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자 속의 사나이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48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 지음, 박현섭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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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존하는 영어권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 영미 문학계의 천재라 불리는 조지 손더스는 25년간의 강의를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라는 한 권의 책으로 갈무리했다. 그가 엄선한 19세기 러시아 단편 소설은 일곱 편이다. 그중에서 체호프 작품이 세 편으로, 톨스토이(2)를 능가한다. 체호프는 마흔넷에 세상을 떠나기 전, 작가 이반 부닌에게 사람들은 앞으로 칠 년 더 내 작품을 읽을 겁니다. 그리고 나는 기껏해야 육 년쯤 더 살겠지요.”(p.331, 해설)라고 말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많이 읽히는 단편 작가로 여전히, 아마도 영원히 건재할 것이다. 손더스는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체호프의 <마차에서>, <사랑스러운 사람>, <구스베리>를 강독한다. 체호프 타계 120주년을 기념해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중단편 선집 <상자 속의 사나이><마차에서>를 제외한 두 작품이 실렸다.

 

상자 속의 사나이(박현섭 옮김, 문학동네, 2024, 348쪽 분량)1884년부터 1903년에 발표된 체호프의 중단편 중에서 작품성이 뛰어난 13편을 발표순으로 담은 선집이다. 작가의 생몰년인 1860~1904년과 견줄 때 초기작부터 마지막 작품까지 주요 저작을 살펴볼 수 있는 구성이다. 작가는 모스크바 대학교 의학부에 입학하면서부터 잡지 등에 글을 투고하기 시작하였고, 의사로 개업한 뒤에는 본격적으로 창작 활동에 매진하였다. 의사이면서 작가였고, 오랜 시간 병마와 싸운 환자이기도 했던 체호프는 자신을 불태우듯 집필에 전념하였다. 희곡 갈매기」 「벚나무 동산등으로 셰익스피어 이래 가장 많이 공연되는 극작가이자 모든 단편소설 작가 중에서 가장 위대한 작가라고 레이먼드 카버가 언급했듯 탁월한 단편소설 작가다.

 

처음 실린 세 편은 안토샤 체혼테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던 작품으로 <>, <아뉴타>, <반카> 모두 가엾은 이들을 등장시킨다. 굶주리고 학대받는 아이와 착취당하면서도 저항하지 못하는 여인을 본다. 특히 신문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난에 개제되었다는 <반카>는 안타까움에 독자를 숨죽이게 만든다. 중편 <6호실>은 동시대 독자들에게 가장 열렬한 호응을 받았던 작품인데 레스코프는 사방 천지가 6호실이며, 6호실은 러시아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소설은 줌 인하듯 병원의 별관을, 현관을, 바닥에 침대를 고정한 커다란 방을 묘사한다. 현관에는 질서를 사랑하며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구타를 자행하는 경비원 니키타가 있다. 소설은 방 안에 있는 다섯 명의 정신병자를 소개하는데 그 중 이반 드미트리치 그로모프의 사정과 그를 진료하게 된 의사 안드레이 예피미치 라긴의 만남은 결말에 더욱 비극적 색채를 덧입힌다. “안드레이 예피미치는 모든 걸 알아차렸다.”(p.125) 그는 6호실에서 환자들이 겪었을 고통을 이십여 년 넘게 알지도 못했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음을 비로소 자각한다. 너무 늦은 깨우침이다.

 

아름답고 숭고한 감정에 함께 빠져들게 하는 <대학생>을 지나면 또 한 편의 문제작이자 표제작인 <상자 속의 사나이> 차례다. <상자 속의 사나이>,<구스베리>,<사랑에 관하여>삼부작으로 묶인다. 교사 부르킨은 수의사 이반 이바니치에게 동료 교사였던 상자 속의 사나이’, 벨리코프 이야기를 들려준다. 벨리코프는 소라게나 달팽이처럼 외부 영향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겠다는 신념에 사로잡혔던 기인으로도 볼 수 있으나 화자는 상자 속의 사람이 비단 그뿐만은 아니라고 역설한다. 그가 이건 상자 속 삶이 아닐까요?’(p.185)라고 반복할 때 독자를 향하는 작가의 목소리로 들리며 액자식 구조를 활용한 질문은 울림을 던진다.

 

<구스베리>는 부르킨과 이반 이바니치가 비를 피해 알료힌의 집으로 가서 묵으며 나누는 이야기다. 이반 이바니치가 친동생인 니콜라이에 대해 나머지 두 명에게 전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행복으로, 최면 상태와 각성의 중요성으로 화제를 옮겨간다. 그의 웅변조는 갸웃하게 만드는 결말에 이르는데 조지 손더스는 이 작품을 근사하게 채에 고르고, 숙고의 지점을 짚어낸다. 화자와 청자를 바꿔가며 이야기 속 이야기로 독자를 끌고 가는 세 편의 연작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사랑에 관하여>는 집주인인 알료힌이 들려주는 지나가버린 사랑 이야기다. 그녀는 지방 재판소 부소장인 루가노비치의 아내다. 말기작은 올렌카라는 불멸의 캐릭터를 탄생시킨 <귀염둥이>와 작가 후기작의 특징인 열린 결말의 전형을 확인할 수 있는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 그리고 마지막으로 발표한 <약혼녀>로 이어진다.

 

내가 체호프에게서 가장 감탄하는 것은 그가 글에서 의제로부터 정말 자유로워 보인다는 점이다.(중략) 그는 의사였고, 그가 소설에 접근하는 방식은 애정어리면서도 진단적으로 느껴진다.”(p.529/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손더스는 자신의 책에서 꼽은 세 편 외에 이번 선집에 실린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사랑에 관하여>와 몇 작품을 더 추천한다. 체호프가 정치적 또는 도덕적 입장이 결여된 것으로 보인다는 비판에 대해서 손더스는 지금은 이런 특질 때문에 우리가 그를 사랑한다.”며 확실성이 종종 권력으로 오인되는 세상에서 불확실함을 유지할(, 계속 호기심을 가질)만큼 자신감을 가진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마음이 놓이는지, 라고 덧붙인다. 모든 결론을 의심하며 재고하는 체호프를 고상하며 심지어 거룩하다고 쓰면서 나아가 체호프의 이야기를 훌륭하고 간략한 재고 기계라고 부연한다.

 

체호프의 인물들은 완벽하지 않다. 어리석고 극단적인 사람들, 편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들, 현실감각이 떨어지거나 속물근성에 깊이 물들었거나, 무감각자나 망상자도 전면에 나선다. 그러나 작가는 예술가는 등장인물과 그의 말에 대한 재판관이 되어서는 안 되며, 편견 없는 증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견해를 실천한다. <6호실>에서, <로트실트의 바이올린>에서 그들은 너무 늦게 자각한다. <구스베리>, <귀염둥이>처럼 때론 늦게까지 깨닫지 못한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처럼 어떡하지 상태에서 이야기 바퀴는 멈추고 마저 굴리는 건 오롯이 독자의 몫으로 남기도 한다.

 

벨리코프만 상자 속에 살고 있는 게 아니고, 라긴만 6호실에 갇힌 게 아니라는 점을 독자는 금세 간파할 것이다. 체호프는 간결한 문장으로 생의 부조리와 타협하고, 결정을 보류하는 이들에게 노크한다. 그런 중에도 서정적인 풍경 묘사와 생생하게 포착한 분위기는 삶이라는 보편의 희비극을 도드라지게 만든다.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귀염둥이>는 논제를 만들고 시립 도서관에서 토론하였던 작품이다. 올해 상반기에 토론할 체호프를 정하는 일이 즐거우면서도 어렵다. 모든 작품이 마스터피스 아닌가! 페이지터너 급으로 읽히지만 여운을 돌아보는데 훨씬 시간을 들이게 되는 고전 명작이다. 생기와 기쁨을 안고 우리 생의 6호실, 비좁아 지는 상자를 떠날 수 있길 바란다. 동시에 예술은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없다. 정확히 정리하기만 하면 된다.”고 했던 작가의 말대로 체호프가 선사하는 예술에 힘입어 생의 연약하고 위태로운 조건을 조명하는 기회로 삼을 수 있어야겠다.

 



 책 속에서>


그 혼돈 속에서도 문득 견디기 힘든 끔찍한 생각이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 달빛 속에서 마치 시커먼 망령들처럼 보이는 이 사람들이 바로 이와 똑같은 고통을 날이면 날마다 몇 년이고 겪었으리라는 생각이었다. 어떻게 그는 이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런 것을 알지도, 알려고 하지도 않았을까? 그는 모르고 있었다. 그에게는 고통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죄가 없다. 하지만 니키타처럼 완고하고 거친 안드레이 예피미치의 양심은 그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한 냉기로 감쌌다. 그는 박차고 일어나서 온 힘을 다해 소리치고 싶었다.(p.132, 6호실)

 

"우리는 남들이 거짓말하는 걸 보고 듣는 것도 모자라서,“ 반대편으로 자세를 바꿔 누우며 이반 이바니치가 말했다. ”그런 거짓말을 참는다는 이유로 바보라고 놀림을 당하지요. 모욕과 멸시를 참으면서, 자신이 정직하고 자유로운 사람들 편이라는 걸 대놓고 주장하지도 못하고, 그러다가 자기 스스로 거짓말하며 미소를 흘립니다. 이 모든 게 빵 한조각, 따뜻한 방 한 칸, 한푼 값어치도 없는 알량한 지위 때문이죠. 아니,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어요!“(p.186, 상자 속의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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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닝
욘 포세 지음, 손화수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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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 더 나아가 억제함으로 고양하는 글쓰기를 계속 만난다. 클레어 키건, 한 강, 욘 포세의 간결함이 동일한 결은 아니어도 소란함이나 치장은 제하고 의미를 내포한 행간 그대로 남겨둔다는 점에서 연결되어 보이기도 한다. 2023년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욘 포세는 기념 연설문에서 내게 글쓰기는 귀를 기울여 듣는 일입니다. 글을 쓸 때 나는 결코 사전에 준비를 하거나 계획을 세우지 않습니다. 오직 듣기만 할 뿐입니다.”(p.95)라고 말했다. 귀 기울여 들을 때 들리는 것은 침묵이며 나아가 침묵 안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그의 설명은 책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한번 책 속으로 걸어 들어가게 만든다. 화자가 숲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처럼 말이다.

 

페이지마다 쌓여가는 눈이 표지판 없는 숲 한가운데에서 생존에 필요한 조건들을 냉각시킨다. 눈이 내리고, 어둠이 들어서고, 기온이 떨어지고, 체온이 내려가고, 허기지고 피로한 상태로 그는 본다, 듣는다, 감각한다. 자신이 처한 상황과 낯선 현상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수용한다. 미심쩍소, 당신 누구요, 라고 물을 권리, 잠시만요, 라고 유예시킬 자격은 이미 회수되었다. 기회를 달라고 하소연할 수 있나. 그는 기회를 기회라고 여기지 못했다. 그가 낭비한 시간 목록과 세부 사항이 추수가 끝난 곡식 단처럼 가지런히 묶여 있다. 첫 번째 묶음은 마땅치 않은 일련의 감정들이었다.

 

나는 차를 타고 벗어났다. 기분이 좋았다. 움직이니 기분이 좋았다.”(p.7)는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기쁨을 주지 못하는 자신의 상태를 벗어나고자 그는 무언가를 했을 뿐”(p.7)이다. 운전했고, 갈림길에서 선택했고, 숲길 끝에 처박혔고, 후진하지 못하여 차에서 내렸고, 도움을 요청하기 위하여 머릿속으로 방법을 시뮬레이션한 끝에 숲으로 들어섰다. 그는 지루함에서 공허함으로, 다시 두려움으로 감정의 파고를 탄다. 멍청하다는 자책을 털고 간절하게 용기를 내보려고 한다. ‘두려움을 감정으로 인식하지 않고 단어로 분석한다. ‘차분하고 조용한 두려움’, ‘불안함이 없는 두려움’, 말하자면 말뿐인 두려움’. 그러므로 감정은 허상이고 이성적인 나는 구출되는 게 마땅하다는 합리화다.

 

이 순간 눈앞에 보이는 실체는 몹시 불합리하다. 철저하게 혼자인 그, 누가 봐도 혼자인 그는 의식의 흐름대로 말문을 연다. 머릿속에 작동하는 사고는 언어 회로를 돌린다. 최면을 거는 듯한 문장으로, 이전의 말을 번복하고, 맞서다가 부연하고, 오류를 곁들이다 끝없이 덧댄다. 딱히 할 일이 없는 그는 의식의 흐름을 놓칠 이유가 없다. 자기의식과 침묵만이 유일한 대화 상대다. 그런데 누군가가 끼어들기 시작한다. 천사인지 악마인지 불분명한 순백색의 존재’, 예전 그대로 서로를 대하고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가 차례로 다가온다. 지력과 이성을 넘어서는 일이 발생하였다. 하지만 감정이 그랬듯이 지력이나 이성도 하나의 단어, 또는 말, 하나의 표현 방식일 뿐이라고 반론한다. 그는 곧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거부하지 않는다. 지루함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는데 결국 삶으로부터 이탈하는 결과를 낳는다. 작은 행동의 총합, 애쓰고 버틴 끝에 예외 없이 맞이할 단 하나의 결말을 빛 속에서 마무리한다. 아무도 예외일 수 없는 길로 들어선다.

 

작가는 예외일 수 없는 길인 죽음을 <아침 그리고 저녁>에 이어 <샤이닝>에서 다시 한번 형상화한다. 전작에서 친구 페테르가 고깃배를 타고 요한네스를 마중 나왔는데 이번에는 깊은 숲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마중 나온다. 전작에서 페테르는 질문하는 요한네스에게 하나하나 답해준다. ‘궂은일이 생긴 아래를 내려다보다 에 접어들자 인도자는 이제 말들이 사라질 거라고 안내했다. <샤이닝>에서는 화자인 가 다가온 이들을 묘사하다가 말미에는 일인칭 복수형인 우리로 주어를 바꾼다. 설명을 듣고 이해하려 했던 전작과 달리 이번에는 경계를 넘자마자 즉각적으로 통찰하고 의문도 망설임도 없이 빛으로 합류한다. 거의 단일한 공간적 배경인 눈 쌓인 숲에서 하루라는 한정된 시간 내에 죽음의 여정을 그린다. 작가는 죽음을 문학적으로 완성해 낸다. 동의하는가와 별개로 사실과 환상을 치밀하게 직조하여 설득력을 갖춘다. 죽음은 도처에 만연하나 나와는 무관하다고, 아직 무관하다고 여기는 게 보편적이다. 하지만 금기시하는 정서와 달리 이면에는 확고한 분위기로 자리 잡고 있지 않을까. 죽음이라는 담론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매우 자연스럽게 이끌어가는 작품이다.

 

<샤이닝>에서 독자는 열 번 남짓 마침표를 썼던 <아침 그리고 저녁>에 비하면 상당히 많은 양의 마침표를 볼 수 있다. 의식의 흐름이 이어질 때 쉼표를 타고 연속해 나간다. 다만 질문 끝에 물음표는 삽입하지 않는다. 답을 간구하기보다 상태를 수용하고 알아차리고 싶은 마음, 답변이 주어지지 않아도 이의가 없다는 마음을 엿본다. 80여 쪽 분량의 소설은 독자를 한 호흡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상당히 감각적이다. 말끝에 얼어붙는 입김, 속수무책으로 에워싸는 눈발이 느껴진다. 얼굴이 있어야 할 자리에 텅 빈 공간이 자리한, 검은색 양복을 입은 남자와 캐릭터들에게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을 보는 기분이 든다. 초현실주의 화가가 회화적으로 구축한 미지와 익명의 세계를 간결한 글로 읽으며 상상의 영역을 밀고 나가는 느낌이랄까. 한국어판 표지도 인상적이다. 인간이 육신의 눈에 담는 마지막 풍경이 별이 총총히 박힌 채 진공처럼 영혼을 빨아들이는 또 다른 차원의 문일까. 해석은 다양할 것이다. <샤이닝>은 묵독으로 읽어도 좋지만 낭독할 때 울림은 극대화된다. 분주한 일상을 잠시 멈추고 삶 전체를 조망해 볼 작품이다. 물음표 없는 물음이자 사유의 쉼표로 초청하는 작품의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그런데 그는 도대체 누구일까.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가 누구인지 직접 물어볼 수도 없는 일이다. 아니, 물어볼 수는 있는 일이었던가. 나는 말한다: 당신은 누구인가요. 존재가 말한다: 나는 나일 뿐입니다(p.64)

 

그는 더이상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그곳에 있는 듯 없는 듯 존재하고 있다, 반짝인다는 말, 순백색이라는 말, 빛을 발한다는 말의 의미도 사라진 것 같다, 마치 모든 것의 의미가 사라진 것 같다, 의미라는 것, 그렇다, 의미라는 것 자체가 더는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모든 것은 단지 거기 있을 뿐이고, 그것들은 모두 의미 그 자체다,(p.7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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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 보급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 / 사이언스북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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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는 지루할 만큼 긴 시간 나의 책장에 꽂혀있던 묵직한 붙박이별이었다. 오다 가다 눈에 비치다보니 어느 순간 무덤덤한 배경이 되어버렸다. 가끔 펄서처럼 깜빡였다. 등대처럼, 반딧불이처럼 빛을 내기도 했다. 못 본 듯 스쳐지나가기를 상당기간 지속하다 몇 달 전 중고서점에 가서 코스모스를 구입했다. 읽어야 되는 책이잖아, 최소한 코스모스는 읽어야하지 않겠니. 순간 정확히 간파할 수 없는 모호한 기분은 들었다. 기시감이랄까. 그렇게 책은 두 권이 되었고 2025년 새해 벽두, 그러니까 12일부터 함께 읽기를 시작하였고 124일에 마쳤다. 함께 읽기의 힘이다. 읽으면서도 떠나지 않는 한 가지 생각은 어떻게 쓸 것인가였다. 한 인간을 통과한 코스모스는 어떤 출력물로 재현하게 될지 기대와 부담과 염려가 엎치락뒤치락했다. 씨름할 여력은 없는데, 수에 약하고 공간감각 제로이며 다니던 길도 잃어버리는 길치이자 이과적 소양을 상당히 결핍하고 있는 사람이기에 독해에만 집중해도 미덥지 않았다. 약속은 약속이다. 함께 읽기로 했으면 읽어야 한다. 그렇게 첫 날이 밝았다.

 

비문학 명저이자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오른 저작인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홍승수 옮김, 사이언스북스, 2006, 1980, 719쪽 분량)는 동명의 텔레비전 다큐 프로그램에서 시작하였다. 당시 시공간을 넘나드는 인간의 탐험 여정은 지구 전체 인구의 3퍼센트에 이르는 사람들이 시청했고 다시 한 권의 책으로 묶여 페이지를 타고 떠나는 우주 여행 티켓이 되었다. 칼 세이건의 서거 10주기를 맞아 기념으로 출간한 보급판은 700여 페이지 분량으로 독자의 접근성과 편의성을 높였다. 또한 칼 세이건의 아내인 앤 드루얀의 한국어판 서문인 칼 세이건의 빈 의자는 저자의 발자취를 의미 있게 간추리면서도 제목처럼 아름다운 여운을 담는다.

 

책은 서문과 머리말, 본문으로 구성하고 있다. “코스모스(COSMOS)는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며 미래에도 있을 그 모든 것이다.”(p.36)라는 1장의 첫 문장(인용문을 제외하고)은 서문의 첫 문장으로 재인용 하고 있다. 여정의 입구와도 같은 문장이다. 본문은 총 13장에서 우주와 인류의 여행을 시공간을 넘나들며, 포착하고, 파고들며, 상상한다. 1장은 <코스모스의 바닷가에서>로 저자는 이 탐험에서 필요한 두 날개가 회의의 정신과 상상력’(p.37)이라고 전한다. 두 요소의 균형이 전제해야 하고, 차원이 다른 측정 단위, 광년의 의미 등도 설명한다. 별들의 공간에 가상여행을 다녀오고 행성 지구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p.46)로 이어지는 몇 페이지는 서정적인 문장으로 설렘 지수를 높인다. 코스모스의 매력을 단번에 이해시키는 인장들로 이런 방식으로 책이 계속 되겠구나 짐작할 수 있는 지점이다. 특히 고대 도시 알렉산드리아와 최고의 자랑거리였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과 박물관은 인상 깊다. 소속 학자들이 코스모스 전체를 연구했다는 점도, 세계의 모든 지식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집대성한 장소였다는 점도 새롭다. 거의 집착적인 축적이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을 연상케 한다. 소설 첫 문장에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이 들어 있기도 하기에.

 

지금부터는 장 별 정리를 이어간다. 비문학 벽돌책 서평을 신박하게 쓸 방법은 무엇일까 내내 궁리하면서 읽었다. 이런 책을 다 읽고 쓰겠다는 건 고문의 날을 열겠다는 것과 진배없다. 그래서 독서와 동시에 장별 요약을 하게 되었다. 기록 자체를 위하여, 추후 쓴 만큼이라도 기억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한다. 절대적이지 못한 요약, 나름대로의 요약은 늘 떫은맛을 남긴다. 이 부분이 더 중요한데 핵심을 빗겨서 정리했다는 날선 자아비판의 위험은 계속 도사린다. 지적에 단련된 나는 그날, 그 컨디션, 그 정신상태에서 건져 올렸던 발췌와 느낌, 엇나간 핵심을 기꺼이 보듬기로 한다. 이게 최선이었나 하는 질문에 모르오, 또는 그렇소, 라고 우기며. 지루한 분들은 패스하기 바란다. 1장에 이어서.

 

2<우주 생명의 푸가>는 외계 생물의 존재를 확인하면서 동시에 우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을 얻고자 한다. 생물학을 음악에 비유할 때 지구 생물학은 단일 주제 형식 음악만을 들려주지만 우주 생물이 들려줄 음악은 푸가일 가능성이 높다. 바로 “10억 개의 성부로 이루어진 은하 생명의 푸가”(p.67)는 화려하고도 장엄할거라 예상한다. 진화론과 자연 선택 이론 대(vs) 위대한 설계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입장은 지금까지도 논쟁적이다. 진화는 환경에 적응하기 유리한 돌연변이들이 축적되기 위한 긴 시간을 필요로 했다. 생명의 출현에서 동물, 다시 최초의 인간이 나타나기까지의 과정을 간추려본다. 복잡한 대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간의 학문은 한계를 지닌다. 상상력을 보태더라도 말이다. 그럼에도 과학과 역사학 등의 학문은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는 공통의 교훈을 남긴다.

 

3<지상과 천상의 하모니>는 점성술과 천문학, 물리학의 생성과 분화, 발전의 여정을 지적 거인이자 끝없는 헌신의 인물들로 살핀다. 프톨레마이오스 이후 코페르니쿠스를 거쳐 요하네스 케플러와 아이작 뉴턴에게서 인류가 진 빚을 저자는 정성껏 펼쳐 보인다. 읽고 싶은 책 목록에 상당히 오랜 기간 이름만 올리고 있던 <프린키피아>를 이해는 바라지 않아도 읽어는 봐야 할 것 같다고 백 번째 결심을 한다. 누구에게나 공로와 과실이 있다. 뉴턴이 남긴 마지막 말은 어떤 아쉬움도 상쇄할 만하다.

 

4<천국과 지옥>에서 저자는 관찰 시간 척도를 길게 늘렸을 때 평온과 고요의 지구격동과 소란의 행성이 될 수도 있음을 퉁구스카 사건의 예로 살핀다. 사건의 실체는 지구 자멸을 막기 위한 대비책을 강구의 인식으로 귀결한다. 잘못된 판단이 핵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경각심이다. 그래서 혜성의 실체를 파헤치고, 명명하고, 연구의 궤적을 짚어본다. 언젠가는 행성과 충돌할 혜성을 따라가다가 행성으로 시선을 돌린다. 지구형 행성과 목성형 행성의 엄청난 간극에 숨죽이고, 상상과 실제간 차이에 맞닥뜨린다. 오류를 진실이라고 잘못 세상에 드러낼 때 저자는 반론의 근거를 차례로 댄다. 그러면서 과학은 자기 검증을 생명으로 한다. 과학의 세계에서 새로운 생각이 인정을 받으려면 증거 제시라는 엄격한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P.195)고 주장한다. 동시에 열린 마음을 강조할 때 저자의 겸손하고 개방된 태도는 매우 인상깊다. 지구와 가장 가까운 행성, 수백 년간 자매로 여겨져 온 금성의 진면목은 전 행성 규모에서 대참사가 벌어지는’(p.209) 세계였다. 금성을 지옥으로 명명하면 상대적으로 지구는 천국이다. 그러나 경고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완전히 남의 별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는 무수한 단계들. 저자는 기후 위기를 언급하며 알고 보니 지구는 참으로 작고 참으로 연약한 세계이다. 지구는 좀 더 소중히 다루어져야 할 존재인 것이다.“(p.215)라는 말로 맺는다. 40여 년 전부터 이미 기후 위기를 경고한 과학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5장은 화성에 생명이 존재한다고 믿는 과학자와 화성에 생명이 없다고 하는 과학자의 주장이 반복되어 마치 블루스를 연주하는 듯하다고 <붉은 행성을 위한 블루스>라는 시적인 소제목을 선사했다. 지구와 유사해 보이며 지구에서 표면을 관측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행성인 화성을 주목한 이들이 등장한다. 퍼시벌 로웰, 조반니 스키아파렐리, 러셀 윌리스 등의 연구와 바이킹 착륙선의 화상 탐사 흔적, 그 안에 숨은 노고와 희망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어떤 유기분자도 발견되지 않는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어쩌면 지구 생명과 동일한 기본 분자로 이루어졌어도 조합의 방식이 낯설 수 있다고 상상의 영역을 넓힌다. 화성에 생명이 있다면, 하는 가정 이후에는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진다. 지구화의 개념과 화성의 지구화 실현을 희망적으로 그린다.

 

6<여행자가 들려준 이야기>에서는 보이저 2호의 태양계 외곽 지대 탐험을 엿본다. 저자는 탐험과 발견이 인류사를 특징지은 인간의 가장 뚜렷한 속성이며, 그러한 탐험 중 가장 최근의 사건으로 보이저 계획을 꼽는다. 화성과 금성을 현대판 신대륙으로 가정하며 시선을 17, 18세기 인류의 개척사로 거슬러 올라가며 유럽 지성들의 등장을 헤아리는데 그 중에서 르네상스적 인간을 연상케하는 콘스탄틴 하위헌스의 업적은 두드러진다. 저자가 들려주는 현대판 탐험대의 여행담은 감상적이면서도 생생하고, 무엇보다 보이저 호의 가상 함장들이 기록했다고 가정한 가상 항해 일지는 저자의 끝없는 열정과 진심의 또 다른 증거로 읽힌다.

 

7<밤하늘의 등뼈>에서 저자는 어릴 때 별을 궁금해하던 첫 기억으로 회귀한다. 책은 별이란 무엇인가? 이러한 질문은 아기의 웃음만큼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인류는 끊임없이 같은 질문을 반복하면서 살아왔다.”(p.331)며 인류의 조상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한다. 탁월한 상상화는 집요한 관심과 우러나는 진심을 동력삼아 하늘과 달, 별을 그려나간다. 어떤 원시 종족은 은하수를 밤의 등뼈’(p.340)라고 불렀다. 기원전 6세기 이오니아에서 새로운 사조,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는데 우주의 정돈된 질서를 코스모스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과학은 이오니아에서 태어났다며 저자는 과학자들을 차례로 호명한다. 탈레스부터 아낙시만드로스, 히포크라테스와 엠페도클레스, ‘원자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데모크리토스의 자취를 따라간다. 데모크리토스의 사고력이 헤라의 젖을 극복하고 밤하늘의 등뼈를 뛰어넘어”(p.359) 하늘 높이 치솟았다고 극찬한다. 이오니아의 과학자들을 지나 피타고라스부터 다시 과학과 철학의 거인들을 만난다. 별은 무엇일까로 시작한 질문은 코스모스와 겨루기 전에 먼저 코스모스를 이해해야 한다는데 이른다.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용기와 던져진 질문에 대한 깊이 있는 답변만이 우주에서 지구의 위상을 높일 수 있는 밑거름”(p.386)이 된다는 말이다.

 

8<시간과 공간을 가르는 여행>는 별자리 이야기로 문을 연다. 별자리 모양은 공간적으로뿐 아니라 시간적으로도 바뀐다. “공간과 시간은 서로 얽혀 있다. 시간적으로 과거를 보지 않으면 공간적으로 멀리 볼 수가 없다.”(p.397)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 이론과 시간 지연 현상은 들을 때마다 흥미롭다. “상대 운동의 영향 때문에 길이의 단축과 시간의 지연 같은 일이 벌어”(p.408)지고, 우주선을 타고 여행하는 사람이 보고 있는 시간과 지구에 남아 배웅한 사람들의 시간이 벌이는 어마어마한 격차는 몇몇 영화를 소환하지 않아도 우리의 상상을 광막한 지경으로 이끈다. 역사를 달리하는 두 갈래의 우주들이 나란히 실재할 수 있다는 주장, 과거로 돌아가 역사에 개입한다는 가상과 그로인한 파급도 꼬리를 문다. 저자는 별들의 눈에 비친 인간의 삶도 상상한다. 10억분의 1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만 반짝 하고 사라지는 매우 하찮은 존재로 여겨질 거라는 견해에는 그럼에도의 희망을 북돋는 선택을 할 것이다. 지금이 미래를 위한 또 한 번의 중요한 역사적 전환점이라고 긍정하듯이 말이다. 카를로 로벨리의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도 상기하게 되는 장이었다.

 

9<별들의 삶과 죽음>은 제목 그대로 별의 시원과 종국을 살펴본다. 수소를 제외한 나머지 원자들이 모두 별의 내부에서 만들어졌으니 별이 우주의 부엌”(p.432)이라고, 인간을 구성하는 원자 알갱이 하나하나가 모조리 별의 내부에서 합성되었으므로 우리는 별의 자녀들”(p.458)이라고 말한다. 적합한 비유는 이해를 돕고 친근한 화법과 저자의 설렘이 배어나는 어투는 독자 역시 그의 파장 안에 머물게 한다. 9장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중력이 물질과 빛에 미치는 영향을 루이스 캐럴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예로 들어 설명한 부분이다. 티파티 장면을 단계별로 구성한 삽화(이 삽화좀 크고 선명하게 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와 블랙홀을 불가해한 우주적 체셔 고양이”(p.471)라고 언급한 설명도 마찬가지다.

 

10<영원의 벼랑 끝>은 우주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살펴보며 별의 탄생부터 초신성 폭발로 마감하기까지 우주 진화의 대서사시”(p.487)를 다룬다. 은하의 충돌 과정에서 내부의 별들이 서로 충돌하는 일은 거의 없다. 별들 간의 간격이 별 하나의 크기에 비해 너무 멀기 때문이다. 활자를 따라갈 때 광대하고 휘황한 우주의 역동이 그려져 무한한 공간에 떠서 읽는 기분도 든다. 은하를 연구하며 우주의 질서와 아름다움을 비롯하여 잉태자인 동시에 파괴자로써의 두 가지 속성을 말한다. 현대 우주론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우주의 팽창과 대폭발 이론에 기여한 휴메이슨과 허블의 발견도 다룬다. 대폭발 이전의 우주, 비어있는 무에서 물질이 생긴 연유를 진화가 아닌 창조로 답할 경우, 소박한 우주관, 순진한 상상(p.513)에 동조한 신화도 짚는다. 다양한 문화권에서 보여주는 세계 창조 신화도 몇 장면이다. ‘납작이나라’(p.524)를 상정하고 차원을 설명하는 부분은 꽤 친절하고 흥미롭다, 마음에 든다. 웜홀과 우주들의 계층 구조도 숙고할만하다.(웜홀을 주제로 한 동화들을 구입했었는데 다 어디로 갔을까) 저자는 우리 우주 외의 또 다른 우주, 그 우주의 사람을 궁금해 한다. 그들의 세계에 진입할 길을 내보자고 독자를 이끈다.

 

11<미래로 띄운 편지>에서 저자는 코스모스 도처에 우리와 전혀 다른 모습의 지적 존재들이 살고 있으리라 예상한다. 현재 지구에 있는 지적 생물들 중에서 가장 우월하고 우아하며 고도의 지능을 소유한 고래를 불러낸다. 마치 노래와도 같은 고래의 소통 방식에 감탄하나 인간 문명의 발전이 소통을 차단할 뿐 아니라 직접적 위해를 가하는 현실에 안타까워한다. 고래나 인간의 생존에 필요한 50억 비트에 이르는 정보를 기술한다면, 정보의 양으로 따지면 세포 하나가 하나의 도서관이 된다. 우리 몸이 100조 개의 세포들로 만들어졌으니 한 사람 안에는 100조개의 도서관이 있는 셈이다. 가늠되지 않으나 즐겁다. 정보의 양이 증가해 유전자에 모두 저장하기 어려워지자 인간은 뇌와 별도의 공용 저장장소를 만들어내는데 바로 기억의 대형 물류 창고인 도서관이다. “책은 인간으로 하여금 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했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통해서 우리 모두는 마법사가 된 것이다.”(p.558) 이 장에서는 도서관, , 글쓰기, 기록의 역사, 인쇄술 발전, 진화 과정에서 우연의 개입, 외계에 존재할 지적 생명에 대한 관심으로 나아간다. 지구가 모든 생명을 존중하는 공동체가 될 때 은하 문명권의 어엿한 구성원”(p.577)으로서 자리매김할 수 있다고 본다.

 

12장은 <은하 대백과사전>으로 인류의 도서관에서 은하의 백과사전까지 영역을 넓힌다. 장 프랑수아 샹폴리옹이 고대 이집트 상형 문자를 해독할 수 있었던 열쇠는 로제타석이었다. 그렇다면 고대 문명이 아닌 외계 문명이 보내는 전파 신호를 해독할 성간 로제타석도 있을 테고, 그 역할은 바로 과학과 수학이 담당하리라고 저자는 생각한다. 문명과 문명의 만남은 평화 또는 파괴라는 다른 결과를 남겨왔는데 이에 견주에 우리가 외계 문명과 만날 경우 그들은 우호적일지 파괴적일지 예상해본다. 저자는 우리보다 앞선 기술을 가진 외계 문명인을 우리가 만나게 되어도 염려할 필요가 없겠다는 견해다. “스스로를 다스리고 남과 어울려 살 줄 무른다면 그렇게 오랜 세월을 견뎌 낼 수 없었을 것”(p.620)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가 외계 문명과의 만남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우리 자신의 후진성에서 유래하였고 우리의 공포감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보탠다. 그들이 보낼 정보를 기대하는 저자의 진심은 얼마나 많은 새로운 보배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p.621)하는 설렘으로 절정에 이른다.

 

13<누가 우리 지구를 대변해 줄까?>는 우리가 우주의 중심도, 우리 존재가 우주의 목적도 아니라는 현실 인식으로 대장정의 마무리를 시작한다. 우주에서 내려다본 지구에는 국경선이 없으며 쥐면 부서질 것만 같은 창백한 푸른 점일 뿐”(p.632)이다. 타협할 줄 모르는 이기심과 견재는 핵전쟁의 위협에 인류를 노출시킨다. 저자는 군수 산업의 특성과 강대국의 자기 모순적 정당화 논리를 지적하면서 지구상 모든 사람이 핵전쟁의 볼모로 잡혀 있다고 우려한다. 상대를 적대하기 이전에 그들이 지구 어디에 살든 나와 똑같은 인간이라는 점을 수용하자고 촉구한다. 피부 접촉을 통한 사랑과 폭력 성향의 상관관계는 비교적 최근 시선을 환기했던 브라이언 헤어 등의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의 주장을 상기시킨다. 끝에 이르러 책은 2장에서 언급하였던 눈부신 발전시기, 2000년 전의 알렉산드리아를 다시 한 번 소환한다.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집적한 인류 문화 산물을 영구히 소실하게 된 원인, 원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터무니없는 낭비는 안타깝다. 책에서 다룬 괄목할 만한 성과나 인물을 시간 함수로 표기한 자료(p.662)는 비어있는 1000년의 암흑기를 시각적으로 보여준다. “인류는 우주 한구석에 박힌 미물이었으나 이제 스스로를 인식할 줄 아는 존재로 이만큼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 자신의 기원을 더둠을 줄도 알게 됐다. 별에서 만들어진 물질이 별에 대해 숙고할 줄 알게 됐다.”(p.682)고 전하며 저자는 인류를 여기 있게 한 코스모스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라고 맺는다.

 

범박한 요약이 비록 과녁을 통과하지 못했더라도 활자를 읽으며 검게 반짝이는 우주를 떠다니던 상상 여행 발자국이기를 바란다. 후기에서 역자는 처음 번역을 할 때 원 저작이 이미 20년 된 시점이었기에 21세기 독자들의 반응을 걱정하였다고 쓴다. 그러나 이 책의 현재적 가치’(p.710)는 뜨거운 호응에서 고스란히 증명되었다고 보탠다. 이 책을 빛나게 하는 첫 번째 요인은 우주를 향해 뻗어나가는 저자의 한결같은 열정이다. 우주적 시각으로 관점을 고양시키고 외계의 생명체를 기대하며 만남을 준비하기 원한다. 새로운 별과 생명을 찾기 이전에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을 공유하는 인간은 물론, 동식물과 환경까지 마음으로 돌봐야 한다고 목소리 낸다.

 

두 번째로 전공지식을 갖추지 않은 일반 대중도 흥미롭게 접근할 수 있는 과학서이면서도 아우르는 범위는 상당히 넓다는 점이다. 우주에 초점을 두면서도 동서양의 결정적 장면, 세계사의 조류들, 빼어나거나 안타까운 인물 열전, 과학의 발전, 문명의 성쇠를 넘나들 뿐 아니라 한 인간의 심리까지도 찬찬히 살펴본다. 그럼으로 책은 먼저 헌신한 이들을 기억하고 기리는 기념관이 된다. 저자는 여러 곳에서 분명한 주장을 드러내지만 근거 또한 충분히 제시한다.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인물을 고루 스케치하는데 그 중에서 꼽자면 또 한명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 할만한 크리스티안 하위헌스다. 이분도 천재시구나 하였다.

 

세 번째는 서술 방식이다. 다루는 내용이 단순하지 않더라도 최대한 독자 편에서 설명한다.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묘사를 읽을 때, 꼭 들어맞는 비유에, 풍부한 은유에, 솔깃한 인용에 잠시 멈추고 상상하게 만든다. 그가 펼쳐내는 지식의 바다는 현학적이지 않고 배려가 넘친다. 밑줄의 행진, 설렘의 향연, 유쾌하고 두근거리는 생생한 어조, 유머러스한 가정이 끝나지 않을 듯이 계속된다.

 

이 책은 저자의 진심이 먼저 줄달음한다. 그 모습이 순수하고 근사하여 독자를 미소 지으며 따라 뛰게 만든다. ‘~(존재)하지 말라는 법도 없다는 말을 종종 건네며 낙관을 전염시킨다. 이해하지 못해도 그저 읽을 수 있어 바랄 것 없다는 협동의 마음이 독자를 뿌듯하고 충만하게 만든다. 독서가 이렇게나 즐겁구나, 유익하구나를 새삼 느끼며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자신이 너무 도덕 교과서 스러워 혼자 민망해한다. 숫자에 예민하지 못한 나로서는 이해하지 못하고 또 체감하기 어려운 지점이 천문학 단위이기도 했다. “빛은 1년이면 10조 킬로미터, 6조 마일을 간다.”(p.38)고 하면 6조마일이 뭔데 하며 갑갑해진다. “탄자니아에서부터 물경 38만 킬로미터나 떨어진 곳에도 사람의 발자국이 찍혀 있다.”(p.681)는 말에 흠, 물안경 아니고 물경이라...조용히 넘어간다. 이뿐이겠는가. 그래도 집중력 옷이라고 이름붙인 자주색 후드 짚업으로 무장하고 용기를 북돋으며 읽어나갔다.

 

매 장 서두의 인용문은 제목만 보았던 과학 고전 목록을 읽어야 할 목록으로 자리바꿈해준다. 그뿐 아니라 과학서, 문학, 예술서, 경전 등 독서의 폭도 감탄하게 된다. 코스모스를 읽으며 어떤 책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어린 왕자>가 네 번째 별에서 만난 사업가는 계산을 하느라 바빴다. 세고 또 센 별의 개수를 종이에 적어 서랍에 넣고 잠궈두는 그는 오억 개의 별로 부자가 되면 그걸로 다른 별을 살 수 있다고 했던가.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에서 로벨리는 엔트로피가 증가하기 때문에 시간이라는 개념이 생겨난 것이라고 했던가. 바다의 우아한 주인이자 고도의 지능을 가진 고래는 <모비 딕>의 에이해브 선장과의 끝장 투쟁 상대역으로 장편의 주인공이 되고도 남았겠고, 앞서 말했던 <바벨의 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자꾸 겹쳐 보인다.

 

5장에서 화성을 읽으며 이현 작가의 그림책 <나는 화성 탐사 로봇 오퍼튜니티입니다>를 다시 꺼내 보았다. 근대 SF문학의 선구자 하버트 조지 웰스 전작읽기도 욕심이 난다. 화성의 카날리를 연구한 조반니 스키아파렐리는 아끼는 그림책인 <피어나다>에 등장하는 주인공 엘사의 삼촌 아니었던가. 어떤 독자는 계속해서 또 다른 책이, 영화가 떠오르고 기사를 검색하거나 프로젝트를 확인하며 저자에게서 멈춘 시간 이후를 거꾸로 들려주고 싶을 수도 있겠다. 다시 칼 세이건의 빈의자로 돌아온다.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는 점점 많아질테다. 그가 목격하지 못했던 지구인의 다음 스텝들을 전해주고 싶다.

 

새벽 1시가 넘었지만 실내이기에 밖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별도 보이지 않는다. 너무 길게 쓰는 서평은 폐를 끼치는 것 같아서 졸음과 죄책감이 나란히 몰려온다. 완독하기로 약속한 날에 책을 마치며 귓전에 맴도는 멜로디가 있었다. <별 별 별 하나 별 둘, 너도 별, 나도 별,> 이 동요 모르니? 나는 딸에게 계속 물었는데 모른다고 한다. 젊은 아이가 기억력이 나쁘냐며 인터넷 검색을 해봤더니 세상에, 내가 졸업한 고등학교 교가였다. <별 별 별 하나 별 둘, 너도 별, 나도 별, 언니도 별, 나도 별, 모두 다 관악산 정기탄 서문의 별, 아아 서문의 딸> 00여고 교가다. (별이 가장 많이 들어간 교가로 어딘가에 올라 있다는 소식이다) 그러고 보니 부를 때 약간 부끄러웠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어떻게 교가를 잊어버리나. 나라는 별이 늙었다. 다시 한 번 그러고 보니 나의 블로그 네임 책먹는 꿈별3년 내내 지속한 교가제창 덕분에 무의식에 스며든 영향도 있지 않을까.

 

서평은 이렇게 쓰는 게 아니다. 세상 최고의 비문학 서평을 써보겠다고 칼을 갈았건만 사방으로 질주하는 듯한, <별들에게 물어봐>야 할 것같은 서평을 쓰고 말았다. 퇴고하려고 스크롤을 올리다가 미쳤구나, 라고 내뱉었다. 비현실적으로 장황하다. 하지만 나에게는 다시라는 가능성이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또 한번의 기회를 선택할 수 있다. 물론 마음 먹는다는게 내맘 같지는 않다. 언젠가 간결하고 우아한, <코스모스>에 걸맞는 진정한 서평을 다시 써보리라.(오늘은 이만 자리라.) 함께 읽어나간 <독서본능>팀과 리드문을 올려주신 회장님께도 감사한 마음이다. 밤하늘을 보면 칼 세이건이라는 이름이 또 하나의 북극성처럼 빛을 낼 것이다. 세상 다정한 과학 도서, 온기 가득한 비문학 도서 코스모스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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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랍어 시간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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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희랍어 시간(문학동네, 2011, 194쪽 분량)은 보르헤스의 유명한 묘비명에 얽힌 일화로 시작한다. “우리 사이에 칼이 있었네, 라고 자신의 묘비명을 써달라고 보르헤스는 유언했다.”(p.7)는 첫 문장부터 질문 또는 의미의 덩어리들이 독자 앞에 놓인다. 힌트는 바로 뒤따른다. “만년의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길게 가로놓였던 실명이 아니라면 무엇이었을까.”(p.8) 칼의 정체는 실명이었고 보르헤스와 세계 사이에 무시무시한 번쩍임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도입부의 강렬한 이미지는 소설 전체를 견인한다. 읽으며 묻고 읽으며 궁금하고 읽다 말고 멈추다가 다시 몇 페이지를 되돌아간다. 페이지를 앞으로 뒤로 번갈아 넘기는 동작이 읽는 내내 반복된다.

 

소설은 익명인 여자와 남자, 두 주인공이 단절하는 칼들을 넘어서서 마침내 유영하는 순간으로 맺는다. 유영이 성공적일지, 이 정도면 족하다 여길만한 여정에 들어설지는 미지수다. 예측하고 상상하는 일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럼에도 다섯 번째 장편인 희랍어 시간을 출간 후 찾아온 봄에 작가는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한 걸음 더나아가는 소설을 쓰겠다고 생각하였다. 이 책이 빛과 따스함의 방향으로 진입하고 있다고 희망적으로 해석할 만한 배경이다. 이런 배경이 없더라도 결말은 안온하다. 매끄러운 안온함은 아니고 걸림돌은 분명 존재한다. 서사의 종착지를 20흑점이라고 생각할 때 소리없이, 먼 곳에서 흑점들이 폭발한다. 맞닿은 심장들, 맞닿은 입술들이 영원히 어긋난다.”(p.184)는 끝문장은 어긋남을 이야기한다. 그것도 영원히라고 단정하는 어긋남이다. 그럼에도 빛과 희망은 스며든다. 역설적 제목인 심해의 숲에서, 숫자 1부터 계단 오르듯 헤아려온 장 번호가 숫자 0으로 고요해졌음에도 스며든다.

 

0일까 다시 독자는 궁금하다. “어둠에는 이데아가 없어. 그냥 어둠이야, 마이너스의 어둠. 쉽게 말해서, 0 이하의 세계에는 이데아가 없는 거야. 아무리 미약해도 좋으니 빛이 필요해. 미약한 빛이라도 없으면 이데아도 없는 거야.”(p.118) 철학을 하기엔 넌 너무 문학적이라고 일갈했던 까다로운 친구, 동갑내기 스승 요하임 그룬델의 말이다. 뜨거움의 또 다른 현현이었던, ‘불붙은 채 소멸에 맞서는 생명이었던 요하임은 결국 마이너스의 어둠에 잠겼을까. 그렇다면 0은 얼굴까지 차오른 정적을 물리치고 심해를 탈출할 가능성, 발화와 호흡의 새로운 시작점일 테다.

 

읽어나가며 이 부분이 좋다, 따로 떼어내서 몇 번이고 다시 곱씹어도 좋다고 감탄한다. 그런 지점이 이곳저곳에 빼곡하게 박혀있다. 발상은 몇 줄의 문장, 단락으로도 빛이 나고 전환하는 장면과 나란히 놓여 있을 때도, 페이지를 넘어가 다시 연결됨을 알아차릴 때도 근사하다. 두 주인공은 마치 중력의 힘을 덜 받는 듯이 지면에서 약간 떠서 움직이는 느낌이다. 내면에 남겨진 얼룩이나 상처의 증거인양 신체에 중대한 결손을 일으킨 현재를 인정하는 사람들. 침묵에 잠긴 여자와 암흑에 갇혀가는 남자는 묵묵하게 자기 조건을 견디고, 결핍의 예후와 삶의 다음 단계를 기다린다. 각자의 최선을 적극적으로 이행한다. 희랍어를 강의함으로, 희랍어를 수강함으로 자기 연민과 타협하지 않는다. 돌파하고자 애쓴다.

 

쓸모가 가치판단의 상당한 기준으로 자리매김한지 오래지만 무용한 사어인 희랍어가 위협하는 칼을 넘어설 연장으로 등장한다. 갈고 닦아도 소통에는 불필요하다. 낯설고도 난도 높은 언어를 익히기 위해 쉽지 않는 단련의 시간을 지불하고 원하는 목적을 기대한다는 게 합리적인가. 그러나 소설은 일말의 가능성을 향해 몰입하고 집중하는 의지를 보여준다. 영리하지 못해 보이는 행동을 밀고 나간다고 환경이 편안한가, 아니다. 소설은 삶이 건넨 마땅치 않고 불합리하며 억울한 조건들을 대하는 태도, 맞서는 결심을 먼 거리에서 조망한다. 시간에 자취를 남기며 도달한 현재를 미화하지 않은 채 수용한다. 그런 일은 숭고해보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시간은 물 흐르듯 흐르지 않는다. 긴장하고 의지를 세워 만든 결단의 기둥이 하루 이십 사 시간에 촘촘히 박혀있다. 잠시 호흡이 부드러워지는 순간이라면 남자는 여동생 란에게 편지를 쓸 때, 여자는 아이를 기억할 때다. 힘을 북돋게 하는 절대 대상과 치유 불가한 상처의 원인 제공자가 가족이라는 동일한 굴레 안에 존재한다. 행간이 넓은 소설은 가족의 이야기, 드러나는 폭력과 폭력 아닌 얼굴을 한 폭력의 이야기, 태도와 관계와 연결, 선택과 책임, 삶의 지향 등 질문으로 가득하다. 인생이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처한 비극에 일정 부분 저항하고, 일정 부분 수용하는 균형을 보여준다. 이상적이지는 못해도 근접하려는 노력은 치열하고, 관조할 때조차 배려가득하다.

 

여자와 남자 두 주인공에게서 라틴 아메리카를 넘어 세계 문학사의 천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특징을 만나는 일도 놓칠 수 없다. 모국어 에스파냐어보다 영어를 먼저 사용했던 유년기 이중 언어체험이나 9세에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를 영어로 번역해 신문에 투고했던 보르헤스의 민감한 언어 감각을 여자에게서 본다. 가계의 유전적 질환으로 시력을 거의 잃고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되어 읽을 수 없는 장서의 우주를 거닌 노후의 보르헤스를 남자에게서 발견한다.

 

작가 특유의 아름다운 묘사는 물론 시간과 공간과 화자가, 대화와 서술이 엇갈리고 교차하는 배치는 천천히 깊이 읽도록 이끈다. 적확하면서도 자연스러운 장면 전환과 화제 이동도 인상적이다. 꾹꾹 눌러쓴듯한 묵직함이 온전히 전해진다. 언어가 작품의 축을 이루고 있다는 점, 병아리의 죽음, , 나무, , , 눈을 비롯하여 이후 한강 소설에서 만나게 될 편린이 단초처럼 자리 잡고 있는 점도 시선을 끈다. “역사적 트라우마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인간 삶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강렬하고 시적인 산문이라는 노벨 문학상 선정 이유는 이 작품에서도 여전히 확인할 수 있다. 작별하지 않는다가 보여주는 시적인 산문의 결이 움트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 수식에 가장 적합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 아끼는 한강의 작품이 될듯하여 기쁘다. ‘그것은 침입하듯 갑자기 오기도, 경고의 북을 치며 포위하듯 다가오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 발을 내딛기로, 감은 눈을 뜨기로, 처음인 듯 목소리 내기로 결단하는 많은 이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칼레파 타 칼라.

 

아름다움은 아름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어려운 것이다.

아름다움은 고결한 것이다.

 

세 번역이 모두 그르지 않은 것은, 고대 희랍인들에게 아름다움과 어려움과 고결함이 아직 분절되지 않은 관념이었기 때문이다. 모국어에서 이 처음부터 밝음과 색채라는 두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p.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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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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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서서히 스며드는 것. 아침과 저녁이 솔기도 구획도 없이 이어지듯 삶과 죽음도 연결된다. 살아온 날을 헤아릴 수 있지만 남아있는 날을 가늠할 수 없다. 헤아릴 수 있다고 온전치 않고 가늠하는 정도라고 없음은 아니다. 기억은 과거를 단단히 붙들었다 싶지만 움켜쥔 손은 어느새 빈손이다. 소설은 주인공 요한네스 인생의 순간을 포착해 단언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는 사태를 인정하고 수용하도록 부드럽게 이끈다.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2019, 2000, 152쪽 분량)』은 시처럼 노래처럼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소설이다. 욘 포세는 “입센의 재래”, “21세기의 사뮈엘 베케트”라 불리는 노르웨이 작가로 20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 장편소설 『레드, 블랙』으로 데뷔한 이래 전 세계 무대에 900회 이상 작품을 올린 극작가로도 명성을 높였다. 희곡과 소설, 시, 산문 등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작가에게 노벨 위원회는 “그의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한 『아침 그리고 저녁』은 이를 빼어나게 증명한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뻐근하게 옥죄어오는 심정에, 고통이라고 슬픔이라고 단어를 나열하는 대신에 이미지를 활자화하고 분위기를 스케치하여 우리는 낯설고도 익숙한 지점에서 일상의 얼굴을 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을 배웅한다.


소설은 태어나고 살고 죽는 인간의 전 생애를 보여준다. 1장에서 올라이는 아들이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하며 그에게 아버지의 이름 ‘요한네스’를 물려준다. 아들 요한네스를 맞을 때 아내 마르타를 떠나보내는 암시가 짙다. 2장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요한네스는 잠에서 깨어나 뻣뻣하고 찌뿌듯한 몸으로 오래 거실 옆방의 커튼으로 가려놓은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p.33) 어서 일어나야지 다잡으며 그대로 누워 있는 그의 아침은 여느 누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더 이상 일터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그, 오랜 의무에서 자유로워진 그의 아침은 그런데 젊을 때와는 물론, 어느 때와도 다르다.


더 다른 건 몸이 너무 가볍다는 거다. ‘가뿐하게 일어나 앉는’ 그, 가볍게 일어나고 몸 뿐 아니라 머릿속도 날아갈 듯 가볍다고 여긴다. ‘풋내기 시절’(p.35)로 돌아간 것 같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며 맞은편 비어있는 아내 에르나의 자리를 본다. 그는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으려던 미끼 생각을 한다. 연금을 받고 나서는 염려도 줄었다. 평안한 나날이다. 이질감을 잠시 내려놓고 하루 동안 할 일을 스스로 채워 넣는다. 이것, 저것 할 일을 만든다. 마음이 맞는 막내딸 싱네에게 갈까, 구두장이 야코프도 기억해보고, 날씨가 괜찮으니 노젓는 배로도 서쪽 멀리까지 갈 수 있겠다. 만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는 특별했던 친구 페테르를 만난다. 페테르와 대화 중에 등장하는 노처녀 페테르센 이야기를 요한네스는 저지한다. 그녀가 죽은 건 확실한데, 아닌 듯 화제로 삼는 건 옳지 않다. 그러던 중 에르나를 처음 만나고 있다, 나 요한네스가.


작가는 이십 페이지 내외의 1장과 백여 페이지의 2장으로 작품을 완결했다. 1장은 요한네스 가 머물던 어머니라는 세상과 이별하고 세상 빛을 보는 첫 순간을 아버지 올라이 입장에서 그렸다. 2장은 일생을 살아내고 맞는 요한네스의 특별한 첫 날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술한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요한네스에게 의미있는 인물들을 불러내고 그들의 목소리와 시각을 고루 담아낸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과정에서 ‘살고’는 회상의 형식으로 결정적 장면만을 추린다. 소설은 1장을 아침으로 2장을 저녁으로 대비할 수도 있겠다. 서사는 간결하지만 의미는 함축적이고 상당한 메시지를 행간에, 여백에, 서술하지 않음에 숨기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실험적이기를 의도한 바가 없다”(p.140)고 밝혔다지만 다분히 혁신적인 문체는 의식의 흐름을 매듭 없이, 온점으로 맺는 일 없이 이어나간다. 온점을 발견하면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하며 낯설고도 놀란 기분이다. 열 번 남짓 마침표는 쓰였고 필자는 동그라미를 해 두었는데 옮긴이의 말에서는 친절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p.16) 소설은 위 문장의 담담한 증언이다. 분량은 작지만 가볍게 완독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어떤 문장은 명징하게 인간의 오래된 물음을 새겨 넣는다. “그리고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그리고 저 위 창고 다락에는, 오랜 세월 모인 많은 물건이 있다,”(p.43)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는 성찰은 얼마나 많이 되풀이 되었을까. 사물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아주 특별한 장을 담그시고 아주 특별한 음식을 식탁에 올리시던 시할머니가 95세로 돌아가신 후에 남겨진 자그마한 쇠국자와 비취색 간장 종지를 보고 한동안을 먹먹했다. 할머니는 더 이상 못 보는데 허름한 국자와 종지가 그 자리를 지킨다니 국자에겐 죄가 없는데, 왠지 분하고 억울했다.


요한네스는 하루 동안 생의 중요한 순간을 회고한다. “에르나가 살아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에르나가 가고 없는 것이 슬프다,”(p.101), “에르나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렇다면 신이 나서 집으로 갈 텐데, 이제, 이제는 그럴 일이 없군,”(p.103) 책은 남은자의 슬픔을 고스란히 전한다. 묵묵한 어조가 더 맺힌다. 이미 그도 더 이상은 남은 자가 아닌데, 다시 한 번 회상의 기회를 얻는다. 죽음에 배웅 나온 페테르는 요한네스의 질문에 답한다. 목적지가 없나? 위험한가? 아픈가? 영혼은? 좋은가? 그리고 묻는다, 에르나는 거기 있나? 질문 그리고 사라질 것들.


소설은 절정이나 변곡점 없이 인간의 조건을 관조한다. 삶을 성찰하게 한다. 독자도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살아온 나날을 헤아리게 된다. 어떤 장면에서는 마치 영상처럼 서로가 서로를 통과하며 안타까움을 더하고, 글로 이미지를 겪으며 상상한다. 산문시처럼 계속 이어질 듯한 작품이 온점도 쉼표도 없이 끝날 때, 독자 역시 아쉽고 아프고 아끼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부르게 될 것이다. 누구를 부르건 또는 불리우건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는 건 자명하다. 그런 하루가 빼앗기지 않을 의미를 만들 것이다. 2024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아침 그리고 저녁』이었고, 서평은 의도치 않게 2년에 걸쳐 쓰게 되었다. 31일과 2일까지. 완독이라고 체크할 수 있을까. 어떤 작품은 완독되지 않은 채 여정에 머물며 무심하게 흔들린다. 물결이 고정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사후,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동의는 차치하고. 하나의 가능성이자 열린 질문을 품은 작품이 새로운 해에 권하는 첫 책이 되었다.



책 속에서>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 물고기, 집, 그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p.16)


오늘은 뭘 해야 하나? 온종일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고, 에르나가 죽은 후로는 마치 모든 온기가 그녀와 더불어 떠나버린 듯 집안이 너무도 썰렁해졌다, 그래 물론 난로에 불을 피울 수도 있다 그리고 전기히터를 틀 수도 있다, 그리고 히터 온도는 항상 제일 높게 맞추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고, 더 이상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 다른 사람들처럼, 연금을 받으면서부터는, 하지만 어떻게 해도 집은 온전히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등을 아무리 켜도, 더 이상 온전히 환해지지 않았다,(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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