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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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서제인 옮김, 암실문고, 2023, 432쪽 분량)은 마리아 투마킨의 비문학 저서로 고통의 얼굴을 한 생생한 사례를 열거하고 누적한다. 르포르타주의 옷을 입고 때로 문학적인 사유와 은유로 나아가고, 때로 믿지 못할 초현실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독자는 어느 순간 주된 분위기와 지향에 속하여 페이지를 넘긴다는 안정감에서 벗어난다. 예민하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 줄타기와 같은 읽기는 이 줄이 최소한 튼튼하기를 기대하지만 이 기대 또한 충족될지는 의심스럽다. 흔들고 휘청거려 독자를 떨구려는 줄이다. 어쩌면 자아를 가진 줄이 아닐까, 느닷없이 한 가운데를 절단해버리는 줄이 아닐까, 고민에 빠뜨린다.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문화사를 전공하고 다양한 사회 문제와 인간 내면의 수수께끼 같은 측면을 탐구하며 그 과정을 기록해 왔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으로 번역된 책의 원제는 『Axiomatic』이다. ‘자명한’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이중적으로, 다시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현실의 사건들은 예측이나 기존의 틀, 굴레를 깨기에 자명함을 오히려 경계한다. 고통을 말해야 한다는 적극적 권유인지, 고통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접근하라는 경고인지, 감히 해석하려는 당신을 열 외시키겠다는 날카로움인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 연대의 방법론인지 아마도 이들 모두를 품고 있을테다.


책은 목차가 있다. 다섯 개의 장은 각각 주요 테마로 또 다른 사례를 접목하거나 확장한다. 저자는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머물면서 보고, 경청하고, 전한다. 청소년 자살 생존자나 마약 중독자들,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나 아스팔트 위에서 반복적으로 트럭(저자가 비유한)에 치이는 자들, 가정 폭력 피해자 등의 기록이 쌓인다. 1장에서는 브로드스키의 시를 가져온다. “슬픔을 비롯한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아니, 슬픔은 아니다. 슬픔에는 한계가 없다.” 이 시의 후반은 “그런데 공간이란 무엇일까, 그게 만약 주어진 모든 지점에서 부재하는 육체를 뜻하지 않는다면?”(p.90) 누군가의 부재로 꽉 찬 공간이라. 이어 삶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고통의 반경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시간이 사람들의 상처에 내려앉는 것일까, 라고 묻는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은 틈새에 연거푸 얼굴을 내민다.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p.92)이라고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정의도 마찬가지로 묻는다. 시간과 공간은 다시 한 번 규정된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여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하여 아들이 남긴 유일한 손자를 위해 싸운다. 심리학적 식견을 늘어놓는 이들은 어디든 있으나 정작 그녀가 말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만남에서 저자는 ‘오도와 오판, 그리고 오심’(p.122), 학대당하고 방치되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흔한 일들은 어떻게 계속되는지, 행정 구조적 문제와 관료주의적 문제와 과부하 걸린 청소년 구호 체계 자체의 문제로 치부되는지, 그러면서 다른 지점을 덧붙인다.


다양한 작품에서 가져온 인용문은 시선을 깊게 하거나 넓혀줄 징검다리가 될 수 있겠다. 찾아 읽는다면 말이다. 거침없고 직관적인 문장, 속도감 있는 이동, 일종의 맹렬함이 활자 사이에 바람을 일으키는 듯하다. 이 책은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최소한 A, B, C를 합시다, 라고 정리해주지 않는다. 충분치 않을지라도 힘 닿는데까지 해봅시다, 라고 요약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안도와 멀어지고 긴장을 풀지 못한다. 제목이나 표지 그림, 서술 기법과 전개 방식, 구조가 그렇다. 사례별 종결도, 책 전체의 매듭도 늪과 같은 끈끈함과 질척이는 감각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문제의 열거와 암울한 반복을 이 책의 아쉬운 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별히 더 황망한 부분, 특별히 마음 아프거나 애달픈 지점을 꼽을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반응 역시 감각이고 반사 일까봐, 이 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흩어질까 봐 걱정을 남긴다. 감정적으로 이입하고 몰입하여 읽었으나 발생하는 질문들이 책을 덮으면서 읽기 전으로 회귀하는 건 아닐까라는 염려와 유사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었다. 두 번째 장에서 화가인 여자는 말한다. “저는 심연에 던져져도 거기서 인간의 표정과 경험들을 찾아내 그릴 거예요.”(p.113)라고. 이 말은 저자의 집필 작업과도 닿아 있다. 무방비로 노출된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업, 개념정리와 요약과 절차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합의되고 요구에 부응하는 편린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재발견하려는 의지다. 본질에 밀착하겠다는 시도다. 바람직하지 못한 편독가로서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읽지 않았을 책을 약속한 과제 덕분에 읽었다. 오히려 뜻깊은 독서가 되었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부분들이 빼곡한 저서로, 기억하고 싶은 책으로 필자 역시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오 당신, 안다는 자여/ 당신은 알았는가,

어머니가 죽는 걸 보고도/ 당신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오 당신, 안다는 자여/ 당신은

알았는가, 하루가 1년보다 길고/ 1분이

평생보다 길다는 것을/······당신은

이것을 알았는가/ 당신, 안다는 자는.


(사를로트 델보 <오 당신, 안다는 자여>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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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와 분노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03
윌리엄 포크너 지음, 공진호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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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간 책꽂이에 머물렀던 <소리와 분노>를 책상으로 가져온 건 한달 전이다. 과제처럼 할당된 책들 사이에 틈을 내어 포크너를 읽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지역의 공립도서관에서 진행중인 노벨문학상 작품 토론커리에 포크너는 없었으나 마지막 차시를 <소리와 분노>로 수정하였다. 포크너를 읽기에 딱 좋은 시간은 우연인 듯 필연처럼 만들어졌다. <압살롬 압살롬>을 읽은지 5년이 흘러 세부 내용을 명확하게 기억하지 못하지만 안개로 뿌연 독해의 여정에서 반들한 조약돌처럼 확실한 의미 하나 발견하기가 얼마나 어려웠는지, 그렇기에 얼마나 경탄했는지, 그럼에도 부실하게나마 기록을 남기는게 또 얼마나 감사했는지 분명히 기억한다. 윌리엄 포크너 최고의 걸작이라는, 작가 자신 또한 내가 다시 쓸 수 없는 걸작이라고 평했다는 소리와 분노(공진호 옮김, 문학동네, 2013, 1929, 460쪽 분량)뉴욕주 뉴욕시라는 말로 맺을 때 독자는 숨을 죽인다. 여운이라기에는 묵직하여 마지막 온점이 돌덩어리로 남은 느낌이다. 온점이라는 표현도 적절치 않다. 그림자들의 맹목적인 돌진을 보았다. 허망한 이탈과 느닷없는 절연을, 무표정과 동시에 일그러진 가면을 보았으며, 참혹한 굉음과 서늘한 침묵이 함께였다.

 

소설은 남북 전쟁 후 와해되어가는 남부의 실상을 제퍼슨이라는 가공의 땅, 대지주인 콤슨가의 몰락 과정을 통해 상징적으로 그려 보인다. 네 개의 장은 콤슨가 4남매 중 세 명이 화자가 되어 일인칭 시점으로 서술한다. 막내인 벤지, 장남인 퀜틴, 셋째 제이슨 순서로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일들을 불연속적으로 기록한다. 마지막 장은 작가의 전지적 시점으로 서술하는데 사남매를 키운 흑인 하녀 딜지의 목소리가 담긴다. 벤지 섹션으로 부르는 첫 장은 선천적으로 장애를 가진 벤지가 구사하는 백치의 언어’(p.426)로 콤슨가의 사람들을 만난다. 서른세 살 성인 벤지로 시작하여 유년기와 청소년기까지 시간 이동이 이루어질 때 각각은 활자에 색 입히기로 구분되고, 벤지를 돌보는 이들이 변경되는 지점을 기준으로 시기를 가늠해야 한다. 끙끙거리기와 울부짖기 정도로만 의사표현이 가능한 벤지에게 아프고 차가운 언어, 비아냥과 협박 등의 폭력이 돌보는 이들로부터 보이지 않게, 돌봐야하지만 방기하는 이(어머니)로부터 근본적으로 이루어진다. 다만 누나인 캐디가 집을 떠나기 전까지 애착과 의지의 대상이 되어준다. 일독을 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와 읽다보면 다음 장들과 연결되면서 비로소 이해가 되니 초독의 미진함과 허술함, 어쩔수 없는 독해의 난도를 실감한다. “울타리 틈 구불구불한 꽃 자리 사이로 그들이 치는 게 보였다.”(p.9)라는 첫 문장부터 독자는 화자가 보는 세상을 그의 감각에 근접하여 스며들기 위해 애쓰는 여정에 돌입한다.

 

가장 분량이 많으며 책의 중심이랄 수 있는 두 번째 장, 퀜틴 섹션은 커튼에 창틀 그림자가 보이니 일곱시에서 여덟시 사이일 것이며 시계 소리를 듣고 있는 나는 또다시 시간 안에 있는 것이다.”(p.101)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그는 생각한다. 사유하고 골똘히 몰입하며, 고요하게 문장을 만들어나간다. 사고의 흐름은 유려하고 다분히 현학적이다. 주제나 사안에 따라 논리를 세우고 확정한다. 부드럽고 친절한 퀜틴은 아픔을 감추고, 자조적으로 관망하며, 내색하지 않은채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기까지 퀜틴은 현재와 과거를 끊임없이 왕래하고, 시간을 정의하는 아버지의 경구들을 되뇌고 확인한다. “나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없으니까. 내가 없는데 그러면 하버드도 없는데 그러면 모자인들 있으랴.”, “다시. 존재의 과거형보다 슬픈 말. 다시. 무엇보다 슬픈 말. 다시.”(p.128) 인간은 자기 불행의 총합이라고 말했던 아버지. “언젠가는 불행도 그칠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네 불행이야.”(p.140)라고 아버지는 못 박는다. 시간을 중단시킴으로 언젠가는이라는 희망도 떠나보내는 퀜틴의 결단에 그의 기여는 어떠했나. 벤지의 목초지를 팔아 하버드에 오게 된 퀜틴은 어린 시절 동화속 그림을 기억하며, 캐디를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 소리들이 없었던 거나 다름없기를 바랐던, 간절했던 그 기억을 품고 존재의 과거형으로 화한다.

 

제이슨은 성장하여 콤슨가의 가장이 되었다. 그는 퀜틴이나 캐디와 달리 혜택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받기로 예정된 혜택도 빼앗겼다. 캐디 때문이라고 여기는 그는 캐디의 딸 퀜틴까지 한데 묶어 지론을 편다. “한번 잡년은 영원한 잡년이다.”(p.241)라고. 벤지 섹션의 첫 문장이다. 어머니인 콤슨 부인은 더 무기력해졌다, 가정의 가장이자 폭군 행세를 하는 아들과 애초에 다툴 생각이 없다. 비굴할 정도이지만 차곡차곡 축적해온 날들의 결과로서 현재는 정확한 값에 도달했다. 소설은 제이슨의 화법과 행동, 반응을 세밀하게 드러냄으로 독자에게 거의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매 순간 억눌린 분노, 적대적인 기운이 폭발 직전의 아슬아슬함을 내뿜는다. 그에게 반하는 목소리를 내는 유일한 인물이 여전히 콤슨가를 지키고 있는 흑인 하녀 딜지다. 그녀는 왜 제이슨이 저러도록 내버려 두느냐고 콤슨 부인에게 직언한다. 부활절 예배에서 벤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는 딜지, 언제든 필요한 만큼의 불굴의 힘을 발굴해내는(p.394) 사람, 시작을 보았고 이제 마지막이 보인다는 딜지는 마지막 때를 피하지 않고 지켜내는 사람, 지켜보겠다는 사람이다. 비록 비참한 몰락만이 남아있을지라도.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떠오르는 이는 캐디다. 캐디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녀가 어디에 있든 잘 지내고 있기를 바라게 된다. 해설에서 포크너는 단편으로 끝날 이야기를 <소리와 분노>라는 장편으로 만들었고, 그 중심에 캐디가 있다고 전한다. “캐디를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단편으로 짧은 생을 살게 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p.430)는데 캐디가 단독 화자로 나서는 장은 없다. 사랑이나 이해를 받지 못하고 집에서 탈출하는, 부모 없는 여자 아이의 이미지(p.429)는 캐디가 되었다. 내몰리는 아이다. 이런 이미지는 그녀의 딸 퀜틴으로 이어진다. 자신의 현재 불행이 모두 그년때문이라고 호소하는 제이슨에게 보안관은 자네가 그 아이를 도망치게 내몰았어, 제이슨.”(p.399)이라고 명확히 말한다. 영민하고 사려 깊었던 소녀 캐디는 사랑하는 것들을 차례로 잃어버린다. 그것에 접근할 방도를 찾아낼 수 있을지도 알 수 없다. 소설에서 그녀의 고통은 구체적으로 계량되거나 묘사되지 않는다. 부지중에 그랬건, 캐디, 캐디, 하고 벤지 귀에 속삭이는 러스터 마냥 고의였건, 고통은 틈을 놓치지 않고 파고든다. 캐디는 소리조차 없지만 벤지는 울부짖는다. “그것은 태양 아래 목소리 없는 모든 고통에서 나오는 장중한 절망의 소리였다.”(p.415) 벤지가 내는 소리는 피할 수 없는 공포이자 충격’(p.419)이며 콤슨가 구성원 전체의 비통한 목소리를 일정 부분 대변한다. 다만 콤슨 부인은 제외하고.

 

콤슨 부인의 한결같은 자기중심주의, 극단의 이기주의, 회피와 합리화는 한 가정을 무너뜨리는데 충분한 독을 간직한다. “내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런 애들이 생겨났을까 벤저민으로도 벌은 충분했는데(후략)”(p.137)라는 말을 입 밖에 내는 이가 콤슨 부인이다.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말을 끊임없이 내뱉음으로 아이들에게 독소를 주입하는 어머니-“하지만 엄마의 마음속에는 모든 게 끝나 있었다. 끝장이야. 끝장이야. 그렇다면 우리 모두에게 독이 침투했던 것이다.”(p.136)가 콤슨 부인이다. 맹독은 한 가족을, 시대를, 생명을 소멸하고야 만다. 그녀의 대척점에 딜지가 위치한다. 소설은 다양한 삽화를 곁들여 다채로운 즐거움을 선사한다. 그 중에서 부활절 예배 장면은 인상 깊다. 초청 목사의 모습에 교인들은 실망을 넘어 불평할 지경이다. 그러나 그가 전하기 시작하였을 때 사람들은 감동하고 변화한다. 이 장면은 사무엘상 16장에서 여호와가 사무엘에게 이르신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라는 말씀을 상기시킨다. 사람은 외모를 보나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는 말씀이다. 보이는 것에 따라 빠르게 자기 입장을 정하는 인간의 속성을 생각할 때 딜지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벤지를 보듬는다. ‘어쨓든 너는 주님의 자녀야, ‘앞으로도 오래도록’(p.416)라고 덧붙인다, 그토록 존귀하다고. 무엇을 선택하고 어떤 말을 낼 것인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성찰하고 또 바꿔야 한다. 그럴 때 진행되는 비극이라도 속도를 조절할 수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시대를 통과하는 한 가족의 비극은 또 다른 아픈 가족사인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를 떠올린다. 그들이 도피처로 삼았던 마약이나 술이 퀜틴이 빠져 들어간 죽음이나 아버지에게 있어서의 술과 다를 바 없다. 전조와 암시는 계속되고 복선을 연거푸 깔리는데 막을 길은 없다는 게 무력감을 배가시킨다. 절망이 숨을 열었다 막았다 눈앞에서 찰랑거리는 느낌이다. 역시 어렵지만 마성의 소설이다. 무한 반복해서 읽고 싶은 문장이 넘친다. 퀜틴 섹션에 특별히 더하지만 한 문장이 발하는 통찰은 공기를 진동시키듯 점진적으로 퍼져온다. 연극조로 되풀이하는 아버지의 조언 뭉치는 아들을 결국 부순다. 망치처럼. 아버지의 조언은 구원자 역할을 하지 못하였고 어머니는 있으나 부재중이었다. 퀜틴가 사남매는 반드시 주어졌어야 할 부모의 절대적 사랑을 누린 적이 없다. 동화책 속 그림을 보고 어두운 구덩이에 갇힌 아이들에 자신을 대입하고 위로 올라가는 부모에게 분노한다. 그러면서 캐디를 희망 또는 절망의 대상으로, 천국 또는 지옥을 예비한 인물로 지목하고 벤지처럼 여전히 울며 이름 부르거나, 퀜틴처럼 동반하기 원했으나 혼자 끝을 맺거나, 제이슨처럼 악에 받힌 행보를 보인다. 고통에 찬 한 가족의 역사를 독자가 읽어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를 생각한다. 뿌리박힌 관습에 의탁하여, 또는 편협한 아집에 사로잡힌 채 자기 안에 갇히는 게 얼마나 위험한지 고발한다. 화자를 바꿔가며 시간을 복기하는 이유는 작위를 지양하고 진실에 다가서라는 경종이 아닐까. 책임 회피와 의무의 방기가 일으키는 파장을 알아차릴 것, 쉽지 않지만 유혹도 위험도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번역본을 읽는 독자로서 역자 공진호에게 감사한 마음이 든다. 내밀한 의식 안에 두 겹, 세 겹의 목소리와 이미지를 들이고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과 병렬 서술하는 문장들, 간단한 대화조차 너무 많은 함의와 너무 많은 과거 인장들을 끌고 와 미래와 절연하는 문장들, 문장이 되지 못하는 파편화된 음절을 붙들고 살아내야 하는 부조리와 참혹함, 나무 냄새와 인동덩굴 향기로 말보다 더 많은 이야기를 남기는 쓸쓸함, 자기 자리에서 구원자는 되지 못하여도 지키는 자로 남는 목소리 등 <소리와 분노> 읽기는 서사와 전개해 나가는 형식을 통해 고루 특수하고도 있을법한 이야기를 증언한다. 20세기 초 미국 남부의 이야기는 어느새 보편성을 획득하여 현대의 독자에게 놀랍도록 꼭 들어맞는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퀜틴의 퇴장이 아쉽다면 수년 후 출간된 <압살롬 압살롬>의 화자로 등장한 하버드 시절 퀜틴을 찾아보는 것도 방법이겠다. 그가 전하는 서트펜 가 또한 결코 단순하지 않은 가계도를 그리지만.

 

미국 모더니즘 문학의 선구자 윌리엄 포크너는 미국 현대 소설에 기여한 공로는 지대할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라는 말과 함께 1949년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된다. 읽어야 할 포크너의 작품이 남아 있다는 게 기쁘다. 어떤 틀도, 최소한의 개요표도 없이 무작정 기록한다는 행위는 늘 감정의 파도를 타고 그러므로 흠결이 두드러진다. 일독 후 쓴다는 결심 또한 얼마나 용감한 넌센스인지. 그럼에도 기억의 쇠퇴는 빠르고 깨달음의 빈곤은 가속하기에 읽을 때마다 오독이었음을 발견할지언정 읽은 후 기록하고 만다. 아직 노벨 문학상 수상작 토론의 마지막 차시를 위한 논제 만들기가 남아있다. 고달프지만 가슴 뛰는 일 아닌가. 포크너는 반복해서, 어쩌면 주기적으로 재회해야 할 작가다. 문제는 늘 시간이다. 퀜틴적 시간, 시지프스적 시간. 크로노스 또는 카이로스의 시간, 어느 편으로 축이 기울건 문제는 시간이다. 얼마나 남아 있는지 가늠할 수 없는 시간을 지금 어떻게 채우고 있나. 부활절 주일을 앞둔 고난 주간을 보낸다.

 


책 속에서>


하지만 비가 올 때면 황혼 무렵에 냄새가 집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가 황혼 무렵에 더 내리는 것인지 황혼빛 자체에 무언가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인동덩굴 냄새는 그때 가장 강했다. 나는 언제 그치지 언제 그치지 하며 침대에 누워 있곤 했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외풍에서 물냄새가, 축축하고 한결같은 호흡 냄새가 났다. 어떤 때는 그 말을 되뇌다 인동덩굴 냄새가 쏟아지는 잠에 섞여들기도 해 그 모든 것은 밤과 불안을 상징하게 되었고, 잠들지도 깨지도 않은 상태로 누워 회색빛 어스름 속 긴 복도를 응시하면 모든 안정적인 것들이 허망하고 불합리해졌으며 내가 행한 모든 것이 나의 모든 느낌과 고통들 그 그림자들은 기묘하고 비뚤어진 형태를 띠고 스스로 긍정했어야 할 의미를 부인함으로써 그들 자체에 내재하는 일관성이 없이 조롱하였으되 나는 생각하기를 나는 존재했다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존재가 아니었다.(p.225~226)

 

그러다 결국 그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고 회중도 존재하지 않게 되었으며 목소리조차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그들은 말이 필요 없는 경지에 들어 영창을 읊는 박자로 서로 가슴으로 이야기했다. 그가 성경대에 기대더니 원숭이 같은 얼굴을 쳐들었다. 그러자 그의 자세는 초라함과 하찮음을 초월하는 평온한 고통의 십자가가 되었고 그의 얼굴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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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이야기들
발터 벤야민 지음, 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 엘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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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발터 벤야민의 『고독의 이야기들』(파울 클레 그림, 김정아 옮김, 엘리, 2025, 344쪽 분량)은 노벨레 형식의 문학 작품집으로 꿈과 현실을 오가며 이야기 타래를 푼다. 노벨레는 단편 소설 양식이나 짧은 소설 장르를 지칭하는데 괴테는 여기에 ‘새로운’이라는 이탈리아어 의미를 가져와 ‘들어본 적 없는 사건’을 노벨레의 본래 개념으로 정리하였다. 이로써 독자는 언어 철학자이자 문예학자, 비평가로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 작품」을 비롯하여 기념비적인 저작들을 남겼던 발터 벤야민 세계로 진입하는 또 다른 길을 선사 받게 되었다. 주디스 버틀러에 따르면 <고독의 이야기들>은 그의 비평 작업을 어떻게 선행적으로 수행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작품이다. 벤야민의 애독자라면 말 그대로 선물이 될 만한 책이고,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에도 발터 벤야민 입문서로 가치를 발할 것이다.


『고독의 이야기들』은 1부 <꿈과 몽상>, 2부 <여행>, 3부 <놀이와 교육론>까지 저자가 관심을 가져온 주제별로 새롭게 묶였다. 마흔두 편의 글 말미에는 집필 시기와 출처를 표기했는데 생전에는 발표되지 않은 글이 상당하다. 각 부에는 연관 테마를 다루는 책의 서평도 실려 있어서 독자는 저자의 다양한 글을 경험할 수 있다. 서평을 먼저 말하자면 ‘서평은 소개다’라는 기준에서 볼 때, 평을 읽은 후 궁금한 마음에 책을 검색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프란츠 헤셀에 대하여 “그는 이 상황과 저 상황, 이 한 시간과 저 한 시간, 이 1분과 저1분, 이 단어와 저 단어를 분리하고 구별 짓는 문턱들을 어느 누구보다 예민하게 발바닥으로 감지한다.”(p.156)고 소개한다. 책의 형식과 내용을, 빼어난 점과 약점을 균형있게 또 논리적으로 조망하여 평의 진수, 평의 모범을 보여주기에 책에 실린 여섯 편의 글은 두고두고 탐독할 만하다. 예술론을 비롯한 주요 저작들을 더 늦지 않게 읽어야 할 동기를 부여한다.


저자가 구성하지 않고 추후에 발굴되고 신중하게 다루어진 글이어서일까, 한편 한편을 더욱 아껴가며 읽게 된다. 이 책을 선택하는 데는 파울 클레의 작품도 큰 몫을 하였다. 단상처럼 분량이 짧아도 한 번 읽고 가뿐하게 넘길 수 없는 글들은 클레의 그림으로 또 한 번 파장을 일으킨다. <너무나 가까운>은 그리움이라는 정서적 상태, 감정적 반응을 물리적으로 치환하고 층위를 달리한 끝에 ‘복된 그리움’에 닿는다. “이름 속에 형상 없이 깃든 그는 모든 형상의 피난처다.”(p.51) 이름은 이미 불멸의 명성이 되어 버린 게 아닐까 잠시 궁리한다. 이 글은 클레의 <한 쌍의 천사>와 함께이다. 거친 듯 부드러운 필선이 그대로 드러난 천사의 그림은 연약해 보이기도 강건해 보이기도 한다. 그들 사이에 충분히 그리워할 거리가 필요할지, 마음은 이미 일심동체일지 그림은 다시 상념을 보탠다.


2부는 여행을 이야기한다. “‘있을 곳 없는 사람이 집으로 삼는 시간’은 떠나올 때 두고 온 것이 아무것도 없는 여행자에게는 왕궁이 된다.”(p.170)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북유럽 바다>는 도시, 꽃, 바다를 차례로 지목한다. 그리고 <빛>을 호명하는데 어느 집에선가 들려오는 소리들이 이 밤을 “달력에 없는 어느 하루”로 바꾸어 놓는다고 작가는 말한다. “시간 창고 안에 들어가보면 사용되지 않은 하루하루가 쌓여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 수천 년 전 지구가 얼려둔 나날이.”(p.175) 이어지는 문장을 따라가면서도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독자는 시간 창고에 냉동 보관되어 있는 나날을, 시간의 뭉텅이 또는 부스러기를 상상하며 꼼꼼하게 다음 문장을 읽어야 하는데 여기서 멈춘다. 생각은 이미 어떤 날개를, 작위적인 날개이든 유치한 날개이든 만들어내고는 뜬금없이 날기 시작한다. 3부는 상상력이 더욱 빛난다. 수수께끼와 게임, 퀴즈 등 위트가 넘치는 글은 다시 한번 생각하기와 비틀어 생각하기, 한계 넘어 생각하기의 자유로움을 펼쳐낸다.


1부의 ‘몽상’ 편에서는 “두 번째 자아: 새해 전야 성찰을 위한 이야기”가 인상 깊다. 평균 4주에서 6주에 한 번 이사하는, 독신남 앞에 ‘군식구 없는’을 겹따옴표로 강조한 주인공 크람바허는 어쩔 수 없이 저자 자신을 투영한다. 1930년에서 33년경에 썼으리라 예측되는 글은 33년 히틀러가 수상으로 임명되며 바이마르 공화국이 막을 내리는 시기와 겹친다. 크람바허가 카이저파노라마를 통해 관람하는 장면은 이국의 풍경이 아니라 이루지 못한 소망들이다. 그는 기계장치를 통과해 ‘두 번째 자아’를 만나며 열두 개의 문장으로 한 해를 돌아본다. 성취보다는 상실과 아쉬움의 문장이다. 이에 더해 그는 외출조차 하지 않았고, 꿈에 침잠하지도 못했으며, 빈 잔을 떨구지 않은 몽상 상태였다. “그때 저 기회를 잡고 싶었는데”(p.44)라는 열두 번째 문장은 마치 미래를 예견한 듯하여 너무 마음이 아프다. 야만의 시대가 시작되면서 국경을 넘을 기회를 잡지 못한 벤야민은 필생의 저작을 미완으로 남긴 채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 현실을 초월한 듯 신비로우면서도 현실 인식과 비판의 지점들을 아로새긴 지성의 이야기를 읽어보기를 권한다.



책 속에서>

또 나는 방에서 소음 때문에 너무 고생을 했었다. 어젯밤 꿈이 그것을 잊지 않고 새겨두었다. 나는 지도 밖에 나와 있으면서 동시에 지도에 묘사되어 있는 풍경 안에 들어와 있었다. 풍경은 경악스럽도록 황량했다. 황량한 풍경이 바위투성이 황무지였는지 활자들 말고는 아무도 살지 않는 텅 빈 회색 바닥이었는지, 누가 물어보았다면 대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활자들이 바닥 위를 구불구불 행진해 긴 산맥처럼 보였다. 그렇게 형성되어 있던 단어들은 서로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었다. 내가 귀 지도의 미로 속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머리 내지 몸으로 감지되었다. 하지만 그 지도는 동시에 지옥도이기도 했다.(p.93/17.일기)



벤야민은 최고의 이야기꾼인 프루스트에 대해 이렇게 썼다. “그는 그리움에 상처투성이가 되어 침대에 쓰러졌다. 그가 그토록 그리워한 세계는 현실과 비슷하지만 일그러져 있는 세계, 현실의 진짜 얼굴인 초현실이 돌발 출현하는 세계였다.” 벤야민에 대해, 그리고 벤야민 본인의 픽션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을 것이다.(p.335/편집자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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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지음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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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체험하지 않은 것은 한 줄도 쓰지 않았다. 그러나 단 한 줄도 체험 그대로 쓰지 않았다.’라는 말을 남겼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선두에 있는 가르시아 마르케스 역시 내 책에 쓰인 것 가운데 실제로 일어난 사건에서 비롯되지 않은 것은 단 한 줄도 없다.’(p.161)라는 사뭇 비슷한 말을 했다. 중편 소설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조구호 옮김, 민음사, 2008, 1981, 161쪽 분량)는 실화를 재구성한 증언 문학으로 기사와 소설의 경계를 넘나든다.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좋은 소설의 두 가지 조건으로 꼽은 사실을 시적으로 변형하는 것과 세계를 구성하는 암호들을 풀어내 알리는 것’(p.161)은 마술적 사실주의의 정의와도 일치하다. 비현실적 변형과 과장의 틈바구니에 뿌리박힌 진실을 등장인물들이 그러하듯 독자 역시 외면하지 못한다.

 

실제 일어난 참담한 사건이 이야기의 중심을 지탱하기에 기록하기 위하여 작가는 상당한 공을 들이고 오랜 시간 기다렸다. 비로소 쓸 수 있었을 때 작가는 직접 화자로 등장함으로 예를 갖춘다. 화자는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27년 전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을 추적한다. 배를 타야 접근 가능한 마을에 바야르도 산 로만이 신부감을 찾아 도착한건 결혼식 여섯 달 전이었다. 그는 앙헬라 비까리오를 우연히 본 순간 결혼하기로 마음먹는다. 결혼식은 공식적인 행사이자 마을 잔치가 되어 성대하게 치러지는데, 그 밤에 신랑은 순결하지 않다는 이유로 아내를 친정으로 되돌려 보낸다. 앙헬라 비까리오의 쌍둥이 오빠 빠블로 비까리오와 뻬드로 비까리오는 동생이 지목한 상대인 산띠아고 나사르를 죽이기 위해 곧바로 집을 나선다.

 

미남이고, 점잖고, 스물한 살 나이에 그 정도 재산을 가지고 있던 산띠아고 나사르는 어머니에게 인생의 전부였던 아들이었고 천성적으로 명랑하고 온화하며 솔직 담백’(p.14)한 성품이었다. 그는 쌍둥이 형제에게 살해당하고, 다시 한번 학살과도 같은 부검으로 훼손된다. “변호사가 그 살인은 명예를 지키기 위한 정당 행위였다고 주장하자 재판부는 양심적인 행위라고 받아들였고, 쌍둥이 형제는 최후 진술에서 똑같은 이유라면 천 번이라도 같은 행동을 할 것이라고 선언했다.”(p.64)고 화자는 기록한다. 명예가 걸린 문제라 양심에 따라 죽였다는 논리는 이전에 막을 수 있었던 기회들을 모두 상실한 채 실행된다. 예고되고 선포된 살인이었건만 스물 두 명이나 되는 사람’(p.67)은 모호하고도 무심한 핑계를 대며 개입하지 않는다.

 

나의 일이 아니기에, 본인이 모를 수 가 없을 것이기에 관여하지 않는다. 오지랖은 민폐라고 발을 빼는 순간 방관자의 자리에서 관람을 시작한다. 혹시라도 불편할 일을 애초에 만들지 않는다는 신조는 얼마나 익숙한가. 화자로 분한 작가는 사건을 복기하며 증언을 다각도로 비추고 수집한다. “이처럼 확실하게 예고된 죽음은 결코 없었다.”(p.67) 그럼에도 일어나버린 사건을 작가는 추적한다, 계속해서 숫자를 기입한다. 잠든 시간과 잠들지 못한 시간을, 깨어난 시간과 움직인 시간, 머문 시간과 머뭇거린 시간을, 날을 세우던 칼의 길이와 폭, 하기로 한 조치를 4분을 지체하고 다시 3분을 빼앗기는 등 사소한 일의 누적이 불러온 회복할 수 없는 상실을 쓴다. 그럼에도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p.123)기에 그날을 불러내며, 사람들은 용기가 없었다고 뒤늦은 자백을 하고 당시와는 다른 목소리를 낸다. 전혀 몰랐다고 분명히 밝혔던 일들을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시인으로 바꾼다. 당사자가 이미 알고 있으리라 예측하고 기대했기 때문에 아무 말도,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고 뒤늦은 고백을 한다. 그들 역시 비참한 삶으로 어쩌면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짧은 분량으로 치밀하게 전개되는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등장인물 모두를 생생하게, 때론 연극적으로 부각한다. 27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으나 그날로부터 시계는 떨어져 나간 것이나 진배없다. 그들의 무의식은 산띠아고 나사르의 마지막 날에서 일초도 전진하지 않았음을 이미 안다. 씻어도 사라지지 않는 산띠아고 나사르의 냄새는 방관자들의 삶이 죽음과 일반이라는 상징으로 읽힌다. 열 한달 동안 잠들지 못했던 뻬드로 삐까리오의 불면증은 백년의 고독에서 레베까로 인한 전염성 불면증을 연상케 한다. 어떻게 대처해도 결국은 삶을 황폐화시켰던 불면증이다. 곳곳에 작가의 인장격인 마술적 사실주의 색채를 발견할 수 있는데 압권은 결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이미 목숨을 잃은 산띠아고 나사르의 참혹한 행진을 그려냄으로 웅변한다.

 

죽은 자의 장송행진곡은 산자들에게 호소하고, 그 호소는 시공간을 넘어 지금 여기에 사는 독자에게 닿는다. 또 다른 산띠아고 나사르는 없는지, 관망하던 자리에서 뒤늦게 입장을 달리하는 사람은 없는지, 합리화로 가릴 수 없는 고통 앞에 굳어가는 심정 또한 환기한다. 소설은 불행한 우연과 책임을 회피하는 침묵을 기록하면서 동시에 해소되지 않는 질문도 남긴다. 산띠아고 나사르를 향한 앙헬라 비까리오의 일관된 입장이 그렇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다른 누구여도 상관없지 않았을까. 폐쇄된 공간에 붙박힌 가부장 사회에서 착취의 대상이며 도구, 고뇌의 상징이 되어버린 한 여성이 필요로 했던 희생양이었을 수 있지만 새롭게 정체성을 구축해가는 그녀 역시 이 거대한 부조리극에서 책임을 피할 수 없겠다. 작가는 마술보다 믿기지 않는 현실을 무대에 올려 누구의 책임인지 묻는다. 시작부터 끝까지 치달아가는, 기록함으로 증언하고 질문하는 대가의 작품을 권한다.



책 속에서>


어느 날 새벽의 수탁 소리에 우리는 불현 듯 그 터무니없는 사건을 가능하게 했던 수많은 연쇄적 우연을 정리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은 여러 가지 미스터리를 풀려는 열망 때문이 아니라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숙명이 그에게 지정했던 위치와 임무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 채로는 계속해서 살아갈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했다.(p.123)

 

무엇보다도 그는 문학에서도 허용되지 않던 수많은 우연이 인간의 삶에 작용하여 그처럼 확실하게 예고된 죽음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은 채 저질러졌다는 사실은 결코 합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p.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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뱅크시로 읽는 서양 미술사
캘리 그로비에 지음, 김하니 옮김 / 아르카디아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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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캘리 그로비에의 뱅크시로 읽는 서양 미술사(김하니 옮김, 아르카디아, 2025, 208쪽 분량)는 서양 미술의 최고봉, 인류 문화의 이정표와 같은 작품을 불러내 새로운 빛으로 조명한다. 그 빛은 뱅크시다. 뱅크시라는 램프를 통과한 걸작의 이미지는 강조되기도, 전복되기도 하지만 새로운 질문을 만들어 낸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통쾌하고 후련하며 때론 감동적인 뱅크시의 인장은 계속해서 세상을 향해 말을 건다. 캘리 그로비에는 BBC Culture의 칼럼니스트이자 문화 안에서 길을 안내하는피처 작가이며 학술 저널의 공동 창립자다. 저자는 뱅크시가 지쳐버린 시대의 아이콘들이 점점 더 무의미해지는 상황으로부터 구해낸다고 평한다. 그는 뱅크시가 아주 작은 부분을 조작함으로 파괴적인 발언을 이끌어내고 작품의 근간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다며, <뱅크시로 읽는 서양 미술사> 집필 이유를 현재가 과거를 만드는 역설의 미학’(p.11)에서 찾는다. ‘우리 시대의 가장 흥미로운 상상력을 감상할 수 있는 지도’(p.15)가 이제 눈앞에 놓였다.

 

책은 서양 미술사의 서두를 차지하는 기원전 15000년경 <라스코 동굴벽화>부터 시작한다. 미술사의 기념비적 유산과 뱅크시의 작품 마흔세 점을 교차 배치함으로 독자는 변화와 간극, 숨은 상징과 드러난 의미에 집중하게 된다. 한 페이지 분량의 글과 이를 집약하는 제목은 빼어난 평으로 독자를 연신 수긍하게 할 수도 있지만, 나만의 관점과 시선을 세워보고 점검하게도 만든다. 1503년 작 라파엘로의 <몬트의 십자가 처형>2006<세일은 오늘 끝난다>로 변화한다. 뱅크시의 작품은 오마주보다는 패러디에 가깝지만 익살과 풍자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 그를 넘어서 잠시 멈추는 시간, 성찰하는 시간을 보낼 자기만의 방으로 이끌어간다. 선뜻 위트가 과하다 할 수도 있으나 과연 그런가 다시 묻게 되고, 세상을 구원하신 구세주는 물신의 모양으로 그 자리를 대체하는 중이고 이미 빼앗았는지도 모른다. ‘터무니없이 유명한 작품’(p.65)이라 언급된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는 과도한 착취와 끝없는 상품화로 인해 자신을 잃어버린 끝에 뱅크시를 통해 가면을 벗고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생기를 찾는다.

 

이 책의 장점은 우선 훌륭한 화집을 소장하는 즐거움, 크고 선명한 인쇄물로 작품을 간직할 수 있다는 점인데, 이는 가장 작은 장점이다. 무엇보다 서양 문화사의 주요 작품들을 시대와 함께 읽어내는 저자의 종횡무진 접근법은 글의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깊이 있고 풍성하다. 인용과 참고는 읽어야 할 또 다른 책을 안내하고 당시의 시대정신과 현재의 변화를 가늠하게 한다. 예술계 전반에 어린 빛과 그림자를 간파하며 정보와 견해와 주장을 고루 담은 가독성 좋은 문장을 읽는 기쁨을 빼놓을 수 없다. 이는 정체를 드러내지 않고 소리 없이 움직이며 폭발적 영향력을 끼치는 뱅크시의 작품으로 매듭짓는다.

 

20년 넘게 뱅크시의 작품을 추적하며 촬영해 온 영국 사진작가 마틴 불의 뱅크시 사진전 'Who is Banksy by Martin Bull'이 열리고 있다. 그는 인터뷰에서 직접 뱅크시를 만나본 적이 있느냐는 질문에 단 한 번이었다며 굉장한 재능을 가지고 있고 아이디어가 뛰어나지만, 아내와 아이들이 있는 평범한 50대 남자다. 브리스톨에서 태어난.’이라고 밝혔다. 하지만 이런 질문은 불필요할 것이다. 저자가 말했듯 그가 누구이든 간에 우리의 관심은 오직 그의 작품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p.15)에 있다. 예술 이면의 공과에 한 편으로 치우치지 않는, 위험을 뚫고 메시지를 전하는, 그럼으로써 절망 가운데 희망을 선사하는 작가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일 자체가 감사하고 축복임이 분명하다. 뱅크시의 작품을 아끼는 이들은 물론이고 특별한 예술 비평서를 기대하는 분들에게 추천한다. 책을 펼 때마다 매번 새로운 영감과 통찰을 만날 것이다.

 

 




책 속에서>

뱅크시는 자신이 개입한 작품을 결코 훼손하거나 비하하지 않는다. 이제는 지쳐버린 시대의 아이콘들을 점점 더 무의미해지는 상황으로부터 구해낼 뿐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더 이상 느끼지 못하고 있었던 원초적인 에너지와 날카로운 긴박감을 다시 불어넣는다. 뱅크시는 작품을 구원하는 구세주나 다름 없다.(p.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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