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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6
제임스 조이스 지음, 진선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평점 :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4/문학동네/진선주 옮김)』은 “더블린 사람들”, “율리시스”와 함께 “더블린 3부작”에 포함되는 자전적 성장 소설이다. 37년간 망명작가 생활을 하면서 실험적 작품을 꾸준히 발표하고 두드러진 그만의 작법들, “이피퍼니를 비롯해 자유간접화법, 틈 또는 생략의 기법, 열린 결말, 의식의 흐름 기법, 특히 내면독백 등(해설, 455p)”을 시도한다.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등에게 영향을 끼친 제임스 조이스는 현대 문학의 고지를 점한다. 이피퍼니(현현)나 의식의 흐름 등 문학용어로 먼저 연상되는 작품이라 읽기 전에 걱정이 앞선 면도 있었지만, 촘촘한 주석은 얼마나 작가의 현실을 반영했을지를 가늠케 했고 부록의 아일랜드 역사개요까지 곁들여 독자의 이해를 도와주니 그 걱정도 조금은 덜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기술에 온 마음을 쏟았다.(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제8권 188행)” 시작에 앞선 제사는 알려지지 않은 기술, 그러나 간절하고 유일한 소망 또는 소명을 향해 바쳐질 시간, 삶을 그려보게 한다. 제임스 조이스가 “스티븐 히어로”라는 제목으로 26장까지 썼으나 다시 5장으로 축약한 (443p해설) 첫 장은 주인공 스티븐 디덜러스의 소년기, 클롱고우스 우드 칼리지 시절을 그린다. 어떤 장면들은 두려움에 싸인 연약한 자신을 어쩔 줄 모르고 견디고 넘어가는 불안감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나의 유년을 소환하기도 한다. 매일 반복하는 기도문, 길지만 멈추거나 생략할 수 없는 밤기도를 끝내는 순간의 “그러나 이제 죽더라도 지옥에 떨어지지는 않으리라.(29p)”하는 안도감은 지금도 생생하다. “그는 정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 수 없고 또 우주가 어디서 끝나는지도 잘 몰라서 고통스러웠다. 스스로가 작고 무력하게 느겨졌다.(26p)” 동급생의 폭력에 양호실에서 떨며 자신의 장례식을 그려보거나 교무주임의 부당한 처사에 대항해 목소리를 내기도 하며 예민한 소년기를 통과한다. ‘결코 알 수 없는 대상들’과 ‘작고 무력한 나’의 대비는 날카롭기만 하다.
“그가 화가 치미는 데는 먼 것과 가까운 것, 여러 이유가 있었다.(107p)” 어리고 충동적인 자신, 가세의 변화, 그러나 어찌할 수 없음에 대해 “그 모든 것을 참을성 있게 마음속에 새겨두었다.(108p)”고 밝힌다. 2장에서 더블린으로 옮기고 벨비디어 칼리지로 전학하게 된 스티븐은 “소년기의 두 해 동안 그가 지나온 성장의 과정과 쌓아온 지식이 그때와 지금 사이를 가로막고 서서 그런 식의 감정의 발산을 허용하지 않았다.(125p)” 이미 어제의 그는 아니다. 분별하고 선택한다. 부모님이나 선생님들의 그런 목소리, 명령하는 목소리, 속세의 목소리, 졸라대는 목소리(135p)를 공허한 목소리가 내는 소음이라 여기고 오히려 혼자 또는 환상 속 친구들에게서 행복을 느낀다. 자신을 알지 못하는 목소리들-명심해라, 명심해라-에 대한 반감은 자신의 현실감각을 의심하게도 정체성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나는 스티븐 디덜러스다. 나는 지금 아버지와 나란히 걸어가고 있고 그의 이름은 사이먼 디덜러스다. 우리는 지금 아일랜드의 코크에 와 있다. 코크는 도시다. 우리의 객실은 빅토리아 호텔에 있다. 빅토리아와 스티븐과 사이먼, 사이먼과 스티븐과 빅토리아. 이름들이다.(150p)” 여기에 육신의 타락이 보태진다.
3장은 “어쩼든 신앙심은 사라져버렸다. 그의 영혼이 스스로의 파멸을 갈망하는 마당에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겠는가?(169p)” 라며 죄책감에 자신을 정죄한다. 학교 수호성인 축일 기념 피정에서 옛 스승 아널 신부의 강론은 심판을 말한다. 지옥을 묘사할 때 영원에 대한 모래산 비유나 ‘에버, 네버, 에버, 네버(217p)’ 똑딱거리는 시계소리의 예들이 실로 무섭고, 글 만으로 그려내는 지옥도가 입체적이고 감각적이라 심장을 옥죄며 신곡(단테)의 지옥편을 연상시킨다. 이는 그를 참회로 이끌고 4장에서 고행과 속죄의 시간에 자신을 철저히 내맡긴다. 그러나 교무주임의 성직 제안은 오히려 자신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된다. “두 발에는 이 세상 끝까지 가고야 말겠다는 방랑의 욕구가 용솟음쳤다. 앞으로! 앞으로! 그의 심장이 이렇게 외치는 듯했다.(279p)” 예술과 방랑의 심장을 지닌 헤세의 크눌프가 떠오르기도 했다. 스티븐은 혼자였던 그 때, 바닷가에서 그녀를 만난다. “그녀의 모습은 그의 영혼 속에 영원토록 아로새겨져 어떠한 말로도 그의 황홀경이 빚어낸 거룩한 침묵을 깨뜨릴 수 없었다. 그녀가 눈길로 그를 불렀을 때 그의 영혼은 그 부름에 화답했다. 살아가면서, 실수하기도 하면서, 추락하기도 하면서, 승리하기도 하면서, 삶에서 삶을 재창조하리라! 어떤 야성적인 천사가, 인간적인 활기와 아름다움을 지닌 천사가, 삶의 아름다운 궁전에서 보낸 사자가 실수와 영광의 모든 길로 통하는 대문을 어느 황홀한 순간 활짝 열어주기 위해 그 앞에 돌연히 나타난 것이었다.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아가야지!(282p)” 이 책 전체의 주제가 아닐까. 순수한 방랑의 목표가 뚜렷한 푯대, 의미를 부여받는 순간이다.
5장에서 스티븐은 앞으로 살아갈 삶의 방향을 점점 더 구체화한다. “디덜러스 군, 자네는 예술가가 아닌가, 그렇지?” 하며 “자네 지금 그 아름다움이라는 문제를 풀 수 있겠나?(306p)” 묻는 교무처장 신부, 스티븐과는 전혀 달랐을 삶의 행로를 견지해오고 그 결과 ‘이용해왔으나, 애착은 없는’, 아일랜드에 사는 가난한 영국인 개종자(311p)를 대비시킨다. 친구 데이빈과의 대화에서 언어, 영혼, 조국 아일랜드에 대한 신념을 보여주고(337p). 린체와의 대화에서는 본격적으로 예술론을 펼친다. 참다움과 아름다움, 아름다움에 필요한 세 가지 인테그리타스(전체성), 조화(콘소난티아), 클라리타스(광채), 예술의 세 가지 형식 등 이론의 장이다. 스티븐의 질문 기록 또한 흥미롭다. 이렇게 민감한 영혼이 길을 떠나는 새로운 출발은 가장 완벽한 마침이고 그의 앞으로의 행적이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날들과 나란히 놓는다면 어떨까 상상하게 된다.
정성 가득한 해설은 무디고 침침한 시력으로 발견할 수 없었던 많은 의미를 밝혀줘 감사했다. 제임스 조이스와 스티븐 데덜러스라는 그의 필명, 데덜러스가 디덜러스로 바뀌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되고 신화 차용과 이름의 의미를 깨닫기까지의 과정, 작가의 독창적 서술 전략 이피퍼니 등을 풀어주니 작품이 몇 배로 풍성해지는 느낌이다. 그 중에서도 예술가를 정의내리던 장면에 대한 해석부분은 감동적이다. “작가가 죽은 듯이 침묵해야 하는 이유는 독자에게 최대한 읽기의 자유를 제공하기 위해서이다. 작가의 간섭이 없는 곳에 독자의 자유로운 읽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정답이 없는 해석, 자유분방한 읽기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 열린 문학의 특징이라면, 스티븐의 이 주장은 열린 문학의 매니페스토라 할 것이다.(해설455p)”
깨어있는 정신, 민감한 영혼의 자취를 어린 시절부터 청년에 이르기까지 엿볼 수 있었던 생생한 성장기는 그가 처한 시공간적 배경은 물론 독특한 역사적 배경에 녹아들거나 맞서는 변화를 투명하게 보여준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인적, 물적 환경에 대해서도 감추거나 에둘러 말하거나 미화하는 법 없이 최선을 다해 진실만을 선택한다. 그에 더해 글에서도 말에서도 그 진실이 일말의 왜곡 없이 전달되도록 정련된 문장만을 통과시킨다. 그런 문장으로 이루어졌기에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삶과 예술을 묻는 탁월한 문제지이자 모범답안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범답안이 유일한 정답은 아니겠고 제2, 제3의 답안도 가능하겠지만 조금 더 높은 곳에서 빛을 품고 있는 방식, 외로운 가시밭 길일지언정 자족하고도 남을 근사한 길일 것이라는 믿음은 넘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