운 세계, 문학의 세계로 이끈다. 문학은 이제 그에게 새로운 소명이 된다. 슬론 교수 덕분에 ‘처음 시작한 곳에서 다시 출발’(p.42)하는 기회를 잡고 ‘땅’에 메였던 부모의 기대와 행로로부터 다른 길로 들어선다.

‘무남독녀였기 때문에 일찍부터 고독이 삶의 일부로 자리 잡았’(p.79)던 이디스 보스트윅을 향한 스토너의 구애와 결혼은 자연스럽게 진행된 듯 보였다. 이디스의 어머니 보스트윅 부인을 보았을 때 스토너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금방 알아차렸다.’(p.85) 습관적 불만과 앙심과 절망이 베어나오는 목소리까지. 그날 밤 ‘그는 어둠 속을 빤히 바라보며 자신의 삶이 왠지 낯설고 이상해졌다는 생각을 했다.’(p.88) 자신의 행동이 현명한 것인지 확신하지 못하던 그가 이 결혼이 실패작임을 깨닫는데는 한 달이 걸리지 않는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은 살얼음판처럼 위태롭고 낯설고 두려운 무엇으로 변해간다. 그 중에서도 가장 슬픈 것은 딸 그레이스 스토너, 태어나 처음 1년동안 오직 아버지의 손길과 목소리, 사랑으로만 자랐던 아이, 어린 아이였을 때부터 얼굴에 ‘그 내면에서 움직이고 있는 지성이 드러나’던 아이, 스토너의 서재에서 온전한 충만함으로 서로에게 기쁨이었던 아이와의 분리다. 이디스는 두 부녀를 있는 힘껏 떼어낸다, 전략적으로, 철저히.

이디스는 적의 얼굴을 하고 스토너를 공략한다. 그의 거처를 서재에서 일광욕실로, 결국 학교의 좁은 공동 연구실로 몰아내기까지 수위를 높여가는 행동은 충격적이다. 결국 ‘그래서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p.180)고 생각하는 스토너의 포기와 수용과 합리화의 단계들은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적의 얼굴이 이쯤에서 끝나면 좋으련만 스토너의 세미나 추가 수강을 요청하던 찰스 워커, 그의 지도교수이자 노골적으로 워커를 변호하면서 기이할 정도로 스토너에게 적대적이던 로맥스 박사까지 스토너를 이중 삼중으로 애워싼다. 부모님의 쓸쓸한 죽음 또한 물론이다. ‘이제마흔 두 살인 그의 앞날에는 즐겁게 여길 만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뒤를 돌아보아도 굳이 기억하고 싶은 것이 별로 없었다.’(p.254) 그런 가운데 그의 세미나를 들었던 젊은 강사 캐서린 드리스콜과의 만남은 위안이고 다행이고 슬픔이며 그럼에도 다시 다행이 아니었나 하는 여러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p.274) 캐서린과의 마지막 선택 또한 서로에게 최선이었고 다른 여지는 없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고든 핀치의 사무실을 나선 순간부터 그는 알고 있었다. 존재의 작은 중심에서 자라난 무감각한 공간 속 어딘가에서 자기 인생의 일부가 끝나버렸음을, 자신의 일부가 거의 죽음을 맞이하기 직전이라서 다가오는 죽음을 거의 차분한 태도로 지켜볼 수 있을 정도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p.301) 스토너는 ‘일이 망가질 것’을 ‘우리 자신이 파괴될 것’과 동의어로 생각한다. 그만큼 어느날 그에게 다가왔던 문학은 모든 것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할 가치이자 유일한 삶의 의미다. 그는 공격을 회피하는 법이 없다. 고통을 호소하는 법 없이 시선을 고정하고는 묵묵히 견뎌낸다. 그의 딸 그레이스 또한 그녀가 될 수 있었을 모든 가능성에 도달하지 못한 채 도망치는듯한 삶을 감수한다. 인간이 인간을 해롭게 하는데는 이유도 끝간데도 없어보인다. 작품의 마지막, 작가는 ‘죽음’을 묘사한다. 노쇠와 쇠약, 병과 죽음으로의 긴밀한 바통터치는 익숙하고 보편적인 경로를 보여주면서도 특별한 대단원의 막을 그려낸다. 이 마지막 장면들, 그 먹먹함은 『타타르인의 사막(디노 부차티/문학동네)』‘ 의 끝 페이지들을 연상시킨다. 조반니 드로고가 ’인류 공동의 적‘을 대면하는 순간의 밀폐된 공간, 드로고의 마지막 몫인 ’별들‘처럼 스토너는 ’그 자신의 책‘에 손을 뻗는다.

작가가 그려낸 윌리엄 스토너라는 인물은 무엇보다 ‘투명하다’는 단어의 인간화처럼 보인다. 그가 열정적으로 소망하는 순간이나 무기력하게 구석으로 내몰리는 순간이나 스토너는 외부의 것들을 투명하게 통과시킨다. 스토너를 통과해 곧바로 독자에게 닿는 충격은 그래서 더 이상 캐릭터의 것, 작중 인물의 것이 아니고 아림과 통증으로 되살아나고 증폭된다. 왜 이런 일이,이럴때는 어떻게 등의 대안과 처방과 방책을 끌어모으다가도 기대했지만 헛될 수 있고 헛되리라는 ‘인간 조건’을 인정하게 만든다. “그는 온전한 순수성, 성실성을 꿈꿨다. 하지만 타협하는 방법을 찾아냈으며, 몰려드는 시시한 일들에 정신을 빼앗겼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그리고 또 뭐가 있더라? 그는 생각했다. 또 뭐가 있지?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는 자신에게 물었다.”(p.388) ‘넌 무엇을 기대했나?’ 그의 마지막 성찰은 시처럼 노래처럼 유연하게 흐른다. 어쩌면 그를 처음 이끌었던 ‘소네트’만큼이나 완벽하다. 역자가 인용한 작가 인터뷰에처럼 스토너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그 일에 애정을 갖고 있고, 의미도 있다고 생각했다(p.395)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작가는 그를 ‘진짜 영웅’으로 생각했다고 밝힌다. ‘진짜 영웅’,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사랑이었건 고난이었건 불평도 핑계도 없이 감당했던 스토너는 그런 면에서 영웅이었음은 분명하다. 또 한 편의 시처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가 적절한 인사인지 모르겠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럽게, 그러다가 대담하게, 종내는 자랑스럽게.(p.159)

그는 다시 숨을 쉬었지만, 그의 몸 안에서 뭐라고 꼭 집어 말할 수 없는 차이가 느껴졌다. 자신이 뭔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지식 같은 것을. 세상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인 양 느긋해도 될 것 같았다.(p.390)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원한다면 그들을 무시할 수도 있었다. 세상의 모든 시간이 그의 것이었다. (p.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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