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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2월
평점 :
이 책을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페이지가 적절한 속도나 만일 그런게 있다면 권장 속도로 넘어가는 책은 아니었다. 감동에 사로잡혀서 다음 장으로 넘길 엄두를 못 내던 날들, 급하게 읽어야 할 책에 양보했던 순간에도 걱정은 없었다. 내게는 책이 있다, 나를 위해 열리고 있는 수업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보물은 확보되었다는 안도감이 책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온전했다. ‘현존하는 영어권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라 불리는 조지 손더스는 역자가 ‘가장 강렬한 조지 손더스 경험’이라고 했던 장편 『바르도의 링컨』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특별한 인상이 여전히 흐려지지 않는 동화 『프립 마을의 몹시 집요한 개퍼들』과 여운 깊은 우화 색채의 『여우 8』로 만났던 조지 손더스의 진면목은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정영목 옮김, 어크로스, 2023, 2021, 644면 분량)』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조지 손더스가 시러큐스 대학 문예창작 석사 과정에서 25년간 진행했던 강의를 공유한다. 부제가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이라 작가만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겠으나 실제 강의는 매년 선발된 6명의 젊은 작가를 위해 이루어졌다. 저자가 “그들은 들어올 때 이미 훌륭하다”(p.11)고 인정했던 소수 정예를 위한 수업은 “이 작품들로부터 배운 내용 일부를 종이에 적어 그 통찰을 보전하는 것”(p.609)을 또 하나의 목표가 된다. 책은 읽고 쓰는 일에 진심인 모두, 저자의 말로 바꾸자면 ‘읽기를 삶의 중심에 놓은 사람들’(p.19)을 염두에 두고 집필되었다. 저자는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대문호인 체호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4인의 작품 7편을 선택한다. 단편 전문을 실은데 이어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한 번 더 부연하는 구성에서 작품별로 배워야 핵심에 주목하고 질문에 답하며 활용하기에 따라 개인별 실습서의 역할까지 해낸다. 저자는 “우리는 일곱 개의 꼼꼼하게 구축된 세계 축척 모형에 들어설 것”(p.15)이라고 밝힌다. 단편 소설이라는 생의 압축 무대는 이토록 짧은데 놀랍도록 광활하게 펼쳐진다. 친절하고 사려 깊은 안내자는 지루할 틈 없이 독자를 처음 만나는 세계로 이끌어간다.
안톤 체호프의 <마차에서(1897)> 는 한 번에 한 장씩 읽으며 질문하고 답한다. 인물의 등장, 등장하는 방식, 구체성을 늘리며 성격이 드러나는 방식, 이야기가 예상을 빗겨갈 때 효율에 대한 기대의 감소를 살펴보며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 단편이란 가혹한 형식이다. 우스개, 노래, 교수대 편지만큼이나 가혹하다.”(p.47)라고. 작품을 읽고 설명을 듣고 속으로 질문하면서 백 년도 더 전, 책 속의 마리야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인물이자 경험으로 독자에게 새겨진다. 이 아름다운 장면은 페이지로부터 떨어져 나와 영속한다. 저자는 말한다. “단편은 단지 잇따라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다. 단편은 기세 좋게 몇 페이지 계속되다 멈추는 활기찬 서사가 아니다. 우리가 끝까지 다 읽을 수밖에 없게 하지만, 그래, 그렇지만 그 와중에 어찌 된 일인지 상승하거나 확장하여···이만하면 됐다는 수준에 이르는 서사다.”(p.86)
이반 투르게네프의 <가수들(1852)>을 읽으며, 여백에 빽빽하고 구체적인 묘사, 라고 메모하였다. 저자의 교실에서도 이 모든 곁가지, 끝없는 외형 묘사는 왜죠, 라고 의구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번 장에서는 ‘내가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것들 Things I Couldn't Help Noticing. TICHN'이라는 딱지가 붙은 수레 개념이 등장한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을 때 이 수레를 끌고 다니며 단서를 차례로 싣는다. 저자는 좋은 이야기란 “과잉의 패턴을 만든 뒤 그 과잉에 주목하고 그것을 장점으로 전환하는 이야기”(p.137)라며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그 실례로 제시한다.
또 한 가지, 저자는 우리가 어떤 작가가 될지 거의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되겠다고 꿈꾸던 작가와는 닮은 구석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진짜로 우리인 것으로부터 태어난다. 글에서 또 어쩌면 삶에서도 우리가 누르려고 하거나 부인하거나 교정하려고 해왔던 경향, 우리가 어쩌면 약간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는 부분들로부터.”(p.171)라는 발견에 이르게 된다. 이 책은 글쓰기라는 주제가 아닌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그에 미치지 못하였는가하는 인식에 닿도록 이끈다. 185면에는 글쓰기에 대한 완벽한 정의가 나온다. 쉼 없이 감탄사를 내뱉게 하는.
안톤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사람(1899)>은 패턴이 있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교본이다. 예상을 만드는 유서 깊은 한 가지 방법(p.215)이다. 단편의 중요한 요소인 ‘비약의 대담성’을 짚고, 이 작품을 ‘굴종하는 여자의 유형에 관한 논평’으로 평가 절하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밝힌다. 올렌카는 유명한 캐릭터로 때론 희화화되기도 하였는데 그녀를 대하는 감정은 책을 읽어나가며 변화한다. 저자의 결론은 다시 한 번 감동적이다.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1895)>에서 저자는 어떤 이야기는 의무감에서 읽는데 말하자면 일련의 단어를 해독하며 예의바르게 견디는 모양새라고 한다. “그러나 <주인과 하인>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살기 시작한다.”(p.350)고 표현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이 그런 종류의 이야기, 글이 멈추고 삶이 시작하는 종류의 이야기다. 그러나 주여, 보기보다는 어려운 일이다.”(p.351)라고. 톨스토이의 <단지 알료샤(1905)>는 마지막에 실렸다. 글로 단정 짓지 않고 생략한 결말을 어떻게 읽을지 숙고하는 장이다. 절대 답을 주지 않고 ‘계속 궁금해해라’ 하고 말하는 점이 <단지 알료샤>의 진짜 성취라고 해석한다.
니콜라이 고골의 <코(1836)>는 우아하지 않은 글이 아니라 “위대한 작가가 우아하지 않은 작가가 쓰는 글을 쓰고 있는 것”(p.440)이라고 저자는 평한다. 스카즈 서술 기법을 활용한 기발하고 독특한 이야기는 한 번 듣기만 해도 잊기 불가능한 사건이자 부조리의 정점을 보여준다. 안톤 체호프의 <구스베리(1898)>는 “비 오는 연못에서 헤엄치기”라는 제목으로 책 속 장면을 현실로 이어받는다. 체호프와 톨스토이 사이의 우정으로까지 연결되고 독자는 두 거장의 시간을 아득하게 그려본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독자는 러시아 대문호들이 남긴 명작을 다시 읽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저자의 지침을 따라 분석하고 파고들면서 새로운 관점을 얻고 반복과 생략, 과장과 은유 사이에서 생각지 못했던 통찰을 만난다. 저자는 그의 저작이 글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종류의 책으로 잘못 인식될까 우려한다. ‘이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듯 오히려 읽는 행위를 통해 직접 ‘이야기를 살기 시작하는’ 체험을 하게 된다. 한 번 그들과 함께 살아봄으로 더 나은 삶, 더 나은 사람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햇살처럼 퍼지고 온기를 입는다. 비록 곧 스러질지라도 말이다.
일곱 작품 덕분에 만나게 된 생생한 인물들에 대하여 저자는 아름다운 말을 남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관념으로 출발하여 글이 되었고, 그런 다음 우리의 마음속에서 관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앞에 놓인 아름답고 어렵고 귀중한 날들로 다가갈 때 늘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도덕적 무기의 일부가 될 것이다.”(p.607)라고. 독자는 그들의 전작을 읽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될지 모른다. 모두 작가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어제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날들을 맞고, 선한 영향을 나누는 일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이 책은 어떻게 삶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판단할지, 결국 선택하고 실천할지에 대한 무대가 된다. 폐막하는 일 없는 무대다. 이 책은 발견의 시간을 선사한다. 신대륙은 아니더라도 미지의, 상상의, 꿈꾸던 땅에 대하여 쉬운 말로 이해시키고 이끄는 지침서다. 취할 것은 너무도 많아서 독자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마음이 될 것이다. 밑줄로 동여매어진 문장들이, 그 목소리가 그리워서 곧 다시 펴야 할 것이다.
책 속에서>
당신에게는 이야기를 시작할 아이디어가 필요하지 않다. 그냥 하나의 문장이 필요할 뿐이다. 그 문장은 어디서 오나? 어디에서든. 특별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계속 반응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특별한 문장이 될 것이다. 그 문장에 반응하고, 이어 평범함이나 너저분함 가운데 일부를 벗겨내기를 바라면서 문장을 바꾸는 것이···글쓰기다. 그게 글쓰기의 전부이며 또는 전부여야 한다.(p.185)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가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일치할 때 좋아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전율을 일으키고, 진실에서 느끼는 이런 전율 때문에 우리는 계속 읽어나간다.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에서 우리가 계속 읽어나가는 주요한 이유는 사실 그것이다. 모든 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가볍게 회의하는 상태에서 읽는다. 모든 문장은 진실에 대한 작은 투표다. “진실이냐 아니냐?” 우리는 계속 묻는다. 우리의 답이 “그래, 진실로 들린다”이면 우리는 그 작은 주유소에서 튕겨져 나와 계속 읽는다.(p.343)
이 악몽은 여러 형태를 띨 수 있다. 물론 코를 잃는 것일 수도 있지만, 팔이나 건강이나 생계나 아내나 자식이나 제정신을 잃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은 언제든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악몽으로 가득하지만, 코발료프가 찾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처럼 이런 사실을 믿지 않거나 적어도 아직은 믿지 않는다.(p.457)
따라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계속된다. 어떤 사람이 코를 잃어버리고, 몸이 불편한 걸인이 성당 앞에서 조롱을 당하고, 무고한 죄수가 차르 체제의 더러운 감옥에서 썩어가고, 부자가 화려한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동안 아이들이 굶어도. 우리는 1835년 3월 25일에 허구의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지고 있었을 또 다른 언어도단인 일들을 수백 가지라도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어느 날에나, 현실의 어느 도시에서나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한 언어도단인 일들을. 그런 일을 해결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것이며, 그러니 그렇게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우리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p.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