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벌레
이언 매큐언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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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언 매큐언은 영국 햄프셔주 올더숏에서 스코틀랜드인이자 전직 군인이었던 부친으로 대표되는 노동자 계급의 가정에서 태어납니다. 그의 부친은 싱가포르. 독일, 리비아에서 군생활을 지속했는데 그런 연유로 그의 가족은 매큐언이 12살이 되어서야 영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그는 서퍽의 울버스톤 홀 스쿨에서 교육을 받고, 1970년에는 서섹스 대학에서 영문학 학위를 취득했으며, 노리치의 위치한 공립 연구 대학인 이스트 앵글리아 대학에서 문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는 1975년에 첫 단편소설집을 출간한 이래로 꽤 다작한 영국 작가로도 잘 알려져 있는데요. 이에 주류 문학계에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는 1997년작, '견딜 수 없는 사랑 Enduring Love"와 이듬해에 출간한 '암스테르담 Amsterdam'이 부커상을 수상함으로써, 전세계로부터 큰 명성을 얻게 됩니다. 또한 2001년에 출간된 '속죄 Atonement'역시 문단과 독자들로부터 큰 방향을 불러 일으켰는데요. 이로써 그는 2008년에 타임즈가 선정한, "1945년 이후 가장 위대한 영국 작가 50인"의 목록에 오르게 됩니다. 다만 그의 종교적 및 정치적 견해와 관련해, 여성과 동성애에 대한 사회적 탄압이라는 이슬람교의 교리에 그는 지속적으로 반대하였고, 이슬람 근본주의에 대한 가감없는 비판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긜고 2016년 6월 영국의 유럽연합 (EU) 탈퇴와 관련된, 소위 브렉시트 캠페인과 이어지는 국민 투표에 대해, 그는 영국 정치권을 향해 신랄한 비판을 가한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The Cockroach"로 지난 2019년에 출간되었고, 국내 번역은 2021년 11월에 이뤄졌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일독이 이번이 두 번째이기도 한데요. 제가 접한 그의 첫 작품은 2008년에 번역된 "체실 비치에서"였습니다. 지금도 이 작품을 눈에 잘 들어오는 서가에 놓고 지난날 읽었던 흔적들을 떠올리곤 합니다. 다시 이 작품으로 돌아와, 처음에 일독 후에 들었던 생각은 작가가 강조했던 것처럼 "인간은 언제나 자신의 지성과 반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게 벌인다"는 일관된 논점에 대한 이해하지만 받아들이기 힘든 감상이었습니다. 어떤 인간을 그 자신의 지성에 따라 구분해야 한다는 허버트 스펜서 류의 사고 방식에 물론 동의하지 않지만, 소설 후반부에 등장하는 "노인들의 인지적 한계"에 이르러 현실 정치와 국가의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결정에 다수의 시민들이 자신의 판단을 너무도 과신하거나 혹은 그렇지도 않은 불확실성의 인질로 미래를 비합리적인 위기로 몰 수 있다고 보여지는데요. 물론 이는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술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매큐언이 말하고자 하는 최근의 EU 체제에 대한 영국의 놀랄만한 '브렉시트'는 단순하지 않은 측면이 있습니다. 물론 작품에 등장하는 것처럼 미국 연방 대통령이 영국의 브렉시트를 은근 부채질 하거나, 혹은 브렉시트를 통해 EU를 손 봐줄 수 있는 기회를 작당하는 것 같이 무슨 음모처럼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었는지는 불확실해 보입니다만 이 브렉시트 자체가 당시 정치인들이 국민의 반EU 정서를 교묘히 부채질하여 이것이 결국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포퓰리즘적 선동이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특히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은 좀 더 의미심장한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는 과거에도, 1940년대에 프랑스가 무너지고 독일 나치의 공포과 유럽을 집어삼킬때도 홀로 서 있었다."는 영국인들의 소위 유럽 대륙에 대한 본질적 정서 말입니다.

그런 연유로 아마도 작가는 자신의 고귀한 총리를 '바퀴벌레'로 종(복합적인 측면에서)을 바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러한 위기에 무엇보다 바퀴벌레처럼 '페로몬'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는 본능을 마냥 실소로 치부해서는 안될 겁니다. 왜냐하면 저자가 이 페로몬이 이끄는 본능을 정치인의 노골적인 정치적 셈법에 대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당시 비상 시국이라는 상황에서 등장한 영국 총리가 과연 어떠한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는 능히 짐작이 가능한데요. 정권을 위해 다소 간의 불편한 브렉시트는 국민에게 그 책임을 떠안길 수 있다는 손쉬운 정치적 편의주의 말이죠. 설사 국가를 비이성적인 내분 상태로 만든다 해도 말입니다. 더욱이 카를 마르크스와 애덤 스미스를 구분조차 못하는 일국의 총리라는 작가의 신랄한 비꼼은 이들 엘리트 지도층이 실질적으로 어떠한 인물들인지 새삼 깨닫게 하는데요. 과거 마거릿 대처의 시대를 냉정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지 못하는 적지 않은 시민들과 이러한 역사 분열의 조건을 정치적으로 쉽게 이용하고자 하는 '권력의 무지성'은 익히 우리가 귀담아 들을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신자유주의와 포퓰리즘 그리고 위대한 결단 등의 이해타산으로 이해되는 '역방향 주의'는 "노동자에게 더 많은 세금을 걷고, 부자들에게는 더 적은 세금을 배분하여, 실로 풍요로운 세상"을 만드려고 하는 일련의 정치적 과업 등을 담고 있습니다. 이는 이웃 혈맹인 프랑스와의 전통적인 관계조차도 큰 고려나 숙고 없이, 때에 따라 이용할 수 있는 이런 작위적인 맥락을 포함하고 있는데요. 우리가 기본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체제나 이웃과의 관계 혹은 동맹과 같은 일련의 맺고 합쳐지는 과정들이 소수의 고위 계층이 원하는 이익과 그런 편취적 태도에 국익이나 모두의 이익으로 때론 쉽게 변질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변화무쌍하게 뒤집혀 버리는 정론, 그것을 둘러싼 영국 의회와 그곳에 모인 정치인들 역시 냉소의 대상이기도 한데요. 그리고 그들 주변을 맴도는 가벼운 인사들을 작가는 인정사정 없이 비꼬고 있습니다. 특히 커트 보네거트 식의 풍자로도 읽히는 극중, "교도소 만 곳을 지으면 25억이 들어온다"는 가히 휘황찬란한 논지는 오늘날 미국이 교도 행정을 민간에게 개방하게 소수의 인사들이 막대한 이득을 올리고 있는 상황과 묘하게 오버랩 되기까지 합니다.

이처럼 바퀴벌레의 페로몬적 본능, 인간이 지성에 반하는 행동을 서슴치 않고 행할 수 있는 불확실성과 오류는 서로 종이 한장 정도 차이의 구별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는 평범한 모두가 원하는 정의와 이에 동의하지 않는 소수의 엘리트 지배층의 이해 관계로 양분되는 것처럼, 단순히 신자유주의나 그것을 걸고 넘어지는 포퓰리즘 등으로 전부 설명할 수 없는 근본적인 부분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이는 영국의 사회 뿐만 아니라 대다수 국가들의 실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요. 다수의 시민들이 스스로 합리적인 사고와 결정을 내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먼저 짚기 전에, 이러한 점을 절묘하게 미리 인지하여 이들을 선동과 왜곡으로 자신의 이익으로 삼는 정치인들이 태반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데이비드 흄으로 비롯된 영국의 계몽주의가 이런 수준에 이르렀다는 작가인 매큐언의 한탄과 동시에 양심이 결여된, '정치의 비도덕적 측면'은 과연 우리 인류가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로 자임하기에는 매우 위선적인 것이 아닌가 다시금 떠올려 보게 됩니다.


-작품의 서두에, 매큐언이 남긴 얼마간의 주의 사항(?)이 절로 눈길을 끌었습니다.
"이 소설은 허구다. 이름과 인물들은 작가가 상상해낸 것이며, 현존하거나 세상을 떠난 실제 바퀴벌레와 유사점이 있다면 전적으로 우연이다."



이제야 웨일스 사투리가 분명하게 들렸다. 웨일스? 먼 서쪽에 위치한 구릉과 비가 많은, 신뢰할 수 없는 작은 지방. 짐은 자신에게 예전과 다른 지식이 있음을 깨달아가고 있었다.

바야흐로 국가가 지긋지긋한 예속에서 해방되려는 참이었다.

부와 기회의 불평등, 북과 남의 분열, 임정 정체 등 국가의 문제점은 모두 재정 흐름의 방향에서 비롯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국가와 국민을 사랑한다면 기존 질서를 뒤집어야 했다. 기존의 흐름은 오만한 지배 엘리트의 이익에만 봉사했다.

우리는 과거에도, 1940년대에 프랑스가 무너지고 독일 나치의 공포가 유럽을 집어삼킬 때도 홀로 서 있었다.

총리와 그의 동료들은 죽음이 일상인 환경에서 자랐고 위생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온당한 일이기도 하여 시체를 먹는 걸 관례로 삼았다.

그렇잖아도 영국의 역행으로 포도주와 치즈 수출에 위협을 받게 되면서 당혹감과 분노를 느끼던 라루스 대통령은 대변인을 통해 영국이 "아주 좋은 친구의 말을 의심하다니 실망스럽다"고 말했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국가는 확실한 적을 필요로 했다. 애국적인 언론인들은 프랑스에게 당당히 맞서 "우리가 잃어버린 청년들"을 위해 항변한 총리를 칭찬했다.

"세상을 흔들어놓는 건 좋은 일이지요. EU를 흔들어주세요."

하지만 공적은 삶은 굵은 윤곽으로만 그려질 뿐이다.

모든 건 법으로 금지하기 전에는 합법이라는 게 개방사회를 규정하는 원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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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경계에 선 여자 1 민음사 모던 클래식 31
마지 피어시 지음, 변용란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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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작품을 쓴 마지 피어시는 미국의 진보주의 운동가이자 페미니스트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1936년 미국 미시간주 디트로이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의 부친은 비교적 종교적 색채가 적은 인물이었으나, 반대로 모친은 정통 유대교 신자로 자신의 딸에게 정석적인 유대교도로서의 정체성을 가르쳤습니다. 여느 문학가의 유년 시절처럼 그녀 역시, 어려서부터 책을 좋아하게 되었고, 책을 통해, "거기에 다른 세상이 있고, 내가 볼 수 있는 것과 완전히 다른 모든 지평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소회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이후 미시간 대학에서 학사를 마치고, 1958년 노스웨스턴 대학에서 문학 삭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이렇게 대학에서 배움을 마친 후, 그녀는 본격적으로 시민권 운동과 신좌파적 사회 지향, 그리고 민주 사회를 위한 운동에 참여합니다. 특히, 1977년에는 여성 언론의 자유를 위한 여성 연구소 (WIFP)의 준회원이 되었는데, 이곳은 여성 간의 소통을 늘리고, 여성 기반 미디어를 대중과 연결시키는 데 힘쓰는 미국의 비영리 출판 기구입니다. 이런 그녀의 문학 작품 활동은 총 17권 이상의 시를 쓰기고 했으며, 소설도 17편을 쓰기도 했는데요. 특히 1993년에 "그, 그녀 그리고 그것 (He, She and It)"으로 아서 C. 클라크상을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그녀의 작품 전반은 페미니즘에 기반한 평등한 사회와 사회 정의, 인종 평등 등을 주제 의식으로 담고 있는데요. 특히 윌리엄 깁슨이 지금 서평을 쓰게 될 이 작품을 '사이버펑크의 발상지'로 인정한 부분은 약간 놀라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Woman on The Edge of Time"으로 지난 1976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0년 8월에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 소설은 현재 절판된 상황입니다.

마지 피어시의 이 작품을 제 북플의 읽고 싶은 책으로 올려놓고 한참 동안 어떻게 구할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요. 마침 알라딘 중고 서점에 재고가 뜨는 것을 보고 겨우 주문을 해서, 손에 쥐게 되었습니다. 우선 마지 피어시의 이 작품은 가깝지 않은 미래인 2137년의 문명과 현재 우리 세계를 인간의 권리와 사회 협력의 측면에서, 이 양자를 소위 '미러링'합니다. 여기에 전형적인 히스패닉인 여주인공인 콘수엘로 라모스, 즉 코니의 험난한 삶을 소설의 기본 배경으로 삼아, 현 사회에서 정의가 실종되었음은 물론, 가족마저도 서로에게 명백한 타인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가혹함을 구조적인 비판으로 풀어내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 작품을 통해 여실히 느꼈던 부분은 미국 사회 내에서 소위 인정이라곤 없는 공권력이 '한 사람의 굴곡진 인생'에 대한 깊은 고려 없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행정 처리로 모성애 마저 파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는데요. 더욱이 코니는 전 남편과의 이혼을 법적으로 마무리하지 못해 (서류를 정리하는데 적지 않은 돈이 들어가는 관계로) 그토록 사랑했던 클로드가 자신의 딸의 법적 양육권자로 인정받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여기에는 판사와 보호 감찰관이 클로드가 흑인이면서 맹인이기에, 그녀로 하여금 그와 동거한 사실을 수치로 여기기를 종용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옵니다. 이렇게 이 작품 전체에는 미국 사회의 뿌리 깊은 인종주의가 가감 없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주인공인 코니는 그야말로 굴곡진 인생을 갖고 있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멕시코 계통의 히스패닉으로 미국의 사회 피라미드에서 가장 밑의 계층을 차지하는 사람입니다. 더욱이 그녀에게 있어 앞선 두 번의 결혼(혹은 사실혼 상태)은 사실상 실패였고, 그녀의 유일한 자식인 앤젤리나는 당국에 의해 강제로 생판 모르는 백인 가정에 양육 위탁되었습니다. 물론 이렇게 된 연유에는 마약 전과와 알콜 문제로 인한 폭력이 주된 원인이 되었는데요. 아런 과오에 대해 그녀는 끊임없이 반성을 하고 있고 스스로를 여전히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백인 남자들이 히스패닉과 흑인, 그리고 아시안 여성들의 섹스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적나라한 해석과 자신의 친오빠의 딸인 돌리가 자신을 배신하고 강제로 정신 병원에 입원시키게 되었을 때, 이 주립 정신 병원이라는 곳이 불법적인 인권 침해와 당국에 허가를 받지 않은 각종 인체 실험 및 입원된 환자의 죽음 마저도 그 사망 원인을 서류에 적시해놓기 위해, 무조건 부검한다는 설정은 이것이 실제인지 상상속의 산물인지 기시감의 혼란을 느끼기도 했는데요. 이런 와중에 코니는 매우 이상하면서 특별한 체험을 하게 됩니다.

이미 서두에서 저는 윌리엄 깁슨이 마지 피어시의 이 작품을 사이버펑크의 시작점이라고 언급했다는 점을 인용하기도 했는데요.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강제로 입원하게 된 정신 병원에서 코니는 먼 미래로 육신과 함께 일종의 전이(轉移)를 매개로 놀라울 만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곳의 문명 세계는 2137년의 어느 시간으로 그녀를 이끈 사람은 루시엔테라는 식물 유전학자입니다. 이 시기의 세계는 우리가 익히 경험하고 있는 "화폐 경제 시스템"을 퇴출시켰고, 삶을 위한 여러 제반 생산을 자동화와 공동 생산으로 대체했습니다. 또한 사회 보존에 있어 마찬가지로 공동 육아 시스템 및 체제 유지를 위한 공동체의 참여 및 일종의 추첨 민주주의의 요소를 제도로서 채택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세계를 조직했습니다. 다만 이들이 현존하는 '해빙기'의 시대가 지구 온난화가 원인인지 아니면 부분적 혹은 인류 종말의 핵전쟁으로 인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과거 유럽의 문화적 유산이 더이상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으로 보아) 어느 시점에서 지구 생태계의 변화도 있었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런 연유로 자신들은 그때 그때 필요한 것을 생산하고 부족한 것은 소규모 무역을 통해 충당한다는 일련의 설정들은 백인들이 도달하기 전, 북아메리카 대륙의 아메리카 인디언의 극히 자연 친화적인 문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렇게 1권의 주된 서사는 여주인공 코니가 현재의 엄혹한 세계와 미래인 2137년의 시대를 넘나들며, 작가는 우리에게 현재의 우리가 2137년에 그리고 있는 '타인과 타인과의 신뢰'와 공동체적 가치를 단지 이상 따위가 아닌 실질적으로 이뤄낼 수 있을지를 오히려 되묻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2137년 이전에 정세를 오판한 어느 강대국의 핵전쟁으로 시발된 인류 전체 문명의 궤멸 가능성이 더 가능성이 높다고 믿고 있습니다만, 그럼에도 코니가 자신의 삶과 그녀가 속한 세계에 대한 통찰을 바탕으로 각성을 하게 되고 그런 그녀와 같은 사람이 더욱 많아진다면 불행한 다음 대전은 어쩌면 한낱 머릿속의 걱정으로 끝날 수도 있을 겁니다. 물론 이것은 너무 나간 생각이고 이 세계가 단순한 평행 세계가 아니라면 2권의 내용은 더욱 흥미진진하리라 예상됩니다.




그들은 병원에 입원하는 것을 꺼리는 태도가 정신병의 징후라고 말하며,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순환 논법을 적용해 사람을 병들었다고 가정했다.

"고모는 자신을 미워하고 그 재주를 미워하는 거야. 나는 그런 온갖 재주를 미워하지 않는 여자는 만나 본적 없어."

그녀 역시 난소가 적출되었다. 낙태 후 에디에게 맞아 하혈했을 때 찾아간 메트로폴리탄 병원에서 그들은 그녀의 자궁을 적출했다. 불필요한 일이었는데도 그들이 자궁을 완전히 적출한 이유는 담당 레지던트가 실습을 원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파른 현관 층계를 오르며 코니는 자신이 원했던 건 어머니의 인정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보기에 당신은 적잖은 아픔과 상처와 억눌린 분노를 지녔지만 천성이 착하고 타인에게 마음을 활짝 열고 있는 존재예요."

"당연히 우리도 짝을 짓죠. 하지만 돈을 위한 것도 아니고, 생계를 위한 것도 아니에요. 사랑, 쾌락, 위안을 위한 것이고, 습관 호기심, 욕망의 발로예요. 당신도 그렇지 않아요?"

인류가 자멸 끝에 이제 암흑의 시대로 되돌아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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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적 순간 - 역사로 미래를 전망하다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95
강원국 외 지음 / 스리체어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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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저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강원국 작가는 2000년 청와대 공보수석실 행정관, 2003년 대변인실 행정관을 거쳐, 2004년부터 참여정부 임기 말까지 노무현 대통령 연설담당 비서관으로 일했습니다. 현재는 소통할 수 있는 말과 글을 위해 고민하고 있으며, 또한 전북대학교 기초교양교육원 초빙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진보적 사회학자이기도 한 김동춘 교수는, 특히 과거 한국 현대사에서의 독재 폭력과 냉전 이데올로기적 사고, 그로인한 무고한 희생들을 다루면서, 한국 정치가 나아갈 길에 천칙하고 있습니다. 특히 그의 논저 중, "자유라는 화두", "근대의 그늘". "전쟁과 사회" 등은 그의 사상을 대표적으로 드러내는 글이기도 합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최근에 출간한, 한국 사회의 "시험 능력주의"에 대한 비판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는데요. 그런 연유로 어떤 언론에서는 이런 그를 단순한 교수로 취급할 수 없다고 평가하기도 했습니다.

숙명여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홍성수 교수는 한국여성민우회 법 부문 자문위원이면서 페미니스트를 지향하고 있는 학자이기도 한데요. 특히 그는 성소수자들의 인권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고 시민들의 인권 문제에 있어서도 지속적인 발언을 해오고 있습니다. SNS를 통한 사회적 발언의 활발한 활동은 그를 다른 강단 지식인과는 또 다른 의미의 대중 지식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박재필 나라스페이스 대표는 과거 고등학교 시절의 열망을 담아 대학에서 '세티'라는 인공위성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는 대학 졸업 후에 '큐브 위성'의 상업화라는 목표로 세계 시장으로 진출하려는 스타트 업의 대표가 되었습니다. 또한 그는소형 인공 위성의 기술적 집약을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이런 노력들은 국위 선양에도 얼마간 기여하는 활동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대두될 우주 개발과 우주 산업 전반이 우리 나라에게 중요해질 것이라는 점은 모두가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을 겁니다.

여기의 5가지 주제의 짧은 글들은 우리 나라가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일종의 제언들을 담았습니다. 우선 대통령의 현란한 연설만으로는 정치가 합리적으로 이행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시작하는 강원국 작가의 글은 "민주주의는 말의 정치"라는 서두의 첨언과 상당히 대치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정치의 여러 문제들 가운데 서로를 명확한 적으로 인식하는 '극단화'는 정치 전반을 충분히 병들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에 누군가는 '회색주의자'라는 오명을 뒤집어 쓰더라도 대립되는 양자가 그 와중에 대화나 합의를 도출할 수 있도록 설득의 언어가 시급한 시점인데요. 이것은 달리 말하면 정치에 있어 최소한의 금도가 사라진 시대를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급격한 미디어의 변화, 말이 서로를 공격하는 무기가 되는 시대에서 과연 정치란 무엇인가를 우리는 끊임없이 되묻기도 합니다. 또한 정치적 언어의 변질과 정치 체제 전반의 왜곡은 우리 민주주의를 어디로 이끌지도 이 점도 매우 궁금합니다. 


그리고 헌법학자는 시민의 권리, 혹은 호혜적 평등과 같은 침해 받지 않는 기본권을 사회가 마땅히 이를 수용해야 된다고 운을 뗍니다. 여기에 법은 말 그대로 '법학'으로서의 학문적 접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도 시민의 정치적 의사를 포함한 보편적 권리 요구와도 관계가 깊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여러 자유에 대한 논법도 이러한 맥락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여기 한 명의 법학자는 동등한 시민의 권리로서, 사회적 약자이기도 한 성소수자들의 차별금지법을 우리 사회가 마련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다만 가부장적 맥락의 성역할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시민들이 여전히 많은 실정이지만 그럼에도 이들 소수자의 권리 역시 우리가 어떠한 편견 없이 더 나은 사회를 위해 노력할 필요가 있는 것은 분명한데요. 이 차별금지법의 제안은 과거 노무현 정부때 개념화 되기는 했지만 20여년이 지난 지금 시점에서 시민들의 성숙도도 깊어졌고, 또한 전세계적으로도 이 차별금지법에 대한 공감대가 나날이 확산되기도 했습니다. 결국 법을 깊게 연구한 학자 뿐만 아니라, 이 법이 모두를 평등하고 자유롭게 하는 원초적 기반임을 우리가 인식하고,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시민이 같은 시민을 차별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홍교수의 언급대로 이런 문제에 보수적인 일본도 이 차별금지법에 대해 한 첫걸음을 내디뎠다고 볼 수 있기에 이제 우리도 정치권, 시민들 그리고 지식인들이 이 평등한 조치와 관련해 심도 있는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치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민주화를 구축했습니다. 그야말로 헌법이 실질적으로 민주주의를 소위 보필하는 체제가 도래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럼에도 과거의 비극적인 제주 4.3 사건과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일부 인사들이 잘못된 판단과 또한 정치적 이익을 노리고 이를 왜곡하고 있습니다. 저는 다수의 시민들이 이런 자들을 걸러낼 수 있는 명확한 도덕적 분별력과 모두를 위한 정치가 과연 무엇인지에 대해 명확히 인식하고, 애써 이룩한 민주주의가 거짓 선동에 병들지 않기 위한 노력이 분명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분별 있는 다원주의는 그만큼 민주주의에서 중요하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로버트 달이 왜 이러한 주제에 평생의 노력을 기울였는지 어느 정도 짐작이 됩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과거 냉전 이데올로기의 유산인'좌파 빨갱이'라는 유사 매카시즘을 여전히 일소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좌파 빨갱이는 표현의 자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저 저열한 자기 본성을 드러내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민주주의는 시민들 간의 자유로운 정치적 토론과 다른 정치적 지향을 가진 세력들이 서로를 균형적인 파트너로 인식하고, 이런 기반이 된 체제를 마땅히 지향할 수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냉전 이데올로기 따위가 민주주의에 우선하는 사회는 (자본주의식으로) 모두에게 이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 싶은데요. 그런 의미에서 여기에 등장하는 '디지털 매카시즘'에 대한 우리의 면밀한 감시가 무엇보다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매일 아침 신문 1면을 장식하는 정치인의 말과 신념은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설득할 때 상대가 어느 정도의 수용성을 가졌는지를 면밀히 살피면 좋을 것 같다. 누군가에게 타인의 생각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건 타인을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와는 다른 역사와 마음이 켜켜이 쌓여서다.

오히려 다른 사람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 같은 편끼리 뭉치는 것, 무리가 아니면 배척하는 것을 꾸준히 학습했다.

민주주의는 시민의 동의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체제다. 다시 말해, 정치인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는 말을 통해 시민을 설득하는 것이다.

차별금지법은 "당신이 어떤 속성을 가졌던, 지위가 무엇이건 간에 사회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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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스퀘어 을유세계문학전집 21
헨리 제임스 지음, 유명숙 옮김 / 을유문화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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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제임스는 미국 뉴욕 주의 올버니 출신의 은행가이자 투자자였던 부친과 오래전 뉴욕시에 정착했던 부유한 가문 출신인 모친 사이에서 자라납니다. 그의 양친은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이었습니다. 그가 한 살이 되기 전에 그의 부친은 뉴욕의 워싱턴 스퀘어를 마주보는 워싱턴 플레이스에 있던 집을 처분하고, 가족 전부를 한동안 영국 윈저 그레이트 파크에 있는 별장으로 이주시킵니다. 가족은 1845년에 뉴욕으로 돌아왔고, 헨리는 올버니에 있는 친할머니 집과 뉴욕 맨해튼에 있던 본가 사이에서 어린 시절 대부분을 보내게 됩니다. 이후 1855년과 1860년 사이에 제임스 가문은 아버지의 즉흥적인 관심과 출판 사업에 따라 런던, 파리, 제네바, 불로뉴 쉬르메르, 본 등을 여행하다 자금이 부족해지면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1862년에 비로소 헨리는 정규 교육 과정으로 하버드 법학대학원에 다녔으나, 곧 스스로 자신이 법 공부에 소질이 없다는 걸 깨닫게 됩니다. 그런 연유로 보스턴에서 그는 작가이자 비평가였던 윌리엄 딘 하월스와 마찬가지로 작가이자 평론가였던 찰스 엘리엇 노턴과 교류를 지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1871년에 이르러 비로소 그의 첫 단편 소설인 '부단한 경계 Watch and Ward'가 출간됩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문학적 명성은 당시 미국 독자들뿐만 아니라, 유럽의 유구한 독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요. 특히나 '리얼리즘 소설'의 개척자로 불리며 당시 소설의 구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했다는 평가를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그의 개인적인 생활에서 주위에 지속적인 압박에도 불구하고 끝내 평범한 결혼에는 이르지 못하게 됩니다. 언뜻 쉽게 믿지 못할 내용이기도 하지만 그가 섹스에 대한 신경질적인 두려움이 있었다는 평가는 실로 충격이었는데요. 그럼에도 주변에 많은 여성 지인들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언어로 서신을 비롯한 간접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부분은 그에 대해 뭔가 아이러니한 감정을 갖게 합니다. 그런 연유로 그의 작품에서 대체로 비극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사랑의 본질은 어쩌면 이런 배경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됩니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 중,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 장편은 원제, "Washington Square"로 지난 1880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9년 6월 번역되었고, 제가 구입한 판본은 2019년의 초판 2쇄였습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인 '캐서린'은 의사이기도 한 부유한 아버지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자라납니다. (캐서린이라는 여주인공의 작명은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실제 여동생의 이름과 동일한 것이기도 합니다) 특히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제외한다면 그녀 삶이 크게 굴곡 없는 원만한 것이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그녀는 아버지에게 있어 대체로 순종적인 딸이었고, 한 집에서 살고 있는 '미망인'인 둘째 고모와도 별반 갈등 없이 잘 지내고 있는 편이었습니다. 그러다 캐서린은 사촌의 결혼 상대였던 남자의 종형제인 모리스 타운젠드라는 청년을 우연히 파티에서 만나게 되는데요. 작가인 헨리 제임스의 특별한 언급대로 이 타운젠드라는 청년은 남의 '환심을 사는데' 탁월한 재주를 갖고 있는 일종의 나르시시즘이 가미된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작품의 스토리 전개에 있어 모리스의 외모에 대한 일관된 찬사는 여러 곳에서 보이기도 하는데요. 그만큼 그는 외모와 화술에 대해 남다른 자신감을 갖고 있는 캐릭터이기도 합니다. 이런 그와는 상반되게 여자로서 적절한 매력이 보이지 않아, 작중에서 거의 '못생겼다'고 언급되기까지 하는 캐서린에게 직접적인 애정을 내비치는 모리스는 어느 정도 숨겨진 의도가 있었는데요. 그는 얼마간의 돈을 유럽 여행과 자신을 위해 거의 소모했고, 혼자 자식들을 키우는 친누나의 집에서 얹혀 살고 있는 실정이었는데요. 그런 가운데 우연히 관심을 가진 캐서린이라는 여자가 작고한 모친로부터 거의 1만 달러에 이르는 유산을 상속 받았고 더불어 여전히 왕성한 진료를 통해 수입을 올리고 있는 부친의 존재, 그리고 미망인인 여동생마저도 스스럼 없이, 건사할 수 있을 정도로 유복한 집안이라는 설정은 어느 정도 극의 전개를 예측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평범한 외모의 또래 청년들과 대비되는 화려한 외모와 물 흐르듯 막히지 않는 언변을 갖고 있던 모리스는 그야말로 '본능적인 감각'으로 캐서린에게 돈 냄새를 맡게 됩니다. "처음부터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는 것처럼 쉽게 사랑을 언급하는 남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오래된 금언은 보통 여지가 없이 들어맞기 마련인데요. 캐서린에 대한 모리스의 일방적인 관심과 애정 표현은 이러한 것에 달리 면역이 없었던 순수한 처녀의 눈이 멀게 되는데요. 연애 경험이 전무한 평범한 여성이 오지랖 넓은 고모라는 캐릭터와 만나 사건의 전개는 급격한 양상을 보이게 됩니다. 이 대목과 관련해, 작중 '페니먼 부인'에 대한 헨리 제임스의 인물 조성이 정말 탁월하다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왜냐하면 남편을 잃고 그저 소일 하는 미망인이 조카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이 커플 사이에서 적극적인 '연애 거간꾼'의 역할을 자임하면서도 그 결과가 분명 조카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을 해볼 수 있음에도 그것에 전혀 아랑곳 하지 않는 '천연의 인물'을 창조해 낸 것은 한편으론 작가의 역량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모리스 타운젠드가 이 페니먼 부인과의 대화에서 언급한 '도덕적 편안함'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금 고찰해 보게 되는데요. 사실상 자신의 안락이라는 목적을 위해, 당시 나날이 경제적으로 팽창하고 있던 신생 국가 미국의 사회적 단초를 어떻게 보면 앞선 욕망과 연계한 것이기도 한 데요. 이는 사익에 기반한 행위 자체에 있어 기본적인 양심의 견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일종의 자기 합리화로도 읽혔습니다. 그래서 이 '도덕적 편안함'이라는 작품을 관통하는 비판적 주제 의식이 이처럼 의미심장한 것인데요. 이처럼 그가 관심을 갖고 있는 여인의 부유한 부친이라는 그다지 매혹적이 않은 문제와 더불어, 마치 먹잇감처럼 노리고 있는 오로지 재산에 대한 관심 뿐인 그 지독한 이기심이 모리스라는 인간 자체와 비판적 이성을 결여한 속물 근성의 페니먼 부인과 그리고 그를 처음부터 경계했지만 결국 자신의 어리석음 만을 폭로한 부유한 의사는 결국 나중에 있을 복선을 위한, 점층된 갈등의 근본적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즉 이 세 인물을 여주인공인 캐서린에게 절묘하게 배치하여 일정 부분 어두운 시대상과 그로 인한 인간 관계의 본질을 작가 자신의 회의적인 시선으로 명확히 드러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고래로 사랑을 일종의 조건으로 삼아 순진한 사람을 소위 '자신이 원하는 감정의 노예'로 만드는 의도 자체는 그 당사자에게는 마치 지옥과도 같은 경험을 초래할 겁니다. 다만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는 주변인들에게 자신과는 일절 상관없는 그저 인생의 귀중한 경험 정도로 관심을 끊을지도 모르겠는데요. 진정한 사랑도 아닌, 노골적인 이익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위장된 사랑이, 한 사람의 삶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물론, 그 사람을 둘러싼 환경과 그 주변의 관계에서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완연히 다른 사람으로 변질될 수 있음을 이 작품은 이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더욱이 이 작품에서 저 사랑 놀음을 입에 달고 있는 모리스뿐만 아니라, 그녀의 잘난 아버지 역시 이러한 파탄에 한 발을 걸치고 있기도 한 데요. 특히 이 시대에서 누구보다 고도로 교육 받은 지성인이자 의사인 이 사람은, 많은 시간을 자신의 서재에서 보내면서 스스로의 삶과 인간 본성 자체에 내밀한 천착, 그리고 그런 사유를 통해 세계를 직관한 그가, 딸을 거의 '놀이 상대'로 밖에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은 실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는데요. 이후 모리스를 향한 자신의 사랑을 굳건히 하고 그런 책임을 다하고자 하는 자신의 딸을, 경멸하고 과소 평가하고 비웃는 과정이 점차 심화되면서 앞선 언급한 그의 장점들이 거의 쓸모가 없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합니다. 자신의 예측대로 순진한 딸을 돈으로 여기고 접근한 모리스의 의도를 간파했으면서도 일생에 처음 경험한 그 '사랑'에 인질이 된 딸을 아버지로서, 자애하고 사려 깊은 방법을 거의 도외시한 채, 그저 강압적인 언설과 비하와 모멸감을 가하는 방식으로 일관된 것은 헨리 제임스 특유의 인간에 대한 회의적 분석으로도 읽히게 됩니다. 특히 딸과 함께한 계산적인 유럽 외유에서, 캐서린을 향한 성마른 태도와 일방적인 언사, 그리고 비꼼과 비난은 그녀로 하여금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상황에서 그의 보호를 즐길 권리가 없다"는 식으로 자포자기하게 만듭니다. 이 대목에서 실로 비정한 부정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소위 자신의 의사와 그 의지 만을 중요하게 여기는 실로 배려와 성찰이 결여된, 근본적으로 영악한 인간의 말로는 이처럼 극중에서 어느 정도는 예견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결국 딸의 진정한 행복이 아닌 자신의 주장과 의지를 관철시키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승리했다는 얄팍한 감정에만 취해 행동한 결과가 과연 어떠했는지는 후반부에 명확히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요구만 강압적이었던 아버지와 그녀의 재산에만 관심이 있었던 위선자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캐서린의 삶은 완전히 뒤바뀌게 됩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녀가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고 봐야 하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원초적인 삶의 열정과 충만한 애정에서 완전히 배제된 채, 주변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존재감이 옅어진다는 것은 그 자체로도 슬픈 일일 겁니다. 캐서린이 항유하고자 했던 아주 평범한 삶의 열망과 누군가를 사랑하고 때론 사랑 받고 싶어하는 평범한 기대가 앞선 두 사람에 의해 완전히 부서졌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작가인 헨리 제임스는 결국 이 작품을 통해, 독자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남기고 싶었는지는 다소 불분명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극이 전개될수록 제가 기대했던 여주인공의 행로가 완전히 예상을 벗어나 개인적으로는 꽤나 복잡한 생각이 들기도 했는데요. 어떤 수사를 들이밀던 간에, 순수한 사람의 미래를 파괴하기에 이른 초기 자본주의적 근대로 대표 되는 이기심과 바로 이런 인물들과의 폭력적 교차는 단지 소설의 얄팍한 주제로 치부될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게 진심이 결여된 행동이 타인의 인생에 부지불식간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섬뜩한 교훈을 우리에게 안겨줍니다. 저는 이 작품을 일독하고 나서, 일부 독자들이 다소 답답하게 여긴 여주인공의 체념과 가까운 선택에 쉽게 감정이입을 할 수 없었다는 후기들을 접하기도 했는데요. 아마도 이것은 우리가 스스로의 삶 속에서 사랑을 매개로 한 관계 자체에 그만큼 더 영악해졌거나, 아니면 사람과 사람 사이에 충분히 고민해야만 하는 '진정성'에 대해 역시 대수롭지 않게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결국 이는 흔한 남녀 사이에서 온전치 않은 애정이 그릇된 의도대로 한 사람의 일생에서 지울 수 없는 상흔으로 남게 되었는데요. 이 작품을 그저 에밀 졸라 류의 인간 세계의 극단적인 희극 정도로 치부해야 될지는 모르겠지만 여기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인간의 회의적이고 음울한 본성 자체에 대한 경고는 결코 허위나 거짓 따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캐서린을 두고 이어지는 각기 두 캐릭터의 이기적인 본성과 그로 인한 비뚤어진 욕망, 그리고 그것이 배경이 된 작위적인 결과물 자체는 작가의 일관된 주제 의식이기도 한, 내재적인 회의주의와 극사실주의와 맞물려, 인간의 불확실성과 사람을 도구적 이익의 수단으로 추락시킨 왜곡된 사회 풍조를 이 작품에서 여실히 드러낸 것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스포일러가 될까봐, 가급적 언급하지 않으려 했지만, 캐서린과 그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서로를 향해 건네는 후반부의 그 의미심장한 대화는 아마도 제 기억에 오래 남을 것 같습니다.      






모리스 타운젠드는 강렬한 에너지가 느껴지는 인물로, 놀라운 풍자의 힘을 가졌고, 날카롭고, 단호하고, 똑똑한 성격의 젊은이라 요령 있게 대처해야 할 것 같았다.

그녀가 물려받은 재산은 두 명의 분별있는 사람을 먹여 살리기에 충분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고, 빈털터리라 하더라도 괜찮은 남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구혼자가 있다면 그의 개인적 자질로 평가할 용의가 있었다.

모리스는 사양을 모르는 젊은이였고, 보르도산 적포도주가 고급이라는 사실에 충분히 고무되었다.

"쉽게 단정한 것이 아니란다. 30년간 관찰로 세월을 보낸 결과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거야. 그런 판단을 하루 저녁에 할 수 있기 위해 나는 서재에서 평생을 보냈다."

그녀는 허세를 부릴 재주가 없었고, 타운젠드가 그녀에게 보이는 관심에 아버지가 반대하는 눈길을 보낸다고 느끼자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처럼 보이는 우연이 불편할 따름이었다.

"모리스 타운젠드가 향락을 위해 자기 재산을 써버렸다면, 네 재산도 써버릴 것이라고 믿을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본다."

고모가 1년 내내 그녀의 연인과 많은 시간을 보냈다는 사실이 그녀의 마음을 짓눌렀고, 그 젊은이를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는 양 그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것을 듣는 일도 유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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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본 미국 정치 - 선거와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
박홍민.국승민 지음 / 오름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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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논저의 공저자 중 한 사람인 박홍민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석사를 마칩니다. 이후 미국 워싱턴 대학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앨라배마 주립 대학을 거쳐, 현재는 위스콘신 주립 대학에서 정치학과 부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미국의 정치제도와 미의회 구조, 극단화 된 당파 정치 등에 큰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이에 그는 미국 하원과 상원에 대한 여러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저자 중 한 사람인 국승민 교수는 서울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리고 도미하여 캘리포니아 대학교, 샌디에이고 (UCSD)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존 국으로도 알려져 있는데요. 현재 그는 미시간 주립 대학의 정치학과 조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국 교수는 미국 주택 임대 시장에서의 주거 분리에 대한 영속화와 공공 정책이 어떻게 인종 및 성 불평등을 강화하는지, 그리고 경제적 불평등이 어떻게 인종에서의 양극화를 심화시키는지 연구를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선거와 양극화 그리고 민주주의"라는 부제와 함께, 지난 2023년 9월 국내에 출간되었습니다.

모두가 익히 알다시피, 미국은 우리에게 있어 뗄레야 뗄 수 없는 동맹 관계이자, 외교 전반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치는 패권 국가이기도 합니다. 이에 두 공저자들은 우리가 미국의 국내 정치를 면밀히 이해하지 않고서는 이 미국이라는 나라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주장을 서두에서 밝히고 있는데요. 이와 동시에 "미국은 완벽에 가까운 선진 민주주의가 아니다."라는 거의 진실과 다름없는 분석을 내리면서, 현재 미국 정치가 얼마나 심각한 병폐를 떠안고 있는지 이어지는 논증을 통해, 증명되고 있었습니다.

연방 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을 선출하는 미국의 선거제도는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상이한 측면이 존재합니다. 일종의 간접 선출이라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의회에서의 상하원 양원과 특히 연방대법원의 지위는 미국 정치의 특수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더욱이 미국은 선거에 있어서 만큼은 선거 운동과 정치 자금에 대해선 거의 예외적으로 제한이 없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현재 미국 정치를 인식하는 소위 '금권 정치'에 대한 폭넓은 인식은 의회에 로비하는 로비스트들의 존재와 선거를 통해 막대한 돈이 오고가는 그런 시스템으로 이해해 볼 수 있는데요. 특히 이 글의 전반적인 논증 가운데에서 제가 놀란 부분은 상당수의 미국인들이 "'돈'은 부정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의견을 표시하는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라는 선거에서의 막대한 자금 투입에 대해 별반 거부감이 없이 언급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세계 민주주의의 동향과 그것을 나타내는 현격한 지표에 있어, 지난 2016년 미국 대선은 특별히 중요한 선거이기도 했습니다. 극단적인 인종주의자이자 전형적인 포퓰리스트가 마치 하늘에서 떨어진 듯, 미국의 기존 정치 무대에 등장한 것도 충격이거니와, 그동안 소소한 문제는 분명 있었지만 그럼에도 최소한의 정치적 건전성을 답보하고 있었던 미국 양당 정치가 단순히 공화당이라는 일개 정당이 극단주의적 경향을 띠는 것을 넘어, 로버트 B. 탈리스의 분석대로 이 당(공화당)이 "트럼프에 의해 철저히 장악되었다"는 점으로 대변되는 양상은 현 미국 정치의 암울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저는 무엇보다 공당(共黨)이라는 공화당이 스스로 내부에서의 자정능력을 여실히 잃었다는 점을 무엇보다 비판하고 싶습니다.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이 시대의 미국 민주주의는 소수의 극단적 포퓰리즘에 명확히 포획되었다는 점이 바로 본질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또한 반대로 이 글 3장에서 분석대는 바와 같이, 민주당은 1980년대 이후, 고학력 전문직 종사자와 소수 인종의 연합체로 변질되었는데요. 제가 폭스 뉴스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레거시 미디어가 주구장창 미국 민주당을 저렇게 공격하는 연유에는 소위 소수 특권 정당이라는 정치적 서사가 그 배경에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과거 민주당의 전통대로 이 당은 더 많이 평범한 노동자들을 대변해야 했지만 오늘날 정치적 지지 기반의 변화는 그만큼 녹록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의 분석대로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하고, 조 바이든이 연방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던 건, 평범한 미국 중산층이 다시 민주당 대선 후보에 표를 던진 결과로써, 그 의미하는 바가 가볍지 않다고 볼 수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이런 양당 정치의 궤멸적 분화라는 현실 투영보다는 주 의회를 장악한 정당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선거 제도를 주도하는 '게리멘더링'과 다수의 미국 유권자들이 자신이 정당한 유권자임을 증명하는 '유권자 등록 제도 voter registration'가 사실상 투표를 제약하는 행정 처분으로 기능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내용은 지금도 명확하게 이해되지 않았는데요. 특히 후자의 선거인명부 등록을 위한 신분 등록 제도가 흑인과 저소득층에게 분명히 번거롭고 불리한 측면이 있어, 각 주에서 공화당이 이를 정치적으로 조장해 왔다는 증거들이 드러나는 부분은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세계 민주주의의 맏형'이라고 불리우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어떻게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조차 제대로 처리 못하는 지에 대해 느끼는 깊은 실망감과 그런 환멸이라고 해야 할까요. 단순히 복잡한 다인종 체계와 지역에 따라 행정 기반이 미약하다는 변명 따위로는 쉽게 넘어갈 수 없는 지점이었습니다. 저는 이 언급에서 현재 미국 내부에 유색 인종을 향한 뿌리 깊은 인종주의를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는데요. 정치적 이익 만을 위해 미국 공화당이 주도하는 백인 유권자들이 아닌 같은 미국 시민권을 가진 유색 인종들의 투표를 사실상 방해하는 역겨운 행태는 국가 내부의 병폐가 어느 지경에 이르렀는지 마찬가지로 충분히 이해하게 됩니다.  

더욱이 양당을 견고하게 지지하는 미국 시민들의 극단적 정치 성향은 이미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2020년 대선에서 40퍼센트에 이르는 공화당 지지자들이 당시의 선거가 '부정 선거'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는 점도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다가왔는데요. 아마도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극단적 포퓰리스트인 도널드 트럼프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향해, 의회 불법 점거를 대놓고 획책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자가 어떠한 기소도 없이 공화당의 다음 대선 후보로 나서고 있는 현실은 미국 민주주의가 얼마나 자정 능력을 잃어버린 상황인지 이를 반증한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또한 12장에서 저자들은 앞선 정치적 양극화에 대한 증거로써, 많은 미국인들이, "감정적 양극화가 더 심해져서 객관적인 사실에 대한 해석조차도 자기 정당이 선호하는 방향에 부합하게 왜곡시키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비판하고 있었는데요. 이것은 작금의 우리 정치에 있어서도 별반 다를 게 없는 모습이라고 여겨집니다. 특히 사실을 더욱 비틀어서 정치 논리화 하는 일련의 궤변적 논법들은 평론가들 뿐만 아니라 일반 지식인들에게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부끄러운 행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연방대법원의 문제도 꼬집지 않을 수 없는데요. 익히 알려진 바대로 과거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은 자신의 주도적인 정책을 위해 연방대법원에 개입하고자 했으나, 같은 당 의원들의 반대로 무산된 바가 있습니다. 현재 9인의 대법관으로 구성된 연방대법원은 본디 미국 사법 제도가 판사의 정치적 결정이 중요한 맥락으로 작용하는 판례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대륙법 체계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조직에서 대법관들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사회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판결이 다수 시민들의 요구와는 상관없이 '소위 법관의 양심'으로 판결되고 있는 점은 백번 양보하여 넘어가더라도, 이러한 판결들이 사회적 파급의 고려 없이 이뤄지고 있는 상황은 상당히 문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국민의 투표로 구성된 의회에서 제출된 법안을 '자격 시험'이나 그에 준하는 교육 과정으로 선발된 사법 관료들이 '헌법이라는 이름'으로 법적 구속력을 행사하는 일이 과연 정당한 일인지에 대해 여전히 의구심을 갖고 있는데요. 현재의 민주주의가 시민들의 직접 투표에 의한 권력 위임이 기본적 메카니즘으로써 그 정당성을 표면에 내세운다 하더라도, 실상은 이미 모두가 알다시피 현실 정치 자체가 위임된 엘리트 지배 체제 그 자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체제의 색채를 좀 더 옅게 만드는 것이 앞으로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억압 받는 소수의 권리 보호라는 미명 하에 갖춰진 헌법적 체계와 그 이해의 한복판에 놓여 있는 상 하원 양원 제도와 연방대법원의 특수한 체계는 많은 미국 시민들이 요구하는 바대로 개헌의 필요성이 시급해 보이는 것은 거의 자명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상당한 시민들이 이에 동의하고 있는 점도 분명한 사실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왜곡된 미국 정치가 극명하게 시사하는 바는 극단주의적 인종주의와 정치적 자정 능력의 실종으로 말미암아 결국 사회가 반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기반이 될 수 있다는 후반부의 경고였습니다. 이는 과거 로버트 달이 주장했던 민주적 다원주의에 대한 공격이자, 동시에 소수 지지층의 이해 관계와 그 기반이 된 금권 정치가 더욱 민주주의를 벼랑으로 이끌고 있다고 봐도 무방해 보이는데요. 저는 당파적 이해관계에 아주 매몰되어 이것이 정치 전반을 아우르는 극명한 체제가 되었을 때, 과연 민주주의가 온전할 것인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이런 정치에서 앞으로 있을 과두제의 위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우려가 있습니다. 이를 약간 달리 언급해 본다면 기존의 영국 양당제도와 오랜 의회주의의 기반이 되었던 서로에 대한 존중, 대립된 정치적 의견이 합의에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계몽주의적 기반이 그저 당리당략에 매몰되어가고 있는 부분은 나날이 중첩되어가는 이익 정치의 본질이라 설명하고 싶습니다. 이것이 탈이데올로기의 새로운 정치 형태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익에 우선한 정치적 본질의 매몰은 미국 정치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까지도 파국에 이르게 할 수 있다고 예측해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일전에 도널드 트럼프로 시작된 '대안적 사실 alternative facts'의 발명이 이러한 왜곡의 시발점이라고 언급한 바가 있는데요. 이는 마찬가지로 과거에는 인종주의를 대놓고 주장하는 정치인을 유권자들이 심판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저자들의 현실 판단은 단순히 반민주주의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엄혹한 시대를 우리가 살아가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 볼 수 있겠는데요. 이 모든 것이 소위 대안적인 정치와 그런 진실 회피의 진면목이 서로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많은 지식인들이 폭로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다음 미국 대선은 미국인들 뿐만 아니라, 우리 정치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 되리라 예측해 봅니다.



그리고 2020년 재선에 실패한 트럼프 대통령은 선거부정을 주장했다. 그의 지지자들은 두 달 뒤 워싱턴 D.C.의 연방의회 의사당에 침입하는 ‘폭동‘도 일으켰다.

그런데 특정 집단에 소속감을 가지고 이와 같이 일방적인 투표 성향을 보이는 유권자는 미국 전체 유권자의 80~85퍼센트 정도를 차지한다.

그러다가 70년대 민권운동과 반전운동을 거치면서 민주당이 진보적인 하나의 색채를 띠기 시작했고, 80년대 공화당 레이건 대통령의 경제, 안보정책을 통해 공화당도 뚜렷한 보수의 정체성을 확립했다.

특히 흑인 유권자들은 기업에 대한 규제와 부유층 세금 인상과 같은 정책보다 자신들에게 직접적인 혜택이 즉각적으로 주어지는 사회보장책과 도시정책에 더 관심이 많다.

민주당, 공화당 할 것 없이 각 정당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더 이상 상대 정당을 국정의 파트너로 생각하지 않는다.

대통령의 재선이 매우 유리했던 구조적인 환경에도불구하고, 2020년은 코로나 위기와 더불어 민주당의 투표율 높이기 전략으로 인해 트럼프가 재선에 실패했던 것이다.

과도한 게리맨더링이 위헌이라는 주장이 19세기와 20세기를 거치며 끊임없이 나왔는데, 이때마다 연방대법원은 ‘선거구 확정은 법의 해석과 무관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두 정당의 지지자들이 관심을 가지는 이슈도 판이하게 다르다. 민주당 지지자들은 건강보험과 총기규제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반면, 공화당 지지자들은 이미정책과 경제정책을 더 강조한다.

트럼프 등장 이전에는 유권자들도 노골적으로 인종주의 캠페인을 벌이는 정치인을 심판했다. 하지만 트럼프 당선 이후에는 노골적인 인종주의 캠페인이 마치 면죄부를 받은 것처럼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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