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소중립을 위해! 쓰레기를 자원으로 - 폐기물편 2050 탄소중립을 말해줘
이성엽 지음, 정유나 그림 / 쉼어린이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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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엽의 『탄소중립을 위해! 쓰레기를 자원으로(정유나 그림/쉼어린이)』는 어린이는 물론 다양한 독자들에게 2050 탄소중립에 대한 정보를 충실히 담고 있는 환경동화다. 앞표지의 ‘폐기물편’이라는 표기가 또 다른 주제를 연속적으로 다룰지 기대를 갖게 한다. 현재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전 지구적 문제 기후위기일 것이다. 머리말에서 저자는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을 고민한 끝에 “폐기물”에 주목하게 되었다고 밝힌다. 그리고 폐기물 또는 쓰레기에 다른 이름을 붙혀줄 것을 제안하는데 바로 “순환자원”이다. 책은 다섯 개 장에서 쓰레기가 자원으로 변환되어야 하는 이유와 방법을 차근히 살핀다.

세 친구 가온이와 연두, 도연이는 탄소중립교육연구소에 근무하는 가온이 아빠의 설명이 귀에 쏙쏙 들어온다. 고체상태로 버리는 것이 쓰레기고 화학약품이나 다 쓰고 난 기름 찌꺼기, 동물의 사체나 그 부산물까지 포함해서 더 이상 쓸모가 없어 벼려지는 모든 것을 폐기물이라고 한다. 지구 온난화를 막기 위한 2050 탄소중립 정책과 이를 위해 반드시 실천해야 할 ‘순환 경제’의 의미도 어렵지 않다. 폐기물의 종류 중에서는 특히 재활용 폐기물의 분리 배출 방법을 꼼꼼히 알려준다. 친구들은 도자기는 유리에, 고무장갑은 비닐에 넣는가 등 궁금했지만 미심쩍게 넘어갔던 일들을 맘껏 묻는다. 익숙한 안내문 내용전달이 아닌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수준의 완벽한 분리 배출법을 들으며 ‘재활용’까지 이어지는 순환과 자원화의 과정에 동참하게끔 이끈다.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난지도 여행은 현장 체험학습의 장이 된다. 이론에 머물지 않고 실제로 물재생센터 방문까지 생생한 공부를 통해 “제로 웨이스트”(생활에서 나오는 불필요한 쓰레기를 영으로 하고 그 외의 쓰레기는 재활용하자는 의미가 담긴 환경 운동이다. p.160) 실천을 다짐한다. 『탄소중립을 위해! 쓰레기를 자원으로』는 자연스럽고 흥미로운 스토리텔링에 더해 필요한 정보를 알차게 전달한다. 핵심 키워드를 반복해서 노출시키고 단계별로 확장해 나가기에 독자가 스폰지처럼 개념을 흡수하고 실천을 결단케 만든다. “넷제로(Net zero) 뜯어보기”, “넷제로 인싸되기”등의 코너는 집중적으로 정보와 팁을 정리해준다. 화사한 색감의 그림과 도표, 사진이 풍성해서 즐겁게 새로운 내용을 익힐 수 있다. 탄소 중립을 실현하겠다는 의지는 늦었다고 생각할 지금이 그래도 가장 빠른 때다. 초등은 물론 연령과 무관하게 중요하고도 실질적인 도움이 될 책이다.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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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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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릭 와이너의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김하현 옮김/어크로스)』는 세상살이의 길잡이가 되는 지혜에 대한 책이다. 저자는 인터뷰에서 과도한 지식과 정보로 인한 데이터 스모그에서 벗어나 신호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 철학이라고 말한다. 에릭 와이너는 《뉴욕 타임스》 기자, 공영방송의 해외특파원, 대학에서 나이트 저널리즘 연구원으로 있었으며 여러 매체에 컬럼을 기고하고 있다. 저자는 자신의 여행에 독자를 초대하는데 “행복의 지도”, “천재의 지도”, “누구에게나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등의 작품에서 사색하는 여행자로서의 영향력을 발휘한다. “기차는 내가 가고 싶은 곳으로 나를 데려다준다. 그것도 생각의 속도로.”(p.10)라고 말하는 에릭 와이너는 시공간을 넘어서는 여행에 열 네 명의 철학자를 불러내는데 그 선택기준은 “이 사상가들이 지혜를 사랑했고, 그 사랑에 전염성이 있는가?”(p.14)이다. 그가 발견한 최고의 철학자들로부터 배우는 “~하는 법”은 오늘의 독자에게 오래되었을지언정 결코 낡지 않을 방법론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부터 몽테뉴까지 열 네 명의 철학자는 우리가 어릴 때, 인생의 중간 단계, 삶의 황혼 무렵을 상징하는 새벽, 정오, 황혼의 3부에서 독자를 만난다. “~처럼 ~하는 법”의 구조는 활용가능한 실용서의 면모를 보여준다. 아우렐리우스에게서 저자는 “자신의 생각을 검열 없이 실시간으로 내보냈”던 “인간이 되고자 단련 중인 사람”(p.33)을 발견한다. 짧은 만남만으로도 다음번에 ‘로마시대의 냉장고 메모’라 칭한 “명상록”을 펼 때는 느낌이 이전과는 달라지리라 예상케 된다. 질문의 대가 소크라테스 편에서는 ‘좋은 질문’을 탐구한다. 소크라테스의 “성찰하지 않는 삶은 살아갈 가치가 없다”(p.75)는 말에 저자는 삶은 이미 충분히 힘겨운데 성찰까지 하라고? 반문한다. 명확하면서도 불쑥불쑥 모호해지는 “성찰”은 남발 수준의 과용으로 일상어가 된듯하기에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내 본능은 이 질문의 답을 재빨리 찾아내서 내 해야 할 일 목록에 줄을 긋고 다음 할 일로 넘어가고 싶어 한다. 나는 이 충동을 억누른다. 그리고 이 질문이 부드러운 그리스의 공기 속을 천천히 떠다니도록 둔다. 답은 구하지 못했지만 성찰하는 중이다.”(p.76)처럼 변화는 성장의 조짐을 보인다.

철학적 여행은 계속된다. 크나큰 오해와 부당한 비난을 받았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욕망의 분류체계를 만들었고 종류의 차이 뿐 아니라 작용 속도의 차이도 설명한다. 결핍과 부재의 측면에서 쾌락을 규정하며 이 상태를 “아타락시아” 즉 “문제가 없다”는 의미로 정의했던 에피쿠로스에 대해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나 자기변명이 아니라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하며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p.213)이라고 말한다. 향락주의자보다 “평정주의자”(p.197)에 가까운 철학자 에피쿠로스의 재발견은 인상깊다. 너무 짧은 시간만이 주어졌기에 더 안타까운 시몬 베이유의 “관심을 기울이는 법”에서 “온전히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그의 노력이 눈에 보이는 결실을 맺지 못한다 할지라도 진전을 이룬 것”(p.253)이라고 하는데 과연 공감하는지 묻게 된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는 “철학은 우리가 공부할 수 있는 가장 실용적인 분야”라는 자신의 말에 구체적인 근거를 댄다. 그가 그려보이는 상황, 처한 환경, 자녀를 비롯해서 사람들과 맺는 관계와 반응의 결, 선택의 순간들까지 반복해 겪게 되는 현대인의 삶이다. 그가 맞닥뜨린 고민이 독자가 경험했던 딜레마와 동일선상에 있음을 확인할 때마다 독자 역시 기차역과 기차역 사이에서 깨달음의 돌들을 모으게 된다.(이 수집은 저자의 유쾌한 솔직함 덕분에 더 즐겁다.) 생의 주기에서 어느 지점을 통과하고 있건 과거에도 미래에도 지혜로운 힌트는 마련되어 있다. 열 네 명의 철학자가 너무 많아 번잡하게 느껴질 수도, 누군가가 빠진듯해 아쉬울 수도 있겠지만 저자의 행로를 따라 다른 시간의 지혜자 또는 지혜를 사랑했던 자들을 만나는 경험은 유익이다. 지금 나에게 더 필요한 철학자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만남에 깊이를 더해갈 노선을 새로 짜볼 수도 있겠다. 철학이 삶이 되기까지, 또는 삶에 원하는 향기가 베어나올 것을 기대하며 생활 밀착형 철학 입문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펼쳐볼 것을 권한다. 밑줄과 느낌표는 물론, 물음표도 많을 책이다.

책 속에서>

에세이 <저술에 대하여>에서 쇼펜하우어는 사람을 멍하게 만드는 소셜미디어의 소음을 미리 보여준다. 소셜미디어 안에서 진정한 소리는 새로움이라는 소음에 묻혀 들리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쓰인 것이 늘 더 정확하다는 생각, 나중에 쓰인 것이 전에 쓰인 것보다 더 개선된 것이라는 생각, 모든 변화는 곧 진보라는 생각보다 더 큰 오산은 없다.”(p.178)

충분히 좋음은 안주한다는 뜻이 아니다. 자기변명도 아니다. 충분히 좋음은 자기 앞에 나타난 모든 것에 깊이 감사하는 태도를 의미한다. 완벽함도 좋음의 적이지만, 좋음도 충분히 좋음의 적이다. 충분히 오랜 시간 동안 충분히 좋음의 신념을 따르면 놀라운 일이 생긴다. 마치 뱀이 허물을 벗듯 ‘충분히’가 떨어져 나가고, 그저 좋음만이 남는다.(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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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모우 미운오리 그림동화 1
나피 지음, 송지현 옮김 / 미운오리새끼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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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속의 모우(송지현 옮김/미운오리새끼)2020/2022』는 ‘겨울의 모습과 상상 속 생물과 장소’를 즐겨 그리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그림책 작가 나피(Naffy)의 첫 그림책이다. 표지의 인상은 색감으로 먼저 다가온다. 앞, 뒤표지의 검은 배경, 책등의 붉은 색에 시선이 머물다보면 빨간 모자를 쓴 소녀와 작은 동물이 마주보고 선 모습에 이어 그 둘을 감싸듯이 서 있는 나무의 행렬이 깊이를 간직한 채 독자를 초대하는 듯 보인다. 둘 중 누가 모우일가? 면지 역시 검은 바탕이다. 오른 쪽 면지의 커튼이 드리워진 문은 본격적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이 문을 열면 무슨 일이 생길지 호기심을 간직한 채 페이지를 넘기면 문이 열리면서 소녀와 작은 동물의 첫 만남이 이루어진다. 한 장의 트레이싱지가 소녀와 동물의 경계를 가르는데 제목만 적힌 독특한 속표지가 앞으로 펼쳐질 환상을 암시한다.

소녀, 토토는 아픈 할아버지와 함께 숲 속의 집에 살고 있다. 노크 소리와 함께 찾아온 작은 괴물은 토토의 집에 들어오더니 하루를 같이 보낸다. 놀라 숨어버린 괴물을 두고 토토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고 괴물은 다가와 소녀의 그림을 본다. 그림 덕분에 소녀는 괴물에게 ‘모우’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다음날 모우를 따라 깊은 숲 속까지 들어가게 된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빛 덩어리, 별들을 보고, 별 조각이 녹아 만들어진 투명한 수프를 나누어 먹고 나니 더 이상 다리도 아프지 않다. 집에 계신 할아버지가 생각난 토토는 수프를 가지고 집으로 향한다. 어두운 밤의 숲을, 눈밭을 하염없이 달려서. 집에 거의 다다라서 쏟아져버린 수프 때문에 소녀는 슬퍼한다.

면지의 문에 드리워진 붉은 커튼은 희망과 환상의 가능성을 띈다. 모우가 처음 들어왔을 때 소녀의 집은 형태를 분간하기 어려운 어두운 색조를 띈다. 하지만 모우가 들어오자 양탄자는 화사한 주황과 노랑의 조각천을 드러내고 벽지도 가구도 색을 덧입는다. 터무니없다고 현실에만 시선을 고정한다면 모우도 변화를 일으킬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으로 소통하는 법은 커다란 괴물들에게서도 공감을 이끌어낸다. 불가능해 보이는 수단일지라도 진심은 마법같은 힘을 발휘해 서로를 넉넉히 연결시킨다. 이런 경험은 소녀를 성장케 하고, 성장한 후에도 여전히 빛을 잃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 토토는 다시 옛집으로 돌아온다. 기적 같았던 기억이 이야기로 되살아나 모두에게 다시 경험될 수 있도록. 뒷 면지의 문을 앞 면지와 비교해 보면서 이번에는 독자가 바통을 넘겨받을 차례다. 우리의 현실에도 불을 밝혀 줄지 모를 모우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오건 알아볼 수 있기를 바란다. 『숲 속의 모우』는 겨울 필독 그림책의 한 켠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출판사 도서 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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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3
저메이카 킨케이드 지음, 정소영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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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정소영 옮김/문학동네/1990/2021)』는 현대 카리브해 문학의 가장 주목할 만한 작가로 꼽히며 매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명되는 저메이카 킨케이드의 자전적 소설이다. 본명 일레인 포터 리처드슨이 아닌 필명을 사용하게 된 이유로, “저메이카”는 콜럼버스가 서인도제도를 발견했을 당시 섬의 이름을 듣고 영어식으로 부른 이름으로 식민지성을 나타내고자 택했(p.139 연보)는데 식민 지배하인 고향에서 영국식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던 작가의 정체성을 보여준다. 킨케이드는 “모녀관계를 탐구하는 동시에 식민주의와 탈식민주의, 인종과 계급, 섹슈얼리티, 디아스포라 정체성”(출판사인용)을 주로 다루는데 수전 손택은 저메이카 킨케이드를 향해 “내가 언제고 읽고 싶은 글을 쓰는, 살아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이라고 꼽는다.

식민 지배하인 고향 앤티가섬을 떠나 외국인 입주 보모로 미국의 대도시에 도착한 19세 루시는 “나는 이제 열대지방에 있지 않았고, 그 깨달음이 바짝 말라붙은 땅 위로 물줄기가 흐르듯 내 삶으로 흘러들어와 두 개의 강둑을 만들었다. 한쪽 강둑은 나의 과거였다.”(p.11)고 말하며 다른 한쪽 강둑은 “나의 미래”라고 이름 붙힌다. 머라이어, 루이스 부부와 그들의 네 딸과 함께 입주 보모로 지내는 동안 루시가 새롭게 보고 경험한 것들과 현재의 상황은 자신이 두고 온 과거를 불러낸다. “살아온 역사가 대단하구나.”라는 머라이어의 말에 “원하시면 얼마든지 가지셔도 돼요.”(p.21)라고 응대하는 루시는 냉정한 관찰자이자 상황 이면의 숨은 의미, 진실을 파고든다. 그녀의 관찰자적 입장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p.21)로 대변되는 이해불가, 소통불능으로 점철된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지?”는 “어떻게 사람이 저럴 수가 있지?”(p.26), “어떻게 하면 그래요?”(p.36) 등으로 변주된다. 입 밖으로 소리내어 표현하지 않더라도 루시의 내면에서는 이 '불통'이 분노의 색을 간직한 채 연거푸 울린다. 개인사적으로 분노의 중심에는 자신의 가족, 특히 엄마가 자리하고 거시적으로 확장했을 때 피식민지와 지배국의 역사를 함축한다. 머라이어와 루시에게 수선화가 얼마나 다른 의미인지, “하지만 그녀가 아름다운 꽃을 보는 그속에서 나는 비통함과 원한만을 본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도 달라질 수 없었다.”(p.29)고 루시는 생각한다. 또한 루시의 시선은 이중성과 허위를 간파한다. “머라이어는 우리 모두가, 아이들과 내가 모든 것을 자기처럼 보기를 바랐다.”(p.33) 이는 머라이어에게만 국한된 취향은 아니다. 누구나 자기처럼 볼 것을 원하고 요구하게 된다.

루시가 살아온 시간은 시선의 방향을 이끄는 것은 물론 시력 또한 좌우한다. 가식과 허위를 꿰뚫는다. “내가 그걸 어떻게 아냐고? 그냥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모든 게 쇼일 뿐, 믿을 만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p.41) 루시의 예상대로 머라이어와 루이스의 쇼는 곧 파경을 맞는데 이를 바라보는 루시는 이미 모든 것을 간파한 듯하다. 그녀가 경험한 것들은 이론이 아닌 언제고 적용 또는 해석 가능한 실전의 사례들로 되살아난다. “내가 떠나온 고향에서는 어떤 존재가 이건가 싶으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돌변하는 일이 자주 일어나서 ‘진짜’라는 것이 없다는 사실이 떠올랐다.”(p.46)

루시의 과거, 생의 한가운데는 엄마가 차지하고 있다. 엄마는 애증의 대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정점이자 버리고 도망치고 싶은 절정이다. 넌 정말 화가 많은 애구나, 라는 머라이어의 말에 “물론 화가 많죠. 당연한 거 아니에요?”라고 답할 때 그 화의 주요 원인이 엄마이기도 하다. 화는 세분화되고 범주로 묶이고 루시의 선택과 행동의 동기로 작용한다. 루시라는 이름의 원래 의미를 알려주던 엄마, 마치 엄마가 원했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그 반대로 나갔다 싶은, 온힘을 다해 “비뚤어지고 말테다”하는 결기까지 느껴지는 애정행각들, “남자의 생애는 언제나 책에 기록되어 있다는 사실을 막 알게 된 참”(p.78)이고 세계 끝자락에서 태어나 고향을 떠나는 자신의 어깨에는 하인의 망토가 둘러져 있음을 깨닫게 된 것도. 나중에는 화 자체를 넘어서고 시선과 해석에 루시만의 통찰을 덧입힌다.

루시의 가열찬 성장 이야기는 주제가 명확하면서도 이중, 삼중의 확장된 이야기를 품고 있다. 분량이 많지 않은 소설을 가뿐히 읽고 즐기게 되리라는 기대와 달리 “모든 사람을 조금 덜 행복하게 만드는 게 내 임무 같아요.”라고 말했던 저자의 의도는 성공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은 명확한 목소리, 회색지대라고는 없는 원색의 발언, 행동의 일관성을 직설적 문장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매력을 찾을 수 있다. 사계절을 지나면서 변하는 풍광의 생생함, 색으로 각인된 추억 속 장면들(p.105), 열대 우림과 대도시를 왕복하는 입체적 배경, 그 안에서 포착할 수 있는 인물들-‘상투적 인물’(p.49)부터 비겁자나 권력을 활용하기가 너무 쉬운 자, 원하는 모든 것을 쉽게 얻을 수 있는 자와 치열하게 노력해도 결코 얻기 어려운 자 등-의 관계, 가족, 우정, 사랑의 의미 등을 응축해서 담고 있다. 책을 읽고 난 후의 여운 덕분에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모든 것은 가능하다”, 이보나 흐미엘레프스카의 상징적 그림책 “네 개의 그릇”도 다시 펴보고 싶어진다. 책을 읽고 나면 킨케이드가 “브론테와 울프의 후손”이라는 의견에도 공감하게 될 것이다. 결코 타협하지 않았던 루시의 이야기는 아마도 쉽게 흐려지지 않을 것이다.

책 속에서>

“나는 이제 열대지방에 있지 않았고, 그 깨달음이 바짝 말라붙은 땅 위로 물줄기가 흐르듯 내 삶으로 흘러들어와 두 개의 강둑을 만들었다. 한쪽 강둑은 나의 과거였다. 워낙 빤하고 익숙해서, 당시의 불행조차 지금 떠올리니 행복한 마음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나의 미래였다. 텅 빈 잿빛 공간. 비가 내리고 배 한 척 눈에 띄지 않는, 구름이 잔뜩 낀 바다 풍경이었다. 이제 내가 있는 곳은 열대지방이 아니었고, 몸의 거죽도 속도 다 추웠다. 그런 감각에 휩싸인 것은 처음이었다.”(p.11)

머라이어는 사라져가는 것들을 다루는 그림책을 쓰고, 그것을 지키려 애쓰는 단체에 수익금을 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머라이어와 마찬가지로 그 단체 회어ᅟᅮᆫ들은 모두 부유했지만, 눈앞에서 진행되는 세상의 피폐화와 자신들의 안락한 삶을 연결시키지 못했다.(p.60)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은 기울어진 자전축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곳이었다. 해가 쨍쨍하고 가뭄에 시달리는 단 하나의 계절만 있는 곳. 그런 장소에서 자라면서 난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나는 눈부신 햇빛을 닮은 기질을 가지지 못했고, 실제 행복이라는 측면에서 오래도록 가뭄에 시달렸을 뿐이다.(p.71)

나는 이 세상에서 혼자가 되었다. 그것만 해도 상당한 성취였다. 그걸 이루려 애만 쓰다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행복하지는 않았지만, 그것까지 바라면 과하지 싶었다.(p.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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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08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리뷰 당선되신거 축하드려요~~

mazinga 2022-03-10 23:46   좋아요 1 | URL
축하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건강한 날들 되세요!

thkang1001 2022-03-08 18: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azinga님! 이달의 리뷰에 당선되신 것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mazinga 2022-03-10 23: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태고의 시간들
올가 토카르추크 지음, 최성은 옮김 / 은행나무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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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토카르추크의 『태고의 시간들(최성은 옮김/은행나무)1996/2019』은 인간이 한정된 시간을 살아가는 유한한 존재인이기에 시간과 그 변화과정을 전달할 필요가 있고 “그러므로 ‘이야기’란 ‘언어’만큼이나 오래되고 고전적인 것”(p.377)이라는 작가의 생각을 온전히 구현해낸 작품이다. 역자는 토카르추크가 “미시 서사 기법을 활용하여 거대 서사를 축소하는 방식을 택함으로써 역사 속에 스러져간 익명의 존재, 역사의 뒤편에서 소수자로 취급받을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의미를 환기한다.”(p.373)고 밝힌다. 신화와 전설, 심리와 철학, 인류학 등 관심의 영역을 망라해 작품에 담아내고 많은 수상경력이 보여주듯 “경계와 단절을 허무는 글쓰기, 타자를 향한 공감과 연민은 토카르추크 작품의 본질적 특징”은 공감과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올가 토카르추크는 2018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며 “삶의 한 형태로서 경계를 넘어서는 과정을 해박한 열정으로 그려 낸 서사적 상상력”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태고(太高)는 우주의 중심에 놓인 작은 마을이다.”(p.5) 첫 번째 글의 제목은 “태고의 시간”으로 공간적 배경인 ‘태고’를 확정한다. 태고의 사방 경계와 이를 지키는 수호천사를 소개할 때, 위험 요소와 수호천사, 인간 대 천사, 신과 인간, 창조와 명명하기(“창조는 신의 일이고, 이름을 붙이는 건 인간의 일이니까.(p.6)) 등 신화와 환상의 이미지를 던진다. 두 번째 글 “게노베파의 시간”은 환상적 공간에 침입한 현실, 전쟁중인 1914년 여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알리고 전쟁에 징집되어 남편 미하우가 부재 중 게노베파는 딸 미시아를 낳는다. 소설은 가계도를 그리듯이 가족의 생성과 변화 뿐 아니라 그 속의 단독자로서의 개인을 그려나간다. 이에 더해 종의 차이, 생명의 유무, 현실과 환상의 어떤 가능성 있는 구분과 제외도 불허하며 공평하게 인간은 물론 신이나 천사, 동식물, 게임이나 커피 그라인더처럼 생명력이 없는 사물 등에 까지도 무대를 내어주고 그 성장과 쇠퇴, 역동과 추구를 요약한다.

“미시아는 여느 다른 인간들처럼 불완전한 상태로 조각조각 나뉘어 태어났다. 보는 것, 듣는 것, 이해하는 것, 느끼는 것, 감지하는 것, 경험하는 것, 이 모든 것들이 그녀 안에서 제각각 분리되어 있었다. 앞으로 미시아의 전 생애는 이것들을 온전하게 하나로 결합했다가 다시 부서뜨리는 데 할애될 것이다.”(p.49) 미시아의 시간이 그려 나갈 궤적에서 빗겨있는 자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탄생에서 죽음, 그리고 죽음 이후를 아우르는 시간의 행진, 그 간격, 틈을 비집고 배우고 익히고 도전하고 깨닫는 일은 일상이면서도 모험에 가깝다. 주어진 생을 살아내는 나름의 경로를, 미하우의 가계(미하우 니에비에스키-게노베파-미시아-이지도르/미시아-파베우-아델카)뿐 아니라 대지의 여신 데메테르를 상징하는 크워스카와 딸 루타, 끝없이 썩은 지붕 널을 교체하던 보스키 영감, 그를 보며 ‘중요한 인물’이 되겠다 다짐했던 아들 파베우 보스키를 비롯한 다른 인물에게서 어떻게 생성, 소멸을 향하는지 반복해서 그려낸다.

“ ~의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불규칙하게 돌아와 그 장면의 주인공을 불러내는 형식은 몰입을 높힌다. 다음 호명에서 이 인물은 또는 사물은, 사건은 어떤 변화나 반전, 희망이나 회생 가능성을 보일지 독자는 기대하고 걱정하고 종국에는 감정이입하다 연민하며 읽어나간다. 서두에서 “애정어린 연민”(p.15)을 천사들에게 허락된 오직 하나뿐인 감정이라고 명시했는데 이 감정은 독자에게 고스란히 자리잡게 되고 작가의 시선을 확인케 한다. 총 7회 등장하는 ‘게임의 시간’은 작품 전체의 복선 또는 안내로 이해할 수 있다. “이지도르는 실망했다. 노년기가 되면 만물을 깊이 있게 볼 수 있는 혜안이 트이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이해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무것도 명확하지 않았다. 그저 뼈마디가 쑤시고 잠을 이룰 수 없을 따름이었다. 죽은 사람도, 산 사람도, 그 누구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p.352) 오히려 망각은 안도감을 준다고 말하고 습득했던 것들은 삭제되기 시작한다. 그럼에도 작품은 어머니 미시아의 커피 그라인더 손잡이를 돌리는 “아델카의 시간”으로 막을 내린다. 연민의 쓸쓸함이 온기를 덧입는다.

『태고의 시간들』은 시간에 대한 다면적 고찰, 철학의 소설화, 철학으로 쓴 문학으로 다가왔다. 제목과 총 84편의 글에서 ‘~의 시간’이라는 형식을 일관되게 사용함으로 독자는 시간의 의미를 곱씹는다. 그리 오래지 않아 ‘시간’을 새롭게 정의하고 탐구하던 여정은 작중 인물들을 따라 나서는 관찰자적 입장에서 이탈한다. 어느새 독자 자신의 고유한 ‘지금, 여기’에 대입했을 때 작품은 더 이상 ‘이야기’에 머무르지 않고 생생하게 다가와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의 시간’에는 내가 아는 누군가, 그리고 나의 이름이 들어간다. 사건과 시간이 촘촘히 모여 삶이 되고 개인과 공동체를 넘어 역사를 만들어 내는 과정을 작가는 아름다운 문장으로 그림을 그리듯이 들려준다. 비유와 상징, 은유의 여러 겹이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언어가 구축하는 또 다른 세상의 경지는 얼마나 무한히 확대될 수 있는가 감탄케 만든다.

문학의 고전적이면서도 중요한 주제 “신은 선한 존재인데, 어째서 악을 허락하는 거지? 그렇다면 신은 선하지 않은 걸까?”(p.41)부터 치열하게 살아내던 인물들이 맞닥뜨리는 각성의 순간들, “시간 속에서 미시아를 영영 멈추게 만드는 것”(p.83)처럼 인간 보편의 내적 과업에 대한 갈망, 추구와 지향을 정확하게 설명하기에 그 문장들에 기대어 독자는 자신을 살피게 된다. 현실과 환상이 너무도 태연히 잇대어 있는 점은 『백년의 고독』의 마술적 사실주의를 떠올리게 하고 마꼰도에서 경험했던 한 가문의 흥망성쇠가 태고에서 어떻게 변주되는지 연결하며 보게된다. “태고의 시간들” 역시 해결할 수 없는 처연한 고독과 이를 감내하는 인간들을 말한다는 점이 여운을 남긴다. 작품의 전반부, “미시아의 그라인더의 시간”에서 “그라인더는 간다. 고로 존재한다.”며 “어쩌면 그라인더는 현실의 축이자 태고라 불리는 것의 기둥일지도 모른다”(p.54)고 했는데 천천히 손잡이를 돌리는 아델카의 마지막 장면은 스러진 듯 보이는 태고와 사람들의 사라지지 않는 현존을 드러낸다. 몰락과 실패에 아랑곳 없이, 보이는게 다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읽고 나면 더 아쉬워지는 『태고의 시간들』은 아마도 올가 토카르추크 전작읽기로 독자를 이끌 것이다.

그는 보다 고차원적이고 지속적이며 고귀한 것, 인간보다는 시간에게 더욱 익숙한 것을 원했다. 시간 속에서 그의 사랑을 언제까지나 유지하게 할 수 있는 것, 시간 속에서 그녀를 영영 멈추게 하는 것을 바랐다. 덕분에 그의 사랑은 영원한 것이 되었다.(p.83)

“질문을 모드고 있군요. 잘됐네요. 당신의 수집 목록에 추가할 만한 질문 하나가 내게 있거든요. 마지막 질문입니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 걸까요? 시간의 목적은 무엇일까요?”(p.98)

상상이란 따지고 보면 창작의 일부이며, 물질과 영혼을 연결하는 일종의 다리와 같다. 특히 빈번하게, 집중적으로 할수록 더욱 그렇다. 이런 경우, 상상은 물질의 파편으로 탈바꿈하기도 하고, 삶의 기류에 융합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뭔가가 뒤틀리면서 변화가 찾아올 때도 있다.그래서 인간의 모든 욕망은, 그것이 충분히 강하기만 하면, 이루어진다. 물론 기대했던 바가 전부 다 이루어지는 건 아니지만.(p.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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