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사워드 지음, 강정인.이석희 옮김 / 까치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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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출신의 ‘정치이론가’이자 정치학자인 마이클 사워드는 영국 코벤트리에 소재하고 있는 워릭 대학의 정치학 교수이기도 합니다. 그는 또한 시드니 민주주의 네트워크 (The Sydney Democracy Network)의 회원으로 활동중인데요. 그의 주요 관심 분야는 오늘날 민감한 정치적 변화 시기의 여러 핵심적 이론들을 연구하고, 어떻게 현실에서 작용되어 왔는지에 대한 포괄적 연구들입니다. 구글 검색을 통해서 호주에서는 꽤 유명한 정치학자로 인정 받는 것을 대충 알 수 있었는데요. 아마도 현실 정치와 민주주의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언론과 여러 저작을 통해 지속하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이 책도 그러한 연장선상에 있는 놀라운 학문적 작업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생각했습니다. 원제는 ‘Democracy’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까치에서 2018년에 번역 출판을 맡았습니다.

우선 마이클 사워드는 자신의 이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두 가지 논점이 있는데요. ‘첫번째는, 과연 평범한 사람들의 정치참여는 중요한가. 두번째로는, 오늘날 전세계의 경제적 불평등과 만연한 환경 문제를 민주주의가 해결할 수 있는가’ 입니다. 이 두 가지 주제 내지는 의문을 갖고 전반적인 민주주의의 형태, 성격, 기원, 의의 등을 논리적으로 규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1장에서는 1999년 10월 파키스탄의 페르베즈 마샤라프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와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플로리다 개표 상황, EU 체제와 유로화 가입에 대한 영국의 민주주의 캠페인 이 3가지를 ‘과연 각각의 국민 국가들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와 그 본질성을 살펴보고, 2장은 미헬스를 거쳐 조지프 슘페터의 ‘슘페터식 민주주의’를 고찰하고 3장은 앞선 슘페터식 민주주의를 비판과 함께 이론적 대안을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4장은 오늘날 민주주의 체제가 직면한 몇가지 도전들에 대해 살펴보고, 5장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떠한 길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정치철학의 이론과 현실정치의 여러 고민들을 틈새에서 몇가지 방법을 모색해보는 것으로 마지막 약간의 결론을 통해 글이 마무리 되고 있습니다.

글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 저자는 민주주의 이념이나 가치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개진하기 보다는 일종의 역사적 혹은 이론적 서술 (naration)을 통해 텍스트적인 상호접근식 방법의 형태로 일관되게 글을 쓰고 있습니다. 즉, 1차대전 당시 ‘인류 문명의 파괴’에 따른 민주주의적 회의와 그에 따른 미헬스의 입장들, 뒤이어 2차대전을 치루고 이후에 등장한 조지프 슘페터의 소위 민주주의에 있어서 ‘정치과학적’ 이론 소개하고 각각의 주장을 또 다른 여러 정치학자들의 주장과 이론으로 비교하는 접근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자 자신은 꽤 관찰자의 시선으로 민주주의를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증되는 곳곳에 저자의 인식이 또 보여지기도 합니다. 우선 미헬스는 그의 정당론에서 “민주주의는 과두제로 이르게 되며, 필연적으로 과두제적인 중핵을 포함한다”고 전제하며 조지프 슘페터도 동의한대로 ‘엘리트에 의한 관료지배’를 안정적인 선택으로 지지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슘페터 역시 “유권자들의 역할이란 정부를 산출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라고 명백하게 단정하고 있는데요. 정치에 대한 이러한 해석은 ‘현실주의적 정치 이론’라 여겨지지만 미헬스와 슘페터는 ‘이 현실적인 한계’를 매우 중요하게 파악했지만 동시에 정치 일반을 소급적인 수단화에 이르게 했다는 비판은 피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조금 더 달리 말하면 ‘민주주의 내에서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이론적 근거’가 이를 추종하는 여러 학자들에 의해 알게 모르게 되어 왔다는 점에서 국민국가에서 다수의 국민들을 단순한 권력의 위임자로 국한시켜 해석한 부분은 분명 동의하기 힘들기도 합니다.

이 엘리트 지배 체제에 대한 당위성이 민주주의 자체가 ‘민중 권력의 가시적 형태’라는 측면의 이해와 ‘오늘날 복합적이고 다면적인 이해 관계와 정치적 상황을 과연 대중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가’와 관련해 앤서니 다운스가 옹호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주도하는 정치체제의 인식으로 변화되어 왔습니다. 더불어 ‘민주주의를 헐뜯고자 하는 사람들의 범주’가 사라지지 않은 것도 앞선 사례들과 거의 비슷해 보입니다. 저자는 이 민주주의를 헐뜯고자 하는 범주의 사람들이 작다고 평가하지만 저는 이것에 동의하기 힘들었습니다. 예전에 태국의 변호사와 의사들을 비롯한 엘리트들이 농민이나 공장 노동자들에 대한 투표권을 제한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너무나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자크 랑시에르도 진단했던 바와 같이 오늘날 과두제의 위협은 지대한 것입니다. 에릭 홉스봄도 처칠과 같이 민주주의 체제에 대한 비관론을 견지했던 바가 있는데요. 이러한 소위 ‘정치과학자들’은 “평등주의적 열망은 망상”이며, “제어하기 힘든 민중적 권력에 대한 두려움”이 소위 상위 계층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이 엘리트 지배 정치가 모순인 것은 “평범한 남성과 여성 대다수에 대한 깊은 불신”이 지배하는 것으로 저자 역시 이 점에 대해 비판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일찍이 로버트 달과 벤자민 바버가 천착했던 다원주의와 참여 민주주의에 대한 시민들의 수단만이 이러한 ‘엘리트 지배 체제’로 획일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저 역시 믿고 있습니다. 물론 포퓰리즘과 반지성주의와는 아주 면밀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겠죠.

18세기 말 공화주의 시기의 루소는 그의 일반의지로서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을 포괄하고 그들 모두가 참여해서 만들어내는 공동선에 대한 개념”을 주창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가치는 충분히 공감할 만하며, 특히 “자유주의가 불안정과 불안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정기적인 공동체주의의 교정이 필요”하다는 판단이 설득적으로 이해됩니다. 그리고 많은 학자들의 의구심을 갖고 있는 ‘대중권력’에 대한 대안으로 이 책에서도 마찬가지로 진단하는 ‘숙의 민주주의’가 좋은 해결책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각 국가들이 지구화 과정에 놓여 있고, 이것은 결과적으로 소수에 대한 부의 집중과 경제적 불평등에 이르고 있어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상호 불균형적인 관계로 발생하는 문제들의 그 근본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요. 로버트 달이 주장했던 ‘시장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해 보이지만, 이제는 국가 단위의 권력 규모를 보이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과 정치 권력이 영합해 나가고 있는 거대한 경제 주체들의 영향에서 전통주의적인 민주주의를 지속해 나갈 수 있을지는 사실상 시민들의 손에 달려 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런 권력이 재편되고 있는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선언적인 의미로서 국한될 수 있다는 점은 바로 이 우려의 본질이라고 불릴만합니다.

글의 결말에서 보이는 대로 저자는 모두에게 각자가 인식하는 민주주의는 다르다고 설명합니다. 민주주의를 정확히 규정하는 것은 거의 딜레마에 가깝지만, 각각의 시민들이 집중하는 서로 다른 민주주의 가치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민주주의는 스스로 존속할 가능성이 높다고 볼 수도 있겠죠. 전세계의 심각한 환경 오염과 이것의 피해는 세계의 국제정치가 민주주의적 메커니즘으로 돌아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는 반증은 꽤 설득력이 있었습니다. 중국 학자 엔쉐퉁이 현재 세계는 “민주주의적 과잉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도 실상은 세계의 민주주의가 ‘공표’되는 것과는 다르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현실의 민주주의를 좀 더 깊이 이해하고 그것이 어떻게 기반하고 있는지 이 책은 꽤 면밀하고 상세히 잘 보여주고 있다고 느껴졌습니다. 더 많은 민주주의와 연관된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저자의 판단이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딱히 책을 잡고 싶진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끝으로 로버트 달의 ‘민주주의와 그 비판자들’에서 언급된 다두제(일종의 다원주의적 정치체제)의 핵심 조건을 소개하는 것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1. 선출직 공직자들
2. 자유롭고 공정한 선거
3. 포괄적인 선거권
4. (누구나) 공직에 출마할 권리
5. 표현의 자유
6. 대안적인 정보
7. 결사의 자율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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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목소리가 중요한가 - 신자유주의 이후의 문화와 정치
닉 콜드리 지음, 이정엽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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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정경대(LSE)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인 닉 콜드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트워크와 미디어학 권위자이기도 한데요. 그의 대표적인 논저 중 ‘미디어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는가’는 큰 명성을 안겨준 글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닉 콜드리 역시 마누엘 카스텔과 비슷하게 오늘날 변화된 민주주의 환경에 대한 분석과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인간 소외에 대한 해결책을 과연 1인 미디어가 갖고 있는가’와 유사한 궁금증을 갖고 있는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네트워크와 개별적인 미디어 시대의 초래를 ‘유별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저는 그와는 별개로 이 네트워크의 시대가 우리 민주주의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매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콜드리의 이 책이 저에게 작은 응답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2010년에 출간된 이 글의 원제는 ‘Why Voice Matters : Culture and Politics After Neoliberalism’ 이며, 국내에는 2015년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특히 3장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모순어법’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느꼈는데요. 책 제목과 동일하게 중요한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 각각의 개인들 및 시민들의 목소리에 관한 필요성을 설득하고 그것이 사실상 부재했던 우리 시대의 단면과 그 배경을 폭넓은 인용을 통해 마찬가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악셀 호네트와 리처드 A. 포스너, 낸시 프레이저, 주디스 버틀러 그리고 짧지만 콜린 크라우치까지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비판자들은 거의 언급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저자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산파가 된 인물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이 바로 이들입니다. 여기에 레이건과 대처에 이르는 신자유주의적 정치화 과정을 언급하며, 3장의 주제와 관련된 배경으로 1980년대 이후부터 영국의 그 과정화를 특별히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밝힌대로 이 3장은 특히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많은 선진국과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한 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얼마나 형용 모순이고 어떻게 그러한 모순에 근거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이를 추종하는 많은 보수 우파들의 ‘자유 민주주의’와 얼마나 유사한지 비판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콜드리가 주장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전통적인 민주주의는 매우 다르고 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그는 “시장 기능이라는 ‘우선적’ 요구로 추동되는 이른바 ‘민주적’ 과정은 실제로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고 규명합니다. 철저하게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3장에서는 이러한 분석의 주된 관점이 되는 영국과 영국 정치에 대해 설명하며 “많은 영국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요구가 사실상 현실 정치에 반영되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추가하고 있는데요. 저는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각났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낮은 투표율은 현실 정치와 과연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현실 정치에 좌절한 많은 시민들의 선택이 주된 연유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결사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해 왔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노동력 상품화를 불러 일으킨 ‘노동단체의 정치적 무력화’와 노동 집단에 대한 견제가 이를 통해 많은 시민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진단해 왔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어느 영국 정치인의 “부유층에 더 집중되고 있는 부의 집중화를 도덕적 문제로 다루기 전에, 모든 인간들이 엄청난 성공의 가능성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되물음은 전자의 메커니즘이 얼마나 노골적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만연한 ‘시장 국가화’ 내지는 ‘정치는 효과적인 자유 시장 확대를 위해서만 존재해야한다’는 이 신자유주의 독트린의 가혹한 위상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정치적 이념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버틀란드 러셀의 주장을 다소간 차치하더라도 신자유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다소 제한하거나 축소할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불의적 이익에 영합한 수많은 미디어들과 그런 권력화를 논의의 확대로서 책의 4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가 경제와 이익을 공유하며 초래될 수 있는 위험성과 관련하여 일찍이 자크 랑시에르는 ‘과두제’의 위협을 꼽은바가 있습니다. 이 과두제의 위협은 랑시에르 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예측한 바가 있습니다. 로버트 달도 역시 다원주의적 가치가 붕괴될 때, 각각의 기득권과 정치가 영합하여 사실상 과두 형태의 정치가 출현할 것을 예견한 바가 있는데요. 인간의 노동을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삼아 이것을 전면적인 자유 시장 체제에 부합시켜 인간 소외의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의 확대로 인한 경졔 계급적 획일화를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리처드 윌킨슨의 ‘불평등 트라우마’는 시민들의 인간 소외와 여러가지 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신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 실천, 정치, 문화 안에 깊숙이 자리잡은 신자유주의 독트린이 여러 고통스러운 모순을 만들어냈다”는게 저자가 제기하는 일관된 주장입니다.

앞선 논증들을 바탕으로 오늘날 많은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체하에 있는 국가들의 상황은 “기업과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화에 발전시킨 내부 시장과 아웃소싱”의 폭발적인 형태입니다. 이것을 마땅히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비판해야 하는 좌파 더불어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영국의 노동당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독트린에 영합하고, 애초에 일관되게 ‘추상적 비판’에 그쳐 확실한 비판적 대안이 되지 못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민들의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확인하고 있고 이 점과 관련해 5장과 6장에서 꽤 설득적으로 논증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아마르티아 센이 밝힌 진정한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이런 자유에는 경제적 기회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 및 사회적 자유 (읽고 쓰는 능력을 포함)이 중요”한데 이것은 목소리을 내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경제적 자유만을 포함한 협소한 해석을 실질적으로 모든 이들의 자유 기회를 위한 가치적 자리매김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쩌면 직면한 당위성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콜드리의 이 글은 콜린 크라우치의 동일한 주제의 글과 함께 신자유주의 비판서의 거의 모든 것이라 평가될 만합니다. 더불어 이 논저의 높은 학문적 의의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의 허구적 모순을 과감없이 파헤친 점일 것입니다. 자유시장 이념이 절대적이고 개인이 공공선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대체 다수의 이익과 어느 부분이 일치하는지 마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꽤 이상주의적일지 모르지만 사회 공통의 도덕적 규범과 공공선의 확립을 시민 모두의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목소리를 끊임없이 이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부의 창출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불평등이라는 엄연한 사실은 신자유주의 논평가들에게 종종 묵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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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 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한 분석
패트릭 J. 드닌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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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패트릭 J. 드닌은 미국 인디애나 주의 노터테임 대학 정치학과 교수인데요. 과거 프리스턴 대학과 조지타운 대학을 거치면서 특히 미국 정치 사상과 독립 시기의 정치사 연구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꽤 저명한 정치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1995년에는 ‘레오 스트라우스’ 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이 책은 편집자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미국 예일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정치와 문화 Politics and Culture’의 시리즈 중 하나인데요. 위의 시리즈 중 두번째 논저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원제는 ‘Why Lieberalism Failed’ 로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올 4월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오늘날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정치적 실패가 전세계적인 문제로 대두하게 된 연유에는 이 자유주의가 너무나 성공적으로 이데올로기화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자유주의의 완벽한 성공이 바로 오늘날의 위기를 만들었다는 입장입니다. 홉스와 밀을 거쳐 근대의 시기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자유주의는 인간의 해방과 권리의 증진 및 자유의 증대를 기본 가치로 삼았습니다. 특히 제일 앞선 ‘인간 해방’이 중요한 목표였는데요. 20세기 초에 서구는 양차대전, 특히 2차대전 당시의 전체주의를 목격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포함한 광범위한 자유주의적 확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주의는 점차 민주주의와 병립하게 되었고, 시기상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경제적 시장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 함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평가하는 대로 대다수의 선진 자유진영의 국가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대두의 시기에서 앞에서 제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경제적 불평등과 시민의 파편화, 그리고 시민의 퇴출을 만들어 낸 현재 우리의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자유주의를 더 확대시켜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의 진정한 진위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샹탈 무페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급진 민주주의’와 앞의 ‘자유주의의 더 많은 확대(이것을 어떤 용어로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가 서로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 책의 7장에서 밝히고 있는 “자유주의의 가장 해로운 허구 중 하나는 동의 이론, 즉 자율적이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사람들이 ‘권리 보호’를 유일한 목표로 삼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추상적인 계약을 맺었다는 가상 시나리오였다”는 긴 문장은 저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더불어 토크빌의 개인의 이기심과 이익 추구를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해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주의에 기반한 개인의 이기심 보장과 권리 추구가 얼마나 많은 공동선과 공동체적 이익을 훼손해 왔는지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논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적 뿌리는 다양한 인간학적 가정과 사회 규범을 뒤집으려는 노력에 있었다”고 해석하며, 인간이 본디 불확실성과 비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불변한다’는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더욱 이러한 불안정성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개인의 이익과 이기심 추구를 부채질 해 왔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저자는 이익과 이기심을 중요한 가치로 설정해 온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의 “의제 가운데 근대에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동안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실행한 의제는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경제적 자유주의 뿐이다”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진보주의자들이 그나마 성공한 정치적 의제는 ‘성적 자율성 프로젝트 뿐”이라고 더 강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정말 얼마나 통렬한 평가인지 저는 적극적인 동의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의 이기심은 극히 한계를 모르며, 더군다나 세계의 자원은 분명 제한적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강조가 결국 사회 질서와 안정을 위해 ‘법치주의’에 더욱 의존하게 됨으로써, 사회 전체가 극히 단순한 형벌주의적 입장에 더욱 전도될 가능성을 저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단순히 설명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종래의 사회적 규범과 공동체적 의식, 그리고 공동체주의로 충분히 법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사회 체계를 수립할 수 있음에도 앞선 문제를 법에 의존하는 간편주의로 만들어 결국 사회적으로 약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7장에서 논하고 있는 사실상의 ‘시민의 퇴출’과 ‘퇴화된 시민들’과 같은 반동적 현상은 “대중민주주의의 기원 자체와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최소로 줄이려는 노력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이 점도 역시 배경에는 자유주의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유동하는 근대로 유명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변의 이웃과 공동체의 고통에 별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자들’과 같은 해석과 유사한 저자의 다음과 같은 평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어디서나 실제 이웃과 공동체의 공동 운명에 무관심한 자유주의적 규범을 신봉하는 자들”이 주도하는 세계에 “좌절한 시민들이 민주주의 주장과 대중의 통제권이 없는 현실간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추세를 목도”하고 있다고 공통된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론에 이르러 밝히는 ‘자유주의 이후의 자유’에서 저자는 “자유주의 이후 시대로 나아가려면, 자유주의가 초기에 감탄스러운 열망을 바탕으로 호소력을 발휘했으나 대개 그런 열망의 변질에 의존해 성공해왔다는 것을 인식”해야하며, 이것과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단순히 자기 이익의 표현이 아니라 종전의 좁은 이익을 공동선에 대한 넉넉한 관심으로 바꾸는 전환”이라는 절대선으로 표명하며 약간의 현실사고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논의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선출된 기득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저자가 기득권에 대한 저런 인식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저는 동의하기 힘든 개념이었습니다. 엘리트들에 기반한 정치와 관련해서도 어떤 특별한 대안을 보이고 있지 않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었는데요. 우리는 너무나 비상식적인 엘리트주의에 대한 무비판을 받아들이고 있어서 ‘엘리트 정치 기반과 현실정치를 전복의 대상으로 삼는 포퓰리즘’ 만큼이나 민주주의적 이념을 해치는 엘리트주의와 약한 권력을 갖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실상의 피동적 인식 태도는 필히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가 자유주의적 비판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나머지 ‘제한되지 않는 엘리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설명이 미흡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점은 충분히 감안하고 있고 다만 저는 ‘확대되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제가 밝힌 이러한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노련한 정치학자 패트릭 J. 드닌의 이 논저는 충분히 의미있는 결과물이라고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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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사회와 이익사회 - 순수사회학의 기본개념 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번역총서 7
페르디난트 퇴니스 지음, 곽노완.황기우 옮김 / 라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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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베버와 게오르그 짐멜 등과 동시대인으로 독일 사회학회를 창설하여 초대 회장에 오르면서 초기 독일 사회학의 기초를 쌓으며 큰 명성을 얻은 페르디난트 퇴니스는 1933년까지 킬 대학의 특별한 연구 교수직을 역임했는데요. 특히 1932에서 1933년에 이르는 기간동안 그가 행했던 나치당의 비판으로 스스로 궁지에 몰리게 되며, 히틀러에 의해 강제로 대학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왠지 칼 슈미트와는 유독 대비되는 행적이기도 합니다. 두 공역자의 해제에는 이상주의적이고 낭만주의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던 퇴니스의 학문적 경향과 양심에 대해서도 잘 언급되고 있습니다. 이 책은 그가 28세때 저술되었으며, 이번에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번역총서로 묶어 1912년 개정판을 바탕이 되었다고, 또한 정부의 재원을 지원받아 출간된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인제대 교수였던 황성모 선생의 1982년 국내 번역판을 다시 새롭게 정비하여 낸 것으로 공역자들이 다시 한번 주지하고 있습니다. 독일어 원제는 ‘Gemeinschaft und Gesellschaft’ 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책의 원제를 바로 표현한 게마인샤프트, 게젤샤프트는 매우 유명한 개념이기도 합니다. 당시 독일은 말할것도 없고, 프랑스를 비롯한 미국에서도 이 개념을 여러 곳에서 차용해 의미를 확장시켰는데요. 더불어 우리말로 공동체와 결사체라는 의미로 쓰여지기도 했습니다. 저자인 퇴니스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라는 대비되는 개념으로 후자를 바탕으로 전자의 우월성을 다소 증명하는 방법을 글의 논리적 전개를 이끌고 있습니다. 또한 ‘부모-자식, 남편-아내, 형제-자매’ 등으로 인식된 기반의 전통적인 공동사회에 대해 개인의 향락 (아마도 안락에 더 가깝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을 위한 자원 분배의 차원에서 가부장제를 차악의 문제로 수용하고 있고, 후에 전개된 서술 기반에서 권력 관계와 장원을 언급하면서 농노와 노예 제도에 대해 ‘법적 노예 신분은 그 본질상 의롭지 못하다’고 평가하지만 앞선 가부장 제도와 마찬가지로 사실상 역사의 문제로 치환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즉, 이익사회가 출현하기 이 전의 모든 가용한 생산물이 자급자족 형태로 순환된 공동사회의 생산형태가 앞서 밝힌대로 각 구성원들의 향락의 문제에서 중요한 기반이 되었고, 이후 잘 알려진 바대로 ‘잉여생산물’을 판매의 형태로 출현한 이익사회에 대해 상인과 자본가의 해석을 크게 할애하면서 잠정적으로 비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평등의 한계를 넘어서면 서로 상이한 것들의 통일체로서 공동사회의 본질이 지양된다”는 측면에서 자본가와 상인의 화폐권력적 우위에 애매한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여겨집니다. 특히 촌락의 구조에서 노동과 생산의 거의 완전한 구조는 선순환의 입장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반면, 각각의 개별 노동력이 수단화가 되는 이익사회의 생산체가 기존의 공동사회가 추구했던 여러 중요한 가치들을 망각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고 보는데요. 이는 “상호간의 믿음과 신뢰가 기반한 관계가 매우 성립하기 어렵게 되는” 이익사회의 단면을 평가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해 보입니다.

이렇게 1부에 이르는 공동사회와 이익사회의 개념의 일독을 마치고 다음 2부를 읽어나가는 도중에 명백하고 1부와 2부는 구조상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부도 전자인 1부와 마찬가지로 서로 대비되는 규명으로 본질의지와 선택의지를 다루고 있는데요. 2부는 약간 미흡한 선택의지의 해석을 감안한다면 거의 본질의지를 다루고 있습니다. 쇼펜하우어와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은 본질의지의 인간 전반의 사고와 관념, 감정에 대한 퇴니스의 해석은 본질적으로는 의지를 유기체로 인식하고, 감정과 사고의 영향이 서로 연계되고 주고받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는 큰 틀의 인식을 고려한다면 꽤 일관된 논증을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기억을 의지의 영향을 주는 중요한 인자로 파악하고, 기억 자체가 ‘필연적 의견, 정언적 명령’으로 호의-습관-기억으로 비롯된 의지 형태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의 본질은 의지와 자유에 비롯되는 것으로 자유와 의지는 곧 하나라는 관념을 잉태합니다. 이렇게 도출된 인간 의지의 개념은 욕망과 욕구와 관련해서 인간의 특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인식이며, 인간 의지 자체가 동물적, 정신적 의지에서 결정된 유기체적 의지로 확신된다면, 인간이 자신의 욕망과 이득을 위해 이기심을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경향이 거의 이해가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선택의지는 앞선 본질의지와 명백하게 대비되고 이점은 이익과 이기심의 선택의 문제로 규정됩니다. 결국 “이러한 개개인은 자기의 본질의지에 자신의 태도를 정하게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제가 느끼기에는 의지를 사실상 본성을 나타내는 명제로 받아들이고 해석되는 것은 일찍이 쇼펜하우어가 시도했던 철학이며, 스피노자 역시 의지와 본성의 문제를 명확히 구별하지 않고 받아들였던 태도와 유사합니다.

그리고 3부는 정의와 테제, 자연법을 정리하면서, 마찬가지로 정의와 자연법을 본질의지-선택의지 및 공동사회-이익사회라는 대비되는 논리적 전개로 확실히 표명되고 있는데요. 이익사회에서 선택의지로 기반되는 정의가 과연 반대의 본질의지와 공동사회에서의 가치로 과연 우월한 개념으로 도출될 수 있느냐와 전통적인 관습과 인습의 기반이 되는 공동사회의 관습법을 역사에서 살펴보고 있습니다. 퇴니스가 규명하는 마지막 자연법과 관련된 문제는 인간의 의지와는 조금 거리가 먼 관념성과 보편성의 측면에서 찾아보고 있습니다. 따로 독특한 이해라고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공동사회의 관습법이 자연법의 일부로 귀속되고 이후 스스로 고유 영역으로서 공법적인 구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측면의 해석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이익사회의 고리대금과 같은 불로소득과 관련된 채권법은 개인의 이익의 수단으로 나타났고, 전체적으로 상업 발달과 자본가 계급의 출현으로 탄생한 이익사회가 어떠한 성격을 갖고 있는지 마찬가지로 보여줍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펴본 양 사회의 분석적 측면은 과연 공동체의 국가론으로서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혹은 공동사회나 이익사회 한쪽에 기반한 국가를 도출해야 하는지, 양자 모두에게서 공통되는 보편적 이익으로 취합해야 되는지에 대한 퇴니스의 고민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보편적인 이익과 보편적인 구속으로 누구나 인정하는 여론에 기반하는 국가체제를 갖추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닐겁니다. 저자 자신이 히틀러로 대표되는 국가사회주의를 목도한 바가 있듯이 자본주의 발달 시기의 독일의 경험을 비추어 본다면 양쪽을 극명하게 대립시켜 결과물을 살펴보는 일종의 경험도출론은 사실상 실행되기 어려운 문제였을 것입니다. 이익의 문제를 최고 선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지만 이익사회가 무조건 부정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는 믿음은 꽤 위험하기도 한 것입니다. 퇴니스가 자신의 독일이 거대하고 파급력이 큰 위험한 징조를 미리 본능으로 알고 이를 비판했던 것과 같이 온전한 자연법을 도덕적 기초로 삼아 국가의 기조로 삼는 것이 완전한 공동사회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 보다는 좀 더 나은 선택이 되지 않을까 고민해 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저자인 그가 이익사회의 단면을 과감하게 파악했듯이 우리 사회의 이 이익사회화는 꽤 변질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책이 우리에게 어떠한 이해를 가져다줄지는 다소 불명확하긴 합니다만 초기 사회학에서 시도된 규명들이 오늘날에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을 것이라는 약간의 희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끝으로 덧붙여, 9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을 발견했는데요. 정부의 지원으로 출간한 책이 제대로 된 마무리도 안 된것은 매우 유감스럽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많이 팔릴 책도 아니니 다시 재출간하는 것은 익히 어려운 일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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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의 설계자들 - 1945년 스탈린과 트루먼, 그리고 일본의 항복 메디치 WEA 총서 8
하세가와 쓰요시 지음, 한승동 옮김 / 메디치미디어 / 2019년 2월
평점 :
절판


이 ‘종전의 설계자들’이라는 글을 쓴 하세가와 쓰요시는 일본 출신으로 도미하여 캘리포니아대 산타바바라 캠퍼스 역사학과에서 학생들을 지도한 일본계 미국인인 학자입니다. 그에게 필생의 논저라고 불릴만한 이 글의 목적은 2차대전 대일전과 관련하여 새롭게 살펴보는 스탈린과 소련의 역할, 그동안 학계와 많은 학자로부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폭이 일본과 일왕의 항복을 이끌어냈다고 알려진 기존의 믿음을 다시 재검토하게 만드는 내용들을 포함한 것입니다. 참고로 이 책은 2005년에 첫 출간이 되어. 2011년 내용의 재보강을 통한 일본판이 2011년에 나왔고, 국내 번역판은 이 2001년 판을 기본으로 출판되었습니다. 특히 한국어판 서문을 저자가 직접 작성하면서 마지막 부분에 “이 책에서는 딱히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이런 굴욕을 강제한 나라에 태어난 저자로서 그 역사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는 것을 한국 독자들이 알아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한국인 독자들에게 겸허한 고백을 하고 있는데요. 아마도 한국어로 번역된 자신의 책이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에 대한 고민도 함께 들어있다는 생각도 문득 들었습니다.

우선 이 책은 총 7장으로 1940년 9월 독일과 이탈리아와 함께 삼국 동맹에 가세한 시점부터 1945년 9월 5일 소련군이 쿠릴열도의 모든 섬의 점령이 완료된 시기까지를 시간적 공간의 범위로 삼고 있습니다. 약간의 논외지만, 얼마전에 서평을 썼던 가토 기요후미의 ‘대일본제국 붕괴’의 많은 근거가 바로 쓰요시의 이 글이더군요. 먼저 짚고 넘어가고 싶은 것은 얄타 회담이라고 잘 알려져 있는 루즈벨트와 처칠 그리고 스탈린의 당시 막바지에 이른 대전의 향방을 탐색하는 이 정치적 회담을 ‘냉혹하게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스탈린이 주도한 루즈벨트에 대한 각종 이권 쟁취로 해석하는 ‘얄타밀약’으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 완전하게 동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저는 일차적으로 치열한 독소전쟁을 전개했던 스탈린의 소련이 동등한 연합군으로서 받아들여진 점과 전자를 통해 확장되는 얄타밀약의 논리로서 노골적인 기만정책을 통한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통한 만주의 소련군 진입을 무조건 비윤리적이고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대응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도 드러나지만 사실상 만주에 대한 이권 포기를 결정했던 장제쓰와 얄타회담을 통한 중국의 양보를 기반으로 한 소련의 이들 지역의 이익을 또 미국 정부가 기만책으로 상대했다는 점에서 솔직히 이러한 정치외교적인 전술의 시험대에서 무조건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어려워 보입니다. 그야말로 순진한 생각이죠. 더불어 일소 중립조약을 루즈벨트 역시 독일과의 전선에 모든 역량을 쏟아내고 있는 소련과 동시에 미영에게도 분명 이득이라고 봤으며, 일소 중립조약이 마찬가지로 전쟁 과정에서 소련의 이익에 그 실효를 다했다는 판단으로 이미 일본과의 참전에 정당성을 갖고 있는 소련에게 조약 위반만을 들이대는 것 또한 별다른 의미가 없어보입니다. 각각의 주요한 정치 행위자들이 자신들의 이익과 입장에 맞는 평가와 결정이 있을 순 있겠지만, 주축국의 일원이자 침략국의 일본이 국제 무대에서의 외교적 도의를 주장하는 것이 얼마나 가당치 않은지 다들 이해하실겁니다. 루즈벨트에 이어 백악관에 등장한 해리 트루먼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결과를 “진주만에 대한 복수”로 생각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는 것에 대해 우리가 트루먼을 냉혹한 살인마라고 비난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국가적 배경과 논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이런 과정에서 일왕은 ‘일격평화론’에 입각한 종전 논리를 갖고 있었는데요. 즉, 저자의 설명대로 ‘상대에게 치명적인 공격을 날리고 그러한 유리한 배경 속에서 전쟁을 마무리한다”는 이 일격평화론은 반대로 루즈벨트와 트루먼은 ‘가혹평화론자’로서 그것이 수사에 불과할지라도 무조건 항복을 포함한 어떠한 반론도 받아들이지 않는 국익의 신봉자이자 정치인들이었습니다. 일전에 E.H 카는 “1차대전이 전쟁에 대한 그 끝도없는 낭만주의적 분위기가 더 큰 파멸을 불러 일으켰다”고 평가한 바가 있습니다. 전쟁의 패색이 이미 시작된 대전의 암울한 분위기에서 일왕을 비롯한 당시 일본의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자원과 수단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하게 미국에게 충분한 일격을 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는지는 모르겠으나 최소한 국가의 운명을 손안에 놓고 가늠하는 자들이라면 모든 가능의 수를 올려놓고 또한 자신들의 그런 위치를 공고히 해주는 데 기반이 된 수많은 국민들을 희생의 값어치로 여기는 것은 더욱 피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일격을 오키나와에 있었던 그 잔인하고 비인도적인 민과 군에 모두를 포함한 ‘반자이 어택’으로 만든 것만으로도 일왕이 그 권좌에 있을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들었습니다. 더욱이 전 국민을 고양시켜 대결전에 준비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보는 것은 히로히토가 얼마나 미화되어 왔는지 밝히는 사례라고 여겨집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허버트 빅스가 왜 이 일왕의 가면을 벗겨내려고 했는지 충분히 이해가 되는 부분입니다.

다만,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종래의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 정부가 소련의 대일 참전을 사실상 원하고 종용해 왔다는 측면의 분석이 잘못 되었을수도 있다는 해석입니다. 물론 이것과 관련해 많은 학자들로부터 다른 의견과 해석이 있습니다만 맨하탄 계획에 의해 원자폭탄이 준비되었지만 당시 루즈벨트에 이어 대통령이 된 트루먼이 오키나와의 경험을 통한 미군들의 희생을 고려했다면 원폭이 아니더라도 소련의 참전을 통한 목적 달성이 더 쉬웠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이를 “히로시마에 의한 원폭투하는 스탈린의 대일본 참전을 앞두고 이를 저지하기 위한 정치적 결정”이라고 보고 있습니다. 즉 더 상세하게 서술한다면 일본의 무조건 항복 자체보다는 소련이 대일전에 참전하여 극동과 일본에서 이익을 획득하는 것을 원천적으로 막기 위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루즈벨트가 승인한 스탈린과의 얄타 회담에서의 정치적 약속을 트루먼도 존중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소련의 대일본전 참전에 대해서는 매우 마뜩치 않아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이 점은 스탈린에 대한 트루먼의 개인적 감정이라기 보다는 앞으로 전후 관리와 질서에 있어서 소련을 잠정적으로 적으로 여겼고, 마찬가지로 히로시마를 쑥대밭으로 만든 원자폭탄을 스탈린이 “소련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받아들인것도 트루먼과 다를바 없는 생각이겠죠.

또한 당시 일본 정부가 일방적인 소련의 일소중립 조약 거부에도 소련과의 화친을 통해 미영과의 전쟁을 끝내려고 접근한 것도 자포자기의 심정인지 외교전략적인 측면을 무시하고 안일하게 여긴것 인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능수능란한 스탈린의 책략에 놀아나 선전포고장 하나만을 손에 쥔 일본의 멍청한 대응과 미영과의 직접 교섭을 당시 일본 육군이 절체적으로 반대했다고 밝히면서 이들 육군은 “1억 일본 국민을 길동무 삼아 자폭할 각오였다”는 냉엄한 한줄 평가를 담고 있습니다. 이러한 와중에도 ‘국체 호지’, ‘일왕제의 존치’를 아주 일관되게 강조했던 것은 일본인들에게 있어서 야마토인 혹은 야마토 문명으로 여겨지는 신도와 일왕이 신과 마찬가지라고 여겨지는 믿음이 주변의 모든 것을 초월해 중요한 것인지 일개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분명 이해는 되지 않았습니다. 1945년 9월 2일 일본이 항복에 서명하기까지 일왕에 대한 전쟁 책임을 회피시키고 더불어 일왕제를 존치하는데 연합국 특히 미국의 동의를 받으려고 정치적 노력을 수없이 시도하고 방안을 마련하는 것에 대해 실로 아연한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일왕이 일본 역사의 전면에 실질적으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메이지 유신 이후 수많은 주변의 아시아인들을 말로 다 못하는 고통에 빠트려 놓고도 그 일왕은 90세 가까이 천수를 누린 것은 비현실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러한 모든 정치적 인식과 과정이 종전 도입, ‘종전을 도입한다’는 자신들의 책임을 전혀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수사’의 수립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종전이라는 단어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 책을 통해 드러나는 것은 이 막심한 피해를 초래한 세계적인 대전과 이것의 많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얼마나 규정할 수 없는 군사외교적 전략과 전술을 사용했고,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국가 관계를 수도 없이 조정하고 심지어 광범위한 기만책과 허위 전술 등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사용했는가에 대한 가감없는 분석입니다. 연합국에 의해 대악으로 규정된 독일과 일본의 만행을 결코 숨기려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막대한 민간인들의 인명 피해를 초래했던 원폭 공격과 도쿄에 대한 미 공군의 수많은 소이탄 공격에 있어서도 ‘부수적 피해’라고 여겼던 일왕과 그 신하들, 그 반대편의 커티스 르메이 같은 적극적인 전쟁론자들 모두 우리가 이룩했던 계몽과 근대의 가치와는 매우 동떨어진 역사임은 분명해 보입니다. 전쟁에 있어서 도덕론자 같은 관찰은 피해야 하지만 지금에야 심각한 제국주의자라고 알려진 영국의 위대한 총리 윈스턴 처칠이 일본 제국주의를 일개 아시아인에 의한 똑같은 아시아인들의 다툼으로 여겼던 것과 같이 세계 2차대전이 과연 해방을 위한 전쟁이었는지는 이 책을 통해서도 결국 다시 되새김 해보게 됩니다. 다만, 지금의 수많은 일본인들이 이 책을 보고 나서 자신들의 역사를 어떻게 생각해 볼지 무척 궁금해지는 것은 또 어쩔 수가 없더군요. 저자도 이와 관련하여 글 후반부에 태평양 전쟁에 참가했던 한 해병대원이 목도했던 일본군에 의한 미군 포로와 희생된 미군들에 대한 참상을 목격하고, 이를테면 희생된 미군 병사의 성기를 잘라 목이 잘린 그 병사의 입에 넣는 등의 목불인견을 통해 일본인들에 대한 극도의 증오심을 표출한 바가 있습니다. 현재의 전체 일본인들이 과거 자신들의 윗세대가 자행했던 전쟁 전체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을지 식민지 지배의 후손인 저같은 한국인은 실로 궁금할 따름입니다.

끝으로 거의 이틀동안 10시간이 넘도록 이 책에 집중을 했는데요. 만약 2차대전과 전후사에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하세가와 쓰요시의 이 책에 적지 않은 만족을 얻으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근래에는 과거 소련측의 자료가 많이 공개되어서 특히 스탈린의 전쟁 수행에 대한 행적들이 이 책에도 많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앞선 표현대로 스탈린은 냉혹한 국가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가이자,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지정학을 신봉하는 매우 현실주의자라는 것을 다시금 알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얄타회담과 당시 루즈벨트와 스탈린의 정치 게임을 좀 더 알고 싶으시다면 최근 출간된 마이클 돕스의 ‘1945’를 같이 읽어 보시면 좀 더 충분한 이해를 갖게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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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승현 2019-04-22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좋은 책을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하세가와 쓰요시의 책과 관련된 도서인 『8월의 폭풍』의 역자입니다.

https://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175357299

하세가와의 책이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둘러싼 당시의 국제정치적 상황을 심도 있게 고찰하고 있다면, 『8월의 폭풍』은 하세가와 책이 비교적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소련의 대일전 참전에서 소련군이 수행한 군사작전을 상세히 다루고 있습니다. 『8월의 폭풍』은『종전의 설계자들』의 참고문헌이기도 합니다.

『8월의 폭풍』을 『종전의 설계자들』과 같이 읽으신다면 더 많은 도움이 되실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제가 번역한 『8월의 폭풍』도 언젠가 소개해주시고 서평을 해 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베터라이프 2019-04-24 08:25   좋아요 0 | URL
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도록 할게요..
댓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