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지바고(박형규 옮김/문학동네)』는 시인이자 번역가, 소설가인 보리스 파스테르타크(1890~1960)의 유일한 장편 소설로 1945년 출간에 대한 기대없이 집필을 시작해서 10년 후 완성하게 되고 출간은 1957년 이탈리아에서 이루어진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첫 번째 정체성은 주인공 유리 지바고에게 투영했듯이 ‘시인’으로 상징주의 시인 알렉산드르 블로크, 미래파 시인 마야콥스키의 영향이 두드러진 시집들을 출간한다. 1931년부터 약 10년간 작가동맹과 불화했던 스탈린 절대 권력시대에 셰익스피어, 괴테 등을 번역하며 작가로서는 침묵기를 거치고 이후 모스크바 근교에 은둔하며 『닥터 지바고』를 쓴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는 “자국 내 출간불허로 이탈리아에서 처음 소개된 이듬해인 1958년 “동시대 서정시와 러시아 서사문학의 위대한 전통의 계승에 기여한” 업적으로 이반 부닌에 이어 러시아에서 두번째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출판사 인용)된다. 『닥터 지바고』는 1965년 데이빗 린 감독의 영화로 다시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긴다.
“세상의 모든 움직임은 따로따로 전부가 계산된 것으로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그 움직임들은 그것들을 한데 모으는 삶이라는 일반적 흐름에 불분명하게 뒤섞여 마치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다. 사람들은 자기 관심사의 메커니즘에 따라 분주히 움직였다. 하지만 주요한 조절 장치인 근본적인 무사태평함이 없다면 그 메커니즘은 잘 작동하지 않는다.”(p.25) 이 무사태평함은 연대감각, 연결의 확신, 차원과 역사를 아우르는 행복감을 주겠지만 이에서 불행하고도 괴로운 예외가 바로 민감한 소년 유라, 유리 안드레예비치 지바고다. 긴 소설이 시작되고 몇 페이지가 지나지 않아 소년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잃은 채 친구들과 유년의 시기, 배움의 때를 지나고 있다.
미망인인 아말리야 카를로브나는 아들과 딸 라리사를 데리고 가난의 공포 속에서 후원자 코마롭스키에게 의지한다. 곧 ‘이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생명체’(p.43)였던 라라를 그는 ‘정신적으로 계발시켜 주었’(p.79)으며 비열함이 결여된 라라는 이에 ‘궤변의 길’(p.81)로 들어선다. 소년 안티포프를 만나게 된 라라는 그의 마음을 거부하지 않는다. 유리 안드레예비치는 코마롭스키와 함께 있는 라라를 우연히 보았을 때 인형극의 괴뢰사와 꼭두각시 인형에 견주는데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다. 유라와 토냐에게 결혼의 약속이 이루어지고 얼마 후 함께 파티를 향하던 날, 유라(지바고)와 라라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각각 같은 시간, 같은 공간을 지나친다. “유라는 거리를 둘러보다 조금 전 라라의 눈에 비쳤던 것과 똑같은 광경을 보았다.”(p.130) 의학을 공부하면서 시적 감동에 사로잡혔던 유라는 언제나 깨어있는 영혼이다. “유라는 불현 듯 블로크를 떠올렸다-그는 러시아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북방 도시의 일상에, 최신의 문학에, 현대적인 거리의 별이 빛나는 하늘 아래, 금세기 객실에서 밝게 타오르는 욜카를 둘러싼 크리스마스라는 현상이었다. 유라는 블로크에 대한 글은 필요 없고, 자신이 써야 할 것은 혹한과 늑대와 어두운 전나무숲과 함께 네덜란드 사람들이 그렸던 것과 같은 동방박사 세 사람의 러시아적인 경배라고 생각했다.”(p.131)
또다시 특별한 상황에서, 총성과 함께 만나게 된 라라. 이후 그들의 재회는 계속된다. 각각 가정을 이루었지만 그 가정의 구속력은 시대적 상황 앞에서 바람 앞 촛불같다. 소설은 1903년부터 1929년 지바고의 죽음까지, 그리고 지바고 사후 약 20년을 그린다. 사후의 기간은 소설 말미 17장 ‘유리 지바고의 시’라는 유작시 수록의 에필로그 배경으로 삼는다. 1917년을 기점으로 한 혁명 전 후, 29년까지를 그리는 소설은 대격변 시기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유리 지바고의 생애를 통해 묵직한 주제를 담아낸다. 순수하고 자유로운 개인, 사랑의 추종자이자 완성에 닿기 원했던 지바고는 내적 갈구와 선택들을 독자에게 상기시킨다. “아침이 되자 그는 그전까지 사람들이 부르던 똑같은 이름으로 자신이 불리는 것에 거의 놀라움을 느낄 만큼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p.157)고 그려진 안티포프. 라라와 결혼 후 그의 돌연한 선택, 혁명으로의 도피와 투사가 그의 인생에 남긴 회복할 수 없는 상흔은 또 다른 ‘붉은 마가목 열매’로 종결을 맞는다. 순결과 세속의 정점으로 그려지는 지바고의 영원한 여인, 영혼의 단짝인 라라, 그녀는 현상을 꿰뚫어보며 단순하고 확고하게 삶의 궤적을 새기지만 비극적 한계를 넘지 못한다. 한결같이 감내했던 토냐는 또 어떤지. 그리고 역사의 급한 변화 속에서 희생당했던 민중의 초상, 죽어갔던 그들의 얼굴도 잊을 수 없다.
『닥터 지바고』는 사실적임에도 그 아름다움 때문에 비현실적으로 여겨지는 풍경의 묘사가 시인의 소설이라는 것을 확인케 한다. 톨스토이와 도스토옙스키, 푸시킨을 비롯해 문학의 거목들을 불러내고 신화와 신앙을 재조명한다. 지바고의 눈과 입을 빌려 작가는 그의 신념은 물론 예술론을 맘껏 펼친다. 문장과 묘사 자체가 ‘시’이기도 하다. 이것이 시가 아니면 뭐람?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내뱉는다. 음보를 줄이며 압축시키는 과정을 작가는 실제로 설명한다.(2권 p.305) 자연으로부터 영감을 받았던 지바고가 삶의 마지막 시기에 도시를, 성스러운 도시 모스크바를 노래하게 되는 점도 그의 시들과 더불어 여운을 남긴다. 세대간의 사상으로 인한 반목과 갈등, 인간성 말살과 이에 대한 고민 또한 간결한 문장으로 반복해서 전달한다.
『닥터 지바고』를 읽으며 어쩔 수 없이 내내 떠오르는 작품으로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를 빼놓을 수 없다. 전자가 1917년부터 1921년의 혁명과 내란이 배경이고 후자는 1812년 나폴레옹 전쟁(조국전쟁)이니 약 100여년의 간격이 있다. 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개별 성장사를 파노라마처럼 점진적으로 보여주는 『전쟁과 평화』에 비해 『닥터 지바고』는 농축되고 밀도높은 일직선상의 사랑, 사랑이 도달하기 원하는 지향점을 내내 강조한다. 『전쟁과 평화』에서 느껴지는 화음, 합력한 선(善)의 온기는 『닥터 지바고』의 실랄하고 건조한 현실인식, 차가운 내던져짐과 대조적이다. 지바고는 라라를 향한 이끌림을 자신의 언어로 정의 내리곤 한다. “영혼의 합일보다 더욱 강하게 두 사람을 하나로 묶은 것은 그들을 다른 세계로부터 떼어놓고 있는 심연이었다.”(p.232) '사랑‘ 자체를 넘어 나와 닮은 인간으로써, 영혼이 합일되는 ’나와 동일한 타자’, ‘나의 확장’으로서의 또다른 개체는 경이로움일 수 있겠다. 나아가 라라는 ‘러시아’자체로 상징성을 띈다. 적합한 문장으로 이 경지를 표현해내는 작가의 능력은 여전히 신비롭다. 작품은 물론 『닥터 지바고』에 바쳐진 헌사까지도 독자를 숙연케 한다. 100년을 채 못 사는 인간, 유한한 인간에게 삶은 무엇이어야 하나, 매 순간이 현재성을 띈 유일무이한 격동임을 부인할 수 없는 오늘의 독자들에게 『닥터 지바고』는 묻고 경청하는 고전이다. 처음인 듯 새롭게 내리는 이 겨울의 눈처럼.
인간은 누구나 파우스트로 태어나, 세상의 모든 것을 깨닫고 모든 것을 경험하고 모든 것을 표현하고 싶어한다. 파우스트가 과학자가 된 것은 선조들과 동시대인들이 범한 실수에 대한 염려 때문이었다. 과학의 진보는 반발의 법칙에 따라, 지배적인 오류와 잘못된 이론에 대한 논박에서부터 출발한다.
파우스트가 예술가가 된 것은 스승들의 영감을 주는 실례 덕분이다. 예술의 진보는 끌림의 법칙에 따르며, 좋아하는 선구자를 모방하고, 계승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2권 p.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