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를 비즈니스로 만든 우파의 탄생 - 왜 보수가 남는 장사인가?
토마스 프랭크 지음, 구세희 외 옮김 / 어마마마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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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국내에 번역 출판되어 큰 반향을 일으킨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실패한 우파가 어떻게 승자가 되었나’의 저자 토마스 프랭크의 또 다른 미국 보수주의 우파의 본격적인 비판서 ‘정치를 비즈니스로 만든 우파의 탄생’을 일독했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토마스 프랭크는 시카고 대학에서 역사학 박사학위를 받고 언론인으로서 르몽드를 비롯한 잡지와 언론에 활발한 기고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전문 분야는 워싱턴 정치와 티파티를 비롯한 보수 우파에 대한 글을 기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요. 사실상 미국 내의 진보주의 운동이 지리멸렬한 상황에서 여론을 움직이는 진보 및 좌파 지식인들 중 몇 안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특히 토마스 프랭크는 매우 집요할 정도로 미국 보수주의에 대한 취재를 다녔을 정도로 그 명성이 적지 않은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 대한 큰 기대를 하고 읽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강고한 공화당 지지 기반인 캔자스 주의 정치 여론 분석과 계급에 반하는 정치적 지지를 다각도로 해석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를 재차 몇번 읽을 정도로 기억에 많이 남아 있습니다.

우선 여기 이 글의 큰 해석상의 큰 틀은 과거 첨예한 냉전 시기를 거쳐 매카시즘의 광풍에 편승해 이득을 얻은 보수주의 정치와 레이건 대통령 시기에 보수와 진보간, 미국의 오랜 전통이었던 ‘자유주의적 합의’가 사실상 종말을 고했고 이후 연이은 구소련의 붕괴로 적극적으로 ‘자유시장 이데올로기’에 편입하여 오늘날 변화된 보수주의의 금권정치화를 비롯한 시민의 의사에 반하는 행적과 인식에 대해 가차없는 비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우파 로비스트인 ‘아브라모프’를 이러한 우파 금권정치의 상징으로 내세워 그가 레이건주의의 신봉자로서 이력을 시작해 우파 비즈니스를 위해 해왔던 일들을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실상 워싱턴과 미국 정치를 주무르고 있는 이 금권 정치가 ‘기업이 사익을 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차없는 수단을 내세울 수 있어야 한다’는 식의 인식으로 최종적인 심각한 문제, 즉 정치가 시민을 위해 일하지 않고 돈과 사익을 위해 힘쓰게 되는 현재의 미국 국내 정치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사례 일 겁니다. 저자인 토마스 프랭크도 로비스트를 고용하여 의회를 포함한 정치권에 로비를 하는 이해 관계자들이 결국 대의와 시민을 위해 일하지 않는 민주주의 체제를 더욱 악화시켜 왔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것과 관련해 공화당이나 민주당 할 것 없이 전직 의원이나 정치인들이 1998년과 2008년 사이에 이들중 43%가 로비스트가 되었다는 것은 현실이 어떤지 짐작하고 남음이 있습니다.

제가 저자의 이 책에서 정말 탄식을 금할 수 없었던 부분은 공화당을 비롯한 우파 보수주의자들이 정부는 무조건 실패할 수 밖에 없는데, 바로 이런 인식에서 조지 W. 부시 행정부 시기에 모든 민영화와 아웃소싱을 비롯한 작업들이 이해 당사자를 제외하면 대의적으로 실패하고 고통만 안겨줬다는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어차피 정부는 실패할 수 밖에 없다는 식의 의미로 대수롭지 않게 끝내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조지 W. 부시는 재난안전청과 관련된 인사에 낙하산을 꽂아넣고 당시 W. 부시가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한 피해를 입은 뉴올리언스의 인명 구조와 피해 복구에 기민하게 대응하지 않고 후에 1000억달러 이상의 복구 자금을 투입했음에도 카지노 시설이나 호텔 같은 곳에 돈이 투입되고 생계가 곤란하거나 수입이 낮은 지역 주민의 주택 복구에는 터무니없이 투입이 되지 않은 것은 ‘정부의 상대는 국민이 아니라 기업이다’라는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던 저자의 주장의 근거였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란-콘트라 사건이 터졌던 레이건 행정부 시기에 니카라과 우파 반군 지원을 위해 미국 국내에서 모금된 돈들이 비영리단체의 계좌로 들어가 결국에는 그것을 주도한 공모자들 호주머니에 대부분 들어가는 상황, 다시 말하면 니카라과의 공산주의를 몰아내기 위해 우파 반군을 지원하기 위해 모금한 돈들이 그들이 주장했던 대로 쓰여진게 아니라 자신들의 사적인 계좌로 들어갔고, 이후 아무런 법적 책임을 지지 않은 사례는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는데요. 이것과 직접적인 관계자였던 올리버 노스와 그 관련자들에 대한 레이건 대통령 임기 말의 사면권 부여가 콘트라 사건을 정치적 전면에서 지우기 위한 결과로서 이러한 ‘모금 수탈’ 도 수면 아래로 잠긴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이 올리버 노스에 대한 자세한 행적도 콘트라 사건 자체가 비즈니스와 같은 것이 아니었나 하는 판단이 들기도 합니다.

구소련이 붕괴되어 냉전 시기가 종식되었고,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말대로 외견상 자유 민주주의의 승리로 여겨진 후, 진보주의와 좌파는 더욱더 정치와 사회 전반에 있어서 영향력을 잃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보수와 우파들이 매번 주장하는대로 진보운동과 좌파들이 해묵은 이념적 태도로 현실 상황과는 괴리된 인식을 갖고 있다고 선전을 펼치면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익 추구’와 이권 개입에 나서서 ‘고결한 보수주의자’, ‘원칙적 보수주의자’를 미국 정치에서 찾아볼 수 없게 된 것은 그것이 이상세계의 잡히지도 않는 말놀음에 불과하다 하더라도 보수주의자들이 국민과 시민들을 위하지 않고 자신들만을 위해 일하는 것은 정치와 체제 자체를 붕괴시키는 큰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반대편의 진보와 좌파의 건실한 역할 가능성을 떠나서 현재의 미국 보수주의가 ‘정치적 자정능력’이 없다는 점에서 앞으로 큰 문제로 대두될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도널드 트럼프의 당선과 포퓰리즘은 그 서막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더욱이 베트남 전쟁 상황에서 수많은 보수주의자들이 진보주의자들과 그 지지자들을 씨를 말리자고 선전한 이후부터 극단의 보수가 어떤식으로 반대쪽을 제거하려고 할지 예상할 수 있는 부분이었습니다. 현재에도 민주당의 정치 자금줄이라 볼 수 있는 미국 노동단체들의 자금지원을 막기 위해 보수 우파들이 끊임없이 노동단체를 백안시하고 악마화 시키는 것은 바로 이런 연유겠죠. 결국 자기들만 살겠다는 건데 이런 상태가 미국 시민들에게 이익이 될지는 얼핏 봐도 자명한 것이겠죠.

책을 다 읽고 나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앞서 짧게 설명해 드렸듯이, 미국의 보수주의자들은 애초에 큰 정부를 불신하고 오히려 정부를 축소시켜야 한다는 점을 이념으로 갖고 있는데, 자신들이 참여한 정부가 실패를 하더라도 어차피 정부는 더욱더 축소시키고 원자화 시켜서 모든 것을 민영화 내지는 시장에 맡기는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 판단한다면 자신들의 정부가 행한 것들이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그것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고 결국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것 아니냐’는 식의 결국 떠미는 것으로 끝날 가능성이 있어 보였습니다. 이러한 제 논점은 지난 2008년 서브프라임 사태가 발생된 이후의 시점에서도 유사했고, 현재까지 책임을 갖고 있는 자 그 어느 누구도 기소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명백해 보입니다. 또 한 가지는 ‘남아공의 자유시장론자들이 자유 시장체제에서가 아니라 IMF로 인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었으며, 여기 글에서도 나왔듯이 부자들이 자유 시장에 끌리는’ 것처럼 자유 시장을 극렬하게 신봉하는 자들이 대부분 부의 집중에 의한 부정적 부산물에 거의 관심이 없다는 측면의 판단에서 매우 우려스럽다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의 거의 끝부분에 나와있는 사이판의 사례가 앞선 저의 인식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토마스 프랭크의 역작이라고 볼 수 있는 이 책은 미국의 금권정치와 우파 주식회사의 모든 것을 담아내고 있는 것으로서, 그 의미가 상당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 많으며, 우리의 정치와 삶을 위해 진보주의 역시 존중하고, 합의의 정치가 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우리가 정치를 견제하고 반성시킬 수 있는 시민의 역량을 갖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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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의 이유 - 부와 권력이 집중되는 10가지 원리
노엄 촘스키 지음, 유강은 옮김 / 이데아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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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학자이자 사회철학자, 역사가, 정치운동가인 노엄 촘스키는 오늘날 진보주의 학자 가운데 가장 현실참여적인 지식인입니다. MIT교수로서 왕성하게 후학을 양성하고 있으면서도 시민들을 위해 정치와 사회 및 경제와 관련된 통렬한 글들을 수없이 써오고 있고, 반대편의 지식인 및 정치인들이 직간접적으로 그를 끊임없이 불편해 하는 것에는 매우 직접적인 표현 방식과 신랄한 비판 의식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의미로 불평등과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을 분석한 이 책 ‘불평등의 이유’도 그의 학자적 양심이 녹아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리에게도 미국의 ‘아메리칸 드림’은 70년대 이전부터 꽤나 알려져 있었습니다. 이 아메리칸 드림을 몇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대체로 요약해보면 개인에게 주어진 충분한 자유를 바탕으로 자신의 꿈을 위해 노력해서 사회적 성공과 경제적 풍요를 획득하는데 미국인이면 (혹은 미국 시민권자) 누구나 가능하다는 일종의 성공 이데올로기일 텐데요. 사실 이 점을 명확히 분석해보면,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에게나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고 그 개인들의 노력 여하에 따라 자신의 성공적 삶을 영위할 수 있는 환경을 보장하기 마련입니다. 헌법상의 시민에 대한 권리가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개인의 자유와 열린 사회, 경제적 풍요로움이 70년대 후반 이후부터 미국의 가치가 어떠했는지 잘 알려주는 수식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레이건 집권 이후 미국과 미국사회는 완전히 바뀌게 되는데요. 아마도 촘스키는 전면적인 정치 및 사회경제적인 급격한 변화에 이은 현재의 미국 정치와 사회에 대한 비판을 여기에 담고 있습니다. 국역된 이 책의 제목인 ‘불평등의 이유’는 불평등과 그것에 한정된 담론으로 여겨지게 만들지만 본질은 불평등 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 경제적인 전반을 두루 다루고 있다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여기에 소개된 원리라고 나오는 총 10가지의 분류는 벤담의 최대 다수의 행복에 반하는 전체 시민들의 삶과 현실 정치 및 경제적 상황과는 반하는 여러 현실들을 독자들에게 낱낱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기득권과 부유층의 극대화 된 부의 집중과 나날이 쇠퇴하고 있는 미국 민주주의의 현실, 시민 연대가 정치적으로 갈수록 무력화되고 있는 점, 역사상 두 번째 파급을 일으킨 금융화 금융업에 대한 규제 전무, 노동 조합에 대한 왜곡적 인식, 하층민과 중간층의 몰락, 국민의 정치 참여가 점차 배제되고 주변화 되는 과정 등을 각각의 인식과 결부되는 자료를 통해 촘스키 특유의 군더더기 없는 논증으로 명료하게 분석되어 있습니다. 특히 여기에는 무엇보다 미국 엘리트 계층의 대중 인식이 어떠한지 소개되어 있는데요. 전 FRB의장이었던 앨런 그리스펀은 “노동자들을 계속 불안정하게 만들면 순순히 통제된다”는 것과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복지란 흑인 남자가 정부 사무실에서 당신의 돈을 훔치는 것을 의미한다”는 등의 표현은 엘리트 계층 대부분이 대중의 경제적 안정과 평등 및 이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 확대에는 관심이 없거나 기피하며, 애초에 대중들은 소수의 엘리트 지배 정치를 따라와야 한다는 점의 인식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뒤에 선거와 관련하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대중의 분노와 불만에 기대어 선거에 당선된 것처럼 그와 같은 기존의 엘리트 정치, 정치 기반을 부정하는 포퓰리스트적 정치인의 기반이 대중의 지배층에 대한 격렬한 분노와 불만에 기대어 반대급부를 얻은 것은 우려할 만하다고 여겨집니다. 그리고 이러한 엘리트들이 민주주의를 별로 달가워 하지 않는다는 평가에 오히려 반대로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의 확대와 정치 참여를 통해 ‘선출되지 않은 권력인 기득권’과 점차 계급화에 나서고 있는 지배 엘리트에 대한 충분한 견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더 덧붙인다면, 여기에 논의되어 있는 촘스키의 분석은 사실상 미국의 많은 학자들이 연구해 왔던 것으로 특히 토마스 프랭크와 마틴 길렌스가 이에 속합니다. 또한 오바마 대통령 임기 시절의 무색무취의 정책을 비판한 많은 지식인들도 레이건 이후 시장에게 모든 것을 운영하게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기조에 따라 부유층의 부의 집중이 날로 집중되어 현재의 사회시스템적 병적 고착화가 견고해져 이것을 노동자들의 권리와 시민들의 의식이 강했던 뉴딜 시기의 사회적 공감대 시절로 되돌리기는 매우 어렵게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오바마 전 대통령이 이러한 것에 공감을 하고 있었는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정치적으로 심각한 난관이 있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의 결과로 지지 계층의 이반과 대통령에 대한 실망으로 대통령 스스로의 정치력 발휘가 임기 후반에 어려줘졌지만 이것 말고도 미국 기득권 층의 정치사회적 반대가 진보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오바마 정부의 전방위적인 좌절이 이어졌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촘스키가 불평등과 관련해서 어느 정도 불평등이 있어야 성장이 이뤄질 수 있다고 판단한 점이었습니다. 이 불평등이 경제적 불평등인지 아니면 헌법이 보장하려고 하는 시민들에 대한 정치조건적 펻등에 대한 그 반대인지는 약간 불명확하지만, 금권 정치와 극심한 빈부의 격차가 만연되어 있는 현재의 미국 현실에서 어느 정도 불평등이 성장에 대한 조건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설사 그것이 원론적인 측면의 인식이라고 하더라도 약간 이해하기는 어렵더군요. 물론 촘스키도 현실의 불평등 심화에 대한 우려를 마찬가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다만, 오늘날 금권 정치에 대해 평가하고 있는 것은 명쾌하다고 여겨졌는데요. 정부가 국민의 이익에 부합하고 정치인들이 국민을 위해 일하는 것이 민주주의가 의미하는 바인데, 사실상 정치인들이 대의를 말하면서도 교묘히 사익 추구에 나서고 있고 이들 뒤에는 수많은 로비 단체가 있다는 점, 공화당 의원들이 정부를 점차 축소하자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금권 정치의 기반을 강화하고자 하는 원인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복지와 관련해서도 개인의 선택과 자유라는 잣대를 더욱 강화하면서 복지는 그것에 반하는 것으로 확대 재생한 하는 것도 시민을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이게 만들어 사설 보험 등과 같은 민간이 시민들의 돈을 쥐어짜게 만드는 메커니즘이 그야말로 이득이기 때문일 겁니다. 이러한 점은 촘스키보다 토머스 프랭크의 글이 더 명확한데요. 전체적으로 이러한 현실 상황이 민주주의의 쇠티를 가져오고 시민들이 자신들의 기본권을 점차 영위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낳게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정치를 외면하지 말아야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되는데 우리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끝으로 촘스키의 이러한 결말은 미국의 현실 디스토피아를 어떤 매개물 없이 잘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습니다. 번역도 딱히 나무랄데가 없었고, 챕터 마다 촘스키 자신의 주장에 대한 독자들의 설득력 강화를 위해 주장의 근간이 된 원전을 소개하고 독자들의 재차 이해에 큰 도움이 되겠더군요. 참으로 ‘지성인의 의무’와 걸맞는 삶을 살고 있는 촘스키 교수가 현시대를 같이 하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의미가 있는 것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저는 3쇄가 찍힌 책을 구해 읽었는데 모쪼록 이 책이 더 많이 독자들의 손에 들어갔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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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옥스퍼드 세계사
템마 카플란 지음, 우태영 옮김 / 다른세상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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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버드 대학 출신의 저명한 비교역사학자인 템마 카플란의 인류의 민주주의 역사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 글인 ‘당신에게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를 읽었습니다. 저자인 템마 카플란은 미국 의회의 (일종의)공로상과 구겐하임 재단에서 상을 받는 등 여류 역사학자로서 꽤 인지도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이 책의 원제는 Democracy : A World History, First Edition 이며, 옥스포드 출판사에서 내놓은 역사 시리즈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저자는 우선 이 책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히고 있는데요. “민주주의는 일종의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만들어가는 과정이고 여기에 모두가 동등한 법치주의적 관점의 발전과 세계 각지의 사람들의 민주적 요구는 서로 관계되어 영향을 끼쳐왔다는 의견으로 이러한 민주주의가 14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 이후의 인문주의와 계몽주의가 발전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도 권리와 자원을 둘러싼 사람들의 민주적 요구와 행동이 분명 있어왔다는 비교역사학적인 분석과 판단이 매우 선명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이집트의 파라오가 물을 분배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 것처럼, 한정된 자원을 균등하게 나누는 것에서 아마도 민주주의적 정치적 기초가 초래한 것으로 저자는 이해하고 있는 듯 합니다.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짧았던 공화정 시기의 역사를 이처럼 해석합니다. 그리스 시대의 페리클레스는 “우리의 체제가 민주주의라고 불리는 이유는 권력이 일부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있기 때문이다”는 것은 이 시대의 법관들 또한 추첨으로 선출해 모두에게 기회로 부여된 권력으로 전무후무한 그리스 대중들의 직접 민주주의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는 뒤에 ‘직접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일이 대의 민주주의를 튼튼하게 뒷바침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요. 저도 이러한 부분에 적극적으로 동감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의 대의민주주의를 좀 더 건강한 체질로 만드는데 시민들의 직접적인 정치 참여는 매우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의 괴상한 ‘시민은 생업에 신경쓰고 정치는 전문가들이 해야된다’는 논리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과연 도움이 되었느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해 보입니다.

이후, 12세기를 거쳐 유럽의 도시들이 도시화의 시기에 들어서자 시민 계급이 다소나마 형성되고 자신들의 권리에 대해 눈뜨게 됩니다. 호국경인 크롬웰이 영국을 통치하던 시기에 릴번의 사례와 비로소 풀뿌리 민주주의의 시초라 불리우는 식민지 신대륙의 보스턴 시민들의 예도 경제활동으로 매번 뜯어가는 왕의 세금 만큼이나 자신들이 누려야 되는 권리에 눈을 뜨게 됩니다. 더욱이 프랑스 혁명 이전과 그 즈음 이후에 프랑스 여성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권리에 눈을 뜨면서 조직적으로 행동하여 정치적 요구를 주장하고 갓 독립한 13주 미국의 여성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당시 남성들이 이 여성들의 요구를 급진적이라고 격하했지만 4인의 여성이 ‘여성독립선언서’라고 불리우는 일종의 희극을 벌인것도 저자가 스스로 여자이기 때문에 여성들의 권리 운동의 미약한 역사를 여기에 담은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 자체가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권리를 갖고 있다는 원초적인 신념을 그녀 역시 믿고 있기 때문에 그런 정치 운동 등 바깥에 밀려나 있던 여성들도 자신들의 권리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독자에게 알리기 위함이 아닌가 추측해봅니다.

“모든 혁명이 격렬한 비판과 반혁명에 직면하게 되는 전환점은. 먼저 정부가 단순히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독재적인 정책들을 차용할 용의가 있는지와 관계가 있다”는 저자의 언급은 세계 양차 대전 시기에 불완전한 민주주의 체제의 정부가 자신들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나 그것을 반대하는 민중들을 억누르기 위해 손쉬운 폭력을 사용하기 시작하면 공화제와 민주주의 자체의 존립을 떠나 파멸의 길로 들어설 수 있다는 경고와 가까워 보입니다. 이 시기에는 민족주의와 제국주의적 세력이 터져 나오면서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대리 전쟁으로 불리우는 2차대전까지 터지게 되고 이러한 측면에서 종전 이후 많은 식민지들이 자신들의 생존권을 위해 정치적 독립을 요구하게 되는 것은 매우 자명해 보입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오스트리아의 전제 권력이 구체제로 회귀시키려고 했던 것과 다리 2차대전 이후는 이와는 다른 양상을 띄게 된 것이죠. 즉,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멕시코와 쿠바의 혁명가들의 숱한 일화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애초에 구체제의 상황에서 정치적 자결과 자신들의 자원을 더 이상 수탈당하지 않고 스스로 결정하고자 하는 요구와 그 권리는 앞선 민주주의의 원리와 다를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고고한 흐름인지 혁명의 기운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민주주의 체제의 수호를 부르짖었던 연합국의 이데올로기로서 이것을 뒤집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겠죠. 이에 저자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은 민주주의를 수호한다는 명분 아래 치러졌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끝으로 이렇게 세계 대전을 치루고 첨예한 냉전 시기에서 미국을 비롯한 각국의 내부 모습은 여성 참정권과 인종차별 문제 등의 시민 운동 시기였는데요.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질서를 유지하는 자들이 책임감을 갖고 모든 사람을 대한다고 확신해야만 번영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지녀야 하는지 명확히 알려주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피노체트 쿠데타에 의해 축출된 칠레 아옌데 대통령의 일례로 봤을 때도, 정당하지 않은 기득권 세력을 제대로 견제해야만 이 민주제를 지켜 낼 수 있는 것이고, 외세의 개입 또한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의 CIA가 개입한 것이 정설로 알려진 이 사건은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의 맏형이라고 자임하는 미국의 어두운 그늘 중 하나입니다. 그리고 1989년의 천안문 사태도 이와 같은데 여기에서 저자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민주주의는 거저로 얻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입니다. 결국 이렇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이 과거에 쟁취했다고 생각한 권리들을 획득하기 위해 계속해서 싸우고 있는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는 결론은 민주주의와 내 삶은 거리가 그렇게 멀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내용이 아닌가 생각 해보게 되는군요. 어쩌면 이 책의 번역된 제목이 말하고자 바가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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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리처드 J. 번스타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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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래에 읽었던 ‘악의 남용’의 저자이면서 정치철학과 사회과학 방법론의 석학인 리처드 J. 번스타인의 최근 출간된 ‘우리는 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를 일독했습니다. 저는 그의 전작인 ‘악의 남용’을 꽤 흥미롭게 접했는데요. 9.11 테러 이후 당시 부시 행정부의 이라크 악마화를 통한 정치적 이득의 셈법이라는 감춰진 진실을 파헤치려고 했다는 점에서 저에게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번스타인의 신간이 번역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얼른 구하게 되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이 책의 역자인 김선욱 선생은 숭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면서 한나아렌트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요. 마찬가지로 역자의 유사한 책인 ‘한나 아렌트의 생각’ 또한 일독을 한 상황입니다. 이 책 후기에서도 자신의 책과 번스타인의 이번 책이 유사한 측면이 있다는 언급을 내비치며, 오히려 역자 스스로 반갑게 번역에 나섰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자와 역자의 자그마한 흑백사진이 양장 겉표지에 실려 있는데요. 어떻게 보면 지금 이 책을 초판으로 구한 것이 나중에 의미가 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감상에 젖어봅니다.

지난 1975년에 세상을 떠난 한나 아렌트와 저자와의 우연한 계기의 만남의 소회가 번스타인이 ‘근본악’에 대해 탐구하는데 사상적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히만을 비롯한 나치 부역자들의 다른 사람들과 다를바 없는 그 평범한 인상에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을 발견했고 이 평범성이 주는 의미 전달 때문에 주변에 많은 동료 학자들과 여론으로부터 엄청난 공격을 받았습니다. 그녀는 이것을 ‘사실의 문제로 간주했고’ 이것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수백만의 유대인 절멸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고 분노했습니다. 저는 이 ‘악의 평범성’의 카테고리를 보면서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마음대로 확대해석하는 것이 얼마나 본질을 왜곡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저자의 말대로 이런 사소한 정치가 진리와 진실의 발견이 우선된 게 아니라 의견의 교환이 먼저라면 ‘불행하게도 사실적 진리를 부정하는 가장 성공적인 기술 가운데 하나는 사실적 진리가 단지 다른 의견일 뿐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라는 잠정적 해석이 뒤따릅니다. 마찬가지로 정치가 권력과 만나거나 권력 자체가 정치적 속성을 기반으로 그 행위 자체에 집중하는 것이라면, ‘정치적 권력’이 매우 아름답거나 진실되고 순수한 이미지로서의 최선이 아니라 기만과 이미지 정치, 거짓말에 기반하기까지 하는 것은 한나 아렌트가 일찍이 ‘정치적 기만’의 한계는 그 끝이 없다고 말한 일면에 그녀가 경험한 전체주의적 뿌리에 그러한 경험을 얻은 것이라 판단됩니다. 사실 이 책을 통해서도 한나 아렌트가 인지하는 정치에 대해 꽤 탈가치적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책의 앞선 인권도 모두에게나 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현실인식은 매우 뼈아프고, 이 ‘양도 불가능한 권리’는 오직 시민들이 구성한 정부 아래에서나 가능하다는 판단도 굳이 난민을 대입하지 않더라도 오늘날의 세계에서도 또한 과거의 세계에서도 인간 모두가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는 것은 어린 아이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녀가 ‘악으로서 무엇이든 가능했던’ 전체주의 시대에 유대인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거쳐 포르투갈로 그리고 미국으로 탈출하여 혈혈단신 이 거대한 대륙에서 무국적자로 오랫동안 거의 난민과 다름없이 ‘외부자’로 경험한 것으로 비추어 봤을 때 그녀가 진실로 오늘날의 난민 사태에 대해 어떠한 의견을 내었을지 절로 짐작이 됩니다. 비통한 심정으로 ‘타당한 정부 아래에서만 자신들의 권리를 보장 받을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은 전세계의 난민들이 고향을 박탈당하고 다른 새로운 고향을 제공받지 못한채 기한없는 수용소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는 삶을 보내야 한다는 점은 윤리적으로 불행한 일일 것입니다. 사실 인간의 이러한 권리라는 것이 한 국가가 내란이나 치열한 전쟁 상태에 처하게 된다면 아주 손쉽게 유명무실해진다는 점에서 전세계인 누구나 쉽게 그런 상태에 빠질 가능성이 있으나 기존의 국민국가주의적 범주에 다른 외부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현실은 물론 정치적 상황 하나 만으로는 판단될 수 없는 문제이긴 합니다만 앞으로 많은 사람들의 이런 주제에 대한 관심이 필요해 보이는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한나 아렌트는 이와 같은 사람에 대한, 정치에 대한 변함없는 관심으로 미국 사회에 적응을 해갔지만 기득권적인 유대인 협회에 적지 않은 반발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것은 영국이 잠정적으로 철수하려고 하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현지 팔레스타인들을 배제한 채, 유대인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계획에 반대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녀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들의 조화로운 국가를 바랐지만 유대인 지도층들은 자신들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팔레스타인들을 소수 민족으로 치부하며 ‘유대인만의 국가’를 세우려고 하는 과정이 흡사 예루살렘으로 잡혀간 아이히만이 과거에 아리아인들만의 국가를 만들려고 했던 잔악한 일들과 그 궤가 비슷해 보였습니다. 악의 전체주의 시대를 몸소 체험한 유대인들이 증오해 마지 않는 독일인들과 마찬가지로 다른 민족을 배외자들로 추방하는 것은 과연 역사는 반복되는 것인지에 대한 점고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은 아이젠하워 대통령 임기 시기에 흑인 인권 운동에 중요한 지점인 리틀록 사건에 대해 ‘정부는 사회적 편견과 차별적 관행에 개입할 권리가 없다’ 는 입장으로 연방 정부의 개입에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또한 ‘사회적 차별에 정부가 어떠한 합법적 조치도 취할 수 없다’는 주장도 보였는데요. 그녀가 나중에 이러한 입장을 철회하고 사과하기도 했습니다만 그 인종주의 때문에 고향을 탈출한 그녀가 그것을 정부가 바로 잡으려고 하는 절차를 사회적 관습 때문이니 하면 안되는 것으로 인식한 것은 저로서는 다소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그녀의 학문적 인생 전반을 놓고 보면 인종주의, 인종차별 등은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될 문제일텐데 말이죠.

이외에도 미국 독립 혁명과 헌법의 동의와 같은 민주적 기초에 대한 긍정의 태도와 더불어 “시민이 그들의 목소리가 공적으로 들려질 수 있도록 하고 그들의 정치적 삶을 날카롭게 벼리는 진정한 참여자가 되도록 하는 열망”을 자신에게 근본적으로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개인의 삶이 사적인 삶으로 그치지 않고 정치적으로도 의미있는 삶이 되게 하는 것이 우리 시민들의 의무라고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저는 그녀의 존경할 만한 많은 학문적 외침 중에서도 과거 독일 나치의 인종 말살 행위에 있어서 이것과 상관없는 보통의 독일인들과 분리하여 이해하고 자신 스스로도 직접적인 피해 당사자임에도 명확하게 분리해서 객관적으로 전범 행위, 전범 행위자들을 구별한 것은 인상적입니다. 유대인 여성으로 태어나 전체주의 시기, 2치대전의 시기에 독일을 탈출해 이방인으로서 미국에 오랫동안 적응해갔던 한나 아렌트, 그녀의 삶이 어떠했을지 가늠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런 개인적 배경으로 전혀 굽히거나 좌절하지 않고 인간의 마음에 호소하여 정치, 인권, 사회적 정의, 시민의식 등의 여러 주제들로 학문적 탐구에 힘써왔던 것은 정말 박수를 받을 만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번스타인의 이 책이 약간의 한나 아렌트의 삶을 돌아보는 의미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녀의 여러 저서들을 주제 및 시대별로 해석해 ‘우리가 왜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만 하는지’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 될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끝으로 개인적인 소망이지만 번스타인의 다른 글들이 또 번역 출판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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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도시를 살다 - 동아시아 발전주의 도시화와 핵 위험경관
이상헌 외 지음, 서울대학교 SSK동아시아도시연구단 기획 / 알트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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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 아시아연구소의 SSK동아시아연구단이 기획하여 출판한 이 책은 ‘핵발전과 그로인한 위험경관(riskscape)’을 주제로 우리나라와 일본, 중국, 대만의 핵발전 도입과 후쿠시마 사태 이후 변화된 핵발전소에 대한 인식 문제 등을 다루고 있습니다. 저는 여기의 이 글을 일독하고 나서 느낀 점은 핵발전이 갖고 있는 본질적인 위험성을 많은 자료를 통해 깊게 분석하고 이를 통해 가시적인 설득력을 보이고 있다는 긍정적인 소감이었습니다. 일본 후쿠시마 사태 이후 핵발전에 대해 쓰여진 글 가운데에서 정말 심도있는 기획이 아닌가 합니다.

1부는 우리의 위험경관이라는 주제로 한국의 핵발전소의 도입과 핵발전의 위험성과 관련하여 거버넌스적 접근 및 이를 통한 한국 사회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대해 논하며, 2부는 일본의 핵발전 도입과 원자력복합체 (nuclear industrial complex)에 대한 분석과 후쿠시마 이후 정부와 주민간의 해당 주거지 복귀와 관련하여 짚고 넘어가야할 문제와 일본 정부의 파행적인 정책, 중국 광둥성 쟝먼의 핵연료공장 반대에 나선 시민들의 행동을 담고 있으며, 동아시아 지역에서는 거의 최초로 핵발전소 건설 동결에 나선 대만의 정치적 결단과 시민 사회의 움직임을 상세히 적고 있습니다.

이 글의 큰 해석 수단이자 주제인 위험경관 (riskscape)은 “복수의 행위자들에 의해서 생산되는 위험에 대한 상징들과 구체적인 결과물들이 복잡하게 나타나는 것”이라 정의하고, 이것의 이론적 틀에는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 이론’을 잠정적으로 바탕에 두고 설명에 나섭니다. 특히 이 위험경관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요즘의 핵발전 및 핵발전소 건설 이슈일텐데요. 이것과 관련하여 여기에 수록된 글들은 핵발전이 초래할 수 있는 환경적이고 기술적 문제에 주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고 그러한 개발이익을 독점하는 원자력 카르텔에 대한 정치사회적 분석이 주요한 부분이라 볼 수 있습니다. 결국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이런 위험경관은 이익을 손에 쥐고 있는 원자력 카르텔과 관련된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적인 모습으로서 이 부분을 과연 우리 시민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고 판단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 책 스스로가 큰 도움을 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 소개되고 있는 것처럼 우리나라의 핵발전 역사는 박정희 대통령의 핵무기 개발 시도가 계기가 된 것으로, 애초에 정치군사적인 비밀 계획과 같은 개념으로 이것이 오늘날 산업 발전에 기여하는 측면의 모습보다는 한국의 원자력 마피아 내지는 카르텔의 정보 독점과 비밀화에 앞선 시기의 특수성이 기인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부분을 인정하고 옹호하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즉, 자신들만이 특수 정보를 처리할 수 있다는 해당 전문가적인 입장에서 ‘의사협회’와 같이 스스로 전문가 집단을 자처하는 특수적 요인을 배경 삼아 원전 건설과 시공에 소수의 대기업들이 과점 상태의 시장을 공유하며 이러한 이익을 원자력 업계가 기득권으로서 오랫동안 유지 및 보호해왔다는 것을 책의 1부에서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판단의 유사한 사례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드러난 여러 본질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한국의 원자력 업계가 정보 폐쇄성과 원자력이라는 특수한 문제를 사실상 제한된 범위에서 다뤄왔다는 점이 우리나라와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 다소 허용되기 어려운 부분이라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여기에 소개된 프랑스와 영국, 미국의 사례를 보더라도 시민에게 정보 공개는 기본임에도 이러한 점을 마치 국가 운영에 필요한 특수한 정보라고 여기는 듯한 업계의 폐쇄적 태도가 일본에서 재앙으로 나타난 후쿠시마 사태 이후에도 별 변화가 없는 근본적인 이유가 아닌가 합니다. 이에 여기에 참여한 학자들은 거버넌스적 해법 즉, ‘정부의 규칙과 과정을 넘어서는 새로운 의사결정구조로서 비정부 행위자들을 포함시키는’ 등의 방법과 삼척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절차적 민주주의’를 더욱 강화하여 적절하게 원자력 업계를 민주주의적 소통의 틀 안으로 편입하게 하는 등의 수단을 밝히고 있습니다. 동일한 사례는 아니겠지만 미국의 군산복합체가 정부를 상대로 막각한 로비력과 자금력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는 데, 금권 정치를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나라의 원자력 업계가 전자의 정도 만큼 물리적인 영향력이 있다고 단정하지는 못하겠지만 분명 카르텔 수준의 견고한 이해관계는 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2부에서는 일본의 현상황이 원자력복합체와 정치인과 관료, 금융기관, 건설업체로 구성된 철의 삼각구조 (Iron Triangle) 시스템이 과거 일본의 토건국가 발전론과 연계하여 꽤 견고하게 시스템이 구축된 상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과거 후쿠시마 사태 때, 내각의 수반인 총리인 간 나오토를 ‘바지사장’으로 만들 만큼 도쿄 전력의 위세는 이미 드러난 바가 있으며, 일본 정부가 절차적 민주주의와 공개적이고 투명한 여론 태도를 거의 수용하지 않고 후쿠시마와 그 주변 지역의 세슘을 비롯한 방사선 물질의 피해 규모와 실제 상태를 (실제적으로 그대로) 공개하지 않는 것은 일본 시민의 동요에 기대기 보다는 일견 정보 폐쇄로 얻는 일본 원자력 업계의 이익과 근본적으로 핵발전은 매우 안전하고 자연친화적이다라는 기존의 반복된 입장을 이 구축된 시스템 안에서 부정하기가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애초에 우라늄을 정제해 발전용 옐로우 케이크를 만드는 것 자체가 환경에 좋지 않은데 고준위 방사선 폐기물 문제를 자꾸 수면 아래로 가라 앉히려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는 바로 막대한 이익이 이들 집단에 연계되어 있기 때문일겁니다. 핵발전 자체가 발전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해서 기간 산업을 비롯한 제조업에 충분한 도움이 된다는 것은 표면적인 이유인 것이죠.

이런 후쿠시마 사태 이후로 강력한 권위주의 국가 중국에서도 광둥성의 쟝먼 핵연료공장 반대 시위를 흥미롭게 읽었는데요. 중국에서는 핵발전 자체가 정부 방침과 다름없어서 이것을 반대하는 것은 거의 이적행위와 다름없음에도 해당 주민들이 반대에 나선 것은 핵발전 위험성이 시민들에게 인지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대만과 같은 경우는 현재 건설중인 핵발전 2기에 대한 반대에 나선 것은 실로 의미있는 일인데요. 독일, 스위스와 더불어 핵발전 반대 움직임에 큰 기여를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현재 동아시아 지역의 핵발전 반경 30Km내외에 3,341만명이 거주하고 있다는 삽입된 지도는 원전의 유사사태 발생시 인명피해가 어느 정도 일지 가늠할 수 있는 자료라고 여겨집니다. 또한 중국 산둥반도의 건설중인 하이양 원전은 자연 재해로 인한 원전 붕괴시 직접적으로 우리 나라의 서울과 수도권, 충청권을 편서풍으로 직격된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스런 부분인데요. 원전의 안전 확보를 해당 국가에 희망적으로 기대야만 한다는 점은 중국과 같은 권위주의 정부를 과연 우리가 신뢰할 수 있겠느냐의 이 원초적 질문과 동시에 공기와 설계를 비롯한 건설 전반을 밀도있고 적법하게 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본격적인 산업 고도화 시기에 들어선 중국의 국내적 상황으로 봤을 때 막대한 재정을 투입하여 대체 에너지를 개발하기란 정말 요원한데요. 그래서 눈에 바로 보이고 손에 잡히는 쉬운 수단인 핵발전으로 석탄과 석유를 비롯한 수많은 화력 발전을 대체하겠다는 것은 미세먼지가 (안전을 답보할 수 없는) 방사능으로 바뀐다는 점에서 매우 우려할 만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이 점은 울리히 벡의 위험도시 이론과 연계된 산업사회의 불안전한 환경 문제와 시민 안전과 관련되어 주장할 수 있는 것으로 현재의 중국 원전 건설 사례가 매우 전자의 이론과 유사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끝으로 관련 학자들의 심도있는 논문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인인 제가 보기에도 꽤 수월하게 글이 이해되었습니다. 더욱이 주제들간에 긴밀히 연결되어 있고 설득력이 있어서 핵발전과 원자력 카르텔에 대해 좀 더 이해를 원하는 분들은 이 책을 일독하시면 도움이 되실 것 같습니다. 여러 논의들이 마음에 와 닿았지만 특히 우리 원자력 업계의 이 특수한 폐쇄성이 박정희 시대에 핵개발 역사의 유산이라는 해석을 보니 뭔가 마음이 답답해졌습니다. 당시 박정희 정권이 비밀에 핵 재처리 기술을 비롯한 무기화 개발에 나섰을 때, 미국 정부가 북한의 핵개발 시도에 불을 지필 수 있다는 것으로 반대했는데 이미 핵무기 개발 연원이 오래된 북한의 핵개발 역사를 미국 정부가 몰라서 그리 말한 것인지 아니면 알면서도 단지 돌이킬 수 없는 강력한 반대를 하기 위해 북한을 판 것인지는 양자 어떤 것이 되었든 간에 뒷맛은 씁쓸합니다. 핵무기 개발을 못해서 씁쓸한 것이 아니라 아마도 우리나라의 이 올가미 같은 지정학적 위치 때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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