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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평점 :
『코스모스』는 지루할 만큼 긴 시간 나의 책장에 꽂혀있던 묵직한 붙박이별이었다. 오다 가다 눈에 비치다보니 어느 순간 무덤덤한 배경이 되어버렸다. 가끔 펄서처럼 깜빡였다. 등대처럼,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기도 했다. 못 본 듯 스쳐지나가기를 상당기간 지속하다 몇 달 전 중고서점에 가서 『코스모스』를 구입했다. 읽어야 되는 책이잖아, 최소한 코스모스는 읽어야하지 않겠니. 순간 정확히 간파할 수 없는 모호한 기분은 들었다. 기시감이랄까. 그렇게 책은 두 권이 되었고 2025년 새해 벽두, 그러니까 1월 2일부터 함께 읽기를 시작하였고 1월 24일에 마쳤다. 함께 읽기의 힘이다. 읽으면서도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생각은 어떻게 쓸 것인가였다. 한 인간을 통과한 코스모스는 어떤 출력물로 재현하게 될지 기대와 부담과 염려가 엎치락뒤치락했다. 씨름할 여력은 없는데, 수에 약하고 공간감각 제로이며 다니던 길도 잃어버리는 길치이자 이과적 소양을 상당히 결핍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독해에만 집중해도 미덥지 않았다. 약속은 약속이다. 함께 읽기로 했으면 읽어야 한다. 그렇게 첫 날이 밝았다.
비문학 명저이자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저작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1980, 719쪽 분량)』는 동명의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에서 시작하였다. 당시 시공간을 넘나드는 인간의 탐험 여정은 지구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시청했고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묶여 페이지를 타고 떠나는 우주 여행 티켓이 되었다. 칼 세이건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기념으로 출간한 보급판은 700여 페이지 분량으로 독자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였다. 또한 칼 세이건의 아내인 앤 드루얀의 한국어판 서문인 ‘칼 세이건의 빈 의자’는 저자의 발자취를 의미 있게 간추리면서도 제목처럼 아름다운 여운을 담는다.
책은 서문과 머리말, 본문으로 구성하고 있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p.36)라는 1장의 첫 문장(인용문을 제외하고)은 서문의 첫 문장으로 재인용 하고 있다. 여정의 입구와도 같은 문장이다. 본문은 총 13장에서 우주와 인류의 여행을 시공간을 넘나들며, 포착하고, 파고들며, 상상한다. 1장은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로 저자는 이 탐험에서 필요한 두 날개가 ‘회의의 정신과 상상력’(p.37)이라고 전한다. 두 요소의 균형이 전제해야 하고, 차원이 다른 측정 단위, 광년의 의미 등도 설명한다. 별들의 공간에 가상여행을 다녀오고 ‘행성 지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p.46)로 이어지는 몇 페이지는 서정적인 문장으로 설렘 지수를 높인다. 코스모스의 매력을 단번에 이해시키는 인장들로 이런 방식으로 책이 계속 되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특히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와 최고의 자랑거리였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박물관은 인상 깊다. 소속 학자들이 코스모스 전체를 연구했다는 점도, 세계의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집대성한 장소였다는 점도 새롭다. 거의 집착적인 축적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연상케 한다. 소설 첫 문장에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이 들어 있기도 하기에.
지금부터는 장 별 정리를 이어간다. 비문학 벽돌책 서평을 신박하게 쓸 방법은 무엇일까 내내 궁리하면서 읽었다. 이런 책을 ‘다 읽고 쓰겠다’는 건 고문의 날을 열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그래서 독서와 동시에 장별 요약을 하게 되었다. 기록 자체를 위하여, 추후 쓴 만큼이라도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한다. 절대적이지 못한 요약, 나름대로의 요약은 늘 떫은맛을 남긴다. 이 부분이 더 중요한데 핵심을 빗겨서 정리했다는 날선 자아비판의 위험은 계속 도사린다. 지적에 단련된 나는 그날, 그 컨디션, 그 정신상태에서 건져 올렸던 발췌와 느낌, 엇나간 핵심을 기꺼이 보듬기로 한다. 이게 최선이었나 하는 질문에 모르오, 또는 그렇소, 라고 우기며. 지루한 분들은 패스하기 바란다. 1장에 이어서.
2장 <우주 생명의 푸가>는 외계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한다. 생물학을 음악에 비유할 때 지구 생물학은 단일 주제 형식 음악만을 들려주지만 우주 생물이 들려줄 음악은 푸가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10억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은하 생명의 푸가”(p.67)는 화려하고도 장엄할거라 예상한다. 진화론과 자연 선택 이론 대(vs) 위대한 설계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은 지금까지도 논쟁적이다. 진화는 환경에 적응하기 유리한 돌연변이들이 축적되기 위한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생명의 출현에서 동물, 다시 최초의 인간이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을 간추려본다.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학문은 한계를 지닌다. 상상력을 보태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과 역사학 등의 학문은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공통의 교훈을 남긴다.
3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는 점성술과 천문학, 물리학의 생성과 분화, 발전의 여정을 지적 거인이자 끝없는 헌신의 인물들로 살핀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코페르니쿠스를 거쳐 요하네스 케플러와 아이작 뉴턴에게서 인류가 진 빚을 저자는 정성껏 펼쳐 보인다.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상당히 오랜 기간 이름만 올리고 있던 <프린키피아>를 이해는 바라지 않아도 읽어는 봐야 할 것 같다고 백 번째 결심을 한다. 누구에게나 공로와 과실이 있다. 뉴턴이 남긴 마지막 말은 어떤 아쉬움도 상쇄할 만하다.
4장 <천국과 지옥>에서 저자는 관찰 시간 척도를 길게 늘렸을 때 ‘평온과 고요의 지구’가 ‘격동과 소란의 행성’이 될 수도 있음을 퉁구스카 사건의 예로 살핀다. 사건의 실체는 지구 자멸을 막기 위한 대비책을 강구의 인식으로 귀결한다. 잘못된 판단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각심이다. 그래서 혜성의 실체를 파헤치고, 명명하고, 연구의 궤적을 짚어본다. 언젠가는 행성과 충돌할 혜성을 따라가다가 행성으로 시선을 돌린다. 지구형 행성과 목성형 행성의 엄청난 간극에 숨죽이고, 상상과 실제간 차이에 맞닥뜨린다. 오류를 진실이라고 잘못 세상에 드러낼 때 저자는 반론의 근거를 차례로 댄다. 그러면서 “과학은 자기 검증을 생명으로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P.195)고 주장한다. 동시에 ‘열린 마음’을 강조할 때 저자의 겸손하고 개방된 태도는 매우 인상깊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행성, 수백 년간 자매로 여겨져 온 금성의 진면목은 ‘전 행성 규모에서 대참사가 벌어지는’(p.209) 세계였다. 금성을 지옥으로 명명하면 상대적으로 지구는 천국이다. 그러나 경고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완전히 남의 별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 무수한 단계들. 저자는 기후 위기를 언급하며 ‘알고 보니 지구는 참으로 작고 참으로 연약한 세계이다. 지구는 좀 더 소중히 다루어져야 할 존재인 것이다.“(p.215)라는 말로 맺는다. 40여 년 전부터 이미 기후 위기를 경고한 과학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5장은 화성에 생명이 존재한다고 믿는 과학자와 화성에 생명이 없다고 하는 과학자의 주장이 반복되어 마치 블루스를 연주하는 듯하다고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라는 시적인 소제목을 선사했다. 지구와 유사해 보이며 지구에서 표면을 관측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행성인 화성을 주목한 이들이 등장한다. 퍼시벌 로웰, 조반니 스키아파렐리, 러셀 윌리스 등의 연구와 바이킹 착륙선의 화상 탐사 흔적, 그 안에 숨은 노고와 희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떤 유기분자도 발견되지 않는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어쩌면 지구 생명과 동일한 기본 분자로 이루어졌어도 조합의 방식이 낯설 수 있다고 상상의 영역을 넓힌다.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하는 가정 이후에는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지구화의 개념과 화성의 지구화 실현을 희망적으로 그린다.
6장 <여행자가 들려준 이야기>에서는 보이저 2호의 태양계 외곽 지대 탐험을 엿본다. 저자는 탐험과 발견이 인류사를 특징지은 인간의 가장 뚜렷한 속성이며, 그러한 탐험 중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 보이저 계획을 꼽는다. 화성과 금성을 현대판 신대륙으로 가정하며 시선을 17, 18세기 인류의 개척사로 거슬러 올라가며 유럽 지성들의 등장을 헤아리는데 그 중에서 르네상스적 인간을 연상케하는 콘스탄틴 하위헌스의 업적은 두드러진다. 저자가 들려주는 현대판 탐험대의 여행담은 감상적이면서도 생생하고, 무엇보다 보이저 호의 가상 함장들이 기록했다고 가정한 ‘가상 항해 일지’는 저자의 끝없는 열정과 진심의 또 다른 증거로 읽힌다.
7장 <밤하늘의 등뼈>에서 저자는 어릴 때 별을 궁금해하던 첫 기억으로 회귀한다. 책은 “별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아기의 웃음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살아왔다.”(p.331)며 인류의 조상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한다. 탁월한 상상화는 집요한 관심과 우러나는 진심을 동력삼아 하늘과 달, 별을 그려나간다. 어떤 원시 종족은 은하수를 ‘밤의 등뼈’(p.340)라고 불렀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사조,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는데 우주의 정돈된 질서를 ‘코스모스’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과학은 이오니아에서 태어났다며 저자는 과학자들을 차례로 호명한다. 탈레스부터 아낙시만드로스, 히포크라테스와 엠페도클레스, ‘원자’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데모크리토스의 자취를 따라간다. 데모크리토스의 사고력이 “헤라의 젖을 극복하고 밤하늘의 등뼈를 뛰어넘어”(p.359) 하늘 높이 치솟았다고 극찬한다. 이오니아의 과학자들을 지나 피타고라스부터 다시 과학과 철학의 거인들을 만난다. 별은 무엇일까로 시작한 질문은 코스모스와 겨루기 전에 먼저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는데 이른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던져진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답변만이 우주에서 지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밑거름”(p.386)이 된다는 말이다.
8장 <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여행>는 별자리 이야기로 문을 연다. 별자리 모양은 공간적으로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바뀐다. “공간과 시간은 서로 얽혀 있다. 시간적으로 과거를 보지 않으면 공간적으로 멀리 볼 수가 없다.”(p.397)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시간 지연 현상은 들을 때마다 흥미롭다. “상대 운동의 영향 때문에 길이의 단축과 시간의 지연 같은 일이 벌어”(p.408)지고,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이 보고 있는 시간과 지구에 남아 배웅한 사람들의 시간이 벌이는 어마어마한 격차는 몇몇 영화를 소환하지 않아도 우리의 상상을 광막한 지경으로 이끈다. 역사를 달리하는 두 갈래의 우주들이 나란히 실재할 수 있다는 주장, 과거로 돌아가 역사에 개입한다는 가상과 그로인한 파급도 꼬리를 문다. 저자는 별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도 상상한다. 10억분의 1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만 반짝 하고 사라지는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거라는 견해에는 ‘그럼에도’의 희망을 북돋는 선택을 할 것이다. 지금이 미래를 위한 또 한 번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긍정하듯이 말이다. 카를로 로벨리의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도 상기하게 되는 장이었다.
9장 <별들의 삶과 죽음>은 제목 그대로 별의 시원과 종국을 살펴본다. 수소를 제외한 나머지 원자들이 모두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으니 “별이 우주의 부엌”(p.432)이라고,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되었으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p.458)이라고 말한다. 적합한 비유는 이해를 돕고 친근한 화법과 저자의 설렘이 배어나는 어투는 독자 역시 그의 파장 안에 머물게 한다. 9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중력이 물질과 빛에 미치는 영향을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예로 들어 설명한 부분이다. 티파티 장면을 단계별로 구성한 삽화(이 삽화좀 크고 선명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와 블랙홀을 “불가해한 우주적 체셔 고양이”(p.471)라고 언급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10장 <영원의 벼랑 끝>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살펴보며 별의 탄생부터 초신성 폭발로 마감하기까지 “우주 진화의 대서사시”(p.487)를 다룬다. 은하의 충돌 과정에서 내부의 별들이 서로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별들 간의 간격이 별 하나의 크기에 비해 너무 멀기 때문이다. 활자를 따라갈 때 광대하고 휘황한 우주의 역동이 그려져 무한한 공간에 떠서 읽는 기분도 든다. 은하를 연구하며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비롯하여 잉태자인 동시에 파괴자로써의 두 가지 속성을 말한다. 현대 우주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주의 팽창과 대폭발 이론에 기여한 휴메이슨과 허블의 발견도 다룬다. 대폭발 이전의 우주, 비어있는 무에서 물질이 생긴 연유를 진화가 아닌 창조로 답할 경우, 소박한 우주관, 순진한 상상(p.513)에 동조한 신화도 짚는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보여주는 세계 창조 신화도 몇 장면이다. ‘납작이나라’(p.524)를 상정하고 차원을 설명하는 부분은 꽤 친절하고 흥미롭다, 마음에 든다. 웜홀과 우주들의 계층 구조도 숙고할만하다.(웜홀을 주제로 한 동화들을 구입했었는데 다 어디로 갔을까) 저자는 우리 우주 외의 또 다른 우주, 그 우주의 사람을 궁금해 한다. 그들의 세계에 진입할 길을 내보자고 독자를 이끈다.
11장 <미래로 띄운 편지>에서 저자는 코스모스 도처에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의 지적 존재들이 살고 있으리라 예상한다. 현재 지구에 있는 지적 생물들 중에서 가장 우월하고 우아하며 고도의 지능을 소유한 고래를 불러낸다. 마치 노래와도 같은 고래의 소통 방식에 감탄하나 인간 문명의 발전이 소통을 차단할 뿐 아니라 직접적 위해를 가하는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고래나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50억 비트에 이르는 정보를 기술한다면, 정보의 양으로 따지면 ‘세포 하나가 하나의 도서관’이 된다. 우리 몸이 100조 개의 세포들로 만들어졌으니 한 사람 안에는 100조개의 도서관이 있는 셈이다. 가늠되지 않으나 즐겁다. 정보의 양이 증가해 유전자에 모두 저장하기 어려워지자 인간은 뇌와 별도의 공용 저장장소를 만들어내는데 바로 ‘기억의 대형 물류 창고’인 도서관이다. “책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마법사가 된 것이다.”(p.558) 이 장에서는 도서관, 책, 글쓰기, 기록의 역사, 인쇄술 발전, 진화 과정에서 우연의 개입, 외계에 존재할 지적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지구가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공동체가 될 때 “은하 문명권의 어엿한 구성원”(p.577)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본다.
12장은 <은하 대백과사전>으로 인류의 도서관에서 은하의 백과사전까지 영역을 넓힌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열쇠는 로제타석이었다. 그렇다면 고대 문명이 아닌 외계 문명이 보내는 전파 신호를 해독할 “성간 로제타석”도 있을 테고, 그 역할은 바로 과학과 수학이 담당하리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문명과 문명의 만남은 평화 또는 파괴라는 다른 결과를 남겨왔는데 이에 견주에 우리가 외계 문명과 만날 경우 그들은 우호적일지 파괴적일지 예상해본다. 저자는 우리보다 앞선 기술을 가진 외계 문명인을 우리가 만나게 되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겠다는 견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무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p.620)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하였고 우리의 “공포감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탠다. 그들이 보낼 정보를 기대하는 저자의 진심은 “얼마나 많은 새로운 보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p.621)하는 설렘으로 절정에 이른다.
13장 <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도, 우리 존재가 우주의 목적도 아니라는 현실 인식으로 대장정의 마무리를 시작한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으며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p.632)이다. 타협할 줄 모르는 이기심과 견재는 핵전쟁의 위협에 인류를 노출시킨다. 저자는 군수 산업의 특성과 강대국의 자기 모순적 정당화 논리를 지적하면서 지구상 모든 사람이 핵전쟁의 볼모로 잡혀 있다고 우려한다. 상대를 적대하기 이전에 그들이 지구 어디에 살든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수용하자고 촉구한다. 피부 접촉을 통한 사랑과 폭력 성향의 상관관계는 비교적 최근 시선을 환기했던 브라이언 헤어 등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끝에 이르러 책은 2장에서 언급하였던 눈부신 발전시기, 2000년 전의 알렉산드리아를 다시 한 번 소환한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집적한 인류 문화 산물을 영구히 소실하게 된 원인,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터무니없는 낭비는 안타깝다. 책에서 다룬 괄목할 만한 성과나 인물을 시간 함수로 표기한 자료(p.662)는 비어있는 1000년의 암흑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인류는 우주 한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둠을 줄도 알게 됐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p.682)고 전하며 저자는 인류를 여기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맺는다.
범박한 요약이 비록 과녁을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활자를 읽으며 검게 반짝이는 우주를 떠다니던 상상 여행 발자국이기를 바란다. 후기에서 역자는 처음 번역을 할 때 원 저작이 이미 20년 된 시점이었기에 21세기 독자들의 반응을 걱정하였다고 쓴다. 그러나 이 책의 ‘현재적 가치’(p.710)는 뜨거운 호응에서 고스란히 증명되었다고 보탠다. 이 책을 빛나게 하는 첫 번째 요인은 우주를 향해 뻗어나가는 저자의 한결같은 열정이다. 우주적 시각으로 관점을 고양시키고 외계의 생명체를 기대하며 만남을 준비하기 원한다. 새로운 별과 생명을 찾기 이전에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을 공유하는 인간은 물론, 동식물과 환경까지 마음으로 돌봐야 한다고 목소리 낸다.
두 번째로 전공지식을 갖추지 않은 일반 대중도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과학서이면서도 아우르는 범위는 상당히 넓다는 점이다. 우주에 초점을 두면서도 동서양의 결정적 장면, 세계사의 조류들, 빼어나거나 안타까운 인물 열전, 과학의 발전, 문명의 성쇠를 넘나들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심리까지도 찬찬히 살펴본다. 그럼으로 책은 먼저 헌신한 이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기념관이 된다. 저자는 여러 곳에서 분명한 주장을 드러내지만 근거 또한 충분히 제시한다.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을 고루 스케치하는데 그 중에서 꼽자면 또 한명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 할만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다. 이분도 천재시구나 하였다.
세 번째는 서술 방식이다. 다루는 내용이 단순하지 않더라도 최대한 독자 편에서 설명한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를 읽을 때, 꼭 들어맞는 비유에, 풍부한 은유에, 솔깃한 인용에 잠시 멈추고 상상하게 만든다. 그가 펼쳐내는 지식의 바다는 현학적이지 않고 배려가 넘친다. 밑줄의 행진, 설렘의 향연, 유쾌하고 두근거리는 생생한 어조, 유머러스한 가정이 끝나지 않을 듯이 계속된다.
이 책은 저자의 진심이 먼저 줄달음한다. 그 모습이 순수하고 근사하여 독자를 미소 지으며 따라 뛰게 만든다. ‘~(존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말을 종종 건네며 낙관을 전염시킨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저 읽을 수 있어 바랄 것 없다는 협동의 마음이 독자를 뿌듯하고 충만하게 만든다. 독서가 이렇게나 즐겁구나, 유익하구나를 새삼 느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도덕 교과서 스러워 혼자 민망해한다. 숫자에 예민하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또 체감하기 어려운 지점이 천문학 단위이기도 했다. “빛은 1년이면 10조 킬로미터, 약 6조 마일을 간다.”(p.38)고 하면 6조마일이 뭔데 하며 갑갑해진다. “탄자니아에서부터 물경 38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도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p.681)는 말에 흠, 물안경 아니고 물경이라...조용히 넘어간다. 이뿐이겠는가. 그래도 ‘집중력 옷’이라고 이름붙인 자주색 후드 짚업으로 무장하고 용기를 북돋으며 읽어나갔다.
매 장 서두의 인용문은 제목만 보았던 과학 고전 목록을 읽어야 할 목록으로 자리바꿈해준다. 그뿐 아니라 과학서, 문학, 예술서, 경전 등 독서의 폭도 감탄하게 된다. 『코스모스』를 읽으며 어떤 책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린 왕자>가 네 번째 별에서 만난 사업가는 계산을 하느라 바빴다. 세고 또 센 별의 개수를 종이에 적어 서랍에 넣고 잠궈두는 그는 오억 개의 별로 부자가 되면 그걸로 다른 별을 살 수 있다고 했던가.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에서 로벨리는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라고 했던가. 바다의 우아한 주인이자 고도의 지능을 가진 고래는 <모비 딕>의 에이해브 선장과의 끝장 투쟁 상대역으로 장편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았겠고, 앞서 말했던 <바벨의 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자꾸 겹쳐 보인다.
5장에서 화성을 읽으며 이현 작가의 그림책 <나는 화성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입니다>를 다시 꺼내 보았다. 근대 SF문학의 선구자 하버트 조지 웰스 전작읽기도 욕심이 난다. 화성의 카날리를 연구한 조반니 스키아파렐리는 아끼는 그림책인 <피어나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사의 삼촌 아니었던가. 어떤 독자는 계속해서 또 다른 책이, 영화가 떠오르고 기사를 검색하거나 프로젝트를 확인하며 저자에게서 멈춘 시간 이후를 거꾸로 들려주고 싶을 수도 있겠다. 다시 칼 세이건의 빈의자로 돌아온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점점 많아질테다. 그가 목격하지 못했던 지구인의 다음 스텝들을 전해주고 싶다.
새벽 1시가 넘었지만 실내이기에 밖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별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길게 쓰는 서평은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졸음과 죄책감이 나란히 몰려온다. 완독하기로 약속한 날에 책을 마치며 귓전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었다. <별 별 별 하나 별 둘, 너도 별, 나도 별,> 이 동요 모르니? 나는 딸에게 계속 물었는데 모른다고 한다. 젊은 아이가 기억력이 나쁘냐며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세상에,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가였다. <별 별 별 하나 별 둘, 너도 별, 나도 별, 언니도 별, 나도 별, 모두 다 관악산 정기탄 서문의 별, 아아 서문의 딸> 00여고 교가다. (별이 가장 많이 들어간 교가로 어딘가에 올라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고 보니 부를 때 약간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떻게 교가를 잊어버리나. 나라는 별이 늙었다. 다시 한 번 그러고 보니 나의 블로그 네임 ‘책먹는 꿈별’은 3년 내내 지속한 교가제창 덕분에 무의식에 스며든 영향도 있지 않을까.
서평은 이렇게 쓰는 게 아니다. 세상 최고의 비문학 서평을 써보겠다고 칼을 갈았건만 사방으로 질주하는 듯한, <별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같은 서평을 쓰고 말았다. 퇴고하려고 스크롤을 올리다가 미쳤구나, 라고 내뱉었다. 비현실적으로 장황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시’라는 가능성이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또 한번의 기회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마음 먹는다는게 내맘 같지는 않다. 언젠가 간결하고 우아한, <코스모스>에 걸맞는 ‘진정한 서평’을 다시 써보리라.(오늘은 이만 자리라.) 함께 읽어나간 <독서본능>팀과 리드문을 올려주신 회장님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밤하늘을 보면 칼 세이건이라는 이름이 또 하나의 북극성처럼 빛을 낼 것이다. 세상 다정한 과학 도서, 온기 가득한 비문학 도서 『코스모스』를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