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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자유주의는 실패했는가 - 자유주의의 본질적인 모순에 대한 분석
패트릭 J. 드닌 지음, 이재만 옮김 / 책과함께 / 2019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의 저자인 패트릭 J. 드닌은 미국 인디애나 주의 노터테임 대학 정치학과 교수인데요. 과거 프리스턴 대학과 조지타운 대학을 거치면서 특히 미국 정치 사상과 독립 시기의 정치사 연구와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대한 연구를 지속하고 있는 꽤 저명한 정치학자이기도 합니다. 또한 1995년에는 ‘레오 스트라우스’ 상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우선 이 책은 편집자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미국 예일 대학 출판부에서 펴내는 ‘정치와 문화 Politics and Culture’의 시리즈 중 하나인데요. 위의 시리즈 중 두번째 논저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원제는 ‘Why Lieberalism Failed’ 로서 지난 2018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최근인 올 4월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오늘날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정치적 실패가 전세계적인 문제로 대두하게 된 연유에는 이 자유주의가 너무나 성공적으로 이데올로기화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저자는 진단하고 있습니다. 즉, 자유주의의 완벽한 성공이 바로 오늘날의 위기를 만들었다는 입장입니다. 홉스와 밀을 거쳐 근대의 시기에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 자유주의는 인간의 해방과 권리의 증진 및 자유의 증대를 기본 가치로 삼았습니다. 특히 제일 앞선 ‘인간 해방’이 중요한 목표였는데요. 20세기 초에 서구는 양차대전, 특히 2차대전 당시의 전체주의를 목격하면서 개인의 자유를 포함한 광범위한 자유주의적 확대가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자유주의는 점차 민주주의와 병립하게 되었고, 시기상으로 약간 차이는 있지만 경제적 시장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신자유주의’와 함께 프랜시스 후쿠야마가 평가하는 대로 대다수의 선진 자유진영의 국가사회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자유주의적 대두의 시기에서 앞에서 제가 언급했던 바와 같이 경제적 불평등과 시민의 파편화, 그리고 시민의 퇴출을 만들어 낸 현재 우리의 시대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회학자들과 경제학자들이 자유주의를 더 확대시켜야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합니다. 이것의 진정한 진위 여부를 차치하더라도 샹탈 무페가 주장하는 것과 같은 ‘급진 민주주의’와 앞의 ‘자유주의의 더 많은 확대(이것을 어떤 용어로 만들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가 서로 동일한 가치를 갖고 있느냐에 대해서는 당연히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이 책의 7장에서 밝히고 있는 “자유주의의 가장 해로운 허구 중 하나는 동의 이론, 즉 자율적이고 합리적이고 계산적인 사람들이 ‘권리 보호’를 유일한 목표로 삼는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추상적인 계약을 맺었다는 가상 시나리오였다”는 긴 문장은 저의 해석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더불어 토크빌의 개인의 이기심과 이익 추구를 적절하게 제어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에 해악이 될 것이라고 예측했던 것은 익히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주의에 기반한 개인의 이기심 보장과 권리 추구가 얼마나 많은 공동선과 공동체적 이익을 훼손해 왔는지 이 책의 1장과 2장에서 논증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저자는 “자유주의적 뿌리는 다양한 인간학적 가정과 사회 규범을 뒤집으려는 노력에 있었다”고 해석하며, 인간이 본디 불확실성과 비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많은 사회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이 불변한다’는 생각을 거부함으로써 더욱 이러한 불안정성을 무시하고 무조건적인 개인의 이익과 이기심 추구를 부채질 해 왔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 저자는 이익과 이기심을 중요한 가치로 설정해 온 보수적 자유주의자들의 “의제 가운데 근대에 정치적 우위를 점하는 동안 계속해서 성공적으로 실행한 의제는 규제 완화, 세계화, 엄청난 경제적 불평등을 포함한 경제적 자유주의 뿐이다”라고 비판하면서 동시에 진보적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진보주의자들이 그나마 성공한 정치적 의제는 ‘성적 자율성 프로젝트 뿐”이라고 더 강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요. 정말 얼마나 통렬한 평가인지 저는 적극적인 동의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듯이 우리의 이기심은 극히 한계를 모르며, 더군다나 세계의 자원은 분명 제한적입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유주의의 강조가 결국 사회 질서와 안정을 위해 ‘법치주의’에 더욱 의존하게 됨으로써, 사회 전체가 극히 단순한 형벌주의적 입장에 더욱 전도될 가능성을 저자는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단순히 설명하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종래의 사회적 규범과 공동체적 의식, 그리고 공동체주의로 충분히 법에 일방적으로 의존하지 않는 사회 체계를 수립할 수 있음에도 앞선 문제를 법에 의존하는 간편주의로 만들어 결국 사회적으로 약영향을 끼친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도 7장에서 논하고 있는 사실상의 ‘시민의 퇴출’과 ‘퇴화된 시민들’과 같은 반동적 현상은 “대중민주주의의 기원 자체와 민주주의에 참여하는 시민들을 최소로 줄이려는 노력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서 이 점도 역시 배경에는 자유주의가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유동하는 근대로 유명한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변의 이웃과 공동체의 고통에 별반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자들’과 같은 해석과 유사한 저자의 다음과 같은 평가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계 어디서나 실제 이웃과 공동체의 공동 운명에 무관심한 자유주의적 규범을 신봉하는 자들”이 주도하는 세계에 “좌절한 시민들이 민주주의 주장과 대중의 통제권이 없는 현실간의 간극이 점점 벌어지는 추세를 목도”하고 있다고 공통된 인식을 보이고 있습니다. 따라서 결론에 이르러 밝히는 ‘자유주의 이후의 자유’에서 저자는 “자유주의 이후 시대로 나아가려면, 자유주의가 초기에 감탄스러운 열망을 바탕으로 호소력을 발휘했으나 대개 그런 열망의 변질에 의존해 성공해왔다는 것을 인식”해야하며, 이것과는 반대로 “민주주의는 단순히 자기 이익의 표현이 아니라 종전의 좁은 이익을 공동선에 대한 넉넉한 관심으로 바꾸는 전환”이라는 절대선으로 표명하며 약간의 현실사고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저자는 논의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선출된 기득권’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데요. 번역의 문제인지 아니면 저자가 기득권에 대한 저런 인식을 갖고 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사실상 저는 동의하기 힘든 개념이었습니다. 엘리트들에 기반한 정치와 관련해서도 어떤 특별한 대안을 보이고 있지 않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었는데요. 우리는 너무나 비상식적인 엘리트주의에 대한 무비판을 받아들이고 있어서 ‘엘리트 정치 기반과 현실정치를 전복의 대상으로 삼는 포퓰리즘’ 만큼이나 민주주의적 이념을 해치는 엘리트주의와 약한 권력을 갖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사실상의 피동적 인식 태도는 필히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가 자유주의적 비판에 많은 지면을 할애한 나머지 ‘제한되지 않는 엘리트주의적 이데올로기’에 대해 설명이 미흡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점은 충분히 감안하고 있고 다만 저는 ‘확대되는 민주주의’에 반하는 어떠한 정치적 입장에 대해 반대한다는 것을 밝히고 싶었습니다. 제가 밝힌 이러한 사소한 문제를 제외하면 노련한 정치학자 패트릭 J. 드닌의 이 논저는 충분히 의미있는 결과물이라고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