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소득이 알려주는 것들 - 국민 복지의 뜨거운 화두, '기본소득'에 대한 입문서
야마모리 도루 지음, 은혜 옮김 / 삼인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글의 저자인 야마모리 도루 山森 亮 는 현재 일본 교토의 명문 사립인 도시샤 대학의 경제학과 교수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오사카 시립 대학에서 석사를 교토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수여 받았는데요. 저자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일본의 코로나 상황과 그로 인한 사회경제적 문제에 대해 발언이 담긴 기사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저자는 과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을 당시 노동자 계급의 여성들을 만나볼 정도로 여성 운동에도 관심이 많은 학자이기도 합니다. 이쯤 되면 일본에서 진보주의 지식인들을 가르키는 리버럴 지식인으로 지칭해도 될 만한데요. 개인적으로 생각하건대, 저자와 같은 지식인들은 일본에서 아주 귀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이 책은 원제, "ベーシック・インカム入門"로 지난 2009년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18년 12월 번역 출판 되었습니다.

이미 모두가 알다시피 근래 들어 기본 소득에 대한 여러 논의가 있어온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이 기본 소득에 대한 신자유주의자들의 강고한 비난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고 마시지도 말라'는 금언과 더불어, 만연한 능력주의 사회에서 꽤 왜곡된 관념들이 논의 자체를 꺼내지도 못하게 한 원인이 되었는데요. 이 글의 서두에서 저자가 기본적인 사회 부조의 원리를 도입에서 꺼내 들었을 때, 근래의 정치사회적 관념들이 과거로 회귀하는 경향이 있다고 하는 점에서 아마도 허버트 스펜서 류의 사상에 기반한 사회진화주의적인 극단적 관념에 이 기본 소득에 대한 총체적인 거부가 연계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이미 서구 유럽은 신자유주의가 사회 전체를 개조시키기 이전부터 이러한 사회진화론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은 곳이기도 한 데요. 저 뿐만 아니라 많은 사상가들이 인정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한, 체제 전반이 인간 자체를 위한 것이어야 하지 그것이 오도 되어 다른 것을 용인하고 지지하는 것에는 거부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주 교묘하게도 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생산적', '생산성'이라는 단어를 마치 자본주의가 사회학을 지배하는 것처럼 무분별하게 차용하는 것에 대해 반대한다는 입장을 먼저 밝혀두고 싶습니다.

저자는 글 서두에서 자신도 1990년대 초 기본소득을 처음 접했을 때 강한 혐오감을 느꼈다고 회고하고 있는데요. 일용자 노동자들이 아무런 희망도 없이 어슬렁 거리는 것을 제대로 인지하고 못하고 그저 외형적인 현상으로 기본 소득이 저러한 문제를 일으키는 것으로 이해했던 모양입니다. 이에 저자는 꾸준하게 사회 부조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회 밑바닥 계층에 대한 돌이킬 수 없는 낙인 효과에 대해 강력하게 비판을 가하면서 사회 논리가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것에 대해 깊은 회의를 보이고 있습니다. 저는 기본소득도 이러한 대다수의 시각에 몰이해 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지금도 이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 자체를 이념적으로 몰고 가서 그에 대한 아무런 기본적 이해도 없이 그저 공격하는 데 여념이 없는 자들이 너무나 많은 실정입니다. 전반적으로 사회가 이렇게 된 연유에는 저자의 언급대로 '복지 국가 담론'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점령 혹은 파괴에 있다고 볼 수 있을 텐데요. 당시 신자유주의를 주도한 세력들이 먼 미래의 시민들의 분리를 조장하려고 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사회 부조와 복지에 대한 문제에 있어 유독 시민들이 파편화에 이르고 있는 점은 매우 불행한 현실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글 초반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제안으로 시작되는 '보장 소득'은 모든 시민들이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길을 제시한 것으로도 여겨집니다. 이 부분에서 킹 목사의 대단한 점은 흑백의 인종 갈등의 진보적인 입장 뿐만 아니라 저소득, 미혼모, 장애인 계층에게도 관심을 갖고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다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매우 명예롭고 지대한 권력을 가진 목사들 대부분이 그러한 것에 관심도 보이지 않는 점은 유감스러운 부분이기도 한데요. 단순히 목사와 같은 종교 지도자들을 그저 직업 선택의 과정에 있는 직업인으로 치부해야 하는지는 아마도 자신들이 더 잘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즉, 킹 목사의 이런 제안은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방편이면서, 민주주의와 기본소득이라는 중요한 관점에서 주도권을 쥘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진정한 민주주의 실현은 시민들의 충분한 기본소득 보장에 달려 있기도 한 것이죠.

또한, 버틀란드 러셀 역시 자신의 다른 논저에서 킹 목사와 동일한 관점을 피력하기도 하였는데요. 러셀은 여기에서 한 술 더 떠서, 모든 시민들에게 중간 계층 이상의 경제적 삶을 보장하는 것이 사회에 중요하다고 여기고 있었습니다. 더불어 실질적으로 시민들의 노동 시간을 줄여서 도리어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노동에 있어 보다 창조적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요. 저도 이런 주장에 적극 동의하는 편입니다. 지금에서야 점진적으로 개선된 평가를 받기 시작하는 슘페터조차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노동자들의 노동 시간에 대해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기도 했는데요. 단순히 자본가들이 일반 시민들의 노동을 착취하고 있다는 표면적인 평가를 넘어서 시민들 대부분에게 충분한 여가 시간을 보장하는 것이 소위 생산성 확대에 일견 도움이 되는 일일 것입니다. 제가 여기서 자본가들이 시민들을 노동 현장에 더 많이 붙잡아 놓는 관계로 이들이 정치와 더 멀어지게 한다는 음모론을 믿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본가들 대부분이 독점적 위치에 서는 것을 선호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법률적 회피가 가능하게 될 것 인지를 드러내는 그렇지 않든 고민하고 있는 점은 분명합니다.

야마도리 도루의 기본소득에 대한 여러 논증들 가운데 제가 더 주목하게 되는 것은 시민들의 보다 나은 소득으로 인한 실질적 자유에 대한 가능성입니다. 여기에 인용된 판 파레이스의 분석대로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오늘날 사회에 "선하다고 여기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뜻하는 고대인의 자유"에 거부감을 갖고 있다는 점은 아주 명백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인정하는 제도들 자체가 인간 사회의 선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겠지만 실질적으로 현실에서는 그렇지가 못합니다. 도덕, 도덕주의가 거세된 신자유주의의 문제는 물론이고 거의 지상 과업의 관념으로 자리 잡은 능력주의가 인간의 이기심과 결국은 차등의 자유를 조장하는 논리를 더욱 강화시키고 있는 실정입니다. 금권 정치에 지배를 받고 있는 미국 정치는 물론이고 아직은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는 유럽의 지본주의 정치도 역시 마찬가지로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형상입니다.

끝으로 저는 저자의 이 글을 통해, 기본소득의 논리가 어느 정도는 페미니즘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지금 여성계가 어떤지는 모르겠지만 1970년대에는 '가사 노동'에 대한 실제적인 노동력으로의 정산이 가사 활동 전반을 여성들의 전유물로 고착화 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 대해 동의하게 되었는데요. 법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게 하는 이러한 가사 노동의 논의 자체가 이러한 위험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재분배 중시와 실질적 기본 소득이라는 논의 자체가 앞으로 정치를 망가뜨릴 수 있는 '과두제 출현'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고 생각하는데요. 뒤에 여러 도표와 자료들로 구사되는 저자의 논의가 일정부분 설득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즉, 기본소득에 대한 여러 선한 효과와 기능이 충분히 입증되고도 남지만 우선적으로 가장 중요한 비용의 문제는 무시할 수 없기도 한 데요. 일반적인 복지 국가의 담론에서 어떤 사람들이 사회적 부조를 받을 수 있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철저한 조사와 가계 상황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전제 되어야 하는 만큼 기본소득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개방된 논의가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기본소득과 시민들이 원하고 바라는 실질적인 제안에 대해 학계와 시민들간에 폭넓은 논의와 더불어 정치권이 이를 지금까지도 한 발 이상 나아가지 못하게 했던 이념적이고 반자본주의적 낙인은 시급히 철회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집니다.



-저자 역시 강조하고 있는대로 기본소득 담론을 연구하고 주장하는 경제학자가 학계 내부에서 비주류로 치부되고 있다는 것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반해, 고령자도 장애인도 아닌 노동할 수 있는 빈곤자(워킹푸어)는 구제 받을 필요가 없는 빈민으로 간주해 그들에게 노동규율을 철저하게 심어준다는 방침을 취했다

미디어에서는 ‘부정수급‘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는데, ‘부정수급‘은 자주 보도되는 반면 포착률에 대해서는 눈에 띄게 침묵한다

또한 ‘열등처우 원칙‘이 주장되어 복지수급자는 일반시민보다 열등한 처우를 받아야 한다고 여겨졌다

사회가 실업자가 늘어나면, 일본의 생활보호 같은 제도의 수급자는 증가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는 제도가 상정하고 있는 범위 밖이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여론과 반발을 초래하고 한편으로는 수급에 따른 차별과 수치심(낙인)이 커지는 경향이 있다

즉 ‘노동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지 않는 비판이다. 분명 다른 사람과 협동하거나 자연에 작용을 가함으로써 개인이 성장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예노동이든 임금노동이든 가사노동이든 그 밖의 다른 형태의 노동이든, 노동을 타인에게 강제할 때 이 표어가 나오면 주의하는 것이 좋다

그런데 보통선거를 양보할 수 없는 전제로 삼으면 역으로 ‘민주주의가 충분히 기능하려면 시민권으로서 기본소득이 지급되어야 한다‘는 논리가 성립된다

러셀은 어떠한 논리로 이런 제안을 했던 것일까. 그는 먼저 "개개인이 일을 하지 않고도 평범한 수준의 안락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다면, 그 사회는 필요한 만큼의 노동량을 달성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제기를 설정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