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전쟁 - 2022년 대선과 진보의 자해극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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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는 강준만 교수는 익히 알려진 대로 쾌도난마의 글로 유명한 지식인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강교수의 여러 글들 중에 공저로 쓴 '문학 권력'을 읽고 당시에 제가 느꼈던 한국 문단에 대한 실체는 실로 충격이기까지 했습니다. 강교수는 글을 쓰기에 앞서 자료 조사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도 유명하고 잘못된 대상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거의 거리낌이 없기도 합니다. 어떤 때는 다소 도가 지나치기도 합니다만 현재로선 강교수와 같은 사람은 한국 사회에 꼭 필요하다고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20대 대선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저에게 강교수의 이 책은 뭔가 훌륭한 배경 설명이 되어주지 않을까 반쯤 그런 기대를 갖고 완독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책의 출간은 아시다시피, 2022년 4월에 이뤄졌습니다.

언론 뿐만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유권자들에게 20대 대통령 선거는 과도하게 불거진 '비호감 선거'였습니다. 어떤 분들은 양 후보 둘 다, 대통령의 자격이 없다고 했었죠. 이에 저자는 아주 큰 틀에서 촛불 혁명으로 탄생한 '문재인 정부'의 오판과 무능이 전 검찰 총장인 윤석렬 당선인을 대통령으로 만드는데 큰 책임을 갖고 있고, 역시나 민주당 대선 후보인 이재명 후보와 그의 아내에 대한 여러 문제점을 지목하면서 전반적으로 이번 대선은 진보 세력의 실패로 귀결되고 있었습니다. 소위 '싸가지 없고', '팬덤에 휩싸인' 진보 세력이 결국은 국민의 심판을 받은 것으로 규정되기까지 하는데요. 기존의 승자 독식의 선거판과 정치 대결에서 대통령에 오른 이들이 과열된 충성으로 인해 현실을 망각하게 되었고, 특히나 과거 김영삼 대통령부터 시작된 '캠프 정치'가 오히려 대통령을 잘못된 길로 가게 한다는 저자의 비판적 분석은 충분히 설득력이 있어 보였습니다. 아마도 문재인 정부의 조국 사태는 그런 맥락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습니다.

이번 대선의 가장 큰 패착의 요인으로 작용한 문 정부의 부동산 대책은 저자의 언급대로 '내집 마련의 꿈을 갖고 있는 수많은 무주택자들을 사실상 일부러 망각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는데요. 한편으로는 은행 대출을 받아 부동산 갭투자를 하며 짭짤한 이익을 거둔 기존의 사람들을 보며 자신도 저렇게 되고 싶다는 보통 사람들의 허망한 기대조차 날려버린 셈이 되었습니다. 이는 진보든 보수든 대의나 명분의 정치가 이미 저물어버렸다는 명백한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다시 스티글리츠의 언급대로 신자유주의화가 아주 잘 이루어진 국가인 한국에서 개인의 이익 추구는 그만큼 중요해진 화두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대선 캠프에 이름을 올린 인사들이 당선 이후, 이익과 권력을 위해 이전투구를 벌일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분석은 그래서 의미심장한데요. 사실 기존 세대들이 자신의 자식들에게 그렇게 많은 자원과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아이들이 나중에 좀 더 수월하게 자신의 이익을 취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어찌됐든 대학 입시도 그러한 맥락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그래서 이번 대선을 경험한 모든 국민들이 자신이 바라보는 정치인 아무개의 이익이 어디에 존재하고, 이 사람의 인맥과 행적들이 어떤식으로 이루어져 왔는지 면밀히 감시하면서 동시에 정치인의 순수한 정치적 사명감은 그저 겉으로만 보이는 치장과도 같은 것임을 인정해야 할 것 같습니다. 버틀란드 러셀의 언급대로 이제는 사실상, 정치 엘리트들이 자신들의 이익 추구만을 위한 무대로 전락해져 버린 것이죠. 

약간 상이한 인용이겠지만 브레진스키는 국제 외교 무대는 선과 악의 대결장이 아니라 전부 회색지대라고 주장한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정치 역시 어느 정도는 그런 일면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특히 양당 체제에서 각자가 속한 정치 그룹 이외에 다른 이들을 극명하게 혐오하고 백안시하는 건 사실상 진보 보다 보수가 더 수월하게 잘하는 것이었습니다. 강교수는 자신의 글에서 많은 진보 세력이 반대편의 보수를 토론과 타협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사실상 극도로 혐오했다고 놀라운 평가를 하고 있는데요. 저도 스스로 보수라는 분들과 단순히 정치적 대화 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대화를 나눠봐도 의견 교환과 그들이 갖고 있는 기본적 인식에 대해 상당히 배타적인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선거 기간에 진보에 있는 사람들도 과격한 카를 슈미트가 연상 될 정도로 상대방과의 소통을 거부했으니, 저자의 말이 아주 터무니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부분만은 명확히 하고 싶은데요. 전 정권인 박근혜 정부 때의 인사들과 그 정권의 탄생에 관여한 인물들이 반대편에 있었던 당 관계자들이 아직도 그 시기의 '국민에 대한 정치적 배반'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없다는 점인데요. 분명한 것은 정부 자체를 그런식으로 무능과 파탄에 이르게 한 일차적인 책임이 그 당에 있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책임을 지려고 하는 사람이 없었죠. 이걸 단순히 정치적 연좌제를 거론하자는 것이 아님에도 그저 시간이 해결해줄 것이라 여기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이들은 또 정치 공세는 정치 공세대로 아랑곳 없이 퍼부어 댔죠. 저는 저들이 단순히 법적으로 책임을 지라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정한 사과의 현장이 있어야만 했다고 봅니다. 하지만 대다수는 전 대통령의 연고지라고 할 수 있는 대구와 경북의 분위기를 고려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기에 바빴죠.


그럼에도 이 글을 통해 알게 된 이재명 후보의 여러 소명되지 않은 문제, 후보의 아내에 대한 과도한 의전 문제는 충분히 비판을 받을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의 후보로 지명 받기 전에 이낙연 전 의원과 이 의원 캠프에 대한 석연치 않은 이 후보 측의 행동 등은 다시금 이 후보가 문제가 적지 않은 사람이었구나를 깨닫게 되었는데요. 이 부분에서 일개 정치인에 대한 과도한 팬덤까지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증명된 이재명 후보에 대한 과도한 팬덤은 정청래 의원의 실망스런 발언들과 더불어, 진보 역시 기존 정치와 다를 바가 없다고 느껴졌습니다. 자신들이 이미 기득권임을 인정하고 이 기득권 비판을 할 수 있는 권리는 수많은 보통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저자의 언급이 크게 다가왔는데요. 더욱이 그전까지 터무니 없는 정치 공세로만 여겼던 여권 인사들이 수사 성역에 한 가운데 있어 어느 정도 검찰의 눈치보기가 있었다는 부분도 그 배경에 대해 인지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만, 윤 당선인이 대권을 쟁취하고 나서, 단순히 영부인에 대한 알려진 의혹들에 대해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아서 문제였다는 것보다 이제 그녀에 대한 의혹을 검찰이 과연 수사를 할 수 있겠느냐는 모두가 짐작하는 대로 흘러갈 가능성이 높아 이것도 현재 정치의 한계인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리고 글 서두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쓴소리를 하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고 강교수는 개탄하고 있었는데요. 이보다 오랫동안 검찰에 몸을 담으며 상명하복의 조직에서 검찰총장까지 지낸 분이 과연 쓴소리를 소화시킬 수 있을지 저역시 강하게 의문이 듭니다. 그리고 일개 시민으로서 검찰 출신 대통령의 검찰과 또한 막역한 전 부하 직원이고도 할 수 있는 한 모 씨의 법무부 장관 기용과 같은 뚜렷한 정치 일색이 과연 우리의 민주주의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될지 많은 고민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미 민주주의를 30여년이나 경험한 국민이니 일개 검찰 출신 대통령의 탄생이 체제 전반의 위협이 되리라는 예측은 어쩌면 철지난 억측이 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당선인이 국회를 파트너로 삼아 국정을 이끌게 될지는 앞으로 두고 봐야 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진보 역시 더 나은 정치를 위해 자신들이 스스로 쇄신의 대오에 서는 것도 정치의 건전성을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윤 당선인의 정부가 국민을 위한 정책을 펼치려고 나아가고자 한다면 거대 야당 역시 이에 발을 맞추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일견 대적의 정치라는 극도의 대결 논리가 아직도 한국 정치에서 중요한 어필임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개인적으로는 중도 정치에 반대하지만 이런 대결 국면에서는 중도의 정치 세력화가 필요해 보이기도 합니다. 차기 정부가 과연 국민의 견제를 마땅히 받을 것인지는 앞으로 좀 더 두고 볼일이라 생각합니다.


-저자의 언급대로 우리가 그토록 염원하던 검찰 개혁은 2017년에 시도했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조국 전 장관의 내각 기용은 그것대로 불행이었고, 그로 인해 2019년 전후로 문 정부의 민심 이반이 시작되었다는 분석은 거의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구조적 여성 차별 문제를 훤히 꿰뚫고 있는 건 물론이거니와 그걸 넘어서기 위한 페미니즘 운동의 선구자들이고 했던 민주당 여성 의원들이 ‘박원순 사건‘떄 ‘피해 호소인‘운운하면서 보여준 비겁한 추태는 어찌 이해해야 하는가?

이른바 ‘캠코더(대선 캠프,코드, 더불어민주당)인사‘를 통해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요직을 장악한 문재인 정권 인사들은 우선 자신들의 분야에서부터 그 문제와 더불어 비정규직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했어야 했다

즉, 당위적으로 옳다고 해서 무조건 지지하는 동시에 이의 제기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대남 선거 전략에 관한 한 윤석열은 이준석을 멘토로 모심으로써 이준석이 저야 할 이미지 책임까지 덮어쓰고 말았지만, 이제부터는 이대남과 페미니즘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런 네거티브의 소재가 무엇이냐에 따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점도 없진 않겠지만, 유감스럽게도 대부분 ‘증오,혐오 마케팅‘에 치중했기에 그런 기대를 걸기도 어려웠다

대통령은 주로 그들이 선별적으로 전해주는 정보에만 접하기 때문에 자신이 잘하고 있는 걸로 착각하면서 살아간다

혹 반정치주의는 무조건 비난하기보다는 그게 나올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일종의 ‘딜레마‘로 다루어야 하는 게 아닐까. 반정치주의의 토양이라 할 유권자의 정치 불신과 혐오는 심각한 수준이며, 이에 대한 해결책도 사실상 없는 상태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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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20 10: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책 한 권 들고 까페에 앉았다가 베터라이프님 리뷰들이 오늘의 제 책이 되어줍니다.

강준만 교수님께서는 자료수집 정리하시는 특화된 능력이 있으신지, 그렇게나 텀 짧게 신간을 내시면서도 허투루가 없으신 듯 자료 인용이 상당하시더라고요. 늘 어떻게 자료 정리, 저장하시는지 궁금해지게 만드는 교수님.

2022년 4월이면 최신간이군요. 요것도 읽어보겠습니다.

˝과연 쓴소리를 소화시킬 수 있을지.....˝ 강력 동감입니다.

베터라이프 2022-04-20 19:13   좋아요 2 | URL
저의 부실한 글이 도움이 되셨다니 약간 부끄러운 마음이 듭니다. ^^;

강교수의 이 책은 사실 저번 대선을 분석하고 진보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싶어서였어요. 다른 것보다 강교수는 진보 세력의 내로남불을 유독 강하게 비판했는데요. 논증이 전부 완벽하다고 볼 순 없지만 대체로 인정할만한 내용들이었습니다. 진보는 분명 성찰할 부분이 있었습니다.

전에 기사로 얼핏 본 것 같은데, 강교수가 중요 인사들에 대한 어록? 뭐라고 불러야할 지 모르겠습니다만 그와 같은 걸 데이터화 해 놓고 활용하고 있다고 본 것 같아요 제가 지그문트 바우만의 주장과 인상 깊은 문장들을 수집하는 것처럼 강교수도 그와 비슷한 작업을 하고 있는 거겠죠? 근데 이분한테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자기의 발언이 고스란히 수집되고 있으니 발뺌은 뭔가 통하지 않을 것 같네요 ㅋㅋ
 
기본소득이 알려주는 것들 - 국민 복지의 뜨거운 화두, '기본소득'에 대한 입문서
야마모리 도루 지음, 은혜 옮김 / 삼인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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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의 저자인 야마모리 도루 山森 亮 는 현재 일본 교토의 명문 사립인 도시샤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사카 시립 대학에서 석사를 교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는데요. 저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일본의 코로나 상황과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발언이 담긴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자는 과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을 만나볼 정도로 여성 운동에도 관심이 많은 학자이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일본에서 진보주의 지식인들을 가르키는 리버럴 지식인으로 지칭해도 될 만한데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저자와 같은 지식인들은 일본에서 아주 귀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ベーシック・インカム入門"로 지난 200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가 알다시피 근래 들어 기본 소득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이 기본 소득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강고한 비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고 마시지도 말라'는 금언과 더불어, 만연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꽤 왜곡된 관념들이 논의 자체를 꺼내지도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는데요. 이 글의 서두에서 저자가 기본적인 사회 부조의 원리를 도입에서 꺼내 들었을 때, 근래의 정치사회적 관념들이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점에서 아마도 허버트 스펜서 류의 사상에 기반한 사회진화주의적인 극단적 관념에 이 기본 소득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가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서구 유럽은 신자유주의가 사회 전체를 개조시키기 이전부터 이러한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기도 한 데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상가들이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체제 전반이 인간 자체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그것이 오도 되어 다른 것을 용인하고 지지하는 것에는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교묘하게도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생산적', '생산성'이라는 단어를 마치 자본주의가 사회학을 지배하는 것처럼 무분별하게 차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는 글 서두에서 자신도 1990년대 초 기본소득을 처음 접했을 때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고 회고하고 있는데요. 일용자 노동자들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어슬렁 거리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못하고 그저 외형적인 현상으로 기본 소득이 저러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이해했던 모양입니다. 이에 저자는 꾸준하게 사회 부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 밑바닥 계층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낙인 효과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을 가하면서 사회 논리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도 이러한 대다수의 시각에 몰이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도 이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 자체를 이념적으로 몰고 가서 그에 대한 아무런 기본적 이해도 없이 그저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실정입니다. 전반적으로 사회가 이렇게 된 연유에는 저자의 언급대로 '복지 국가 담론'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점령 혹은 파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당시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세력들이 먼 미래의 시민들의 분리를 조장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회 부조와 복지에 대한 문제에 있어 유독 시민들이 파편화에 이르고 있는 점은 매우 불행한 현실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글 초반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제안으로 시작되는 '보장 소득'은 모든 시민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도 여겨집니다. 이 부분에서 킹 목사의 대단한 점은 흑백의 인종 갈등의 진보적인 입장 뿐만 아니라 저소득, 미혼모, 장애인 계층에게도 관심을 갖고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매우 명예롭고 지대한 권력을 가진 목사들 대부분이 그러한 것에 관심도 보이지 않는 점은 유감스러운 부분이기도 한데요. 단순히 목사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을 그저 직업 선택의 과정에 있는 직업인으로 치부해야 하는지는 아마도 자신들이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킹 목사의 이런 제안은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이면서, 민주주의와 기본소득이라는 중요한 관점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은 시민들의 충분한 기본소득 보장에 달려 있기도 한 것이죠.

또한, 버틀란드 러셀 역시 자신의 다른 논저에서 킹 목사와 동일한 관점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요. 러셀은 여기에서 한 술 더 떠서, 모든 시민들에게 중간 계층 이상의 경제적 삶을 보장하는 것이 사회에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실질적으로 시민들의 노동 시간을 줄여서 도리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에 있어 보다 창조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저도 이런 주장에 적극 동의하는 편입니다. 지금에서야 점진적으로 개선된 평가를 받기 시작하는 슘페터조차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는데요. 단순히 자본가들이 일반 시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는 표면적인 평가를 넘어서 시민들 대부분에게 충분한 여가 시간을 보장하는 것이 소위 생산성 확대에 일견 도움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자본가들이 시민들을 노동 현장에 더 많이 붙잡아 놓는 관계로 이들이 정치와 더 멀어지게 한다는 음모론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가들 대부분이 독점적 위치에 서는 것을 선호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법률적 회피가 가능하게 될 것 인지를 드러내는 그렇지 않든 고민하고 있는 점은 분명합니다.

야마도리 도루의 기본소득에 대한 여러 논증들 가운데 제가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시민들의 보다 나은 소득으로 인한 실질적 자유에 대한 가능성입니다. 여기에 인용된 판 파레이스의 분석대로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오늘날 사회에 "선하다고 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는 고대인의 자유"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아주 명백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인정하는 제도들 자체가 인간 사회의 선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실질적으로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도덕, 도덕주의가 거세된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물론이고 거의 지상 과업의 관념으로 자리 잡은 능력주의가 인간의 이기심과 결국은 차등의 자유를 조장하는 논리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금권 정치에 지배를 받고 있는 미국 정치는 물론이고 아직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유럽의 지본주의 정치도 역시 마찬가지로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상입니다.

끝으로 저는 저자의 이 글을 통해, 기본소득의 논리가 어느 정도는 페미니즘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 여성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에는 '가사 노동'에 대한 실제적인 노동력으로의 정산이 가사 활동 전반을 여성들의 전유물로 고착화 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이러한 가사 노동의 논의 자체가 이러한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분배 중시와 실질적 기본 소득이라는 논의 자체가 앞으로 정치를 망가뜨릴 수 있는 '과두제 출현'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뒤에 여러 도표와 자료들로 구사되는 저자의 논의가 일정부분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기본소득에 대한 여러 선한 효과와 기능이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지만 우선적으로 가장 중요한 비용의 문제는 무시할 수 없기도 한 데요. 일반적인 복지 국가의 담론에서 어떤 사람들이 사회적 부조를 받을 수 있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가계 상황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전제 되어야 하는 만큼 기본소득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개방된 논의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기본소득과 시민들이 원하고 바라는 실질적인 제안에 대해 학계와 시민들간에 폭넓은 논의와 더불어 정치권이 이를 지금까지도 한 발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했던 이념적이고 반자본주의적 낙인은 시급히 철회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 역시 강조하고 있는대로 기본소득 담론을 연구하고 주장하는 경제학자가 학계 내부에서 비주류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고령자도 장애인도 아닌 노동할 수 있는 빈곤자(워킹푸어)는 구제 받을 필요가 없는 빈민으로 간주해 그들에게 노동규율을 철저하게 심어준다는 방침을 취했다

미디어에서는 ‘부정수급‘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데, ‘부정수급‘은 자주 보도되는 반면 포착률에 대해서는 눈에 띄게 침묵한다

또한 ‘열등처우 원칙‘이 주장되어 복지수급자는 일반시민보다 열등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겨졌다

사회가 실업자가 늘어나면, 일본의 생활보호 같은 제도의 수급자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제도가 상정하고 있는 범위 밖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여론과 반발을 초래하고 한편으로는 수급에 따른 차별과 수치심(낙인)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

즉 ‘노동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않는 비판이다. 분명 다른 사람과 협동하거나 자연에 작용을 가함으로써 개인이 성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노동이든 임금노동이든 가사노동이든 그 밖의 다른 형태의 노동이든, 노동을 타인에게 강제할 때 이 표어가 나오면 주의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보통선거를 양보할 수 없는 전제로 삼으면 역으로 ‘민주주의가 충분히 기능하려면 시민권으로서 기본소득이 지급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러셀은 어떠한 논리로 이런 제안을 했던 것일까. 그는 먼저 "개개인이 일을 하지 않고도 평범한 수준의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 사회는 필요한 만큼의 노동량을 달성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제기를 설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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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콤 글래드웰 외 지음, 이승연 옮김 / 모던아카이브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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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온타리오 주의 토론토에서 개최되는 주요 정책 문제 토론인 멍크 디베이트 The Munk Debates 는 피터 멍크와 그의 아내 멜라니 멍크가 설립한 자선 재단에 의해 운영되고 있습니다. 멍크 디베이트는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서는 너무나 잘 알려진 토론회이기도 한데요. 특히, 광범위한 주제를 바탕으로 심도 있는 토론으로 유명합니다. 더욱이 사회적 명사 혹은 충분히 존중 받을 만한 저명한 여러 지식인들을 초대해, 이들이 단순히 손쉬운 수입과 공짜 캐나다 여행으로 치부되고 있지는 않습니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은 멍크 디베이트의 수준 높은 명성으로 인해, 여기에 초대된 인사들이 토론에 대해 진지한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토론회의 사회자로서는 내셔널 포스트와 토론토 스타의 칼럼니스트이자 작가인 러디어드 그리피스가 나서고 있는데요. 그의 깔끔한 진행 역시 멍크 디베이트의 명성을 올리는 데 한 몫을 하였습니다. 따라서 이 책은 사회자인 그리피스가 2020년 4월 9일에서 6월 10일까지 진행된 멍크 다이얼로그 시즌1을 기반으로 정리한 내용을 출간한 것입니다. 원제는 "The World after COVID : The Munk Dialogues on a Pandemic edited by Rudyard Griffiths"로 2021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1년 9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기로는 국내에 번역된 멍크 토론은 2편으로 알고 있는데요. 저의 북플 친구분이기도 한 얄라님을 통해 이 글의 존재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선 간단히 글을 요약해 보자면, 2019년 11월에 발생한 전세계적인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로 세계는 어떻게 변화되어 왔으며, 앞으로 우리가 맞이할 세계의 양태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여기에는 전세계에서 존경 받는 지식인들의 현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를 좀 더 면밀히 풀어본다면,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어떤 위기를 겪게 되고 그동안 누적된 전세계의 경제적 불평등의 해소 문제는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주된 관심이 담겨 있는데요. 더불어 넷 미디어 시대에서 우리의 정치적 권리가 안전하게 보호 받을 수 있을 것인지도 현재의 양상과 돌아가는 모습을 통해 규명해 보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있습니다.

이곳에 등장하는 소위 명사들은 미국의 민주주의, 더 나아가 전세계의 민주주의에 대해 걱정과 희망을 동시에 피력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전세계가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 있는 현실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한 전염병 사태는 막대한 인명 피해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니얼 퍼거슨의 주장대로, 이러한 팬데믹 사태에서 가장 중요했던 것은 사회적 거리두기와 마스크 착용이었습니다. 이것은 수많은 현장에서 실질적으로 입증된 바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여기에 이름을 올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국과 대만, 싱가포르의 성공적인 방역 정책을 칭찬하고 있는 분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동시에 '작은 규모의 민주국가들'이 권위주의적 수단이 아닌 민주주의 방식으로 팬데믹 사태를 통제한 것에 대해 마찬가지로 그 결과를 인정하고 있었는데요. 사실 팬데믹 초기에 미국을 비롯한 많은 유럽 국가에서 '개인의 자유'라는 논법에 -분명 중요하지만- 가열차게 매몰되었습니다. 이 개인의 자유는 직면한 문제에서 대부분을 이슈로 빨아들이게 됩니다. 즉, 자신들의 자유는 팬데믹이라는 비상상황에서 조차 절대 교환할 수 없다고 강조한 것인데요. 자신이 죽음에 이른다 하더라도 스스로 마스크를 안 쓸 자유와 권리는 지켜야겠다는 맥락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들은 우리의 확진자 동선 추적을 한국의 민주주의가 종말을 고했다는 식으로 왜곡하기에 이릅니다.

파리드 자카리아가 논평한 대로, 종래의 신자유주의자들이 흡사 앵무새처럼 부르짖었던 '큰 정부 vs 작은 정부'라는 논법은 팬데믹 상황에서 사실상 무의미해진 상황입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신자유주의자들은 2008년의 그 끔찍한 사태에서 정부 아니, 국민의 세금으로 자신들을 살려준 것도 망각한 채, 2010년 즈음이 지나자마자 더 이상 정부는 금융 시장에 개입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력하게 주장합니다. 물론 제가 정부의 금융 시장 개입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이 부분에 있어 카라 스위셔는 현재까지의 금융 정책 대부분이 최고 부유층을 위한 것들이었으며, 그러한 가운데 나날이 심화된 소득 불균형에 대한 정부의 어떠한 대책이 없었다는 점을 꼬집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녀의 여러 논평들 가운데, 팬데믹 이후의 아메리카 2.0에 대해 냉소하는 부분은 절로 저의 눈길을 끌었는데요. "아메리카 2.0은 뭘까요? 엄청난 로비력, 미다스 같은 엄청난 재산, 많은 사람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능력을 갖춘 거대 기업들로 가득한 나라인가요? 아니면 소득 평등을 이룬 나라일까요?"라는 질문의 진정한 해답은 아주 명확합니다. 존 듀이의 주장대로 많은 시민들이 정의로운 사회를 꿈꾸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그리고 카라 스위셔 역시, 부자들이 더욱더 방탄 승용차를 타는 상황을 바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하고 사회 안전망에 대한 함의를 다시금 꺼내 들기에 이릅니다.

이렇게 '민주주의 2.0'의 미래에 대해 열띤 논의를 이어가고 있는 가운데 다른 토론자인 데이비드 브룩스는 사회정치적 맥락에서 색다른 관점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소위 '사회적 신뢰'에 대한 문제인데요. 그의 말대로 라면 이 사회적 신뢰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양자 간에 어느 한쪽이 더 유리하다고 주장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그는 중국의 일례를 들며, 그동안의 눈부신 중국의 경제 발전으로 인해 자신들의 정부가 분명 권위주의적인 정권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중국인들은 현재의 정치 체제에 신뢰를 느낄 수밖에 없다는 요지였는데요. 단순히 풍족한 돈의 소유를 넘어 전체적으로 삶의 풍요로움을 보장하여 이를 사회적으로 자리매김한 정부에 대해 시민들이 '사회적 신뢰'를 가질 수밖에 없다는 그의 분석은 실로 현실적이라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앞선 논평에 대해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있어 유권자들의 투표와도 결부지을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되는데요. 물론 신자유주의 이행 이후, 민주주의 국가들의 좌와 우의 논법이 다소 정치적 본류에서 벗어나게 되고 이런 이념적 선택은 현재의 직면한 경제적 불평등을 어느 한쪽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게 됩니다. 저는 과거의 미국 리버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셈법에 의거 신자유주의에 대거 투항한 사건을 앞선 현실의 예로 들고 싶은데요. 자크 랑시에르나 샹탈 무페의 언급처럼 1980년대 이후 신자유주의적 우파들의 득세에 진보 좌파들이 제대로 일을 하지 않는 점은 분명한 사실일 겁니다. 또한, 오스트리아의 좌파 언론인인 로버트 미지크 역시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는데요. 그렇지만 최소한의 정치적 신념을 헌신짝처럼 내버린 리버럴들의 그 같은 투항은 소위 자본주의적 독재와 다름없는 광범위한 이행에 있어 보수는 물론이고 진보 역시 어떠한 견제가 되지 못했다는 불행한 사실입니다. 그래서 지그문트 바우만이 이데올로기의 시대는 종말을 고할 수밖에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더욱 견고화 되기 위해서는 서멘사 파워의 진단처럼 현재 유럽이 직면하고 있는 반자유주의자 혹은 반민주주의자들의 대두에 시민들이 즉각 나설 수 있는 결단이 필요 해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무엇이고 어떤 가치인지에 대해 더욱 고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선 자카리아의 평가대로 팬데믹 상황의 소위 '비상 대책'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비상 대책과 같은 수단을 오용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휘두르는 헝가리의 오르반과 같은 자들에 의해서 위기가 짙어질 가능성이 더 높은 것입니다. 이것은 아마도 "민주주의가 실패한 것이 아니라 미국이 실패한 것이다"라는 자카리아의 뼈아픈 고백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도널드 트럼프와 오르반의 연결은 이처럼 지독한 측면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필연적으로 우리는 모두의 안전과 공익을 위해 시민들이 가져야 하는 최소한의 정치적 공감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다만, 이언 브레먼이 강조하는 대로 미국과 캐나다와 같은 민주적 국가들이 팬데믹 사태로 인해 단번에 권위주의 독재 국가로 나아갈 가능성은 그만큼 희박하다고 보는 것이 옳은 해석일텐데요. 그동안 민주주의를 경험한 시민이 다시 과거로 회귀하거나 독재를 추종하기란 너무나 어렵다는 노엄 촘스키의 주장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좀 더 면밀히 따진다면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충분한 시스템적 역량과 자원은 보유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민주주의를 시녀처럼 부린 자본주의와 경제적 우월 담론을 거의 비판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시민들에게도 일정 부분 책임이 있어 보이는 것도 확실합니다. 물론 현재 미국과 같은 로비스트들에 의한 광범위한 금권 정치에 있어 힘의 차이가 분명한 것은 사실이기도 한데요. 하지만 분명한 것은 민주주의가 개인의 자유를 저버릴 수는 없는 것이며, 마찬가지로 모두의 안전을 위한 공적인 담론 역시 민주주의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도 합니다. 이처럼 팬데믹 사태에서 만약 한국과 대만이 그만큼 언론의 자유가 보장되지 않았다면 확진자의 동선 파악과 같은 행동에 정부가 쉽게 나서기란 어려웠을 것이란 평가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여기에 자주 언급된 한국과 대만의 사례는 충분히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에게 긍정적인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아직도 국내의 많은 이들이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해 상당한 불신을 갖고 있는데 반해 전세계인들이 갖는 우리의 평가는 이처럼 상반되기까지 합니다. 특히나 근래 출판되는 많은 팬데믹 관련 글에서 우리 정부에 대한 대처와 방식에 대해 호감을 표하는 저자들이 많다는 점은 아직은 우리의 민주주의가 건전하다는 증거일 수도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팬데믹 상황에세도 질서정연한 선거도 치루고 시민들 대다수에게 있어 민주주의에 대한 함의 역시 중요한 문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다만, 팬테믹 상황에서 나날이 세를 불린 인터넷 기업들이 민주주의에 초래할 부정적인 전망 또한 다른 논저들에서 처럼 반복되고 있기도 한데요.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국가들이 이런 기술 기반으로 정치를 쥐락펴락 하고 있는 것은 충분히 우려할 만한 상황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막대한 이득을 얻고 있는 인터넷 기업의 사주들이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고 있다"는 비평은 우리 시민들이 귀담아 들어야 하는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이익에 따라 규정되는 인터넷 환경의 전반적인 혼란이 민주 정치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은 모두가 인지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는 루스벨트 대통령이, 영국에는 처칠 수상이 있었다. 두 명의 비범한 정치 지도자가 위기를 틈타서 공공 제도를 강화했던 건 순전히 운이 좋았던 것이다

미국은 국민을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야 할 아주 결정적인 국면에서 최고가 아니라는 게 이 위기로 만천하에 드러났다

지금은 중국 중심의 세계가 아니다. 미국 중심에서 벗어난 세계일 뿐이다

트럼프가 자신에게 절대 권한이 있다고 떠들 수는 있어도 미국 시스템이 갖춘 강점 덕분에 12시간 내에 주지사 10명이 트럼프를 비난했고 트럼프가 뭐라 말하든 대통령의 선언에 따라 주를 봉쇄하거나 개방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물론 아무도 민주주의에 책임감이 없는 독립적인 관료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에겐 잘못된 성장 모델이 있었다. 금융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에 깊이 빠져들었다. 인력과 자본의 생산성에 의존하는 성장 모델로 되돌아가야만 했다

어떤 백신을 개발하든 도움을 주기 위해 어떤 검사를 할 수 있든, 서구 사회에는 분명히 그 일을 빨리 해내야 할 도덕적 책무가 있다

팬데믹이 누구의 잘못이었는지 국가 간에 책임 공붕이 벌어질 테고 민족주의를 부채질 하게 될 것이다

이상적인 세계에서라면 미국 뿐 아니라 캐나다, 유럽 국가, 한국, 일본 모든 민주 국가가 함께 그런 접근을 요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우리 민주 국가들이 더 이상 한 팀으로 협력하지 않다 보니 공백이 생겼고, 중국은 그 자리를 채울 준비가 완벽히 되어 있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초기부터 코로나19에 ‘우한 바이러스‘란 이름을 붙여 써야 한다고 고집을 피우느라 이번 팬데믹에 대한 결속을 다지려 모인 G7 공동 성명에 동의를 거부할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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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뉴스 - 디지털 저널리즘, 위기의 실체 북저널리즘 (Book Journalism) 33
박영흠 지음 / 스리체어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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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대에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고 동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박영흠 교수는 현재 협성대 미디어영상광고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2020년에 불거진 검찰과 기자 간의 소위 부적절 관행에 대해 양자 관계를 명백히 '갑을 관계'라고 비판을 한 바가 있는데요. 저는 이런 검찰과 일부 언론의 밀착 관계가 민주주의에 어떠한 긍정적 영향이 있는지 명백하게 알지 못합니다. 이 책의 저자인 박교수 역시 기성의 한국 언론이 얼마나 권력과 자본에 유착되어 있는지 그동안 끊임없이 발언을 해왔습니다. 특히, 그가 관심을 보여온 언론과 민주주의 그리고 언론 윤리에 대해 저 역시 많은 부분 공감하고 있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박교수의 이 글은 최근의 언론 지향 뿐만 아니라 우리의 언론이 디지털 시대에 어떠한 변화를 맞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생각됩니다. 따라서, 이 책은 지난 2019년 2월 출간되었습니다.

다소 이른 결론일 수도 있지만 저자는 "언론과 시민 간의 건강한 파트너십"이야 말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길이라고 정리합니다. 지금까지 수많은 정치인들이 오로지 입으로만 민주주의를 외친 것과 마찬가지로 언론 일각도 건전한 민주주의를 위해 책임감과 사명감을 갖기 보다는 돈벌이와 자신의 얄팍한 권력을 위해 앞선 두 가지를 망각해 왔습니다. 아마도 많은 시민들은 현재 자신의 삶에 있어 돈을 추구하고 이익을 우선하는 일련의 노력들이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에 대해 많은 고심이 있을 겁니다. 어쩌면 이런 고심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부분일 겁니다. 마찬가지로 언론과 기자들 역시 과연 자신들이 민주주의를 위해 특별한 노력을 다하고 있는지에 대해 가감 없는 성찰이 필요하다 여겨집니다. 그런 측면에서 박교수의 이 글은 일관되게 기자들의 윤리관에 대해 논하고 있지는 않지만, 일반 시민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자본과 언론, 신자유주의적 이행에 따른 전통적인 사회 개념의 형태를 유지하는 이론적 가지들이 어떻게 시장의 지배를 받게 되었는지 약간의 단초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즉, 자본의 지배적 논리화 과정에서 이 언론도 그러한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요. 이런 사회적 이익화에 따라 언론 사주들도 돈을 벌고 싶어하고, 그런 측면에서 언론의 독립성이 크게 흔들리고 또한, 자본의 입맛에 맞는 기사들을 생산해, 이를 답습하고 시민들에게 강고한 인식으로 주입되는 등의 일련의 과정이 있었습니다. 글의 4장인, "일상적 삶 속에서 모든 자원의 배분을 오로지 시장 논리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시장 물신적 사고가 빠르게 내면화되었다"는 주장이 이를 증명한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기본적인 헌법적 기초에서 뿐만 아니라, '언론의 자유'는 건강한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사항입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에서 만큼은 그저 이상주의적이고 이론적인 측면으로 치부될 것이 아니라, 언론이 시민의 권리를 위해 사회의 정의를 위해 제 기능을 다해야 한다는 당위는 그저 책에서만 이론으로 배우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일반적인 의사들이 환자의 건강과 인간의 존엄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언론인들 역시 이 점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만 하겠는데요. 여기에서도 인용된 아마존닷컴의 창립자 제프 베조스의 공격적인 워싱턴 포스트 인수를 자본과 언론과의 관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례로 뽑고 있습니다만, 더 엄밀히 현재의 언론 기반이 비정상적으로 변화된 것에는 1장과 2장에서 논증되는 바와 같이, 기득권의 권력 강화와 사회 전반에 대한 자본의 물리적 지배력 확대 그리고 이러한 이행들 속에 시민들이 정치 감시와 같은 본연의 의무에 더욱 멀어진 결과가 원인이 되었을 겁니다. 저자는 이 부분과 있어, 5장에서 "한국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이미 불신과 회의, 냉소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고 뼈아픈 고백을 하기에 이릅니다.

이 글의 앞선 2장은 '시장이 우선이냐, 광장이 우선이냐'라는 해석으로서 마누엘 카스텔식의 초기 인터넷 공간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더 함양하고 확대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어떻게 무너질 수밖에 없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반적인 자본의 물리적 지배는 사회 전체를 변화시킬 수밖에 없었는데, 특히 언론은 기존의 민주주의를 위해 어떤 보루로서의 역할이 요구되었으나 실상은 자본의 논리에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정치를 시녀로 만들었는지 가늠할 수 있게 하는데요. 민주주의에서 중요한 가치라고 할 수 있는 '법의 지배'가 '시장과 경제 전반이 위기에 놓일 수 있다는 이유로 죄를 지은 경제인들이 풀려나는 상황'을 우리는 이미 목도한 바가 있습니다. 도식적으로 '사법체계-언론-시장'을 삼각 구도로 본다면, 결정적으로 시장이 사법제도와 언론을 지배하고 있다는 식의 논리가 현실적으로는 통용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는 것입니다. 뭐 엘리트들과 기득권들은 이를 강력하게 부정하겠지만 실상은 어떠한지 시민들은 이미 충분히 분석 가능한 수준일겁니다.

따라서, 노무현 시대의 언론들의 광범위한 디지털 진행화가 결국은 민주주의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은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고, 언론의 사적 지배 뿐만 아니라 자본의 지배 역시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정치 따위에 신경 쓰지 말고 너의 밥벌이나 먼저 해결하던가 하라"는 왜곡된 사회적 논법들이 시민들에게 언론과 민주주의를 더욱 멀어지게 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5장의 맥락을 아우르는 "저널리즘, 민주주의와 분리되다'는 문장은 이처럼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는 것이죠. 사실상 대다수 정치인들에 의해 주도된 언론을 통한 당리당략을 위한 사적 이익 추구가 하버마스가 강조한 '건전한 공적 토론장'으로서의 기능이 유명무실해진 것과 그 궤를 같이 합니다. 이에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의 우리 정치는 18세기 이전의 '교육 받은 남성들에게만 투표 권리를 부여한 영국의 상황'과 거의 유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극단적으로 그리스 민주주의처럼 시민이 노예와 같은 상황은 아니지만, 직업 정치인이 국민과 민주주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자신이 정치를 하는 정당성으로 주장들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저들 역시 스스로의 사적 이익에 충실해, 민주주의 자체를 부차적으로 만든 주범이기도 합니다.

클로드 르포르를 포함해, 많은 정치 이론가들이 자본주의 안에 집 나간 도덕주의를 되찾고자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도덕을 상실한 자본주의'가 과연 시민들에게 '시민 본연의 시민 다운 삶'을 보장하는지는 여전히 불확실합니다. 과연 언론과 시민들간의 진정한 파트너 십이 가능할 수 있을런지는 앞선 분석과 동일하게 회의적입니다. 저자의 강조대로 기사를 작성하는 언론인이 "투명한 증거를 기반으로 진실을 숭배"해야 하지만 현실을 그렇지가 못합니다. 기사의 독립성 역시, 사주나 언론사 고위층의 정치적 지향에 따라, 진실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고 아예 언론 기업 자체를 자본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할 수도 없는 매우 고약한 사정이 있습니다. 자본가의 이익, 자본의 이익추구는 마땅히 존중 받아야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관점이 우리 사회에 뿌리 깊기 때문입니다. 일전에 조지 스티글리츠는 한국에 대해, "여느 서구 국가들보다 짧은 시간 내에 신자유주의화가 급속하게 이뤄진 국가"라고 논평한 바가 있습니다. 이것은 거의 진실에 가깝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정치를 위해 언론 자체가 자본에 대해 독립성을 갖고 있어야만 하고 언론인들 역시, 자신의 직업이 어떠한 의무를 갖고 있는지 한번쯤은 돌이켜 볼 때라고 생각합니다.


저널리즘이 부유한 지배 계급의 이해를 일방적으로 옹호하며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또한 주권자로부터 권리를 위임받은 대리인으로서 시민들이 생업에 바빠 미처 하지 못하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견제의 임무를 수행하여 민주주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하지만 한국형 규범적 모델은 민주주의에 대한 강력한 지향성과는 달리 자본 권력으로부터 사회 평등을 보호하려는 노력에는 소홀했다

이러한 재화나 서비스가 무차별적으로 상품으로 교환되는 것은 사회 정의와 정치적 자유를 침해하기 때문에 적절히 규제되어야 한다

시민 사회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국가 엘리트 집단과 대자본 중심의 지배 연합이 오랜 권위주의 정권 기간 유지해 온 기득권을 완전히 상실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한국 사회의 보수 헤게모니는 여전히 강고했고, 디지털 대안 언론의 인기와 영향력은 아직 인터넷이라는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했다

자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변화는 당시 전 세계를 강타한 신자유주의 경제 프로그램과 무관하지 않다. IMF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가 글로벌 자본주의 체제에 더 깊숙이 결합하고 신자유주의화가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시장 논리와 자본의 성장을 그 어떤 가치보다 우선시하는 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쳤다

일상적 삶 속에서 모든 자원의 배분을 오로지 시장 논리에 따라 수행해야 한다는 시장 물신적 사고가 빠르게 내면화 되면서 한국인의 생활 세계는 자본에 의해 잠식되었다

포털에 이르러 디지털 기술은 비로서 수익 창출의 도구로 확고히 자리매김했고, 사회 변혁을 바라는 이용자들의 정치적 열정은 포털에 의해 부지불식간에 자본 축적의 수단으로 전유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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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구하기 - 어떻게 미디어는 '생존'하는 동시에 '민주주의'의 보루가 될 것인가
줄리아 카제 지음, 이영지 옮김 / 글항아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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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카제는 프랑스에서 근래 각광받는 여류 경제학자로, 개발 경제와 정치 경제학, 경제사를 주로 연구하고 있는데요. 파리 1대학과 파리 경제 대학 수학한 후, 도미해 하버드 대학에서 경제학 박사를 수여 받습니다. 그녀는 하버드에서 다니엘 코헨의 지도를 받았습니다. 2012년에는 프랑스 올랑드 대통령을 공개지지 했던 9명의 경제학자 중 한 사람이었고 2017년 대선에는 사회당 후보인 베노이트 하몬을 지지했습니다. 그녀의 개인사와 관련해. 한가지 유명한 점은 현재 전세계 경제학의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는 토마 피케티의 배우자라는 사실입니다. 두 사람은 2014년에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됩니다. 이 책은 지난 2015년 원제, "Sauver les Médias"으로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7년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우선, 저자인 줄라이 카제가 이 책을 통해, 명확히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은데요. "진정한 민주주의는 극소수 부유층의 주머니에서 나오는 돈만으로는 유지되어서는 안 되고, 양질의 민주적 토론을 책임지는 미디어는 부호의 독점적 영향력 아래 있어서도 안 된다"는 서론의 주장입니다. 사실 그동안 많은 미디어 전문가, 언론학자들의 입을 통해 언론이 어느 정도로 자본주의의 영향력 하에 있는지 설왕설래에 가까운 평가가 지속되고는 있습니다. 하지만 언론 재벌들 가운데 꼭집어 언급되는 루퍼트 머독의 행적에 있어, 그와 코크 형제와의 긴밀한 관계는 보수주의자들의 단순한 연계를 떠나 정치 자체에는 해악이 될 만합니다. 더욱이 머독은 과거 대처 영국 총리와 긴밀한 관계이기도 했는데요. 이들이 단순히 함께 커피나 마시자고 가까이 지냈던 것은 분명 아닐겁니다. 또한, 아마존닷컴의 설립자이자 CEO인 제프 베저스가 2013년에 미국 저널리즘의 기반인 워싱턴 포스트를 인수한 일은 그러한 과정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자본에 의한 언론지배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될 만합니다. 이미 미국 정부는 꽤 오래전부터 언론의 소위 경제적 독립을 위해 세금 감면을 비롯한 적잖은 지원을 하고 있기도 한데요. 민주주의에서 언론의 독립적인 기능은 무척 중요하다는 점은 모두가 알고 계실 겁니다. 카제는 이러한 명시적인 전제 뿐만 아니라, 1장에서 "실제로 기자의 일이란 부분적으로는 지식경제의 다른 주역들이 생산한 지식과 문화재화를 최대한 많은 이가 접할 수 있도록 보급하는 것"라고 첨언하고, 오늘날의 언론의 위태로움이 각 언론사들의 경영 문제로 인한 기자들의 대폭적인 해고에 원인이 있다고 보는 듯 했습니다.

아예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대부분의 언론 사주들은 돈을 벌고 싶어 합니다. 앞선 문단에서 인용된 아마존닷컴의 거부 제프 베저스는 보유자산이 대략 300억 달러에 이르는데, 그의 사례는 좀 특이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소 돈에 구애받지 않는 사주의 존재는 언론사를 보유해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는 것보다는 저자의 언급대로 약간은 취미 생활로 혹은 자신의 사회적 영향력을 위해 언론사 사주가 되었다고 볼 수 있겠는데요.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들은 급격한 광고 수입의 하락과 기존의 신문 영향력의 축소로 상당히 어려운 현실에 놓여 있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단순히 언론사를 일반 사기업처럼 설정해 본다면, 소모되는 각종 부대 비용이 마찬가지로 상당할 것으로 예측됩니다. 그래서 최근에 언론사들이 거대 인터넷 기업인 구글과 같은 '네이티브 광고'의 제공 의미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수 있겠는데요. 어느 언론사나 전혀 돈이 되지 않는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비용이 소모되기 마련입니다. 특히, 공익을 위한 목적의 기사들은 기자들에게 거의 돈이 안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물론 적지 않은 기자들이 견고한 윤리관으로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갖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현실은 또 이런 이상과 다르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과거 전통적인 언론의 책무와 사명감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 수 있을정도로 최소한의 경제적 보장이 필요해 보이는데요. 물론 기자들과 비교하여 의사나 변호사와 같은 전문직의 경제적 보장에 있어 사회적 동의가 부족한 측면도 분명 있습니다. 정부의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언론사들이 각종 공적 자금을 지원받지 않는 것도 중요하고 그러한 독립적인 위치를 견지할 수 있어야만 민주주의를 떠받칠 수 있게 되는 맥락일겁니다. 더욱이 기자들 스스로 시민의 이익과 권리에 힘써야 하는 것은 더는 강조할 필요가 없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글의 1장에서 "미디어 한 곳이 탐사보도 전문기자 한 명을 고용하고 업무를 지원하려면 연간 25만 달러 이상을 지출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2002년에 미국 보스턴글로브지가 가톨릭 성자의 성추행 사건을 8개월 동안 취재하면서 100만 달러를 지출했다"는 점은 기사 자체가 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세간의 선입견을 날리기도 하는데요. 현재 우리의 탐사보도만을 전문으로 하는 소규모 언론사의 경제적 자립이 왜 중요할 수밖에 없는 가에 대한 앞선 미국의 사례는 중요한 참고 자료가 될 듯합니다. 특히, 사회의 각종 비리와 정치권의 부정부패를 중점적으로 다루는 언론사일 경우 경제적 자립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더군다나 사주의 영향력을 거의 받지 않는 소위 독립 언론사의 존재는 작게는 사회 안전과 크게는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무척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요. 이런 독립 언론사들은 눈엣 가시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수록 이들에 대한 시민들의 지원은 마땅히 당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자인 카제는 3장에서 '비영리 재단'에 의한 언론 설립을 지지하고 있었는데요.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방안이라고 여겨집니다. 국민주를 모집해서 언론사를 운영하는 방법도 한 방안이 될 수 있고, 시민들이 특정 정당을 지지하고 그에 따라 소규모 계좌 지원을 하는 것처럼 언론사를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것이 가능할겁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도 얼마 없는 그런 소규모 독립 언론의 존재가 얼마간 머릿속에 떠오르기도 합니다.

끝으로, 개발 경제와 경제사를 중점적으로 연구한 경제학자가 그다지 고유하지 않을 수 있지만 언론 독립의 명료한 당위성을 주장하고 있는 점은 꽤 귀담아 들을 만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와 관련해, 여기에 인용되고 있는 프랑스 언론계의 상황이 상당히 우려스러워 보이기도 했는데요. 현재 러시아의 푸틴이 자신의 권력으로 언론들에게 재갈을 물리고 있는 것처럼 사실 시민들에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정치적 보장은 언론 자유와 독립 경영일 겁니다. 지난 역사에서 권위주의 정권이 제일 먼저 언론을 제압하려했던 부분은 이와 비슷한 맥락이라고 할 수 있을텐데요. 이에 한가지 아쉬운 점은 기자라는 직업군의 다수가 돈벌이에 치중하고 있고, 어떤 부류는 정치 권력에 너무 닿아 있어 한 사람의 기자가 언론의 독립을 보호하는 기초가 되는 것이라면 현재 우리의 현실은 아무래도 낙관적인 기대를 할 수 없다고 여겨지는데요. 저는 기자들에게 전문직에 준하는 보수를 보장하여, 이들이 어느 이익 단체나 어느 정권, 어느 경영자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스스로 원하는 기사를 쓸 수 있는 독립성을 보장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는 약간의 극약처방으로 기자들의 경제적 독립성이 시급하다는 요지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어찌됐든 언론에 대한 여러분들의 많은 의견 개진과 관심이 필요하지 않나 싶습니다.



의식하는지 못 하는지 모르겠으나, 사람들은 미디어에 대한 신뢰를 점점 잃고 있다. 프랑스인들은 미디어가 제공하는 뉴스 자체에는 늘 관심이 많지만, 프랑스인의 약 4분의 1은 이제 더 이상 미디어를 믿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대체 우리는 어떤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것인가? 미국의 부호들이 점점 쇠약해지는 신문사에 거액을 내놓는다는 이유로 미국 미디의 새로운 ‘도금 시대‘가 도래했다고 환호할 수 있는가?

비영리 미디어 주식회사는 자기자본의 안전성과 투자의 영속성을 통해 미디어의 품질을 보장할 것이다

부호 (또는 대기업)들이 미디어에 쏟아부은 거액은, 독립된 양질의 뉴스를 최대한 제공하는 것에 기반하는 미디어의 기능마저 악화시키기에 이르렀다

게다가 (언론사들의) 수익성 증가는 민주주의를 대가로 치르고 얻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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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7: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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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7:2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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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8:0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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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03 09:2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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