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 이전의 자유 교유서가 어제의책
퀜틴 스키너 지음, 조승래 옮김 / 교유서가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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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11월, 영국 맨체스터 근처의 올덤에서 태어난 퀜틴 스키너는 부친인 알렉산더 스키너와 모친인 위니프레드 스키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부친은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특이하게도 서아프리카에서 공무원 생활을 했습니다. 스키너는 7세가 되자, 7세부터 18세의 남학생들을 교육하기 위해 설립된 베드퍼드 스쿨에서 본격적인 교육을 받게 됩니다. 그의 친형과 마찬가지로, 케임브리지 대학의 곤빌 앤드 카이어스 칼리지에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여, 1962년 역사학과에서 최우등으로 졸업하게 됩니다. 졸업 후, 케임브리지 대학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의 교수로 일하기 시작했고, 2008년 런던 대학으로 자리를 옮기기 전까지 그곳에서 일하게 됩니다. 스키너는 1981년부터 영국 아카데미의 회원이었고, 미국 예술 과학 아카데미(1986), 유럽 아카데미(1989), 미국 철학회(1997), 오스트리아 과학 아카데미(2009), 덴마크 왕립 아카데미(2015) 등을 포함한 여러 국가 아카데미의 외국인 회원으로 참여합니다. 지금까지 그는 정치사상사의 '케임브리지 학파'의 설립인 중 한 명으로 여겨지며, 정치적 글쓰기를 학문을 탐구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특히 고전 텍스트를 연구하고 이를 자신의 글에 자발적으로 인용하며, 자신이 무엇을 말하는지 명확한 근거에 의해, '텍스트의 원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이는 일반적인 텍스트가 문화 및 정치 담론화에 기여할 수 있다는 것을 명확히 한 것으로, 그가 단순한 강단의 지식인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연구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겁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Liberty Before Lberralism"으로 지난 1998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6년 2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식하고 있듯이 자유라는 단어의 기본 의미와 어쩌면 정치적 신념이 투영되어, 좀 더 확장된 함의는 이를 받아들이는 개인의 차이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역사상, 과거 첨예한 냉전 시기에서 구 소비에트 연방에 맞선, 소위 자유로운 미국과 이를 따르는 서유럽의 '자유'로 어느 정도 이해하고 있는데요. 이는 이 글의 역자와 더불어 저자인 퀜틴 스키너가 공통적으로 인식하는 바대로, 냉전 시기에 '자유라는 관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아이제이아 벌린 (다른 말로 이사야 벌린)의 '소극적 자유'를 비판의 틀로 다루고 있습니다. 벌린의 이 소극적 자유는 아주 간단히 말해, 누가 나를 방해하거나 어떤 간섭이나 제약 없이 하고 싶은 바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자유'라는 이름으로 확산되어 왔습니다. 특히 저로서는 1980년대부터 경제적 헤게모니인 동시에 사회 지배적인 관념이 되었던, '신자유주의자들'이 그토록 '내재된 신념'처럼 부르짖었던 것이 바로 이 '자유'였습니다. 물론 이들에게는 '우선하는 시장의 자유'를 포함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 의미심장한 벌린의 '소극적 자유'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유럽의 그야말로 자유라는 의미의 '확신하는 자기 결정'이 됨으로써, 이것에 대한 면밀한 분석과 사회학과 정치학의 구조적인 기준과 잣대로 시대에 맞게 분류하고, 더 나아가 앞선 틀로 '재의미화' 할 수 있는 학문적 가능성 마저 원천 봉쇄되어 왔던 것이 이 자유라는 가치를 둘러싼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어느 정도 필립 페팃과 인식의 궤를 같이 하고 있는 '역사학자' 퀜틴 스키너는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에 많이 경도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세세한 명칭에 있어서, 과거 찰스 1세 시기에 등장했던 '신로마적 이론'에 그 연원과 한때 신로마적으로 해석된 자유가 어떻게 당시 영국 지식인들의 주제가 되었는지를 저자는 논하고 있었는데요. 도입에서 설명한 벌린의 '소극적 자유'가 그저 자신의 행동 자유, 즉 어떤 제한이나 간섭 없이 내가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면 그것이 자유의 본질이라는 해석에 저자는 몇 가지 반론을 제기합니다. 만약 과거의 노예주들이 남들보다 좀 더 선의와 아량을 갖고 자신이 소유한 '노예'에게 약간의 행동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면, 이 노예는 과연, "자유로운 상태인가, 혹은 자유를 향유하고 있는가" 라고 명확히 말할 수 있는지에 대해 회의적인 의견을 보탭니다. 이는 그저 '자유롭게 행동할 자유'만을 강조하고 이것이 인간 자유의 핵심이라고 보는 것을 비관적으로 보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벌린의 자유가 명확한 인식의 한계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데요. 이 소극적 자유에 극적으로 대비된 인식이 바로 '신로마적 자유'입니다. 이를 아주 간단히 언급해 보자면, 진정한 자유란 타인은 물론, 어떤 권력이나 체제에 지배 당하거나 예속된 상황을 극복한 '대의'로서의 자유를 뜻합니다. 우리의 가까운 역사에서, 5공화국 시절에 그나마 알량하게 누려왔던 시민들의 자유, 그리고 스포츠와 같은 허접한 취미, 여가 생활을 즐길 수 있던 것을 그 사회의 개방성이라고 지칭했던 당시의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의 답습된 발언 등을 기억합니다. 민주주의와 하등 상관 없는 정권이 시민들에게 배려하는 듯 보이는 알량한 자유란 바로 그런 의미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18세기 공리주의의 역사가 태동하기 전까지, 영국이 찰스 1세의 처형을 계기로 아마도 진정한 자유, 즉 왕의 권리나 권의에 예속되지 않는, 자유의 본질에 대해 당시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분명해 보이는데요. 그 시절의 논란을 일으켰던 토머스 홉스는 지금에야 대단한 사상가로 추앙받고 있지만 그 괴랄하기 짝이 없는 '리바이어던'에서 "국가의 권력과 그 신민들의 자유 사이의 관계"를 드러냅니다. 모두가 행하는 총체적 소산의 무언가인 리바이어던의 핵심은 법의 규제가 어느 정도 명시적으로 규명된 상황에서 소위 이 체제하에 놓인 신민들의 자유가 어떠한 맥락을 갖고 있는지 냉정하게 분석했던 것이 바로 홉스였습니다.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법의 강제력을 부과하는 것이 일종의 자유라고 여긴 것이 확실히 그라면, 약간의 상상을 보태어, 소극적 자유와 신로마적 자유를 긍정하는 양쪽의 세력에게는 결과론적으로 악몽이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그려집니다. 그리고 여기서 소개되는 홉스의 또다른 결론인, "일치해야 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신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대로 의미심장합니다. 강력한 주권자가 존재하고 그 주권자가 다수의 신민들을 지배하지 않는 경우, 신민은 그의 재량대로 무엇을 할 수 있거나 혹은 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것으로, 홉스 역시 이율배반적이지만 자유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고 판단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가 소개하는 니덤의 사상은 그 시대의 진보적 관념을 엿보게 합니다. "모든 정부의 목적은 인민이 지배자나 다른 동료 시민들에게서 압박과 억압 없이 그들의 권리를 확고히 누리게 하여 이익과 편안함을 누리게 하는 것이고 또 그래야만 한다"는 일종의 명시는 자유와 또다른 자연권에 대해 겸허히 숙고하게 만듭니다. 사실 저자인 스키너가 발굴한 그 시대의 저술가들이 거의 공통된 목소리로 말했던 것은 자유라는 본질적 의미가 결국엔 시민들(혹은 신민들)의 자연권 개념과 맞닿아 양자가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점입니다. 그래서 절대 왕정의 국왕의 권리 내지는 권위가 그 신민들을 사실상 옥죄게 될 때, 귀족을 비롯한 중간 계급의 헌정적 함의에 대한 요구 역시, 비슷한 강도로 도출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단순히 자유라는 개념이 그저 일개 인간의 제한적인 행동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집중된 권력의 왜곡이 오로지 한 인간으로부터 체제적 종속으로의 폭력으로 시발되어, 결국 왕의 목조차 베어 버릴 수 있는 '목소리들의 요구'가 역사의 어법으로 '인정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역사의 행로에서 그 이전의 수많은 사람들의 요구가 지배와 예속의 굴레에서 억압되어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맥락으로 '역겨운 obnoxius 조건'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됩니다. 이는 누군가의 선의에 의지해야만 할 정도로 쉽게 곤경을 벗어날 수 있는 상황 등을 뜻하는 것인데요. 이렇게 신로마적 자유의 정의는 아주 명백하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떠한 사람이 피할 수 없는 지배나 예속, 혹은 종속 상황에 놓여져 있는데도 그저 알량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자유만이 주어져 있다면, 그 사람이 과연 진정으로 '자유로운 인간'이냐는 물음은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개인적 자유에 대한 시대적 고찰, 혹은 사상의 분기에 따른 분석을 거쳐, '자유국가'에 대한 이미지인 "자유국가 안에서만 개인들은 자유로울 수 있다"는 일종의 유토피아적 시각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때의 국가들은 정복이나 전쟁을 통한, 국가의 영광 내지는 승전의 열매를 쟁취하기 위한 노력들로 국한되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바와 같이, 개인의 자유는 체제 안에서 확실히 부차적인 문제였을 겁니다. 이러한 가운데 니덤의 진술로 보건데, 자유의 또다른 부분이 모든 사람의 시민적 권리와 수준의 향상에 있다는 것을 주지한다면, 자유 국가에서 개인이 시민적 자유를 구가할 수 있다는 홉스적 이해는 어느 정도 그 개념적 이해가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전의 대부분의 왕정 국가들은 왕이 신민을 자신의 재산으로 인식하고, 신민들은 왕의 예속된 상태로 그런 상황에서 왕은 총신의 발언에만 주목하여, 대체로 권력의 방향은 일방적이었습니다. 여기서 국왕은 신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자신의 임의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짐은 하늘의 명령을 받은 국왕이다"와 같은 절대 왕권을 드러냅니다. 그래서 이 책에선 엘리자베스 여왕조차도 폭군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왕의 임의적 재량권이나, 프랑스의 루이 14세가 광범위한 조세 권리를 가졌던 것처럼, 국가는 어쩌면 국왕의 소유물이라고 볼 수 있었습니다. 결국 이러한 역사 과정을 헤쳐 나오는 가운데, 시민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이들이 직접 정치에 참여하거나, 혹은 입법에 관여하는 수 밖에는 그 인식과 현실의 합치의 유일한 대안이었을지도 모릅니다. 설사 그것이 유토피아적 발상이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여기에 더해, 신로마적 자유의 퇴행과 원래 신로마적 이론이 강조했던 공공선에 대한 후퇴 내지는 공공성의 상실 역시, 자유국가에 대한 맹목적 요구가 그 파급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조심스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이제서야 언급하는 것이지만, 앞선 벌린의 '자유'와 대비되어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공공선에 이바지하게 되는 공적인 자유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최근에 68혁명의 실패로 좌파가 지녀왔던 공공성의 가치 추구와 공공선에 대한 개념적 혹은 실제적 가치가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을 목도했습니다. 흘러간 샹송 가수인 에디트 피아프의 애처로운 목소리 만큼이나, 공공선에 대한 시민들의 인식은 지리멸렬을 넘어, 그저 애처로운 수준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자신을 분명하게 '역사가'로 지칭하는 퀜틴 스키너가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자유에 대한 소위 변질된 신자유주의자들(제한된 권력으로서의 자유를 사실상 특정 계급에게만 용인하자는)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기본적인 시민적 권리마저 누릴 수 없는 지경에 이른 (신자유주의자들의 대대적인 사회 부조와 정부 지출을 철회한 시점에서, 그 이유는 무엇보다 자본의 이익을 위해) 작금에, 과거 공화주의의 부활을 외치는 여러 학자들과 그 중에, '공화주의적 자유'를 도출한 필립 페팃이 주목 받는 이유는 이처럼 그럴 수밖에 없는 맥락을 갖고 있습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명백한 신자유주의 이론조차도 망상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자리를 비켜나고 있지만 그 대폭락의 2008년 이후에도 여전히 그 체제는 유지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락에서 언급한 공공성의 추구와 공공선을 통한 공적인 자유의 복귀 내지는 부활은 이만큼 수많은 시민들의 삶을 위해 필요한 선제 조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샹탈 무페가 떠오르긴 합니다만 벌린을 위시한, 제한적이고 다른 매개로 시장 친화적이면서, 부를 가진 계급에게 더 많은 자유를 부여하는 민주주의에서 도저히 용인될 수 없는 것들을 치워버릴 수 있는 혁명적인 진보 세력(허위의식에 사로 잡힌 자들이 아닌 알짜배기와 같은)의 부활이나 대응 세력이 필요한 것은 분명하나, 앞선 자유로 대표되는 제한적인 자유 담론은 이미 극단적 헤게모니가 된 지가 이처럼 오래 되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끝으로 스키너의 이 책을 통해, 제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부분은 "공화주의만이 진정한 자유를 보장할 수 있다."는 문구였습니다. 다만, 겉으로 자유주의와 자유 세계로 포장하는 국가나 사회의 자유로서, 그 한계를 명확히 한 것도 인상이 깊었는데요. 일전에 다른 책에서, 권위주의 체제에 놓여 있는 국가의 시민들 가운데, 적지 않은 수가 "자신이 자유를 누리고 있고 또한 자유롭다"라고 조사된 어떤 설문을 보면서, 자유의 헤게모니적 차원의 비극적 운용 방식은 정권의 차원에서 차등적으로 이뤄질 수 있다는 점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글의 후반부에서, 저자인 스키너가 "현대 정치철학에서 자유주의 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위치에 오르면서, 신로마적 이론은 시야에서 너무나 멀리 사라져 오로지 자유주의적 분석만이 관련된 개념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정연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것이다"라고 일침을 가하기에 이릅니다. 이처럼 벌린이 의도치 않게 확산시킨 '강제의 제거'로서의 자유가 궁극적인 지배와 예속 상태로서의 해방에 가까운 자유를 압도하게 됨으로써, 벌린 자신은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어떠한 명성을 얻은 점은 분명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물론 이 지점에서, 민주주의 체제하의 자유의 본질이나, 국가가 시민들의 자유를 어디까지 보장할 수 있겠느냐와 같은 건설적인 논쟁이 필요한 것은 거듭 강조할 필요가 없을 겁니다. 여기에 권력의 분립으로 인한 분명한 이득, 혹은 '모두가 평등한 자유'를 기반으로 한, 민주주의적 가치의 실체적 복귀만이 시민들에게 더 확실한 자유를 보장하는 길이 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이러한 "공화주의적 자유론을 발굴해 내는 작업이 가치 있는 이유는 그것이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헤게모니에 도전할 수 있는 소중한 사유의 방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라는 제언은 더욱 귀담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본문 91페이지에 띄어쓰기 오류 한 곳이 있었습니다.            



적극적 자유가 비합리적인 것과 부도덕한 것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좋은 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행해야 된다는 목적론을 내재하고 있다면, 소극적 자유는 그러한 목적론을 배제하는 다원적 개방적 개념이다.

예를 들어 인자한 주인 밑에서 사는 노예는 아무런 간섭 없이 살아갈 수 있지만 자유롭다고는 할 수 없다. 왜냐하면 노예는 주인의 재량에 종속되어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그의 자의적 지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자신이 종속되어 있는 사람의 의지에 거스르는 언행을 했을 때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무서워서 스스로를 검열할 수밖에 없는 사람은 자유롭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유국가의 정부는 이상적으로는 각각의 개별적 시민들이 입법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국가 안에서, 국가 주권의 권위에 의해 안전을 보장받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신민의 자유일 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홉스가 말하는 자유는 소극적 자유일 수밖에 없다.

홉스의 또다른 결론은, 일치해야 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 한, 신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자유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이다.

"모든 정부의 목적은 인민이 지배자나 다른 동료 시민들에게서 압박과 억압 없이 그들의 권리를 확고히 누리게 하여 이익과 편안함을 얻게 하는 것이다."

정치체라는 메타포의 좀 더 심오한 헌정적 합의는 자유국가의 정부는 이상적으로 각각의 개별적 시민들이 입법에 참여할 수 있는 평등한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헌정 제도 아래에서 산다는 것은 정치체가 의회 안에서 대표되는 국민의 의지가 아닌 다른 의지에 의해 행동할 수 있는 위험에 빠지기 쉬운 상태로 산다는 것이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이론가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국가의 자유였지 개별적 시민들의 자유는 아니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자유국가에서 사는 것의 공통된 혜택은 "자신의 소유물을 자유로이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구가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마키아벨리는 선언했다.

단지 정치적으로 종속되거나 혹은 의존하기만 해도 그로써 정부가 생명, 자유, 재산을 강제로 혹은 강압으로 박탈할 수 있는 위험에 노출되기만 해도 자유는 상실된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아는 것은, 역사가들은 그들의 능력이 허락하는 한 진지하게 과거에 대해서 서술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뿐이다.

현대 정치학에서 자유주의 이론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위치에 오르면서, 신로마적 이론은 시야에서 너무나 멀리 사라져 오로지 자유주의적 분석만이 관련된 개념들에 접근할 수 있는 유일한 논리정연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널리 퍼진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는 언제나 그렇게 해주는 것과 동시에, 시민들이 피할 수 있도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타인의 선의에 종속되는 것을 막아줄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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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감성 디어 제인 오스틴 에디션
제인 오스틴 지음, 김선형 옮김 / 엘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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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5년 12월 16일, 영국 햄프셔주 스티븐턴에서 태어난 제인 오스틴은 성공회 교구 목사로 재직한 아버지와 유서 깊은 가문인 리 가(家) 출신인 어머니 밑에서 자라납니다. 그녀의 부모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삶의 지향에서도 냉정하고 합리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처음에 오스틴은 가족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인세를 통한 경제적 이득에도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독신인 그녀가 안정적으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입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처음 익명으로 출판된 "이성과 감성 (1811)"을 비롯, 순차적으로 "오만과 편견 (1813)", "맨스필드 파크 (1814)", "에마 (1816)" 등을 내놓게 됩니다. 특히 에마는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생전에는 압도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녀의 사후 "노생거 수도원"과 "설득"이 출간되었고, 다른 작품인 "샌디턴"은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녀의 작품들은 상대적으로 불완전한 상황이었던 가문의 지위를 계승한 유산 계급의 여성들의 삶과 연애를 다루었는데, 특히 이 여성들의 지위 추구와 경제적 안정을 위한 "결혼"에 큰 관심을 기울이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앞선 배경의 여성들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 아니라 세태에 대한 비판인 동시에 이런 사회적 구조 자체를 일종의 "사실주의적 글쓰기"로 드러낸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녀의 여러 작품은 이미 드라마 혹은 영화화가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작품은 원제, "Sense and Sensibility"로 지난 1811년에 출간되었고, 제가 구입한 번역본은 2025년 12월에 출판된 판본입니다.

얼마전에 읽었던 존 스펜스의 제인 오스틴 전기를 통해, 이 이성과 감성을 슬슬 손에 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했는데요. 그동안 그녀의 다른 장편들을 시공사 판본을 통해 읽었던 만큼 같은 출판사의 번역본을 구하려고 했으나 알라딘에서 검색중 이 번역본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확실히 수려하고 적확한 번역이어서 개인적으로는 상당히 만족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역자의 상세한 주가 작품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기도 했는데요. 에마를 비롯, 그녀의 다른 작품에서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의미부여한 단어의 상세한 설명을 첨부한 점도 역자의 큰 노고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서식스 지역의 존경받는 영주였던 대시우드 일가는 정상적인 승계가 어려워지자, 당시 조카였던 헨리 대시우드에게 그 유산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는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안락한 삶을 영위한 이후, 세상을 등지게 되었는데요. 그에게는 전 부인에게서 얻은 아들 하나와 뒤이어 새롭게 맞이한 젊은 부인의 슬하에 세 명의 딸을 얻게 됩니다. 죽음을 앞둔 그는 장남을 통해, 새어머니와 여동생들을 살뜰히 보살필 것을 거듭 강조했는데요. 그렇지만 원래 귀가 얇고 줏대가 없던 장남은 마찬가지로 자신의 이익과 셈에 밝은 아내의 강요된 조언으로 끝내 새어머니와 여동생들이 같은 교구이지만 다른 마을인 데번셔로 이주하게 만들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러한 절차에는 대시우드 부인의 체면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었는데요. 이 소설의 배경으로 등장할 바턴 파크가 그녀들이 새롭게 삶을 시작할 곳이었습니다. 남편을 사별한 여자가 의붓 아들과 같은 집에서 쉬이 지낼 수 없는 사정은 이미 짐작할 만한 부분인데요. 당시 영국의 사회 분위기를 보건대, 가정을 이룬 상속자의 일가와 돌아가신 아버지가 남긴 새어머니와의 합가가 녹록치 않은 일이었음은 새삼 강조할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이 대시우드 부인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세 딸이 있었는데, 맏딸인 엘리너와 둘째인 메리앤, 그리고 마거릿이 그들입니다. 미스 대시우드로 불리게 되는 첫째 엘리너는 매사가 신중하고 자신의 감정에 매몰되지 않는 분별력과 통제력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이미 작가인 제인 오스틴에게 이 '분별 sense'이라는 단어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본성을 규정하는 중요한 기준이기도 한데요. '분별력을 잃은 인간'에 대한 오스틴의 일관된 냉소는 작중 화자의 입을 통해, 여실히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뒤이어 둘째인 메리앤은 열일곱 살로 흔한 그 나이대의 소녀답게 감정적이고 또한 자신의 기준보다 떨어지는 사람들에 대해, 가차 없이 대응할 정도로 상당히 자기 본위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메리앤의 매력적인 용모는 모두가 인정할 정도로 대단한 것이어서 우리가 보기에 여러 인물들의 대화나 행적 등으로 조금씩 드러나는 그녀의 결함 자체가 크게 문제시 되지 않을 정도로 가히 범접할 수 없는 후광이 되기도 했습니다. 여전히 이들 자매에 다소 인색한 의붓오빠인 존 조차도 메리앤의 아름다운 외모를 여러 대화에서 꼬집어 칭찬하기도 했습니다.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막내인 마거릿의 비중을 거의 두지 않고, 그저 어머니의 곁에 자리한 딸로 국한시킵니다. 이와는 달리 엘리너와 메리앤을 같은 비중의 캐릭터로 두고 이들을 두고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두 자매의 심경 변화와 내면의 성장 등을 이 작품에 드러난 여러 주제 의식들과 맞물려, 서사의 감정이 고조되기도 합니다. 특히 2부에서 벌어지는 충격적인 사건을 겪고 내면의 붕괴와 절망을 경험하는 메리앤의 이율배반적인 성장은 쉽게 예견되지 못할 정도로 대체로 놀라운 부분이었습니다. 이성을 잃고 감정이 무분별하게 폭발하는 듯보이는 행동의 결과로 메리앤이 겪는 그 붕괴의 서사는 쉽게 극복될 수 없는 문제로 여겨지기까지 했는데요. "사랑에 빠진 젋은 아가씨"에 대한 당시 문학의 치명적인 서사들은 인간으로서의 메리앤이 나락으로 떨어지게 됨을 쉽게 예견하게 만들었습니다. 짐작할 수 있는 아주 평범한 구조의 대미였다면 말이죠. 저는 그저 작가인 오스틴이 독자들에게 어떠한 교훈을 남겨주기 위해 누구도 예상 못한 전개를 더한 줄 알았습니다. 또한 엘리너 역시, 자신이 오랫동안 흠모해 왔던 남자의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전해졌기에, 어쩌면 이 자매의 붕괴를 다면적인 측면에서 부각시키기 위한 서사 구조로도 읽혔습니다. 그럼에도 이는 '사랑-배반-증오'의 메커니즘으로 남김없이 파괴되는 인물로 유독 메리앤을 조형한 것이 아닌가 싶었지만 이런 제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가게 되었습니다.

맨스필드 파크의 헨리 크로퍼드가 절로 떠오를 정도로 불쾌한 인물인 존 윌러비는 자신의 체면과 지위, 그리고 경제적 이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입니다. 이러한 본성의 증거보다도 더 과거의 어두운 족적을 태연히 남긴 윌러비는 작품의 3부 중후반까지 개심의 가능성조차 없던 인물이었습니다. 앞선 '맨스필드 파크'에서 헨리 크로퍼드가 젊은 여성(물론 유부녀를 포함해)을 매혹시키는 것을 그저 자신의 자존감을 재확인하고 동시에 고차원적인 유흥거리로 여기는 일련의 '재미'로 점철된 인물이었다면, 윌러비는 자신의 체면을 위한 소비 유지와 돈 나올 때를 귀신 같이 찾는 '자기 이익의 화신'으로 대비됩니다. 그럼에도 윌러비는 3부 후반부에서 죽을 열병에 걸려 하루하루 생명이 위독했던 메리앤에 대한 죄책감과 자신에 대한 수치심으로 말미암아, 엘리너를 증인으로 세워, 자신의 죄를 어느 정도 회개하게 되는데요. 바로 이 장면에서 엘리너의 남다른 인격과 타인에 대한 연민을 서사로 드러내는 동시에, 죽음의 문턱을 넘어선 메리앤에게도 그 이전의 자신과 완전히 다른 삶을 인정하게 되는 중요한 사건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자신보다 더한 언니의 고통을 알게 된 메리앤은 이제 자신의 남은 삶은 오로지 언니와 어머니를 위해 살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이 시점에서 메리앤은 전과 완전히 다른 인물로 그려지게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맨스필드 파크의 메리 크로퍼드가 절로 떠오른 인물인, 스틸 자매의 둘째, 루시 스틸은 그야말로 '자기 중심적이면서 그와 동시에 위선의 화신'입니다. "루시 스틸로 말하자면 예쁜 구석이라고 하나도 없는데 제 정신이 박힌 남자가 그런 여자를 조금이라도 사랑한다니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덧붙이는 것과 동일하게 외향과 내면이 부정적으로 일치하는 인물이기도 한데요. 여기에 매사에 자신감을 잃어 어느 정도 자기 혐오에 빠진, 메리앤과 마찬가지로 중요 등장 인물인 에드워드 페라스를 가히 제 손으로 옭아매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작가인 오스틴이 그 비중에 걸맞는 대단한 시련을 얹기 위한 착각이 들 정도로 에드워드와 루시를 비상식적으로 엮은 것이 아닌가 눈을 비빌 정도로, 엘리너를 향한 루시 스틸의 충격적인 고백의 1부 후반부와 사건이 계속 중첩되는 2부 후반부까지 더해지는 이들(엘리너와 루시 스틸)과 관련된 서사는 정말로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오로지 사람을 이용할 목적으로 접근하는 루시 스틸에게 한때, 어머니의 강압과 요구로 자신의 길을 찾지 못해 스스로 방황하기에 이르렀다는 에드워드의 그 지독한 사연이 어떻게 루시 스틸과 같은 '천연덕을 가장한 협잡의 화신 '에게 덜미를 잡히게 되었는지는 극의 개연성의 측면에서 지금도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루시 스틸과 같은 인물 조형에서 시골 처녀가 으레 갖는 순수성을 가면으로 삼아, 돈과 이익 그리고 평판을 교묘히 안으로 갈무리해, 주변 사람을 조정하고 이들의 언행과 지향을 자신의 사활적 이익으로 쓰이게 만드는 메커니즘 자체는 문학의 오래된 설정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시 스틸의 최종 행로는 가히 충격이라고 불릴만 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인 오스틴이 앞선 메리앤의 인물 조성에 큰 공을 기울였던 점을 수긍하면서도 이 루시 스틸 역시, 메리앤에 준하는 극의 전환을 소용돌이 치는 비중 있는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자신과 에드워드와의 약혼을 최종 국면에서 심각한 방해자가 될 수 있는 엘리너를 자신의 수중에서 '요리'하려고 했던 루시의 협잡은 믿겨지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이 루시 스틸의 배경이 될 수 있는 실제 인물을 작가인 오스틴이 어디서 찾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범인의 이해에서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던 형상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서신 교환에 있어 상대방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일반적인 관례임을 고려해 봤을 때, 자기 임의대로 엘리너에게 서신을 보내는 루시의 행동 자체는 그만큼 의미심장한 요소이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이 루시라는 캐릭터를 '나르시시즘'에 기반한 자기 이익 추구라는 설명을 넘어, 쉽게 예상할 수 없는 능수능란한 수단을 본인이 적극적으로 사용할 줄 안다는 점에서 부정적인 인물의 전형 이상의 입체적인 캐릭터라고 볼 수 있겠는데요. 루시가 대미에서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에드워드의 동생, 로버트와의 결혼으로 전환된 점은 실로 역겨운 감상을 남길 정도였습니다. 다만, 에드워드의 자포자기한 심정에서 비롯된 충동과 그런 결과물들의 서사가 극이 진행되는 가운데 연계에 따른 근거들이 다소 부족해 보여, 저로서는 아쉬운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아무리 우유부단한 인물이라고 해도 일찍이 엘리너가 극찬한 그의 양식과 이해를 고려해 봤을 때, 속수무책으로 루시에게 끌려다니는 그의 모습은 약간 의문인 상황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극의 서사가 진행될 수록 새롭게 인정되는 '두 명의 신사'와 연을 맺게 되는 엘리너와 메리앤의 해피 엔딩은 그 과정에서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건들과 이것에 발을 걸치게 되는 주변인들의 때론 단순하지만 그 이면의 복잡한 심상,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높낮음을 몸소 겪으면서 성장하는 이 두 자매의 생생한 모습은 이 작품을 읽어야만 하는 근본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메리앤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고 스스로 '분별있는 여성'임을 쟁취하게 되는 일련의 서사들은 브랜던 대령과의 화촉으로 귀결되어, "신사는 마땅히 분별있고 조리있는 여성을 만나게 된다"는 금언을 새삼 곱씹게 되었습니다. 전체적인 측면에서 이러한 교훈 때문에라도 메리앤의 변신(?)은 참으로 기꺼웠는데요. 여기에 극중, 사람과 가문을 오로지 돈으로 판단하는 존 대시우드 부부와 화려한 외모는 가졌지만 그외에는 전혀 갖추지 못한 파머 부인과 결혼한 파머의 자포자기식의 불행한 일화는 결혼에 대해 숙고하는 이들이라면 충분한 교훈을 전해줄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만, 이 작품을 통해, 저는 "평범한 어머니는 딸들 가운데 자신과 가장 닮은 딸을 편애할 수밖에 없다"는 사소한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인 오스틴의 문장력과 이를 통해 이끌어가는 서사의 집요함에 저로서는 감탄을 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 엘리너라는 인물의 자기 통제력에 기반한 인물됨과 분별력에 기반한 타인을 인식하는 태도는 거의 일관되었고 당장 느끼는 자신의 기분보다 일의 선후 과정을 살펴보는 (이성적) 접근은 놀라울 정도였습니다. 과연 이런 사람이 주변에 실제로 존재할 수 있겠는가에 거듭 고민해봐도 대체로 누구에게나 회의적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엘리너는 동생의 감수성을 근심스러운 눈길로 지켜보았지만 헨리 대시우드 부인은 그런 면을 지닌 둘째 딸을 편애하고 끔찍이 사랑했어요.

훌륭한 지성과 반듯한 원칙이 눈에 덜 띄는 건, 순전히 그이가 수줍은 탓에 종종 입을 다물고 말을 아끼기 때문이고.

윌러비가 물려받을 엄청난 재산을 알게 된 후에도 돈을 생각하고 둘을 결혼시킨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메리앤의 어머니 역시, 주말이 오기 전 이미 결혼을 바라고 기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메리앤은 진짜 수치는 마음을 터놓는 게 아니라면서, 가리고 숨기는 거라면 무조건 질색했어요.

성질머리가 좀 삐딱해진 건, 아마도 같은 성별의 많은 이들이 그랬듯, 미녀를 선호하는 그 이해할 수 없는 취향 탓에 결혼했다가 자기 아내가 아주 어리석은 여자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스틸 자매라는 연구 대상은 이만하면 충분했어요. 천박하게 함부로 친한 척 들이대는 첫째의 어리석음은 칭찬할 구석이 하나도 없었고, 게다가 엘리너는 둘째의 미모나 교활한 표정에 눈이 멀지 않았기에 진정한 기품과 교양의 부재를 꿰뚫어 보았어요.

아픔을 무릅쓰고 과거의 슬픔과 현재의 굴욕을 털어놓은 대향에게 가장 큰 보람은, 메리앤이 가끔 그를 지켜볼 때 보이는 연민 어린 눈빛과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필요에 따라 혹은 자발적으로 대령에게 말을 걸 때마다 들려주는 온화한 목소리로 돌아왔습니다.

물론 루시는 내심 엘리너가 크게 낙심하길 기대했고, 심지어 에드워드가 자기를 지극히 사랑한 나머지 함께 있는 자리에서 애정을 숨길 자신이 없어 오지 못한다는 말로 아픈 마음을 더욱 후벼파고 싶어했지만요.

자기 이득이나 기분과 상관없이, 아무리 작은 약속이라도, 결코 허술히 보지 않고 반드시 지키는 사람이고요.

게다가 로버트는 명랑하고 무심한 태도의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 특유의 행복한 만족감에 젖은 채로 부당하기 짝이 없는 모친의 절연과 상속권 박탈을 만끽하고 있었고, 자신의 방탕한 생활 방식에 견주어 형에 대한 편견을 고집하고 있었어요.

엘리너는 움직임 없이 조용하게 정색한 채로 그 우매한 짓거리가 끝나기만 기다리면서, 치밀어 오르는 경멸을 뚜렷이 드러내는 눈빛으로 노려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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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6-03-03 1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가 너무 예쁘네요^^

베터라이프 2026-03-03 19:01   좋아요 1 | URL
이성과 감성도 번역판이 많은데 분량이 있는 만큼 양장으로 나온 것 같습니다. 실제로도 출판사가 표지 디자인에 신경을 많이 썼더군요.
 
제인 오스틴 - 세상 모든 사랑의 시작과 끝
존 스펜스 지음, 송정은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7년 11월
평점 :
절판


존 헌터 스펜스는 미국의 저명한 제인 오스틴 전문가로, 2003년 오스틴의 전기 영화인 '비커밍 제인 오스틴 (Becoming Jane Austen)'의 고증 자문으로도 참여했습니다. 그는 1945년 미국 조지아 주의 미첼 카운티 소재인 카밀라에서 태어납니다. 이후 그는 조지아 대학에서 영문학 학사 학위를, 그리고 뉴올리언스에 위치한 사립 연구 대학인 툴레인 대학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영국 런던의 공립 연구 대학인 킹스 칼리지 런던에서 최종적으로 박사 학위를 마쳤습니다. 그는 학위 취득 후, 사우디아라비아의 킹 사우드 대학과 일본 히로시마 대학 및 도시샤 대학에서 강의를 했습니다. 또한, 스펜스는 본인이 제인 오스틴 전문가로서 호주 제인 오스틴 협회의 편집 위원회에서 오랫동안 활동했지만 2011년 5월, 다소 불명확한 이유로 시드니 더블 베이에 있는 자택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가 집필한 '제인 오스틴 되기 (Becoming Jane Austen)'는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는데, 이 책은 "지난 25년 동안 오스틴과 관련해, 출판된 최고의 여섯 권 중 하나"로 평가를 받았고 제인 오스틴에 대한 방대한 사료와 개인 오스틴에 대한 성격과 인성, 그리고 그녀의 소설에 대한 스펜스 자신의 고유한 해석은 그의 놀라운 업적으로 평가를 받은 바가 있습니다. 따라서, 그의 이 책은 원제, "Becoming Jane Austen"으로 지난 2003년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07년 11월 번역 출판되었으나, 현재는 절판된 상황입니다.

존 스펜스의 이 글은 무엇보다 1장과 2장에서, 제인 오스틴의 가계를 치밀하게 분석하고 부계 뿐만 아니라 그녀의 외가 쪽의 가계도 적잖은 자료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특히 부계인 '오스틴 가'와 모계인 '리'가의 많은 인물들의 살아생전 행적 등을 치밀하게 조사했는데요. 여기에는 제인 오스틴이 어떠한 분위기의 가정에서 성장했고 그녀를 둘러싼 가족들의 내밀한 생활사와 더불어 먼 친척까지 관계도로 분류하여, 오스틴 가의 인적 가지들을 독자들이 한 눈에 조망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대략 1740년대부터 1810년대까지 오스틴이 살아간 시대상과 더 나아가 그때의 영국인들이 어떠한 사회상을 품고 인생을 살았는지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저자인 존 스펜스는 제인 오스틴이 남긴 작품들과 그녀 자신이 어떻게 연관되어 나타났는지 이 점도 주요 관점으로 해석했으며, 특히 개인적으로 궁금했던 그녀가 왜 결혼에 이르지 못했는지에 대한 '인연의 한계' 혹은 작가 스스로의 신중함 등을 빠짐없이 언급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확인된 여러 기록에 의해, 그녀와 언니인 카산드라와의 단순한 자매를 초월한 깊은 우정은 많은 '서간'으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다만 카산드라가 제인에게 보낸 편지들은 저자인 스펜스가 언급한 바와 같이, 거의 전부가 유실되고 말았는데요. 그럼에도 언니인 카산드라와 제인의 어떻게 보면 친밀하고 부모를 비롯, 동기 간의 이야기들이 후세에 전해지면서 이 두 사람과 전체적으로는 오스틴 일가를 살펴 볼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여기에는 제인과 아일랜드 출신의 톰 러프로이와의 짧은 인연이 젊은 시절의 열정으로 끝나자, 그녀는 그 과정에서의 이야기들을 함구하기에 이르렀는데요. 동생을 깊이 이해하고 있던 언니인 카산드라 역시 이에 동참합니다. 후에 작가로서의 명성을 얻은 제인 오스틴을 가리켜, 톰 러프로이는 젋은 시절에 흔히 볼 수 있었던 '찰나의 열정'을 인정했고 그것이 작가적 명성을 쌓은 제인 오스틴의 연결 고리를 그저 수긍하려는 러프로이 자신의 이기심의 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시사하는 바는 크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런 실패에서 제인 오스틴이 경험한 '결혼하지 못한 여성'에 대한 편견과 수근거림을 뒤로 하고 그녀는 더욱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결혼에 대한 감수성 자체는 오스틴에게도 중요한 문제였기에 그녀 작품 종종 보이는 "사랑하지 않는 상대"와 결혼하는 여성들에 대한 작가적 시선이 아마도 그녀의 숙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싶은데요. 이에 저자인 스펜스는 "오스틴 일가 대부분이 제 속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들이었지만 유독 제인 오스틴은 더욱 개인적 성향이 짙어졌고,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고 언급합니다. 


경제적으로 그다지 풍족하지 않은 조건에서 꽤나 까다롭게 굴 수밖에 없던 오스틴의 양친은 상대적으로 주변인들에게 '합리적인 인사들'이라는 평가를 종종 받게 됩니다. 그럼에도 오스틴의 형제들을 대부분 별 탈 없이 삶을 영위하게 되는데요. 큰 고난과 굴곡 없이 오스틴의 형제들은 스스로의 인생을 어느 정도 주도합니다. 토머스 나이트의 유산을 물려 받은 에드워드의 사례 뿐만 아니라 장남인 제임스 역시, 그러한 행운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특히 군에 투신했던 오스틴의 두 남동생의 여정은 바로 열정과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점철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자인 스펜스가 기록해 낸 당시 영국 사회의 일면들이 꽤나 흥미롭게 느껴지기도 했는데요. 앞선 오스틴 일가가 분주하게 연결된 혈연에 의해, 간혹 자식이 없는 일가 친척의 유산을 승계하고, 그런 경제적 이익을 얻는 과정에서 영국 사회의 일종의 '현실적 유산'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일종의 부동산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연간 수입에 의존하는 귀족 혹은 준귀족 계급의 경제적 안정에 대한 관념 등을 잘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특히, 오스틴의 외숙모인 리 페럿의 재산 승계를 바랐던 그 과정에서 오스틴 일가와 리 페럿 간의 밀고 당기는 양상은 그 장면 하나하나가 꽤나 인상이 깊었습니다. 후에 제인이 너무 아끼던 오빠인 헨리가 무리하게 운영하던 은행 사업이 파산하면서 외숙모에게 끼친 손해가 막심하자, 리 페럿이 보인 오스틴 일가에 대한 분노 역시, 새삼스럽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다만, 저자인 스펜스가 깊게 서술하지 않은 관계로, 1800년대 초반, 유럽 대륙에 벌어졌던 '나폴레옹 전쟁'에 대한 영향력과 그 파급이 그냥 지나치는 수준인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제인 오스틴 본인을 비롯, 그녀의 일가가 마치 유럽 대륙과 멀리 동떨어진 하나의 섬처럼 작용했던 영국에서의 삶이 그렇게 차분하고 고요할 수밖에 없던 점이 쉽게 믿겨지지가 않았습니다.

스펜스는 오스틴의 작품과 관련하여, 우선 '맨스필드 파크'를 언급합니다. 이는 그녀의 작품들에 있어 위계를 세운다면 이 작품이 우선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들고 있는데요. '오만과 편견'은 물론, 후에 등장하는 '에마'역시 쉽게 탈고를 끝낸 반면에, 맨스필드 파크는 그녀 스스로가 오래 고민했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제인은 '맨스필드 파크'를 1811년 2월경에 쓰기 시작해, 소설을 구상하는 데만 적어도 10년이 걸렸다."고 저자는 언급하고 있었는데요. 이 작품에서 패니 프라이스에게 상당 부분 자신을 투영한 오스틴을 저자가 따로 분석하면서, 그 시대를 통틀어 약간 괴상하면서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낸, '아주 못되 처먹은' 메리 크로퍼드를 요새 말로 톱 스타 마냥 소개하고 있기도 했는데요. 물론 이는 반쯤은 그 시대의 독자들의 의견을 덧칠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연유로 저자인 스펜스는 맨스필드 파크가 출간되어 인기를 끌자, 당시 독자들이 메리 크로퍼드에 보인 열광적 반응을 빗대어 설명하고 있었는데요. 그다지 낙관적인 분석은 아니지만 오스틴이 왜 메리 크로퍼드와 같은 인물을 그려냈는지에 대해, "자신이 즐거움을 찾을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는 것, 그 자유라는 측면의 이상"을 제인 오스틴이 새롭게 발견했고, 또 그것을 자신이 원하게 될 것을 예견했던 것에 이유가 있지 않나 추측해 봅니다.

이미 언니인 카산드라를 통해, '에마'에 대한 그녀의 기대가 드러나듯, '에마'역시 오스틴의 작품들 가운데 한 획을 그은 소설이기도 합니다. 실제 삶에서 오스틴은 그녀가 너무나 사랑했던 스티븐턴을 떠나 우여곡절 끝에 이른 '초턴'에서의 일기가 '에마'의 하이버리 마을에서의 장면들과는 매우 대조적으로 느껴질 만한데요. 앞서 스치듯 지나간 제인 오스틴이 '여자 가정교사'에 대한 상당히 저어했던 감정을 차치하더라도 아주 극적인 태도의 변화까지 느껴지게 만드는 '에마'에서의 테일러 양의 인물 조성은 상당히 작가의 인식과 간극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에마의 주인공인 에마 우드하우스가 일전의 테일러 양의 사례에 힘입어, 보는 사람에 따라 다소 경솔해 보일 정도로 가여운 운명의 해리엇 스미스를 통해, 적절한 남자를 소개하는 장면 자체는 실제로도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조카를 위해 그러한 '중매'를 했다는 점에서 꽤나 놀라운 사연이기도 했는데요. 앞선 맨스필드 파크에서, 패니 프라이스에 대한 아이디어를 오스틴 자신의 조카인 패니 나이트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도 몇몇 애정을 둔 조카들을 극의 인물들에 대입시킨 사례는 흥미로운 부분이었습니다. 에마에서 자유분방하고 장난스러운 성격인 에마 우드하우스에게 덧입힌 것이 조카인 애나의 성격이기도 했습니다. 이미 5장과 6장에서 따로 설명되는 바와 같이 오스틴의 여러 작품속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름과 모티브는 대부분 자신의 가족과 친척으로부터 차용되었습니다. 외가인 리 일가의 세 자매 역시, 맨스필드 파크에서 간접적으로 아이디어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오스틴의 다른 작품인 '이성과 감성'은 유독 다른 작품들과 달리, 섹스와 관련된 간접적인 긴장감과 감성적인 측면이 드러납니다. '오만과 편견'도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와 다아시의 관계를 통해, 저의 해석으로는 섹스를 통해 발산되는 관능과 감정의 고조가 다소 간접적으로 소비되었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은 섹스라는 주제 자체를 간접적으로 또는 완곡한 어법으로 처리한 제인 오스틴 특유의 주제 의식으로 볼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을 따로 주제의 한 방편으로 꺼내 그녀의 여러 작품들과 연계해서 분류해야 될지는 독자들의 판단이기도 하겠습니다만 그녀의 작품 대부분에서 등장하는 인물들 대부분이 젊은 남녀들임을 감안해 본다면 그 시대에는 매우 희소한 여성 작가가 그리는 연애와 결혼, 그리고 그 속에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섹스 자체의 간접적인 요소 채용은 독자들의 흥미를 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적당히 압축해 담은 저의 글이 이 상당한 분량의 자료들을 담은 '제인 오스틴' 개인의 삶을 얼마나 담아낼 수 있을지는 불명확합니다. 다만 저와 비슷하게 이미 그녀의 작품 여럿을 경험해 본 독자들에게는 스펜스의 이 책은 파란만장한 그녀의 작품들을 내면에서 다시금 되새김질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이성과 감성'을 일독하지 못해, 이 책에서 소개되는 이성과 감성과 레이디 수전에 대한 부분은 그저 읽고 참고하는 수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또한 '노생거 수도원'과 관련된 이야기들은 캐서린 몰런드에 대한 짧은 인상과 작가인 제인 오스틴이 실제로는 좋아하지 않았다고 하는 배스 (혹은 바스) 에 대한 인상과 이곳에서 그녀가 느꼈던 감상들이 소개되고 있었습니다. 스티븐턴과 바스를 비교하여 후자를 가히 살기 어려운 도시로 설명하는 대목에서는 이해될 만한 부분도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오고 가는 분주한 휴양지에 대한 인상이 대개 그렇듯 말입니다. 또한 그녀의 후기 작품 가운데, 자신의 친오빠인 헨리와 그와 결혼한 사촌 엘리자 드 푀이드를 투영한 레이디 수잔은 영미 문화권에서 대표적으로 '수잔의 계략'으로 소개될 만큼 중요한 작품입니다. 여기에 헨리는 특유의 진취적 사고와 긍정적인 기질로 인해 오스틴의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형제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 친오빠와 결혼한 엘리자 드 푀이드는 이들이 처음 스티븐턴에서 대면했을 때, 당시 십대였던 헨리와 엘리자는 부적절한 관계를 맺기도 했습니다. 이미 어린 나이에도 감수성이 예민했던 오스틴은 이들의 부적절한 관계 (보기에 따라 아주 역겨울 정도로) 에서 그 어떤 사건에서 보다 감정적 변화를 드러냅니다. 이 감정적 변화는 그녀 평생에 걸쳐 나타나게 되는데요. 엘리자의 첫 결혼 상대였던 프랑스의 귀족이었던 푀이드 백작이 혁명 재판에서 목숨을 잃자, 얼마간의 공백기를 거쳐 헨리와 그녀는 맺어지게 됩니다. 바로 이 두 사람의 결혼과 그것을 이뤄낸 (헨리와 엘리자, 여기선 엘리자의 시점에서) 관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이 연계된 것이 바로 '레이디 수잔'이라는 작품으로 여겨집니다.

끝으로 스펜스의 이 책을 통해 그동안 일독했던 제인 오스틴의 여러 작품들에 대한 나름의 재해석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약간의 첨언이지만 맨스필드 파크에서 등장한 그 조악한 연극의 시도는 작가인 오스틴이 과거 스틴븐턴에서 크리스마스 시기에 올린 '가족 연극'에 모티브를 가져왔다는 기록도 해석의 사소한 확장을 제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 작품의 주인공인 패니 프라이스가 연극에 대한 그런 모호한 태도를 보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일독하실 분들에게 권유하고 싶은 것은 먼저 오스틴의 작품을 되도록이면 전부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여기에는 제인 오스틴의 삶과 일상 생활에서 그녀가 견지한 태도 뿐만 아니라 그녀가 출간한 작품들에 대한 그동안 알 수 없었던 숨겨진 사실들이 잘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녀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한 인명이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지는 물론 작품의 각 인물들이 오스틴의 어떤 형제, 어떤 친척, 혹은 어떤 익명의 이웃에서 차용했는지, 이 책은 아주 상세히 이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 연유로 그동안 읽었던 '노생거 사원', '맨스필드 파크', '설득', '오만과 편견' 등에서 새로운 감상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특히 한때 오스틴의 짦은 사랑이었던 톰 러프로이와 그를 투영한 '어떤 작품'에 대한 저자의 분석을 직면하게 되었을 때, 짧은 탄식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모든 것들 때문에 얼마 전까지 생생하게 함께한 제인 오스틴의 말과 생각이 제 뇌리를 쉽게 떠나지 않게 된 연유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그저 어떤 개인의 인생으로 조망해 보건대, 제인 오스틴 역시 글을 쓰기 이전의 자신의 삶이라는 조건에서 결혼과 안정적인 경제적 생활이 불확실해 놓였을 때, 아마도 그녀 자신을 숨기는 법을 터득했으리라 이해됩니다. 오로지 언니인 카산드라에게만은 자신의 기질에 기인한 유쾌함과 기민함을 보여주지만 다른 이에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남자들과 그런 남자들이 가지는 특성과 개성에 의구심을 갖지 않고 존중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그녀의 작품 여러 곳에서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녀의 작품 전반을 사회적 구속에 놓인 여성들의 결혼과 그런 관념의 총체라고 볼 수 있다면 그것을 만든 사회를 쉽게 비난할 수 있었지만 각 인물들의 개인사와 주변의 삶을 파고들어 그것을 문학적 집약체로 만든 것이 제인 오스틴의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혹여 페미니스트들이 그녀의 작품을 '페미니스트 문학'이라고 대변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점을 밝혀두고 싶습니다.     



초창기 소설들은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가족과 친구들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쓴 것이었다.

프랑스식 관점으로는 결혼한 여자가 열여섯 살짜리 사촌 동생을 유혹하는 것이라 볼 수 있었고, 영국식 관점에서는 결혼한 사촌 누나를 대상으로 두 젊은이가 바보 같은 싸움을 벌이는 것으로 볼 수 있었다.

제인은 엘리자를 통해 자유와 쾌락, 그리고 소유에 대한 자신의 갈망을 투영했다.

하지만 제인 오스틴은 세련되고 우아한 중년의 여성이 된 고모만 알았을 뿐, 젊은 시절 필라가 가졌을 감정이나 동기에 대해서는 우리가 아는 것만큼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엘리자는 수잔 부인보다 훨씬 더 미묘하고 흥미로운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을 사악하고 파렴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레이디 수잔]을 쓰면서 제인 오스틴 자신은 수잔의 본성을 폭로하는 맨워링 부인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후 [설득]을 집필하는 동안에도 리 가문의 역사에서 영감을 받았고 [에마]에서도 그런 사실을 느낄 수 있다.

주제를 다루는 데 있어 제인 오스틴과 헨리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아우렐리우스처럼 매리앤도 열정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깨닫고 이성적인 애정을 느끼는 사람과 결혼한다는 사실이다.

[오만과 편견]은 예리하고 정확하며 균형을 잃지 않는 문장으로 유명하다. 이 소설은 산문과 운문 모든 면에서 이성적이고 거의 수학적인 18세기 영국 문학의 최고 작품 가운데 하나로 손꼽힌다.

이성은 열정의 하인이다. 이성을 통해 행복 비슷한 것을 얻을 수는 있지만, 열정이 없으면 그곳에 기쁨은 있을 수 없다.

인생의 후반기에 온천지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면서, 제인 오스틴은 부유한 친척의 가난한 친척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잔인할 정도로 신랄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제인의 두 편지에서 고립감이나 무력감이 표현된 적은 없었다. 만약 제인이 비참한 마음으로 산 것이 사실이라면, 그녀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심정을 숨기는 법을 터득한 것이 틀림없다.

그녀는 자신의 현실에서 ‘읽는‘ 사람들에게 비추는 조명과 똑같은 조명을 소설 속 인물들에게 비추면서 그들을 ‘읽었다.‘ 이는 책의 세상이 언제나 현실의 세상과 함께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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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수하 2026-02-24 1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이디 수전>이 서간체 소설이라 독특한 점도 있지만 매우 재미있습니다. 메리 크로퍼드보다 레이디 수전이 더 인기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하는데.. 꼭 읽어보시길 추천합니다.

베터라이프 2026-02-24 14:09   좋아요 0 | URL
추천 감사드립니다. 조만간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정치는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
사라 스테인 루브라노 지음, 이혜경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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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사라 스테인 루브라노는 하버드 대학을 거쳐, 케임브리지에서 석사를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정치 이론을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녀는 인긴 심리학과 정치 이론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따라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인지 부조화 현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인지 부조화 현상이 어떻게 현대 정치적 일상에서 음모론과 확증 편향, 더 나아가 민주적 담론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조사하고 있는데요. 이런 일환으로 그녀는 영국 런던에 있는 '더 스쿨 오브 라이프 (The School of Life)'에서 콘텐츠 책임자로 일했고 여러 소셜미디어와 앱 기반 및 영화 등지에서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그녀의 이 논저는, 자신이 처음 발표한 글로 출간 즈음에 유튜브와 여러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활발한 홍보 활동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Don't Talk About Politics : How To Change 21st Century Minds"로 최근인 2025년 5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루브라노에 대한 정보를 구글에서 찾다가 이 책에 대한 그레이스 블레이클리의 짧은 감상평이 보여 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근래들어 어떠한 정치경제학자들도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단주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에 대해 특별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 못하는 실정을 감안해 본다면 루브라노의 이 글은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독창적이라 여겨집니다. 우선 저자는 자신이 누구보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소위 다른 계층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정치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서슴없이 고백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표출하는 것도 신기했고, 극단주의 정치를 자신의 연구 목표로 삼은 점도 제가 보기에 흔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지만 그녀의 이 논저는 아주 철저하게 이론과 고증에 집착한 학문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정치,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그 구성원들인 우리 시민들의 관점에서 글을 진행해 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목도하고 있는 현실 정치를 기반으로 시민들이 처해 있는 인터넷 기반의 '인지 부조화'와 확증 편향 등이 강화되는 문제적 현실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근본적인 문제 인식과 여기에 좀 더 실효적인 개선 방법을 시도할 수 있는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보는 현실 정치에서 소셜 미디어가 갖는 위상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인 루브라노는 1장의 논증에서 아주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라는 관점으로 이들 소셜 미디어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었는데요. 이는 저자가 서두에서 도출한, "자유주의라는 오래된 명목에서 개인의 권리, 사유 재산,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하는 이 유산"이 과연 오늘날 현대 정치에서 제대로 기반해, 작동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되묻고 앞선 '소셜 미디어 혁명'을 자신의 고유한 이론을 통해 밝히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자유주의적 전통과 유산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신뢰 구축과 지향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고 있다고 표면적으로는 인정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자유주의는 특정 정치 세력이 이를 왜곡하거나 혹은 시민 전체를 아우르는 자유라는 이상의 확대가 더이상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입니다. 이 지점에서 필립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를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자유라는 정형화된 가치가 아니라 이제는 현실에서 이 자유라는 권리가 얼마나 평등하게, 혹은 실질적으로 보장되고 있는지를 점검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인 루브라노가 밝히는 소셜 미디어 상의 우리가 흔히 수렴하고 있는 의사 소통과 시민들 간의 의견 개진이 그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이 글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의 자아 실현과 소비를 통한 개성의 확대, 혹은 (능력을 통해 돈을 축적하는) 신분 상승과 그런 이상을 교묘하게 언설로만 그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더욱 조장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이 신자유주의가 어떻게 교묘하게 작동했는지를 여기서 따로 논하지는 않겠지만 저자 역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부와 능력을 과시하는 이런 포장된 '선물 세트'가 무슨 시민들간의 소통의 한 방편이 될 수 있겠느냐고 오히려 반문을 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이 글에서 논증되는 부분이 과거 위르겐 하버마스가 고안한 '공론장'의 기능이 거의 유명무실화 된 상황에서 후에 드러나겠지만 이 공론장에서의 토론과 의견 교환이 시민들, 서로 간의 건전하고 생산적인 정치적 무대가 되지 못하고 있는 점은 직시할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요. 여기에 저자인 루브라노는 이 전통적인 공론장을 새로 고쳐서 혁신해야 된다는 접근은 애초에 제시를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저자의 공론장에 대한 막연한 회의를 전통적인 공론장이 민주주의 정치에서 유명무실해졌거나 아니면 공론장의 이상들이 현대 정치에서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공론장에서 시민들이 공공선에 대한 논의가 예전 같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다는 것은 분명하고, 또한 행동에 앞선 인식과 무엇보다 중요했던 시민들의 도덕적 분별력이 예전보다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비상한 다른 관점의 분석이 요구되는 분위기는 거의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토론'에 대한 실질적 의미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근본 이유를 2장, 이후의 논증에서 대략적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듯 토론은 정치 전반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담론이었습니다. 과거 미국의 대선 시점에서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치열한 양자 토론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치적 문화가 말하는 바는 분명했습니다. 서로 간의 의견 대립을 충분한 토론을 거쳐, 좁힐 수 있으면 좁히고 심지어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나 혹은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토론, 그러니까 정치인들의 필요한 상식선의 논쟁이라든지, 일반 시민들 간의 사소한 의견 교환까지, 그 본연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맥락은 이렇습니다. "내가 공화당의 지지자인데 우리 정치인이 상대 당의 정치인(이를테면 민주당)과 공개된 토론이 시작되면 나는 상대당 정치인의 합리적인 의견이나 사리에 맞는 상황 인식보다는 우리 편의 정치인이 어떻게 저 정치인을 찍어 누를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또 기대한다."는 일종의 이종 격투기와 같은 승리자와 패배자로만 구분되는 잔인한 논리 같은 것들을 드러냅니다. 그러므로 공론장과 연계 될 수 있는 토론이 그만큼 설자리를 잃었다고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즉, 미국의 정치 현실은 민주주의가 그려내는 제도적 기반과는 그만큼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인 루브라노는 앞선 정치인들의 소위 타협하지 않는 정치적 극단화를 포함하여, 일반 시민들조차도 각 개인들이 이미 심각한 '인지 부조화'에 빠져, 존 듀이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적 분별력'을 상실한 상황이라고 사실상 분석해 냅니다. 이미 토크빌이 강조했듯 초기 미국이 유럽과는 다른 정치적 분위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저 사람이 나와는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갖고 있을지라도 정치적 차이에 따른 각자의 최소한의 신념을 인정했기 때문이라고 그 본질을 증언합니다. 바로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례가 이와 같은 선명성을 대변하는 일례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제가 다른 서평에서도 언급했지만 과거 보스턴 티파티 운동을 차용한 현재의 풀뿌리 극우 포퓰리즘 운동인 티파티 운동이 민주당을 비롯한 리버럴 정치 전부를 싸잡아 '격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오로지 적과 아로 구분되는, 즉 소위 '구시대의 반동'을 드러내는 결과물이라고 여겨집니다. 카를 슈미트의 잔재와 같은 것들 말입니다, 이런 저자의 표현대로, 각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고 그저 전제한다면 스스로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내면의 정치적 극단주의를 통제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하지만 정치적 분별력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시민들이 과연 어디까지 통제가 가능할 지는 다소 회의적이긴 합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하등 쓸모가 없는 결과로 나타나고 있는 영리 목적의 인터넷 기업들을 배불리는 것에 국한된 소셜 미디어 자체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요청케 합니다. 현실적으로 이미 다수 시민들이 매몰되어 있다는 점은 심각한 부분이라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에 가까운가."라고 끊임없이 고찰하고 분석할 필요가 있다는 요구는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해 가장 먼저 시도해야 될 결정이라 봐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이 책에서 보이는 저자의 여러 통찰 가운데, 가장 수긍할 수 있었던 부분은 앞서 언급한 실제 권력과 비등해진 소셜 미디어가 특유의 네트워크성으로 말미암아, 극단주의 정치의 저변을 더욱 두텁게 만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위 나와 같은 생각, 나와 유사한 정치색, 그리고 비슷한 세계관 등으로 연결된 수많은 네트워크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숙고해 봐도 종래에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는 것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오프라인의 극단화의 근본적 원인은 기존의 공론장의 기능 상실에 있다기보다는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해 온 신자유주의 체제 이행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있습니다. 동일하게 이런 맥락에서 현재 도널드 트럼프 현상이 시작되어 그가 기존 정치 무대에 서게 된 실질적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자 역시, 시민들 간의 불신과 혐오 및 대립이 확산된 이유에도 각자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은 경제적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5장의 후반부에서, "극우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일반 시민들조차 가장 인종 차별적이고 가장 이민자를 혐오하면서 그 지향은 흡사 파시스트적인데도 이들은 민주주의를 칭송한다"는 역설은 경제적 환경의 악화 그리고 동시에 유입된 이민자들로 일원화된 단순 도식이 "이들에게 권리를 빼앗긴 선량한 시민들"이라는 서사를 만들게 했습니다. 이러한 매커니즘 자체는 이 서사에 속한 이들이 절대로 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글의 결론에 이르면서 저자는 결국엔 우리가 안과 바깥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며 시간과 관계를 소모시키는 것보다 좀 더 친구와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정부들이 신자유주의 이행에 따라 사회적 기반의 제거와 그에 따른 '민주적 인프라'가 민영화되었고 이는 아주 근본적으로 "자주 자본주의의 요구와 민주주의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상황에 놓인 우리들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를 민주적 삶보다 우선시하는 '정치적 선택'을 내렸다"는 과거의 결정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모든 정치인들도 쉽게 인식하고 있는 문제로 이는 다른 면에서 시민들이 정치인들의 가면에 쉽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되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기반의 전반적인 후퇴를 결정했던 지난 대처리즘의 이행이 바로 저 정치인들이 주도한 것이며, 이들의 진면목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 '정치가 만들어 내는 혐오와 차별과 같은 날 것'에 더는 부화뇌동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선언과도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정치를 위해 진실과 증거를 구별하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저자가 강조하는대로 친구와 이웃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그만큼 의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글 후반부에 도출된 것처럼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타인을 덜 의심하고, 공격적인 성향도 덜하며,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한다."고 강조한 이유일 겁니다. 그런 의미로 글의 결론에서 저자가 밝히는 "오직 민주주의만 생각하라"는 대목에서 저는 한 가지를 더 첨언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이익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합치되는 쪽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라고 말입니다.


- 본문 11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너무나 반갑게도 마크 피셔가 본문에서 인용되고 있었는데요. "자본주의를 대체할 그 무엇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한탄 아닌 언급은, 현재의 경제 및 정치적 불평등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생생한 연관성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결함투성이인 두 개의 모델이 존재한다. 첫 번째 모델은 정치가 사실상 ‘상업(생각의 시장)‘과 같다고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모델은 정치가 사실상 ‘전쟁(사상의 충돌)‘과 같다고 본다.

그리고 이 인지 부조화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 속 모순이 일으키는 불쾌감을 줄여 가는 과정에서 확증 편향과 자기 합리화와 같은 사고방식에 빠져드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우리의 생각은 교환을 통해 형성된다기보다는, 타인과 조화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집단이 잘 지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조정되는 경향이 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를, "이상적 형태의 정치적 담론이란 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전쟁을 대체하는 것이 그 본질이며, 그러한 정치에서 승리는 무력에 기초하지 않은 더 나은 논증의 힘으로 얻어진다."라는 말로 멋지게 요약했다.

실제로 덜 민주적인 체제에 살면서도 독재 정권의 지배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하는 모습을 지켜봐 온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인간 행동의 기이함을 바로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정치 집단과 사이비 종교 집단, 양쪽 모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집단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 대체로 개인이 맺는 사회적 네트워크에 달려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직업적 삶, 취미, 건강, 외모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들조차도 일반적으로는 관계에서 사랑받고 싶거나,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거나,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싶거나,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다는 욕구로 귀결될 수 있다.

트위터(지금의 X)와 같은 형태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민주주의를 아주 제한적으로만 지원할 뿐이며, 동시에 반민주적 목적을 위해 너무도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위한 더 나은 인프라를 만든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소셜 미디어를 몰수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민주적 인프라들이 점차 민영화됨에 따라, 우리는 자주 자본주의의 요구와 민주주의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권력자들이 민주주의를 칭송하며 자주 들먹였던 순간은 정확히 그들이, 그리고 일반 시민들조차 가장 인종 차별적이고, 가장 이민자를 혐오하며, 심지어 파시스트적일 때였다.

어쩌면 우리가 사회를 더 많이 불신하게 된 이유는 사회가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아서, 그로 인해 우리가 고립될수록 우리 뇌에서는 편집증과 의심을 유발하는 영역이 더 활성화되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사회적 위축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를 민주적 삶보다 우선시하는 ‘정치적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다(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아마도 생산적인 노동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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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지식인에 대해, 여러 차례 서평을 통해서 지그문트 바우만을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제가 그동안 제대로 알지 못했던 신자유주의 체제의 본질과 18~19세기의 근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시기 동안 인류가 이룩한 '근대성'이 얼마나 문제가 많았는지를 '직보'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여기에 약간의 논외로, 지그문트 바우만 살아 생전에 단 한번이라도 대담의 형식으로 이제 언급할 노엄 촘스키와 함께 전세계 문제에 대한 공개 논의를 했으면 어땠을까, 혼자 상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 두 사람이 과거 실제로 연이 닿아 잠깐의 사적인 만남조차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2월 6일, 어제였죠. 간혹 듣던 모 유튜브 프로그램에서 엡스틴 (엡스타인은 그를 가리키는 정확한 발음은 아닙니다.)과 한 눈에 보기에도 친밀해 보이는 사진이 공개되었습니다. 이것은 '엡스틴 파일'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2월 6일 전까지 '세계의 양심'으로 불렸던 노엄 촘스키는 특히 저에게는 과거 조지 W. 부시 정권의 네오콘을 아주 적나라하게 비판했고, 1980년대 이후 자본주의의 신자유주의 이행을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판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가 기여한 학문적 업적은 물론이거니와, 하버드와 MIT를 비롯 미국 유수의 대학에서 일하고 있는 많은 지식인들로부터 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소위 행동하는 양심, 자신이 명확히 인식하고 있는 진실과 연계하여 그것을 욕되게 하지 않고 할말을 기어코 하는 촘스키의 행동력은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있는 보신에 힘쓰는 지식인의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그의 대학 경력과 이후 이어지는 미국 지식인 사회에서 그가 갖고 있는 위상은 단순히 말만 잘해서 인정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일전에 조지프 슘페터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지식인들의 역할은 중요하고 특히나 비판이 필요할 때는 지식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그의 말을 공허하게 느끼는 경우도 있겠지만 그것보다 지식인들이 돈(시장)과 권력에 점차 순응함에 따라, 이러한 의무는 이익에 매몰되어 갔습니다.


그런 노엄 촘스키가 엡스틴과 아주 친밀한 관계였다는 것이 거의 '폭로'되었습니다. 촘스키는 그 누구보다도 정치 권력의 위선과 부패를 증오하던 사람입니다. 그의 글들을 보면 자격이 없는 권력이 어떠한 일들을 벌이는 지에 대해 낱낱이 밝히기도 했습니다. 또한 특히나 국내 방송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노란 봉투 캠페인'의 일환으로 그가 제작진에게 47달러를 건넨 일화는 매우 유명하기도 한데요. 자유주의를 왜곡하고 자본주의 체제 자체를 권력과 부를 쫓는 일종의 수익 사업으로 생각하는 인간들을 강도 높게 비판한 그가, 지금까지 알려진 바대로 그런 권력자들의 유흥거리 (아주 불법적이고 비인간적인 그리고 금수만도 못한)를 제공한 불명예스런 인간과 가까운 사이였다는 진실은 저에게 무엇보다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노엄 촘스키가 그동안 자신이 견지해 온 양심적인 글쓰기와 후학들과 독자들에게 수많은 영감을 제공한 것을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면 추후 이 사건에 대한 명확한 발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로 이 사건이 그가 과거로부터 목숨과 같이 여겼던 스스로의 양심과 선명한 진실, 그리고 비도덕적인 정권을 비판했던 과거의 행적이 그저 위선이 아니었다면 마찬가지로 자신이 분명하게 과거의 오명을 세상에 명확하게 밝힐 필요가 있습니다. 이는 그가 몇 번이나 강조한 '지식인의 책임'을 증명하는 아주 사소한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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