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는 말로 설득되지 않는다
사라 스테인 루브라노 지음, 이혜경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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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사라 스테인 루브라노는 하버드 대학을 거쳐, 케임브리지에서 석사를 그리고 옥스포드 대학에서 정치 이론을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합니다. 그녀는 인긴 심리학과 정치 이론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갖고 그에 따라 시민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는 인지 부조화 현상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인지 부조화 현상이 어떻게 현대 정치적 일상에서 음모론과 확증 편향, 더 나아가 민주적 담론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 조사하고 있는데요. 이런 일환으로 그녀는 영국 런던에 있는 '더 스쿨 오브 라이프 (The School of Life)'에서 콘텐츠 책임자로 일했고 여러 소셜미디어와 앱 기반 및 영화 등지에서 활동을 지속해 오고 있습니다. 이번에 소개할 그녀의 이 논저는, 자신이 처음 발표한 글로 출간 즈음에 유튜브와 여러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활발한 홍보 활동을 겸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이 책은 원제, "Don't Talk About Politics : How To Change 21st Century Minds"로 최근인 2025년 5월에 출간되었고 국내에는 2025년 7월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저자인 루브라노에 대한 정보를 구글에서 찾다가 이 책에 대한 그레이스 블레이클리의 짧은 감상평이 보여 제 눈길을 끌기도 했습니다. 근래들어 어떠한 정치경제학자들도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단주의, 극우 포퓰리즘 정치에 대해 특별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지 못하는 실정을 감안해 본다면 루브라노의 이 글은 부분적으로는 상당히 독창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자신이 누구보다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으로 소위 다른 계층의 지식인들과는 다른 정치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렇게 엘리트 교육을 받은 지식인이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을 표출하는 것도 신기했고 극단주의 정치를 어느 정도 연구 목표로 삼은 점도 제가 보기에 흔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이미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지만 그녀의 이 논저는 아주 철저하게 이론과 고증에 집착한 학문서가 아니라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 정치 더 나아가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해 그 구성원들인 시민들의 관점에서 글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목도하고 있는 현실 정치를 기반으로 시민들이 처해 있는 인터넷 기반의 인지 부조화와 확증 편향 등이 강화되는 문제적 현실을 깊이 있게 분석하고 이러한 상황에서, 근본적인 문제 인식과 여기에 좀 더 실효적인 개선 방법을 시도할 수 있는 방안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저자가 보는 현실 정치에서 소셜 미디어가 갖는 위상은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쉽게 무시할 수 없는 수준에 올라선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저자인 루브라노는 1장의 논증에서 아주 기본적인 '의사 소통'이라는 관점으로 이들 소셜 미디어가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단언하고 있는데요. 이는 저자가 서두에서 도출한, "자유주의라는 오래된 명목에서 개인의 권리, 사유 재산, 법 앞의 평등을 강조하는 이 유산"이 과연 오늘날 현대 정치에서 제대로 기반해 작동하고 있는지를 우리에게 되묻는 식으로 앞선 '소셜 미디어 혁명'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자유주의적 전통과 유산이 오늘날 민주주의의 신뢰 구축과 지향에 어느 정도 이바지하고 있다고 표면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다시피 이 자유주의는 특정 정치 세력이 이를 왜곡하거나 혹은 시민 전체를 아우르는 자유라는 이상의 확대가 더이상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겁니다. 이 지점에서 필립 페팃의 공화주의적 자유를 굳이 언급하고 싶지는 않지만 헌법에 규정되어 있는 자유라는 기본적 가치가 아니라 이제는 현실에서 이 자유라는 가치가 얼마나 평등하게 뻗어나가고 있는지를 주목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인 루브라노가 밝히는 소셜미디어 상의 우리가 흔히 수렴하고 있는 의사 소통과 시민들 간의 의견 개진이 그저 신기루에 불과하다는 점을 명백히 인식하고 있어야만 한다고 여겨집니다.

이미 이 글에서도 신자유주의에 대한 본질이 드러나고 있지만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개인의 자아 실현과 소비를 통한 개성의 확대, 혹은 (능력을 통해 돈을 축적하는) 신분 상승과 그런 이상을 교묘하게 언설로만 그친 것이 바로 신자유주의 체제입니다. 조장된 경제적 불평등 상황에서 이 신자유주의가 얼마나 교묘하게 작동했는지를 여기서 따로 논하지는 않겠지만 저자 역시, 소셜 미디어를 통해 자신의 부와 능력을 과시하는 이런 포장된 '선물 세트'가 무슨 시민들간의 소통의 한 방편이 될 수 있겠느냐고 일침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근본적으로 이 글에서 일반적으로 논증되는 부분이 과거 위르겐 하버마스가 고안한 '공론장'의 기능이 거의 유명무실화 된 상황이고, 후에 드러나겠지만 이런 공론장에서의 토론과 의견 교환이 시민들 서로 간의 건전하고 생산적인 정치적 무대가 되지 못하고 있는 점도 분명합니다. 물론 이에 대해 저자인 루브라노는 이 전통적인 공론장을 새로 고쳐서 혁신해야 된다는 접근은 애초에 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저는 이 지점에서 공론장 자체가 민주주의 정치에서 유명무실해졌거나 아니면 공론장의 이상들이 현대 정치에서 더이상 가능하지 않다는 것인지 명확하게 구분할 수는 없지만 시민들이 공공선에 대한 선행 인식과 도덕적 분별력이 예전보다 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다른 관점의 분석이 요구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자가 '토론'에 대한 실질적 의미에 대해 회의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유를 2장 이후의 논증에서 대략적으로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해하고 있듯 토론은 정치 전반을 통틀어 매우 중요한 가치이자 담론입니다. 과거 미국의 대선 시점에서 존 F. 케네디와 리처드 닉슨의 치열한 양자 토론으로 상징되는 미국의 정치적 문화는 분명했습니다. 서로 간의 의견 대립을 충분한 토론을 거쳐, 좁힐 수 있으면 좁히고 더 나아가 그 과정에서 자신이 그동안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나 혹은 왜곡된 인식을 바로 잡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토론, 그러니까 정치인들의 토론에서부터 일반 시민들 간의 사소한 의견 교환이나 작은 토론까지, 그 본연의 기능이 작동하지 않는다고 봐야 할 것 같은데요.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맥락은 이렇습니다. "내가 공화당의 지지자인데 우리 정치인이 상대당의 정치인(이를테면 민주당)과 공개된 토론을 시작되면 나는 상대당 정치인의 합리적인 의견이나 사리에 맞는 상황 인식보다는 우리 편의 정치인이 어떻게 저 정치인을 찍어 누를 수 있을 지를 고민하고 또 기대한다."는 일종의 이종격투기와 같은 승리자와 패배자라는 단순한 논리 말입니다. 


즉, 미국의 정치 현실은 민주주의가 그려내는 제도적 기반과는 더욱 거리가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해, 저자인 루브라노는 앞선 정치인들의 소위 타협하지 않는 정치적 극단화를 포함하여, 일반 시민들조차도 각 개인들이 이미 심각한 '인지 부조화'에 빠져, 존 듀이식으로 말하자면 '정치적 분별력'을 상실한 상황이라고 사실상 분석해 냅니다. 이미 토크빌이 강조했듯 초기 미국의 유럽과는 다른 정치적 분위기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저 사람이 나와는 다른 정치적 의견을 갖고 있을지라도 정치적 차이에 따른 각자의 최소한의 신념을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바로 미국인들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건국의 아버지들의 사례가 그것을 대변하는 사례이기도 합니다. 일전에 제가 다른 서평에서도 언급했지만 과거 보스턴 티파티 운동을 차용한 현재의 풀뿌리 극우 포퓰리즘 운동인 티파티 운동이 민주당을 비롯한 리버럴 정치 전부를 싸잡아 '격멸'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저자의 표현대로, 각자가 확연히 구분되는 '정치적 감수성'을 갖고 있다고 전제한다면 스스로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내면의 정치적 극단주의를 통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시민들이 민주주의에 하등 쓸모가 없이 그저 인터넷 기업들을 배불리는 것에 지나지 않는 소셜 미디어의 검증되지 않는 소문이나 일설 등에 이성을 잃지 말고 각자가 고민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진실에 가까운가."라고 말이죠.

이 책에서 보이는 저자의 여러 통찰 가운데, 가장 수긍할 수 있었던 부분은 앞서 언급한 실제 권력과 비등해진 소셜 미디어가 특유의 네트워크성으로 말미암아, 극단주의 정치의 저변을 더욱 두텁게 만들고 있다는 점입니다. 소위 나와 같은 생각, 나와 유사한 정치색, 그리고 비슷한 세계관 등으로 연결된 수많은 네트워크가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고 숙고해 봐도 종래에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는 것으로 예견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온-오프라인의 극단화의 근본적 원인은 기존의 공론장의 기능 상실에 있다기보다는 많은 정치학자들이 지적해 온 신자유주의 체제 이행에 따른 심각한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에 있습니다. 동일하게 이런 맥락에서 현재 도널드 트럼프 현상이 시작되어 그가 기존 정치 무대에 서게 된 실질적 연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자 역시, 시민들 간의 불신과 혐오 및 대립이 확산된 이유에도 각자의 삶을 통째로 흔들어 놓은 경제적 불평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5장의 후반부에서, "극우는 우연히 만들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일반 시민들조차 가장 인종 차별적이고 가장 이민자를 혐오하면서 그 지향은 흡사 파시스트적인데도 이들은 민주주의를 칭송한다"는 역설은 경제적 환경의 악화 그리고 동시에 유입된 이민자들로 일원화된 단순 도식이 "이들에게 권리를 빼앗긴 선량한 시민들"이라는 서사를 만들게 했습니다. 이러한 매커니즘 자체는 이 서사에 속한 이들이 절대로 타협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습니다. 

글의 결론에 이르면서 저자는 결국엔 우리가 안과 바깥에서 '정치 이야기'를 하며 시간과 관계를 소모시키는 것보다 좀 더 친구와 이웃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수많은 정부들이 신자유주의 이행에 따라 사회적 기반의 제거와 그에 따른 '민주적 인프라'가 민영화되었고 이는 아주 근본적으로 "자주 자본주의의 요구와 민주주의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상황에 놓인 우리들의 모습"을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를 민주적 삶보다 우선시하는 '정치적 선택'을 내렸다"는 과거의 결정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모든 정치인들도 쉽게 인식하고 있는 문제로 이는 다른 면에서 시민들이 정치인들의 가면에 쉽게 속아 넘어가서는 안되는 증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본질적으로 자본의 이익을 위해 사회적 기반의 전반적인 후퇴를 결정했던 지난 대처리즘의 이행이 바로 저 정치인들이 주도한 것이며, 이들의 진면목을 파헤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 '정치가 만들어 내는 혐오와 차별과 같은 날 것'에 더는 부화뇌동해선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중요한 선언과도 같습니다. 물론 우리의 정치를 위해 진실과 증거를 구별하는 능력을 키울 필요가 있지만 그와 동시에 저자가 강조하는대로 친구와 이웃들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것도 그만큼 의미가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이 글 후반부에 도출된 것처럼 "사회적 자본이 풍부한 사회일수록 사람들은 타인을 덜 의심하고, 공격적인 성향도 덜하며, 전체의 이익을 고려하는 방식으로 정치에 참여한다."고 강조한 이유일 겁니다. 그런 의미로 글의 결론에서 저자가 밝히는 "오직 민주주의만 생각하라"는 대목에서 저는 한 가지를 더 첨언하고 싶습니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이익과 민주주의의 가치가 합치되는 쪽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라."라고 말입니다.


- 본문 118페이지에 오타 한 곳이 있었습니다. 

- 너무나 반갑게도 마크 피셔가 본문에서 인용되고 있었는데요. "자본주의를 대체할 그 무엇을 상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그의 한탄 아닌 언급은, 현재의 경제 및 정치적 불평등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보다 더 생생한 연관성을 느끼게 해 줍니다.        

              


우리 사회에는 정치가 작동하는 방식에 대해 근본적으로 결함투성이인 두 개의 모델이 존재한다. 첫 번째 모델은 정치가 사실상 ‘상업(생각의 시장)‘과 같다고 보는 것이고, 두 번째 모델은 정치가 사실상 ‘전쟁(사상의 충돌)‘과 같다고 본다.

그리고 이 인지 부조화로 인해,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 속 모순이 일으키는 불쾌감을 줄여 가는 과정에서 확증 편향과 자기 합리화와 같은 사고방식에 빠져드는 것이다.

즉, 현실에서 우리의 생각은 교환을 통해 형성된다기보다는, 타인과 조화를 이루려는 과정에서 집단이 잘 지내는 데 도움이 되도록 조정되는 경향이 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이를, "이상적 형태의 정치적 담론이란 피 흘리지 않는 방식으로 전쟁을 대체하는 것이 그 본질이며, 그러한 정치에서 승리는 무력에 기초하지 않은 더 나은 논증의 힘으로 얻어진다."라는 말로 멋지게 요약했다.

실제로 덜 민주적인 체제에 살면서도 독재 정권의 지배를 옹호하는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하는 모습을 지켜봐 온 사람들이라면, 이러한 인간 행동의 기이함을 바로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정치 집단과 사이비 종교 집단, 양쪽 모두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이러한 집단에 가입하게 되는 것이 대체로 개인이 맺는 사회적 네트워크에 달려 있다는 점을 발견했다.

직업적 삶, 취미, 건강, 외모처럼 겉으로 보이는 것들조차도 일반적으로는 관계에서 사랑받고 싶거나, 매력적으로 보이고 싶거나, 다른 사람과 연결되고 싶거나, 더 많은 시간을 갖고 싶다는 욕구로 귀결될 수 있다.

트위터(지금의 X)와 같은 형태의 소셜 미디어 플랫폼은 민주주의를 아주 제한적으로만 지원할 뿐이며, 동시에 반민주적 목적을 위해 너무도 손쉽게 악용될 수 있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위한 더 나은 인프라를 만든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소셜 미디어를 몰수해야 한다는 뜻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제 민주적 인프라들이 점차 민영화됨에 따라, 우리는 자주 자본주의의 요구와 민주주의의 요구 사이에서 줄타기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권력자들이 민주주의를 칭송하며 자주 들먹였던 순간은 정확히 그들이, 그리고 일반 시민들조차 가장 인종 차별적이고, 가장 이민자를 혐오하며, 심지어 파시스트적일 때였다.

어쩌면 우리가 사회를 더 많이 불신하게 된 이유는 사회가 우리에게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제공하지 않아서, 그로 인해 우리가 고립될수록 우리 뇌에서는 편집증과 의심을 유발하는 영역이 더 활성화되어서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이러한 사회적 위축이 계속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신자유주의 경제를 민주적 삶보다 우선시하는 ‘정치적 선택‘을 내렸기 때문이다(그런 사회에서 우리는 아마도 생산적인 노동자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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