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이냐 삶이냐 - 팬데믹 시대의 사유
장 피에르 뒤피 지음, 이충훈 옮김 / 산현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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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2월,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난 장 피에르 뒤피는 유년 시절을 보낸 뒤, 1965년까지 에콜 플리테크니크 (Ecole Polytechnique) 와 에콜 데 마인 (Ecole des Mines)에서 수학합니다. 이후, 1982년에는 장 울모의 예비적 고찰을 바탕으로 장 마리 도메나흐와 함께 에콜 폴리테크니크의 인지과학 및 인식론 센터 (CREA)를 설립합니다. 그리고 미국 캘리포니아주 스탠포드 대학의 언어 및 정보 연구 센터 (CSLI)에서 프랑스어 교수이자 연구원으로 재직하기도 합니다. 이와 연계되어 그는 2006년까지 에콜 폴리테크니크에서 사회 및 정치 철학과 기술 윤리를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특히 그는 이반 일리치와 르네 지라르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는데, 앞선 일리치와는 남다른 우정을 쌓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뒤피는 프랑스를 비롯한 서구 사회의 환경 및 사회 붕괴의 위험에 관심을 기울여 왔고, 그러한 가운데 "계몽적 파국주의"라는 연관된 주제를 개념화 하기도 했는데요. 이것은 계몽주의가 인간 진보와 사회 발전을 위해 추동했지만 그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오히려 문명의 파국을 초래했다는 인식이기도 합니다. 저는 이러한 대목에서 칼 포퍼가 떠오르기도 했습니다만 그의 이런 생각은 도구적 이성의 문제를 다룬 과거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에도 어느 정도 맞닿아 있기도 합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a Catastrophe ou la vie : pensées par temps de pandémie"로 지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이듬해인 2022년 8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뒤피의 이 책은 지난 코로나 펜데믹 시절인 2020년 12월 이후의 일기 내용 (펜데믹 사태에 대한 글쓴이 본인의 인문사회학적 분석 등)을 담고 있습니다. 각각의 장 서두에, 글이 쓰여진 날짜가 기록되어 있고, 뒤피 본인이 후반부에 이것이 일기 형식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다만, 여기에 실린 내용들은 펜데믹 시기에 드러난 프랑스 정부의 사실상 무능과 마찬가지로 코로나 확산 초기 트럼프 행정부의 미흡한 대응 혹은 의도된 늑장 대처로 벌어진 미국내 25만명의 희생자와 그것과 버금가는 브라질 정부의 막장 대처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기도 합니다. 최근에 번역된 그의 다른 논저인, 『경제와 미래』에서도 드러나듯, "경제가 먼저이냐 정치가 먼저이냐"라는 근본적 물음과 비견될 수 있는 "생명이 먼저이냐 경제가 먼저이냐"를 비판적 사회철학자이자 동시에 과학자이기도 한 저자의 철학적 성찰이 약간 비통한 심정으로 읽히기도 했는데요. 책 중간에 언급되는 사이버네틱스 논쟁과 여러 자연 과학자들의 무지도 문제로 꼽힐만하지만 그럼에도 전세계에 자유를 방패로 삼아 몰아치고 있는 '반지성주의'에 대한 지적을 무엇보다 먼저 언급하고 싶습니다.

지난 코로나 펜데믹 상황에서 백악관의 주인이 하필 도널드 트럼프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미국 내 극우 포퓰리스트들과 극단주의자들이 "이 코로나 펜데믹을 민주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미국의 유서 깊은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로 엄중한 펜데믹 상황에서도 사회 전반을 위한, 소위 '긴급한 보건적 조치'에 대해 이들은 극렬히 저항하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혁명의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프랑스에서도 거의 예외가 없는 모습이기도 했는데요. 더욱이 3장에서 비판적으로 논증되는 보편적 생명을 대하는 지식인들의 이중성의 대표적 표징이기도 했던 조르조 아감벤의 '벌거벗은 생명'을 기반으로 펜데믹 시대에서 보여졌던 민낯을 저자는 여과없이 증명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명성을 쌓아 올린 아감벤은 보건적 조치인 격리로 인해, "인류와 야만을 가르는 억제선이 무너졌다"고 일종의 악에 바친 소리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가 지난날 무솔리니의 통치에 이탈리아적 열정으로 저항하지 못한 이탈리아인들을 얼마나 비극적으로 여기는지는 모르겠지만 언뜻 보기에 일부 유럽 지식인들이 두드러기처럼 느끼는 공리주의에 대한 반감이 간접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아감벤 역시도 그 위기의 시대에 '개인의 자유', '선택의 자유'를 유독 그 시기에 지고한 가치로 격상시키기에 이릅니다.

펜데믹 시대에 사회적 거리두기는 물론 그외 단행된 격리조치는 이어지는 시민들의 '마스크 착용'이라는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펜데믹 초기에 미국 시민들은 이 마스크 착용을 일종의 '국가와 사회의 강제'로 이해하기도 했는데요. 국가와 정부가 개인의 권리와 자유에 간섭할 수 있느냐는 말과 함께 말이죠. 이에 저자는 개인 간에 발생할 수 있는 비말을 효과적으로 방지하는 것이 마스크이고 이 마스크를 거부하는 일부 시민들이 실제로 안전해질 수 있는 원인은 자신들보다 많은 사람들이 마스크를 착용했기 때문이라고 군더더기 없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글의 마지막 장에서 그가 셰익스피어처럼 인용하여, "그것은 우리 자신에 관해 생각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을 생각하도록 명령한다는 의미에서 도덕적 바이러스이다"라는 절묘한 수사로 덧붙이고 있는데요.또한 앞선 9장에서 인용된 루소의 말인 "결과가 원인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제도의 결과인 사회정신이 제도 자체를 앞장서서 이끌어야 한다."는 주장들은 어떤 가치를 앞서 강조하는 테제들이 결국에는 가치전복적인 결말에 이르지 않기 위해, 명확한 기준을 갖고 있어야 한다는 뜻을 에둘러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에 어떤 미국 보건 관계자가 희생된 고령의 환자들이 "어쩔 수 없는 피해" 혹은 다른 말로 "콜래트럴 데미지"와 같은 책임지지 않는 수사를 더하는 것이 그 나름대로는 손쉬운 방책이긴 하나, 펜데믹 시기의 수많은 희생들은 진실로 비극적이었다는 것을 누구나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앞선 양차 대전에서 도합 7천만명의 희생자가 나왔다는 대목은 통계학적으로 봤을 때, 일반 사람 머리로는 거의 가늠이 되지 않는 숫자이기도 합니다. 1961년에 전세계를 핵전쟁으로 몰아넣을 수 있었던 쿠바 사태에서도 핵폭탄의 투발로 초래될 무고한 민간인들의 희생 역시, 이제는 그저 건조한 추정치로만 남아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뒤피가 성찰하는 바는, "정치 권력이 절대 용서받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 방법이란 어디에도 없다."는 단언과 함께, 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 사회를 궤멸에 빠지게 만들 정도로 종의 종말을 이끌어 낸 것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이 코로나 바이러스의 정확한 분석에 지리멸렬한 것은 전문가들의 그 과학이 어쩌면 만능이 아니라는 것을 일정 부분 드러내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는 코로나 바이러스가 가히 면역 체계를 붕괴시키는 에이즈 바이러스와 유사한 병리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점을 애써 들고 있지만 세계 의학계가 이를 쉽게 인정하기는 어려웠으리라 추정됩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전세계 펜데믹에 대한 성격 규정마저도 조직과 단체의 알량한 이익과 권위가 맞물려 있는 것이 아닌가 추측해 보게 되었습니다. 특히 백신 생산과 관련된 담론들에서 말이죠.

글 중간에 뒤피는 만약 이반 일리치가 살아 있었다면 이 펜데믹을 어떻게 사유했을까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알려진 바대로 실천적 지식인이었던 일리치가 일련의 과정들을 보면서 어떠한 말들을 읊어댔을지는 대략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결국 바이러스의 자기증식적 한계와 그 변이가 극적으로 우리의 기대만큼 우리 면역계에 덜 영향을 끼치는 쪽으로 틀어졌기에 인류는 그 고난의 시기를 탈출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알량한 인간의 능력 때문이 아니라는 점은 분명하죠. 이는 각 국가가 보유한 의료 체계나 성숙한 시민 의식 내지는 자기 희생적 태도 때문이 아니라, 그저 인류가 운이 좋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런 연유로 우리에게 '인간의 생명'이라는 무엇인가에 대해 펜데믹 시기, 그렇게 이행된 사회적 결과로 일종의 의미 부여를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때 희생된 사람들에게 어떠한 말을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의 자유와 원할한 경제 활동이라는 은폐된 이기심의 발현이 과연 역사에서 어떻게 쓰여질지는 앞으로 두고 볼 문제이겠습니다.



- 이미 본문에서 자의적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노인들과 병에 걸린 약자들이 주로 코로나에 희생을 당했다는 식의 기사와 통계들은 여전히 본질을 가리고 있고, 오히려 2020년 3월 1일부터 8월 말까지 사망자의 25%가 45~75세라는 연령대에 집중되었다는 인용은 주목할 만합니다. 물론 앞선 사례는 프랑스의 예이기는 하지만 코로나 팬데믹이 초래한 인명 피해와 유럽 여러 나라와 마찬가지로 초기 대응이 미흡했던 프랑스 정부 당국의 법적 책임 뿐만 아니라 도덕적 자괴감까지 효과적으로 떨치게 만드는 통계적 장난으로. 이러한 편의주의를 우리는 앞으로도 쉽게 망각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세상 어디서나 어떤 이들을 오늘날 인류가 처한 일에 단순한 ‘독감‘이상의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다고 믿는다.

이 책 첫머리에 파스칼을 인용했지만, 오늘날 프랑스에서는 미국과는 다르게 지식인들 절대다수, 특히 철학자들 절대 다수가 외곬으로 문학 교육만 받는다.

허울 좋은 논변을 내세워 재앙의 결과를 최소화하려는 시도는 정말이지 시민정신이 결여된 행동이다. 사유 능력, 그러므로 추론 능력이 없다면 진정한 시민의 자격도 없기 때문이다.

삶과 경제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노인들이 자기희생을 하는 것이 선과 정의에 부합하는 일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그 원칙을 말하는 이들이 노인들이었다는 점이다. 나는 복음서의 메시지가 이보다 더 나쁘게 타락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희생은 그것만으로는 진리와 정의의 기준이 전혀 될 수 없다.

그들에 따르면, 펜데믹을 타개한다는 이유로 이 국가 기구들이 마스크 착용을 강요하고 이른바 ‘봉쇄‘조치를 강제하면서 기본적 자유를 제한했던 일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 기사는 펜데믹의 심각성을 전형적으로 최소화하면서 시작한다.특히 노인들과 질병에 취학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 같은 전염성 독감이 정말 온 국민을 유린하는 질병들과 비교할 만하다고 할 수 있을까?

프랑스에서 한 인간 생명의 가치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의적인 방식으로 결정된다. 그 가치는 오늘날 300만 유로로 고정되어 있다.

이렇게 행동하면서, 이들은 자기들이 국가 전체를 바이러스가 최단 시간 안에 퍼질 수 있는 국소세계로 만드는 데 성공했음을 의식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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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리얄리 2025-08-08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읽어 가면서 ‘이반 일리치라면?‘ 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역시 언급이 있었네요.

베터라이프 2025-08-08 08:52   좋아요 0 | URL
일리치가 멕시코에서 일종의 보건의료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뒤피가 그것에 응했던 모양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아마 두 사람만의 공감대가 있었을 것 같습니다. 그런 개인적 사연들도 소개되니 학문과 연구의 공동작업이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깨닫게 되네요. 댓글 남겨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