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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목소리가 중요한가 - 신자유주의 이후의 문화와 정치
닉 콜드리 지음, 이정엽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6월
평점 :
런던정경대(LSE)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인 닉 콜드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네트워크와 미디어학 권위자이기도 한데요. 그의 대표적인 논저 중 ‘미디어는 어떻게 신화가 되었는가’는 큰 명성을 안겨준 글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닉 콜드리 역시 마누엘 카스텔과 비슷하게 오늘날 변화된 민주주의 환경에 대한 분석과 ‘신자유주의적 상황에서 인간 소외에 대한 해결책을 과연 1인 미디어가 갖고 있는가’와 유사한 궁금증을 갖고 있는게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네트워크와 개별적인 미디어 시대의 초래를 ‘유별나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하는데요. 저는 그와는 별개로 이 네트워크의 시대가 우리 민주주의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매개로 보고 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콜드리의 이 책이 저에게 작은 응답이라도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2010년에 출간된 이 글의 원제는 ‘Why Voice Matters : Culture and Politics After Neoliberalism’ 이며, 국내에는 2015년 번역 출간 되었습니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특히 3장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라는 모순어법’ 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다고 느꼈는데요. 책 제목과 동일하게 중요한 오늘날 신자유주의 시대에 각각의 개인들 및 시민들의 목소리에 관한 필요성을 설득하고 그것이 사실상 부재했던 우리 시대의 단면과 그 배경을 폭넓은 인용을 통해 마찬가지로 분석하고 있습니다. 악셀 호네트와 리처드 A. 포스너, 낸시 프레이저, 주디스 버틀러 그리고 짧지만 콜린 크라우치까지 이처럼 신자유주의의 비판자들은 거의 언급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저자는 전세계의 신자유주의적 기조의 산파가 된 인물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고 있습니다. 루트비히 폰 미제스, 프리드리히 A. 하이에크, 밀턴 프리드먼이 바로 이들입니다. 여기에 레이건과 대처에 이르는 신자유주의적 정치화 과정을 언급하며, 3장의 주제와 관련된 배경으로 1980년대 이후부터 영국의 그 과정화를 특별히 비판적으로 고찰해보고 있습니다. 앞서 제가 밝힌대로 이 3장은 특히 중요한데요. 왜냐하면 많은 선진국과 워싱턴 컨센서스에 의한 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가 얼마나 형용 모순이고 어떻게 그러한 모순에 근거하고 있는지 분석하고, 이를 추종하는 많은 보수 우파들의 ‘자유 민주주의’와 얼마나 유사한지 비판적으로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콜드리가 주장하고 있는 이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와 전통적인 민주주의는 매우 다르고 또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그는 “시장 기능이라는 ‘우선적’ 요구로 추동되는 이른바 ‘민주적’ 과정은 실제로는 전혀 민주적이지 않다”고 규명합니다. 철저하게 동의할 수 밖에 없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3장에서는 이러한 분석의 주된 관점이 되는 영국과 영국 정치에 대해 설명하며 “많은 영국인들이 자신의 정치적 요구가 사실상 현실 정치에 반영되고 있지 않다”고 여기는 것을 추가하고 있는데요. 저는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점이 생각났습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낮은 투표율은 현실 정치와 과연 어떠한 상관관계가 있는가”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는 현실 정치에 좌절한 많은 시민들의 선택이 주된 연유가 아닌가 싶기도 했습니다.
이미 많은 학자들이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인 ‘결사와 집회의 자유’를 제한해 왔고, 궁극적으로 인간의 노동력 상품화를 불러 일으킨 ‘노동단체의 정치적 무력화’와 노동 집단에 대한 견제가 이를 통해 많은 시민들의 비판적 목소리를 무력화하는 결과를 낳았다고 진단해 왔습니다. 이 책에 소개된 어느 영국 정치인의 “부유층에 더 집중되고 있는 부의 집중화를 도덕적 문제로 다루기 전에, 모든 인간들이 엄청난 성공의 가능성을 부여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라는 되물음은 전자의 메커니즘이 얼마나 노골적인지 엿볼 수 있습니다. 즉, 만연한 ‘시장 국가화’ 내지는 ‘정치는 효과적인 자유 시장 확대를 위해서만 존재해야한다’는 이 신자유주의 독트린의 가혹한 위상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정치적 이념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버틀란드 러셀의 주장을 다소간 차치하더라도 신자유주의를 위해 민주주의를 다소 제한하거나 축소할 수는 결코 없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불의적 이익에 영합한 수많은 미디어들과 그런 권력화를 논의의 확대로서 책의 4장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정치가 경제와 이익을 공유하며 초래될 수 있는 위험성과 관련하여 일찍이 자크 랑시에르는 ‘과두제’의 위협을 꼽은바가 있습니다. 이 과두제의 위협은 랑시에르 뿐만 아니라 많은 학자들이 예측한 바가 있습니다. 로버트 달도 역시 다원주의적 가치가 붕괴될 때, 각각의 기득권과 정치가 영합하여 사실상 과두 형태의 정치가 출현할 것을 예견한 바가 있는데요. 인간의 노동을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삼아 이것을 전면적인 자유 시장 체제에 부합시켜 인간 소외의 문제와 경제적 불평등의 확대로 인한 경졔 계급적 획일화를 지금 우리는 목도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도 리처드 윌킨슨의 ‘불평등 트라우마’는 시민들의 인간 소외와 여러가지 경제적 모순으로 인한 정신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그래서 경제적 실천, 정치, 문화 안에 깊숙이 자리잡은 신자유주의 독트린이 여러 고통스러운 모순을 만들어냈다”는게 저자가 제기하는 일관된 주장입니다.
앞선 논증들을 바탕으로 오늘날 많은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체하에 있는 국가들의 상황은 “기업과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화에 발전시킨 내부 시장과 아웃소싱”의 폭발적인 형태입니다. 이것을 마땅히 오랫동안 지속적으로 비판해야 하는 좌파 더불어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영국의 노동당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신자유주의적 독트린에 영합하고, 애초에 일관되게 ‘추상적 비판’에 그쳐 확실한 비판적 대안이 되지 못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현실일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시민들의 더 많은 목소리가 필요하다고 저자는 확인하고 있고 이 점과 관련해 5장과 6장에서 꽤 설득적으로 논증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아마르티아 센이 밝힌 진정한 자유로서의 발전에서 “이런 자유에는 경제적 기회 뿐만 아니라 정치적 자유 및 사회적 자유 (읽고 쓰는 능력을 포함)이 중요”한데 이것은 목소리을 내기 위한 전제 조건일 뿐만 아니라, 보편적으로 신자유주의가 말하는 경제적 자유만을 포함한 협소한 해석을 실질적으로 모든 이들의 자유 기회를 위한 가치적 자리매김이 필요해 보입니다. 어쩌면 직면한 당위성의 문제일지도 모릅니다.
끝으로 콜드리의 이 글은 콜린 크라우치의 동일한 주제의 글과 함께 신자유주의 비판서의 거의 모든 것이라 평가될 만합니다. 더불어 이 논저의 높은 학문적 의의는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체제’의 허구적 모순을 과감없이 파헤친 점일 것입니다. 자유시장 이념이 절대적이고 개인이 공공선에 관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는 밀턴 프리드먼의 주장은 대체 다수의 이익과 어느 부분이 일치하는지 마땅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꽤 이상주의적일지 모르지만 사회 공통의 도덕적 규범과 공공선의 확립을 시민 모두의 중요한 가치로 인식하고 이에 대한 목소리를 끊임없이 이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됩니다.
“부의 창출이 우선이라는 이유로 불평등이라는 엄연한 사실은 신자유주의 논평가들에게 종종 묵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